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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2:01:19

중국 3대 악녀

1. 개요2. 멤버3. 평가4. 비판5. 관련 문서

1. 개요

중국사에서 높은 권력을 쥐었던 악녀 3명을 칭하는 말.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 정도의 권력을 쥔 것도 있지만, 많은 수의 대신들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고 나라를 크게 흔들었기에 악녀로 불린다.

2. 멤버


측천무후의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측천무후가 제외되고 가남풍이 대신하기도 하며 여후도 권력욕이 넘치고 잔인한 인물이긴 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을 괴롭히진 않았던데다 그녀의 치세가 안정적이었다는 걸 감안하여 제외하자는 의견도 있다.

3. 평가

측천무후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말로가 별로 좋지 못 했다. 여후는 사기와 전설에 의하면 척부인의 아들인 유여의의 원한이 실체화된 거대한 개가 덮치는 환상을 본 뒤[2] 얼마 가지 않아 숨졌고, 그녀의 일족은 관영, 진평, 주발, 하후영 등이 일으킨 쿠데타에 몰살당했다. 이렇게 된 여후의 큰 흠집은 무자비한 숙청과 여 씨들의 우대에 있다. 전한의 5대 황제 한문제의 후손들이 건국한 후한 광무제는 문제의 어머니 박희의 후손이였지 여후의 후손이 아니어서 '건국의 어머니'라는 고황후의 칭호를 여후에게서 박탈, 조상인 박씨에게 바쳤다. 게다가 한이 멸망할 때 적미군이 여후의 무덤을 도굴하고 시신을 능욕했다.

서태후의 무덤 또한 청나라의 멸망 후 군벌 쑨뎬잉의 군대의 의해 도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시신의 옷을 벗기고 몸을 난도질했으며 발로 밟기까지 했다고 한다. 공식 멤버는 아니지만 가남풍은 조왕 사마륜에 의해 유폐됐다가 독살되었고 일족은 몰살당했다.

반면 측천무후는 자신의 일족을 잃었지만,[3] 그의 손자 현종과 그의 자손이 당나라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대우가 특별히 깎이지 않았고, 남편 당고종과 합장된 건릉 또한 당나라 황릉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았다.

측천무후가 비교적 좋은 결말은 맞은 건 정권 이양 과정에서 피를 덜 봤기 때문일 수 있다. 측천무후는 남편에게 정치적 실권을 이양받았기 때문에 권력을 넘겨받느라 피를 그렇게 많이 흘리지 않았다. 반면 여후와 서태후는 집안 싸움의 여파로 나라가 들썩일 정도였다. 또한 측천무후는 상기한 재평가에 통치 기간 동안 백성들의 삶이 윤택했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비교적 원활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측천무후는 치정문제에서 상대적으로 깨끗했다는 것도 있다. 차라리 권력을 잡거나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것은 남성들도 자주 하는 일이라 관대하게 봐주기도 하지만[4][5], 질투는 칠거지악에 포함될 정도로 남성들이 싫어하는 성품이었다. 같은 악녀라도 투기가 심하거나 하면 쪼잔하고 치졸하게 보이는 것이다. 여후는 숙적인 척부인을 잔인하게 처형해(인간돼지) 친아들인 혜제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무에서 손을 뗄 정도였고,[6] 가남풍은 질투가 너무 심해서 사마염이 폐위시키려고 할 정도였다. 서태후는 본인이 딱히 질투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광서제의 부부 문제에 개입하여 진비를 살해하기까지 한다. 물론 측천무후도 사람인지라 남총이 있기도 했고, 남총에게 한눈을 판 상관완아라는 여성의 이마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지만[7][8] 이 정도의 선에서 끝났으니 앞의 악녀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애교 수준. 그 외에 당 고종의 황후 왕씨와 후궁인 숙비 소씨를 잔혹하게 살해한 적도 있지만, 잔혹함과는 별개로 이 자체는 치정 문제보다는 정치적 문제의 성격이 더 강했다.

4. 비판

중국 3대 악녀라고 하지만, 중국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면 관련 내용이 거의 없으며, 극소수의 내용도 '일본에서 평가한'이라고 수식어가 붙는다. 3대 운운은 대부분 출처가 일본이라고 봐도 좋다. 중국인들은 오히려 분류를 할때 3보다는 4에 집착하는 면이 있다. 전국사군자, 4대미녀, 4대 발명(가끔 인쇄술을 빼고 3대 발명이라고도 한다.), 망탁조의 등.

