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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08

고황후 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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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황후 시호 박탈 후 고후(高后)로 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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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황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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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고제의 황후
高皇后 | 고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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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 출생 기원전 241년 진(秦)
사망 기원전 180년 8월 18일 (향년 61세)
전한 장안 장락궁(長樂宮)
능묘 장릉(長陵)[1]
재위 전한 황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7년)
전한 황태후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 (7년)
전한 태황태후 (섭정)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80년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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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 여(呂)
치(雉)
아후(娥姁)
시호 고황후(高皇后) → 고후(高后)[2]
부모 부친 여선왕 여공
형제 큰오빠 여도무왕 여택
둘째 오빠 조소왕 여석지
언니 여장후
여동생 임광후 여수
부군 전한 태조 고황제
자녀 전한 효혜황제, 노원공주 }}}}}}}}}

1. 개요2. 생애
2.1. 황후가 되기까지2.2. 여씨(呂氏) 천하2.3. 죽음과 여씨 천하의 몰락2.4. 대외 관계
3. 평가
3.1. 긍정적3.2. 부정적
4. 대중매체에서5. 여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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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의 초대 황제인 고조(고제) 유방(劉邦)의 아내이자 황후였다. 시호는 남편인 유방의 시호인 고황제(高皇帝)에서 따와 고황후(高皇后)[3]였다. 그리고 기록에 남은 중국 최초의 황후[4]이자 최초의 황태후 태황태후의 이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2. 생애

2.1. 황후가 되기까지

이름은 여치(呂雉)로 한자로는 '꿩 치(雉)' 자를 쓴다. 때문에 한나라 당대에는 피휘하여 꿩을 가리킬 때 雉(치) 대신 野鷄(야계, 들닭이라는 의미)라는 표현을 썼다. 흔히 《 사기》의 <본기> 제목으로 쓰인 여태후나, 여후(呂后) 같은 '성+지위'로 된 명칭으로 불린다.

산현[5]에서 태어난 부유한 집안의 여식이었으나, 아버지인 여공(呂公, ? ~ 기원전 203)[6]이 할 일 없이 패현[7]에서 배때기나 벅벅 긁고 굴러다니는 유방을 보고 그의 몸에 서린 왕기를 간파한 후, 억지로 주겠다 주겠다 애원해서 시집보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그녀가 뒤에 숨어서 이야기를 듣다가 유방이 계속 거절하니 직접 면담해서 혼인했다고 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공이 패현으로 이사했을 때 집들이 연회가 열렸는데, 이 연회에서 여러 관리들이나 호걸들이 여공에게 잘 보이려고 하례금을 바쳤다. 이때 하례금을 걷는 일을 맡은 현 서기 소하가 하례금의 액수가 1000전 이하인 사람들은 대청 아랫 자리에 앉게 하였는데, 완벽한 무직백수거지건달인 유씨네 막둥이가 들어와 하례금 1만 전이라 당당하게 외치고 들어왔다. 이것을 본 여공이 깜짝 놀라 직접 나와서 유방을 맞이했는데, 본래 관상을 즐겨 보던 여공이 한번 유방을 보고서는 그에게서 꽤 그럴 듯한 면모를 감지했는지, 유방을 극진히 대접하며 귀빈석에 앉게 했다. 소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다.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허세만 가득하고, 큰소리만 치지 정작 이루는 것은 없습니다."
적당히 눈치보다가 조용히 꺼지라는 암시였지만, 유방은 그런 말은 다 무시해버리고 계속 귀빈석에 앉았다. 앉아있는 것도 일인데, 태도가 너무 당당했으며 접대를 사양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슬쩍 유방을 자리에 남겨놓더니 자신의 딸인 훗날의 여치와 혼인시키려 하였다. 이에 여공의 부인이 "아니, 현령이 혼맥을 맺자고 할 때도 내키지 않았거늘 저런 놈팽이에게 딸을 주다니요?"하고 노발대발했지만,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아!" 하면서 무시하고 기어코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고 말았다.

여치는 대담한 기질에 내면에 무서울 정도의 야심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심지어 포로가 되어서 서초의 패왕 항우 앞에 포박당해 있을 때도
네놈이 뭘 어떻게 할 거냐. 죽일 테면 죽여봐라. 너 따위는 내 남편의 상대가 안 된다.[8]
라는 태도를 유지해서, 항우는 물론 같이 포로가 된 시아버지 유태공도 모두 벙찌게 만들었을 정도로 담력이 출중했다.

가족을 무척 아꼈다. 다만 종친들에 비해서 자식에겐 유방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팽성대전 와중에 어찌된 일인지 혜제와 노원공주(魯元公主, ?-기원전 187)가 둘이서만 길에 버려져 있었던 것과[9], 유여의 독살사건 이후 혜제에 대한 행동이 그것이다.[10]

유방이 건달 시절에 사고를 쳐서 도망다닐 때마다 대신 형벌을 받고 옥살이를 했으며[11] 유방이 거병해 곳곳에서 전투를 치를 때도 그냥 담담히 자기 할 일을 하며 확실히 집안 내조를 했으며, 결국 아버지 여공이 바란대로 귀인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잔인무도함의 시작[12]이었다.

현대인들에겐 유방의 토사구팽 설화가 유명하여 거의 토사구팽의 대명사 같은 교활한 인간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토사구팽의 사례라고 하는 한신, 팽월, 영포. 이들 모두, 죽을 죄를 몇 번이나 저지른 것을 유방이 엄청난 인내심으로 계속 살려주다가 끝끝내 죽이게 된 것이다. 한신은 유방의 참모로서 제나라와 평화 조약을 맺은 역이기를 시기하고는 자기 공 세운답시고 독단으로 제나라를 침공하여 극대노한 제나라 왕에게 역이기가 삶겨죽게 만들었고, 그 제나라의 민심이 당연히 안 좋아지니까 안정화시키게 자길 제나라 왕을 시켜달라면서 땡깡을 부리며 자기 상관에다가 능력을 알아준 유방을 협박하는 미친 짓거리를 일삼았다. 명령 불복종에, 팀킬에, 하극상에, 배은망덕까지 정말 하나하나가 안 죽이는 게 호구일 정도의 패악질이다.
팽월은 나오라는 해하 전투 때 안나오고 땅 좀 더 달라면서 땡깡을 부려대고 통일 이후에도 오라는 인사도 잘 오지도 않으며 중앙 정치 따위는 개밥으로 알았다.
영포는 그냥 자기도 황제 해보고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반란을 했다. 당연하지만 민중의 호응 따위는 없었다.
팽월도, 한신도 유방이 직위를 박탈하는 선에서 끝내려는 것을 최종적으로 여후가 나서서 처단했다. 영포는 유방이 늙어서 병치레를 하고 있으니 친정을 못할거라고 잘못 판단했다가 진짜로 친정을 나온 유방에게 뼛속까지 털려버리고는 강남으로 빤스런을 치다가 현지인들에게 그대로 살해당했다. 다른 모반 이성 제후왕인, 옛 유방의 친구 노관은 '유방이 병들었고 여후는 왕들을 숙청하니…'라 하면서 여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반을 철회하지 못했고, 유방이 쾌차하면 죄를 빌 생각이었으나 결국 유방이 붕어하자 북방의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그리고 유방은 원래 잘못을 해도 쿨하게 봐주는 성격이다.
항우의 핵심 부하로서 몇 번이나 유방을 죽을 위기에 몰아넣은 계포가 항우가 죽고 도망치자 당연히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이때 계포를 숨겨주던 주가라는 사람이 ”계포는 항우의 부하니까 항우한테 충성을 바쳐서 명령을 받든 겁니다. 신하가 주군의 명령을 이행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렇다고 항우의 신하를 다 죽일 겁니까? 황제로써 천하를 얻었는데 지금 사사로운 원한으로 계포를 죽이면 황제의 도량이 작다는 걸 천하에 보이는 겁니다.“ 라고 간언했고, 유방은 바로 계포를 살려준다. 이후 계포는 한나라의 정부의 일원까지 되었고, 섣불리 흉노와 전쟁을 걸었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어 유방의 은혜를 갚았다. 옛날 사람들이 한 걸 지금 보니까 용서가 쉬워 보이는 거지, 자기를 몇 번이고 죽일 뻔한 사람을 살려주는 건 정말로 보통 도량이 아니다.

