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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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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군사법정 전쟁범죄자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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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191919> 한국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독일어 Die Nürnberger Prozesse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
Nürnberger Prozess gegen die Hauptkriegsverbrecher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영어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Germany ( 참고)
Nuremberg Trials
러시아어 Нюрнбергский процесс
Послдущие Нюрнбергские процессы
프랑스어 Le Procès de Nuremberg
스페인어 Juicios de Núremberg
아랍어 محاكمات نورنبيرغ
라틴어 Iudicia Norimbergensia

1. 개요2. 재판부 및 검사
2.1. 재판부
2.1.1. 수석 판사2.1.2. 대리 판사2.1.3. 검사
2.1.3.1. 수석 검사
3. 피고인(24명의 전범들)
3.1. 군인 피고인3.2. 그 외 피고인
4. 재판의 쟁점 및 판결5. 사형 선고6. 사형 집행7. 시신 처리8. 금고형 집행9. 슈판다우 교도소 철거10. 기타11. 매체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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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나치 독일 전범들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진행된 재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미국, 영국, 소련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을 거쳐 종전 후 나치 독일 전범의 처리 문제에 관하여 협의를 진행하였다. 최종적으로 전범들에 대한 국제군사재판을 실시하기로 합의한 이들 승전국은 1945년 8월 8일 런던헌장(London Charter)을 채택하여 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를 설치하여 유럽의 추축국(樞軸國) 핵심 범죄자의 소추 및 처벌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런던헌장에 따라 이 재판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행해진 나치 독일 소속 개인의 범죄행위에 대하여만 관할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인 1939년 9월 1일 이전의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관할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들 3개국에 추후 프랑스가 포함되어 최종적으로 4개국 출신의 재판관 8명과 검사 4명으로 구성된 재판소가 독일 뉘른베르크의 법무부 건물(Justizpalast)에 개설되었다.

이 재판소는 전쟁 발발 및 전개에 책임이 있는 나치 독일의 핵심 정치·군사 지도자 24명에 대하여 1945년 10월부터 재판을 실시하였다. 당시 피고인들은 침략 전쟁 등의 공모와 참가, 계획, 실행과 전쟁범죄, 비인도적 범죄(유대인 학살) 등의 이유로 총 24명이 기소되었다.

반면 재판 대상이지만 피소되지 않은 전범들도 많은데 아돌프 히틀러 퓌러를 비롯하여 파울 요제프 괴벨스 선전장관,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장관,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공군 원수, 한스 크렙스 육군참모총장,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육군인사청장, 베른하르트 루스트 교육장관, 헤르베르트 바케 식량장관 등은 모두 체포되기 직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제국보안본부장도 1942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암살되었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1945년 11월에 시작되어 403회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는 전쟁의 공동모의,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 등의 항목으로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 외무장관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등 12명에게 사형이 언도되었고, 이 가운데 자살한 헤르만 괴링과 행방이 묘연한[1] 마르틴 보어만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사형은 10월 16일 집행되었다. 부총통 루돌프 헤스 등 3명에게 종신금고형이, 알베르트 슈페어, 카를 되니츠 등 기타 전범들에게는 20년 금고, 15년 금고, 10년 금고형이 언도되었다. 한스 프리체와 프란츠 폰 파펜, 얄마르 샤흐트 3인은 전쟁과의 연결성 부족으로 무죄로 풀려났고 마르틴 보어만은 궐석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됐으며 로베르트 라이는 공판 전에 자살했고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은 질병으로 출석이 연기되어 얼마 후 질병으로 사망했다.

2. 재판부 및 검사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에서 각각 수석 판사 1명과 대리 1명(프랑스는 두명), 검사 1명씩으로 법정을 구성했기 때문에 4명의 검사가 있었다. 재판장은 영국의 제프리 로런스 남작이 선정되었다. 대부분의 판사 및 검사는 문민 관료 신분이나 소련에서는 군인들이 선정되었다.

2.1. 재판부

2.1.1. 수석 판사

2.1.2. 대리 판사

2.1.3. 검사

2.1.3.1. 수석 검사

3. 피고인(24명의 전범들)


죄명
판결 ※영화 뉘른베르크(2000)에서 판결 장면 당시 선고를 받지 않은 전범은 굵은 글씨 및 분홍색 바탕으로 표기한다.

3.1. 군인 피고인

성명 군별 계급 역할 판결
빌헬름 보데빈 요한 구스타프 카이텔 육군 원수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 및 총사령관 G G G G 사형( 교수형)
알프레트 요제프 페르디난트 요들[10] 상급대장 국방군 작전부장 G G G G
헤르만 빌헬름 괴링[11] 공군 제국원수[12] 공군 총사령관
4개년 경제계획청장[13]
항공부 장관
산림청장
돌격대 대장
G G G G
에리히 요한 알베르트 레더[14] 해군 원수 전(前) 해군총사령관. G G G O 종신형
카를 되니츠 원수 해군총사령관
제3제국 2대 대통령(1945.4.30부터)[15]
I G G O 10년형

