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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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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쟁
楚漢戰爭
파일:external/img1.voc.com.cn/201208241746384344.jpg
시기 BC 206년 ─ BC 202년
장소 중국 전역
원인 진나라 멸망 후, 유방 항우의 패권 전쟁
교전국 한(漢) 서초(西楚)
지휘관 한왕 유방
한신
장량
소하
팽월
영포
조참
번쾌
주발
왕릉
하후영
역상
관영
노관
장이
장오
부관
근흡
시무
유고
초패왕 항적
범증
계포
용저
종리말
장한
사마흔[A]
동예[A]
위표[A]
환초
정공
항백
항장
결과 유방의 승리, 한나라의 건국과 중국 통일
영향 시대의 개막, 고대 중국 세계의 완성

1. 개요2. 특징3. 전개
3.1. 진나라의 통일, 그리고 붕괴3.2. 진승·오광의 난3.3. 서초 패왕 항우3.4. 초한전쟁 개시3.5. 항우의 최후3.6. 토사구팽3.7. 결말
3.7.1. 진(秦)의 실패를 거울삼다
4. 관련 어록5. 영향
5.1. 중국5.2. 한국
6. 사건 목록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기원전 206년 진나라의 멸망 이후 유방 항우가 대립한 끝에 기원전 202년 12월 항우의 패배와 죽음, 그리고 유방의 승리와 천하 통일로 통일 왕조국가 한나라가 건국되는 전쟁. 초한쟁패(楚漢争覇)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초한상쟁(楚漢相爭)'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

2. 특징

당대 중국의 모든 세력이 얽혀들어간 대전 중의 대전이며, 진나라 멸망 후 당대 최강자였던 초패왕 항우는 역사에 남을 수준의 일신의 무력과 용병술로 여러 차례의 괴물 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배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유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평민 출신으로 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사상 초유의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워낙 항우와 유방의 존재감이 막대하여 그 두 명이 중국 땅을 갈라놓고 붙은 문자 그대로 2파전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항우와 유방 외에도 여러 왕들과 독자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나 조나라나 제나라, 그리고 후반부에 반(半) 독립세력으로 성장한 한신 등은 충분히 삼파전 구도를 시도해 볼 만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군소 세력들도 모두 항우의 세력권에 속했거나 유방과의 협력관계에 놓여 있었으므로, 양대 세력의 결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중국 역사상 분열기가 많긴 하지만 이렇게 완전하게 양대로 나뉘었던 전쟁사례가 상당히 특이하면서도 납득되는 이유다.[4]

또한 항우와 유방은 출신 계급부터 정책에 대한 관점, 특징되는 능력과 성격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상반되는 상대였다.[5] 이러한 상호간의 강렬한 개성으로 인해 이 전쟁은 인기가 많고, 《 삼국지연의》와 마찬가지로 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 초한지》가 있다. 또한 이러한 항우와 유방의 강렬한 개성, 그리고 한삼걸(漢三傑) 등의 존재로 인해 전근대 중국사의 전쟁 중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의 《 삼국지》 시대 다음으로 많이 회자되고, 미디어화되는 대결이기도 하다.[6]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의 장기는 초한전쟁이 배경이다.

정사 삼국지》와 《 삼국지연의》에 나타나는 이야기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들 알고 있는 데 비하여, 실제 기록상에 나타나는 초한전쟁과 소설인 《 초한지》의 내용에 대한 차이점은 모르는 경우가 잦다. 본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은 실제 역사 기록상에서 나타나는 초한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소설상의 내용은 《 초한지》 항목을 참조.

3. 전개

3.1. 진나라의 통일, 그리고 붕괴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대혼란을 겪은 중국은 마침내 (秦)나라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었다. 법가(法家)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원교근공의 외교 정책을 받아들여 열국을 분열시킨 진나라는 백기, 왕전, 몽염 등의 장수를 앞세워 전쟁에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 기원전 230년에는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켰고, 불과 10년밖에 안 되는 사이에 한(韓)나라 · 조(趙)나라 · 위(魏)나라· 초(楚)나라 · 연(燕)나라 · 제(齊)나라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inshihuang.jpg
시황제(始皇帝)
중국의 통일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업적을 이룬 진시황은 황제로 즉위하며 제국의 시대를 열었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 정치를 단행,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 집권 전제 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시황제는 다시 몽염을 파견하여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임효와 조타를 보내 광둥성(廣東省) · 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였다.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해외에서는 중국의 다른 이름을 China, Chine 등 진나라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진나라의 천하 통일은 곧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시황제의 거대한 대외 정책과 대규모 토목 공사는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 말년에는 민심이 동요하자 극단적인 탄압 정책이 시작되었다. 또한 전국칠웅 중 진을 제외한 다른 여섯 나라는 모두 멸망하였지만, 망국(亡國)의 주민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고 진나라는 억압만 했지 그들을 보듬어줄 어떠한 정책도 펼치지 않았다.[7]