점점 정치에 개입하는 여후의 행동이 눈 밖에 난 것인지는 불명하나, 한고조는 뜬금없이 황태자인 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가장 총애하는 측실 척부인(戚夫人)의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유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무위지치' 체제가 시대의 흐름인 것에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벌일 것도 아닌데 유영의 성격이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고작 몇 년 전에 후계 구도를 뒤집으며( 사구정변) 억지로 황제에 오른 뒤 아예 진나라를 말아먹은 2세 황제 호해의 전례까지 있다보니 곧바로 주창(周昌), 숙손통 등 모든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고집을 부리는 유방으로 인해 여후가 근심하자, 어떤 사람이
폐하는 유후께서 하는 말만큼은 꼭 들어주시니 유후를 한편으로 만드십시오.
라고 간했다. 장량을 찾은 여후는
당대의 은사(隱士)인 상산(商山)의 4호(四皓)[13]를 데려다가 황제의 눈에 띄게 하십시오.
라는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했는데, 자기가 불러도 오지 않던 명사들이 태자 유영을 따르는 것을 본 유방은, 결국 태자 폐위를 포기하게 되었다.[14] 대신 유여의를 조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부인과 함께 가도록 했으며, 자기가 죽은 후 여후가 유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하여, 태자 폐위에 반대해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유방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을 때 여후가 고명을 청하며, 재상인 소하가 연로했으니 후임 재상을 누구로 할 지 물었다. 유방은 소하의 후임으로 조참을 지목했다. 여후가 조참 사후에는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까 물으니, 왕릉이 좋겠는데 내정은 진평이, 군사는 주발이 보좌하게 하라고 말했다. 여후가 다시금 두 사람의 후임을 물으니, 유방은 뭔가 눈치를 챘는지 아니면 짜증이 났는지 다음과 같이 쏘아붙이고 대화를 접어버렸다.
그 뒤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

2.2. 여씨(呂氏) 천하

유방이 임종하는 자리를 지킨 여후는 잠시 욕심이 솟아서, 유방의 붕어를 숨기고 황명을 사칭해 개국공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신이 공식적으로 정권을 장악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우연히 정황을 포착한 역상이
" 번쾌 진평 같은 공신들이 거의 대부분의 군사를 데리고 바깥에 나가있는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며 넌지시 압박하자 계획을 포기했다. 이에 유방의 장례를 치르고, 공신들을 자극할 생각도 거두었다.

하지만 아들인 혜제 유영의 자리를 위협한 척부인 유여의에 대한 원한만은 접지 않았는데, 유방이 붕어하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곤형을 가하고, 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채워서 궁녀를 가두는 감옥인 영항(永巷)에 감금시키며 하루 종일 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에 척부인이 <영항가(永巷歌)>를 지어 노래하며 여후의 행동을 비판하자, 분노한 여후는 척부인의 아들인 조왕 유여의를 수도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조나라 재상이 된 주창은 여후의 의도를 파악하고 세 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환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방패막이인 주창을 소환해 유여의를 지킬 사람을 치워버렸고 결국 조왕 유여의는 소환되었다. 유여의는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고, 궁궐에 입궐했다.

모친인 여후와 달리 인자한 성격이었던 혜제는 이런 어머니의 속셈을 간파하고는, 미리 이복동생을 마중나가 바로 자신이 기거하던 건물로 데려온 후, 침식을 모두 같이 하며 옆에 끼고 보호했다. 그러나 혜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여의는 혜제가 아침 일찍 활쏘기를 하러 나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아직 10세인 어린아이라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조왕 유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기반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수족을 자르고, 눈을 뽑은 후, 음약(瘖藥)을 먹여(또는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15] 돼지우리(뒷간을 겸하는)에 던져졌다.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참고로 여기 쓰인 '돼지 체(彘)' 자는 거의 쓰이지 않는 벽자인데,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다. 춘추전국시대때의 글에는 종종 보이는 글자지만,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겨 사용을 꺼리면서 한나라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사장된 것이라고 한다.

야사에는[16] 척부인의 음부를 짓이겼다거나 남자 죄수들에게 던져 주었다고도 한다. 또한 척부인의 아들이었던 조왕 유여의의 시체를 가져와 보여주며 그녀를 농락했다고 한다. 이 사람돼지 일화는 여후의 잔학함을 잘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일화다. 특히 여후는 유방의 다른 첩들도 궁에 유폐하는 등 박대했으나 이렇게 잔인한 죽음을 당한 것은 척부인이 유일했다.

원한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유방 사후 명분과 세력이 없는 유여의를 죽이고 척부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옹호가 불가능한 악행인 것은 자명하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척부인도 마냥 억울한 피해자로 보기 힘들었다. 인간돼지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 여후의 잔혹성만 집중해서 많이들 잊어먹는 부분인데 비록 유방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 크긴 하지만[17] 이미 정통성이 확실한 태자를 교체하는 부분에 대해서 비록 외척이나 파벌을 끌어들여 대립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딱히 사양하지 않는 걸 넘어 자신이 직접 유방 앞에서 유여의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매일 밤 울며 애원하고 결국 조정 대신들의 반발로 태자 교체가 실패하자 대놓고 슬퍼하며 자기 아들을 후계로 삼으려는 욕심을 드러낸 척부인은 여후에게는 분명히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이며 내명부의 수장인 황후의 입장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때문에 태자 교체 사건에 한해서 척부인은 미천한 출신이며 별다른 지지세력도 없는 일개 후궁으로서 개국공신 가문 출신의 귀족으로 유방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물심양면으로 내조한 조강지처이자 태자의 모후로서 가히 천지차이의 입지를 자랑하는 황후인 여후의 권위를 건드는 하극상을 저지른 가해자였고, 여후와 유영 역시 태자 교체 사건에서만큼은 피해자가 확실하며 신하들이 춘추시대 진(晉)나라 헌공의 애첩이었던 여희의 사례를 들면서까지[18] 태자 교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은 여후의 본성을 몰라서도 아니고 여후 모자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전한 이전 2세 황제 영호해 치세하의 통일 제국 진나라가 멸망한 것은 호해의 폭정만이 아니라 그의 정통성이 너무 떨어져서 지지도가 너무 낮았던 것도 원인이었다. 호해는 부소 다음의 차남도 아니었고 18남이라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호해는 계승권이 없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될 수 없는 여자 형제들까지 전부 살해하며 지저분하게 제위에 올라야 했고, 정통성이 떨어지는 군주가 폭정까지 행하니 내부 분열이 빠르게 일어난 것이었다.

이런 사례들이 있었으니 신하들은 내란 끝에 세워진 한나라와 유방을 위해서라도, 후계와 관련된 유방의 그릇된 선택을 목숨과 커리어를 걸어서라도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적장자만이 가문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실의 자식인만큼 정통성이 정당하고, 증명된 권력 기반이었다는 소리로[19] 여후가 척부인을 증오한 것은 단순히 치정 문제로 인한 투기로 증오한 것이 아니라 제위를 노려 입지와 목숨을 위협한 정적으로 여긴 정치적인 이유와 당대의 상식적인 이유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매번 언급되지만 율법에 적힌 처벌로도 충분히 해도 될 것을 복수심에 눈이 돌아가 어린 제후왕을 암살하고 잔인한 사적 제재를 가한 것은 옹호할 수 없는 사안이 맞다. 실제 기록에 남은 척부인과 관련된 여후의 비판 의견들도 자세히 보면 잔혹성과 비인간성, 도넘은 복수심과 지나친 투기를 주제로 비판했지 황후가 주제넘게 황제의 후궁을 죽였다고 비난하거나 척부인을 동정할 지 언정 그 행동을 옹호한 경우는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척부인의 행동도 질타 및 처벌받을 사안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정실로서 첩을 벌한 것 자체는 타당하게 여겼거나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20]

