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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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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융
동호
고조선 예맥 숙신
고조선 고리국
흉노 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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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초
고구려 {{{#!wiki style="margin:30px -10px -160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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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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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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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2권 「태조기(太祖紀)」 3·4권 「태종기(太宗紀)」 5권 「세종기(世宗紀)」
야율아보기 야율요골 야율올욕
6·7권 「목종기(穆宗紀)」 8·9권 「경종기(景宗紀)」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야율술률 야율명의 야율문수노
18·19·20권 「흥종기(興宗紀)」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야율지골 야율사랄 야율아과 · 야율순 · 야율아리 · 야율대석
※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2><tablewidth=100%><tablebgcolor=#a0522d> 71권 「후비전(后妃傳)」 ||
소탁진 · 소아리신 · 소월리타 · 소암모근 · 술률평 · 소온 · 소철갈지 · 견비 · 소황후 · 소작 · 소보살가 · 소누근 · 소달리 · 소삼천 · 소관음
소탄사 · 소탈리라 · 소사고 · 소비비 · 소귀가
72권 「종실전(宗室傳)」 73권 「야율갈로등전(耶律曷魯等傳)」
야율배 · 야율이호 · 야율준 · 야율오로알 야율갈로 · 소적로 소아고지 · 야율사열적 야율로고 야율파덕 · 야율욕온 · 야율해리(海里)
74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75권 「야율적렬등전(耶律覿烈等傳)」
야율적랄 · 소흔독 · 강묵기 · 한연휘 · 한지고 야율적렬 야율우지 · 야율탁진 야율고 야율돌려불 · 왕욱 · 야율도로군
76권 「야율해리등전(耶律解里等傳)」
야율해리(解里) · 야율발리득 · 야율삭고 · 야율노불고 · 조연수 · 고모한 · 조사온 · 야율구리사 · 장려
77권 「야율옥질등전(耶律屋質等傳)」 78권 「야율이랍갈등전(耶律夷臘葛等傳)」
야율옥질 · 야율후 · 야율안단 · 야율와 · 야율퇴욱 · 야율달열 야율이랍갈 · 소해리 · 소호사 · 소사온 · 소계선
79권 「실방등전(室昉等傳)」 80권 「장검등전(張儉等傳)」
실방 · 야율현적 · 여리 · 곽습 · 야율아몰리 장검 · 형포박 · 마득신 · 소박 · 야율팔가
81권 「야율실로등전(耶律室魯等傳)」 82권 「야율융운등전(耶律隆運等傳)」
야율실로 · 왕계충 · 소효충 · 진소곤 · 소합탁 야율융운 · 야율발고철 · 소양아 · 무백 · 소상가 · 야율호고
83권 「야율휴가등전(耶律休哥等傳)」 84권 「야율사등전(耶律沙等傳)」
야율휴가 · 야율사진 · 야율해저 · 야율학고 야율사 · 야율말지 · 소간 · 야율선보 · 야율해리
85권 「소달름등전(蕭撻凜等傳)」
소달름 · 소관음노 · 야율제자 · 야율해리(諧理) · 야율노과 · 소류 · 고훈 · 해화삭노 · 소탑열갈 · 야율살합
86권 「야율합주등전(耶律合住等傳)」
야율합주 · 유경 · 유육부 · 야율요리 · 우온서 · 두방 · 소화상 · 야율합리지 · 야율파적
87권 「소효목등전(蕭孝穆等傳)」
소효목 · 소포노 · 야율포고 · 하행미
88권 「소적렬등전(蕭敵烈等傳)」
소적렬(蕭敵烈) · 야율분노 · 소배압 소항덕 · 야율자충 · 야율요질 · 야율홍고 · 고정 · 야율적록(的琭) · 대강예
89권 「야율서성등전(耶律庶成等傳)」 90권 「소아랄등전(蕭阿剌等傳)」
야율서성 · 양석 · 야율한류 · 양길 · 야율화상 소아랄 · 야율의선 · 소도외 · 소탑랄갈 · 야율적록(敵祿)
91권 「야율한팔등전(耶律韓八等傳)」 92권 「소탈랄등전(蕭奪剌等傳)」
야율한팔 · 야율당고 · 소출철 · 야율결 · 야율복리독 소탈랄 · 소보달 · 야율후신 · 야율고욱 · 야율독매 · 소한가 · 소오야
93권 「소혜등전(蕭惠等傳)」
소혜 · 소우로 · 소도옥 · 야율탁진
94권 「야율화가등전(耶律化哥等傳)」
야율화가 · 야율알랍 · 야율속살 · 소아노대 · 야율나야 · 야율하로소고 · 야율세량
95권 「야율홍고등전(耶律弘古等傳)」
야율홍고 · 야율마륙 · 소적렬(蕭滴冽) · 야율적록 · 야율진가노 · 야율특마 · 야율선동 · 소소삽 · 야율대비노
96권 「야율인선등전(耶律仁先等傳)」
야율인선 · 야율량 · 소한가노 · 소덕 · 소유신 · 소악음노 · 야율적렬 · 요경행 · 야율아사
97권 「야율알특랄등전(耶律斡特剌等傳)」
야율알특랄 · 해리 · 두경용 · 야율인길 · 양적 · 조휘 · 왕관 · 야율희손
98권 「소올납등전(蕭兀納等傳)」
소올납 · 야율엄 · 요신 · 야율호려
99권 「소암수등전(蕭巖壽等傳)」 100권 「야율당고전(耶律棠古等傳)」
소암수 · 야율살랄 · 소속살 · 야율달불야 · 소달불야 · 소홀고 · 야율석류 야율당고 · 소득리저 · 소수알 · 야율장노 · 야율출자
101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102권 「소봉선등전(蕭奉先等傳)」
야율적랄 · 야율아식보 · 소을설 · 소호독 소봉선 · 이처온 · 장림 · 야율여도
103·104권 「문학전(文學傳)」 105권 「능리전(能吏傳)」
소한가노 · 이한 · 왕정 · 야율소 · 요휘 · 야율맹간 · 야율곡욕 대공정 · 소문 · 마인망 · 야율탁로알 · 양준욱 · 왕당
106권 「탁행전(卓行傳)」 107권 「열녀전(列女傳)」
소차랄 · 야율관노 · 소포리불 야율상가 · 소의신 · 소와리본 · 소뇌란
108권 「방기전(方技傳)」 109권 「영관·환관전(伶官宦官傳)」
직로고 · 왕백 · 위린 · 야율적로 · 야율을불가 나의경 · 왕계은 · 조안은
110·111권 「간신전(奸臣傳)」
야율을신 · 장효걸 · 야율연가 · 소십삼 · 소여리야 · 야율합로 · 소득리특 · 소와도알 · 소달로고 · 야율탑불야 · 소도고사
112·113·114권 「역신전(逆臣傳)」
야율할저 · 야율찰할 · 야율누국 · 야율중원 · 야율활가 · 소한 · 야율첩랍 · 야율랑 · 야율유가 · 야율해사 · 야율적랍 · 소혁 · 소호도 · 소첩리득 · 고첩 · 야율살랄죽 · 회리보 · 소특열
115권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 서하
※ 116권은 國語解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0522d><tablebgcolor=#a0522d> ||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fff"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양서(梁書) ]
{{{#181818,#e5e5e5
1·2·3·4·5·6·7권 「태조기(太祖紀)」 8·9·10권 「말제기(末帝紀)」
주황 주우정
11권 「후비전(后妃傳)」
문혜황태후 · 원정황후 · 장덕비
12권 「종실전(宗室傳)」
주전욱 · 주우량 · 주우능 · 주우회 · 주우녕 · 주우륜 · 주우유 · 주우문 · 주우규 · 주우장 · 주우자
13권 「주선등전(朱瑄等傳)」 14권 「나소위등전(羅紹威等傳)」
주선 · 주근 · 시부 · 왕사범 · 유지준 · 양숭본 · 장은 · 장만진 나소위 · 조주 · 왕가
15권 「한건등전(韓建等傳)」 16권 「갈종주등전(葛從周等傳)」
한건 · 이한지 · 풍행습 · 손덕소 · 조극유 · 장신사 갈종주 · 사언장 · 호진 · 장귀패 · 장귀후 · 장귀변
17권 「성예등전(成汭等傳)」 18권 「장문울등전(張文蔚等傳)」
성예 · 두홍 · 전군 · 조광응 · 장길 · 뇌만 장문울 · 설이구 · 장책 · 두효 · 경상 · 이진
19권 「씨숙종등전(氏叔琮等傳)」
씨숙종 · 주우공 · 왕중사 · 주진 · 이사안 · 등계균 · 황문정 · 호규 · 이당 · 이중윤 · 범거보
20권 「사동등전(謝瞳等傳)」
사동 · 사마업 · 유한 · 왕경요 · 고소 · 마사훈 · 장존경 · 구언경
21권 「방사고등전(龐師古等傳)」
방사고 · 곽존 · 부도소 · 서회옥 · 곽언 · 이당빈 · 왕건유 · 유강예 · 왕언장 · 하덕륜
22권 「양사후등전(楊師厚等傳)」 23권 「유심등전(劉鄩等傳)」
양사후 · 우존절 · 왕단 유심 · 하괴 · 강회영 · 왕경인
24권 「이정등전(李珽等傳)」
이정 · 노증 · 손즐 · 장준 · 장연 · 두순학 · 나은 · 구은 · 은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당서(唐書) ]
{{{#181818,#e5e5e5
1·2권 「무제기(武帝紀)」 3·4·5·6·7·8·9·10권 「장종기(莊宗紀)」 11·12·13·14·15·16·17·18·19·20권 「명종기(明宗紀)」
이극용 이존욱 이사원
21권 「민제기(閔帝紀)」 22·23·24권 「말제기(末帝紀)」
이종후 이종가
25권 「후비전(后妃傳)」
정간황후 · 유태비 · 위국부인 · 신민경황후 · 한숙비 · 이덕비 · 소의황후 · 화무현황후 · 선헌황후 · 공황후 · 유황후
26·27권 「종실전(宗室傳)」
이극양 · 이극수 · 이극공 · 이극녕 · 이존패 · 이존미 · 이존악 · 이존예 · 이존확 · 이계급 · 이계동 · 이계숭 · 이계섬 · 이종경 · 이종영 · 이종찬 · 이종익 · 이중길 · 이이미
28권 「이사소등전(李嗣昭等傳)」 29권 「이존신등전(李存信等傳)」 30권 「왕용등전(王鎔等傳)」
이사소 · 배약 · 이사본 · 이사은 이존신 · 이존효 · 이존진 · 이존장 · 이존현 왕용 · 왕소회 · 왕처직
31권 「강군립등전(康君立等傳)」
강군립 · 설지근 · 사건당 · 이승사 · 사엄 · 개우 · 이광 · 이승훈 · 사경용
32권 「주덕위등전(周德威等傳)」 33권 「곽숭도전(郭崇韜傳)」 34권 「조광봉등전(趙光逢等傳)」
주덕위 · 부존심 곽숭도 조광봉 · 정각 · 최협 · 이기 · 소경
35권 「정회등전(丁會等傳)」 36권 「이습길등전(李襲吉等傳)」
정회 · 염보 · 부습 · 오진 · 왕찬 · 원상선 · 장온 · 이소문 이습길 · 왕겸 · 이경의 · 노여필 · 이덕휴 · 소순
37권 「안금전등전(安金全等傳)」
안금전 · 안원신 · 안중패 · 유훈 · 장경순 · 유언종 · 원건풍 · 서방업 · 장준회 · 손장
38권 「맹방립등전(孟方立等傳)」 39권 「장전의등전(張全義等傳)」
맹방립 · 장문례 · 동장 장전의 · 주우겸
40권 「곽언위등전(霍彦威等傳)」 41권 「이건급등전(李建及等傳)」
곽언위 · 왕안구 · 대사원 · 주한빈 · 공경 · 유기 · 주지유 이건급 · 석군립 · 고행규 · 장정유 · 왕사동 · 삭자통