결국 이러한 온갖 억압과 부담 속에 백성들의 분노와 불만은 한계 수위까지 차오르고 있었는데, 시황제의 뒤를 이어 이세 황제로 즉위한 호해(胡亥)는 아버지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건 전혀 없는 막장이었다. 호해는 정치는 조고(趙高)에게 맡겨둔 채 막장스런 생활만 즐겼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제국은 착실하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진시황이 죽기 몇 년전 꿈을 꾸었는데 진시황 앞에 태양이 떨어졌다. 전대미문의 현상에 당황한 진시황제 앞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파란 옷을 입은 청의동자가 떨어진 태양을 주워가려고 하자 곧 빨간 옷을 입은 홍의동자가 그 태양을 뺏고자 싸움을 걸었다. 싸움 내내 청의 동자가 일방적으로 홍의동자를 이겼으나 홍의 동자는 계속 일어나서 청의동자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제풀에 지친 청의동자가 태양을 포기한다. 그렇게 태양을 차지한 홍의동자가 떠나려고 하자.
진시황 : 홍의를 입은 아이야 너는 누구냐?
홍의동자 : 이 몸은 천명을 받들어 요순의 시대를 재현하는 400년 왕조를 만들 몸이시다.
이에 놀란 진시황은 잠에서 깨어나 홍의 동자를 찾고자 곧바로 전국순행을 떠났으나 홍의 동자를 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하였다.

3.2. 진승·오광의 난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크게 일어날 것이다.(大興楚, 陳勝王)"
公等遇雨,皆已失期,失期當斬。藉弟令毋斬,而戍死者固十六七。
너희들은 비를 만나 모두 기한을 어겼고 기한을 어겼으면 참수를 당할 것이다. 참수를 당하지 않더라도 (수자리) 지키는 사람 열 명 중 예닐곱 명은 죽을 것이다.

且壯士不死即已,死即舉大名耳,王侯將相寧有種乎
또 장사(壯士)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명성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王), 후(侯), 장(將), 상(相)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 사기(史記)·진섭세가(陳涉世家), 권중달의 자치통감 1권 번역본. (pp403)[8]

상앙(商鞅) 이래 진나라의 법치주의는 진시황의 시대에 이사(李斯)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했다. 법률은 무엇보다도 가장 위였고, 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면이 많았다. #
파일:/pds/200910/05/89/f0043889_4ac941ca44bd8.jpg
인부들을 선동하는 진승
시황제가 죽은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하남성 출신인 진승(陳勝)은 자신의 동료인 오광(吳廣) 등 징용된 900여명과 함께 현재의 베이징 부근인 어양(漁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행이 대택향(大澤鄕)에 이를 무렵, 마침 큰비가 내려 도로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별수 없이 발이 묶이게 되었는데, 당시 진나라의 법률로는 목적지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무조건 목을 베어버리게 되어 있었으니, 어차피 도망쳐도 죽고 늦게 가도 죽게 되는 상황이 되자 진승과 오광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인부들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인부들도 동조하여 인솔하던 관리들을 모두 죽여버린다음 반란을 일으킨다. 진승은 장초(長楚)라는 국호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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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렇게 가혹한 법률이 없었다면 진승·오광의 난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9][10] 또한, 진나라의 지배력이 강고하다면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났다고 해도 모기가 물어대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서자 전국에서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퍼져 나갔다. 특히 당시 진나라 36개 군과 그 밑의 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있었는데, 혹독한 관리들에게 고통받던 백성들은 불만이 폭발하여 모두 들고 일어나 그들을 죽이고 난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불어났다. 호해가 상황 파악이 늦기도 했지만 계포의 평가에 따르면 진시황이 흉노 원정 등으로 국력을 축내놓은 탓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면도 있었던 듯. 장한만 해도 수도에서 당장 동원할 군대는 형벌부대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승은 결국 일개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반군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로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다.[11] 육국의 후손들은 진승에게 굳이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하들도 점점 진승을 이탈하게 된다.[12] 이 와중에 나중에도 사고를 치는 괴철 무신이란 장수가 성 수십개를 함락시키자 '이 기회에 진승의 군사를 훔쳐서 독립해버리자'며 꼬드겼고, 무신은 진짜로 독립했다가 자기도 똑같은 수법으로 군사를 도둑맞은 후 어이없이 부하에게 죽는 등 장초 세력은 개판 오분전이 된다.

결정적으로,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는 주문(周文)의 병력을 진나라의 명장 장한(章邯)이 격파하면서 진승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기세를 탄 장한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였다.