측천무후의 경우 기득권 세력을 정리하고 고구려를 정벌하는 등 내치와 외치에서 일정한 업적을 쌓았고, 물러날 때 곱게 물러나 훗날 당나라의 태평성대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악녀 중 두 명은 '쉴드칠 만한 측면도 있다' 정도로,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악녀라는 평이 아주 부당하지는 않다는 평가인 데 반해 측천무후는 좋은 쪽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당의 3번의 전성기 중 2번째 전성기(첫 번째는 당 태종의 '정관의 치')인 '무주의 치'를 이끈 인물이며 이후의 전성기인 당현종의 '개원의 치'의 초석을 깔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9]

전통적인 중국의 사관(史觀)에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유독 여자로 인해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식의 논조가 보인다. 이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부부유별 등 가정내 질서 유지와 이를 위한 가장의 집안 내부단속을 강조하는 특유의 유교적 세계관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도 있고,[10] 왕권을 약화시키는 외척세력을 경계하기 위해 특별히 악녀들을 강조한 탓이기도 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얘기도 일국과 가정을 규모만 다를 뿐 사실상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던 유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결국 왕비, 외척이 나서면 나라에 망조가 든다는 얘기다. 여후, 측천무후 때 외척들이 유달리 폐해를 끼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악녀로 평가할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관련 문서


[1] 서씨가 아니라 서쪽 궁에 머무는 태후라는 뜻이다. 동궁에 사는 동태후도 있었다. 서태후 항목 참조. [2] 주변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여후 본인이 유여의에 대하여 내심 켕기는 부분이 있어서 나타난 환각증세였다는 분석이 있다. 유여의의 어머니인 척부인이 더 가혹한 대우를 받긴 했지만 여후의 입장에서 이쪽은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었고, 아들인 유여의는 어른들 권력싸움에 말려들어서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살해당한 거라 여후가 이쪽에 죄책감을 가질 소지가 있었다는 것. [3] 막내딸 태평공주 당현종과 손을 잡고 위씨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무씨 일족도 덩달아 숙청당했다. [4] 왜냐하면 이런 숙청을 통해 나라가 더 좋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통 나라에 고인물이 생기면 썩으므로 처내면 새로운 인재가 들어오는 계기가 되기 때문. [5] 측천무후의 숙청은 황권마저 넘보던 무천주 관룡집단의 권력을 억누르기 위함이므로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반면 여후나 가남풍의 경우 외척의 발호를 위한 것이다. [6] 단 여후가 척부인을 증오한 것은 단순 치정 문제가 아니라 측전무후가 왕황후와 소숙비를 숙청한 것처럼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유방이 황태자를 교체하려고 했을 때 척부인도 유방의 의견에 동조해 유여의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재촉했다. 여후 입장에서 척부인의 행동은 하극상을 일으킨 행동으로 여겨 정치적 숙적으로 여길 법했던 것. 그러나 척부인은 태자 교체 실패 이후엔 정치적으로 어그로를 끈 적이 없어 잔인하게 살해당할 정도의 중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후는 원한에 사무쳐서 끔찍하게 죽였으니 투기를 벌였다고 인지되는 것이다. [7] 측천무후는 그녀의 재능을 아꼈고 그녀의 할아버지를 정치적 이유로 죽인 것에 미안해했던 탓인지 이마에 글씨가 아닌 아주 작은 매화꽃을 새겼다고 한다. [8] 관련 기록은 여러 야사들에서 나오는지라 이마에 뭔가 상처를 입혔다는 부분만 제외하면 사건의 경위와 세부사항에 있어서 다소 다르게 나온다. 심지어 치정과는 무관하게 다른 사건으로 심기를 건드렸다는 설도 있다. [9] 이외에도 측천무후는 위진남북조 시대 때 이어오던 관롱집단들을 청산하였고 과거제를 개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인걸 같은 비관롱집단들을 등용하여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였다. [10] 공자가 주장한 유교의 핵심을 이루는 사상이 정명사상이다. 쉽게 말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제 자리(임금과 신하, 지아비와 부인, 부모와 자식 등)에서 제 할 일을 다하며 분수에 넘치는 행동은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오륜의 하나로 부부간의 관계와 역할을 규정하는 '부부유별'이 있는데, 이에 따라 망한 왕조들을 설명할 때 유교의 오륜 중 하나인 부부유별을 지키지 않고 부인을 단속 못 해 망했다고 설명하는 식으로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