42권 「안중회등전(安重誨等傳)」 43권 「두로혁등전(豆盧革等傳)」
안중회 · 주홍소 · 주홍실 · 강의성 · 약언조 · 송영순 두로혁 · 위설 · 노정 · 조봉 · 이우 · 임환
44권 「설정규등전(薛廷珪等傳)」
설정규 · 최기 · 유악 · 봉순경 · 두몽징 · 이보은 · 귀애 · 공막 · 장문보 · 진예 · 유찬
45권 「장헌등전(張憲等傳)」
장헌 · 왕정언 · 호장 · 최이손 · 맹곡 · 손악 · 장연랑 · 유연호 · 유연랑
46권 「원행흠등전(元行欽等傳)」
원행흠 · 하노기 · 요홍 · 이엄 · 이인구 · 강사립 · 장경달
47권 「마욱등전(馬郁等傳)」
마욱 · 사공정 · 조정은 · 소희보 · 약종지 · 가복 · 마호 · 나관 · 순우안 · 장격 · 허적 · 주현표
48권 「장승업등전(張承業等傳)」
장승업 · 장거한 · 마소굉 · 맹한경
49권 「모장등전(毛璋等傳)」 50권 「강연효등전(康延孝等傳)」
모장 · 섭서 · 온도 · 단응 · 공겸 · 이업 강연효 · 주수은 · 양립 · 두정완 · 장건쇠 · 양언옹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진서(晉書) ]
{{{#181818,#e5e5e5
1·2·3·4·5·6권 「고조기(高祖紀)」 7·8·9·10·11권 「소제기(少帝紀)」
석경당 석중귀
12권 「후비전(后妃傳)」
이황후 · 안태비 · 장황후 · 풍황후
13권 「종실전(宗室傳)」
석경위 · 석훈 · 석중윤 · 석중영 · 석중신 · 석중예 · 석중진 · 석중고 · 석중예 · 석연후 · 석연보
14권 「경연광등전(景延廣等傳)」
경연광 · 이언도 · 장희숭 · 왕정윤 · 사광한 · 양한옹 · 양사권 · 윤휘 · 이종장 · 이종온 · 장만진
15권 「상유한등전(桑維翰等傳)」
상유한 · 조형 · 유구 · 풍옥 · 은붕
16권 「조재례등전(趙在禮等傳)」
조재례 · 마전절 · 장균 · 화온기 · 안숭완 · 양언순 · 이승약 · 육사탁 · 안원신 · 장랑 · 이덕충 · 전무 · 이승복 · 상리금
17권 「방지온등전(房知溫等傳)」
방지온 · 왕건립 · 강복 · 안언위 · 이주 · 장종훈 · 이계충 · 이경 · 주광보 · 부언요 · 나주경 · 정종
18권 「요의등전(姚顗等傳)」
요의 · 여기 · 양문구 · 사규 · 배호 · 오승범 · 노도 · 정도광 · 왕권 · 한운 · 이역
19권 「노질등전(盧質等傳)」
노질 · 이혜미 · 노첨 · 최절 · 설융 · 조국진 · 장인원 · 조희 · 이하 · 윤옥우 · 정운수
20권 「장종간등전(萇從簡等傳)」
장종간 · 반환 · 방태 · 하건 · 장정온 · 곽연로 · 곽금해 · 유처양 · 이경 · 고한균 · 손언도 · 왕부증 · 비경 · 이언순
21권 「황보우등전(皇甫遇等傳)」
황보우 · 왕청 · 양한장 · 백봉진 · 노순밀 · 주환 · 심윤 · 오만 · 적장 · 정복윤 · 곽린
22권 「공숭필등전(孔崇弼等傳)」
공숭필 · 진보극 · 왕유 · 장계조 · 정완 · 호요 · 유수청 · 방고 · 맹승회 · 유계훈 · 정수익 · 정손 · 이욱 · 정현소 · 마중적 · 진현
23권 「범연광등전(范延光等傳)」 24권 「안중영등전(安重榮等傳)」
범연광 · 장종보 · 장연파 · 양광원 · 노문진 · 이금전 안중영 · 안종진 · 장언택 · 조택균 · 장려 · 소한 · 유희 · 최정훈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한서(漢書) ]
{{{#181818,#e5e5e5
1·2권 「고조기(高祖紀)」 3·4·5권 「은제기(隱帝紀)」
유고 유승우
6권 「후비전(后妃傳)」
이황후
7권 「종실전(宗室傳)」
유승훈(劉承訓) · 유승훈(劉承勛) · 유신 · 유빈
8권 「왕주등전(王周等傳)」
왕주 · 유심교 · 무한구 · 장관 · 이은 · 유재명 · 마만 · 이언종 · 곽근 · 황보립 · 백재영 · 장붕
9권 「사홍조등전(史弘肇等傳)」
사홍조 · 양빈 · 왕장 · 이홍건 · 염진경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 유수
11권 「이숭등전(李崧等傳)」 12권 「두중위등전(杜重威等傳)」
이숭 · 소봉길 · 이린 · 용민 · 유정 · 장윤 · 임연호 두중위 · 이수정 · 조사관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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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373a3c> 1·2·3·4권 「태조기(太祖記)」 5·6·7·8·9·10권 「세종기(世宗紀)」 11권 「공제기(恭帝紀)」
곽위 시영 시종훈
12권 「후비전(后妃傳)」
성목황후 · 양숙비 · 장귀비 · 동덕비 · 정혜황후 · 선의황후
13권 「종실전(宗室傳)」
곽동 · 곽신 · 시종의 · 시희회
14권 「고행주등전(高行周等傳)」
고행주 · 안심기 · 안심휘 · 안심신 · 이종민 · 정인회 · 장언성 · 안숙천 · 송언균
15권 「왕은등전(王殷等傳)」
왕은 · 하복진 · 유사 · 왕진 · 사언초 · 사의 · 왕령온 · 주밀 · 이회충 · 백문가 · 백연우 · 당경사
16권 「조휘등전(趙暉等傳)」
조휘 · 왕수은 · 공지준 · 왕계홍 · 풍휘 · 고윤권 · 절종완 · 왕요 · 손방간
<rowcolor=#373a3c> 17권 「풍도전(馮道傳)」 18권 「노문기등전(盧文紀等傳)」
풍도 노문기 · 마예손 · 화응 · 소우규 · 경범
19권 「왕박등전(王朴等傳)」
왕박 · 양응식 · 설인겸 · 소원 · 노손 · 왕인유 · 배우 · 단희요 · 사도후 · 변울 · 왕민
20권 「상사등전(常思等傳)」
상사 · 적광업 · 조영 · 이언군 · 이휘 · 이건숭 · 왕중예 · 손한영 · 허천 · 조봉 · 제장진 · 왕환 · 장언초 · 장영 · 유인섬
21권 「왕준등전(王峻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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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권 「유호등전(劉皞等傳)」
유호 · 장항 · 장가복 · 우덕진 · 왕연 · 신문병 · 호재 · 유곤 · 가위 · 조연의 · 심구 · 이지손 · 손성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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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33권 「세습열전(世襲列傳)」 134·135·136권 「참위열전(僭位列傳)」
이무정 · 고만흥 · 한손 · 이인복 · 고계흥 · 마은 · 유언 · 전류 양행밀 · 이변 · 왕심지 · 유수광 · 유엄 · 유숭 · 왕건 · 맹지상
137·138권 「외국열전(外國列傳)」
거란 · 토번 · 회골 · 고려 · 발해 · 흑수말갈 · 신라 · 당항 · 곤명부락 · 우전 · 점성 · 장가만
※ 138권 ~ 150권은 志에 해당. 구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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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권 「당폐제가인전(唐廢帝家人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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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 「진가인전(晉家人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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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권 「주태조가인전(周太祖家人傳)」
성목황후 · 양숙비 · 장귀비 · 동덕비 · 곽동 · 곽신 · 곽수원 · 곽손
20권 「주세종가인전(周世宗家人傳)」
시수례 · 정혜황후 · 선의황후 · 부황후 · 시종의 · 시희성 · 시희함 · 시희양 · 시희근 · 시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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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권 「이숭등전(李崧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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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구오대사 진서에서는 심빈(沈贇)으로 표기되며, 신오대사에서는 심빈(沈斌)으로 표기된다.
}}}}}}
[ 세가(世家) ]
||<-2><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width=50%> 61권 「오세가(吳世家)」 ||<-2><width=50%> 62권 「남당세가(南唐世家)」 ||
양행밀 · 서온 이변
63권 「전촉세가(前蜀世家)」 64권 「후촉세가(後蜀世家)」
왕건 맹지상
65권 「남한세가(南漢世家)」 66권 「초세가(楚世家)」
유은 마은 · 유언 · 주행봉
67권 「오월세가(吳越世家)」 68권 「민세가(閩世家)」
전류 왕심지
69권 「남평세가(南平世家)」 70권 「동한세가(東漢世家)」
고계흥 유민
※ 71권은 譜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 부록(附錄) ]
||<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72·73권 「거란전(契丹傳)」 ||
거란
74권 「외국열전(外國列傳)」
· 토혼 · 달단 · 당항 · 돌궐 · 토번 · 회골 · 우전 · 고려 · 발해 · 신라 · 흑수말갈 · 남조만 · 장가 · 곤명 · 점성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 ||
모스 키타이 구르[1]
대거란국 | 대요
[ruby(大契丹國 | 大遼, ruby=Mos Kitai gur Dà Liáo)]
파일:요나라 지도.png
북송 서하와 국경을 맞댄 요나라의 강역(연두색)[2]
907년[3] ~ 1125년(218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거란
오대십국 서요
별칭 요조([ruby(遼朝, ruby=liáocháo)])
위치 몽골 초원, 내몽골 자치구, 만주
수도 상경임황부 (上京臨潢府, 916 ~ 1120년)
중경대정부 (中京大定府, 1120 ~ 1121년)
응주 (현 숴저우시 잉현, 1121 ~ 1125년)[4]
인구 약 200만명(10세기 초)
약 900만명(12세기 초) 출처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5]
국성 야율(耶律)[6]
주요 황제 태조 야율아보기(억)
태종 야율요골(덕광)
성종 야율문수노(융서)
천조제 야율아과(연희)
언어 거란어, 중세 중국어
문자 거란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도교, 유교
종족 거란족, 한족, 해족, 발해인, 여진족
통화 각종 통보(通寶), 원보(元寶)[7]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몽골|]][[틀:국기|]][[틀:국기|]]

