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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1:06:45

양(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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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 | Liang Dynasty
파일:동위-남량.png
지도의 분홍색 부분 (534년 기준)
502년 ~ 557년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남제 남진
후량
별칭 남량(南梁), 소량(蕭梁)
위치 중국 화남, 베트남 북부
수도 건강(建康) (502년 ~ 552년) (554년 ~ 557년)
강릉(江陵) (552년 ~ 554년)
면적 2,620,000km² (546년 기준)
인구 21,000,000명 (539년 기준)
민족 한족
언어 중세 남방 중국어, 한문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화폐 태청풍락(太淸豊樂)[1]
정치체계 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난릉 소씨
주요 황제 고조 무황제 (502년 ~ 549년)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베트남|]][[틀:국기|]][[틀:국기|]] (일부)
1. 개요2. 흥망성쇠3. 내면4. 왕사5. 인물6. 전투

[clearfix]

1. 개요

502년에 세워진 나라로 육조시대의 국가 중 하나이다. 이 왕조의 초대 황제 양무제 소연의 치세는 송 문제 유의륭의 치세와 함께 육조시대에서 그나마 나라가 나라다웠던 시대[2]로 꼽힌다. 소연의 성을 따서 소량(蕭梁) 혹은 남량(南梁), 동량(東梁)이라고도 부른다. 남제 폭군 동혼후 소보권을 죽인 황족 소연이 세웠는데 소연은 아주 훌륭한 황제로 막장 황제가 들끓는 남조 역사 중에서도 정말 몇 안되는 명군으로 추앙되는 인물이었다. 휘하 장수들 중에서 진경지가 유명한 편이다.

한반도 국가들(특히 백제)과 왜와의 교류가 잦았다. 이를 대표하는 유물은 무령왕릉 양직공도이다. 한국사 동아시아사에 단골로 잘 나온다.

2. 흥망성쇠

초기에는 제도를 개혁하고 민심을 살펴서 화폐 경제가 발전하는 등 국가가 융성했으나, 점차 가속화되는 인플레이션에다가 새로 주조한 철전은 외면받고, 동전을 만들 구리는 부족해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의 극치를 달리는 융성의 시대였지만, 속이 썩은 나무같이 이면에 문제점이 많이 발생하던 때가 당시의 양나라였다.

덤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서 빈민과 불량배들이 군대에 입대하여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바람에 양나라 군대 자체가 깡패의 모임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중앙의 귀족들은 사치의 극한을 누렸다. 여성화하여 화장을 하고 굽 높은 신발을 신으며, 남이 옷을 입혀주지 않으면 혼자서 아무것도 못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서 고위 벼슬아치가 말이 날뛰는 광경을 보며 말이 아니라 호랑이라고 하는 등, 겉보기엔 신선 같지만 전혀 쓸모없는 인간만 양산하고 있었다.

물론 소연도 이런 문제를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딱히 해결방법이 없었다. 이를 비관했는지 말년에 불교에 너무 심취해서 툭하면 머리 깎고 중 되겠다고 설치는 것을 신하들이 잡아와서 간신히 말리고, 잊을 만하면 또 그 짓거리를 반복하여 나라를 홀라당 말아먹었다.[3] 후경의 반란에 휘말려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다른 곳에 있었던 같은 소씨 황족들이 서로 눈치 보고 어떻게 이 뒤에 더 챙겨먹을까나 강구하다가 결국 늙은 황제를 굶어죽게 내버려뒀다. 소연이 다른 남조 국가들의 예를 생각해서 황족들을 탄압하지 않고 자상하게 보살펴주며 죄를 용서한 것에 비하면 참 배은망덕한 짓을 한 셈이다.

이게 550년의 일이다. 물론 소연 자체는 좋은 황제였으나 종교에 너무 깊이 빠진 것이 유일한 단점[4]으로 그 때문에 자신이 파멸하는 비극을 맞았다. 다른 황족들도 자기네들끼리 내전을 벌이다가 북조의 공격을 받거나, 휘하 장수의 꼭두각시가 돼서 결국 제대로 된 황제 노릇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557년에 나라가 망했으니 말 그대로 무제의 재위기간 동안 잘 나가다가 죽자마자 폭풍같이 망한 셈이다. 양무제가 죽고 나서 나라가 고작 8년밖에 못 간 것이다.

