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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21:51:57

대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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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長征
Long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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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의 이동 경로
파일:대장정.jpg
공산당원들에게 연설하는 마오쩌둥

1. 개요2. 배경
2.1. 국공결렬과 분공조치2.2. 지하투쟁과 소비에트의 건설2.3. 제5차 초공작전
3. 전개
3.1. 홍군의 규모와 구성3.2. 대장정의 시작3.3. 쭌이 회의(준의 회의)3.4. 장궈타오와의 합류3.5. 홍군 분열3.6. 장궈타오의 운명
4. 의의5. 기타6. 매체7. 참여한 인물8. 참고문헌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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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4년 10월, 국민혁명군 제5차 초공작전을 견디지 못한 중국공산당이 기존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남부의 장시성을 떠나 약 1년에 걸쳐 중국 서북부 산시성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사건.

역사 이래 인류가 단일한 군사상 목적으로 행한 기동으로는 최대 기록이다. 줄여서 '장정(長征)', '서쪽으로 천도한다'는 뜻으로 '대서천( 西)'으로도 부른다. 일반명사로 곧잘 쓰이는 '대장정'의 의미와 구분하기 위해 홍군의 대장정(紅軍大長征),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이라는 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국민당에서는 이리저리 도망간다는 뜻의 중국어인 유찬(流竄, liúcuàn), 대유찬(大流竄), 또는 같은 의미의 중국 사자성어 동분서찬(東奔西竄)에서 따온 서찬(西竄, xīcuàn)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1]

이때 중국공산당은 25,000리(약 9,600km)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를 도보와 우마로만 이동하였다.

10만에 육박했던 출발 인원 중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포로로 잡힌 인원은 약 3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행군하다 병들거나 강행군에 낙오한 병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는 더 많은 수가 중도에 탈락했고 처음 시작할 때 모인 사람 중에 끝까지 완주한 수효는 3,000명 아래다. 장정 도중 계속해서 병력을 보충했기에 장정을 마무리할 때 6,000명 정도의 규모는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이며 공산당은 자신들의 정통성이 이곳에서 나온다고 자부한다. 대장정을 기점으로 보구, 낙보 등 공산당을 영도하던 상하이 임시 당중앙이 완전히 몰락하고 마오쩌둥의 가장 유력한 군사적 경쟁자인 장궈타오 국부군에게 토벌당하여 마오쩌둥이 권좌에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공산당은 핵심 지도부가 국민당을 피해 탈출함으로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고 국공내전이후 중국 대륙을 장악하였다.

2016년 10월 22일에 대장정 80주년을 맞이하였다. #

2. 배경

2.1. 국공결렬과 분공조치

불과 수백 명밖에 되지 않는 군소 정당인 중국공산당은 1차 국공합작 이후 당내합작을 추구하여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 국민혁명에 투신하였다. 하지만 미하일 보로딘의 국민당의 레닌주의 노선 기반 개조 이후로 공산당은 자신들의 규모에 맞지 않는 강력한 발언권과 지분을 차지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었고 강력한 행동력으로 국민당을 서서히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쑨원이 살아있을 때부터 혁명원로들과 국민당 보수파들은 이러한 현상에 불만을 품고 공산당의 궁극적 목적이 국민당을 장악하여 중국을 적화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지만 쑨원이 개인적 카리스마와 명망으로 이런 불만을 억누르며 친소용공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1925년 국민당 좌우파 모두의 구심점으로 존재하던 쑨원이 죽고나자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쑨원이 죽고나서 불과 몇달 후, 국민당 좌파의 거두인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괴한의 총격으로 노상에서 암살되자 국민당 좌파가 장악한 국민당 중앙은 우파의 거두인 후한민의 측근들이 이 사건에 관여했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후한민을 소련으로 강제 외유를 보냈고, 혁명원로 린썬, 쩌우루 등도 국민혁명을 화북으로 전파하라는 허울좋은 임무를 주어 화북으로 사실상 추방하였다. 이에 격노한 원로들이 베이징에서 국공합작의 종식을 선언하며 독자적인 상하이 당중앙을 창설하는데 이들이 바로 서산회의파다.[2]

이러한 정통 우파의 주장에 이어서 공산당이 주도한 지나치게 과격한 토지개혁과 민중봉기에 반감을 가지게 된 중산층, 향신 출신의 국민당원들과 중산함 사건 이후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공산당의 공세에 대응하려던 장제스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의 신우파 세력이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고 공산당도 장제스와 광서파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 신우파 세력을 경계했지만 초기에 지나치게 장제스를 핍박하다가 중산함 사건이라는 역풍을 맞은 이후 북벌이라는 공동 목표에 합작하는 것으로 노선을 순화했다. 하지만 양당의 갈등은 수면 아래에서 끓고 있었고 공산당은 장제스를 견제하려는 국민당 좌파와 장제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던 후난 군벌 탕성즈 등과 연합하여 장제스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계속하였다. 거기에 국민당과 열강이 무력으로 충돌한 난징사건이 발생함으로 열강과의 전면전이 발생할지도 모르며 이것이 공산당의 음모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급진화, 적화되어가는 국민당에 대한 외국의 우려, 공산당에 대한 지식인과 대중의 불안감, 장제스의 정치적 성장을 견제하려는 공산당의 공세 등이 겹치면서 결국 우파 세력은 더 이상 국공합작을 지속할 수 없다고 여기고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중국공산당과 노동자, 농민 조직을 무력으로 섬멸하였다.[3]

대개 여기서 국공합작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왕징웨이가 영도하는 우한 국민정부는 국공합작을 지속하기로 천명했기 때문에 국공합작은 잠시 더 이어졌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포섭한 펑위샹은 정작 자신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왕징웨이에게는 공산당을 쫓아낼 것을 요구했고 코민테른과 스탈린도 갑자기 공산당 자체 무력을 확보하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코민테른은 멍청하게도 이 지령을 왕징웨이에게 통보하면서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으면 맹우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가뜩이나 수세에 몰렸던 왕징웨이는 공산당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고 난징 국민정부와 합친다. 이를 영한합작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제1차 국공합작은 파탄나고, 중국공산당은 기존에 상하이를 위시해 도시 노동자 사이에서 갖던 세력을 거의 상실하고 전체 당원의 80%가 지방 군벌 삼합회에 무자비하게 살해되거나 체포 후 투옥됐다.

2.2. 지하투쟁과 소비에트의 건설

국공분열 이후 중국공산당은 천두슈의 지휘 아래에 난창 폭동 등을 감행하면서 노동자들의 힘을 빌어 소비에트를 건설하려 했지만 국민당에게 번번이 진압될 따름이었다. 이 때문에 천두슈가 물러나고 취추바이( 구추백) 노선이 등장하였으나 역시나 폭동에 매달리는 정통 노선을 버리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 때문에 취추바이도 물러나고 총서기 샹중파(향충발), 조직부장 저우언라이, 선전부장 리리싼(이립삼)을 중심으로 하는 새 노선이 등장하여 당의 역량 확보에 주력했으나 대공황에 고무된 리리싼이 독단적으로 1930년 6월 여러차례 폭동과 무장봉기를 지시했다가 역시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때문에 코민테른 고문 파벨 미프가 개입하여 리리싼, 취추바이 등을 숙청하면서 중국공산당을 정리했고 이로 인해 샹중파가 물러나고 진소우가 총서기에 올랐으며 왕밍이 당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공산당은 무모한 무장봉기를 포기하고 지하활동과 지방 소비에트 건설에 주력했다.