그나마 이걸로 끝냈으면 잔혹하다는 평가로 그쳤을 지 몰라도 여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기 아들인 혜제에게도 인간돼지가 된 척부인을 보여주었다. 아마 자신보다는 유약한 성품인 아들에게 황제 지위에 도전하는 자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며 강해지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겠지만 참혹한 광경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대로 드러누웠던 혜제는 눈을 뜬 뒤
"사람이 되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인 저 또한 무슨 염치로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라고 말한 후 정치에서 손을 뗀 채 술독에 빠져 버렸다고 한다. 결국 혜제는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단 미쳐서 틀어박혔다는 혜제가 이후로도 여기저기 나타나곤 했기 때문에 정말 폐인 같이 살았는지는 의심스럽다. 정치에서 손을 놓은 이유는 단순히 트라우마로 마음의 병을 얻어서가 아니라 당시 재상이었던 조참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아들 혜제가 죽은 이후, 전소제가 즉위했지만[21] 나이가 어렸기에 여후가 섭정으로서 제국의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이때 곡을 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진평은 이것이 신변에 불안감을 느껴서 그런 것이라는 조언을 했고, 이에 한제국의 군권을 큰오빠 여택의 두 아들들이었던 여태·여산과 작은 오빠 여석지의 아들이었던 여록 등 친족들에게 맡겼는데 이것이 여씨 천하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측근인 심이기의 직위가 좌승상인데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낭중령까지 겸임하게 하면서 위병을 전부 통제하에 놓았고, 황명의 출납을 둘이서만 맡으면서 궁궐의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심이기는 여후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돌아서[22] 혜제에게 죽을 뻔했다. 대신들도 다들 심이기를 싫어했기에 나몰라라 했다고. 여후 사후에는 공신들의 주적이 되어서 탄핵되었고, 여씨 몰살 후 잠시 복직되었지만 한문제 3년, 회남왕 유장에게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남편 유방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연왕의 자리를 큰오빠 여택의 손자인 통에게 주었고, 이를 위해 전임 연왕인 유방의 서자 유건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러던 중 전소제 유공이 자신의 친모가 여후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이만 들면 여후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이 여후의 귀에 들어갔다. 여후는 황제가 성장하면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우려하여 유공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후소제 유홍을 즉위시켰다. 이때는 명목상 새 황제가 즉위했는데도 연호조차 바꾸지 않았다.

여후의 주무기(?)는 짐주(鴆酒)라는 이름의 술을 가장한 독이었다. 이것은 독사를 먹고 사는 새인 짐새의 깃털로 담근 술이었다고 한다. 조왕 유여의도 이것으로 죽였고, 혜제가 권했다고는 하나 황제보다 상석에 앉으려고[23] 했던 제왕 유비를 보고 위험시해 연회중 혜제와 건배할 때 짐주로 바꿔치기 해서 먹이려다가 되레 자기 아들내미가 그 잔을 잡고 마시려고 하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잔을 엎어버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제왕 유비는 여후의 친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의 상당 부분을 헌납하는 것으로 여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때가 딱 인간돼지 사건으로 시름시름 앓던 혜제가 모처럼 일어났던 때였다. 어린 동생과 그 어미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1년을 내리 앓던 아들에게 이번엔 그 눈 앞에서 보란듯이 다른 형제를 독살하려고 한 것이다.

그나마 제왕 유비는 운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조왕 유여의는 짐주를 먹고 사망했으며, 또 다른 유방의 서자였던 조유왕 유우는 조나라에서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여태후에게 잡혀서 굶어죽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여태후는 조유왕을 죽이고 또 다른 유방의 서자인 유회를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겨 조공왕으로 삼고, 또 여씨의 사위로 삼았는데, 조공왕이 딴 여자를 사랑하자 이 여씨 왕비가 짐독으로 그 여자를 죽였다. 조공왕은 상심이 커서 자결했고 여태후는 조공왕이 여자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며 조나라를 조공왕에게서 뺏아 자기 조카인 여록(呂祿, ? ~ 기원전 180)에게 주었다.

결국 유방의 아들들 중 여후의 친아들인 혜제 유영에다가 유비, 유여의, 유회, 유우, 유건의 여섯 명이 여후 때문에 여러모로 불행해진 셈이었다. 그나마 대왕(代王) 유항(훗날 한문제)과 회남왕 유장만이 멀쩡할 수 있었는데, 대왕 유항은 어머니 박씨가 유방에게 총애받지 못했기에 피해갔고[24], 두 동생 조유왕과 조공왕이 횡사한 후 여태후가 조나라 왕위를 제안하자 겸손하게 거절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회남왕 유장은 어머니 조씨가 여태후와 무관한 건으로 죽었는데 그 후 여태후가 키워줘 그나마 정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러나 이 유장마저 어머니가 일찍 죽은 것을 불쌍히 여긴 문제가 유장을 오냐오냐 길렀고, 이에 유장이 점점 비뚤어져,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된다.

2.3. 죽음과 여씨 천하의 몰락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여태후였으나 그도 사람인지라 말년에 가면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죽음의 계기도 심상치가 않았는데, 《사기》 〈여태후 본기〉에 따르면 갑자기 나타난 푸른 개처럼 생긴 괴물이 겨드랑이를 툭 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태후가 지나는 길에 쥐새끼라도 지나갔으면 눈에 안 띌 리가 없었을 텐데, 주변 사람들은 되레 '그런 게 있었느냐'는 반응이길래 점을 쳐봤더니
죽은 조왕 유여의가 태후에게 자신은 물론 자기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
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여후는 황제를 제멋대로 세우고 교체했으며, 유씨 번왕들의 땅을 찢어서 여씨들에게 주고 왕으로 세우는 등의 폭거를 저질렀기에 개국공신들은 여후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여후는 수도 장안으로 복귀하자 조왕 여록을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북군(수도 방위군)을 장악하게 하고, 양왕 여산을 상국으로 삼아 남군(황궁 수비군)을 지휘하게 한 뒤
'내가 곧 죽을 텐데 그러면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내 장례를 미루고 군사들을 동원해 황제를 사수하라'
는 유지를 남겼다.[25]

과연 여후가 죽자 장안에 있었던 유장은 아내인 여록(조왕 겸 상장군, 북군 통솔)의 딸을 정보원으로 삼아 여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참에 자기 형인 제왕 유양(劉襄, ? ~ 기원전 179)을 황제로 세울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26] 유양에게
"이러다가 나 죽겠다. 빨리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오라. 안에서 내응할 테니 여씨를 다 족치자"
는 밀서를 보냈다. 이에 제왕 유양이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서진하자 상국이던 양왕 여산은 관영에게 토벌군을 맡겼다. 그러나 관영은 조금 가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주저앉더니 은밀히 제후들에게
"여씨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라. 그때 같이 때려야 반란 혐의를 안 뒤집어쓴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라고 귓속말을 보냈다. 근데 이를 몰랐던 여씨들은 "설마 관영이 배신하진 않겠지? 관영이 제나라 군사들과 격돌할 때 거병해야겠다(…)"고 정하는 바람에 서로 생각이 엇갈렸고 그대로 대치가 이어졌다.

장안의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낀 태위 주발은 승상 진평과 상의했는데, 역상의 아들이었던 역기가 상장군 여록과 친하다는 걸 떠올리고 역상을 인질로 삼아 역기를 협박했다. 결국 역기는 부친을 살리기 위해 '병권을 태위에게 인도하고 영지에서 제나라를 막는 게 낫겠다'고 여록을 속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여후의 여동생 여수는 '상장군이 군사를 버리고 어딜 가느냐! 우린 다 죽었구나!'라고 화를 내며 방의 재물을 모조리 마당에 뿌려버리는 통에 계획이 물거품이 될 뻔했지만, 역기가 '황제도 북군(수도 방위군)의 지휘를 태위에게 맡겼다'고 추가타를 날리자 결국 낚인 여록은 인수를 대뜸 내주고 말았다. 주발은 인수를 확보하자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우단(右袒, 오른쪽 어깨를 내놓는다)하고, 유씨를 따를 자는 좌단하라"
고 명령했는데,[27] 모든 장병들이 갑옷의 왼쪽 어깨 부분을 풀었다.