3.3. 서초 패왕 항우

진승과 오광의 난은 결과적으로 진승의 죽음으로 좌절됐다. 하지만 이미 지방들에서 반란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기에 진 제국은 중국 전국의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항우가 이끄는 초(楚)의 부흥군이 거록대전에서 장한의 군대를 격파하면서(BCE 207) 진은 멸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사이 패현에서 거병했던 초한대전의 또다른 주역 유방은 함양 남쪽 무관(武關)을 넘어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제후들 중 가장 먼저 함락시켰고 진나라 왕 자영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곧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항우는 함곡관을 뚫고 유방을 치려했다. 위기에 처한 유방은 연회를 가장한 암살위기였던 홍문연에서 탈출, 서촉땅으로 물러났다. 이후 항우는 함양을 재차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을 비롯, 모든 왕족을 멸족시키고 대학살을 벌이며 함양을 불태웠다.

이후 항우 서초(西楚)를 건국하고 패왕(覇王)을 자칭하며 팽성에 도읍을 두고 초 회왕 미심을 황제인 의제로 높였으나 진을 멸한 후에는 침현으로 추방 후 살해하였다. 항우는 각지의 유력자들이 세운 나라들을 초나라 아래에 편입하고 자신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멸한 장군들을 각지에 봉건하여 봉건제를 부활시켰는데, 봉건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세부 사항에서 보다시피 문제가 많은 조치였다. 항우는 주로 자신에 협력한 세력에 좋은 땅을 분봉했고,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은 세력은 그 지방의 중심지에서 벽지로 쫒아냈기 때문에 봉건으로 인한 분쟁이 수없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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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옛 진(秦)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이상은 옛 조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이상은 서초패왕 항우와 함께 옛 초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이상은 옛 연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이상은 옛 제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이상은 서초패왕 항우와 함께 옛 위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이상은 옛 한(韓)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3.4. 초한전쟁 개시

하지만 항우의 조치는 성급했다. 제나라는 반진전쟁에서 초나라에 은혜를 입은 적도 없고, 따라서 제후국도 아닌 자신들이 내정간섭을 당할 이유가 없다며 곧바로 분봉 조치에 반발하며 들고일어났던 것이다. 분봉이 이루어진지 겨우 3달 즈음 지났을 때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면서 진여 팽월 등까지 부추겨서 난장판을 만드는 와중에 바로 같은 시기에 유방이 삼진을 뚫고 나와 관중 쪽의 영향력도 사실상 상실하게 된다. 순식간에 제, 진, 조, 대 등 기존 영토에서 절반 이상을 잃다시피한 것.

항우는 우선 가까운 제나라부터 해결하고자 했으나 본인이 항복한 적군을 산채로 구덩이에 파묻으라는 명령을 내리며 저항군을 사서 만드는 관계로 시원하게 진군하지 못하는 사이 싸움닭 유방 쪽은 진나라의 잔류 초군이 정리되자 쉴틈없이 동진을 개시하여 초나라의 수도 팽성까지 점령했다. 3만 병력으로 회군한 항우는 팽성대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오창이라는 교통요지와 곡창지대를 포함한 형양의 방어선까지는 이런저런 이유로 탈환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전쟁은 예상 외로 늘어지기 시작했다.[14][15]

고제(전한)/생애 항목도 참조. 한고제의 생애가 곧 초한전쟁과 맞닿아있다.

3.5. 항우의 최후

항우는 군사적 재능은 압도적으로 탁월하여 한과의 전투에서 언제나 승승장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안대학살 등으로 민심을 잃는 등 정치적 역량에 있어서는 무지에 가까운 처신을 보였다. 또한 인재 기용에 있어서는 적들이 입을 모아 비웃을 만큼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항우의 부하들이 숱하게 이탈하여 유방 밑에서 항우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다. 그렇게 소하의 필사적인 보급과 팽월의 유격전으로 악착같이 버티는 한나라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채로 실속 없는 승리만 쌓아가는 도중, 별동대로 출발한 한신이 북방을 모조리 평정해 버리고 말았다.[16]

결국 광무산 대치에 이르러 초군의 군량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적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해지며 천하에 항우의 적만이 남게 된 상황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더는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 항우는 유방 못지않은 원수지간이었던 제나라와 동맹을 맺거나, 한신을 회유하려 해보거나 유방과 화평하려 하는 등 뒤늦게 외교적 수단을 시도해 보았으나 전부 실패하고, 해하 전투에서 연합군에 패배한 뒤 한군이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 심리전을 펴자 그나마 남아 있던 군사들도 동요를 일으키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 결과 해하 전투 직전까지만 해도 10만이 넘었던 병사는 불과 800명만 남게 되었다.

항우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잃고 도망가는 신세가 된다. 휘하의 소수병력조차 추격대에 의해 죽어가면서 회수를 건널 즈음에는 100명으로, 중간에 일부러 길을 잘못 가르쳐준 노인으로 인해 늪지대에 빠지면서 다시 28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동성 언덕에서 네 갈래로 갈라져서 죽을 힘을 다해 오강 나루에 도착하지만, 항우는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강동에서 군세를 일으켜 재기하자는 권유를 물리치고[17] 배를 타지 않는 대신 뱃사공에게 오추마를 선물했다. 그때까지 따라온 사람들도 배를 타지 않고 말에서 내린 뒤 그대로 항우와 함께 한군의 추격대를 향해 돌격했다. 항우는 싸움 끝에 자살하였다.

