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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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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關東軍)이라고도 하는 중국 삼국시대 반(反)동탁 군벌의 연합군에 대한 내용은 18로 제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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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징에 있었던 관동군 사령부. 나고야 성을 모델로 지어졌으며 현재는 중국공산당 지린성위원회 청사로 사용중이다.

1. 개요2. 시초3. 폭주4. 확대5. 최후6. 제주도에서7. 특징8. 관련자9. 미디어

1. 개요

일본어 - 關東軍 / 関東軍 (かんとうぐん)
영어 - Kwantung Army

일본 제국 육군 총군 가운데 하나.

관동군의 '관동'은 일본 본토의 지역 구분 중 하나인 관동( 간토)과는 무관하다. 당연하지만 관동( 강원도)과도 무관하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중국의 뤼순(旅順, 뤼순), 다롄시(大連) 일대를 조차(租借)하게 된 일본 제국은 이 지역을 산해관(山海關)의 동쪽 지역이라는 의미 ' 관동주(關東州)'라고 명명했다. 본래 일본 제국이 중국에게 획득한 지역은 요동반도였으나, 삼국간섭으로 여순과 대련 일대로 조차지가 축소되었는데,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요동반도 전역을 다시 장악한다. 훗날 괴뢰국인 만주국이 수립된 후에는 만주 전역으로 작전 지역이 확대되었다.

만주를 다스리는 실질적 지배세력이자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주력부대이자 전투경험이 가장 많아서 일본제국 육군의 최정예였던 부대로 알려졌지만,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고 동남아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벌인 태평양 전쟁 남방작전으로 정예부대 일부가 차출되어 빠지고 보급도 우선순위에 밀렸고 대전 말기에는 본토 방어를 위해 전투경험 있는 부대를 다 빼간 뒤 소련 불가침 조약만 믿고 신병들로만 채우게 되면서 일본 육군내에서도 3류 군대가 되었다.

2. 시초

일본 제국은 청일전쟁 직후 랴오둥 반도를 장악했으나 삼국간섭을 위시한 외교상 각종 압력으로 반환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 후 중국을 위협해 기어이 랴오둥 반도를 조차지로 확보하였고 이 조차지와 남만주철도부속지를 수비할 육군 관동도독부육군부(關東都督府陸軍部)를 편성했다. 이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1]

파일:external/www.willamette.edu/Kwantung%20Army.jpg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으로 뤼순과 다롄을 점령했고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1905년 9월 5일)하여 러시아에서 이 지역의 조차권을 인수했다. 이 지역명을 관동주[2]라고 정하고 관동총독부를 신설(1905년 10월 17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만주국의 모태가 된다. '관동총독부'는 이듬해 9월 1일 폐지되어 낮은 부서의 ' 관동도독부'가 되었지만 사실상 '총독'이 '도독'으로 바뀐 것뿐이다. 이후 1919년 4월 관동청으로 다시 변경되었는데, 이때 관동도독부육군부가 관동군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예하 병력은 6개 독립수비대대 뿐이었고, 일본 본토의 지휘를 받는 1개 사단이 2년씩 교대로 파견되어 주둔하는 정도였다.

3. 폭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Kwantung_Army_Special_Maneuvers2.jpg
관동군은 일본 제국 육군 소속으로 대만군, 조선군, 지나주둔군, 본토 사단과 동등한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 직속 부대였다.[3]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의 상급지휘부인 대본영이 설치된 후로는 참모본부를 통해 대본영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관동군은 관동주를 거점으로 호시탐탐 중국 침략을 노렸고 1927년 1차 산동파병을 통해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1928년에 황고둔 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을 암살하고 장제스를 배후로 지목하여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려 했으나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선포하고 국민당에 합류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관동군 과격파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고 1931년 여름 만보산 사건 나카무라 사건을 잇달아 일으킨 데에 이어 1931년 9월 18일 육군중좌 이시와라 간지의 음모로 류탸오후 사건(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철도의 운영권을 일본 제국이 소유했으므로, 해당 폭파 책임을 중국 측에 돌려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침략을 개시했다. 이곳에 배치된 중국 동북변방군(동북군, 바로 장학량의 군벌군이다)은 20만 명이 넘었지만, 관동군 불과 1만 명에게 만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만주사변이다.[4] 한편 관동군측의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일본 중앙의 명령이 전혀 없는 가운데 벌어졌고 중앙 행정부는 사후 추인하기만 했다. 군대와 하부기관의 폭주가 국가를 막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이렇게 만주를 차지한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만주군을 편성하여 만주군 장교와 하사관을 일본군이 맡는 형태로 만주군을 통제했다. 관동군사령관은 만주국을 실제로 지도했고 만주국의 모든 행정은 일본인 관료나 관동군 참모가 결정했다. 어차피 만주국 자체가 일본 제국, 아니 관동군의 괴뢰국이었으므로 그 만주국의 군대인 만주군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만주군은 관동군보다 훈련 수준은 물론이고 충성심과 사기 모두 극도로 낮았기에 전력으로서는 별 가치가 없었다. 당초 만주군의 시초부터가 장쉐량에게서 강탈한 동북군 병력이었고 마적 떼나 다름없던 당시 중국 군벌군의 상태는 막장 그 자체였다. 만주군의 자세한 사항은 만주군 항목 참조.