3.2. 그 외 피고인

전범 이름 역할 판결
율리우스 슈트라이허[16] 나치당 고위 간부
돌격대 대장
대중잡지 돌격병(Der Stürmer)의 사장
I O O G 사형
( 교수형)
마르틴 루트비히 보어만[17] 나치당 비서실장
돌격대 상급대령
친위대 대장
I O G G
한스 미하엘 프랑크[18] 폴란드 총독
돌격대 대장
I O G G
에른스트 칼텐브루너[19] 국가중앙보안본부 대장.[20]
친위대 대장
무장친위대 및 경찰대장.[21]
I O G G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프리츠 자우켈[22] 외국인 노동고용 전권 총감
돌격대 및 친위대 대장
I I G G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23] 오스트리아 수상( 총리)
네덜란드 총독[24]
친위대 대장
I G G G
빌헬름 프리크 전(前)내무부 장관[25]
체코 총독
뉘른베르크 인종 법 작성 참여.
I G G G
울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부 장관
친위대 대장
G G G G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나치당 교육부장
나치당 외교정책부장
동유럽 점령지 관리 장관
돌격대 대장
G G G G
발터 에마누엘 풍크[26] 경제부 장관
국가은행 총재
I G G G 종신형
루돌프 발터 리하르트 헤스[27] 퓌러 대리
친위대 대장
G G I I
발두어 베네딕트 폰 시라흐[28] 전(前) 히틀러 유겐트 단장
돌격대 대장
I O O G 20년형
베르톨트 콘라트 헤르만 알베르트 슈페어[29] 군수 & 탄약부 장관 I I G G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30] 전(前)외무부 장관.[31]
전(前) 체코 총독.[32]
친위대 대장
G G G G 15년형
프란츠 요제프 헤르만 미하엘 마리아 폰 파펜 전(前)수상(총리)
전(前)부수상(부총리)
오스트리아 대사
터키 대사
I I O O 무죄
얄마르 호러스 그릴리 샤흐트[33] 전(前)경제부 장관
전(前)국가은행 총재.[34]
I I O O
한스 프리체[35] 선전부 라디오 방송부장 I I I O
구스타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마리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 1941년까지 크루프사의 최고경영자 O I I I ---[36]
로베르트 라이 나치당 조직부장
노동전선 지도자
돌격대 대장
I I I I 재판 전 자살
대리 판사 알렉산드르 볼치코프를 제외한 소련 수석판사는 독일로 인해 2,900만명의 사망자를 냈고 1000만의 부상자를 냈기 때문에 기소된 모든 전범에게 유죄를 선고하려고 했지만 영국, 미국, 프랑스 측의 반대에 부딪혀 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루돌프 헤스도 사형시키길 바랬지만 결국엔 무기징역으로 만족해야 했다. 결국 소련 측에서 반대의견을 따로 펴내는 것으로 끝냈다. 한스 프리체는 다른 전범들조차도 "재 누구임?" 할 정도로 영향력이 미미했고 얄마르 샤흐트 박사는 히틀러를 반대했다가 수용소까지 들어갔던 인물이다. 이쯤 되면 나치가 그냥 싫어서 다 감옥에 넣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37]

다만 이 재판에서 무죄 방면된 피고인들은 모두 그대로 편안한 여생을 누리지는 못했다. 괴벨스의 선전성 심복이었던 한스 프리체의 경우 전범 혐의는 없어서 이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나치 부역 혐의에 대해서는 독일(서독) 국내 법에 의한 처벌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재판 이후 서독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프리체는 복역 중 암 발병으로 1950년에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1953년에 사망했다. 역시 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프란츠 폰 파펜도 마찬가지로 나치 부역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서독 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고 1954년까지 서독 내 공직 활동과 저작물 출판을 금지당했다. 이후에도 끈질기게 정계 복귀를 노렸지만 우파 성향인 기민당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실패했고 자신이 끝까지 히틀러 반대자였다고 주장하다가 1969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샤흐트는 서독 정부하의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1년만에 출소한 것을 제외하면 그래도 편한 여생을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샤흐트는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행정가라 죽기 전까지 여러 나라의 경제정책에 관여했고 서독 정부에서 건국 훈장을 받았다.

4. 재판의 쟁점 및 판결

첫째로 죄형법정주의가 문제가 되었다.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법규가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범죄를 규정짓고 소급 적용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의 판결은 1928년 켈로그 브리앙 조약으로 인하여 침략전쟁이 국제법에 위반한다는 점은 독일 지도자들도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처벌은 소급처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둘째로 나치 경제·군사 지도자들은 독일 정부와 별도로 국제법상 개별적 형사책임을 부담하는지 여부의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하여 이미 국제법은 국가뿐 아니라 개인에 대하여 권리와 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이 오랫동안 확인된 바, 따라서 독일 정부와 별도로 나치의 정치·군사 지도자들도 국제법상 개별적 형사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보았다.