항우의 패배와 죽음은 유방이 새로운 중원의 패자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얄궂게도 서초가 항복하는 와중에 한때 항우의 봉토였을 뿐인 노나라만이 끝까지 유방에게 저항했으나, 항우의 수급을 보여주며 항우를 노공(魯公)으로 안장할 것을 약속하자 결국 항복하였고 중원은 하나로 통일되어 한나라가 건국된다. 마침내 긴 싸움을 끝낸 유방은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쳤는지 항우의 장례식에서 울었다고 한다.

3.6. 토사구팽

항우가 봉건한 왕들 가운데 회남왕 영포, 형산왕 오예, 연왕 장도는 유방에게 투항했다. 초한 전쟁 과정에서 유방은 유력한 군벌들을 왕으로 봉건하였는데, 초왕 한신, 양왕 팽월, 조왕 장이, 한왕 한신 등이었다. 이렇게 천하에는 유방을 포함하여 8명의 왕이 있게 되었는데, 고제 5년(기원전 202년)에 다른 7명의 왕이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바치는 형식으로 유방의 우위를 인정하게 된다. 굵은 글씨가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바쳤던 7왕이다.

이로서 한 제국이 성립하게 되지만, 이런 제후왕들은 하나하나 토사구팽당하고, 유방은 제거한 제후 대신 친척인 유씨로 제후를 교체한다.
한고조가 죽을 때까지 남았던 유씨가 아닌 제후왕은 인구도 적고 민월, 남월에서 완충지 역할을 하던 장사국의 오예(吳芮)뿐이다. 한편 한나라에 형식적으로 복속된, 한족이 아닌 월족(越族)이 세운 이민족 왕조도 있다. 물론 이 왕조는 유씨가 아니다.

그외에도 중원땅에서 왕으로 임명된 이성왕 공신이 한명 더 있었으나 이 공신은 유방에게 왕으로 임명되기 무섭게 왕위를 포기하고 유방과 여후 사이에 난 노원공주에게 하사받은 영토를 바쳐서 토사구팽을 피하고 고향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3.7. 결말

위에서의 설명도 그렇고 항우 항목을 봐도 그렇지만 항우의 행적은 장수로서는 최고였으나 통치자로서 볼 때 안 좋은 점만 다 모아놓았다. 특히 군주로서는 명백한 폭군[21]이었고 결국 그것이 그대로 돌아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항우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하늘 탓만 했다.

항우의 서초는 멸망하고, 이성 제후왕들의 세력도 한풀 꺾여 한나라가 건국되었다. 하지만 사실 새롭게 성립된 한나라는 오히려 매우 허약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진나라는 토목공사를 자주해서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했고, 여기에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했다. 그런 까닭으로 진나라는 통치 체계가 불안정되었고, 진의 통일전쟁부터 영포의 난까지 전란과 학살로 상당한 수의 인구가 소멸했으며 중국을 떠나 해외로 이탈한 인구도 상당히 많았다. 실제로 사기 조선 열전을 보면 진나라의 통일전쟁 때부터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출신 유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기사가 나오며, 덕택에 그동안 연나라에게 눌러지냈던 고조선이 그 덕을 톡톡히 보며 연나라 시절에 상실당했던 영토도 상당수 회복하고[22] 세를 다시 떨치게 되면서 중흥기를 맞았다. 유방의 증손자 대에 이르러서 서한과 마찰 끝에 멸망하지만.[23]

또한 전란이 끝난 직후인 서기전 194년에 위만의 쿠데타로 인해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위만조선이 건국된 계기도, 이 유이민 세력 중 위만 세력을 단군조선이 흡수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위만 세력이 단군조선을 멸망시키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또한 진나라는 어렵지 않게 무찔렀던 흉노를 한나라는 패배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후로도 한동안 군사력에서 밀리며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묵돌 선우와 노상선우가 동호와 월지 등 주변 종족들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하고 부국강병을 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한나라의 국력이 진나라 때의 그것에 비해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국시대의 인구는 2천만으로 추산되는데, 진나라 통일전쟁을 시작해서 영포의 난까지 종결되는 30여 년 동안의 전란 사이에 사라진 인구는 그 가운데 7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 그 결과 한고조 치세에서 인구는 고작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

사실 이런 경우는 70%가 모조리 절멸했다기보다는 전후 한나라의 행정력에서 이탈한 인구가 대다수 였을 것이다. 다만 이 수치도 너무나도 많은 데다가 더 심한 것은 후대의 신나라 후한으로 이어지는 전란기와 후한 말 군웅할거의 전란을 겪은 삼국시대의 경우 전란이 종결된 이후의 인구는 몇 배나 많이 집계되었다. 한나라의 인구가 적은 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70% 감소까지는 매우 심한 일이다. 즉 인구가 70%가 감소한 것은 아니라고 쳐도 진나라의 폭정과 항우의 학살, 수십 년간의 민란과 전쟁으로 만만찮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확실하다. 그 탓에 통일제국이 된 한나라는 당연히 행정력이 많이 떨어졌다.

