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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17:41:12

나카무라 사건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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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제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1월 28일~5월 5일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Shintaro_Nakamura_and_Entaro_Isugi.jpg
살해당하기 전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郎) 대위와 그의 동행인 이스기 엔타로(井杉延太郎) 예비역 상사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나카무라 대위의 행로3.2. 사건 초기 일본의 대응3.3. 정식교섭의 시작3.4. 일본 측의 요구3.5. 장쉐량의 대응3.6. 열강의 반응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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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1년 6월 27일, 관동군 소속 스파이였던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郎 1897-1931) 대위가 농업기사로 위장하고 대흥안령(大興安嶺) 일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봉천군벌에게 억류되어 살해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만주사변의 구실이 되었다.

2. 배경

당시 일본 군부는 만몽정책 수행 과정에서 소련과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대만몽 군사작전 계획의 일부분으로 소련군이 북만주로 출동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흥안령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군 참모본부와 관동군은 다이쇼 시기부터 5개 조사반을 파견하여 흥안령 일대 조사에 착수하였고 1928년에도 3차례 조사를 하였다. 당시 일본군 참모본부와 관동군은 소련군이 치치하얼 등지로 주력군을 집중할 것이라 예측하였기 때문에, 흥안령 동쪽 지구에서 교전함을 상정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해 주력군을 집중시켜 북진시킨단 계획을 짜고 있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소련군의 배후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흥안령을 종단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숙영, 급양, 급수, 행동불편 등 사항을 현지에서 조사하라고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에게 명령하여 파견을 보내었다.

3. 전개

3.1. 나카무라 대위의 행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Shintaro_Nakamura.jpg
사건의 발단이 된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
나카무라는 1931년 5월 10일 도쿄를 출발하여 뤼순의 관동군 사령부에 들러 봉천에서 받은 여권 외에 하얼빈에서 받은 여명학회 간사, 농학사라는 가짜 신분증 등을 지참했고 관동군 참모부 조사반의 주선으로 북상, 흥안령 일대의 조사에 착수했다. 나카무라는 이스기 엔타로(井杉延太郎) 예비역 기병 상사, 백계 러시아인 시로카프, 안내인인 몽골인 등 다른 일행 총 3명과 동행하여 6월 6일 치치하얼을 출발, 흥안령을 남하하여 제심하 상류를 거쳐 색륜을 지나 7월 3일에 조남에 도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군사정찰 행위는 법률 위반이었다. 장쉐량은 일본의 만몽분리정책에 자극받아 흥안령 일대 일본인 출입을 금지한 바가 있었으나 이러한 불법행위를 일본 외무성의 현지 주재기관인 재만몽영사관이 조사의 편의를 위해 여권 2개 등을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1][2] 이러한 은폐 공작에도 이미 중화민국 관헌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채고 감시하였고 일본 측도 이 사실을 알아차려 5월 31일 주만주 영사 대리가 외무성에 지질학 연구를 명분으로 파견됐음에도 중국과 몽골 관헌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나카무라는 6월 9일 이렬극특 역에서 말 3마리를 얻어 조남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소악공부 부근에서 이들의 소식이 끊어졌고 예정일이 되어도 조남에 나타나지 않았다.

3.2. 사건 초기 일본의 대응

일본 외무성과 현재 주재기관은 나카무라의 신분과 여행의 목적의 누설을 우려했고 하얼빈 총영사가 7월 29일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상에게 "내지에 있는 참모본부의 대만몽 책동에 비추어 볼때 만약 나카무라가 전하는 바와 같이 관병에 의해 살해되어 군사 정탐의 증거가 드러날 경우에는 장래 이와 같은 여권에 대해 편의를 봐줄 수 없음은 물론 배일의 역선전에 이용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본건에 관하여 장래 어떠한 형식으로 중국측과 접촉하거나 혹은 외부에 사건을 발표하는 경우에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라는 건의를 올렸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외무성은 매우 신중하고 은밀한 접근을 추진, 7월 25일에 시데하라 외상이 봉천, 톈진, 상하이의 총영사에게 일본 신문이 나카무라 사건을 보도하지 말도록 통제하란 지시를 내렸다. 이와 동시에 외무성은 조사에 착수, 시데하라 외상이 7월 27일에 봉천 총영사에게 조사를 지시하고 7월 29일에는 군부와도 협력하는 한편 중국과 교섭하기 위해 자료가 될만한 증거를 조사하여 확실히 알아내는 일에 진력을 기울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하야시 총영사는 7월 30일 군관계자들과 함께 조사에 착수했다. 봉천, 하얼빈, 치치하얼의 영사관은 사건 정보를 끊임없이 시데하라 외무상에게 보고하였다.