셋째로 사병 즉, 병들과 부사관들의 경우 상급자가 내린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들이 명령수행에 따라 지은 형사적 책임에 대한 정당화 사유가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이 쟁점에 대한 핵심은 해당 하급자가 실질적인 의미에서 범행 참여 여부에 관해 선택권을 가졌는지에 대한 여부로 보아 상급자가 내린 명령 수행은 하급자의 형사적 책임에 대한 정당화 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법체계인 영미법과 소련과 프랑스의 법체계인 대륙법의 법철학이 다르다는 점도 문제였다. 가령 영미법에서는 범죄 의도만 있어도 처벌할 수 있는데 반해, 대륙법에서는 의도만 가지고는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38] 전범재판에서도 이런 법철학적인 마찰이 상당히 있었다.

여기에 마이너한 문제지만 엄청난 통역량도 문제였다. 피고인들은 독일인이고 재판부는 연합국 4개국에서 파견되었으므로 그 중 영국과 미국은 단어 등등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영어를 쓰기 때문에 하나로 통합한다면 통역의 경우의 수는 6가지나 되었다.(영-독, 영-프, 영-소, 독-프,독-소, 프-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Karikatur_zum_N%C3%BCrnberger_Prozess.jpg
전범 재판을 풍자한 그림 - "Mein Name ist Hase(나는 아무것도 모른다)[39]"
파일:Defendants_in_the_dock_at_the_Nuremberg_Trials.jpg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발두어 폰 시라흐,[40] 프리츠 자우켈.[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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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형 선고

재판 당시 영국·미국·프랑스에서 파견된 재판부 판사들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들 중 사형을 선고받은 경우 현직 정규 군인 계급을 가진 정규 군인[42] 군대 군법회의[43]를 위한 표준을 적용해서 총살형으로, 그렇지 않은 나머지는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였다. "어차피 죽는 거 둘 차이가 뭐냐"고 할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서구권에서는 군인을 처형할 때 검이나 총기와 같은 군인이 사용하는 무기로 처형하는 것이 관례이자 명예였기 때문에 이는 의외로 중요한 문제였다.[44]

하지만 소련 측 수석 판사인 이오나 니키첸코(Иона Никитченко) 육군 소장[45]이 독일을 증오한 나머지 "이런 쓰레기 놈들에게는 교수형도 과분하다! 전원 고통스럽게 매달아 엮어놓은 다음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인데 총살은 무슨 총살이냐!"며 대리 판사인 볼치코프 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인 사형수들의 총살형 집행을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다고 한다. 현역 군인이었던 이오나 니키첸코가 군인에 대해서 총살형을 반대한 이유는 독소전쟁 당시 소련이 독일의 침략으로 사망자 수가 총 2,900만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소련의 제안으로 독일로부터 불가침 조약까지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뒷통수를 크게 맞은 것도 모자라 독일의 전쟁범죄로 인해 군인, 민간인 피해까지 합쳐 총 2천 9백만이 넘는 사망자와 1,000만이 넘는 부상자가 나온 것이다. 당연히 소련군들도 2차 세계 대전 내내 그 분풀이로 독일군 포로들에게 엄청난 가혹행위를 한 뒤 바로 죽여버렸으며, 급기야 베를린 공방전으로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한 뒤에는 본토의 독일인을 상대로 수많은 약탈 강간을 저지르는 것으로 복수심을 표출했다. 소련 입장에서는 독일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몰살시키고 찢어 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았을 상황. 따라서 불가침 조약도 어기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치 인사들은 불명예스러운 방식인 교수형을 당하는 것으로 사죄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소전쟁을 치르며 엄청난 피해를 입어가며 독일군의 주요 전력을 패퇴시킨 것은 거의 소련군이었으니 연합군 측에서도 이를 고려해 소련 수석 판사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형 선고를 받은 전범들은 군인 신분을 가진 자들도, 그렇지 않은 자들도 전부 예외없이 교수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소련은 인종주의에 매몰되어 국제 협약 따윈 안중에도 없이 독소전쟁을 승인하고 자국의 무고한 민간인을 수도 없이 죽인 나치와 독일이라면 치가 떨리는 상황이었다. 니키첸코도 현직에 복무하는 군인이었고 나치 측의 카이텔, 요들, 괴링, 되니츠, 레더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소련인들을 군인과 민간인을 전부 합쳐서 2,900만명이나 죽이고 1,000만명 넘게 부상을 입힌 나치 인사들을 군인이라는 이유로 총살형으로 한방에 편하게 죽이는 자비 따윈 보이기 싫었다.

행방불명 상태라 궐석 선고받은 마르틴 보어만을 제외한 11명의 사형수들은 1946년 10월 16일 새벽에 뉘른베르크 교도소의 체육관에 급조한 교수대 두 곳에서 비공개 교수형으로 처형하기로 결정되었다. 현역 군인 신분이었던 헤르만 괴링 빌헬름 카이텔[46], 알프레트 요들은 공개든 비공개든 시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도 좋으니 자신들의 사형은 총살형으로 집행해 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이 청을 기각했다고 한다.[47] 사형수들 중 헤르만 괴링은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것에 반발해서 집행 전날에 밀반입한 시안화칼륨 캡슐을 깨물고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때문에 실제로 교수형으로 집행된 이들은 10명으로 줄었다.