[[북한|]][[틀:국기|]][[틀:국기|]]

[[러시아|]][[틀:국기|]][[틀:국기|]]

[[카자흐스탄|]][[틀:국기|]][[틀:국기|]]

1. 개요2. 국호3. 키타이4. 역사
4.1. 발흥4.2. 당나라 시기4.3. 5대 10국 시기4.4. 전성기4.5. 멸망과 후예 국가들
5. 행정 제도6. 경제
6.1. 농업 경제
6.1.1. 상경도와 중경도의 농업 경제6.1.2. 서경도, 동경도, 남경도의 농업 경제
6.2. 유목 경제
6.2.1. 목축업6.2.2. 어업&어로, 채집, 수렵
6.3. 상업
6.3.1. 대외 무역 및 속국과의 조공 무역
6.4. 광업 · 금속 공업
6.4.1. 금속 기술 발전
6.5. 공예업
6.5.1. 직조업6.5.2. 도예 · 가죽 공예 · 목공예
7. 사회8. 문화9. 종교
9.1. 불교
10. 주요 인물11. 참고 문헌12. 한국사에서의 위치
12.1. 고려와의 관계
13. 요나라가 등장하는 대중매체14. 역대 황제 목록15. 추존 황제16. 요나라 계열 국가
16.1. 괴뢰국
16.1.1. 동란국
16.2. 잔존국
16.2.1. 북요(北遼)16.2.2. 서요(西遼)
16.3. 부흥 운동 국가
16.3.1. 동요(東遼)16.3.2. 후요(後遼)

[clearfix]

1. 개요

유목 민족인 거란의 왕조 중 하나. 영문으로는 '遼(, 본음은 료)'의 한어병음 표기를 따라 Liao Dynasty, 또는 거란국, 거란제국이라는 뜻으로 Khitan State, Khitan Empire라 부른다. 거란어로는 "훌지(호리지/胡里只. hulʤi)"라고 부른다.

