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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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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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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朝鮮
위만조선 | 衛滿朝鮮
Wiman Chosŏn (Wiman Joseon)
파일:6C69ED59-6C4A-4751-AB14-8525DFFD3978.jpg
▲BCE 108년 당시 고조선 세력도.
위 지도에서 고구려라고 표시된 건 삼국시대의 고구려 왕조가 아니라 예맥족의 원고구려 집단이다.
[1]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08년 (86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단군조선 한사군
고구려
원삼국시대
옥저
동예
<colbgcolor=#8a001b><colcolor=#FFDF00>위치 한반도 북부 일대
수도 왕검성[2]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王)
주요 군주 위만(BCE 194~?)
우거왕(?~BCE 108)
국성 [3]
문자 불명[4]
언어 불명[5]
화폐 오수전, 명도전(?)
종교 한반도 토착 종교
종족 예맥, 화하족[6]
주요 사건 기원전 194년 위만의 정변→위만조선 개창
기원전 109년 고조선-한(漢) 전쟁 발발
기원전 108년 우거왕 암살 및 멸망 →한사군 설치

1. 개요2. 역사
2.1. 위만
2.1.1. 위만: 조선인인가? 연인인가?
2.2. 우거왕과 위만조선의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
3. 정치 사회4. 주변국과의 관계
4.1. 흉노와의 관계4.2. 전한과의 관계4.3. 진국과의 관계4.4. 고구려와의 관계
5. 위만조선은 철기시대의 시작인가?6. 삼한정통론7. 역대 국왕
7.1. 계보도
8. 관련 서적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위만조선(衛滿朝鮮)은 고조선의 두 번째 세습 왕조다. 위씨조선이라고도 한다.

위만(衛滿)을 시조로 하며, 《사기》 <조선전>(朝鮮傳)과 《한서》 <조선전> 등의 중국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고대 국가로, 기원전 194년 ~ 108년 기간 동안 86년 존속했다.

지금의 베트남 일대에 조타가 현지인에 동화되어 세웠다가 한무제에 의해 멸망한 남월과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성립 정황과 멸망 과정이 비슷하다.

2. 역사

2.1. 위만

시조인 위만(衛滿)은 연나라(燕) 출신인 걸로 되어 있으며, 《 사기》에서는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나라에 반(叛)하다 실패하여 흉노로 도망하자 연나라 사람이었던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상하장(上下障)이라는 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당시 고조선은 비왕의 뒤를 이어 평안도 지역에 정착한 준왕의 시대로, 위만은 요동 태수(遼東太守)로부터 변방을 방어하는 외신(外臣) 직함을 받았다. 그런데 차츰 그는 진번조선(眞番朝鮮)과 연(燕)·(齊)의 유민들을 모아 왕 노릇을 하다가, 끝내는 준왕을 내몰고 왕검성(王儉城)에 도읍을 정했다. 이때가 중국 한나라 효혜제(惠帝) 1년(기원전 194년)이었다.

위만은 중국어( 상고 한어)와 고조선 말에 능통했고, 주변 사정에 정통했으며, 주위의 진번국, 임둔국, 옥저 등을 복속시켜 영토의 확장을 꾀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능한 무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1.1. 위만: 조선인인가? 연인인가?