6. 사형 집행

사형 집행은 미 육군 교수형[48] 담당관이었던 미군 군사경찰 상사 존 C. 우즈(John C. Woods, 1911–1950)[49]가 군사경찰 병사 조셉 몰타(Joseph Malta, 1918–1999)의 보조를 받으며 행했고 증인들로 미군 소련군, 영국군, 프랑스군 관계자들과 군종장교, 군의관, 취재 허락을 받은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의 기자 하워드 K. 스미스(Howard K. Smith. 1914–2002) 등이 입회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사형(교수형)은 1시 11분부터 2시 57분까지 약 1시간 40분 동안 집행되었고 원래는 헤르만 괴링이 먼저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링이 소련의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가 군인들에 대한 총살형 집행을 반대하여 교수형으로 선고되자 이에 반발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는 바람에[50]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시작으로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한스 프랑크, 빌헬름 프리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프리츠 자우켈,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순으로 집행되었다.[51]

참고로 교수형 집행 과정에서 소련 측이 사형수 모두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주는' 교수형으로 집행할 것을 요구했는데 우즈 상사 등 집행자 측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줄 길이를 조절해서 군인을 포함한 사형수들을 모두 고통스럽게 질식사하였다.

소련의 요구대로 집행 후 추가적인 고통을 받으며 사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음과 같다.

서양에서는 사형수를 미결수 취급하므로 전원은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대부분은 양복을 구해 입고 교수대에 올랐다고 한다. 카이텔과 요들도 군인 신분이 유지되었던 관계로 교수형 집행이라도 육군 군복 착용을 허용받아 일본의 극동국제군사재판 일본군 전범들과는 다르게 군복을 입은 채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다만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이 두 장군은 군복에 계급장을 포함한 그 어떤 부착물도 달지 못했다.

사형수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을 할 기회를 줬는데 "없다(No)."고 대답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제외한 나머지가 유언을 남겼다. 한스 프랑크처럼 용서를 빌면서 반성한 이들도 있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단지 회한만을 남긴 이들[56]이 대다수였다. 슈트라이허처럼 죽는 순간까지 반성하지 않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유대인 학살을 합리화하고 연합군을 저주하던 자[57]들도 있었다고 한다. 자우켈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은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상관이었던 슈페어는 20년 형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자신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니 유무죄는 몰라도 양형에 대해선 억울하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7. 시신 처리

자살한 괴링을 비롯한 사형수들의 시신은 검시 후 연합군 검찰 관계자들에 의해 사진 촬영 된 뒤 자살 당시(괴링) / 사형 집행 당시 그대로 입관되었고 전범들은 이 땅에 묻힐 곳이 없다며 유족에게 시신을 인도하지 말고 시신마저도 불태워 뿌리라는 소련의 요구로 군용 트럭에 실려 비밀리에 뮌헨의 한 화장터로 보내져 가명으로 일괄 화장되었다. 화장하고 남은 재는 묘지에 안장하지 않고 소련의 요구대로 비밀리에 이자르 강의 콘벤츠 지류에 뿌려서 사후 준동할 지도 모르는 극우파들의 우상화를 막도록 했고 유품만 모두 유족에게 반환되었다. 그러나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은 집안 묘지에 가묘 형태로 묘비가 설치되어 있다.

8. 금고형 집행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은 발터 풍크, 루돌프 헤스, 에리히 레더, 20년형을 선고받은 발두어 폰 시라흐, 알베르트 슈페어, 15년형을 선고받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10년형을 선고받은 카를 되니츠는 뉘른베르크 교도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1947년 7월 18일에 서베를린 영국군 관할 지구에 있던 슈판다우 교도소로 이감되어 나머지 형을 살게 되었다. 이들 중 풍크와 레더, 노이라트는 건강 악화 등의 이유로 1954~57년 사이에 가석방되었고 몇년 후 모두 사망했으며 시라흐와 슈페어, 되니츠는 만기 출소했다.

이후 유일한 수감자로 건강에 별 문제가 없어 감옥에 갇혀 있던 헤스는 90대까지 장수하다 1987년 8월 17일에 목을 매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헤스의 유족들은 헤스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부검 결과도 자살로 나왔다. 헤스의 수감 생활은 많이 편했는데, 사실상 뉘른베르크 재판 기결수들만을 격리 수감하려고 남겨 둔 교도소라 다른 동료들이 출소한 후 거대한 감옥의 정원 및 시설을 혼자서 이용하면서 지낼 수 있었던 데다 면회를 온 사람도 꽤 많았으며 교도소 측에서도 그가 고령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인물이고 반인륜 범죄자가 아님을 감안해 사복 착용을 허용하고 담을 대놓고 넘어가려고 하지 않는 한 별다른 통제를 하지 않고 편의를 봐줬기 때문이다. 애초에 헤스 본인도 밖에 나가면 할 것도 없고 나치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교도소 내에서 이거저거 받아먹으며 사는 게 더 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 줄을 교도소 측이 예상하지 못하고 어차피 곧 죽을 늙은이니 예우 좀 해 주자던 게 너무 건강한 나머지 중간에 끊을 수도 없어 길어진 탓도 있다.