218년간 존속하면서 거란 문자도 만들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송을 압박했다. 약체로 이름난 송군을 몰아붙인 게 큰 업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건국 초기의 송군은 고회덕, 반미, 부언경(符彦卿), 양업과 같은 우수한 지휘관들과 통일 전쟁을 치른 수십 만의 강군을 보유했다. 게다가 경제, 문화, 인구 등 다양한 면에서 송 왕조는 요 왕조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제 공격을 가해 온 송군을 번번이 격퇴한 요의 군사력은 상당히 강력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심지어 금군에게 전국토를 유린당해 멸망이 다가온 상황에서 요의 패잔병들이 송군 수만을 격퇴하는 기적적인 전적을 세운 적도 있었다. # 그러나, 요군 역시 체급을 한참 앞서는데다[8] 국경에 두터운 방어선을 세운 송을 멸망시킬만한 힘은 없었다.

개조는 야율아보기이며 황성(皇姓)은 야율(耶律)이다. 황성인 야율은 거란어로 '옐뤼'라고 발음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현대 중국어 발음 예뤼(Yélǜ)가 와전된 것이다. 거란 문자를 통해 재구성한 음가에 따르면 '야루드(ei.ra.u.ud)’[9]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0]

단명 왕조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218년이면 꽤 오래 존속한 왕조다. 진 · 한대 이후의 왕조들과 비교하면 1위 청나라 296년, 2위 당나라 289년, 3위 명나라 276년 다음이다. 요의 뒤로는 전한 213년, 후한 195년,[11] 북송 167년, 남송 152년,[12] 북위 148년, 금나라 121년, 원나라 97년이 뒤따른다.

2. 국호

요 왕조는 2개의 국호를 사용했다. 최초의 국호인 ‘거란’은 종족명을 국호로 사용한 것으로서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제정했고 두 번째 국호인 '요(대요)'는 947년(태종 대동 원년)에 처음 제정했다. 흔히 요라는 국호를 요하(遼河)나 요산(遼山)에서 유래했다고 말하지만, 둘 다 사실이 아니며 그 어원은 여러 학설이 분분할 뿐, 불명확하다.

거란(契丹)이라는 국호는 빈철(賓鐵)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중앙이나 중국, 칼, 시라무렌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 빈철설의 근거로는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가 국호를 정할 때에 "요는 빈철의 강함을 취해 국호를 요라 정했다."는 금사(金史)의 기록과 원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왕반(王磐)이 거란이란 국호의 유래를 빈철이라고 답한 기록 등을 제시한다.[13][14] 빈철은 단련된 금속, 즉 강철을 의미하며 실제로 요는 광공업으로 유명하고 영토에 지하 자원이 매우 풍부했다.

요 왕조가 구축한 이중 지배 체제는 국호의 사용에도 영향을 미쳐서 한인과 발해인 같은 정주민을 대상으로는 요(遼)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유목민과 삼림 수렵 민족을 대상으로는 대거란(大契丹), 또는 합라거란(哈喇契丹)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합라거란은 거란어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으로서 거란어 원음은 카라키타이, 또는 카라키탄이다. 즉, 서요의 국호로 알려진 카라키타이는 서요나 흑거란(黑契丹)을 뜻하는 게 아니라 서요를 세운 요의 유민들이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 조정은 983년(요 성종 통화(統和) 원년)에 다시 대거란으로, 1066년(요 도종 함옹(咸雍) 2년)에 다시 대요로 변경하는 등, 여러 차례 국호를 개정했다. 그러나 국호를 개정하더라도 예전의 국호를 혼용하는 일이 많아서 대중앙 요 거란국, 거란 요국, 요 거란국, 대거란국 등이라 서술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여요 전쟁 문서에서처럼 요 왕조의 국호를 개정 시기 별로 나누어서 거란이나 요로 따로 지칭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2가지 국호를 지속적으로 혼용한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며 요 왕조가 유목민을 대상으로는 거란, 정주민을 대상으로는 요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니 개인의 편의에 맞춰 사용할 수도 있고 국호를 합쳐 요 거란국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본 문서에서는 대부분의 역사서, 중국사 서적, 요 왕조에 대해 다룬 중학교 역사 ➀,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 여러 논문에서 ‘요’로 지칭하기 때문에 ‘요’로 통일했다.

3. 키타이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해 이름을 날린 요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서 러시아와 그리스, 이란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중국 키타이(Cathay. 캐세이)라고 부르고 있다.[15]. 몽골에서 중국을 가리키는 "햐타드(Хятад)"도 키타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는 " 동방견문록"에 북중국을 키타이, 옛 남송의 영토였던 남중국은 만지(Mangi, Manzi, 蠻子)라고 기록했다. 마르코 폴로의 영향과 중국 지역에 대한 낮은 정보력 때문에 유럽인들은 상당 기간 동안 정복 왕조의 영향이 짙은 북중국과 중국 전통 문화가 강한 남중국을 서로 다른 지역으로 인식했다.

4. 역사

4.1. 발흥

거란(契丹)은 고막해와 함께 동호계(東胡系)의 선비족 일파인 우문부의 후예로서 연원을 따지면 위 · 진 남북조 시기부터 존재한 민족이다. 하지만, 거란은 민족의 규모가 크지 않고 느슨한 형태의 부족 연합 세력이던 탓에 유연 북위, 고구려, 돌궐, 수나라, 당나라 같은 주변 강대국들과의 전쟁에 휘말려 부족이 쪼개지고 복속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수나라의 공작으로 돌궐이 분열하자, 돌궐에 대한 종속을 그만두고 수에 입조해 예전에 살던 땅을 하사받은 다음, 고구려와 돌궐에 복속한 부족들을 다시 모아 연맹을 구성했다. 이때 세운 연맹은 대하씨(大賀氏)가 주도권을 쥐어서 대하씨 연맹이라고 부른다.

수가 양제의 폭정으로 쇠퇴하고 수당교체기의 혼란이 발생하자, 초원의 돌궐은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거란을 비롯한 유목민족들을 복속시켰다. 돌궐에 예속된 상태에서 돌리가한(突利可汗)이 폭정을 일삼자, 이에 위협을 느낀 거란은 당에 귀순하여 보호를 요청하고, 당은 이를 받아들여 돌궐로부터 이들을 지켜주었다.

4.2. 당나라 시기

이후, 당은 거란에 기미제(羈縻制)를 적용하여 대하씨 연맹의 영토에 송막 도독부(松漠 都督府)를 세우고 각 부에는 주(州)를 설치한 뒤, 연맹 수장은 송막 도독(松漠 都督)으로, 부족장들은 각 주의 자사(刺史)로 임명했다. 당의 직접 지배를 받는 독립적인 부족들도 그 수가 무척 많다 보니 당 조정은 별도로 영주 도독부(營州 都督府)와 유주 도독부(幽州 都督府)를 설치해 이들을 관리했다.

구당서에 따르면, 대하씨 연맹은 총 8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는 200,000명, 병력은 43,000명이다. 각 부는 기본적으로 자치와 독립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만, 전쟁과 외교는 각 부의 합의나 연맹 수장의 명을 따랐다. 그러나 이 또한 수장이 전권을 행사하지는 못해서 연맹에 소속된 8부의 족장인 '대인'들이 다 함께 모여서 전쟁과 외교, 수장 선출과 파면과 같은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군사 업무는 번장(番長)이[16] 전담했다.

대하씨 일족 중에서 선출한 연맹의 수장은 일정한 임기 동안 외교, 전쟁을 담당하고 각 부의 관계를 중재했다. 원래 이러한 유목민 연맹의 수장은 부족장들이 능력 있는 자를 선출하는데, 대하씨 연맹은 수장을 대하씨 일족에서만 뽑았으니 선출제에서 세습제로 발전하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하씨 연맹 시기의 거란은 당의 통제에 놓여 있고 최전선에서 돌궐을 상대해야 했지만, 반대급부로 당의 보호를 받는 것은 물론 조공 무역을 통해 부를 누렸다. 연맹 수장과 각 부 대인들은 당 황제가 보내주는 많은 하사품과 관직, 국성(國性)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통치의 정당성까지도 확보할 수 있어서 당과 우호 관계를 맺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를 위해 인질을 보내주거나 당의 군사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수장들은 당 황제가 부족의 통치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거란 연맹이 당을 위해 군대를 파견한 사례로는 고 · 당 전쟁에 거란군이 참여해 당군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공격한 일이 있다.