진나라가 벌인 통일전쟁과 가혹할 정도로 인한 정치로 인해 전국에서 유랑민이 속출했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이 찍은 것이 항우가 저지른 잔혹한 학살이다. 신안대학살 등 기록에 명확하게 남은 숫자만 합쳐도 당시 인구의 수% 정도는 항우의 주도 아래 학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안대학살 같은 만행을 저지른 것을 보면 항우는 거의 전국시대 백기 같은 수준으로 각지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 백기는 병사가 될 수 있는 젊은 장정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지만, 항우는 더 잔인해서 성과 마을을 점령하고는 민간인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24][25][26] 그리고 한군이 지켜낸 관중에마저 대기근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으니, 당시에는 그야말로 안전한 곳이 단 하나도 없이 폐허가 된 성과 마을, 시체로 가득한 인외마경이었고, 감정적 대립으로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지옥도가 도래한 것이다.

진나라가 통일전쟁을 개시한 것을 시작으로 전한 초기 영포의 난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난세로 인해 국가 시스템이 붕괴했다. 기근도 여기에 겹쳐서 전 중국의 민생이 처참한 상태로 추락했다. 초한 전쟁 말기에 이미 전란의 폐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데, 진나라의 본거지로서 풍요로운 생산력을 자랑했던 관중 땅이 전란과 기근이 지속된 끝에 급기야 소하가 보통은 병역 의무를 짊어지지 않던 노인, 청소년까지 징병해서 긁어모은 병력을 유방에게 지원군으로 보내야 했을 정도로 황폐화 되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관중 지방은 여전히 그나마 상황이 나은 지방이었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학살에 노출된 다른 지방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전쟁이 끝난 뒤 경제와 민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사마천 사기에도 전한 초에는 장군들조차 이 없어 를 타고 다녀야 했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 유방이 진평에게 3만 호가 넘는 크고 좋은 땅을 내렸는데 백성들 대부분이 유랑민이 되어서 막상 남아있는 백성들은 기껏해야 5천 호 수준밖에 안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진의 폭정과 초한 전쟁은 중국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으며, 겨우 성립된 한 제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매우 허약한 국가였다. 결국 북방의 흉노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한 고제 유방은 흉노가 침공해왔을 때 친정에 나섰으나 오히려 흉노에게 참패하여 조공과 인질을 바치고 굴욕 외교를 감수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위만조선도 한나라가 허약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확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3.7.1. 진(秦)의 실패를 거울삼다

당연한 얘기지만 유방은 당초 약속했던 것과 달리 약법삼장(約法三章)[27] 외의 다른 법을 진짜로 다 밀어버리지는 않았다. 한나라의 법률과 제도는 많은 부분이 진나라를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전근대 시대에는 진과 전한의 차이점을 강조했지만, 진의 재평가와 함께 발굴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서는 진과 전한의 통치 체계가 큰 차이가 없다는 견해가 다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중국사에 있어서 체제적으로 진한제국이란 용어가 의미있게 사용된다.[28]

하지만 '죄인은 최대한 무겁게 엄벌'이었던 진나라와는 정반대로 '가능하다면 가볍게 처벌하자'라는 부분에서 법을 운용하는 의도가 달랐고, 백성 중 가진 게 없고 궁핍해진 사람이 대부분이었기에 세금을 내게 되는 성인의 나이를 23세까지 올렸고, 조세법의 경우 수확량의 15분의 1로 내린 뒤[29] 말년에 납세 시기 등의 조항이 애매모호한 걸 많은 사람들이 악용한다면서 조공은 한 해에 한번만 내라하고 징수액과 함께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토지의 상태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세금을 마냥 똑같이 뜯어가던 진 시절의 허점을 보완하여 토지의 여건에 따라 세금 지불액에 차등을 두었고, 도무지 수확할 처지가 아니라서 아예 땅을 반납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허용하였다.