9. 슈판다우 교도소 철거

루돌프 헤스가 자살한 뒤 슈판다우 교도소도 사형수들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네오나치의 우상화를 막기 위해 철거되었고 잔해는 깔끔히 부서져 북해에 뿌려지거나 영국군 관할 비행장이었던 가토 비행장에서 폐기 처분되었다. 헤스의 시신은 가족에게 인도되어 장례를 치른 후 가족묘지에 묻혔으나 그가 그렇게 싫어하던 네오 나치들이 자꾸 단체로 성지순례를 와서 결국 2011년에 화장되어야 했다.

10. 기타

윈스턴 처칠의 경우 1945년까지 재판은 있을 수 없고 악질범은 과거의 처리 방식대로 군대에서 총살하자고 의견을 제시했으며 소련 측의 한 인사는 고위직 정치인과 범죄 행위가 확실한 자들만을 추려 약 5만명 정도 주요 범죄자들을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총살하자고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나 미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끝까지 관철하였다.[58] 이후 국제법을 공부한다면 한번쯤은 볼 만한 판례. 이와 같은 기본적인 입장은 도쿄 재판에서도 관철되었다. 단,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통역으로 일했던 조선인들이 독일의 부총통 헤스에게 내려진 것과 같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59]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육군 원수는 소련군에 투항했고 전범 혐의를 받을 일을 하지 않은 덕에 이 재판에서 전범이 아니라 증인의 자격으로 증언했다. 소련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 중에서 전범 혐의자는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전범 재판을 받았으나, 파울루스는 전범 혐의로 볼만한 행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소되지 않았다. 일단 파울루스는 1942년 봄에 6군 사령관을 맡기 전까지는 지휘계통과는 거리가 먼 참모장교로만 일했기 때문에 휘하부대의 학살혐의에 대한 감독 책임은 없었고, 그가 비로소 야전직을 맡은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민간인이 거의 빠져나간 도시에서 격전을 치렀기 때문에 학살 같은 일을 벌일 여지도 없었다. 오히려 파울루스는 학살 등의 전쟁범죄를 지시하는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폐기하고 전쟁범죄를 금지시키는 등 국방군에서 보기 드문 올바른 자세를 보여주었다. 물론 무장친위대가 이런 명령을 무시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있기는 했지만 부하의 명령불복종까지 파울루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전범 혐의는 받지 않았다. 대신 파울루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옛 동료였던 요들이나 카이텔 등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거부한지라 바로 석방되지는 못하고 몇 년간 더 억류생활을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경우 본래 생존 가능성을 근거로 기소 대상자 명단에 있었으나 얼마 후 소련 측에서 사망을 공식 발표하면서 제외되었다.[60]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혹시나 해서 이오시프 스탈린 KGB 아르헨티나에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서는 재판이 끝나고 거의 7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말이 많다. 1949년 기준 감옥에 수감된 나치는 300여 명에 불과했다. 당대 사람들에게 이 부분은 아주 악질을 제외한 대부분의 실무자들은 처벌을 피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도 그랬다.[61] 그리고 일부 유대인들은 복수를 위해 비밀결사대 나캄[62]을 만들기도 했다. #

나치가 행한 인체실험에 대한 충격적 진실이 밝혀지고 과학과 의학의 이름을 참칭해 벌어진 참혹한 학살에 대한 과학계 전반의 반성으로 의료실험 연구윤리에 대해 규정한 뉘른베르크 강령이 발표되었으며 국제적으로 과학자 연구윤리의 대한 스탠다드가 되었다.

또 자국민에게 저지른 범죄도 그것이 반인륜 범죄에 해당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그 죄를 벌할 수 있다는 판례가 만들어진 것도 이 때의 일이다. T-4 프로그램에 가담한 전쟁 범죄자들이 살해한 자들의 대다수는 독일 자국민이었지만 연합국은 그 역시 전쟁범죄의 일환이라고 판단하여 똑같이 죄를 물었다.

11. 매체

훗날 이 재판 과정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 뉘른베르크의 재판〉(1961)과 이브 시모노(Yves Simoneau) 감독의 〈 뉘른베르크〉(2000)가 있다. 후자의 경우 알렉 볼드윈 브라이언 콕스가 주연을 맡아 각각 로버트 H. 잭슨 수석검사와 헤르만 괴링을 맡았다. 1961년작인 〈뉘른베르크의 재판〉에선 괴링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사실상 주인공이라 봐도 될정도. 독빠 기질을 가진 자신의 전담 장교[63]인 미 육군 중위[64]를 꼬드겨 청산가리를 밀반입해 자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피고인들 중 괴링 다음으로는 알베르트 슈페어가 가장 비중이 높다. 그 외에는 대부분 단역이지만 그래도 주요 전범들은 대부분 등장한다.

