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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1:00:00

슈판다우 교도소

Das Kriegsverbrechergefängnis Spandau
슈판다우 군사교도소
파일:1947 Spandau prison.png
1947년 슈판다우 교도소 주변을 순찰하는 영국 군인들.
언어별 명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cccccc,#212121> 독일어 Das Kriegsverbrechergefängnis Spandau
영어 Spandau Prison
프랑스어 La prison de Spandau
러시아어 Межсоюзная тюрьма Шпандау
}}} ||

1. 개요2. 역사3. 특징4. 수감자의 하루 일과5. 뉘른베르크 죄수 명단6. 마지막 죄수와 최후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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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1년 완공되어 1987년 철거될 때까지 베를린 슈판다우에 존재했던 교도소.

2. 역사

1881년 완공됐을 때의 슈판다우 교도소는 군 교도소였다. 교도소치고는 아담하고 수용인원도 300명 밖에 안되는 건 군 교도소로 쓰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전한 직후인 1919년, 초인플레이션으로 치안이 개판이 됐을 때 교도소가 모자란 나머지 민간인 범죄자도 슈판다우에 수용했고 300명 정원인 교도소에 무려 600명을 수용하는 초과수용을 감행해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나치당 정권을 장악한 시기에는 나치에 반대하는 독일인들을 수감하는 정치범 수용소가 되었다. 그리고 나치가 패망한 다음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나치전범 7명을 수용하는 수용업무를 마지막으로 1987년에 철거되었다. 건물의 내구성에는 큰 문제[1]가 없었는데도 굳이 철거한 이유는 나치 추종자들이 슈판다우 교도소를 성역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철거 후 나온 폐자재들조차 추종자들이 성물화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바다에 뿌리거나 다른 건축물의 토대로 쓰는 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3. 특징

뉘른베르크 전범 수용 시점에서 수용인원이 고작 7명에 불과했던 이 교도소는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인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에 의해 공동관리되었다. 특이한 점은 4개국이 동시에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매달 4개국이 교대하면서 운용인력과 경비병력을 자국 인원으로 교대, 배치했는데 여기서 운용인력이랑 그냥 교도관뿐만 아니라 시설관리 인력부터 주방장까지 전부를 말한다. 한마디로 죄수 빼고 모든 걸 갈아치우는 것. 그래서 죄수들에게 배급되는 식사의 질도 그 달의 관리국가에 따라 달라졌는데 제일 좋은 식사를 주는 국가는 당연하게도 프랑스였고 제일 나쁜 식사를 주는 국가는 영국도 꼈는데 의외로 소련이었다.

미국 영국의 식사는 당시 먹는 것에까지 인색할 이유는 하등 없던 국가였던지라 푸짐했고 더 달라고 하면 아낌없이 줬지만 정작 죄수들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하게 프랑스는 한때 독일에 점령됐던 국가답지 않게 부드럽게 죄수들을 대해줬는데 음식은 맛있었으며 기본적인 교도소 수칙으로 일체의 주류가 금지였지만 프랑스가 관리할 때는 식전주 문화 때문인지 식사 때 가끔 와인이나 코냑도 배급해줄 정도였다.

반면 소련의 관리가 시작되면 삼시세끼 삶은 감자, 흑빵, 스프 이 3가지만 로테이션으로 줬다. 간식도 다른 국가는 과자를 줬지만 소련은 그냥 커피만 줬다. 식사 뿐만 아니라 죄수를 대하는 태도도 소련이 제일 가차 없었는데 다른 국가 관리 하에서는 그냥 다 죽어가는 영감쟁이들이라 아침 기상 시간에 칼같이 일어날 필요는 없었지만 소련 관리 하에서는 딱 6시가 됐을 때 죄수가 기상해서 침구를 개고 있지 않으면 당장 일어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수감자 중 제일 건강이 안 좋던 발터 풍크는 아침 잠이 많아서 소련 관리 하에서 제일 많이 혼난 죄수였다. 그나마 구타나 체벌 같은 징벌은 안 했고 구두로 야단치는 정도로만 끝냈다.

다만 소련이 죄수들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점은 러시아 네티즌들이 강력히 부정[2]하는 사실이고, 오히려 다른 서방 3국이 느슨하게 대하는 통에 전범들이 외부와 불법 서신을 교환하고 금지된 물건을 들여왔다고 주장해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3]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소련 측이 맡을 때조차 관리가 상당히 느슨해지고, 나중에는 통상적인 교도소에서 하는 수준의 검열만 할 뿐, 죄수들이 제약없이 서신 교환을 했다. 나치 전범들 중에서 정말로 극악무도한 자들은 진작에 사형선고를 받고 얼마 못 가 죄다 저세상으로 보내졌으므로, 슈판다우에 갇힌 전범들은 핵심 전범들이기는 해도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그나마 덜 했던 사람들이었다. 즉 눈감아 줄 여지가 조금은 있었다는 말이다.

4. 수감자의 하루 일과

아침 6시에 기상해서 8시에 아침식사 시간까지 세면 및 청소. 식사 후에는 12시 점심식사 시간까지 중정 텃밭에서 노역, 점심식사 후에는 2시까지 휴식한 뒤 다시 노역, 저녁식사 시간은 오후 5시였고 소등 및 취침시간은 10시였다. 취침 전까지는 자유 시간이었다.