그 뒤 건강 근처는 장군 진패선(陳覇先)이 세운 (陳)나라로 이어지고, 서위의 괴뢰 정권인 후량은 양양 부근의 좁은 지역에 세워진다. 참고로 후량의 경우 명색은 국가였지만 실상은 양양만 다스리는 일개 지방 정권 이하에 불과했으므로 정식으로는 양나라로 보지 않으며 남조로 치지도 않는다.

여담으로 양나라는 국호는 바꿨으나 스스로 남제와 같은 운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제나라에 제사도 지내주고, 심지어 황릉도 같은 자리를 썼으며, 오행의 덕도 같은 목덕(푸른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외에 양나라의 특징은 후경의 난 이후에 벌어진 대규모 내전으로 인해 멀리 보면 삼국시대 위나라에서부터 전해진 문벌 귀족 계층이 한꺼번에 망해버린 것이다. 원래 남조의 귀족 계층은 왕조가 망해도 그대로 존속하며, 귀족이 되고 안 되고는 귀족들 스스로 결정하지 황제도 손을 못 대는 엄청난 권세를 누렸으나, 후경의 난과 그 이후의 혼란으로 인해 권력과 함께 지방의 장원, 즉 재력도 잃어버림으로써 완전히 몰락했다. 따라서 후경의 난 이후의 귀족 계층은 진나라에서 장식용으로 몇 명 등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비참한 삶을 살았고, 일부만이 수나라의 집권계층과 혼인하여 흡수되었다.

3. 내면

양의 치세가 육조시대에서 유일하게 사람다운 시대라 꼽히는 이유는 다른 시대에 유독 폭군 암군이 유독 즐비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아보이는 것이고 사실상 이 시대도 그리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건국을 선포한 지 겨우 40일 만에 소연의 최측근이자 외척(外戚) 세력의 중심인 장홍책(張弘策)이 동혼후의 잔당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소연이 유독 자신의 친족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등원기(鄧元起)가 겨우 군사를 재정비하기 위해 익주(益州)의 양식과 기계를 채웠는데 그 때문에 창고에 남는 것이 없어서 익주자사(益州刺史) 소연조(蕭淵藻)는 등원기를 원망하며 그에게 등원기의 명마를 요구했다. 이에 소연조는 등원기가 술에 취한 것을 틈타 그를 살해했는데 이때는 양이 건국된 지 겨우 3년 만이었다. 그럼에도 소연은 소연조를 나무라는 데로 끝났고 겨우 관직이 내려가는 데에 멈췄다.

이에 남사의 저술가 이연수(李延壽)는 「등원기는 근면하여 마침내 위아래와 화목했고 공적은 오직 영토를 새로 얻은 것이나, 수고하고 일을 도모하려하지 않았으니 화란(禍亂)의 기회가 먼저 함정에 빠뜨렸다. 관군(冠軍)장군으로 폄하한 것은 형벌로는 이미 가벼운 것이니 양(梁)의 정치와 형벌은 이에 실종되었다. 친척을 사사로이 하는 실마리는 이것으로부터 열렸으니, 수명이 길지 않은 것 역시 마땅하지 않은가! 」라 평했다. 즉 나라가 건국된 지 3년도 안 돼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것은 후대에도 전해져 황족들이 백성들을 수탈하고 황녀들과 간통하는 등 심각한 상태로 번지게 된다.

4. 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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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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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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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청(太淸) 연호 시기인 547~549년에 주조 [2] 물론 남조 기준이다. 북위에 비하면 국가 시스템은 약했다고 평가받는다. [3] 그래서 황제 보살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4] 아무 생각 없이 종교에 올인한 것은 아니고 불교계를 세력화해 그 힘으로 기존 귀족들을 견제하고 국정의 정상화를 꾀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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