하지만 남군(황궁 수비군)은 아직 양왕 겸 상국 여산의 수중에 있었다.[28] 여산과 맞짱을 뜰 자신이 없었던 주발은 유장에게 '일단 입궁해서 황제부터 지키라'며 병사 1,000명을 지원해주었다. 유장이 일단 궁성에서 상황 좀 볼까 하며 서성이고 있었는데, 궁문에서 입구컷을 당해 멍때리던 여산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정적이 흐르는 사이 상황 파악을 조금 빨리 마친 유장이 다짜고짜 여산을 기습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여산의 부하들은 싸움다운 싸움도 못한 채 패퇴했고, 도망쳐서 화장실에 숨은 여산이었지만 유장에게 발각당해서 참살되었다. 칼과 몽둥이로 시작된 초-한 시대의 결말에 걸맞은 장면이라 할 만하다. 궁성을 완전히 정리하자 여씨 일족을 모조리 잡아다 베어버렸는데 여록이 제일 먼저 참수당했고, 번쾌의 아내인 여수도 맞아 죽고 말았다.[29]

훗날 신·후한 교체기의 난세때 관동의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와 역대 한나라 황릉을 대거 도굴했는데, 고조 유방과 여후가 묻힌 장릉도 도굴당했다. 이때 여후의 시신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생전의 전횡에 대한 업보 때문인지, 후한의 초대 황제인 세조 광무제 유수에 의해 고황후의 시호를 영구박탈당하고, 그 시호는 위표의 첩에서 한고조의 후궁이 된 고황후 박씨에게 돌아갔다. 고황후 박씨는 제5대 태종 문황제 유항의 어머니로, 여후의 후손은 확실하게는 혜제까지가 끝이었지만,[30] 전한 문제를 시작으로 전한 후한, 촉한의 황제들은 전부 이 고황후 박씨의 후손들이었다. 박씨는 한 고조 유방의 총애를 잠깐 받고 끝나 여후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고, 현명하게 처신한 덕분에 유방의 여인들 중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2.4. 대외 관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 간 여걸이었으나, 당시 한나라의 대외적인 국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으며, 변방에서는 흉노족 같은 이민족들이 득세하여 계속 세력을 불려나갔다. 매일같이 식량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납치당했으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한나라 군대는 흉노족 같은 이민족들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일단 초한대전의 타격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장수가 타고 다닐 이 없어서 로 대신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백등산 포위전에서 아예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비참할 정도로 쳐발린 이후로는 매년 굴욕적이지만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무명, 비단, , 곡식 등을 보내주는 등 한나라측에서는 처절할 정도로 흉노 측에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굴욕적인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이는 유방이 죽은 뒤 여후, 문제, 경제가 집권한 시기에도 그 구도가 지속될 정도였다.
문언문(文言文): "孤僨之君,生於沮澤之中,長於平野牛馬之域,數至邊境,願遊中國。陛下獨立,孤僨獨居。兩主不樂,無以自虞,願以所有,易其所無。"

백화문(白話文): "我是孤独寂寞的君主,生在沼泽,长在牧養牛馬的草原,我多次到边境来,希望能到中原游览一番。陛下独立为君,也是孤独寂寞,一个人居住,我们两个寡居的君主都很不快乐,无以自娱,还不如我们兩人互相交換,用自己有的東西,來交換自己沒有的東西."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 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 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떻겠소?”
ㅡ 흉노의 선우 묵특이 여후에게 보낸 편지. 출전 : 《 한서》(漢書) 권(卷)094 상(上)

심지어는 흉노 선우 묵특으로부터 위와 같은 "우리 둘 다 짝이 없고, 즐길 것도 없는데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면 어떨까"와 같은 편지를 받기도 했다.[31]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여후는 이 성희롱적인 편지를 받고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펄펄 뛰면서 즉각 전쟁을 개시하려고 했고, 이때 번쾌가 노망이 났는지 아니면 처형이(즉 자기 가족이) 성희롱당했다는 모욕감에 눈이 돌아갔는지 자신에게 100,000명의 군대만 주면 흉노를 쓸어버리겠다며 조정을 선동했는데 다른 신하들도 여후의 눈치를 살피느라 맞장구를 쳤지만 오직 계포만이 혼자 나서서
"번쾌를 참하십시오. 선황제조차 400,000명이 넘는 병력과 명장들을 이끌고 원정했지만 다 죽다가 겨우 살아왔는데, 번쾌 따위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번쾌는 고작 태후께 아첨하기 위해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고 천하를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진나라 진승에게 반란의 빌미를 준 것이 흉노에게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며 여전히 그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도 저런 소리를 하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라는 발언으로 기를 죽여버렸다. 신하들은 계포의 말이 맞지만 여태후의 총애를 받던 번쾌에게 일갈을 한 계포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태후도 내심 지금 흉노를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 말려줬다고 판단한 것인지 계포에게는 별 일이 없었다.[32]

사실 이건 둘째 문제고 애시당초 당시 한나라는 흉노를 토벌할 만한 군대를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방 생전에도 백등산 포위전을 마지막으로 중앙정부 단독으로 10만 단위의 군사를 동원한 적은 없었으며, 반란이 일어나도 언제나 수만 명 규모의 형벌부대만 꾸린 뒤 현장에서 병사를 지원받아 체급을 불리는 식으로 해결했다. 문제는 유씨 제후왕들과 죄다 원수를 진 여후에겐 이런 수법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며, 훗날 남월과의 분쟁 때 빈약한 수준의 원정군만 보냈고, 이 원정군도 눈 뜨고 당하기만 하는 추태를 보이며 이런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결과로 이어졌다.[33]

하는 수 없이 여후는 부드러운 내용으로 묵특을 달래는 답장을 써서 보내기로 했으며 계포의 발언에 대해선 불문에 부쳤다. 여후 본인의 성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중에 남월의 조타와 시비가 붙었을 때는 한사코 원정군을 고집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냥 혜제가 반대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여태후 본기>에서 혜제가 조왕 유여의 독살건으로 미쳐서 칩거했다고 하는 얘기는 다른 일화들과 교차할수록 신빙성이 의심되는데다가, 심이기 에피소드를 보면 혜제가 정말 열받으면 여후도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저희 조그만 고장을 잊지 않고 글을 내려주시니 저희는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주체가 안됩니다. 폐하께서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으신 듯한데, 저와 같이 지내봐야 공연히 힘드시기만 할 것입니다. 저희 고장이 지은 죄가 없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의 전용수레 두 대에 말을 같이 붙여 보내드릴 테니 항상 타고 다니는 데 쓰옵소서.”
ㅡ 여후가 흉노 선우 묵특에게 보낸 답신

결국 흉노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현실 탓에 꾹꾹 눌러 참으며 위와 같이 "이 몸은 늙어서 모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치욕적인 회신을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이에 묵특도 이를 미안하게 여기며 "그냥 떠 본 말이었는데 너무 심하게 들어갔구려. 정말 미안하오."라며 사과했고 이후에도 여후는 흉노 정벌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그전과 같이 계속 흉노의 비위를 맞춰주는 굴욕적인 외교정책을 지속하게 된다.[34]

한편, 기존에는 한나라의 제후 왕국 위치에 있었던 남월을 철기 교역 금지로 자극해, 남월이 황제를 자칭하고, 한나라의 남쪽 변경을 맡은 장사국이 남월군의 공격을 받는 단초를 제공했다. 일단 여후도 남월에 반격을 하긴 했지만 되레 습기와 전염병에 피해를 보고 물러나서 조타만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결국 2년 후에 한문제가 즉위하고 육가가 파견된 후에야 양국은 화해했다.

3. 평가

3.1. 긍정적

전한의 사마천은 여후의 치세 때 천하가 평안했다고 호평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격렬한 전쟁과 폭정 및 잦은 대량학살에 시달리던 전국시대 ~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 ~ 초한전쟁의 난세보다는 집안 싸움하는 것이 더 나았고, 둘째, 한나라 초기는 진나라의 억압 통치에 대한 반동으로 되는대로 놔두는 도가식 정치, 즉 무위지치를 추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직무를 방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을 피로하게 하는 정책을 세우지 않는다는 황로사상(黃老사상)[35]에 기반을 둔 정책이었다. 게다가 사마천은 여태후를 제왕들의 행적을 다룬 <본기>에 편입하는 파격적인 행동까지 보여주었다. 참고로 후한의 반고(班固)가 쓴《 한서》에서도 < 혜제기>가 별도로 빠져 있을 뿐, 소제 시대는 <고후기>(高后紀)라 해서 여후를 <본기>로 삼았다.

