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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4:53:44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1900년~1913년의 독일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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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F6F7><colcolor=#000> 바이에른 왕국의 섭정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
Luitpold, Prinzregent von Bayern
파일:1280px-Luitpold_Wittelsbach_cropped.jpg
이름 루이트폴트 카를 요제프 빌헬름 폰 바이에른
(Luitpold Karl Joseph Wilhelm von Bayern)
출생 1821년 3월 12일
바이에른 왕국 뷔르츠부르크
사망 1912년 12월 12일 (향년 91세)
바이에른 왕국 뮌헨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아우구스타 페르디난다 여대공
(1844년 결혼 / 1864년 사망)
자녀 루트비히 3세, 레오폴트, 테레제, 아르눌프
아버지 루트비히 1세
어머니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
형제 막시밀리안 2세, 마틸데 카롤리네, 오톤, 아델군데, 힐데가르트, 알렉산드라, 아달베르트
서명 파일: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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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군사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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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F6F7><colcolor=#000> 복무 바이에른 왕국군
독일 제국군
최종 계급 육군 상급대장이자 원수[1]
주요 참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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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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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트폴트 카를 요제프 빌헬름 루트비히는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로, 바이에른 국왕이 오토였을 당시 실권을 잡은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루이트폴트는 1821년,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의 아들로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4세의 나이에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하여 포병 대위로 임관하였다. 1848년 혁명 당시 진정시키기 위한 연설을 하였으나, 이후 정치적인 자리를 한동안은 갖지 않았다. 여담으로 당시 그리스 왕국의 왕이었던 오톤이 자식없이 죽으면 루이트폴트가 그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톨릭에서 정교회로 개종해야 한다는 이유로[2] 포기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형 막시밀리안 2세가 사망하자, 자신의 조카 루트비히 2세가 왕이 되었고 이 때는 좀더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받았다. 1866년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루이트폴트는 3사단을 지휘하였고, 전후에는 바이에른 왕국군 프로이센군처럼 만드는데에 도움을 주었다. 루이트폴트는 1869년, 바이에른 왕국군의 군사 고문 위원장이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루이트폴트는 프로이센 참모부에서 바이에른 왕국군 대표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이에른 왕국의 대표로 빌헬름 1세의 즉위식에 참여하였다. 1876년 그는 바이에른 왕국군의 원수가 되었다. 루트비히 2세가 죽기 며칠 전, 그는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루트비히 2세 사후 오토가 왕위를 물려받긴 하였으나 정신병이 있어서, 루이트폴트가 섭정으로서 실권을 잡았다. 루이트폴트도 권력욕으로 섭정을 맡은 것이었을 뿐이었으며 실권을 잡았다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바이에른 왕국의 실권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이후 루이트폴트는 기관지염으로 1912년에 사망했고, 그의 장남인 루트비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섭정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이후 1913년에 루트비히 3세로 즉위했다.

3.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루트비히 3세
(Ludwig III)
1845년 1월 7일 1921년 10월 18일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 테레제
슬하 4남 9녀
2남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Leopold von Batern)
1846년 2월 9일 1930년 9월 28일 오스트리아의 기젤라 여대공
슬하 2남 2녀
1녀 테레제 폰 바이에른
(Therese von Bayern)
1850년 11월 12일 1925년 12월 19일
3남 아르눌프 폰 바이에른
(Arnulf von Bayern)
1852년 7월 6일 1907년 11월 12일 리히텐슈타인의 테레제
슬하 1남[3]


[1] 사실상 명예원수를 칭함 [2] 당시 그리스 헌법은 오톤의 형제와 그 자손들에 대해서도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였으나, 오톤의 후계자는 반드시 정교회 신자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3] 1차대전때 전사하여 직계 후손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