한편 관동군은 7월 중순경에 나카무라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 나카무라 대위의 육사 동기인 가타쿠라 타다시(片倉 衷) 대위를 조남에 파견하여 조사를 실시했다. 가타구라는 조남 만철공소를 수사본부로 정하고 나카무라의 행로를 추적하였는데,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수사하던 중 7월 23일 만철공소 직원으로부터 6월 중순에 일본인 2명, 러시아인 1명, 몽골인 1명이 둔간대 3단에게 소악공부에서 살해되었단 첩보를 들었다.

이미 관동군은 만주사변의 빌미가 되는 류탸오후 폭파를 책략하기 위해 6월 하순부터 준비 중에 있었다. 당연하지만 관동군은 나카무라 사건을 만주사변 준비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했고, 이시와라 간지는 "나카무라 사건은 현안에 하나를 더하는 것뿐이지만 군부는 외무성의 도움 없이 단호히 독자적으로 해결한다."라고 발언하며 외무성에게 협력을 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군부는 절대 기밀을 유지하여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했고 외무성은 군의 요청에 있을 때까지 중국과의 교섭을 유보한다는 방침에 따라 기다렸다.

한편 관동군은 '군부의 위신을 중외에 떨쳐 국민의 기대에 보답하고 만몽 문제를 해결할 단서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나카무라 사건 처리에 대한 건의를 육군성에 올렸다. 이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기 위히 이시와라 간지 등이 8월 2일 하야시 총영사를 만나 "나카무라 대위 사건에 관해서 살해된 사실의 대강을 짐작해 보건대 본건 교섭을 지연시키는 것은 헛되이 중국 측에 증거 인멸의 기회를 주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관동군으로부터 제시된 교섭 방침에 관한 의견을 정부에 건의하는 것이다."라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를 제시했다.
1. 현재 파견 중인 조사반이 조남에 도착하는 시기에 맞추어 은밀하게 조사를 중단하고 교섭으로 이행할 것.

2. 이와 같은 교섭에서는 나카무라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군부로 하여금 이를 담당하게 하여 총영사와 충분히 협의할 것.

3. 교섭의 제일보로서 중국측에 공동조사를 요구하고 중국 측의 동의가 있을 경우 신속히 필요한 인원과 군대[3]를 현지에 파견하여 현지에서 중국측 조사원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것.

4. 공동조사를 승낙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최소 한도의 기일을 기한으로 하여 중국 측에서 승낙하지 않을 경우에는 실력조사를 강행한다. 이러한 사실은 공동 조사를 제의할 때에 미리 경고해 둘 것.

5. 해결 조건은 대체로 조남 지방과 철도의 개방, 사죄, 배상, 보장으로 할 것.

사실상 관동군이 직접 동북 당국과 교섭하겠다는 이러한 건의에 하야시 총영사는 "먼저 첫번째로 사실 조사의 완성을 기하기 위해 필요한 이와 같은 안건에 대하여 제반의 관계를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지금 바로 동의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 때문에 이후로 사건 처리를 위한 관동군과 외무성의 이중 외교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육군성도 관동군의 방침에 전면적인 동의는 하지 않았던지라 육군성 차관 스기야마 하지메가 8월 7일 다음과 같은 군 중앙의 방침을 전달했다.
1. 군 중앙은 관동군의 독자적 교섭 방침을 견제하고 군이 수행해야 할 교섭은 외무 관헌이 수행해야 할 정식 교섭의 예비적 범주에서 이를 수행하는 것으로 어느 시기에 정식 교섭으로 이행할 것인가는 군이 수행하는 예비적 교섭의 결과에 따라 이를 결정한다.

2. 나카무라 대위의 신분은 장교라고 명확히 밝혀도 지장 없다.