이때 두각을 드러낸 것이 정강산에서 시작하여 장시성 전체에 이르는 거대한 소비에트 지구를 확보한 마오쩌둥 주더였다. 여기서부터 홍군이 시작되었고 이 외에 독안룡 류보청, 산적 출신 허룽[4]을 위시해 이후 홍군의 주요한 지휘관들도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하였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당중앙에서 지시하는 폭동이 무모한 것이니 실패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비정통 혁명 이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당중앙이 내세우던 연속혁명론, 무장봉기론은 계속 실패했지만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지구는 날이 갈수록 확장되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장시성 소비에트는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되기에 이르렀으며, 1931년 11월에는 인구 250만 명의 장시성 루이진(瑞金) 지역에서 정부 주석 마오쩌둥, 부주석 장궈타오, 군사위원회 주석 주더를 선출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 정부 성립을 선언한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장시 성, 푸젠 성을 거점으로 이외에도 후난성, 광시성, 안휘성을 위시해 양쯔강 이남 주요 지역에 소비에트 특구를 수립하고 홍군을 양성하여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루이진(瑞金)을 수도로 해서 각지의 해방구를 모두 합치면 그 인구가 1,000만 명 이상이었다.

2.3. 제5차 초공작전

국민정부는 일찍이 이런 소비에트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으나 홍군을 단순히 비적떼로 얕잡아보아 지방군을 중심으로 한 보잘것없는 공세를 초기에 취했으며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공산당 스파이들이 정보를 빼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병력을 늘리고 장제스가 친정하는 등 공세의 강도를 높여갔으나 지방군의 무능과 태업, 농촌을 확고히 장악한 상태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연한 게릴라 전을 펼치는 공산당의 대응에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일부 효과를 본 공세에서도 만주사변, 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 등의 이변이 발생하면서 국민당은 공산당의 완전 섬멸이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공산당 내부에서도 여러 문제점은 발생했다. 만주사변으로 중단된 3차 초공작전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이 주장한 게릴라 전술도 외환이 아니었으면 소용없던 것이 아니었냐는 당중앙의 비판이 제기되었고 당중앙이 고수하던 공세작전이 실패한 이유는, 노선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마오쩌둥 등의 소극주의자들이 태업을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게릴라 노선은 상당한 영토와 인민대중을 일시적으로나마 국민당 손에 넘겨주어야 했는데 정식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이 출범된 이후까지 이 전략을 고수하는 것은 인민을 저버리는 일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거기에 국민당의 거세진 탄압으로 1931년 상하이 당중앙이 붕괴되어 상무위원 장궈타오, 저우언라이, 왕밍 등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저우언라이, 보구를 중심으로 하는 당중앙이 루이진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장시 소비에트에서 독립왕국처럼 군림하던 마오쩌둥은 명목상 주석이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상관인 인물들이 줄줄이 몰려옴에 따라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당중앙은 마오쩌둥이 노선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 주석으로 실각시키고 저우언라이를 총정치위원, 코민테른 요원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을 실질적으로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새로운 노선을 꾸렸다. 이들은 제4차 초공작전에서 국민혁명군의 광창 진입을 저지함에 따라 자신들의 노선이 옳다고 여겼으나 실질적으로 열하사변이 발생한 덕분에 불과했다.

한편 장제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모셔온 한스 폰 젝트를 위시한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으로 섣불리 진군하는 것을 자제하고 요처마다 콘크리트 토치카 진지를 건설하면서 야금야금 전진하면서 공산당의 밥줄이자 정보원 역할을 하던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주하게 하고 소금을 비롯한 필수 물자의 유통을 차단하는 전술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장시성 내부에만 3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는 등 보급망 혁신이 이루어졌고 홍군을 회유하기 위한 선전용 포로수용소도 지어졌다. 특히 소금의 차단으로 홍군은 소변을 졸여서 소금을 구하고 시체 속에 소금을 숨겨서 옮기는 등의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리게 이르렀다. 거기에 중화기와 공군까지 동반한 국민당의 토치카 전술은 게릴라전으로 물리치기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고 국민당은 몇 달에 걸쳐서 차례차례 홍군의 거점을 점령하면서 차례로 여러 소비에트들을 분쇄해나갔다. 중간에 복건사변이 발생하면서 잠시 국민당에 타격이 있었으나 복건사변이 종결된 후에는 오히려 토벌이 소극적이었던 복건 지역이 장제스의 손에 들어가면서 토벌은 더욱 거세졌다. 여기에 광동파, 광서파도 장제스가 복건을 박살내는 것을 보고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됨에 따라 홍군은 연일 거듭 참패하면서 각지에 있는 해방구가 무너지게 된다. 결국 1933년 장궈타오는 제4방면군을 이끌고 자신에 세운 어위완 소비에트를 탈출해 쓰촨 성 북부로 이동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며, 허룽의 제2방면군도 후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쓰촨 성으로 이동한다. 이제 양쯔강 이남의 해방구는 마오쩌둥과 주더가 지도하는 루이진과 그 주변 지역만 남게 된 것이다.

루이진 지역도 사정이 좋은 게 아니라 수개월에 걸친 토벌작전 때문에 크게 궁지에 몰려 있었고 34년 4월이면 수도 루이진의 관문인 광창에까지 국민당 토치카가 지어지고 있었다. 당중앙은 정면 공격으로 국민당으로부터 거점을 탈환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국민혁명군과 중국공산당의 무력 역량인 홍군이 정면으로 충돌한 1934년 10월, 공산당은 그야말로 궤멸 상태가 될 만큼 타격을 입었다. 콜 오브 듀티처럼 홍군 병사 두 사람당 소총 하나 정도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극도로 빈약하게 무장한 군대를 완전히 편성된 진지 앞으로 닥돌했으니 당연한 결과. 홍군은 그야말로 쓰러져갔고 공산당은 공격은커녕 근거지도 지킬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장제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것은 당연지사고 공산당 수뇌부도 현재 근거지를 고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자세한 것은 초공작전 문서에서 확인.

3. 전개

3.1. 홍군의 규모와 구성

루이진의 함락이 목전에 다가오자 1군단, 3군단, 5군단, 8군단, 9군단으로 구성된 제1방면군 8~10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병력의 수치에 대해서 언급해보자면, 인민해방군사에서는 병력 85,000명과 간부요원 15,000명, 도합 100,000명이 피난길에 올랐다고 쓰고 있고 장개석비록은 이 수치를 인용하되 중앙기관과 가족 5,000명이 포함된 100,000명이라고 한다. 서진영의 중국혁명사도 10만 명이라 쓰고 있다. 바르바라 바르누앙의 저우언라이 평전과 모택동 vs 장개석에서는 홍군 5개 군단과 공산당 중앙, 혁명군사위원회 및 직속부대 86,000명이 본대였다고 쓰고 있다.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중국근현대사 3권은 1방면군 주력 80,000명을 언급하고 있고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은 5개 군단 86,000명의 병력이라고 기록하며 여기에 마오쩌둥의 아내 허쯔전을 비롯하여 당 지도자들의 아내 30명과 간호사와 행정인원인 여성 20명 등 50명 가량의 여성들만이 참여를 허락받았다고 쓰고 있다. 오토 브라운은 전투원 57,000~61,000명이 포함된 81,000명 정도가 중앙방면군이었으며 소총 41,000~42,000정, 각종 기관총 1,000정을 갖추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기술에 따르면, 일부 중포를 동반했으나 가지고 다니는데 애로사항이 꽃피어 곧 포기했다고 한다.

