<colcolor=#fff> 솔페리노 전투 Battaglia di Solferino e San Martino Bataille de Solférino Schlacht von Solferino |
||
<colbgcolor=#536349> 시기 | 1859년 6월 24일 | |
장소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솔페리노[1] |
|
교전국 |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 (수세) 승
|
<rowcolor=black> 오스트리아군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나폴레옹 3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지휘관 프란츠 요제프 1세 |
병력 | 130,833명 | 129,273명 |
피해 |
사망자 4,578명 사상자 28,000명 |
사망자 7,679명 사상자 40,000명 |
결과 | 프랑스-피에몬테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휴전 협정(빌라프란카 조약) 체결 - 제2차 이탈리아 통일전쟁 종결 |
[clearfix]
1. 개요
제2차 이탈리아 통일전쟁 시기인 1859년 6월 2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영토 솔페리노에서 나폴레옹 3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친정한 프랑스- 피에몬테 연합군과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맞붙은 전투다.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된 전투이며 더불어 양쪽 모두 각국의 군주가 친정하여 직접 군을 지휘한 세계사상 마지막 주요 전투로 불린다.
혈전 끝에 프랑스-피에몬테 연합군이 신승을 거둬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퇴각시키는데 성공했고 결국 휴전협정을 통해 롬바르디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할양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베네토 지역을 제외한 북이탈리아 전역에서 영향권을 잃게 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막지 못했다.
2. 배경
오스트리아 제국의 침공으로 제2차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플롱비에르 밀약에 따른 프랑스 제2제국의 지원 속에서 프랑스-피에몬테 연합군이 몬테벨로, 마젠타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고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동쪽으로 밀어낸 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수도 밀라노를 장악했다. 6월 8일 밀라노에 입성한 나폴레옹 3세는 개선식을 가지면서 이탈리아인들에게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오스트리아 제국군이 롬바르디아에서 후퇴해 베네토와의 사이에 위치한 사각요새(Quadrilatero)에 주둔하자 프랑스-피에몬테 연합군은 프로이센 왕국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6월 23일 동진을 선택했다.
한편 마젠타 전투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정에 나섰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가르다 호수(Lago di Garda) 남쪽의 구릉지대 외곽에 머물며 작은 도시 카스틸리오네(Castinglione)의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침입자들을 기만시키기 위해 민치오(Mincio) 강 뒤에서 엄폐하려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적군이 카스틸리오네에 머문다는 정보를 알아냈고,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대한 빠른 공격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사르데냐-피에몬테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모두 친정에 나선 상황에서 6월 24일 오전 3시, 프랑스군 2개 연대가 솔페리노(Solferino) 서쪽에 있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전초기지를 공격하는 걸 시작으로 양군이 맞붙었다.
3. 전투
오전 6시 프랑스군 우익이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공격하면서,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이때 나폴레옹 3세는 북으로는 산 마르티노(San Martino) 근처에서 가르다 호수까지, 서로는 솔페리노 구릉을 넘어 남으로는 메돌라(Medola) 평지에까지 16km에 달하는 긴 전선을 형성해 군사를 배치했다.앙측의 병사들은 전날 긴 행군을 했음에도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 피로에 절어 있었다. 공격하는 프랑스군은 그나마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지만, 수비 측인 오스트리아군은 2회 분의 브랜디 외에는 온종일 아무런 음식을 받지 못했다. 부족한 식사에 15시간 넘게 지속된 6월의 무더위가 병사들을 괴롭혔다.
나폴레옹 3세는 백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전선을 돌아다니며 병력들을 격려하고 직접 지휘했지만 백부의 군사적 능력에 발뒤꿈치도 못따라가는 수준 미달의 지휘력으로 프랑스군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통일된 지휘 체계를 확립하지 못했다.
오후 무렵 나폴레옹 3세는 포병을 집중시켜 솔페리노에 맹렬한 포격을 퍼붓고, 그 화력 지원 하에 정예의 황제근위병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을 투입했다. 또 북쪽에서 4차례의 공격 끝에 피에몬테군이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몰아냈다. 양측 모두 진흙을 잔뜩 뒤집어 쓴 백병전 끝에[2] 더 이상 버티지 못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후퇴를 명령하였고 수많은 사상자 끝에 프랑스-피에몬테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6월 24일의 전투에서의 희생자 수는 승자나 패자 측에서 똑같이 이례적으로 컸다. 양군 모두 전사자만 3만 명 이상이었고, 부상자는 전장에서 어떤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때마침 무더위까지 겹쳐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는 프랑스군 사이에선 티푸스가 퍼졌고, 그 결과 전 병력의 4분의 1이상이 전투 능력을 잃었다.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 3세는 프란츠 요제프 1세에 보내 즉각 정전을 요청하고, 7월 11일 빌라프란카에서 휴전 협정을 맺었다.
4. 적십자의 탄생
이 전투에 종군했던 사람 중 앙리 뒤낭이 있었다. 전투 직후에 솔페리노에 도착한 덕분에 직접 전투를 경험하진 않았지만, 현장에 도착한 뒤 직접 목도한 참상에 큰 충격을 받은 뒤낭은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이름의 회고록을 집필하여 전투의 참상을 회고했다.또한 1863년 10월 26일부터 제네바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 창립회의 및 제네바 협약 체결을 주도했는데 이 공로로 뒤낭은 초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