3. 일중 공동 조사에 관해서는 공동 조사가 오히려 사건을 애매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살해를 확정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 증거 물건을 확실하게 입수한다. 공식적인 조사를 실시할 경우에도 본 조사는 이와 같은 증거를 확정적인 것으로 하는 의미에서 시행할 것이라고 하고 공식적인 조사를 수행할 경우에는 중국 측에 대해 호위병의 파견을 요구한다. 중국 측에서 여기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군 자체에서 호위에 필요한 병력을 파견해도 좋다.

4. 요구 조건에 관해서는 중국 측으로 하여금 살해의 사실을 확인시키고 그렇다고 인정한 이후에 사죄, 책임자의 처벌, 손해 배상 및 장래의 보증을 요구하도록 할 것, 그러나 본 사건을 이용하여 만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이후 육군성은 외무성과 협의하여 8월 7일의 훈령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방침을 지시하였고 시데하라 외무상도 8월 10일 하야시 총영사에게 육군성의 방침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전달하며 하야시에게 봉천 당국과 정식으로 교섭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관동군은 육군 중앙의 방침의 불만을 품고 8월 중순, 장갑차와 보병 연합부대 1개 대대를 집중시켜 실력으로 조사를 단행하려다가 군 중앙의 제지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시와라 등은 만몽문제가 외교적 교섭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분명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고 무력 행사의 방침을 공고히 하였다.

3.3. 정식교섭의 시작

8월 16일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전보를 보내서 다음과 같이 주의를 촉구했다.
이후 일본군대가 어떤 도발을 해온다 해도, 저항하지 말고 충돌을 피하여야 한다. 만약 일시의 분함을 참지 못하면 국가와 민족을 어려움에 빠뜨릴 것이다.[4]

일본과 충돌하지 않은 것은 장쉐량 역시 원하던 것이었으므로 장쉐량은 장제스의 이와 같은 지시를 동북 각군에게 집행하게 하였다. 8월 16일의 이 전보를 근거로 장제스가 만주사변에서 장쉐량에게 부저항정책을 강요했다는 인식이 퍼졌으나, 장제스는 엄연히 일본이 도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발이 일어나지 않게 주의하라는 상식적인 내용을 지시했을 뿐 침략이 있음에도 생까라는 뜻이 아니었을뿐더러, 지시를 내린 날짜도 만주사변 이전이므로 만주사변과는 무관했다. 자세한 것은 만주사변 문서 참조.

8월 17일 하야시 총영사와 장식의 봉천성 주석 사이의 교섭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야시는 나카무라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소르본 사건[5]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라면서 최단 기간 내에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중국 측을 압박했다. 교섭의 시작과 동시에 엠바고가 풀리면서 8월 17일 만주일보 등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흥안, 도남을 유력 중이던[6] 육군 대위 나카무라 신타로 일행은 6월 27일 소악공부 식당에서 식사 중, 동북 변방군 흥안 둔간대 제3단 병사에게 체포되었다. 나카무라는 여권을 제시하고 보호를 요청했으나 군사 간첩의 혐의를 받아 그대로 구금되어 제3단 단장 대리 관옥형 등 장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되었다. 이 뒤 관옥형은 증거인멸을 꾀하기 위해 7월 1일에 가까운 산 속에서 시체를 불태우고 전원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러나 친일파 중국인이 밀고하여 사건이 표면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만몽에 대한 침탈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중국 측에 엄중 항의하여 배상, 처벌,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여론이 조성되어 관동군에게 유리해졌다. 8월 18일 전만 일본인 자주동맹본부 등의 단체들은 수상, 외상, 육상, 제국회의 의장에게 만주를 공격하는 방도를 요구하였고 8월 27일 나카무라 대위의 위령제를 지냈다. 이와 더불어 곳곳에서 정부의 '유약한 외교'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편 시데하라 외무상은 군 중앙과 관동군의 주장과는 달리 공동 조사를 실시하면 나카무라가 군사정찰을 실시한 것이 폭로될까봐 두려워하여 8월 24일, 일본 측에 유리하다고 인정되는 이유가 있는 특별 공동조사를 제외하곤 중국 측의 공동조사 제안을 거절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군부는 교섭에 참가하진 않았으나 장식의에게 장교를 파견하여 성의가 없다면 무력행사를 각오하고 있다고 중국 측을 위협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군 중앙이 관동군을 지지했다기보다는 군 중앙에 관동군의 무력 방침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봄이 적절할 듯하다.