홍군은 앞서 언급한 다섯개 군단과 야전종대(참모종대), 병참종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인원 4,000~5,000명, 전투원 2,000명을 보유한 제1종대에는 마오쩌둥을 포함한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위원들과 당과 정부의 요인들이 있었고 직속 호위병, 통신대대, 공병대대, 대공 포화중대의 호위를 받았다. 그리고 육군대학과 세개의 사관학교에서 선별된 간부후보생연대가 간부들을 호위했는데 보병 2개 대대와 특과 1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특과 1개 대대는 경박격포 6문, 중기관총 6정, 다수의 경기관총, 모젤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밖의 제1종대의 전투원들은 1,500정의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총인원 8,000~9,000명, 전투원 2,000명을 보유한 제2종대는 중앙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인민위원회 등에서 복무하는 다양한 복무원과 후방근무요원, 당과 기관의 각종 요원들, 허쯔전을 비롯한 의무대, 야전병원 등으로 구성된 병참기지부대였다. 여기에 군수품을 운반하기 위해 고용 혹은 징발한 농민들로 구성된 예비사단이 동행했다. 이들 예비사단은 선전지가 들어있는 보따리, 군자금인 멕시코 은화가 들어있는 상자, 무기제조설비, 인쇄기, 조폐설비 등을 운반했고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짐은 계속 줄어들 것이니 낙오, 전사하는 병사들을 대체할 인력으로 간주되었다. 각 보안경비부대에서 모은 혼성연대가 예비사단을 원호했다. 제2종대는 1,500정의 소총, 모젤총과 약간의 기관총이 있었다.

오토 브라운의 회고를 따르면, 각 부대에는 충분한 무전기와 야전전화를 비롯한 각종 통신수단이 있었으며 모든 병사들에게 한두개의 수류탄과 70~100발의 소총탄을 지급했으며 경기관총에게는 300~400발의 탄환을, 중기관총에게는 5~600발의 탄환을 지급했다고 쓰고 있다. 모든 인원은 2주 동안 먹을 수 있는 쌀과 소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토 브라운은 이를 들어 대장정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이었다고 공포상태에서의 도주라고 한 마오쩌둥의 주장을 반박했다.[5] 또한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비율이 3대 1이었다고 쓰고 있는데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기술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오토 브라운은 1군은 1사단, 2사단, 15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총 16,000명~18,000명 규모이고 전투원은 14,000~15,000정도고 소총 9,000~10,000정, 기관총 3~350정으로 무장했다고 쓰고 있다. 3군은 4사단, 5사단, 6사단으로 구성된 15,000명인데 전투원은 12,000~13,000명, 소총 9,000정, 기관총 300정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5군은 13사단, 34사단으로 이루어진 11,000~12,000명이며 그중 전투원이 10,000명, 소총 7,000정, 기관총 150정~200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8군은 신편된 부대인데 21독립사단과 23독립사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원은 1만명, 전투원은 8천명, 소총 6,000정, 기관총 100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9군은 3사단, 22사단으로 구성된 12,000명이며 전투원은 9,000~10,000명, 소총 7,000정과 기관총 150정을 가졌다고 한다.

이들 중앙홍군이 포위망을 뚫기 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주건평의 24사단 5,000명과 10여개 독립여단 병력을 합쳐 총 16,000명의 병력이 항영과 천이의 지휘 아래에 루이진을 지켰고 탄전린과 중병으로 와병 중이던 취추바이[6] 등 일부 고위 인사들도 잔류했다. 여기에 복건, 강서, 호남 지역의 지원병까지 합치면 중앙 소비에트에는 총 28,000~30,000명의 병력이 잔류했다. 이들은 정치기관, 간부, 저장식량을 산으로 옮기며 국민당에 대한 유격전을 준비하였고 훗날 신사군을 조직하게 된다.

3.2. 대장정의 시작

10월 10일 중앙 홍군은 일단 국민당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돌파 작전에 나선다는 방침을 확정하고 인원들을 집결시켰다. 10월 13일부터 전투 부대들이 야간을 틈타 집결 장소인 우도를 향해 철수 길에 올랐고 병기창, 피복창, 인쇄창, 의무 부대, 병참 부대 등은 10월 14일까지 루이진 인근의 관전에 모두 집결했다.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등의 총사령부 요인들도 이날 관전에 도착했다. 15일 홍군은 루이진을 완전히 떴다.

16일에 집결을 마친 홍군은 17일에 본격적인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1군단과 3군단이 선봉에 섰으며 5군단이 후미를, 8군단과 9군단은 좌우 각 면을 엄호했다. 주요 인사들이 소속된 종대는 이들 군단의 호위를 받았다. 홍군의 행렬은 수십 리에 달했으며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묘사한다.
"그들은 각자 5파운드의 쌀과 양쪽에 짐 보따리를 매달은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탄약이나 수류탄을 넣은 짐 바구니 안에는 석유통과 극히 아끼는 중요한 도구들이 들어 있었고, 모두들 담요와 누비이불이나 솜이 든 겨울 옷가지를 비롯해 면으로 만든 덧신, 바늘, 실 등으로 꾸린 배낭을 등짐처럼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처음에는 도보로 이동했으나 2킬로미터를 이동한 후에는 발에 물집이 잡혀서 들것을 탔고 저우언라이도 들것에 탔다. 담요 두 장, 홑이불 한 장, 셔츠 하나, 베개로 쓰기 위해 뭉쳐둔 겉옷 몇 개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핵을 앓고 있던 덩잉차오는 노약자와 병자 대오에 속해 있었다. 오토 브라운은 상당히 실의에 빠진 모습이었으며 보구는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다. 이를 본 1군단장 녜룽전(섭영진)이 조심하라고 그를 타일렀다. 그 정도로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이 시점까지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코민테른과 연락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다른 소비에트 지구와 연락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국민당의 토치카를 돌파하면 목표가 보일 것이라 생각하며 탈출 길에 오를 뿐이었다.[7] 홍군은 남서부의 신풍에서 국민당 토치카 지대를 돌파해 도강을 건너기로 결정했다. 바르바라 바르누앙의 "저우언라이 평전"과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중국 근현대사 3권"에 의하면, 용이한 돌파를 위해, 저우언라이는 광동 군벌 천지탕과 협상을 했다. 홍군이 지나가면서 그들에게 큰 손실을 끼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고 천지탕은 동의했다고 한다.

신풍 지구에는 광동군 제1군 제1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홍군은 중화기를 집중하여 10월 21일 이들을 격멸시키고 강서와 호남의 성경 지대로 뻗어나갔다. 11월 3일 여성의 2차 포위망이 돌파되었다. 홍군은 수많은 광서군과 광동군의 공세에 노출되었고 측면에 위협을 받은 1군은 방향 전환을 위해 1주일을 허비했으며 5군과 9군은 광동군과 중앙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마오쩌둥, 뤄푸, 왕가상 등은 이 점을 들어 보구, 저우언라이, 오토 브라운을 공격했다. 오토 브라운은 이를 정찰대의 실수라고 변명했다. 주더가 오토 브라운을 옹호하면서 내부 분열은 일단락되고 홍군은 3차 포위망으로 향했다.

