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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4 05:53:23

류탸오후 사건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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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제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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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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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북대영 공격3.2. 봉천성 공격
4. 참고문헌5. 관련 문서

1. 개요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급진파 이시와라 간지 등이 봉천성 인근 류타오후에서 철로를 폭파시키는 자작극을 행한 다음에 이를 중국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워 동북군이 주둔한 북대영을 공격한 사건을 말한다. 만주사변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서, 일본군은 이 사건을 구실로 만주를 공격, 1932년까지 완전히 병탄하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한다.

한국식 독음으로 유조호 사건으로 불리며 북대영을 공격했기 때문에 북대영 사건으로도 불린다.

2. 배경

3. 전개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 봉천성 북쪽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의 류타오후[1]에 위치한 남만주철도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대단치 않은 것으로 겨우 침목 3개를 부서뜨리고 레일을 약간 구부리는 정도에 그쳤으며 불과 20분 후에 남만주철도를 달리던 급행열차가 시속 80킬로미터로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다. 만약 이것이 단순한 사고였다면 어느 역사책에도 기록이 남지 않을 사소한 일이었으나 이는 관동군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온 자작극이었다.

이 작업에는 봉천 독립수비대 중대장 가와시마 대위, 오노 대위, 봉천 29연대의 고지마 소좌, 대대장 나구라 소좌, 봉천 헌병대 미타니 소좌 등이 참여했으며 아마카스 사건의 주역인 예비역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보조작업을 맡았다.

3.1. 북대영 공격

류타오후에서 동북쪽으로 800미터 떨어진 남만주철도 성로 동쪽에는 봉천을 수비하기 위한 동북군이 주둔하는 북대영이 있었다. 북대영은 장쉐량 휘하 왕이철의 동북육군 독립7여단 소속 619, 620, 621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미한 폭발 규모 때문에 단순히 지뢰가 실수로 터진 일 정도로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폭발음이 들리고 불과 5분이 지나지 않아 완전무장한 200명의 일본군이 북대영의 서쪽 방벽을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10일 전에 절대로 일본군을 자극해선 안된다는 장쉐량의 명령을 받은 터라서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오후 11시, 일본군 포병대가 621단 1영에 포격을 가했고 11시 30분에 일본군 증원부대가 서남쪽 방향으로 돌격해왔다. 마침내 장사현의 619단과 하립중의 621단에 철수명령이 떨어져 두 부대는 퇴각했으나 왕철한이 지휘하는 620단은 퇴각명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북대영 동쪽 병사를 사수하면서 7여단장 왕이철에게 응전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자정이 되어서야 왕이철에게 전화가 왔으나 저항하지 말고 교섭을 기다리라는 지시 뿐이었다. 9월 19일 새벽 1시 40분, 일본군 200명이 620단에게 접근하여 공격을 감행했고 이때 동북변방군 참모장 영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영진은 왕철한에게 절대로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왕철한은 크게 항의했다.
"적은 우리 국토를 침략했고 우리 병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항해선 안된다는 말은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국가도 국민도 파멸당하고 맙니다. 장병들은 모두 분개하고 있으며 전원이 북대영과 운명을 함께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적은 포격까지 하고 있는데 우리는 총을 들 수도 없단 말입니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하지만 영진은 막무가내로 총탄을 무기고에 집어넣으라고 지시하면서 왜 아직도 철수하지 않았냐고 따졌다. 왕철한이 철수명령을 받은 바가 없다고 하자 영진은 구두로 철수명령을 내리며 철수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은 왕철한이 져야 한다고 위협했다. 결국 왕철한은 620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렸으나 일본군 400명이 620단 2영을 공격하는 바람에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중국군은 일본군 40여명을 사상시켰으나 5연장 진현서가 부상당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9월 19일 새벽 5시에 북대영에서 철수했다. 이로서 북대영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점령되었다.

중국군은 335명의 사상자와 485명의 행방불명자가 발생했으며 일본은 12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자체 결과를 발표했다.

3.2. 봉천성 공격

북대영에 대한 공격이 가해지던 와중에는 봉천에서 성정부 주석 짱스이, 동북변방군 참모장 영진 등이 만보산 사건, 나카무라 사건의 처리를 놓고 일본 측과 교섭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교섭 중에 갑자기 일본군의 포격이 발생하자 짱스이는 일본의 봉천 총영사관에 사람을 보내 이유를 물었다. 총영사관은 자신들도 사정을 알 수 없다고 대답했고 이에 짱스이는 5분 이내로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만약 회답하지 않으면 심양 주재 각국 영사관에 외국인들을 보호할 수 없다고 통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5분 후에 일본 측은 제지시키는 절차를 밟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알려왔으나 이후 1시간이 지나도록 일본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오후 11시, 일본군은 봉천성 동쪽 병공창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성 서쪽의 상업 지구를 공격, 대서변문(大西邊門)[2]과 소서변문(小西邊門)의 경찰서를 점령하고 다수의 중국인 경찰을 살해했다. 짱스이는 관동군 총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전화하여 공격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일본은 군관 회의 중이며 나중에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얼마 후에 총영사관 측의 회답이 돌아왔으나 황당한 내용이었다.
군대가 이미 출동했으므로 제지시킨다는 것은 어렵다. 일본의 총영사에게는 군의 행동을 제지할 권한이 없다. 당국에 요청할 수 있을 뿐이다. 봉천성 안에까지 진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허나 일본의 회답과 달리 19일 오전 2시, 일본군이 봉천성의 모든 성문을 점령하였고 중국 측은 이 사실을 각국 영사에게 통보하였다. 오후 4시, 일본군은 성벽 위에서 성내로 기관총을 발사했고 장갑차를 앞세워 서남쪽으로 침입하였다. 결국 오전 6시 즈음에 봉천성 전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날이 밝자 짱스이는 일본 총영사관에 재차 항의했으나 일본 측은 혼조 사령관이 봉천에 도착한 후에야 입장을 밝히겠다며 중국 측의 항의를 무시했다.

오전 11시, 혼조 시게루가 뤼순에서 여러 막료와 보병 30연대를 이끌고 봉천에 도착했으나 해결은 커녕 봉천의 군정당국과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붙였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30분,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의 한 부대가 봉천 서북쪽 북대영 부근에서 우리 남만주철도를 촉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했다. 적대행동을 개시한 것은 그들이며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장본인이다. 원래 우리 남만주철도는 지난해, 일본 제국이 조약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획득했고, 우리 소유로 지속시킨 것으로서 다른 나라가 여기에 손을 댈 수는 없다. 중화민국 동북군은 감히 이것을 침범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일본 제국 군대에게 발포까지 했다. 이번 사건은 동북군이 먼저 우리 군에 도전해온 것이 분명했다. 본관은 철도보호의 중책을 지고 있는 바, 그 기득의 권익을 지키고, 제국 군대의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4. 참고문헌

5. 관련 문서


[1] 상당히 오랫동안 류타오후 인근의 류탸오거우(柳條溝, 유조구)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 정설이었으나 재조사 결과 류타오후에서 터진 것으로 밝혀졌다. [2] 여담으로 삼학사가 처형당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