(1) 조선인: 위만이 본래 조선 사람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 증거라는 게 "상투를 틀었다"와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가 있다. 교과서에 따라 '조선인의 옷'이나 '흰 옷'이나 '만이복'으로 나오기도 한다. 정확히는 위만이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었다(魋結蠻夷服)”고 묘사되어 있다. 또한 위만은 당시 조선의 정권을 뺏은 이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으며 법과 문화 등에 일체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점으로 보아 위만을 조선인 계통의 자손으로 본다. 요즘의 '위만 = 조선인'설은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학설 중 정설인 '요동 => 평양 중심 이동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사방 2,000리를 뺏기고 나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 이동설을 기본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침략당한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끌려가거나 연나라와 그 뒤를 이은 진나라의 지배 아래 요동 지방에서 지냈는데, 위만이 그들 중 하나였고, 요동 지방 고조선인들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에 귀순했다고 설명한다. 그 근거로 고조선 ~ 삼한 시절처럼 왕권이 약할 때는 듣보잡이 왕위에 오르면 쫒겨나거나, 내분이 일어나거나 하기 쉽기 때문에 자기 수족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강화시키려 할 텐데 현지인들이 높은 관직에 많이 올랐다는 기록도 있고,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지지도 않았다.[7] 그러니까 위만을 중심으로 해서 유이민 세력과 고조선의 결합이 매우 자연스러웠다는 것. [8] 고고학적으로도 연나라가 고조선을 쳐부수고 요동 일대와 청천강 이서 일대를 영역으로 확보는 했으나, 직접 지배는 요동을 반으로 가르는 천산산맥 서쪽까지만 실시했고 천산산맥 동쪽에서 청천강 이서까지는 거점만 건설한 후 그 나머지는 기존 예맥계 실력자들에게 대폭 자치를 허용한 걸로 드러난다. 위만도 이런 연나라 영역 내부의 조선계 실력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2) 연인 내지는 연인이어도 한족이라 볼 수 없다는 시도: 호복을 입었다거나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남월(현재의 베트남)에 간 조타도 연나라 출신이지만 현지인의 모습을 하고, 현지인에 어우러져 지배자가 된 역사가 동시대에 있다.[9] 또한 연나라의 진개가 조선을 공격한 것은 위만보다 80여 년 전인 BCE 281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만일 위만이 지금과 같은 민족주의적 개념이나 국적이 없던 그 시대에 3대가 외국에서 산 사람이었다면 그런 그를 굳이 조선인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다만 위만 = 조선인'설을 부정하는 측에서도 이 이동설을 토대로 연나라 출신이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과 접촉하여 어느 정도 조선의 문화에 동화된 상태였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3) 의미가 없다: 해당 내용을 정독하고 고민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 이는 큰 의미가 없다. 남월에 진나라 장군 출신인 조타가 갔다고 해서 그 당시 베트남이 진나라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그가 조선인이든 아니든 위만의 출신 성분이 그 당시 조선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즉 그런 것은 고려할 바가 아니며 그렇게 따지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점령한 그리스,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이후 역사가 전부 마케도니아사에 편입되는 것인가? 단지, 위만의 등장은 외래의 강대한 세력에 의해,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과 떨어져 있었던 조선이 한나라 시대의 확장에 의해 직접적인 교류가 생기고, 동북아시아사에 편입되었다는 의미를 가질 뿐이다.

2.2. 우거왕과 위만조선의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 다시 손자에 이어 주었는데 아들에 대해선 기록이 없고 그 손자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이다. 이와 같이 국가적 정체성이 갖추어지기 시작했으며, 우거왕 대에 이르러서는 진번, 임둔 등 주변지역을 복속해 현재의 한반도 북부 대부분 지역 및 남만주 일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한반도 남부 지역과 중국간의 교류를 방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전한 세종 무황제 유철의 확장 정책하에서 기원전 109년 ~ 108년 조선 원정이 있었으며, 왕검성 전투 등 원정 자체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왕자인 장을 비롯한 주요 세력의 자발적 이탈이 빌미가 되어 멸망했다.

하지만 고조선 멸망에 공헌해 봉직 / 직위를 수여받은 자들 중 일부는 부흥 운동으로 추정되는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한사군이 설치된 지 3년 만인 기원전 105년, 기후(幾侯)에 봉해졌던 우거왕의 아들 장항(張降)이 모반을 꾀하다가 참수당했으며, 고조선 멸망 당시 한나라에 내통했던 니계상 참은 기원전 99년 조선인을 숨긴 죄로 하옥되어 죽었다.