여기에 육군도 험악해지는 사회 분위기에 연동하여 차차 강경해졌고 8월 24일 중국 측이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조남을 보병 1개 대대로 공격해 점령한다는 방침을 송부했다. 이때 육군 중앙은 본건을 가지고 만몽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계기로 삼으려는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조남에 대한 보증적 점령의 단행은 중국 측의 실력 저항에 직면하게 됨으로 만몽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동기가 초래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를 위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단 말을 덧붙였는데 이는 육군 중앙에서도 관동군에 기우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외무성은 '근본적 해결'이란 의미심장한 문구에 '무슨 일인가?'라고 의문을 표시하였으나 명확한 대응을 보여주진 않았다.

한편 하야시 총영사는 중국과 교섭을 지속했다. 8월 19일 봉천에서 파견한 조사원 2명이 실시한 1차 조사가 성과 없이 끝나자 9월 4일 하야시는 장식의 주석에게 중국 측이 공정한 처리를 회피하면 특별한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고, 조사원 2명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대신에 관옥형 단장 대리를 봉천에서 심문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날 시데하라 외무상도 강경한 태도로 교섭하라 권고하는 훈령을 내렸고 "만일 상대편에서 사실을 부정할 경우에 즉시 우리 측의 조사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하등 논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왕 등의 증인과 기타 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강경하게 주장하도록."이라고 하였다. 문제가 있다며 일본 측은 그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입증할 증거나 증인이 없었다.(...) 하야시 총영사는 9월 8일 시데하라 외상에게 "나카무라 사건에 관해서 오늘날까지 입수한 증거는 요컨대 사건의 직접 관계자가 아닌 제삼자로부터 들은 정도에 불과하다. 이것이 사실의 인식에는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증거로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현재 더욱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고 있으며 특히 증인의 포섭에 노력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3.4. 일본 측의 요구

역시 같은 날 시데하라 외상은 동북 측에 제출할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으며 이 요구 조건은 현지 군부가 협력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되었다고 인정될 때라는 조건을 붙였다. 이는 요구 조건을 관철하기 위해 군사적 압력을 동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데하라 외상이 제기한 조건에는 장식의 등이 총영사와 군사령관을 방문하여 가장 엄숙한 방법으로 사죄할 것, 나카무라 건으로 7만 3180엔, 이스기 건으로 2만 7262엔, 도합 10만 442엔을 배상하고 둔간대 단장 대리 관옥형 중좌 이하 직접 책임자를 중국 측 법령에서 정한 가장 엄격한 처벌을 할 것, 일본인의 출입 금지령을 해제하고 동방면에서 일본인이 여행할 경우 중국 측이 완전한 보호를 제공하고 특히 필요하다면 호위병을 붙여준다고 약속할 것 등 내용이 있었다.

만약 필요한 경우에 호위병을 대동시키는 것을 중국이 거부한다면 일본이 이에 상응할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을 알려 중국 측을 설득시키라고 하였다. 이러한 조치에는 당연하지만 만몽에서 일본의 권익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일본 측은 4번째 항에 대해서는 호위병 문제가 오히려 일본인의 자유로운 여행을 침해할 소지가 된다고 여겨 실제적으로 재량에 맡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완벽한 보호의 약속'으로 수정하고 호위병 부분은 삭제했다.

3.5. 장쉐량의 대응

8월 19일 장쉐량의 일본인 군사고문이 일본인과 군부의 분노가 심하여 사태의 악화가 우려된다는 경고를 전했다. 장쉐량은 "이같은 감정의 오해로 인해 사건이 빈발한 것은 진실로 유감이다. 이에 대해 충분히 단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나 자신도 아직 하등의 보고를 받지 못하였으나 어떠한 보고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한다."라고 회답했다. 장쉐량은 이 사건이 일본의 만몽 정책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여 8월 24일 일본인 고문들에게 "동북에 있어 일중 양국의 현상에 비추어 이 시기에 속히 미해결된 여러 현안을 해결할 급무를 통감함으로써 아래에 기록된 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동북외교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현재 일본측이 동북에 대한 교섭 책임자를 어려워하고 있는 현상을 고쳐 장래 모든 교섭은 해당 기관으로 하여금 신중히 심의하여 일본과의 교섭에 응해야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고 시데하라 외무상이 요구하는 교섭에 응했다.