베를린 전투 말미의 국회의사당 국기 게양 사진을 찍은 소련 해군 정훈장교 예브게니 할데이(Евгений Халдей, 1917–1997) 중위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도 소련 측 전속 사진기자로 투입됐다. 유대인 출신인 그를 소련 정부가 배려 겸 상징성 부각 차원에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12. 관련 문서


[1] 후일 히틀러 자살 이후 벙커를 탈출하던 중 부상당해 베를린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 1941년에서 1945년 간 58대 미 법무장관에 재직하였다. [3] 소련의 대법원에 근무한 대법원 판사로 계급은 영미권 계급의 준장에 상응한다. 한국을 비롯한 영미권은 대장-중장-소장-준장, 북한을 비롯한 소련은 대장-상장-중장-소장, 중국 인민해방군은 일급상장(대장)-상장-중장-소장-, 2차 대전까지의 독일 국방군의 계급은 상급대장-대장-중장-소장, 현재 독일 연방군은 영미권 계급 체계를 사용한다. 그리고 원래 니키첸코가 검사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으나 대신 판사로 임명됐으며 웅변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로만 루덴코가 검사장으로 임명됐다. [4] 1958년부터 사후까지 상임항소법관으로 재직하였다. [5] 실존인물은 1940년에서 1941년 간 57대 미 법무장관, 1941년에서 1954년 간 연방 대법관에 재직하였다. 이후 2000년작 영화 〈뉘른베르크〉에서 배우 알렉 볼드윈이 잭슨 검사 역으로 출연했다. 해당 배우는 〈 진주만〉에서 제임스 둘리틀 중령 역, 〈 붉은 10월〉에서 잭 라이언 역으로도 등장한다. [6] 우크라이나어로는 로만 안드리요비치 루덴코(Роман Андрійович Руденко). 이후 1953년 7월 소련 검사총장에 임명되어 1981년까지 무려 28년간 재임했으며 재임 중 사망하였다. [7] 프랑스 상원의원이었으며 비시 프랑스 정부 수립에 반대한 80명의 국회의원 중 한 명이다. [8] 본명은 폴란드어로 안제이 비신스키(Andrzej Wyszyńsk). [9] 전·현직 장관(리벤트로프 현 외무부 장관 &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탄약부 장관 & 발터 풍크 경제부 장관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동유럽 점령지 관리장관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전 외무부 장관) & 총독 & 경찰대장 & 총재 유겐트 단장 등 17명+현역 정규 군인 5명(육군 2명(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해군 2명(에리히 레더 & 카를 되니츠 원수)/공군 1명(헤르만 괴링 공군원수)+출판업자 1명(율리우스 슈트라이허)+선전 라디오 방송부장 1명(한스 프리체) [10] 프랑스 측 판사는 요들의 사형 판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사형은 무리고 종신형이면 족했다고 한다. 결국 다른 판사들이 코미사르 명령과 바르사로바 작전 당시 소련군 포로 학살에 대한 건으로 인해 소련 측의 강력한 주장으로 사형을 찬성하는 바람에 묵살되었고 동의할 수 없었던 사형 판결문을 본인이 읽어야 했지만 이후 독일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으나 연합국 측은 이 판결을 인정하지 않아 현재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는 프랑스 판사가 판결문을 읽었으나 영화 뉘른베르크 2000에서는 소련 니키첸코 판사(렌 돈체프 역)가 요들에 대한 판결문을 읽었다. 즉 고증오류. [11] 유일하게 군민관료 신분을 모두 갖춤. 소련 수석 판사 이오나 니키첸코의 반대로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이 결정되자 이에 반발해서 사형 집행 전날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했다. [12] 제3제국의 2인자로 피고인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의 인물이었다. 제국원수는 Reich를 국가로 번역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 있으나 이미 본 주석에 "제3제국"이란 단어가 버젓이 쓰이는 등 사실상 고유명사화되었고 이쪽이 더 많이 통용되므로 제국원수로 번역한다. [13] 이 권한으로 당시 난립하던 중소기업들을 하나로 통합해 Reichswerk를 설립했다.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중점 헤르만 괴링-공업의 형태로 표현된다. [14] 베저위붕 작전의 기획, 지휘자다. 후임인 되니츠는 포로 강제 노역, 제3제국판 무제한 잠수함 작전 등을 지시했으며 전쟁법을 어기고서라도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 확실한 전범인 반면 이 사람은 베저위붕 작전을 계획, 실행한 것이 전부인데도 선고된 형량은 되니츠보다 높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죄형법정주의적 측면에서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다. 1955년 석방되었다. [15] 히틀러의 지시로 2대 대통령이 되었고 총통직이 히틀러 집권 전처럼 대통령과 수상(총리)직으로 분리됨. [16]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해서 오죽하면 변호사들도 이 사람 정신병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물론 정신병이 있는지가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원래 이 정도면 사형까지 가기는 무리였지만 연합국 측은 그가 나치 이념의 구성 및 선동의 핵심 역할을 했음을 고려하여 사형을 판결했다. 일종의 시범 케이스라는 평가도 있다. [17] 실종되어 궐석재판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때문에 오치아이 노부히코나 고바야시 모토후미는 그가 살아서 네오 나치를 이끌고 있다는 소설/만화를 쓴 적이 있다. 나치 독일 시절 정보부대에서 근무하고 서독 성립 후 서독 정보기관 수장이 된 갤런은 보어만이 사실 소련의 첩자로서 소련에서 은신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1972년 그의 유골이 발견되어 최종적으로 사망으로 판정. 몰락(역사서와 영화 모두)에서는 1945년 5월 2일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18] 알베르트 슈페어와 더불어서 진솔하게 사죄한 나치 고위관리자 중 한 명이다. 알렉 볼드윈이 주연으로 나온 2000년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는 프랑크의 진솔함에 감명받은 프랑스 재판관이 살려주는게 어떻겠냐고(무기징역형) 제안하지만 소련 니키첸코 판사(렌 돈체프 역)가 반대한다. 