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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6:35:24

여록

<colcolor=#ece5b6>
전한 조왕
상장군
呂祿
여록
작위 <colbgcolor=#fff,#000>조왕(趙王)
최종직위 상장군(上將軍)
여(呂)
(祿)
생몰연도 ? ~ 기원전 180년
사망지 장안(長安)
1. 개요2. 생애
2.1. 전기 생애2.2. 조왕의 자리에 오르다2.3. 친구의 배신과 최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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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한의 인물로, 한나라의 첫 번째 외척세력인 여(呂)씨 가문의 제후왕 겸 장군.
고황후 여씨의 작은오라버니인 여석지의 아들이며 여칙, 여종의 아우이다. 따라서 고황후 여씨의 조카이다. 여록의 딸은 고제의 서손인 주허후 유장과 혼인한다.

2. 생애

2.1. 전기 생애

초한전쟁 당시에는 어떤 활약을 했는지 불분명하다. 이 당시 나이가 매우 어렸거나, 능력이 없어 딱히 활약을 못 했을 수도 있다.

2.2. 조왕의 자리에 오르다

초한전쟁땐 조용하다가 갑툭튀하여 조나라의 왕이 된다. 사실 여후의 섭정 당시 조나라 왕의 자리는 매우 불길한 자리였다. 조왕 유여의는 짐주를 먹고 사망했으며, 또 다른 유방의 서자였던 조유왕 유우는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여후에게 잡혀서 굶겨져 죽었다. 여태후는 조유왕을 죽인 이후, 또 다른 유방의 서자인 유회를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겨 조공왕으로 삼았고 동시에 여씨의 사위로 삼았는데, 조공왕이 딴 여자를 사랑하자 조공왕과 혼인한 이 여씨 왕비가 짐독으로 그 여자를 죽였다. 조공왕은 상심이 커서 자결했고 여태후는 조공왕이 여자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며 조나라를 조공왕 유회의 후사를 끊고 유항으로 대신하여 하였다. 그러나 유항은 앞선 조왕들의 말로를 보고이를 고사한다. 그러나 여산과 진평은 여후의 조카인 여록을 새로운 조나라 왕으로 추천한다.

그렇게, 고황후가 섭정한 지 7년만인 기원전 181년 가을에 여록은 조나라 왕으로 임명된다. 그러다 이듬해인 기원전 180년에 여후가 병들자, 상장군에 임명되어 장안의 북군을 통솔하며 남군을 통솔하는 여산과 함께 중앙군을 장악하게 된다. 여후는 유언으로 '내가 곧 죽을 텐데 그러면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내 장례를 미루고 군사들을 동원해 황제를 사수하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과연 여후가 죽자 회남왕 유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장은 자신의 아내이자 여록을 딸을 정보원으로 이용해 여록의 움직임을 파악해나간다.

2.3. 친구의 배신과 최후

유장이 자기 형인 제왕 유양(劉襄)에게 관중으로 진격하라는 밀서를 보냈고, 유양이 제나라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여산은 관영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막게 한다. 그러나 토벌군을 이끌고 출정한 관영은 여씨가 반란을 일으키면 되돌아가 이를 진압하려 했고, 여씨들은 관영의 토벌군과 유양의 제나라군이 격돌하면 반란을 일으킬 심산이어서 대치가 이어지게 된다. 장안의 남북군에게 포위 꼴이었던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은 역상의 아들인 역기가 상장군 여록과 친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아버지인 역상을 인질로 잡고 역기를 협박해 여록을 기만하게 했다. 역기는 결국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병권을 태위 주발에게 인도하고 그대의 영지인 조나라 땅에서 제나라의 군대를 막는 것이 낫다'고 여록을 속인다.

이 소식을 들은 여후의 여동생 여수는 '너 때문에 우리들이 다 죽게 생겼구나! 우리가 군사를 잃으면 어디에 발을 붙인단 말이냐!'라고 화를 내며 방의 재물을 모조리 마당에 뿌려버리는 통에 계획이 물거품이 될 뻔했지만, 역기는 꿋꿋하게 '황제도 북군의 지휘를 태위에게 맡겼다'고 연이어 거짓말을 했고, 결국 친구의 말이라 믿고 속아넘어가게 된 여록은 인수를 대뜸 내주고 만다. 그렇게 여록은 멍청하게 두눈 뜨고 북군을 주발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어서 여산과 우연히 마주친 유장이 뇌정지가 온 여산을 대뜸 급습하여 마침내 화장실까지 추격해 여산을 죽인다. 이후 주발, 진평, 유장 등에 의해 궁성이 완전히 정리되자 여씨 일족들은 모조리 잡혀 참수 당하게 되는데, 이때 여록이 제일 먼저 참수당했다고 한다. 여수 역시 맞아 죽게 된다.

3. 평가

능력도 없이 여씨라는 이유만으로 조나라 왕에 상장군까지 했던 인물이다. 여산은 남군을, 자신은 북군을 통솔하고 있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비록 자신의 친우인 역기를 이용했다지만 진평과 주발의 계략에 의해 군사하나 없는 주발에게 북군을 빼앗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아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가지는 북군의 의미와 무게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인데, 권력이나 정쟁에 대한 감각이 전무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역기를 정말 뼛속 깊이 신뢰하였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