낙오자와 도망자가 증가하는 상황이었지만 홍군은 11월 13일에는 의령에서 장제스의 중앙군이 따라붙기 전에 미약한 호남군이 수비하는 3차 포위선을 돌파했다. 국민당은 2차 포위선이 돌파되고 나서야 홍군이 탈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장제스는 11월 30일 허젠을 추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호남성 형양에 사령부를 설치했으며 귀주성 주석이자 귀주의 초공 책임자 왕가열과 광서의 초공 책임자 바이충시에게 홍군을 저지할 것을 지시했다. 투입된 병력은 총 15개 사단이었다. 하지만 바이충시의 광서군이 계림 방어를 위해 결국 철수해버리면서 홍군은 11월 말 광서성 계수에서 샹강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 중간에 바이충시가 도로 공격을 결정하고 국민당 전투기들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3,000명이 넘는 극심한 피해를 입고 대오가 반으로 찢어져 지금까지 힘들게 나르던 물자들 대다수를 손실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광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귀주로 향했다. 홍군은 원래 호남 서부로 올라가 2방면군과 합류할 생각이었지만 국민당의 방어가 단단했기 때문에 마오쩌둥이 귀주로 방향을 틀자고 제안했다. 12월 12일 후난 퉁다오에서 열린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의견을 지지했다.

귀주에 진입한 홍군은 1934년 12월 14일 산세가 험한 여평을 점령했다. 고참병들은 그럭저럭 버텨냈으나 신병과 예비 부대의 피해는 극심했다. 예비 사단은 75%까지 피해를 입었다. 이미 군세는 30,000명으로 격감한 후였다. 12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 위원회 정치국 임시 회의가 소집되었다. 일부는 2방면군과의 합류를 주장했고 일부는 4방면군과의 합류를, 일부는 운남으로 진입해 새 근거지를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오토 브라운은 귀주 동부로 이동하자고 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를 사지로 가는 일이니 사천과 접경지대이고 국민당의 군세가 약한 귀주 서부로 가야 한다고 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오토 브라운은 패배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회의 도중에 마오쩌둥, 뤄푸, 왕자샹이 보구에게 5차 초공 작전에 대항한 전투 결과를 토론하는 대회를 열 것을 요구했다. 회의를 주재하던 저우언라이도 이에 동조하자 보구는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홍군은 자신들이 귀주의 성도 귀양을 공격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다음에 국민 혁명군이 귀양 방어에 집중하는 사이에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 준의로 향했다.

12월 말 황평현을 점령한 린뱌오의 2사단에게 오강을 도하해 준의를 점령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홍군은 국민 혁명군의 강력한 저항을 돌파하고 1935년 1월 3일 오강을 도하하여 1월 7일 귀주에서 두 번째로 큰 상업 도시인 준의 ( 쭌이시)를 점령하고 2주간의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3.3. 쭌이 회의(준의 회의)

1935년 1월 9일 마오쩌둥과 보구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준의로 입성했다. 마오쩌둥, 뤄푸, 왕자샹 등은 검군여장 이샤오취안의 저택을 징발하고 짐을 푼 다음, 닭고기, 배추 등으로 배를 채우며 다가올 회의를 준비했다. 다급해진 보구는 녜룽전에게 지지를 호소했지만 녜룽전은 거부했다. 마오쩌둥은 지지자들을 포섭하며 일전을 기다렸고 1월 15일 새벽, 여평 회의에서의 합의대로 귀주 군구 사령관 바이후이장의 집 2층 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정치국 확대 회의, 소위 쭌이 회의가 개최되었다.

마오쩌둥, 왕자샹,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천윈, 주더, 보구, 뤄푸 등 8명의 정치국 위원과 덩파, 하극전 등 2명의 후보 위원, 리부춘(이부춘), 류보청, 린뱌오, 녜룽전, 펑더화이, 양상쿤, 이탁연 등 홍군 지도부, 홍성보 주필이며 중앙 비서장 덩샤오핑, 코민테른 요원 오토 브라운과 그의 통역관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8] 오토 브라운을 제외한 참석자들은 커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았고 늦게까지 회의가 지속될 때를 대비하여 램프를 준비했다.

쭌이 회의에선 장정 과정에서 군사상 실패 원인, 군사 지휘 상의 문제가 없었는지, 그리고 이핑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귀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장강을 건널 지를 논하였다. 회의 시작과 함께 보구가 5차 초공 작전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해 분석한 보고서를 낭독했다. 보구는 패배의 원인이 국민당의 압도적인 전력, 국민당 지배 구역 내부의 미약한 공산당 세력 등에 있다고 외부적 요인을 들었으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오토 브라운의 통역인 오수권은 보구의 보고가 인상을 주지 못했으며 책임 회피로 들렸다고 회고했다.

보구의 뒤를 이어 보고서를 발표한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지배 구역에 대한 정치 공작의 불충실성, 유격전 전개의 미약 등을 들며 패전의 책임을 느낀다고 자아비판을 하여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어 저우언라이는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비판했다. 바로 뒤이어 뤄푸가 마오쩌둥과 왕자샹을 대변하여 보구에 대해 비판을 퍼부었고 뤄푸의 발언이 끝나자 마오쩌둥이 치밀하게 준비해둔 원고를 바탕으로 한 시간에 걸쳐 발언을 진행했다.

이날 마오쩌둥은 루이진에서의 실패는 결코 우연이 아니며 루이진을 버린 것은 당의 잘못된 노선을 관철시킨 해당분자의 실책이 크고 이를 바로잡아야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임시 당 중앙과 오토 브라운을 맹비난했다. 그는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돌려 도망쳤으며 그들이 한 것은 유치한 전쟁놀이에 불과하다고 외쳤다. 오랫동안 비난을 퍼붓던 마오쩌둥은 그럼에도 홍군의 주력은 유지되고 있다고 낙관적인 어조로 전환하며 운남, 귀주, 사천에 새로운 소비에트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는 왕자샹이 역시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비판했고 발언 요구가 빗발쳐서 회의는 1월 17일까지 지속되었다. 주더, 펑더화이, 녜룽전, 린뱌오가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펑더화이는 전략상의 실패와 홍군의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류사오치도 좌경 모험주의 노선으로 정치 사업이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평소에도 오토 브라운의 전술이 멍청하고 우둔하다고 까던 린뱌오의 태도가 거칠었다. 이에 보구는 정치 노선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근거한 것으로 정확한 것이라고 반박했고 오토 브라운도 군사 전략에 어떠한 잘못이 없다고 맞섰다. 보구의 유일한 편이었던 카이펑도 마오쩌둥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잘 알지도 못한다고 비판하며 반박했다.
"당신의 전술 방식은 그리 현명한 것이 아니다. 그저 < 삼국지연의>와 < 손자병법>에 토대를 두었을 따름이다. 어떻게 그런 책에 의존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마오쩌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마오쩌둥은 삼국지연의만 읽었을 뿐 손자병법은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에 마오쩌둥은 카이펑에게 손자병법은 전체 몇 장이고, 첫 장에서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를 물었지만 마오쩌둥이 손자병법을 읽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비판했던 카이펑 역시 손자병법을 읽어본 적이 없어 대답할 수 없었다.[9]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하면서 완전히 마오쩌둥의 편에 섰다. 역시나 마오쩌둥 반대파였던 류보청도 이때 마오쩌둥의 편으로 갈아탔다.

오토 브라운은 말라리아에 걸려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문 옆에 앉아서 회의 내내 거의 발언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울 뿐이었으며 오수권의 불성실한 통역 때문에 추후에 토의 의사록이나 결의를 얻기 전까지는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그는 끝에 마오쩌둥이 말하는 중국 내전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1군과 약간의 시간을 보내게 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는 승인되었다. 보구는 신경질적인 미소를 짓고 험악한 눈초리로 참석자들을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는 끝장난 상태였다.