프랑크의 아들은 아버지는 극렬 나치빠였고 뉘우치는 건 진심이 아니었을 거라는 식의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19] 어느 문서에 서명했냐고 물어보면 죽어도 안 했다고 일관해서 변호인단은 그를 "Der Mann ohne Unterschrift" (the man without a signature, 즉 서명 없는 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20] 전임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21]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22] 알베르트 슈페어의 죄까지 뒤집어썼다는 논란도 있다. 그는 사형대에 올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교수대를 바라보며 "난 죄 없이 죽는거요."라고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23] 반인륜적 범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거물 전범 중 하나다. 레온 골든손(Leon Goldensohn)의 뉘른베르크 인터뷰에서도 괴링이 반인륜적 범죄에 가장 앞장섰던 전범 중 하나로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 [24] 네덜란드의 도살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가지고 있었다. [25] 그 후임이 하인리히 힘러. [26] 57년 석방 [27] 처음 4가지 죄목 모두 기소당했으나 1941년에 영국으로 날아가 이후 줄곧 영국 측에 감금당했으므로 반인륜 전쟁범죄에 대한 범죄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웠다. 결국 재판부는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서는 무죄 판결을 내린다. [28] 알베르트 슈페어, 한스 프랑크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뉘우친 자 중 한 명이다. [29] 같은 임무를 맡았던 부하 프리츠 자우켈은 사형인데 이쪽은 20년형이라서 사법거래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다만 사형이 마땅할 정도의 반인륜 범죄에 적극 가담한 증거는 없다. 어쨌든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판결 중 하나. [30] 54년 석방 [31] 그 후임이 리벤트로프. [32] 그 후임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서 프리크임. [33] 샤흐트는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재판 증언석에서도 독일어 대신 영어로 응수했고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슈트라이허가 "전쟁에 반대한 유대인의 개이니 이제 훈장만 받으면 완벽하겠군!" 이라며 조롱했다. 그리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역시 "전쟁에 반대했으니 연합군 놈들이 황금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주겠구먼."이라고 조롱했다. 그러자 헤르만 괴링이 박장대소했다고 하며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훗날 서독 정부에서 건국훈장을 받았다. [34] 그 후임이 풍크. [35] 종전 직전 자살한 파울 요제프 괴벨스 대신 기소되었다. 그런데 괴벨스의 위상이 너무 높았는지 정작 같이 기소당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프리체가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단지 괴벨스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라디오 해설자로 발탁된 사람이다. 간단히 말하면 목소리 대역이 전범재판에까지 대신 끌려온 셈이었다. 이 사람은 단지 괴벨스와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끌려온 것이며 대본에 써 있는 대로 읽었을 뿐이기 때문에 기소는 되었으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36] 병으로 재판에 불참했으며 얼마 후 사망했다. 검사팀은 1943년 이후 최고경영자인 아들을 대신 재판에 앉히려고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부가 거부하였다. 대신 이후 진행된 뉘른베르크 계속재판 중 하나인 크루프 재판에 넘겨져 12년형을 선고받았다. [37] 샤흐트는 애초에 무죄가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전범재판을 걸어 재판이 승자의 철저한 보복 파티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견해가 있으며 샤흐트 본인도 그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수석 판사 두 명(소련 이오나 니키첸코, 미국 프랜시스 비들)이 샤흐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것을 주장하자 나머지 6명의 재판관들이 "아니, 전쟁을 반대한 사람까지 유죄라면 도대체 무죄는 누구냐?"며 유죄를 주장한 두 판사에게 반박했다. 심지어 소련 측 대리 판사였던 알렉산드르 볼치코프 판사는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에게 "이보시오, 동지. 저 사람이 왜 유죄입니까?" 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영국 측 대리 판사 노먼 버킷은 프랜시스 비들에게 "이 사람아, 약 빨았어?" 라는 말을 던지며 비웃었다고 한다. [38] 예를 들어 영미에서는 함정수사로 잡은 범인도 처벌할 수 있으나 대륙계 국가에선 함정수사는 금지되어 있고 시도한 경찰 등이 범죄자로 기소될 수도 있다. [39] 직역하면 "내 이름은 토끼다". 웬 토끼냐고 할 수 있는데 독일어 관용구다. 19세기 하이델베르크의 법대생 빅토르 폰 하제(Victor von Hase)가 결투에서 사람을 쏜 친구를 두고 도주원조죄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으면서 "내 이름은 하제고 모든 물음을 무이며 아무 것도 모른다.(Mein Name ist Hase; ich verneine die Generalfragen; ich weiß von nichts)"며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고 뻗댄 일화에서 비롯된 것. 그의 성인 Hase가 독일어로 토끼인 것과 법정에서 불리한 증언을 일체 거부한 그의 행적을 한데 엮은 블랙 유머, 언어유희라고 할 수 있다. [40] 그 유명한 히틀러 유겐트의 총책임자. 재판에서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이 남자가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믿었다."