그러나 당 - 거란 관계는 우호와 적대를 오가는 관계였다. 정관(貞觀) 연간까지 당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거란은 무주의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년)에 영주 도독 조문홰의 폭정에 분노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의 난)

진노한 측천무후 이진충 손만영의 이름을 이진멸(李盡滅), 손만참(孫萬斬)으로 개명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거란 반군은 측천무후의 조치에 대해 황장곡(黃麞谷)에서 수만의 주군을 참살하는 것으로 답했다.[17]

거란 반군이 막북(漠北)과 요서(遼西)에서 자립하고 하북(河北)까지 휩쓸자, 진압에 어려움을 느낀 주는 급기야 17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에 더해 돌궐까지[18] 끌어들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동협석곡(東峽石谷)에서 손만영의 유인 전술에 걸려 2차 진압군은 궤멸하고 거란 반군은 유주(幽州)까지 진공했다. 이에 주는 재차 20만의 병력을 파병하고 묵철가한이 거란 반군의 후방을 습격해 남북으로 압박했다.

결국, 이해고와 낙무정(駱務整)이 항복하고 손만영은 도주 중에 호위병의 칼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남아 있던 거란의 잔존 세력은 돌궐에 항복했다가 714년(당 현종 개원(開元) 2년)에 이진충의 사촌 동생 이실활(李失活)이 부족을 이끌고 다시 당에 복속했다.

730년(개원 18년)에 거란 연맹의 실력자인 가돌우(可突于)가 이진충의 일족인 소고(邵固)를 죽이고 굴렬(屈列)을 가한으로 옹립하여 대하씨 연맹이 무너지고 요련씨(遙輦氏) 연맹이 들어섰다. 이 시기 거란은 반당파인 가돌우가 당과의 전쟁을 벌이고 내부적으로는 부족 대인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래서 가돌우가 죽고[19] 요련 연맹의 두 번째 가한인 조오가한(阻午可汗)이 집권한 뒤부터 거란은 당에 귀순해 다시 국성을 받고 화번공주(和蕃公主)와 결혼했다. 평화를 회복한 뒤부터 조오가한은 부족의 재건에 주력했다. 점차 경제력이 회복되고 사회 분화가 촉진되었으며 초보적인 법 제도도 제정했다. 또한 수장의 권한이 강해지고 이리근도 군사 업무와 사법 업무를 겸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 시기에도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다소 복잡했다. 연맹은 당에 귀순하기 전에는 돌궐에 복속하고, 당에 귀순한 뒤에도 마냥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당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하북 3진의 절도사인 안록산이 거란과 그 동족인 해족을 계속 침략하자, 거란은 우호의 상징으로 결혼한 당의 화번공주를 주살하고 안록산을 박살낸 뒤, 위구르 제국에 합류했다.

4.3. 5대 10국 시기

산하 유목민 세력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던 위구르 제국이 쇠퇴하자, 거란은 당의 도움을 받아 위구르 제국에서 파견한 감독관들을 주살하고 다시 당에 사대했다. 위구르의 강력한 통제에서 벗어난 거란은 경제 성장과 세력 확장에 힘쓰고 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돌궐과 위구르 제국은 멸망하고, 위구르를 무너뜨린 키르기즈는 예니세이로 돌아갔으며[20] 당과 발해(渤海)는 쇠퇴해 초원 지역에서 거란을 막을만한 세력이 없었던 덕분에 거란은 날로 강성해졌다. 거란 요련 연맹은 돌궐과 위구르,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정부의 기초를 세우고 연맹 수장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직조업, 수공업을 장려하고 곳곳에 마을과 유목도성(遊牧都城)을 세웠다.

이러한 국력 강화가 이뤄진 뒤, 5대 10국의 혼란기에 연맹 수장 자리에 오른 야율아보기는 상비군을 강화하고 자신의 직할령으로 한성(漢城)을 설치해 군사,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한인 망명자와 포로들이 다수 거주하는 한성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유목민들에게 귀중한 소금과 철을 다량 생산했다. 이를 토대로 야율아보기는 여전히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동생 및 친척들과 골육상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거칠 것이 없어진 아보기는 왕조를 개창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옥좌에 앉은 그는 정복 전쟁을 개시해 경쟁 민족인 해족을 정벌하는 한편, 막북의 조복(阻卜),[21] 서방의 위구르까지 원정하여 이들 모두를 복속시켰다. 또한 중국으로도 진출하여 하북의 수십 개 주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나, 성공은 여기까지였다. 노용군 절도사(盧龍軍 節度使) 유인공(劉仁恭), 유수광(劉守光) 부자와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지닌 후당(後唐)의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勖)이 태조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인공 부자가 이끄는 노용군은 반측지지(反側之地)의 3대장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여 요군은 모략에 걸려 패하거나, 도리어 노용군에게 요의 경내를 주기적으로 약탈하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노용군은 유목 경제와 기병 군단이 근본인 요의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침공해올 때마다 목초지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후당의 이존욱은 요군이 여러 차례 침공해 주력군이 패퇴당하자, 요 태조와 직접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존욱과의 일전에서 패배한 태조가 하늘을 향해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하진 못하는구나!" 하고 외친 일화는 요의 하북 진출 시도가 대단히 어려웠음을 알려준다.

발해의 경우, 원래 요 왕조와 발해와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발해 선왕대를 기점으로 그 관계가 크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는 대대로 원수였다."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였으며 태조는 하북과 몽골로 진출하면서도 발해와는 치열하게 싸웠다. 요 왕조의 발해 공세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태조는 대요 전선의 핵심인 요양을 함락해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상당 부분 부숴버렸으며 요양에 대대적인 사민 사업을 벌여 굳히기에 들어갔다.

924년, 발해가 요주를 급습해 자사를 죽이자, 크게 놀란 요 태조는 공격받은 직후부터 발해에 보복성 공세를 전개했다. 이후, 태조는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우회하여 부여부(扶餘府)를 급습해 수일 만에 점령했다. 그리고 방어선이 뚫려 무주공산이 된 발해의 북부 지역을 질주해 상경성을 포위하고 수십 일만에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를 함락,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란국(東丹國)을 세웠다.

4.4. 전성기

발해를 정복하고 돌아오던 태조가 급사하자, 요 왕조는 정치 노선과 황위 계승 문제, 황권 도전 세력에 대한 진압 문제를 놓고 태자 야율배(耶律倍)와 황자 야율덕광(耶律德光) 사이의 계승 분쟁이 터졌다. 중앙집권화와 황권 강화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한인 관료들과 친하고 학문이 뛰어난 야율배보다는 군무에 관심이 많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야율덕광이 황제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한 순흠황후(淳欽皇后)는 당시 동란왕(東丹王)으로 발해 지역을 통치하던 야율배 대신에 야율덕광을 옹립했다. 그리고 황권에 반발할 가능성이 큰 보수 세력, 야율덕광의 계승과 자신의 권력 장악에 저항하는 선황의 측근, 동란왕 지지 세력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관료와 지휘관들이 주살당하고, 야율배의 견제를 위해 동란국의 지위와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 독이 되어 점차 발해 고토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고 발해인들의 끈질긴 저항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발해 통치 문제로 고심하던 태종은 상경성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요서로 이주시킨다는 초강수를 써서 발해인들의 저항을 뿌리 뽑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태종은 발해 고토에 대한 지배력을 거의 다 포기해야 했다. 요는 성종대가 되어서야 요동의 발해 고토를 일부 장악하고 동만주와 북만주, 함경도 일대 여진족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요는 멸망하는 그 날까지 발해 고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동란국이 건재하던 시점에도 발해유민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아 수 차례에 걸쳐 발해 저항 세력들을 철권으로 찍어 누르고 통치력을 재확인해야 했지만, 동란국을 매개로 발해 고토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발해인들을 포섭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태조 사후의 황위 계승 분쟁과 태종의 섣부른 요동 포기는 아쉬움을 남긴다.[22]