사마천
"여태후 시절에는 형벌을 시행하는 일이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어서 치안이 좋았으며, 백성들이 농사일에만 힘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넉넉해지는 태평성대였다."
고 여태후의 공로를 칭송했다. 게다가
"지배층 내부에서는 피터지는 권력 싸움의 연속이었지만, 여태후가 통치를 잘한 덕분인지 백성들의 삶은 평안했다."
는 것이다. 여기엔 사마천 개인의 경험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가 다름아닌 계속된 대외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진 한무제 유철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가 여후는 척부인처럼 죽이고 싶어서 미치겠거나 아니면 이성왕들처럼 위협이 되는 인물들이 아니라면 자기에게 반대한다고 해도 무조건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들 혜제가 붕어한 후에 혜제의 생전 뜻이라는 명분으로 삼족죄(三族辜)와 요언령(妖言令)을 폐지하기도 했다. 삼족죄란 흔히 말하는 '삼족을 멸한다'의 삼족에 대한 연좌제를 말하며, 요언령이란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비방을 유언비어로 규정하고 이를 처벌하는 규정을 말한다. 실제 혜제의 뜻을 따랐을 뿐이었는지, 아니면 혜제의 뜻이란 명분을 가져다 썼을 뿐 여후 본인의 의도였는지는 불분명하나 확실한 것은 백성들에 대한 탄압을 줄이는 행동이었다는 점이다. 반면 한무제는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조문에 사형이 없어도 자기가 직접 만들어내서 집행할 만큼 잔인하게 굴었다. 당장 사마천 본인이 흉노와의 전쟁에 열을 올리던 한무제의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궁형을 받아 성불구자가 되었으니, 여후의 국정 운영과 한무제의 국정 운영이 대비되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즉, 사마천이 내린 결론은 '조정과 황실은 비록 피비린내 나는 암투에 휩싸였지만, 백성들에 대한 통치는 훌륭했다'것이었다.

3.2. 부정적

세간의 평가는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 서진의 가남풍과 함께 중국 3대 악녀로 일컬어진다. 세조 광무제 유수는 후한 건국 이후 여후의 시호를 박탈하고 한고조의 장릉에서 축출했으며, 한문제의 어머니인 박태후에게 원래 여후의 시호였던 '고황후'를 올리고 고조와 함께 배향했다. 정작 박씨의 직계인 한문제를 비롯한 전한의 역대 황제들은 여후를 비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여후에게 큰 문제가 있었다면 박씨의 후손들이 자기 정통성 확립을 위해 여후를 깎아내리지 않았던 것은 기묘한 일이다. 여후는 행실 자체도 권력을 쥔 악인의 행태에 가까웠기 때문에 서태후, 가남풍과 마찬가지로 재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마저도 개인사만 어느 정도 변호받고 있다. 그 이유는 정적인 척부인이 잘못된 처세를 보였다 할 지라도 정말 역모를 꾀한 것이 아닌데 지나친 원한과 경계심을 품은 나머지 끔찍하게 살해한 것과 황족인 유씨들을 무분별하게 숙청 및 통제하고 여씨 천하를 만들어 국가 친탈을 시도한 행위가 여후의 부정적인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후의 치세가 태평성세였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후가 잘나서라기보단 한고조 유방과 그를 보좌한 공신들의 영향이 크며, 기본적인 사실관계만 살펴 봐도 정치적 능력은 항우, 한신에 못지 않게 최악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36]

첫째, 전쟁이 없었던 것은 이미 유방 최대의 숙적이었던 항우가 패망하고 한신과 팽월 같은 잠재적인 위험인물 내지는 반역자들이 토사구팽을 당하거나 죽어서 세력이 와해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생전 고조 유방의 업적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여후 시절에도 제국의 정무를 실질적으로 담당한 인재들은 대부분 고조 유방의 공신이거나 유방이 발탁한 인물들 뿐이었다. 여후가 훗날 흉노와의 전쟁을 선포하려 했을 때 다행히 계포의 만류로 그만두게 되는데 이 계포 또한 본래 항우의 수하였다가 유방에게 용서를 받고 발탁된 인물이었다.[37] 다만 한신이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된 뒤 최종적으로 숙청한 것은 여후의 짓이었으며, 영포 토벌때는 어린 유여의의 태자 책봉 실패 후 완전히 의기소침해진 고조 유방이 혜제 유영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여후의 설득으로 본인이 출진하게 된 것이었다. 한신이나 장오의 처우를 보면 알듯이 직접적으로 반기를 들지 않으면 어느 정도 봐주는 경향이 고조에게 있었던 반면, 여후는 위험요소가 있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타입이었다.[38][39]

둘째, 무위지치를 추구한 건 여후가 아니라 소하 조참의 공이 컸다. 소하가 법을 제정하고 조참이 이를 따르니 이 또한 그 둘을 승상으로 중용한 고조 유방과 혜제 유영의 혜안이 빛을 발했다고 봐야 한다.

더불어 정치에 능하고 통치를 잘했다지만 여씨들을 우대하기 위해서라면 숱하게 규칙을 어지럽히고 전횡을 저질렀다. 여후 치세 8년간 태평성대였다면 남월왕 조타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하고, 혜제 때만 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제나라가 두려워서 친족이 살해당해도 따지지도 못하는 비굴한 모습은 이상하다. 여후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는 자체적인 군사력을 지닌 상대였다. 당시 왕은 황제의 신하이긴 했지만 자체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등 반 독립적인 상태였다. 숙청 대상들을 잘 보면 알겠지만 초반에는 자체척인 군사력을 지닌 인물들이나 유여의처럼 그 자체로 제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이 주요 숙청대상이었으며, 대부분의 이성왕들이 정리된 이후에는 유씨 동성왕쪽으로 숙청 대상이 이동된 걸 알 수 있다. 반대로 군사력이 없는 공신들은 그다지 손을 대지 않는 등 어느 정도 숙청에도 방침이 있었다.

유방에 비해 사적인 제재도 빈번해서 진평이 고작 여수의 모함에 떨며 지내는 등 혜제 때까지만 해도 직언에 자유로웠던 한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여후의 대에선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번쾌가 여후에게 아첨하기 위해 흉노를 토벌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선동에 앞장서고, 계포가 나설 때까지 모두 눈치를 보느라 호응하기 바빴을 정도였다. 여후 때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분명히 성격이 좋아서 선택됐을 한문제 유항을 상대로도 공신들이 지레 겁을 먹어서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다.[40] 황족 유씨 및 중신들과 의견을 일치하고 손을 잡아 부국강병에 힘쓰기는 커녕, 마음에 안들면 무조건 숙청만 해대는 잔혹함으로 인해 유방 생전에는 초군의 포로 생활을 했던 여후를 동정하고 보호했던 건국공신들이 합심해서 여씨를 몰살시키고, 혹여 외척이 또 기승을 부릴까봐 1등 공신이었던 유장 형제와의 밀약까지 뒤집으며 한문제를 옹립할 만큼 공신들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었다. 여후의 집권은 엄연히 공신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인데,[41] 여후는 그들의 권위가 불쾌하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에게 준 도움에 대해 보상해야할 부분에서까지 시치미를 뚝 떼었으니 공신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42][43] 섭정 통치를 악용할 경우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보여준 선구자였으니 어떻게 보면 후대에도 민폐를 끼친 셈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차없이 왕들을 잡아 죽였으면서 사위인 장오가 유방 암살사건에 연루됐을 땐 오히려 장오를 당장 처형하겠다고 벼르는 유방을 밤낮으로 울면서 뜯어말리기도 했는데, 그건 그냥 복잡하게 생각할게 아니라 단순히 사위인 장오가 걱정되어 그런 것이었다. 실제로 제왕 유비도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를 넘기자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도 했고. 즉, 단순하게 우리 피붙이는 아끼고 남의 피붙이는 가혹한 정치관을 가진 것.

숙청은 유씨 황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척부인을 죽이기 위해 조왕 유여의를 암살로 처리하고 혜제에게 인간돼지가 된 척부인을 보여주어 정신적인 충격을 줘 사실상 폐인으로 만든 것을 보면 정치적 의도보다는 자신의 가학적인 감정에 가깝다. 아무리 인권이 전무하다시피하던 고대 중국이라도 엄연히 황실의 일원인 만큼 법률에 의한 극형이나 상대적으로 평범한 방식의 암살로 처리했으면 될 일이었으며[44] 아들인 혜제를 정서적으로 학대한 것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사마천은 《사기》 <여태후 본기>에서 잔인하고 권력욕에 가득찬 여태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여태후가 척희와 세 명의 조왕을 죽이는 과정 자체에서 나타나는 악독한 성격을 담담한 필치로 기술했다. 또 '사람돼지'가 곧 척희라는 사실을 혜제가 알고 '이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라며 애절하게 탄식했다는 기술은 친자식의 입을 빌려 여태후를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왕 유우가 유폐된 채 죽기 전에 불렀던 비가를 통해 여태후의 인간성 상실이라는 측면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성토했다. 사마천은 <여태후 본기>에서
'민심을 얻은 자는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다.'
는 대원칙을 다시 한번 천명하고 있다.