3. 정치 사회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역사발전 단계상에서 후기(將軍職)로 편제하여 국가적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정치적 지배 체제를 갖춘 고조선은 국가적 통치를 위해 일정 지역들을, 지역적 구분을 두고 통치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결국 위만조선의 국가 형태는 최고 수장인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재지수장층의 누층적 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 형태였다. 한나라 시대에 기록된 《8조금법》의 내용이나 비왕, 대부와 같은 재지수장층을 기본으로 하는 기초적 관료 체계가 형성되기는 했으나, 삼국시대 중기나 동시대 한나라에 상응하는 충분한 관직 및 통치 체제는 발전되지 못했다. 다만 우세한 병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으로 넓은 영토를 가졌고, 정복 지역에 대해 공납적 지배관계를 실현하는 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삼국 초기까지 이어지다가 4세기 이후 고대 국가가 완성되면서 공동체적 제약을 극복하고, 왕에 의한 전제적 고대 국가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위만조선은 기원전 3세기 연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의 영향력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 일대로 축소되었던 것을 현재의 북한 전지역 및 랴오닝 성 일부를 영향력하에 넣으며, 고조선을 다시 강대국의 지위로 올려놓았다. 학자에 따라 이견이 심하나 직접적 지배는 청천강까지 확실시되고 있으며, 이후 현도군의 설치로 미루어보건대 가장 강성할 때는 요동 반도에 위치한 천산 산맥 ~ 압록강 일대를 완충지역으로 하여 중국과 마주한 듯 보인다.[10] 이외에도 한반도에서 주변 부족 내지 부족연합들을 다수 복속시키며, 진번(황해도 지역으로 비정) 및 임둔(함남 지역으로 비정)을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였으며, 남쪽의 세형 동검 문화권에 비해 우세한 문화적•정치적 위치를 차지한 듯하다. 이후 한사군 시절에조차 진번과 임둔의 모든 지역을 통솔하지 못하고, 이들이 후한 시대까지 점차적으로 이탈했음을 생각한다면 위만조선의 전성기에는 한반도 북부 사회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4. 주변국과의 관계

4.1. 흉노와의 관계

흉노는 위만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킬 때 '흉노의 왼팔이 잘렸다.'고 중국 사서에서 표현하기도 했으며 위만조선 왕이 내린 작호 중 하나인 '비왕'(裨王)은 흉노족의 '비소왕'(裨小王)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당시 위만조선이 흉노와 연계하여 아마 한나라에 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전한과 마찰이 생겼을 수 있다.

다만, 흉노의 왼팔이라 끊으려고 했다는 중국 측의 기록은 위만조선 정복을 합리화하려는 한나라의 프로파간다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서역 진출 때에도 서역이 '흉노의 오른팔'이라는 주장을 하며, 복속시켰던 점을 보아도 한무제의 동•서방 경략의 원인을 흉노에게 돌리려던 정황은 충분하다. 《사기》, 《한서》 등을 보아도 흉노와의 연계 기록은 '흉노(匈奴)의 좌비(左臂)'(《한서》 <위현전>)라는 표현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실제로 한무제의 동방 및 남방 경략은 주변 이민족에 대한 한 제국의 기존 정책인 외신으로서 변경을 안정시키려는 정책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과 반한(反漢) 노선을 추구한 남월, 조선 등의 국가에 대해 그보다 높은 단계의 관리 정책을 추구하여 직접 지배를 추구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주류적 견해이다. 그 결과로 동방 4군 및 남월 9군이 설치된다. 다만, 서북한 지역 고고학 유물에서 북방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을 흉노와의 연계의 증거로 보는 견해도 있다.

4.2. 전한과의 관계

위만조선 전한의 사람들이 많이 귀화도 하고, 교류도 활발히 하는 등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다. 초대 위만왕 대에는 전한에 외신으로서 조공하고, 그 대가로 주변 한반도 서북 지역에 대한 우위권을 인정받으며, 선진 문물을 교류하는 등 한 제국의 조공-책봉 체제에 포함되어 발전을 했다.

하지만 제3대 우거왕 대에 들어서면서 진국과 한 제국간의 직접 교역을 막고, 무역을 독점하는 등 반한 노선을 추구하자, 분노한 전한에서 군사적, 외교적인 압박을 주며 신하국이 되라는 등 마찰이 점차 생기자 결국 전쟁이 벌어졌고, 국력에서 열세였던 위만조선은 당해낼수가 없다가 그로 인한 내분으로 우거왕이 살해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다만 이후 한나라가 한반도 남부 삼한 거수들과 가졌던 관계가 재미있는데, 위만조선이 건재했을 때는 한반도 남부 세력들과 직거래를 트려고 했었고 위만조선이 반대해서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던 것인데, 실제로 거래할 때는 편의성을 이유로 늘 중개 세력을 선정해서 무역을 했다는 점이다. 소위 마한왕, 진한왕, 변한왕이라고 일컬어지며 다른 마한 거수들보다 명분상 우위에 있던 세력들이 그것이다. 한나라가 보기에 이런 군소세력들은 낙랑군을 위협하기엔 다소 약소했다고 판단되었고, 일일히 군소 거수국들과 무역하기엔 번거로웠는지 위만조선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꽤 유화적으로 나온 편이다.

