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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e48>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장 앙리 뒤낭 Jean Henri Dunant |
출생 | 1828년 5월 8일 |
스위스 제네바 | |
사망 | 1910년 10월 30일 (향년 82세) |
스위스 아펜첼아우서로덴 주 하이덴 | |
종교 | 개신교( 칼뱅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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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앙리 뒤낭(Jean-Henri Dunant)은 적십자의 창시자이자 초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2. 생애
182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업가 장 자크 뒤낭과 앙투아네트 뒤낭콜라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뒤낭은 '금수저'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인생은 31세였던 1859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군대가 전투를 벌인 이탈리아 솔페리노 전투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한 이후 크게 달라졌다. 그는 국적과 이념을 떠나 전쟁 구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뒤낭의 이 경험은 나중에 그가 집필한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으로 이어졌고, 이는 전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전쟁 부상자들을 돕고 간호할 자원봉사자 단체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는 전 세계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로 인해 적십자 운동이 탄생하게 됐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불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농업에 투자했지만, 경영에 대한 재능이 부족해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사실 솔페리노를 방문한 것도 사업 편의를 위해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1867년, 그의 사업은 막대한 빚으로 인해 파산에 이르렀고, 그는 채권자들로부터 민형사 소송을 당하게 되면서 제네바를 떠나야 했다. 또한, 그는 믿었던 동료들로부터 배신을 당해 적십자 운동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프랑스, 영국, 독일을 떠돌며 그의 명성 덕택에 사교 모임에서 초대를 받기도 했지만, 초대받지 못하면 끼니도 제대로 챙기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20년 이상 타국에서 방황한 후, 1887년 스위스 북동부 요양지 하이덴으로 이주했을 때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병약한 중년의 남자가 돼 있었다. 고국 스위스에서는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스위스의 한 잡지사가 그의 소식을 확인하고 1895년 그의 근황을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인류 평화에 대한 활동이 재조명되었고, 그에 대한 동정론이 퍼지게 됐다. 덕분에 그는 어느 정도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노벨상이 수여되기 시작하자, 뒤낭이 첫 번째 평화상 수상자로 적합하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결국 1901년, 그는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이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뛰어넘지 않았다. 노벨상 상금은 현재 가치로 10억 원에 달하는 큰 금액이지만, 그는 그로 인해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관계의 단절과 불신, 정신적 고통은 더욱 심화되었고 육체적으로도 쇠약해져 갔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류애와 평화를 위한 그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전쟁 포로의 처우 개선과 국제재판소 설립 운동에 앞장섰고, 각국의 적십자사를 통합하기 위한 국제적십자연맹 설립에도 힘썼다. 1893년에는 남녀의 동일임금, 자녀 양육에 대한 공동 책임 같은 혁신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고,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뒤낭은 향후 일본의 변화를 몰랐기에 일본으로 구호 활동을 떠나라고 측근에게 권유하기도 했다.
1910년, 뒤낭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상자 17개 분량의 책과 원고, 그리고 여러 서류뿐이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사망 석 달 전에 유서를 작성해 자신의 유산 중 일부를 몇몇 사람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