회의는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났고 뤄푸가 의촉을 받아 <국민당군의 제5차 초공 작전에 반대한 것에 대한 중공 중앙의 총결 결의>라는 초안을 작성했다. 뤄푸는 나름 절충안을 내놓았는데 총노선은 옳았으나 5차 초공 작전과 장정에서 군사 노선에 오류가 있었고 이 책임은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결의에서 보구의 보고서는 근본적으로 부정확하다고 부정되었고 중앙 소비에트 지구가 공격받은 이유는 군사 지휘와 전술 전략상의 과오 때문에라고 결론지어졌다. 이 결의안은 그대로 채택되었다. 오토 브라운은 이 결의가 서류로 확정되지 않고 투표 형식도 없었으나 대다수의 승인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정치국 회의가 열렸고 마오쩌둥은 정치국 상무 위원으로 임명되고[10] 뤄푸, 왕자샹이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했으며 저우언라이는 완전히 마오쩌둥 그룹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의 조직 인선에 대하여 기록들이 상당히 엇갈리는데, 가령 총서기 보구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기록이 일치하지만 그 시기에 관하여는 기록마다 편차를 보이며 뤄푸의 총정치국 주임 임명, 저우언라이의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임명에 대해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하지만 쭌이 회의에 이은 조직 인선에서 마오쩌둥이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직 인선이 끝나자 마오쩌둥은 임신 상태였던 허쯔전에게 "모든 것이 잘되었소. 이제 나도 말할 권리를 갖게 되었지."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오쩌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네 어머니가 아주 오랫동안 날 기다렸단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자 앉을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지. 처음에는 짐짓 아닌 척 속일 생각이었는데 너무 기뻤어. 사람이 기쁘거나 행복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거든. 나는 뒷짐을 지고 방안을 어슬렁거리면서 천천히 말했지.
'사람들이 나 같은 부처도 아직 쓸 만하다고 여겼던 모양이야. 그랬으니 나를 환한 곳으로 끄집어내어 중앙 위원회 정치국 상임 위원으로 앉혔겠지. 이는 그들이 아직까지 라오마오를 존경하고, 자신들에게 뭔가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지.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그래 자격이 없다고! 그들이 나를 중앙 상임 위원으로 선임한 것은 그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확실히 나는 겸손하지 못했어. 국가의 운명이 위급한 상황에 있을 때는 모든 일반 농민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만 해!'
네 어머니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며 귀를 기울였단다. 그날 저녁은 정말 행복했지."
마오쩌둥이 허쯔전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리민에게 설명한 상황.

2월이 되자 정치국원 겸 중앙 위원회 서기를 유지했던 보구에게 뤄푸가 상무 위원회 회의에서 천윈,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총서기 자리를 내줄 것을 요구했다. 오토 브라운의 설명에 따르면 쭌이 회의에서 사실상 총서기 자리를 잃었던 보구는 항복하고 총서기 자리를 뤄푸에게 넘겨주었다. 3월 4일 전적 사령부가 설치되어 주더가 사령관에, 마오쩌둥이 전적 정치 위원에 임명되었다. 주더는 중앙 홍군 총사령관에 유임되었고 저우언라이도 총정치 위원으로 유임되었으나 3월 5일 전투 준비가 완료된 부대는 전적 사령부 소속으로 전환되면서 마오쩌둥이 다시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군은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 쭌이를 떠났다. 중국공산당과 혁명 사관에 충실한 사가들은 홍군이 대장정 와중에서도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지켰다고 미화하지만 이는 공산당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화에 불과하며 홍군의 철저한 약탈로 번성했던 쭌이는 홍군이 떠날 무렵에 폐허로 전락한 상태였다.

3.4. 장궈타오와의 합류

이 무렵 사천의 장궈타오와 후난의 허룽도 근거지를 버리고 서천에 나섰다. 1934년 11월 19일 호남성 상식을 출발한 홍2방면군은 귀주로 향했는데 총지휘는 허룽, 정치위원은 임필시, 정치부 주임은 감사기였다. 휘하에는 2군단과 6군단이 있었으며 2군단장은 허룽이 겸임했고 6군단장은 소극이 군단장, 왕진이 정치위원이었다. 이들 홍2방면군은 금사강을 건너 운남으로 진입한 후 감자에서 홍4방면군과 회합했다. 이들 홍2방면군도 고생 끝에 2만에 달하던 병력이 3천명으로 줄어 있었다. 홍4방면군은 4군, 9군, 30군, 31군, 33군 5개 군, 14개 사단, 41개 연대의 병력으로 병력이 70,000~80,000명에 달했다. 마오쩌둥과 홍1방면군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이 홍4방면군과의 합류였다.

홍군은 인회, 모태를 점령하여 사천성 경계로 접근했다. 국민당은 홍군은 제지하기 위해 사천군벌 류샹을 사천초비군 총사령관, 성정부주석, 보안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충칭에 중앙군을 주둔시켰다. 2월 1일 군사위원회 행영을 남창에서 무창으로 옮겨 장쉐량에게 지휘를 맡겼다. 홍군은 1월 23일 귀주성 토성에서 류샹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고 사천성 고린, 서영에서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다시 실패하여 2월 28일 준의까지 철수했다. 국민당의 공습은 계속되었고 허쯔전은 몸에 17개나 파편이 박혔다. 3월 5일 장제스는 반성록에서 토벌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고 기록했다.
"주더가 되돌아와 준의와 동재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섬서성 남부에서는 쉬샹첸(홍4방면군)을 격퇴해 한중은 무사하다. 사천의 남부와 북부의 공산군(홍2방면군)은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 있다. 능히 대처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으련만'

4월 말에는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탄이 강서성에서 유격전을 지휘하다가 정부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전사했다.사천으로의 북상을 포기한 1방면군은 귀주로 남하하였다. 3월 24일 장제스가 직접 청두, 궤이양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귀주군을 독려했으나 귀주군은 병사들의 아편중독과 지휘부의 무능이 심각하여 홍군을 거의 견제하지 못했고 홍군은 손쉽게 귀주군의 포위를 분쇄하고 운남으로 도주했다. 장제스는 크게 실망하여 5월 2일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주더, 마오쩌둥의 잔비를 용리와 반강에서 섬멸하지 못하고 호기를 놓쳐버린 것은 무선전보가 신중치 못해 정보가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주의해 적의 교활함을 읽는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홍군이 귀주에서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여 홍군이 떠난 귀주의 황폐함은 극에 달했고 이 때문에 장제스는 귀주의 농업세를 면제하고 성민에게 최소 반년의 휴가를 주어야 한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운남에 들어온 홍군은 세갈래로 나뉘어 진군했고 5월 9일 금사강을 도하하여 티베트로 진입했다. 티베트인들은 공산당에 매우 적대적이라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가하여 티베트에서 홍군은 매우 힘들게 행군했다. 5월 말에는 폭이 300m나 되는 대도하 (다두허)에 이르렀는데 대도하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찬데다가 강 양안이 높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건너기 매우 어려웠다.[11] 그리고 70년 전 태평천국의 생존자들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태평천국의 일파를 이끌던 석달개가 사천 지역을 장악하려다 실패하고 이 대도하 유역에서 몰살당했다. 한 정치위원은 그곳을 이렇게 묘사했다.
"오솔길은 산을 따라 구절양장으로 꾸불꾸불하게 뻗어 있고, 산은 마치 곧게 뻗은 칼이 구름을 조개듯 수직으로 날카롭게 솟아나 있었다. 오른쪽 몇백미터 아래로는 물살이 거센 강에 하얀 물보라가 용솟음쳤다. 단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디면 끝장이었다.

파일:루딩 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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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루딩교 모습. 홍색 관광의 거점 중 하나이다.