골육상쟁을 벌이긴 했지만, 요태종은 황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으며 관제를 정비해 남 · 북면관제를 실시하고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그는 인민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이렇게 국력을 신장시켜 가던 중, 936년(후당 청태(淸泰) 3년, 요 태종 천현(天顯) 11년)에 후당 이종가(李從珂)와 내전을 벌이고 있던 후진(後晉)의 석경당(石敬瑭)이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燕雲 十六州. 베이징 ~ 타이위안 인근의 중국 동북부 지방)와 30만 필의 세폐를 대가로 내어줄 테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군대를 일으켜 후당 이종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석경당을 용상에 앉혔다. 원군 요청은 요 태종에게 영토와 돈은 물론이고 복수도 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기회였는데, 이종가(李從珂)가 자신의 형인 야율배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23]

석경당에게 받은 연운 16주의 경제력과 세폐를 이용해 국가를 발전시키던 요 태종은 석경당의 뒤를 이은 석중귀가 세폐를 거부하고 적대적으로 돌변하자, 진노하여 친정을 감행해 후진을 멸망시키고 개봉에 입성하여 중국 전체를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들의 약탈, 강간, 살인을 용인하는 잘못된 점령지 정책 때문에 한인들이 저항하고 후진의 절도사들이 반격을 가해와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연운 16주로 퇴각했다.

요군이 자행한 학살과 파괴는 도를 넘는 것이었다. 태종은 한인을 사로잡으면 얼굴에 자형(刺刑)을 가해 살려준다는 글자를 새긴 다음에 풀어주고, 그의 사촌 동생인 마답(摩遝)은 더 잔인해서 한인을 붙잡으면 얼굴 가죽을 벗긴 뒤에 눈을 뽑고 팔을 부러뜨려 죽였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마답은 죽인 한인의 손과 발을 잘라다 집에 장신구처럼 걸어두었다. 또한 요군은 행군 중에 보이는 집은 모조리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으며, 전투를 벌일 때마다 강제로 끌고 온 주변 백성들을 선봉에 내세워 적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어 죽게 했다.[24]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으니 패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나마 유지하던 연운 16주 이남의 일부 영토들도 얼마 못 가서 상실했다. 일시적으로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산서에서 자립한 유지원(劉知遠)이 어부지리를 얻어 개봉에 입성하고 후한(後漢)을 건국했다. 7년 뒤, 요는 후주(後周) 곽위(郭威)와 후한 잔존 세력 간의 분쟁에 개입해 후한의 계승자인 북한(北漢)을 위성국으로 삼는 것으로 손실을 조금이나마 메꿀 수 있었다.

자치통감에는 요 태종이 연운 16주로 퇴각할 때 "중국인을 다스리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고 탄식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25] 요사에서는 태종이 여양도(黎陽道)를 지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이번 원정에서 세 가지 잘못을 했다. 군사를 풀어 말 먹이와 곡식을 빼앗은 것이 첫 번째이고, 백성들의 사적인 재산을 빼앗은 것이 두 번째이고, 여러 절도사를 서둘러 진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그 세 번째이다."
그리고 태종은 황태자에게 전황을 얘기하면서 해결책도 함께 제시했다.
"하동(河東)은 아직 귀부하지 않고 서로(西路)의 추장들도 서로 무리지어 어디로 귀부할까를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오직 백관의 마음을 구하고, 군사들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세 가지 방법뿐이다."

이를 통해 요 태종이 개봉에서 돌아오면서 중국의 정치와 문화 전반을 파악하고 한인에 대한 통치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요는 이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정주민들에 대한 통치 방식을 개선하고 중앙집권화된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체제를 정비하기도 전에 태종이 급사하여 요의 정계는 긴장 상태에 빠졌다.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동란왕 야율배는 오래도록 거란 귀족들의 동정을 받았고 정계에서는 동란왕 지지 세력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순흠황후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이 상황에서 태종이 급사하고 본토에서 순흠황후가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요의 귀족과 관료들은 19년 전에 태조가 붕어하고 수백명의 귀족과 관료, 장군들이 생매장당한 사건을 떠올렸다.

순흠황후가 황태후의 이름으로 대규모 숙청을 벌이고 3대에 걸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관료와 지휘관 다수, 동란왕 지지파의 잔존 세력, 가족들이 숙청당해 순흠황후에게 원한이 있는 귀족들이 힘을 합쳐 세종의 자손인 영강왕(永康王) 야율완(耶律阮)을 옹립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순흠황후는 막내 아들인 야율이호(耶律李胡)와 함께 거병해 맞섰다. 그러나, 이호는 형들과 달리 역량이 떨어지고 잔인무도해 인망이 없었던 데다가 순흠황후 역시 군부와 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 내전에서 패배하고 아보기의 능묘에 유폐당하는 신세가 된다.[26]

할머니를 몰아내고 옥좌에 앉은 세종(世宗)은 정력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여러 가지 개혁과 체제 정비를 단행했다. 그러나, 오대 왕조들과의 전쟁에서 별 소득을 못 본 데다가 한화와 중앙집권화, 황권 강화 정책을 밀어붙여 보수파들의 커다란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세종은 상고산(祥古山)에서 제의를 진행하던 중, 태조의 조카인 야율찰할(耶律察割)과 야율분도(耶律盆都)에게 암살당했다.

이들의 반란은 이전부터 양자의 불온함을 감지하고 있던 척은(惕隱) 야율옥질(耶律屋質)이 급히 군사를 몰아오고 태종의 장남인 수안왕(壽安王) 야율경(耶律璟)이 합세해 진압했다. 수안왕은 각 부와 왕공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으나, 그는 지나치게 잔혹하여 원한만 쌓고 성급하게 황권 강화를 밀어붙여 반대 세력만 불렸다. 결국, 목종(穆宗)은 반대파들의 결집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냥하던 중에 암살당하고 만다.

세종, 목종의 연이은 피살로 인해 요는 내부적으로 반란과 사회 혼란에 시달리고 외부적으로는 후주(後周)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는 등 내우외환에 빠졌다. 요 왕조는 954년(후주 세종 현덕(顯德) 원년, 요 목종 응력(應曆) 4년)에 북한(北漢)을 침공한 후주(後周)를 격퇴하고 호기롭게 역공을 걸었다가 고평(高平)에서 장령 조광윤(趙匡胤)의 분전으로 대패했다. 이후, 959년(후주 현덕 6년, 요 응력 10년)에는 후주 세종 시영(柴榮)이 공세를 가해와 연운 16주 중에 두 곳인 막주(莫州)와 영주(瀛州)를 빼앗았다.

오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은 국초에는 요에 우호적이었지만, 태종대부터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2차에 걸친 북벌을 단행했다. 979년(송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 요 경종 보령(保寧) 11년)에 송(宋)의 침공을 받은 북한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한 요는 백마령(白馬嶺. 지금의 산서성 양천시) 전투에서 대부분의 병력과 지휘관을 잃는 건국 이래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기세가 오른 송의 1차 북벌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연운 16주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남경까지 포위하는데 이른다. 이에 맞서 요는 침착하게 보급로 차단과 유인 전술을 사용해 송군을 지치게 만드는 한편, 주력군으로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심지어 고량하 전투(高梁河 戰鬪) 때는 수만의 송군을 익사시키고 목을 베었으며 총수인 태종(太宗)이 당나귀가 끄는 마차에 타고 도망치게 만들 정도의 굴욕적인 참패를 안겼다. 송의 1차 북벌을 막아낸 요는 송의 군사력 약화를 노려 980 ~ 982년에 걸쳐 송을 침공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7년 뒤, 986년(송 태종 옹희(雍熙) 3년, 요 성종 통화(統和) 4년)에 송 태종은 2차 북벌을 개시했다. 2차 북벌은 1차 북벌보다 여건이 더 좋았다. 당시의 요는 한덕양(韓德讓)이 권세를 휘둘러 민심이 동요하고 황제(성종)의 나이가 어려 예지황후(睿智皇后)가 수렴청정하는 상황이었다. 첩보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태종은 성종이 봄 순행을 위해 북쪽으로 떠난 틈을 노려 3월에 대군을 동원하고 3로로 진격해 들어갔다.