그러나 삼한 세력의 역량, 그중에서도 마한의 역량이 점차 성장하는 것에 중원 제국이 경각심을 느끼게 되면서 이런 관계는 바뀌게 된다. 기리영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

4.3. 진국과의 관계

그 당시 진국 전한과 직접 교류하려 했으나 당시 위만조선은 진국이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교역할 때는 반드시 조선을 통해서 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때의 진국과 전한 사이 중계무역으로 당시 위만조선은 큰 이익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한나라는 BCE 109년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조선을 설득하려 했으나 당시 위만조선의 왕이었던 우거왕을 결국 설득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당시 전한과 위만조선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전한과 위만조선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진국과 위만조선, 전한의 삼각관계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 셈. 전투가 끝나고 (전쟁 전에 내려간 조선상 역계경과 더불어)[11] 수많은 고조선 유민이 훗날 삼한이 될 한반도 남부로 망명해 삼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위만조선 유민들이 가장 많이 유입된 곳은 다름아닌 침미다례 일대였다. 침미다례는 그 전에도 유리한 입지와 좋은 기후 덕택에 잠재성은 컸지만, 선진 기술과 앞선 정치 문화를 경험한 위만조선 유민들이 대거 침미다례로 흘러들어 기존 침미다례 선주민이었던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에게서 주도권을 가져오면서 더욱 큰 번영을 이루게 된다.[12] 다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그보다 약 백 년 전 조선인들, 즉 준왕계 조선인들이 먼저 이주했던 전북 일대에는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한 이해못할 고고학적 현상이 발생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한편 침미다례 다음으로 위만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은 고고학적으로는, 삼국사기에 사로국을 구성한 6부촌이 조선 유민이었다고 서술한 오늘날의 서라벌 일대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요약하면 위만조선인들의 남하는 침미다례 신라를 구성하게 되는 인적 자원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13]

진국의 실체는 불분명하나, 소국 이전 단계 또는 소국 내지 소국연맹 단계로 추정되며 크게 두 차례의 유이민 파동[14]을 거치며 당대 한반도 최고의 선진지역이었던 위만조선 지역의 세형 동검-초기 철기 문화를 수용하여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진국은 《후한서》 및 《정사 삼국지》 <위지>에서 진한 또는 삼한의 전신으로 이야기된다.

4.4. 고구려와의 관계

위만조선은 한씨조선이 연나라에게 대패해서 요동에서 밀려날 당시 잃었던, 압록강 너머 요동 동부 변경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었다. 말하자면 훗날 고구려로 성장할 지역인데, 단 위만조선 입장에서는 약 백수십 년 만의 고토 회복이었으나 그 일대에서 연나라의 간섭도, 조선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살던 한씨조선의 잔존 예맥인들 입장에선 영 맘에 들지 않는 처사였다. 이 일대는 위만조선이 망한 뒤에는 현도군 관할이 되며, 이후 해당 지역민들의 저항으로 점점 퇴축하다가 고구려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된다. 이 지역은 위만조선이 망한 지 사백 년 만에, 훗날 미천왕 시절의 낙랑군 점령으로 다시 평양 일대와 같은 나라 아래에 있게 된다. 물론 이 당시에는 고구려가 건국될 지역이 변경이었고 평양 일대가 중심지였던 반면, 미천왕 정복 직후에는 그 반대였음이 재미있는 사실이지만.

5. 위만조선은 철기시대의 시작인가?

보통 이때부터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철기 문화란 단조 철기의 사용을 말하는 것으로 초기 철기시대에 틀에 부어 만드는 철도끼와 같은 작은 공구류가 아니다. 즉 철제 장검, 철제 투겁창, 철제 괭이와 같이 두들겨 만든 철기를 사용한 시기를 말한다. 《사기》 <조선 열전>에 의하면 위만이 혜제 ~ 여후(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0년) 시대에 '병위재물'(兵威財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근거해 비로소 한반도에도 철기 문화가 수입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위만조선 시대에는 위의 철기 문화와 관련한 유적이 확인되고 있지 않다. 북한에서 고조선에 대한 유적들이 발굴되고는 있지만 북한학계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져서 신용을 못얻어서 그렇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낙랑군 유물 / 유적으로 보고 있는 일부 유적 연대를 끌어올려서 위만조선 시대 유적이라고 하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근거가 부족하고 반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보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6. 삼한정통론