죄수들은 각자 독방을 썼고 이른바 통방(몰래 연락하는 연통) 행위를 막으려고 각 감방은 하나나 두개씩 빈방을 사이에 두고 수용했지만 일과시간에 자유롭게 대화할 시간이 많아 별 의미는 없는 조치였다. 그런데 관리 주체인 4개국이 자기들 관점대로 일과를 해석하는 바람에 그 달의 관리국 방침에 따라 조금씩 하루 일과가 조정되었다. 영국이 관리를 맡은 달에는 티타임이 존재하는 영국 문화 특성상 점심식사 후 오후 휴식시간이 길었고, 프랑스가 관리를 맡은 달에는 식사를 느긋하고 푸짐하게 즐기는 프랑스 생활상에 따라 식사시간이 좀더 길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재소자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어, 헤스만 홀로 남은 뒤론 필수 보안 구역 외엔 소내 이동 통제가 사실상 없어지고 일과표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지경으로, 그냥 '바깥에 못 나갈 뿐인 요양병원'이나 다름없게 됐다.

5. 뉘른베르크 죄수 명단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징역 10년) 알베르트 슈페어 (징역 20년) 루돌프 헤스 (종신형)
해군총사령관 겸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대통령 나치 독일의 군수 장관 나치 독일의 부총통, 돌격대 및 친위대 대장
발두어 폰 시라흐 (징역 20년)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금고 15년) 발터 풍크 (종신형)
히틀러 유겐트의 총책임자, 돌격대 대장 나치 독일의 외무국가장관, 친위대 대장 나치 독일 중앙은행 2대 총재
해군원수 에리히 레더 (종신형)
전 해군총사령관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다들 상당한 고위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관 수감자가 5명[4]으로, 무관 수감자인 제독 2명보다 2배 이상 많았다. 동시에 홀로코스트를 주도하는 등 극악무도한 반인륜범죄에 연루된 자들은 없지만 대부분 강제노역을 지휘하거나[5] 전쟁을 이끌어가는 데 깊게 관여하는 등[6] 무고한 자들은 아니다. 즉 사형시키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무리지만 전범은 맞았다.

형량은 엄격하게 집행된 편이다. 수감생활을 하기에 건강에 큰 문제가 없었던 카를 되니츠와 알베르트 슈페어, 발두어 폰 시라흐는 형량을 꽉 채우고 나서야 사회로 나갈 수 있었다. 역시 건강했던 루돌프 헤스는 영국에서의 수감기간을 합치면 무려 46년을 갇혀있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결국 감옥에서 종신형으로 죽게 되었다. 노이라트, 풍크, 레더는 가석방됐지만 모두 건강이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음이 인정되어서 내보내준 것이고, 실제로 오래 못 살고 3~5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6. 마지막 죄수와 최후

파일:Kriegsverbrechergefängnis_Spandau_-_Abriss_abgeschlossen.jpg
철거되는 슈판다우 교도소의 모습.

세월이 흐르며 죄수들이 하나 둘씩 만기출소 내지 가석방되면서 마침내 슈판다우에는 단 1명의 죄수만 남게 된다. 바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루돌프 헤스. 헤스 말고도 에리히 레더 발터 풍크도 종신형이였지만 전술했듯 이 2명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형집행정지 가석방되었고 얼마 못 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루돌프 헤스는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건강상태가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종신형을 살아야만 했다. 결국 헤스는 1987년에 93세의 나이로 자살할 때까지 42년의 세월을 슈판다우에서 살았다. 그리고 슈판다우 교도소는 1987년 8월, 루돌프 헤스가 사망한 그 달에 신속하게 철거되었다. 헤스의 자살로 슈판다우 교도소의 유일한 존재의의가 사라졌다지만, 헤스가 사망한 그 달이 지나기도 전에 바로 철거를 시작했기 때문에 '헤스는 살해당한 거고, 연합국은 현장을 없애려고 서둘러 철거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7. 기타


[1] 루돌프 헤스가 사망한 시점에서 지은 지 거의 백년에 육박하면서 건물이 심하게 노후화된 상태였으나 내구도에는 문제가 없었다. 본래 슈판다우 교도소는 슈판다우 요새와 동일한 축성기술이 적용된 성채나 다름 없었는데, 그 때문에 거주의 쾌적함보다 내구성이 강조되었다. [2] 전범이지만 공정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주장. [3] 하지만 앞에 서술된 이야기들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일과표대로 똑바로 하라고 칼같이 갈구고 밥과 간식도 소련이 가장 엉망으로 주면서 다른 세 나라에 비해서 개같이 굴렸다는 건 사실이 되어버렸다. [4] SS 장군 출신이 둘, 돌격대 장군 출신이 1명 있지만, 이들의 계급은 일종의 명예직이고 실 직책은 문관이다. [5] 알베르트 슈페어, 카를 되니츠 [6] 카를 되니츠, 루돌프 헤스, 에리히 레더 등 [7] 전쟁 당시나 전후에 벌어진 상황을 두고 자주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재밌는 건 점심시간에 멱살잡이 하듯이 싸워놓고 저녁식사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식탁에 마주 앉았다고 한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되니츠가 나는 총통으로부터 적법하게 정권을 이양 받은 독일 대통령이라고 주장했고 그 때마다 레더는 "아, 이 양반 또 시작이네. 아니잖아 이젠." 식으로 빈정거려서 싸움이 났다고... 또 두 사람은 독일 해군의 패전에 책임이 서로에게 있다고 떠넘기기도 했다. 레더는 되니츠의 U보트가 독일 해군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고, 되니츠는 레더의 전함이 독일 해군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고... [8] 교수형 중 몸이 경련하는 모습을 발레에 빗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