송이 기습적으로 침공해 오자, 요 조정은 송이 자국의 내부 사정까지 훤히 파악하고 있단 사실에 크게 당황했으며 북벌군의 규모에 기겁했다. 이에 예지황후가 나서서 공황 상태에 빠진 조정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병력을 모아 반격할 태세를 갖췄다. 1차 북벌과 마찬가지로 초반에 승승장구하던 송군은 연운 16주의 핵심인 남경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요군의 지연전과 보급로 차단, 각개격파 전술에 휘말리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송으로서는 뼈아픈 것이 2차에 걸친 북벌로 통일 전쟁을 수행한 고참병들과 양계업(楊繼業)을[27] 비롯한 유능한 지휘관들이 전사해 군사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송은 위축되고 역으로 요가 기세를 타고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999년부터 요군은 3차례의 침공을 가해 송의 방어 거점들을 무너뜨리고 포로와 물자를 일방적으로 약탈해갔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성종은 1004년에 친정을 결심하고 예지황후와 함께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성종이 이끄는 요군은 하북의 여러 성들을 함락하고 개봉이 보이는 전주까지 진격했으나, 원수 소달람(蕭達覽)이 전사하고 송 진종 또한 친정을 나와 송군의 사기가 오르는 바람에 도리어 위기에 빠졌다.

전세가 반전된 것을 느낀 성종은 안전한 퇴각과 원정의 성과를 확보하기 위해 진종 전연의 맹을 맺고 물러났다.[28] 정복왕조 개념을 제시한 독일계 미국인 역사학자인 카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이 시기 거란과 송의 군사력을 '그 어느 쪽도 상대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 못했던 세력 균형의 적대관계'로 묘사했다.

전연의 맹을 맺음으로써 중국 정복의 꿈은 완전히 버렸지만, 요는 송이 보내주는 막대한 세폐를 국가 발전에 투자하고 영토를 확장해서 동으로는 요동, 북으로는 바이칼 호, 서로는 천산 위구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그래서 요는 의외로 중앙아시아에서도 꽤 유명하며, 요가 멸망한 뒤에 서쪽으로 멀리 달아나서 세운 서요도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이름을 크게 떨쳤다.

또한, 성종은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어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이 시기의 요는 경제와 무역이 크게 성장해서 번영을 누렸다. 또한 전연의 맹은 외교적, 명분론적인 성과도 컸다. 기존까지 요는 중국 왕조로부터 ‘이민족’ 취급받았지만, 이제부터는 ‘북조(北朝)’로서 ‘남조(南朝)’인 송과 대등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 왕조는 거란족 한족을 대상으로 인속이치(因俗而治)라 부르는 이중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유목 민족의 땅은 유목민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연운 16주와 발해의 고토는 주현제를 적용해서 다스렸다. 독자적 문자를 만드는 등의 행위는 제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정주민의 문물을 너무 받아들여 자신들이 한화(漢化)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이중 통치 정책의 흔적은 의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송사전 요 열전에 따르면 황제와 한인 관료들은 중국식 복장을 착용하지만, 황후와 거란인 관료들은 거란식 복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요대 벽화들을 보면 고려 북송 관복과 비슷한 단령 사모를 입은 관리들과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같은 그림에 함께 그려져 있다.[29] 어찌보면 이런 점에선 청나라보다 관대했던 셈.

물론 청과 달리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채로 멸망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장 지도를 비교해 봐도 요의 영토에서 정주민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많지 않고, 중국 전역을 정복한 청과는 비교가 안 된다. 만약 청이 요처럼 1국 2체제로 유목민과 정주민을 나누어 통치하려 들었다면 정주민 영역의 비중이 너무 압도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

따라서 요가 한인과 거란인(유목민)을 분리하여 거란인의 한화를 막는 것만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데 비해 청은 단순히 만주인의 한화를 막는 것뿐 아니라 가능한 한인을 만주화 시키기까지 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종적으로 요는 최초의 정복왕조로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유목민과 정주민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이중 통치 체제를 창조해 후대의 정복 왕조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 이것은 요 왕조가 이룬 커다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전연의 맹이 일어나기 전 사전 정지 작업을 위해 동쪽의 작은 나라였던 고려를 건드려 993년부터 1019년까지 무려 26년간 이어진 여요전쟁에서 제대로 이기지 못하면서 일부 거란인들이나 지배를 받고 있던 일부 여진 부족들이 고려에 내투하는 일이 생기는 등 성종 재위 후반부터 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4.5. 멸망과 후예 국가들

7대 흥종대부터 경제적으로는 번영하지만, 사회적 모순과 행정 제도의 문제점이 연달아 발생함과 동시에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종 대에는 권신 야율을신(耶律乙辛)이 전횡을 일삼고 각지에서 반란까지 터지기 시작하자 요는 통치력을 급격히 잃게되었고, 결국 9대 천조제 때 그간 쌓인 게 많던 여진족이 세운 협공을 받고 멸망했다.

금의 흥기와 송, 요의 쇠퇴에는 11세기 후반부터 발생한 기온 하강이 영향을 미쳤다는 학설이 있다. 기온 하강으로 농경과 목축이 힘들어지고 지속적인 자연재해가 발생해 정주민은 물론, 유목민들도 큰 타격을 입어 요의 국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흥종대까지는 기온 상승 현상이 유지되고 있어서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었지만, 도종대부터 기온이 떨어져 기근과 가축 몰살, 자연재해로 유목민들이 고통받고 속부의 민심이 이반해 대규모 반란이 연이어 터졌다.

이러한 기온 하강 현상은 성종대에도 벌어졌지만, 통치 세력이 변화에 잘 대처하고 지속적으로 구휼과 감세 조치를 실시해 인민의 부담을 줄여준 덕분에 큰 국력 손실 없이 버텨낼 수 있었다. 그래서 성종대의 요는 기온 하강기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영토를 팽창하고 전성기를 누린 반면, 도종대의 요는 지배층의 부패, 통치 체제의 이완, 민족, 사회 모순의 첨예화 등으로 기온 하강을 버티지 못했다. 물론 도종도 지속적인 구휼과 감세 조치를 실시했지만, 상술한 요인들 때문에 큰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송 또한, 기온 하강으로 하북을 중심으로 자연 재해와 기근이 빈발해 수십만의 유민이 발생했다. 송 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북부 지역의 역량이 크게 떨어지고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래서 송이 금군의 공세에 쉽게 무너진 것도 이때의 기온 하강이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반면에 여진은 기온 하강에 따른 피해가 송, 요에 비해 심하지 않은 데다 북만주 일대의 여진인들이 추위를 피해 남하하여 여진 완안부를 비롯한 여러 부족에 합류하면서 역량이 강화되었다.

요를 무너뜨린 금은 요의 고토를 지배하고 인력과 물자를 충원하기 위해 도망치는 요의 유민들을 사로잡고 예전의 관료와 군인들을 기용해 통치력을 확보했다. 이후, 송 · 금 사이에 연운 16주를 둘러싼 분쟁이 전쟁으로 이어지자, 금은 요에 이어 송까지 무너뜨리고 회수 이북의 화북 지방을 차지했다.

금은 요의 핵심 부족인 요련 9장과 황족 4장, 국구 5장을 맹안 · 모극으로, 거란인들의 다수는 규군으로 편성해 서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겼다. 항복한 관료와 군인들은 기존의 지위를 보존해주고 그대로 기용했으며 요의 정치, 행정, 군사 제도를 흡수해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요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제도로는 금의 5경제, 각종 관직의 명칭, 지방 행정, 군목 제도 등이 있으며 서북면 지방에는 요의 북면관제가 일부 잔존했다.