'삼한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 후기 국학 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한국사 왕조의 정통성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 없고, 적통인 기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에서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닌 조선 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었으나, 전북 마한 세력과 한씨조선 사이에 있는 고고학적 연속성이 최근 부정할 수 없이 확인되면서 어느 정도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즉, 적통 운운에서 의미 찾는 이들은 더 이상 없지만 전북 마한 일대가 위만 이전 조선과 강력한 연계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7.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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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계보도

8. 관련 서적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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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820000> 단군조선
초대 군주 계보 미상 제?대 조선후
조선후 ?세
<rowcolor=#ffd400> 계보 미상 초대 왕 제2대 왕 제3대 왕
조선왕 1세 조선왕 2세 조선왕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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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 준왕
<rowcolor=#820000> 위만조선
<rowcolor=#ffd400> 초대 제2대 제3대 멸망
위만왕 □왕 우거왕
' 기자'의 재위 및 '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함.
' 한후'는 고조선 군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음.
}}}}}}}}}}}}



[1] 이전에는 예맥(원고구려)과 진번-옥저 일대를 제외한 외국 학계에서 비정하는 영토를 올려놓았으나, 현재 한국 학계에서 비정하는 영토가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세력권으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사진을 교체한다. [2]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지만 현재의 평양 일대라는 설이 많다. [3] 국성이 정말 '위'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4] 고조선이 남긴 문자는 남아있지 않고(단,경남 남해군의 항아리바위에 있는 석각(石刻)등이 고조선 문자라는 주장도 있다.) 한나라 측의 역사서에 조선의 풍습이 조금이나마 언급된 수준이다. [5] 단, 고조선이 한국사에 포함되기 때문에 퉁치는 것이고, 고조선의 어휘에 대해서 남은 자료는 양웅의 방언으로 일부 알 수 있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언어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대해서 단언하기 어렵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한국어족에 속하는 예맥어로 상정했다. [6] 중원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피난민이 유입되었다. [7] 사실은 기록이 너무 적어서 현지인이 관리에 얼만큼 올랐는지 등은 정확히 알 수 없다가 정답이다. [8] 그러나 갈등이 없었을 리는 없다. 당장 준왕이 자신을 따르는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 마한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이 당시 고조선계 집단이 전북 서부 일대로 대량 남하한 게 확인된다. 당시 고조선 사회에서 위만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역시 적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9] 생각해 보면 망명해 온 주제에 중국풍 복식을 고집하는 태도가 더 이상할 것이다. 조선풍 복식을 입은 것은 준왕 등 기존 지배계층의 신임을 얻기 위해 벌인 정치적 퍼포먼스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10] 한나라의 창해군 설치 시도의 실패, 연화보 - 세죽리 문화 등의 존재 [11] 조선상 역계경은 전쟁 이전 우거왕의 대한(對漢) 정책에 반대했으나 본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본인 휘하의 민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망명했다. 고조선 멸망 이후의 유이민 파동과는 다른 인물이다. [12] 물론 이후 침미다례에는 백제 건국 세력 중 하나와 묘제 및 문화가 같은 토돈분구묘인들도 들어오게 되지만, 위만조선인들에게서 침미다례의 주도권을 가져오진 못했다. 옹관묘 전통은 주로 위만조선계 조선인들이 주축이 되어 확립한 묘제 전통이다. [13] 단, 사로국을 건국하여 초기 지배층이 된 주체는 기원후 2세기 초중반 경 옛 진번 일대에서 남하하여, 서라벌 선주민 집단인 전국연의 요서-요동 정벌 당시 남하한 조선인 집단, 위만 집권기에 남하한 조선인 집단, 위만조선 멸망시 남하한 조선인 집단, 이 세 집단을 아울러 하나로 묶은 낙랑인 집단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사로국의 위만조선계는 신라 초기 6부의 일부는 이뤘지만 박석김에는 들지 못했으니 침미다례에서와는 달리 주요 지배층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14] 위만의 역성혁명, 위만조선 멸망 및 한사군 설치 [15] 《사기》 <조선전>에 '傳子至孫右渠'{(왕위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에 이르니}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위씨왕조의 왕위는 위만의 아들을 거쳐 우거왕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