인근에 노정교(瀘定橋, 루딩교)라는 다리가 있어서 그 다리를 건너기로 했는데 노정교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길이 100m의 현수교였다.[12] 하지만 홍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국민당이 다리를 끊고 뼈대인 쇠사슬만 남아 있었다. 5월 29일, 22명의 홍군 특공대가 목숨을 걸고 나무판을 놓으려 하자 국민당은 폭격과 기총소사로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특공대가 수류탄을 던져 강 건너편을 제압하고 2시간 만에 다리를 보수, 홍군은 대도하를 도하할 수 있었다. 이 노정교 도하는 대장정 때의 전투 중에서도 특히 드라마틱하고 유명한 전투여서, 대장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영화 등에서 반드시 언급한다.

이후 홍군은 협금산을 넘어 추위와 고산병과 싸워야 했다. 행군길마다 병사들의 시체가 줄을 이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동상과 발진 티푸스로 고생했다. 이런 개고생을 거쳐 6월 6일 사천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는데 살아남은 홍군은 10,000~20,000명에 불과했다. 이때의 재밌는 일화로 홍군이 마오타이진이라는 마을에 들렀는데 백여개의 항아리에 가득 찬 액체를 보고 물인 줄 안 홍군이 그 물로 발을 씻다가 그것이 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술이 바로 마오타이였다. 술을 좋아하던 오토 브라운이 발을 씻지 않은 술을 한모금 마시더니 곧바로 취해버렸고 이에 홍군은 너도나도 마오타이주를 한모금씩 마셨다. 홍군의 마지막 대열이 마실 차례에는 발을 씻은 더러운 술만 남았지만 홍군은 이도 모두 마셔버렸다. 이것이 마오타이주가 유명해진 계기다.

6월 중순, 의복과 신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스스로를 거지군으로 자조하던 홍1방면군 선발대가 사천성 마오궁(무공)에서 인근의 무오에 주둔하다가 홍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홍4방면군과 조우했다. 6월 25일 마오쩌둥과 장궈타오가 만나 서로를 얼싸 안았고 합류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흥분한 마오쩌둥은 혁명가라면 고추를 많이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강소성 출신이라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보구가 반박하는 등 연회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편하게 유쾌했다. 하지만 대장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3.5. 홍군 분열

한편 국민정부는 5월 26일 초비사령부를 사천 청두로 옮겨 공산당 추격을 독려했고 7월 중순, 추격대의 중대장 이상 간부들을 불러모아 분발을 촉구하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제군은 서강에서부터 적비추초를 출발한 이래 호남, 귀주, 운남의 여러 성을 거쳐 현재의 사천에 도달했다. 반전을 거듭하며 종횡으로 전장을 누벼 5천 킬로미터의 여정을 주파, 온갖 고난과 난관을 헤치며 이룩한 대장정은 중국의 유사 이래 처음이다.
우리 측의 선전으로 공산군은 현재 5,6천 명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며 이는 강서를 출발할 때의 거의 십분의 일의 전력에 지나지 않는다. 제군은 더위에 굴하지 않고 금사강을 건넜으며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대도하를 넘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군의 적비토벌의 의의 및 경과의 성적, 1935년 7월.

이 시각 홍군은 첫 회합의 화기애애함은 사라지고 노선 충돌로 다시 분열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바로 양하구에서 제1차 정치국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정치국위원들과 더불어 중앙위원 천창하오, 후보중앙위원 쉬샹첸 등도 참여했다. 천창하오는 "쭌이 회의에서의 중앙개조는 비합법적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섬서성으로 북상해 류즈단(유지단)의 부대와 합류하자는 마오쩌둥의 주장에도 반박하여 장궈타오는 남하하여 사천, 티베트의 변경에 근거지를 구축하여 사천성을 탈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1방면군은 1만에 불과한데 반면 진용을 갖춘 홍4방면군은 그 일고여덟배에 달했으니 장궈타오의 목소리는 당연히 더욱 컸다. 장궈타오는 급기야 당 노선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고 천창하오는 장궈타오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에 이르자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의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세력이 압도적으로 약했던 마오쩌둥이 물러섰다. 뤄푸는 장궈타오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주겠다고 달랬으나 장궈타오는 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직위인 연합 홍군 총정치위원 자리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홍군 총정치위원에서 물러났고 마오쩌둥도 전적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주더가 가진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도 장궈타오의 수하들이 주더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위험했으나 장궈타오는 주더가 유임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중앙혁명군사위원회도 사실상 장궈타오의 손에 들어왔다.

한편 이미 홍군의 약탈로 근처의 식량이 고갈되고 현지인들의 저항이 격렬해지면서 홍군은 다시 대장정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장궈타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단 목적지는 사천, 감숙, 섬서의 경계지역이었다. 홍군은 이동하면서 가축과 곡식을 징발했으나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하고 홍군을 습격하자 징발조를 더 보내기도 어려워졌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7월 20일, 행군이 잠시 멈추고 홍군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다. 뤄푸는 장궈타오에게 악예환 소비에트에서의 성과를 보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장궈타오가 보고하자 마오쩌둥이 장궈타오가 심각한 과오를 범했다고 질책했다. 장궈타오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8월 5일 모아개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북상노선을 주장했다. 류즈단의 부대와 합류한 후 몽골과 소련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궈타오는 다시 사천군의 방어선을 뚫고 성도평원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뤄푸가 다시 장궈타오가 악예환 소비에트를 잃은 일로 비난하자 장궈타오는 화를 내며 "전체 중앙 소비에트 지구를 잃은 것은 당신들 아니오. 어째서 당신들 노선이 옳단 말이오?"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뤄푸와 마오쩌둥은 장궈타오의 제안을 거부했고 장궈타오는 일단 정치적 반박은 삼가고 감숙 남부로 전진할 것을 제안했다. 바로 앞에 놓인 슾지대를 따라 양갈래로 갈라져 감숙성에서 합류하기로 결정함으로 8월 10일 장궈타오와 주더의 좌로군[13]이 선발로 떠나고 8월 23일 우로군[14]이 행군을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대다수 정치국 위원들은 우로군에 속해 있었는데 저우언라이가 말라리아에 걸려 아팠기 때문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병이 호전된 것이 8월 말이었고 우로군은 그때 행군을 재개했다.

우로군은 넓고 아름다운 평원에 도착했는데 이 평원은 겉보기는 아름다웠으나 살얼음 낀 대초지가 가득 펼쳐져 전진하기에 최악의 환경이었다. 굶주림과 질병이 홍군을 덮쳤고 쥐를 잡아먹고 대변에서 낱알을 골라내는 6일 동안의 고생 끝에 겨우 습지를 나올 수 있었다. 이 습지를 통과하는 데만 500명의 병사들이 사망했다. 그 순간 국민당 49사단이 홍군을 덮쳤는데 선두에 선 우로군과 충돌, 이틀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홍군은 5,000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냈고 장궈타오는 자신의 병력이 큰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에 격노하여[15] 이대로 북상하면 전군이 궤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장궈타오, 주더, 류보청의 명의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8일 저우언라이, 뤄푸, 마오쩌둥 등 정치국원과 사령관, 지도부들이 연명하여 장궈타오에게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전보를 보냈다.
"형들께서 심사숙고하시어 아바와 줘커지에서 양식을 보충한 뒤에 방향을 바꾸어 북진할 것을 즉각 결정해 주시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장궈타오는 우로군에 속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비밀전보를 보내 정치국에 대한 투쟁을 착수할 것을 지시했는데 마오쩌둥에게 들키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즉각 긴급상무위원회를 소집, 마오쩌둥, 뤄푸, 저우언라이, 보구, 왕자샹 등이 중앙위원회 명의로 <북상 방침을 집행하기 위해 동지들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전 홍군에게 남하하지 말고 '중앙위원회의 전략 방침을 굳게 옹호하며 신속하게 북상하여 섬서, 감숙, 사천에 새로운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할 것을 촉구했다. 장궈타오는 양보하지 않고 분통을 터트리며 독자적으로 남하했다.[16][17]

9월 중순, 감숙성 뎨부현 어제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홍1군, 3군, 군사위원회 종대를 중국공농홍군섬감지대로 재편성하고 펑더화이를 사령관, 린뱌오를 부사령관, 마오쩌둥을 정치위원으로 임명했다.[18] 왕자샹은 정치부 주임, 양상쿤은 정치부 부주임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감숙 동북이 아니라 아예 소련 접경지대까지 전진할 것을 제시했다.
"장궈타오가 남쪽으로 감으로써 중국 혁명에 막대한 손실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로 낙담하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 섬서 북부와 감숙 서북부가 우리가 가야 할 곳이다."