잔혹한 형벌, 보복정치, 종친 편애 등은 한때 유방의 숙적이었던 항우와 매우 비슷한 단점이다. 그나마 항우는 주변의 간언이 있든 없든간에 일반 백성들까지도 마구 해쳐 비참한 몰락을 자초했으나, 여후는 그래도 계포 등 견제세력이 어느 정도는 있었고, 본인도 척부인을 제외하고는 자기 기분을 거스르기는 해도 누가 봐도 화를 자초하는 수준까지 어그로를 끌지 않고 확실하게 자신을 위협할 수 없는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들어준 편이라서 나라까지 말아먹을 개삽질을 벌이진 않았으며, 아무 힘이 없는 백성과 일반 관료들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

또한, 여씨의 잔혹한 형벌 중 가장 대중적인 인간 돼지사건은, 여태후 하나의 잔혹성에 머무르지 않고, 수천년이 지난 현대에 이르기 까지 주변국민들에 있어 중국인들에 대한 야만과 무지 잔인성을 조롱하는 섬뜩하고도 흉측한 이야기 재료로 남았음을 본다면, 그녀의 악행은 본인의 평판 뿐 아니라 자신의 민족과 후손들의 평판까지 실추시켜버린 아둔하고 동물적인 행각이었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정치인 치고는[45] 제도혜왕 유비와의 사연에서 보듯이 너무 인과관계에 단순했다는 점[46]도 항우와 판박이라고 볼 만하다.

한국사에서 여후에 대한 비판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다름아닌 고려 중기에 편찬된 김부식의 《 삼국사기》이다. 《 삼국사기》 < 신라 본기> -선덕왕( 선덕여왕)-편에서 여후와 측천무후가 국정을 장악한 일을 빗대며 선덕여왕을 사정없이 비판했다.[47]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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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기 여태후

5. 여담

서술대로 자기자신의 권력욕에 미쳐 사실상 반역 행위를 시도하거나 자신의 적이라는 이유로 지나친 보복을 하는 등 기억에 남을 잔학무도한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기에 현세에도 비판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악행의 스케일과 질이 워낙 안 좋았다는 것에 대한 작용으로 객관적인 비판점이 아닌 시안, 여후가 피해자 입장인 사건까지 악행으로 매도 내지는 여후에게만 책임이 몰리며 싸잡히거나 어긋난 관점에서 과도한 비난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먼저 여후를 비판해야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여후의 지나친 잔혹함과 섭정으로서 저지른 악행과 실책들은 명백한 비판점이 맞다. 그러나 태자 교체 사건 한해서는 여후가 피해자 입장인 것도 맞다.

따라서 여태후로서의 행적을 과거 황후 시절과 연결지어 여후를 악(惡)으로, 유방과 척부인을 선(善)이라는 이분법에 두고 둘의 실책을 옹호 및 정당화하며 여후의 잘못이 더 크다며 떠넘기거나, 유방이 주도한 황권 투쟁이 없었다해도 척부인 모자는 어떻게든 여후의 손에 죽었을 것이라며 조롱하는 것, 비판 사항이 아닌 것까지 싸잡아 매도하는건 당시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인식 및 법도, 사건의 인과를 무시하고 여후의 실책만을 부각하기 위해 앞뒤를 잘라먹은 결과만 보고 억지로 끼워맞춘데다 논점에서 이탈된 단순한 비난이지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여후의 잔학무도함만 집중해 잊어버리거나, 비판 행위를 오해해 선을 넘거나 비판 대상은 이분법에 빠져 무조건 부정적으로 봐야 하고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부분은 인정하면 안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저지르는 실수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여후 시기 백성들은 살기 좋았다는 평가 때문에 여후의 악행들이 단순한 후대의 프로파간다로 여겨서도 안되는 것이다.