융통성 따윈 없던 진의 가혹한 법률과 달리 한고제는 비교적 유연한 통치를 펼치고 수시로 사면령을 내리는 것으로 가혹한 처벌로 고통받는 사람을 줄였으며, 요역 면제권을 계속 뿌리면서 진대와는 달리 전국적인 사업을 자제하였다. 도가의 무위사상을 바탕으로 백성에게 휴식을 주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인구와 경제의 자연 회복(증가)를 기대한 것인데, 한고제의 뒤를 이은 혜제 소제까지 이 정책의 기조가 이어지면서 생산력이 서서히 증가했다. 당대만으로는 도저히 회복되지 않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던 것이다. 조참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되 도가의 황로 사상에 의거한 국가 운용은 이후 한무제 때까지 전한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 예법 또한 숙손통에 의해 전한에 걸맞게 바뀌었다.[30][31]

진나라 시기 일시적으로 강고하게 구축되었던 군현제 역시 이 전쟁으로 인해 붕괴했다. 군현제 자체가 군국제보다 한차원 높은 행정제도인데, 한차원 높은 만큼 군국제보다 통치 시스템 구축 및 유지 비용을 더 많이 들여야하는지라 갓 난세를 바로 잡은 전한의 경제력으로 군현제를 실시하는 건 무리가 많았기에, 전한 초창기엔 군현제와 봉건제를 결합한 군국제를 실행했다. 물론 중앙에서도 경제력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제후국의 힘을 빼는 정책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오초7국의 난을 진압한 후에야 군현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4. 관련 어록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서 8년이 되었다. 그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희들로 하여금 알게 해 주겠다."
항우
"무릇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보다 못하다. 또한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호걸 중의 호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한고제
"항왕이 분노하여 소리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현명한 장수를 임명하여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에 불과합니다. 항왕은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고 화기애애하게 말을 하며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주지만, 다른 사람이 공을 세워 마땅히 봉작(封爵)할 때는 아쉬워하며 어쩔 수 없이 인수를 새겨주니, 이는 아녀자의 인자함에 불과합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를 제패하고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으나, 관중(關中)에 머물지 않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또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제후들을 고르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제후들은 항왕이 의제를 강남(江南)으로 쫓아낸 것을 보고는 각자 돌아가서 주인을 쫓아내고 좋은 땅을 차지해 스스로 왕을 칭했습니다.

항왕은 지나가는 곳마다 잔멸(殘滅)에 잔멸을 거듭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가득하며, 백성들이 스스로 항왕에게 의탁한 것이 아니라 그 위세에 겁을 먹어 강제로 복종했을 뿐입니다. 비록 패왕(覇王)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천하의 인심을 잃었으니, 그래서 강성함이 쉽게 약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이를 바로잡고 천하에서 무용(武勇)이 있는 자를 임명한다면 어찌 주살하지 못하겠습니까! 천하의 성읍을 공신들에게 나눠준다면 어찌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의병의 마음을 쫓아 동쪽으로 거병한다면 무엇인들 무너뜨리지 못하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무관(武關)에 입성하여 백성들에게 추호도 해를 끼치지 않고, 가혹한 진의 법을 폐지하고, 백성들에게 약법 3장을 약속하여 진나라의 백성들은 대왕께서 진나라의 왕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왕께서 관중을 빼앗기고 촉으로 쫓겨나 모든 진의 백성들이 한탄하고 있으니, 이제 왕께서 동쪽으로 거병하여 격문을 돌린다면 삼진은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한신
"폐하께서는 오만무례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시나 항우는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폐하께서는 휘하의 장수를 부리시어 성을 함락하고 그 땅을 점령한 다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봉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그 이익을 같이 누리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왕릉
"참으로 애통하구나!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항왕으로부터 천하를 뺏어갈 자는 필시 패공(沛公)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리라!"
범증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마천

5. 영향

5.1. 중국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진나라였지만 가혹한 통치로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는 단명왕조가 되어버렸고, 이후에 건국된 한나라가 400년 가까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한나라가 실질적인 중국의 첫 번째 통일왕조로 기능하게 되었다.[32]

초한전쟁 종결 후부터 한무제의 재위에 이르는 시간동안, 한나라는 역사적, 지리적인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그로 인해, 이전 왕조였던 상, 주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달리 말하면 중국의 통일 왕조라는 위치에서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문화권을 형성하였고, 지리적 터울을 넘어서 이웃 국가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33]

이후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여 신나라를 건국했지만 광무제가 왕망을 물리치고 후한을 건국하면서 황제는 오로지 유(劉)씨만이 할 수 있다는 관념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믿음은 유비가 건국한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한무제 때 국력이 완전히 회복되자 한나라는 본격적인 주변국 원정에 나서 북쪽의 흉노 제압하고 남쪽의 남월, 동쪽의 고조선까지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주변국들이 통일 중국의 국력을 실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2. 한국

초한전쟁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연나라 땅에 거주하던 위만이 진한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무리를 이끌고 단군조선의 마지막 군주 준왕에게 복속하였고 이후 단군조선의 서쪽 국경을 지키다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가 내전의 상처와 흉노의 압박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실시하는 동시에 한나라와 진국 사이에 중계무역으로 많은 이득을 누린다. 또한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철기가 도입된 것도 위만조선 시기이다.

하지만 한나라 무제가 즉위하고 나서 무역문제로 고조선을 압박하였고 협상이 결렬되자 한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결국 위만조선은 멸망하고 만다.