마오쩌둥은 전혀 연락이 닿지 않던 모스크바와 연락하기 위해 동생 마오쩌민을 비롯한 2명의 특사를 신강성을 통해 파견하려 했다. 그 순간 섬서 서북쪽에서 류즈단이 작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노획한 국민당 신문에서 이 소식을 접한 마오쩌둥은 대장정이 항일을 위한 행군인 것처럼 선전하자고 제안했고 9월 22일 간부회의에서 "민족의 위기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반드시 계속 북쪽으로 행군하여 일본과 대항한다는 원래 계획을 완성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류즈단의 홍군이 작전 중인 섬서 북쪽으로 갈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10월 중순, 홍군 제1지대가 섬서 북쪽 접경지대를 돌파해 우치진에 다다랐다. 선발대는 80킬로미터 떨어진 류즈단의 사령부로 달려갔고 10월 22일 마오쩌둥은 우치진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를 소집, 대장정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장궈타오와 결렬해 다시 북으로 향한 6천 명의 홍군 중에서 살아남은 장병은 5천에도 미치지 않았으나 그들은 살아남았다.

11월 1일 국민정부는 섬서성의 성도 서안에 서북초비 총사령부를 두어 장쉐량을 총사령관인 장제스의 전권대리로 임명했다. 이것이 서안 사건으로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6. 장궈타오의 운명

한편 모아개로 돌아온 장궈타오는 9월 중순 6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이들은 10월 작목조에 이르러 새로운 중국공산당 중앙을 선포하고 장궈타오, 주더, 진창호, 류보청 등 15명의 중앙위원을 추대했으며 장궈타오가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두개의 당중앙이 등장하여 홍군이 분열되는 것을 우려한 코민테른은 코민테른 요원 장호를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타협안을 제안했다.
  1. 북방과 남방의 2개 당중앙을 동시에 철폐하고 중앙의 직권행사를 중지한다.
  2. 북방 중앙을 서북국으로 개편하고 남방 중앙을 서남국으로 개편하며, 지구와 관할부대를 경계로 각각 직권을 행사한다.
  3. 서남국은 홍2방면군의 주요책임동지를 포함한다.
  4. 각 방면군은 서로 협조하면서 서북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현재는 영하와 감숙을 발전방향으로 정한다.
  5. 과거의 마찰과 불화는 통일전선의 새로운 정책을 공동으로 집행한다는 전제 하에 모두 불식시키고 단결을 모색한다.

장궈타오는 이 타협안을 수용하여 6월 당중앙을 취소했다. 장궈타오의 홍4방면군은 티베트와 사천을 헤매며 "천전, 노산까지 가면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라고 선전하며 성도평야로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수만에 달하던 장궈타오 부대는 2차 양광사변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국민정부가 파견한 쉐에가 지휘하는 토벌군에게 박살났다. 산악지대로 달아난 장궈타오는 티베트의 감시로 달아나 소비에트구를 선포하였으나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류보청 등이 감숙으로 북상하자고 주장하여 8월 16일 감숙, 영하를 돌아 섬서로 향했다. 2방면군도 4방면군과 합류하여[19] 10월 1,2,4방면군의 주력이 드디어 후이닝에서 합류했다. 11월 장궈타오는 주더를 대동하고 결별 이후 처음 마오쩌둥을 만나 원군을 요청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미 힘을 잃은 그를 환대하면서도 원군 요청은 거절했고 장궈타오는 정원에서 마부팡 군벌부대에게 패배하여 완전히 파멸했고 12월 꼬리를 내리고 연안으로 들어가 마오쩌둥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총정치위원이 되었으나 이미 그는 끝장난 후였다.

1938년 그는 공산당을 탈당, 국민당에 합류했다.

4. 의의

홍군의 엄청난 강행군과 루딩에서 국민당군과 벌인 전투는 멋진 전설이 되어 중국인의 한 세대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다. 훗날 루딩 전투는 ‘장정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만일 이날 강행군에 실패하고 전투에서 졌다면 홍군은 완전히 분쇄되었을지도 모른다. 첩보를 전달받은 양청우의 부대는 엄청난 강행군을 벌인 끝에 다음 날 새벽 루딩에 도달했다.


루딩 다리는 길이가 약 110m이며 13가닥의 쇠밧줄로 이어져 있었다. 아래에는 드문드문 나무판자가 깔려 있었지만 양옆에는 밧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찍이 어느 여행객은 아시아 지역의 고원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이 다리를 보고 “인간의 기발한 재주가 만들어낸 가느다란 거미줄”이라고 묘사했다. 다리의 서쪽 나무 밑판은 국민당 군사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제거되었고 쇠밧줄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다리의 동쪽 끝에는 높이가 약 6m 되는 돌벽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루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벽 위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접근로를 통제했다. 양청우는 이때 상황을 간략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극복해야 할 여러 어려움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병사 22명이 자원하여 공격의 선봉에 나섰다. 1년 뒤 에드거 스노는 당시 전투에 참여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삼아 루딩 전투의 고전적 묘사를 남겼다.