사마천도 여태후본기를 집필할 때 여후 치세의 세상은 호평했지만 결국 여후의 악행들과 결점들을 기록하며 비판을 했다. 이렇듯 비판 대상의 장점이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한다고 해서 옹호 및 미화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비속어와 노골적인 인신공격 표현이 없다고 해서 비난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나쁘게 말하기 위해 억지로 트집잡거나 왜곡해서 폄하하는 것도 비난 표현이며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한 역사 인물이나 객관적인 악인은 어디까지나 이들의 악행과 실책을 반면교사 삼아 후세에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로 학자들이 연구해 비판을 하는 것이지 마음껏 음해하거나 싸잡아서 감정적인 비난을 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이유나 사정이 있었다해도 어디까지나 여후가 악인이라는 이유로 억지스럽거나 음해 목적을 위한 비난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 뿐, 복수심에 미쳐 세력도 약한 척부인을 과도하게 잔인하게 죽인 것과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채 무턱대고 황족들을 탄압하고 일가친척들을 직책에 앉힌 정치적 횡포들은 옹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척부인 모자 살해 건도 여후가 유씨 황실의 황태후로서 활동했다면 혜제와 황실, 국정을 수호하고 내명부의 질서유지를 위해 손을 더럽혔다는 평가를 받으며 잔인하다는 비판은 못피해도 변호받을 여지가 있었다. 즉 거한 악행들 때문에 긍정적으로 볼 수 있거나 변호 및 재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 복합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마저 가려지거나 매우 부정적인 방향으로 왜곡된 것. 결국 전적으로 여후의 책임과 업보가 맞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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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조 고황제 유방과 합장되었다. 추후 세조 광무제 유수가 삭탈했다. [2] 후한의 세조 광무제에 의해 삭탈되어, 고후(高后)로 격하당했다. 가끔 그녀를 폐후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황후'라는 시호만 삭탈된 것이지 폐서인까지 된 것은 아니다. [3] 한나라의 역대 황후들은 시호가 대부분 이렇게 정해졌다. 그래서인지 시호보다는 이름이나, 지위에 성을 붙인 경우가 통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4]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이나 2세 황제 호해도 여러 자식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보면 부인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이들이 황후를 책봉했다는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 [5] 오늘날의 산둥성 허쩌시에 속해 있는 곳이다. [6] 이름이 아니고 그냥 '여씨 어르신', '여씨 나리' 정도의 존칭에 해당한다. 도홍경(陶弘景, 456 ~ 536)의 저서인《상경》(相經)의 기록에는 이름이 여문(呂文). 자는 숙평(叔平)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마정(司馬貞, 679 ~ 732)의《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그 내용을 인용했다. [7] 지금의 쉬저우시 페이 현 [8] 실제로 항우가 이때 여후와 함께 세트로 잡은 유방의 부친 유태공을 삶아죽이겠다고 높은 단 위에서 협박성 퍼포먼스를 하자, 유방은 '너랑 내가 전날 의제 앞에서 의형제를 맺었는데 그럼 너는 제 아비를 삶는 꼴이구나, 잘 삶아지거든 나도 국물 한 입 줘라!' 라고 대꾸해서 항우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그 남편에 그 아내이며, 항우는 여후의 말마따나 결국 군주로서도, 인간 대 인간의 기싸움으로도 유방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던 셈. [9] 여후와 태공은 초나라 군사에게 쫓겨다니다가 붙잡힌 것이 아니라 미리 도망쳤지만, 유방을 찾아다니다가 하필 초나라 군사와 딱 마주쳐서 포로가 된 것이라 자식을 둘이나 잃어버릴 만큼 정신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10] 조왕 유여의의 일로 1년을 드러누운 혜제 앞에서 보란듯이 똑같은 짐주로 제왕 유비를 독살하려 했고, 5년 후 혜제가 붕어했을 때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1] 이때 여치가 갇힌 감옥을 관리하던 옥리들이 그녀에게 매일 가혹행위를 하기도 했는데, 임오(任敖, ? ~ 기원전 179년)라는 옥리의 도움으로 가혹행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임오는 유방의 거병 이후 함양 공략에 나선 유방 대신 본거지인 풍읍을 수비하는 등 전한의 건국에 기여하며 나중에는 어사대부에 광아후(廣阿侯)가 되었다. 광아는 현대 중국 싱타이시의 일부다. [12] 또한 야사에서 말하길 여태후는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냥하고 잔혹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으나 결혼 후에 고생을 많이 하면서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13] 각각의 이름은 동원공(東園公)·기리계(綺里季)·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甪里先生)이었다. [14] 사실 상산4호가 고조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고 태자 유영에게 응한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벽지 건달 출신인 고조 유방은 학자들을 박대하고 면전에서 모욕을 주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를 역이용한 '지금 당신네들을 찾는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태자임. 태자는 효성과 4덕을 두루 갖춘 인성자라구!' 라는 떡밥을 덥석 물었기 때문이다. 태자를 계속 따른 걸 보면 그 평가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15] 고막을 연기로 그을려 태우는 방법이었다고도 한다. [16] 야사인만큼 적당히 걸러서 듣도록 하자. 여성 정치인에 대한 야사는 유독 성적인 면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당연하지만 그냥 재미있으니까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유포하는 것일 뿐이다. [17] 정치적인 목적에서 여후를 배제 또는 약화시키려고 했다면 여씨 일족을 대거 숙청하거나 여후의 정치적인 최측근를 배제 및 제거해 권력 기반을 없에서 여후가 딴 마음을 못 품게 만드는 형태로 만드는 현실적이고 충분히 좋은 차선책도 있었다. 그런데 장성하고 평판도 좋은 적장자인 유영을 놔두고 평민이나 다름없는 미천한 후궁 소생 서자를 단순히 자기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태자로 삼으려고 하며, 여후에 대한 견제패로 선택한 것은 군주로서는 스스로 황실의 후계 구도를 어지럽히면서 의무를 저버린 것이고 가장으로서도 첩과 서자를 편애하여 정실과 적장자의 체면과 권위를 훼손한 행위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태자 유영의 지지 세력이 막강해져서 여후에게 더 유리해졌기 때문에 여후 견제라는 의도도 불명확해졌고, 오히려 사랑하는 척부인과 유여의야말로 일개 후궁과 서자 주제에 태자 자리를 노린다며 거의 모든 조정 대신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여후가 섭정으로서 저지른 악행들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황후 시절에 일어난 태자 교체 사건에 한해서 피해자인 것은 사실이다. [18] 여희도 자세한 것은 문서에 나와있지만 자신의 아들인 해제를 진나라의 군주로 만들기 위해 적장자 겸 후계자인 신생을 온갖 음해질과 누명을 씌워 자살을 시켰다. 진헌공 사후 아들을 즉위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첩에 불과한 여희의 권력은 남편에게 온 것이었기에 얼마 못 가 반란이 일어나 아들도 살해되고, 본인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요부로 기록되어 비판과 비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19] 서자가 왕위와 가문을 계승한 경우는 적장자가 없을 때(적장자가 이른 나이에 죽었거나, 정실이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만 가능했다. 극히 예외로 전국시대 조나라의 초석을 쌓는 조간자 조양자가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적자들을 제치며 조씨 가문의 후계자로 삼기도 했으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며, 이렇게 후계자가 되더라도 구설수가 많았기에 후계자가 된 서자는 정실의 아들로 들어가 신분 세탁을 하거나 정실이 양육을 맡는 등의 수를 써야 서자 취급을 받지 않았다. 그 후에도 가장이 된 서자들은 생모를 정실로 추존해 정통성 확보에 신경을 썼고, 본인들도 자신들의 적자를 후계자로 삼는 등 유교적 질서하에서는 결국 적자 우선이라는 사항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운 유목민족들은 태자밀건법을 시행한 청나라와 같이 굳이 적자에 집착하지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적자와 서자를 동일하게 취급한 건 아니었다. [20] 여후 사후 대왕 유항이 제5대 문제로 즉위했을 당시, 문제는 효문황후 두씨와 총애하는 후궁인 신부인과 함께 상림원의 행사에 참여했었다. 원앙은 신부인의 좌석을 두황후의 것보다 뒤로 끌어내렸는데 이에 문제와 신부인은 원앙의 태도에 분노했다. 이에 원앙은 "폐하께서 첩실을 사랑하신다면 후하게 상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 신부인을 대하시는 바는 후에 신부인에게 필시 화가 미치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옛날 인간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라고 비판을 했다. 즉 정실의 권한과 입지를 존중하지 않은 채 함부로 첩을 정실보다 위로 대하면서 편애하면 척부인 꼴이 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이에 문제와 신부인은 정신을 차려 원앙에게 예를 표하고 황금을 주었다. 물론 이 부분도 신부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단 문제의 행동에 대한 비판이 큰데, 마찬가지로 고조 유방이 척부인을 아낄수록 여후는 더욱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21] 전소제는 여태후가 데려온 남의 아이라는 설과 여씨 일족의 아이라는 설, 혜제와 후궁 사이의 아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느 설이 확실한지 현재로써는 불확실해서 전소제의 진짜 혈통은 지금도 미스터리이다. [22] 팽성 전투의 참패 직후 여후가 패왕 항우에게 사로잡혔을 당시, 심이기도 같이 잡혔는데 이때 심이기는 유태공과 여후를 돌봤고 그러면서 서로 눈이 맞아 이후 불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크게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심이기가 여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던 건 사실이다. 물론 심이기는 상술되었다시피 여후가 항우에게 사로잡혀 있었을 당시 그녀를 모셨던 인물이니 여후가 그를 신임한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긴 했다. [23] 제왕 유비가 고조의 서장남, 즉 혜제의 큰형님이었기 때문이다. 혜제는 상술한 조왕 유여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배다른 형제들도 지극히 아꼈던 어진 사람이라 자신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유비를 깍듯이 형님 취급했다. [24] 후술하겠지만 이게 전화위복이 되었고, 한나라 전체 역사로 보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심지어 사후에나마 여후의 직위였던 고황후 자리까지 갖게 된다. [25] 여후가 살아있을 때는 그래도 태후라는 명분이 있어서 공신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여후 사후에는 유씨와 공신들이 여씨를 몰아내려 할 것이 명백했다. 