하지만 9월에 이르러 군부의 태도, 여론, 시국이 나날이 악화됨으로 장쉐량은 일본과의 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탕이화를 일본에 파견하여 시데하라 외상을 방문하게 했으며 고의로 연기할 의사가 없다고 설명했으나 시데하라는 장쉐량의 태도가 '지극히 짜임새'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합의가 연기되었으며 결과가 불만스러운 점에 대해 일본의 여론이 커다란 자극을 받게 될 것을 신중히 고려하여야 한다고 회답했다. 탕이화는 미나미 지로 육군상과도 회담한 후 귀국하여 9월 8일 하야시 총영사와도 회담하여 쌍방이 함께 양보적인 정신 아래 평화적으로 해결할 뜻을 표명했다. 장쉐량은 9월 9일 고문을 일본에 파견해 미나미 지로 육군상과 가나야 한조 육군참모총장과 의향을 전하게 했다. 또한 여러 심복들에게 만약의 경우에 절대 부저항주의를 채택할 것을 지시하는 훈령을 내렸다.

한편 동북 외교연구위원회는 9월 6일 법관과 헌병사령 등을 파견하여 2차 조사에 착수,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6월 26일 소악공부에 도착한 나카무라 일행은 흥안 둔간대 제3단의 연병장 부근을 지나갔다. 거동이 수상하므로 제3단 연단 왕병의가 여권을 조사한 바, 중국의 통행 허가증을 소지하지도 않았고 해명도 횡설수설이었다. 그래서 단부로 연행하여 심문하니 그들은 유력 도중 비적에게 쫓기어 여기까지 도망해왔다고 한다. 단부는 일본이 다시 피해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머물게 한 후 지시를 기다려 출경까지 보호하기로 했다. 군대의 식사는 허술하기 때문에 읍의 식당에서 네차례 식사를 하러 가서 장교가 배식했다. 27일 오후까지는 완전히 귀빈 대접이었다. 단장인 조관오는 심양에 가고 부재 중이었는데 그날 밤 단장 대리 관옥형이 출장지에서 귀단, 비로소 간첩 혐의를 씌워 나카무라 등의 신체검사를 명령했다.

그랬더니 바지 속에서 일본어와 러시아어로 된 군용지도 2매와 일기 2권 그리고 필기록 3매, 은표 190원과 금표 2원이 발견되었다. 일기에는 장차 군사상에 응용하기 위한 사항이 가득 기입되어 있었다. 그들이 군사탐정인 것은 틀림없었다. 둔간 공서의 지시로 정중하게 다루면서도 감시를 강화했다. 그러나 나카무라 등은 그날 밤 파수병이 잠들어버린 틈에 단부 뒷문으로 도주했다 파수병들이 즉시 알아채고 뒤를 쫓았다. 얼마가 지나 북쪽 산에서 한바탕 총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해졌다. 파수병들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사무장인 곽덕창이 병사를 이끌고 수색하러 갔다. 그들은 일본인의 시체를 달빛 아래에서 발견했다. 파수병들도 외국인을 사살한 일로 죄를 문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대로 도망해버렸던 것이다. 관장 대리 관옥형도 역시 이 사건이 국제문제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증거인멸을 명령, 시체 및 소지품 그리고 화물 운반용 말을 소각시켰다. 지도, 일기, 필기록은 보존했다. 더욱이 상관에게는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사병들에게는 사건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병사들의 함구 때문에 요령성 주석 장식의가 실시한 1차 조사에는 드러나지 못하고 2차 조사에서야 드러났다. 이 때문에 중국 측은 그전까진 비적의 소행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장쉐량은 시데하라 외상의 주장대로 외교교섭에 초점을 맞추어 외교교섭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일본측에 전달했고 베이핑의 여론도 외교교섭에 희망을 걸었다. 지나치게 외교에 치중하여 부저항주의로 나갔던 장쉐량의 태도에 만주는 불과 며칠 후 만주사변에서 1만 5천에 불과한 관동군에게 극도로 쉽게 함락당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3.6. 열강의 반응

일본은 열강을 포섭하는 것도 잊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9월 10일 시데하라 외상은 주영, 주미대사에게 나카무라가 북만지방의 여행중 살해되었다며 나카무라의 간첩행위를 숨기고 자신들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으며 중국이 성의 없는 행동을 보인다고 비난했다.