이후 1933년 열하사변, 1935년 하매 협정 진토 협정 체결, 기동사변, 1936년 수동사변을 계속 일으켰다. 또한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100 부대와 731 부대를 운영했다.

4. 확대

파일:external/teikoku-denmo.jp/kantokuen.jpg
만주를 침공하여 소련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으나 일본 제국 육군은 소련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5] 반면 소련군은 일본군을 위협으로 간주하여 전력을 꾸준히 증강했다. 그러다가 결국 1938~1939년에 하산 호 전투 할힌골 전투 등을 통해 과소평가의 대가를 치르면서 뼈저린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전투는 모두 대본영의 명령을 어기고 관동군이 제멋대로 일으킨 사건이었기에 패배를 문책해 관동군 사령관, 참모장, 사단장 여러 명이 예편당했다.

만주-소련 국경지역에서의 무력 충돌로 인해 소련군을 위협으로 인식한 일본 제국은 관동군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무력충돌 이전 관동군에는 4개 사단과 5개 독립수비대대가 있었지만, 중일전쟁 증원을 위한 대기병력 및 소련군에 대응하는 병력 증원으로 최전성기인 1941년에는 14개 사단까지 증강되었다. 같은 해 발발한 독소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일본 제국 육군의 관동군 대연습 당시에는 본토에서 준전시동원령이 발령되어 관동군 지역에 74만명의 병력이 일시적으로 집결하기도 했다.[6] 정예 백만 관동군, 무적 관동군이라는 홍보문구는 바로 이때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일본중립조약으로 만주 지역의 위기가 감소하고 태평양 전쟁 악화로 인해 남방군에 전력을 증강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는 관동군 병력을 남방군으로 재배치하여 1943년 이후 관동군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만주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당시 관동군은 일본 제국 육군 장교가 거쳐가는 출세길이기도 했다. 도조 히데키도 관동군에서 근무했다.

5. 최후

중국 영화 퍼플 선셋의 한 장면.[7]
1941년 12월에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관동군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고 휘하 여러 정예부대가 중국 전선이나 남방 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어 관동군은 거의 2선급 부대의 집합소가 되었다.[8]

전쟁 말기인 1945년 독소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만주 지역 위협이 다시 증가하여 일본 본토는 물론 만주, 조선 지역에서까지 무차별 동원이 시작하어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직전 관동군 지역에는 변변한 장비는 물론 훈련도 받지 못한 16세~65세의 민간인 의용병이 최대 78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소총 부족 현상을 비롯해 장비와 보급도 충실하지 못해서 단위 부대 전체가 칼과 창과 낫으로 무장까지 할 정도였다. 그나마 최후까지 남아 있던 정예부대도 일본 제국 본토를 방어하고자 소환되면서 관동군은 완벽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게다가 관동군이 세운 방어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교훈을 거의 반영하지 않고 마지노 선과 비슷한 요새 소련군을 막는 동안 예비 병력으로 소련군이 뚫은 방어선의 구멍을 막겠다는 어이없는 작전이었다. 이것은 기동전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데다가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전해들은 소련군의 추태만을 반영하고 소련군을 얕잡아본 결과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사태였다.