이 사실은 여후도 잘 알고 있었지만 유씨와 공신들의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여후는 유씨와 공신 세력들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했다... 라기 보다는 처리하는게 불가능했다. 당장 북쪽에서 흉노가 언제 처들어올지 모르는 판인데 공신들을 처리했다간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흉노의 묵돌 선우로부터 성희롱에 가까운 모욕을 당했는데도 두려워서 받아치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여씨들 중에는 군사를 잘 부리는 이가 없었던 반면, 황족 유씨와 공신들은 초한전쟁 당시의 실전 경험 때문에 노련한 장군이나 지휘관들이 대다수였다. [26] 고조의 적자가 자식없이 죽었고 전소제 및 후소제는 혜제의 아들이 아니라는 정황이 있었으므로 고조의 서장자였던 유비의 장자인 유양은 충분히 제위를 노려볼 만한 인물이었다. [27] 사실 인상깊은 일화긴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의 결의 표명으로 줄곧 써먹던 방식인지라 이게 오리지날은 아니다. 당장 그보다 수십년 앞선 진승 오광의 난에서도 동일한 일화가 존재할 정도이다. [28] 한나라의 군사제도에서 북군은 수도의 방위를 담당하는 부대였고, 남군은 황궁의 경비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후한 말의 제도에서도 한나라의 중앙군은 대장군이 관할했지만, 황궁의 경비는 황제의 직속 병력으로 예외였다. 태위인 주발의 명령빨이 정규군인 북군에게는 먹히지만, 근위대인 남군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29] 진평은 여수의 뒤끝이 두려워 고조의 밀명을 어기면서까지, 번쾌를 안 죽이고 놔뒀는데 여수는 이것만으로도 진평에게 원한을 가져서 6년에 걸쳐 그를 모함한 전적이 있었다. [30] 전소제와 후소제가 혜제의 아들이 맞다는 전제하에는 후소제가 끝이겠지만 전소제와 후소제는 혈통이 불확실해서 혜제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므로 확실하게는 혜제까지가 여후의 후손이다. [31] 이를 흉노의 문화 중 하나인 형사취수로 해설하는 견해도 있다. 흉노가 보기엔 한나라의 족장이 죽고 그 처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며, 마침 그들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흉노족은 죽은 형제의 처를 취함으로써 그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봤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흉노도 한나라와 교류가 잦았기 때문에 서로 문화를 아예 모르지는 않았으며, 진지하게 혼인을 고려했다면 더 예를 갖추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32] 사실 이때 한나라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초한전쟁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엉망이 돼서 전후 복구에 집중해야 했는데다가 유방 자신도 흉노에게 대패했다. 신하들 중에 인물이 없지는 않았으나 초한대전을 겪은 개국공신들은 일선에서 은퇴할 나이에 접어들 때였다. [33] 사실 백등산 전투에서도 묵특 선우가 대단하긴 했지만 한나라도 흉노를 상대할 병사를 긁어 보내서 충분히 상대할 만하긴 했다. 결국 유방이 대패하면서 다시 한 번 흉노를 공격하는 건 힘들었는데 이미 초한대전으로 인해 백성들의 수가 워낙 많이 줄고 경제도 피폐해져서 국력 자체가 심히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진나라의 백기~초나라의 항우로 이어지는 무차별적인 대학살로 인해 중원의 인구 수가 심각하게 줄었다는게 문제였다. 인재 자체는 한신, 팽월, 영포가 죽었지만 워낙 유방의 인재풀 자체가 넓다보니 한가닥하던 공신들도 다수 남아 있었고, 유방의 후손들 중에서도 똘똘한 이들도 적지 않아서 인재가 없다고 보긴 힘들었다. [34] 이 여태후의 한을 풀어준 것은 한나라의 제7대 황제인 세종 무황제 유철이었다. 그러나 한무제는 흉노와 이민족 토벌, 대토목 공사를 과도하게 남발한 나머지 문경지치로 회복한 국력을 날려먹었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여파는 전한이 멸망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35] 도가가 종교화되기 이전, 오제시대의 황제 도가 노자를 숭상해서 무위정치를 추구했던 사상이다. 다만 법가의 제왕학도 받아들여서 '신하가 깝치면 무위적으로 박살내라(!)'라는 치세 이론도 이용한다. [36] 이 3명은 정치적 계산이라는게 거의 전무하고 인과관계를 너무 단편적으로만 봐서 몰락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37] 여후 때 친척인 여씨들을 대거 등용했지만 이들이 고조 시절 공을 세운 적도 없었고 여후 시절에도 유능함을 보인 인물들은 없었다. 이는 여후 사후 여씨가 몰락한 원인이 되었다. [38] 이는 고조와 여후의 기질 및 능력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 고조는 자기가 몸으로 뛰어서 세운 제국이었기에 군사적인 능력도 충분했고, 군대와 공신의 지지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었던 데다가 정치적인 면에서도 한신 따윈 가지고 놀 정도로 출중했지만 여후는 기본적으로 고조에게 업혀서 권력을 휘두르는 형태였기 때문에 고조만한 권위가 없었고 또, 친정인 여씨 집안에도 정치 및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 전무했다. 한신을 죽일 때도 그런 점을 굳이 숨기지 않아서 대놓고 내가 너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죽인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39] 하지만 한신의 힘을 정말로 꺾은 건 그를 제왕에서 초왕으로 전봉하고, 다시 회음후로 강등한 것인데 이 일은 전부 고조가 해낸 것이다. 해하 전투 직후 한신 휘하에 2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이 있었고, 초왕 시절에도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조에게 순식간에 밀렸다.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고조의 인덕과 능력이 비범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이미 회음후로 강등된 시절의 한신은 아무런 힘도 없었으므로 그를 죽이는 건 명분과 타이밍의 문제였을 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40] 평원군은 심이기와의 친분을 한문제가 트집잡자 "내가 빨리 죽어야 가족들이라도 무사할거다."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자살해버렸고, 용맹함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주발도 한문제에게 찍혔다는 생각이 들자 한동안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다. 다만 역으로 한문제가 여후 사후에 공신들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등 어느 시점으로 보는냐에 따라서 상당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41]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서 황제의 붕어를 4일이나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이 쉽게 가능할만한 상황이라고 보긴 어렵다. 역상에게 새어나갔던 것을 보면 알만한 사람들이 합심해서 묵인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42] 유방은 토사구팽으로 악명이 높지만 한편으론 이런 지지층 관리에 신경을 쓴 측면도 있었다. 옹치의 일화도 그렇고, 애시당초 고향 출신 사람들 중에서 유방이 숙청한 인물은 거의 없다. 예외로 친구인 노관은 먼저 반란을 저지르고 흉노로 도망갔지만 사실 그 노관도 알고 보면 유방보다는 여후가 무서워서 튄 거였다. 오히려 유방이 죽으니 이제 고향가기 글렀다며 좌절했다고 하니 말이다. [43] 당장 진평이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에게 무슨 꼴을 당했는지 보자. 진평은 번쾌를 살리기 위해 잔꾀를 내고 정권 안정을 위해 여씨에게 군권을 맡기라는 계략을 여후에게 제시할만큼 공신들 중 첫 손에 꼽히는 친 여후파였다. 그런 그가 반 여후파의 수장으로 전향해 여씨를 몰살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44] 아니, 굳이 암살이라는 탈법적인 방법까지 갈 필요도 없이 척부인과 유여의를 괴롭힐 합법적인 방법은 널리고 널렸다. 본인이 태후인데다가 황제도 자기 아들이고 신하들까지 다 자기 편인데 정통성도, 권력도 한참 떨어지는 일개 후궁와 서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척부인을 폐서인하고 유여의를 정치적 불구자로 만드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였을 것이며, 여차하면 역모를 뒤집어 씌워서 참수해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척부인도 엄연히 쌓아놓은 업보가 있기에 이 정도는 명분 상으로도 하자 되는게 전무하며 현대적 관점으로도 이 사건은 척부인이 과욕을 부리다 자멸한 사건으로만 판단하지 여후를 비판하는 의견은 극소수일 것이다. 당장 선제인 유방조차 척부인에게 '나도 그대와 여의를 귀애하긴 하나 태자의 정통성이 너무 확고하므로, 여후를 주인으로 잘 섬기고 거스르지 말라'고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45] 아니, 이정도면 일반인의 사회생활 기준으로도 매우 단순한 편이다. [46] 제도혜왕이 혜제보다 상석에 앉은 것만으로 독살하려고 했는데, 심지어 이거 혜제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제도혜왕은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에게 영지를 이할하고 여후의 원한이 풀려서 살아남았다. 더도 덜도 말고 "어? 우리 아들내미한테 무례하게 구네? 죽여." "어? 우리 딸내미한테 선물 주네? 우리 편 히힛^^" 정도의 판단력이다. [47] 실제로 선덕여왕 시기는 고황후가 집권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대외관계에 있어서 크게 약세를 보였으니 묶여서 비판받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48] 1996년 MBC 방영 당시에는 공리를 전문으로 맡은 송도영이 더빙 연기를 했다. [49] 여후가 단지 시어머니가 뒤쳐져서 패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적이 코앞에 왔는데도 집안에 남은 재물을 챙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조금만 더 지체하면 가족 모두가 죽을 상황이었다. 여후는 몇 번이나 시어머니에게 가자고 간청했지만 시어머니는 가족의 목숨은 관심없이 재물을 챙기기에 바빴고 여후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결심을 한 것이다. 이는 물론 꾸며진 이야기다. [50] 개의 혼령이 자신을 물었다는 야사를 인용해 각색했다. [51] 드라마 초반에서 여후 포지션에 가까운 여캐는 차우희. 그리고 점점가면서 백여치가 되었고, 또 초한쟁패를 시작하는 것과 흡사해보이는 16-17화는 실제와는 거의 정반대다. [52] 이런 반응 보일 만은 한 게 유방과 여치가 적극적으로 여동생과 노관의 혼사를 추진하고 노관을 격려하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번쾌와 여동생이 눈이 맞아버리자 노관 볼 낯이 없어진 것. 거기다 노관은 사실을 알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채 꺼이꺼이 울고, 그걸 여치가 겨우 달래주는데 그 상황에서 철없는 여동생이 끼어들어서 "나 맞았다"고 하니 화가 날 만 했다. [53] 사실 척부인은 여치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는데 옆에서 시중드는 척부인의 고모라는 사람이 "지금이야 괜찮지만, 나중에 한왕의 관심이 멀어지면 본처인 여치가 분명히 후처인 너를 가만히 안 둘 것"이라며 여치에게 누명을 씌워 공격한다. [54] 여치가 석방되기 직전에 척부인은 유방이 항우의 화살에 맞고 한동안 위독했을 때, 후계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다가 유방과 관료들의 신망을 잃고 입지가 약화되었다. [55] 유방과 그 부모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을 다 맡는다, 아들인 유영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