“그들은 등 뒤에 수류탄과 마우저 권총을 동여매고서 곧 쇠사슬 다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아래에는 급류가 흘렀다. 병사들은 쇠밧줄을 부여잡은 손을 교차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홍군의 기관총은 적의 요새를 향해 불을 뿜었고 총탄이 교두보에 쏟아졌다. 이에 적군도 기관총 발사로 응수했고 저격병들은 쇠밧줄에 매달려 천천히 전진하는 홍군 병사들을 향해 총을 쐈다. 홍군 병사 하나가 총에 맞아 물속으로 떨어졌다. 또 한 명이 떨어졌다. 또 한 명이 떨어졌다. 아마도 쓰촨성 출신 병사들은 이러한 전투병들을 처음 봤을 것이다. 홍군의 젊은 병사들은 그저 밥벌이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전투에 임했다. 이들은 사람인가? 미친 사람인가? 아니면 신인가? 결국 홍군 전사 한 명이 쇠사슬 다리의 동쪽 밑판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는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고 적군의 요새에 난 구멍으로 정확하게 던져 넣었다. 국민당 군사 지휘관들은 다리의 모든 나무판자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나무판자 위에 파라핀 기름을 급하게 뿌리고 불을 붙이자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홍군 병사가 쇠밧줄에 매달려 전진했고 나무판자에 붙은 불을 끄고 새로운 나무판을 깔면서 다리를 건넜다. 하늘 위에서는 장제스의 비행기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빙빙 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실제 상황은 스노가 묘사한 것보다 조금 덜 극적이지만 그렇다고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돌격대가 “몸을 던져 손을 교차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게처럼 몸을 옆으로 돌린 다음 다리 양쪽에 있는 쇠밧줄에 매달려 이동했고, 그들의 뒤를 따라 다음 병사들이 나무판자를 하나씩 깔면서 움직였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간에 이들이 다리를 건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과거 태평천국군은 다두하에서 몰살되었지만 공산당군은 살아남아 다두하를 돌파했다. 6월 초에 홍군은 모두 강을 건넜다. 그들을 산 가운데로 몰아 포위하려던 장제스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필립 쇼트, 양현민, 마오쩌둥 1, 교양인, 2019, p.542~545
대장정은 중국공산혁명의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마오쩌둥은 산시에 도착하여 대장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정은 진실로 선언서이며 선전대이며 파종기였다. 12개월 동안 공중에서는 매일같이 수십 대의 비행기가 우리를 정찰, 폭격하고 지상에서는 수십만의 대군이 우리를 포위, 추격, 차단하였다. 우리는 장정의 과정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과 장애를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두개의 다리만으로 2만 여리가 되는 거리를 걸어 11개의 성을 종횡단하였다. 장정은 진실로 선언서였다. 전 세계를 향하여 홍군이야말로 영웅적인 군대이며,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자들의 주구인 장제스의 무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장정은 제국주의자들과 장제스가 시도하려 했던 포위, 추격, 차단의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장정은 또한 선전대였다. 그것은 11개의 성에 사는 약 2억의 대중들에게 홍군이 가는 길만이 그들이 해방되는 길이라는 것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만일 장정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광범위한 대중이 홍군이 구현하고 있는 대진리를 그렇게 빨리 알 수 있었겠는가. 장정은 또한 파종기였다. 장정의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종자를 11개의 성에 뿌렸다. 그것이 언젠가는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서 추수할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장정은 우리에게 승리였고, 적에게는 패배였다."

물론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일방적인 장밋빛 선전에 불과하며, 대장정은 전술적으로는 (당시 국민당이 비웃었듯이) 병력의 90%를 잃어버린 기나긴 퇴각과 도주의 과정이었다. 대장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홍군의 수는 고작 3000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계속되는 전투와 필사의 각오로 탈주하는 과정에서 역량이 극도로 저하된 홍군은 대장정이 끝난 후로도 반격할 여력이 없어 국민당의 공격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또한 간신히 피신한 서북 지역도 중국 본토에서 가장 척박하고 인구밀도도 희박한 곳 중 하나로서 도저히 장기적으로 혁명을 도모할 만한 곳이 되지 못하여 공산당 내부에서는 외몽골이나 신장으로 이동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단지 서안 사건으로 토벌 직전의 상황에서 기사회생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의 승리였다. 어쨌든 중국 국민당은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박멸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며, 홍군의 핵심 지도부는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그의 정치/군사 이론을 중심으로 한 지도 체계가 그 유효성을 입증하며 확립되었고, 중국공산당은 이를 바탕으로 북쪽에서 다시금 토대를 다지고, 끝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게 된다.

5. 기타

중국은 우주개발을 추진하면서 독자개발한 로켓에 ' 창정'이란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은 장정(長征)을 중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 대장정에는 조선인 김무정 등도 참가하고 있었다. 김무정은 대장정 참가를 통해 중국 출신 조선 공산당인 연안파뿐만 아니라 북한의 거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또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지휘한 쑹스룬은 임관하자마자 이 대장정에 참가했다.

베트남 공산당의 친중파 쯔엉진(본명은 당 쑤언 꾸)의 이름이 바로 이 대장정에서 딴 것이다. 마오쩌둥과 이 당시 대장정에 감화되어 장정의 베트남어 독음으로 고친것.

PD계열 학생운동단체인 전국학생행진의 전신인 대장정학생연합의 명칭이 이 대장정에서 따 왔다.

2024년 4월 2일 중국의 장리슝이 사망하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대장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모두 사망하였다.

6. 매체

워낙 스케일이 장대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대사건이었던 탓에, 이후 한자 문화권에서는 '장정'이라는 표현이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됐고 많은 문학 작품에도 동기를 부여했다. 대표적인 예가 애니메이션 은하영웅전설 장정 1만 광년.

게임 Hearts of Iron IV는 대장정이 끝난 직후인 1936년이 시작 배경이므로 중국 공산당 플레이시 대장정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건설 속도 -50%/공장 생산량 -15% 효과의 '대장정의 여파', 육군 조직력 회복 -10%/훈련 시간 +20%/충원률 -1% 등의 효과를 가진 '약화된 홍군' 등의 디버프성 국민정신을 지니고 있다. 물론 디버프만 있는건 아니고 마오쩌둥의 '궁지의 몰린 여우'라는 사단 방어율 +15%/회복률 +10%의 버프가 있다.

아르세니아의 마법사에서 노정교 전투를 오마주한 장면이 나온다.

7. 참여한 인물

8. 참고문헌

9. 관련 문서



[1] 출처: 國民黨管長征叫西竄 長征後毛說非黨員一律入黨(1) [2] 서산회의파의 주동자 중 유명한 사람이 후에 중화민국 주석을 지내는 린썬이다. [3]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앙드레 말로가 쓴 "인간의 조건"이다. [4] 다른 공산군 지도자인 예팅(1896~1946)과 함께 1927년 8월 1일에 난창에서 공산 봉기(난창기의)를 일으킨 뒤 징강산의 공산 세력과 합류했고 중국이 공산화된 후 8월 1일은 건군기념일로 제정된다. 인민해방군의 군기와 표식에 적힌 八一도 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5] 물론 오토 브라운도 처음의 돌파작전이 경과 중에 후퇴의 성격으로 변한 것은 인정하고 있다. [6] 1935년 국민당에 붙잡혀 처형된다. [7] 공산당 공식 역사에는 초기는 포위망을 일시 돌파했다가 중앙 소비에트로 귀환할 계획이었다고 하지만 당대의 기록에는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8] 기록마다 참석자 숫자와 구성에 대해 약간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크게 신경 쓸 수준은 아니다. [9] 마오쩌둥은 이 쭌이 회의를 계기로 손자병법 탐독에 들어갔다고 한다. [10]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이 정치국 의장이며 중국공산당 의장이 되었다고 설명했는데 이에 부합하는 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1] 대도하의 현재 모습, 지금은 공산당의 성지처럼 되었다 [12] 영문 위키백과 참조. [13] 1방면군 소속 5,9군단, 4방면군 소속 9,31,33군. [14] 1방면군 소속 1,3군단, 4방면군 소속 4,30군. [15] 국민당 49사단과 충돌했다는 부분은 장개석비록에만 보이니 일단 주의해서 읽을 대목이다. [16] 장개석비록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장궈타오에게 감숙의 기병과 비행기가 무서운 모양이라고 비난했고 장궈타오는 마오쩌둥에게 소련으로 도망쳐 편히 살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장궈타오는 병사들에게 감숙까진 21일이 더 걸릴 것이라면서 중국혁명의 계속을 바라고 대초원에서 21일이나 진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는 자신에게 따르라고 외쳤다고 한다. [17] 세부적인 사항 외에도 전체적으로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으로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중국현대사 3권, 장개석비록, 모택동 vs 장개석에서는 마오쩌둥이 비밀리에 일방적으로 먼저 병력을 빼서 북상한 것이라고 하는 반면,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은 장궈타오가 선수를 친 것으로 설명한다. [18] 1종대 사령관 린뱌오, 2종대 사령관 펑더화이, 중앙군사위원회 종대 사령관 섭검영. [19] 시기는 기록마다 다른데 장개석비록은 6월 합류설을, 모택동 vs 장개석은 10월 하순경 합류설을 기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