제국주의를 앞세워 세계 곳곳을 점령해 경영하고 있던 열강들이니만큼 당연히 중화민국이 아닌 일본을 지지, 응원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타임지는 9월 9일자 사설을 통해 일본군 제9사단이 ' 러일전쟁 비용 24억 엔, 투자 17억 엔, 동포의 귀한 선혈 20만'이라고 적힌 삐라 10만 매를 뿌리며 시위한 사건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훈련이 엄격한 군대의 하나인 일본군의 장교가 이같이 시위를 벌인 일은 바로 본건 범죄에 대한 격분의 표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위 격분의 이면에는 중국 국민운동이 만주에 있어 일본의 중대한 권익을 무시하고 조만간 이 방면에서 일본의 조약상의 권리가 유린될 수밖에 없다라는 우려와 두려움의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지금 중국 중앙당국의 외국인 보호 능력이 없다는 것을 더더욱 분명하게 나타낸다. 나카무라 사건에 관해 헛되이 중국측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에 신중할 필요가 있으며 더욱이 유력한 경고가 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베이핑 주재 영국공사관 무관도 "단호히 보장점령의 행동이 결의될 것을 바란다."라고 일본 공사관 무관에게 진언했고 다른 나라 공사관 무관들도 9월 10일의 각국 무관연회에서 "함께 군의 명예유지에 대한 일본의 행동은 비난의 여지가 없다."라고 일본을 지지했다. 당연히 9월 11일 국제연맹에 제기된 나카무라 사건은 열강들의 철저한 무시를 당했고 오로지 소련만이 중국을 지지했다. 소련의 이즈베스티야 지는 9월 9일 단평을 통해 "나카무라 대위 살해 사건은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만주에 진출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본 사건은 다른 경우라면 중대하게 취급되지 않았겠지만 이 시기에는 마침 일본이 만주진출 등의 계획을 갖고 만주를 점령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일본인의 일부는 전 만주를 점령해야 한다고 말하고 일부는 만철의 경쟁선을 탈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이 만주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일본의 침략욕구가 더욱 왕성해지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보도함으로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을 정확히 분석했다.

4. 결과

9월1 6일, 탕이화는 "장 부사령관은 일본 측의 재만 조선인 문제 처리방법에 관해서도 살펴보고 만주에서 일중간 현안, 500여건을 정리하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의향으로, 난징정부의 대표를 참가시킨 하나의 위원회를 조직하고자 하였는데 위에 대해 난징정부에서도 대체로 동의하였다."라고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에 타진하였다. 이날 왕정팅 외교부장이 중국측이 나카무라 사건에 대해 반드시 공평히 처리할 것을 언명하고 시게미츠 마모루 공사는 실제적인 수단으로 가능한한 신속히 우의적 해결에 도달하도록 노력 중이라고 주장하며 일본 측의 군대 동원 계획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불과 다음날인 9월 18일 관동군이 폭주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킴으로 일제의 십여 년에 걸친 만주 지배가 시작되고 일본의 대륙침략이 가속화되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나카무라 대위의 요청에 따라 봉천 총영사가 5월 5일 여권을 발급해주었고 같은 달 14일 하얼빈 총영사도 별도로 여권을 주었다. 봉천 여권으로는 조남 지역을 여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제한이 없는 하얼빈 여권을 별도로 받은 것이었다. [2] 봉천의 하야시 총영사는 여권 수속 와중에 나카무라 대위의 신분을 교원으로 세탁해주었으며 하얼빈 총영사도 중국 측에 보낸 공문과 허가증에 나카무라의 직업을 생략하고 이름만 기재하였다. [3] 보병 1개 소대로 정해져 있었다. [4] 나중에 이 전보가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만주사변 때 부저항정책을 취하라고 지시했다는 떡밥을 낳게 되지만 정작 만주사변 시점에서 장제스는 부저항을 지시하지 않았다.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사건 때 사태를 확대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 지금껏 침소봉대된 것. [5] 쑤저우에서 영국군 병사가 살해된 사건. [6] 8월 17일 하야시 총영사는 이를 경제조사를 위한 여행이라고 봉천성 주석 장식의에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