결국 1945년 8월 9일, 소련 만주 작전을 실시하여 소만 국경을 돌파해 들어왔다. 관동군은 체계적인 반격이 불가능했고 개전 1주일만에 붕괴되었다. 관동군은 만주 지역의 일본 제국 군관민들을 포기한 채 패주했다.[9] 이때 관동군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느냐 하면, 자국민을 방패삼아 도망 할 시간을 벌기 위해 피난 열차를 관동군 장교들과 그리고 일부 병사만 타게 하였는데, 일반 국민들이 피난 열차로 몰려들자 관동군 병사들이 총칼로 막고 열차에 올라 타려는 많은 피난민들을 사살하는 추악한 행태까지 보였다. # 설상가상으로 천황의 항복선언까지 이어지자 대부분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위의 영상에 나올 정도의 반격도 일부 부대에서만 개별로 행했을 뿐 대부분은 추풍낙엽으로 모조리 무너져 패주했다. 그 사이 소련군은 1주일만에 거의 1,000km를 주파하는, 파죽지세로 공세를 펼쳤다. 개전 초기, 이미 소련군의 주공도 아니고 조공 병력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여 8월 15일에는 함경북도 중부인 나남까지 진출했을 지경이었다. 이미 종이 호랑이가 된 관동군이, 당시 전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였던 독일군을 격파한 소련군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소련군의 작전 목표는 '관동군 세력의 괴멸'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일본 제국군 대본영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북을 관동군 위수지로, 이남을 17방면군 위수지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의 조공이 북한 지역으로 설정되었다.[10]

결국 일본 제국 천황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선언 후인 1945년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도 무조건 항복했다. 만주에서 사로잡힌 관동군 60만 명은 1955년까지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중앙아시아 일대 등 소련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하다가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국했다.[11]

6. 제주도에서

위와 별개로 소수의 관동군 병력이 제주도로 내려와서 연합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것을 대비하였다.

이들은 태평양 전선이 심화되기 전에는 나름 최정예였던 본인들 기준으론 총체적 난국이었던 제주도 주둔 조선군[12]을 관리하느라 꽤나 고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의 회고에 따르면 제주도에는 3개 사단이나 있었지만 무기는 5명에 한명 꼴로 있었고, 그나마도 사격이 가능한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화기들과 대검이라고 해봐야 철판을 칼 모양으로 흉내를 낸 말 그대로 가짜 칼 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제주도의 일본군은 2선급 병력 취급도 못 받아서, 거의 예비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평균 나이가 너무 많아서[13] 제주도를 겨우 요새화한다 쳐도 적극적인 작전은 커녕 훈련도 무리였고, 대부분 벙커에서 농땡이나 피웠다고 한다. 한 가지 다행으론 이들은 관동군의 리즈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라 관동군 출신들을 잘 대우해주기는 했다고.[14]

이후 제주도 주둔 관동군은 격전지가 되어버린 오키나와를 지원해주기도 하면서 존버를 시도했지만, 결국 일본의 패망을 맞이해야 했다. 이들은 만주에 있는 본인들의 부대가 통째로 소련에게 갈려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해 했으나, 만주로 돌아가면 굴라그행이었기에 순순히 미군에 항복하고 일본 본토로 귀환하였다.

7. 특징

이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군대 자체가 계급에 상관없이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만 훈련하는 부대이다. 이 때문에 장교가 장교로서 제대로 훈련받는 병과는 보병 병과밖에 없었으며 기갑이나 포병도 장교들이 지휘를 훈련받기는 했으나 보병에 비하면 그 비중이 떨어졌는데 비전투병과 장교는 참모부 업무만 철저히 훈련시켜서 계급이 높아도 병과로 서열이 갈리는 때가 잦았고 심할 때는 비전투병과 대좌가 보병 소위에게 지휘받는 극도에 도달한 사태까지 발생했다.[15]

할힌골 전투를 분석한 책인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를 보면, 관동군의 특성은 바로 하극상(下剋上, Gekokujo)라고 한다.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나 육군대학의 교육 과정은 소대와 중대 같은 소규모 단위부대를 지휘하는 능력보다는 사단급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능력 배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런 교육을 이수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들은 자신이 소규모 부대 지휘관이더라도 대규모 부대를 운용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경거망동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참모로 많이 활동하던 좌관급 장교단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했고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일개 소좌인데도 관동군 참모단 내에서 그 깽판을 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한 이유였다. 심지어 할힌골 전투 당시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서명을 날조해 전투를 일으키는 빼도박도 못할 하극상을 일으킨 작자이다.