고 했다고 한다. [41] 제3제국의 외국인 노동력 징발 총책임자. 자신이 노동력 동원을 주도한 점은 인정했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당한 가혹 행위나 부당한 처우, 살해 등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42]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 및 총사령관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작전부장 육군상급대장 알프레드 요들, 공군총사령관 공군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 [43] 군사재판의 옛말이다. [44] 덤으로 교수형은 비교적 "깔끔한" 총살형과 달리 사형 과정에서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여담으로 이 때문에 과거 서구권에서는 군인을 욕보이고 싶을 때 검이 아닌 도끼나 작은 나이프(이쪽은 사형 과정의 고통도 더해지는 효과가 있다) 등으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다만 영국에서는 예외적으로 신분의 고하나 민간인/군인 여부를 가리지 않고 참수형은 일괄적으로 도끼로 집행했다. [45] 정작 대리 판사인 알렉산드르 볼치코프 육군 중령은 서방 측(미국, 영국, 프랑스) 판사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니키첸코가 너무 막나간다 싶으면 만류하기도 했을 정도라고 한다. [46] 카이텔의 요구대로 연합군 측도 카이텔의 총살형 집행에는 동의했다고 한다. 이유는 연합군 측이 카이텔의 범법 행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오나 니키첸코가 단 한 사람이라도 총살시킬 수는 없다며 날뛰며 반대했다고 한다. [47] 위에서도 서술했다시피 소련의 이오나 니키첸코 수석판사가 군인에 대한 총살형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재판부에서도 이를 언급하며 "적어도 독일로 인해 2,900만명이 사망한 소련측 수석 판사의 반대가 있었으므로 전범의 처리가 한 명이나 둘뿐인 독일군 장교의 처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상 사형 방법을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서 기각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나치 전범들은 치욕스럽게 교수형당하면서 그들의 만행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손실을 당한 소련에게 사죄하라고 한 것이다. 교수형이 현대에도 가장 치욕적인 사형 방식임을 생각하면 그냥 나치 수뇌부를 군인은 커녕 사람 취급도 안 해 주겠다는 의미. [48] 군인이면 총살형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미군은 교수형도 집행했다.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미군 사형수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을 정도로 총살형보다 더 흔했다. [49] 이 분야에서 권위자였으나 엔지니어 조명 세트를 수리하던 중 실수로 감전당해 39세로 사망했다고 한다. [50] 소련은 이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자국 요구대로 불명예 교수형으로 고통스럽게 죽지 않고 편하게 자살해서라고. [51]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는 리벤트로프-카이텔- 칼텐브루너-로젠베르크-자우켈-프랑크-요들-슈트라이허 순으로 집행되었다. [A]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기각 처리. [K] 낙하시에 교수대 발판이 작게 만들어졌고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으며 이로 인해 온 얼굴에 피를 쏟아내면서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질식사했다. [K] [A]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기각 처리. [56] 리벤트로프는 "독일이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는 것과 세계의 평화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으며 카이텔 원수는 자신은 독일인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독일을 위해 먼저 죽은 부하들을 따라간다고만 하였다고 한다. [57] 대표적인 인물이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오늘은 푸림 축일(부림절)이구만! 언젠가는 볼셰비키 놈들이 네놈들 목을 매달 것이다!' 라고 말했다. [58] 에른스트 벤다가 저술한 '새로운 국제법의 기초를 세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원 출처, 김명섭 연세대 정외과 교수가 저술한 '대서양 문명사'가 674p에서 재인용. [59] 김명섭 연세대 정외과 교수 저, '대서양 문명사', 675p [60] 사망했기 때문에 공소권이 없어져 끝난 거지 생존하여 기소됐다면 재판에서 4가지 기소 내용으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후 부하들과 같은 날 교수형에 처해졌을 게 분명하다. [61] 이것은 냉전의 개막과 관련이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날로 강해지는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은 자기들의 입장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범들은 최대한 선처하자는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 모두 고위층 위주로 처벌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나치의 남미 도주 일본의 우경화로 이어졌다. [62] 담 예후디 나캄(Dam Yehudi Nakam): 유대인의 피에 대한 복수라는 뜻이다. [63] 전범 1명당 연합군측 위관급 장교 한 명이 붙어 고충 처리 등을 맡았다. [64] 이들 전담 장교들과 전범들과의 관계는 각양각색이었는데, 전담 전범을 무시하고 험하게 대한 경우도 있고, 괴링의 전담 장교처럼 그의 화술에 넘어가 정중히 예우하고 편의를 봐 준 경우도 있다. [65] 워크래프트를 원작으로 한 소설로 호드의 수장으로 있는 동안 각종 잔혹한 전쟁범죄와 전횡을 일삼은 가로쉬를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합의하에 전범재판에 회부하여 심문하는 내용인데 저자가 실제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모티브로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