이후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해 지배하려 했으나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점차 밀려나 고구려와 같은 소국들이 성장하였고 마지막 남은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면서 한사군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문화적인 영향으로는 한국의 전통 보드게임인 장기가 이 전쟁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6. 사건 목록

7. 같이보기


[A] 양 쪽에 전부 속함. [A] 양 쪽에 전부 속함. [A] 양 쪽에 전부 속함. [4] 다른 예를 찾자면 남북조시대 국공내전이 있다. 실제로 마오쩌둥이나 장제스를 유방이나 항우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국공 내전도 만주국을 비롯한 일제의 존재가 중국사 다른 시대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삼파전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5] 진시황의 행렬을 보았을 때 태도 차이가 이를 보여준다. 유방은 "대장부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호탕한 한탄을 했다면 항우의 반응은 "저 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다"였다. [6] 보통 세번째는 전국시대 진시황 통일전쟁, 네번째는 칭기즈칸의 중국 정복전쟁 [7] 실제 진승·오광의 봉기 이후 이들에게서 독립한, 혹은 자립한 6국의 후예들은 불과 1년도 안되는기간 옛 근거지를 확보하고, 망국(亡國)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민중을 끌어모았다. 6국 중 가장 강했던 초나라 민중들의 진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특히 강했다. 진승, 오광도 초기에 초나라의 장수 항연의 이름을 앞세웠다. [8] 이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문장은 일반 민중에게, 특히 난을 일으키는 민중에겐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작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고려 무신정권 때의 만적의 난에서도 이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반도로도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9] 하지만 반대되는 자료도 존재하는 것이, 당시에 살았던 진 하급 관료의 무덤에서 발견된 죽간에 수록된 것은 이렇다. "부역에 징발된 인원이 도착하지 않으면 담당자에게는 2갑의 벌금. 3일에서 5일까지 늦으면 견책. 6일부터 10일까지는 1순의 벌금. 10일을 넘기면 1갑의 벌금." 참고로 갑이 순보다 높은 단위다. 이상을 볼때, 보통 알려진 것처럼 진의 법률은 수틀리면 사형이라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나름 고도의 체계를 갖춘 것으로, 후대의 곡가필을 감안한다면 죽지는 않아도 높은 벌금을 물수밖에 없었든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반란이 되겠다는 진승 오광의 판단이 앞섰다는 가능성도 열어둘 수 있겠다. [10] 아래 주석에도 언급하지만, 한대의 법률은 진의 그것을 큰 차이 없이 계승한 것으로, 단지 법가 대신 도가를 표방한 무위지치의 통치로 진보다 좀 더 느슨한 적용을 행한 것이다. 진의 멸망 원인은 단순히 가혹한 법률과 그에 대항한 민중이 아니라, 고대 국가의 제한된 통치력과 고작 15년의 기간으로는 분리되었었던 전국 400년의 세풍을 수습할 수 없었으며 이를 보듬어줄 정책 또한 미비했음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설령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이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았다 한들, 명백히 저런 죽간같은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그런 뻔한 프로파간다를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진나라=가혹한 법률로 내려왔음을 보면 진나라에 대한 증오가 상상초월이었음을 알 수 있는것이다. [11] 역사학자 공원국은 이 부분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았는데, 핏줄도 핏줄이지만 전투에 있어 농민출신이었던 진승은 말도 전차도 몰 수 없었고, 이는 장군으로서의 권위를 세울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그것. 등자가 없던 시절이기도 하고 등자가 발명된 이후로도 동서양을 불문하고 농경사회에서 승마는 귀사족들의 특권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다. [12]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장이와 진여는 먼저 진을 쳐서 쓰러뜨릴 것을 권했으나 일개 농민에 불과했던 진승은 그보다는 왕 자리에 오르는 것을 우선시했다. [13] 한왕 신의 숙부 [14] 초한전쟁 동안의 오창은 교통도 뛰어나서 온갖 군수물품이 모였고 365일 마차행렬이 끓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한나라군의 보급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연히 한군도 여기가 점령당하면 전세가 힘들어 질 것을 알기에 경계가 삼엄했는데 만약 항우가 이곳을 점령해 보급을 끓었다면 전세가 급변했을수 있다. [15] 하지만 결국 상술한 대로 항우는 오창을 점거하는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방, 한신, 팽월, 영포 때문으로 한신은 조, 위, 연 등을 제패했고, 팽월은 제를 기반으로 항우가 성고와 형양을 공격하러 가면 그 뒤에서 게릴라전을 펼쳤으며, 영포 또한 자신의 영토인 남부 지역을 항우의 지배 영역에서 떼어냈다. 