8. 관련자

9. 미디어


[1] 남만주철도(만철)는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어 1907년 4월을 기해 남만주철도를 관동도독부에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경비하고자 창설된 6개 독립 수비 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고바야시 히데오가 쓴 "만철:일본제국의 싱크탱크" 참고. [2] 관동이라는 명칭이 산해관 동쪽을 의미하기에 헷갈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요동반도 일대를 러시아가 관동주라고 명명했고 일본 제국은 답습했을 뿐이다. 그 면적은 3,462 km2이고 주요 도시는 해군 기지 여순과 무역항 대련이다. [3] 대일본제국 헌법은 식민지 등의 외지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다(특별통치주의). 다만 천황에게 대권을 위임받은 조선총독의 경우, 제국 헌법 등 내지 현행 법령의 범위 안에서 총독부령을 비롯한 하위 법령을 입법할 권한이 있었다(제령권 및 조선에서 시행하여야 할 법령에 관한 법률). 다만 법령의 시행에 필요한 예산에 관한 심의는 본국 제국의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총독이 본국을 완전히 무시하는 통치 행위를 고집할 수는 없었다. 또한 3.1 운동 등에 의한 세출의 증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정당내각의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 확보 시도,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의 내각과의 협조 시도 등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독립성이 줄어들기도하였다. 예산과 내각의 의지에 의해 총독부의 독립성은 제한적이었다. [4] 이에 대해서는 장제스가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 게 우선이니까 저항하지 말고 산해관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이런 명령 탓에 장쉐량은 이후 장제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장제스를 감금하여 국공 양당의 항일 연합을 촉구하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는 1931년 7월과 8월, 장제스가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 도중 장쉐량에게 일본군에게 도발의 빌미를 주지 말라고 내린 전보가 근거인데 말 그대로 만주사변 이전의 지시를 바탕으로 만주사변 때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에 불과하며 한때 중국공산당측 자료에 의해 장제스 배후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으나 교차검증을 한 결과 장쉐량의 실책이 더 큰 것으로 판명되었다. 부저항 명령도 장쉐량 본인이 내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오해와 편견 문서를 참고. [5] 이는 러일전쟁 때,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물리쳤다는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무렵, 러시아는 아직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완공되지 못한 상태여서 보급에 차질이 컸는데 한 예로 러시아군이 사용할 총탄이 무려 2,800만 발이나 모자란 상태였다. # [6] 소-일 불가침조약이 파기되어 소련이 침공할 것을 두려워한 외무장관 도요타 데이지로가 소련 측에 자세한 훈련 상황을 통보하여 위기를 통제했다. [7] 소련군의 여타 군대를 압도하는 기갑 전력에 완전히 개발살나는 관동군의 모습이다. [8] 여기에 더 병크는 이런 정예부대들의 장비들은 혹한에 대비된 것이었기에 열대 지방인 남방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부터가 실전과는 거리가 있는 기병학교 교장 출신이었다. [9] 관동군이 만주의 일본인들을 내팽개치고 자기들끼리만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일본인 작가들의 기록과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다나카 요시키의 창룡전, 일본의 저명한 작가 겸 작사가인 나카니시 레이의 증언. [10] 이것은 약간 논란이 되는 것이 북위 38도선 설정은 관동군의 빠른 붕괴와 함경도 지역을 이미 점령한 소련군의 진공에 미국에서 옛 한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미국이 확보하고자 무장해제선을 급하게 그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장에 38도선은 아니지만(이 때는 북위 39도선), 러일전쟁 직전에 러시아와 일본이 타협점을 찾을 때에 이러한 경계선을 두자고 한 적도 있다. [11] 이들 중 일부는 석방 이후에도 러시아에 잔류하여 가정을 꾸리는 경우가 있었다. 소련에서 활동한 음악가 세르게이 가와고에(Серге́й Си́рович Каваго́э)가 이러한 잔류 가정의 케이스 중 하나로, 부칭과 성씨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계 후손이다. 부친 가와고에 시로는 관동군 출신으로 전후 소련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12] 조선 왕조 치하의 조선군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군을 말한다. [13] 회고에 따르면 러일 전쟁도 아니고, 무려 청일 전쟁 참전자(즉 50대 후반에서 70대까지)가 있었다고... [14] 관동군이 주도한 만주사변 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일본이 더 부강해졌기 때문에 후방에서는 관동군이 전공을 많이 쌓았다며 높게 치는 인식이 있었다. 일례로 태평양 전쟁 참전자인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쓴 저서에서도 관동군 직속병단 제10사단이 증원병력으로 루손 섬에 파견되어 밤새 비를 맞으면서도 전진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관동군은 우리처럼 인원만 채운 부대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말하는 묘사가 나온다. [15] 소련군도 직책이 계급보다 우선시되므로 중위 중대장에게 지휘받는 대위 소대장 같은 게 있었지만, 관동군은 그냥 보병이 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