유방은 성고와 형양을 직접 방어하면서 항우가 오창을 근거로 서진을 하는 것을 온 힘을 다해 막아냈다. 항우는 이들이 벌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오창과 그 근거지인 성고와 형양을 계속 점거하지 못했고 그 틈을 타 유방은 계속 성고와 형양을 지켰다. 설령 한순간 이 땅을 뺏기더라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병사들을 모아 항우가 없는 동안 다시 탈환해서 항우가 무한 뺑뺑이를 돌게 만들었다. [16] 결국 항우는 동쪽의 팽월, 북쪽의 한신, 서쪽의 유방, 남쪽의 영포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17] 사실 개인적인 감정을 자처하더라도 이 당시의 강동은 개발이 진행되기는 했어도 중원의 생산력에는 영 미치지 못했던지라 정신차리고 권토중래를 하기가 까다로웠다. [18] 정확히는 진희의 반란에 연루되었다기보다는 그 때 팽월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오라는 황명을 씹었다. 거기다 팽월의 미움을 샀던 아랫사람이 죽기 싫어서 선수를 쳐 팽월을 음해하는 바람에 잡혀가게 되었고 이후 여후가 다시 고제에게 팽월을 참소해서 처형되었던 것. 물론 갑자기 벌어진 건 아니고 팽월이 이전에도 몇 번이나 황명을 씹었다는 말이 있었던 만큼 유방으로서도 꽤 벼르고 있던 참에 팽월이 제버릇 못 고치고 눈치없이 군 게 문제가 되었다. [19] 다른 하나는 서초 측의 2대 임강왕 공위. [20] 유방을 옹립할 당시에는 항우에게 형산왕의 자리를 빼앗겼다. [21] 한 행동만 따져보면 후의 수양제 등과 비교될만한 세계사 내에서도 역대급 폭군이였다. 한국의 연산군 등은 애교로 보일 수준. [22] 그래도 요동까지는 수복을 못했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23] 조선으로만 흘러간게 아니라 삼한 지역까지 유민들이 흘러들어가 당시 개발이 덜 되어있던 한반도 남부가 여러 연맹왕국들이 생기고 삼한이 정립되는 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24] 그나마 백기는 장평대전의 고고학적 유물 발굴 결과 전사자를 학살자로 부풀려 과장했거나, 혹은 학살이 있었더라도 수십만에 달하는 학살은 없었으리라고 보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25] 물론 진나라처럼 폭정을 일으키거나 항우처럼 작정하고 학살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유방도 팽월을 이용해 전쟁 내내 초나라 후방 지역을 공격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으며 지속적으로 곡식을 약탈했다. 하지만 대규모로 유랑민을 만든 책임은 대부분 진나라와 항우에게 많이 있다. [26] 애시당초 팽월은 제나라를 근거로 삼아 활동했는데, 주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다닌 이상 그 땅의 주민들과 척을 지게 되면 애시당초 게릴라전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항우는 팽월의 근거지를 없앤답시고 팽월이 근처에 가기만 해도 그 근처 사람들을 죄다 학살하고 다녔고 반대로 팽월은 굳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아도 제나라 사람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27] 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2. 상해를 입힌 자와 3. 재물을 훔친 자 역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행한다. [28] 비슷한 사례로 시용되는 수당제국이란 용어도 있다. 앞쪽 왕조가 단명하고 뒤쪽 왕조가 앞쪽의 체제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29] 초한전쟁 도중에는 기존의 세금 제도는 거의 동결했고 산부라는 제도를 따로 만들어서 운용했다. 이것도 전쟁을 시작한지 2년 후부터나 거두기 시작했다고. 노약자나 청소년을 징집하다보니 대신 유방이 입대자가 나온 집에서는 세금을 거두지 않겠다고 약조했기 때문. [30] 사실 고제는 원래 예법과는 담을 쌓았던 사람이지만 주변의 장수들도 마찬가지로 예법과는 담을 쌓은 인물들 뿐이라 이대로 가면 아무도 황제를 추앙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숙손통에게 예법을 정비하되 자신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시켰다. 이후 숙손통은 자기 제자들과 유학자들을 동원해서 진나라의 예법과 각국의 예법을 비교하고 자를 건 자르고 살릴 건 살려서 새로 간편하면서도 알기 쉬운 예법을 제정하였고 이를 고제에게 보여주자 자신도 할 수 있겠다며 매우 기뻐했고 많은 상금과 벼슬자리를 (주로 숙손통의 제자들에게)하사하였다. [31] 숙손통은 전란 도중 고제에게 자신의 제자 대신 주로 전쟁에 도움이 되는 인재만 천거했고 제자들은 이에 대해 불평했으나 숙손통은 이를 묵살했다. 그러나 이후 전란이 끝나자 그동안 묵혀두었던(?) 자신의 제자들을 대거 추천하였고 이들은 고제 밑에서 관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32] 중국의 민족을 한족(漢族), 의복을 한푸(漢服)라고 부르는 것도 한나라가 중국의 정체성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진나라도 중국의 영어명 China(차이나)에 영향을 주고 법가 사상과 군현제라는 선진적인 제도를 남겼고 무엇보다 통일중국이라는 원형을 제공한 국가이다. [33] 손대현의 논문 초한전쟁 관련 문학의 동아시아적 변이 양상 연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