송과 금이 싸우는 동안, 금군을 피해 간신히 탈출한 잔존 세력과 유민들은 야율대석(耶律大石)의 지도 아래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가 서요를 세웠다. 서요를 세운 야율대석은 천산 위구르와 현지 투르크계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카라한 왕조를 복속시키는 한편, 사마르칸트에서 벌어진 카트완 전투에서 당대 중동의 초강대국이던 셀주크 투르크까지 패퇴시킴으로써 거대한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정도 성공에 만족하지 못한 야율대석은 여러 차례 원정군을 파견해 선조들의 고토를 수복하려 했다. 서요의 원정군은 완안종한(宗翰) 같은 거물을 상대로도 승리했을 정도로 기세가 높았으나, 결국 고토를 수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란인들은 금의 지배에 순응하는 듯 했으나, 금 왕조와 거란인들과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금은 자신들을 잔혹하게 다룬 과거가 있는 거란인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고 거란인들도 자신들의 지배를 받던 여진인들이 이제 자기 머리 위에 앉아서 명령을 내리는 것을 불편해 했다.

그리고 초원 저 너머에 동포들이 세운 국가인 서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란인들이 금의 지배에 완전히 순응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해릉양왕이 황권에 저항하는 여진 보수파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거란인들을 중용하여 일시적으로 거란인들의 신분 상승이 이뤄지는 듯 했으나,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야율씨들을 학살한 해릉왕의 폭정과 남송 정벌을 위해 거란 규군에 병력 동원령을 내린 것이 문제가 되어 거란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상술했듯이 거란 규군은 금의 서북면에서 서하와 초원 유목민들의 침공을 막아주고 있었는데, 만약 병력이 남송 국경으로 이동하게 되면 당연히 무방비해진 부족을 서하와 유목민들이 침공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규군들은 고향을 떠날 수가 없었고 이 문제로 금 조정과 갈등을 빚다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야율살팔을 중심으로 봉기한 거란 반군은 친척인 해인들까지 끌어들여 금의 북방을 휩쓸었고 해릉왕의 남정에 동원된 거란인 지휘관들은 남송에 투항해 길잡이 노릇을 했다.

독립을 꿈꾸던 거란 반군은 금 세종이 정국을 수습하고 남송과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기세가 꺾이고 결국 복산충의(僕散忠義)에게 진압당했다. 반란에 대한 징벌적 조치로서 금 조정은 거란 규군을 해산하고 거란인들을 분산시켜 맹안, 모극에 편입했다. 이러면서도 금은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거란인들과의 통혼을 장려하고 민족 융합을 꾀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했으나, 양자간의 불편한 감정과 서요의 존재, 거란인 관료와 군인의 임용 제한 강화, 거란 문자 사용 금지 등의 문제 때문에 유화책은 그렇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편, 요의 지배를 받던 초원의 몽골 부족들은 요가 멸망한 뒤부터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투쟁을 벌였다. 100여 년이 지난 뒤, 몽골은 칭기즈 칸이 부족을 통합해 몽골 제국을 세우고 서요를 멸망시켰다. 서요가 망한 뒤에도 일부 유민들은 이란까지 도주해 다시 나라를 이어갔다. 이란, 즉 페르시아 남동부 케르만 주에 세웠던 거란인의 국가는 쿠틀루그 칸국[30]이다. 이들은 나중에 몽골 제국에 흡수되었다.

금이 몽골 제국의 엄청난 공세로 망조가 들자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요동에 동요(東遼)를, 아예 멸망한 후에는 일부 거란인들이 만주에 후요(後遼, 대요수국)을 세우고 독립하려 했으나, 양측 모두 몽골 제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복속했다. 이 과정에서 거란의 일부 잔여 세력이 고려를 침공했으나, 고려와 몽골의 협공으로 진압당하고 생존자들은 양국에 흡수당했다.

고려의 양수척 중 일부가 이 시기에 고려에 유입된 거란인들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몽골은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며 고려로서는 불행하게도 몽골과의 외교 관계가 틀어져 장장 28년간의 대몽항쟁을 이어나가게 된다.

몽골 제국에 흡수된 거란 유민들은 몽골 제국의 관료나 전위 부대로 종사했다. 유목 문화에 익숙하면서도 행정과 한학에 능숙한 거란인들은 칭기즈칸의 치세부터 행정 관료나 군인으로 신뢰받았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란인들은 민족 정체성을 잃고 점차 몽골인이나 한인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현재는 중국의 다우르족이 몽골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한 거란의 후예라 전해진다. 요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요서, 막북, 화북에 남은 거란인들은 한인, 몽골인 등의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한 반면,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서요(西遼)를 세웠으며, 요의 8대 부족 중 하나였던 대하씨(大賀氏) 세력은 북쪽의 아무르강 유역까지 이동하여 정착했는데 이들이 다우르족의 직계 선조로 여겨진다. 그리고 윈난성 일부 마을과 바오산시, 린창시, 스뎬 현에도 야율씨와 소씨 등 요나라 황실을 이은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번런(本人)'들이 있다.
파일:다우르족.png
다우르족의 모습

또한 학자들이 고대 거란족의 유골에서 추출한 DNA와 현대 다우르족과 번런, 몽골인, 한족 등의 유전자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해 본 결과, 다우르족과 번런의 DNA가 고대 거란족의 것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 즉, 유전적으로는 거란족의 직계 후손이 다우르족과 번런이라는 게 밝혀진 셈이다. 언어학적으로도 거란어는 다우르어 및 몽골어와 매우 유사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몽골어족에 속한 것으로 본다.

다만 대부분 혈통이 일치하기만 할 뿐, 일부 차이점도 있었던 데다가 진정한 의미에서 거란인의 뒤를 이은 민족은 없다고 보는 게 옳다.[31]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와 그 후계 국가들까지 멸망한지 1000년이 넘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잔존 거란인들이 꾸준히 독립국가를 세워왔던 것도 아니었고, 대다수는 몽골 등 다른 민족들에 동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몽골과 중국은 이 민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32]

5. 행정 제도

6. 경제

6.1. 농업 경제

유목민이라 농업과는 거리가 멀 것 같지만, 요는 연운 16주를 얻기 이전의 연맹 국가 시절부터 농사를 짓고 직조 기술과 경작 기술을 습득하는 등, 자체적으로 농업을 시작했다. 또한 곳곳에 한성(漢城)을 세워 농사 경험이 풍부하고 기술력이 높은 한인 유민과 포로들을 정착시키고 농사를 짓게 하여 한인의 선진 기술과 농기구, 좋은 품종을 흡수하고 농지를 개척했다. 이후, 인구가 많고 문명이 발전한 발해와 연운 16주를 정복한 뒤부터는 농업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급증했다. 그래서 요의 황제들은 농업을 중시하고 농민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농업과 목축업의 이중 경제가 조화를 이루게 하고 상호 교류와 발전을 유도했다.[33]

태종은 농번기이니 요양 순행의 규모를 줄여달라는 요청을 듣고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환도했으며 남경으로 순행할 때는 조서를 내려 호종하는 자들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태종은 석중귀를 치기 위해 병력을 징발할 때, 농작물을 훼손하고 조세를 감소시키는 자는 군법으로 처리하겠다고 령을 내렸으며 마을의 유력자들을 촌장으로 임명하고 부호들의 남는 땅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빈민을 구제했다. 임종 직전에도 태종은 개봉에서 곡식을 빼앗고 약탈을 용인한 것을 후회했으니,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경종은 송 · 요 전쟁으로 인해 들판이 황폐해지고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자, 982년에 조서를 내려 조세를 1년간 면제하고 인민들에게 주인 없이 버려진 농토를 임의로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조세를 걷었다. 그리고 원주인과 경작자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땅 주인이 5년 이내에 돌아오면 토지의 2/3를, 10년 이내에 돌아오면 절반을, 15년 이내에 돌아오면 1/10을 돌려주도록 했다. 경종의 이 조치는 농지가 황폐해지지 않게 하고 땅이 없는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한 좋은 조치였다.

성종과 예지황후는 이전의 황제들보다 농업을 훨씬 더 중시해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부세를 정비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동시에, 유민들을 정착시키고 상업을 보호했다. 성종이 세운 이 정책은 도종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요의 농업 생산력은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통치자들의 중농 정책은 요의 관료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서 대부분의 관료들은 농사와 양잠을 백성들에게 권장하고 가르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았다.

통치자들의 중농 정책과 보호 속에서 농민들은 열심히 일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 덕분에 요의 곡창은 매우 풍족해졌다. 경종 때는 북한에 조(좁쌀. 粟) 20만 석을 원조할 만큼 비축한 곡물이 많았고, 성종 시기에는 국경 지역의 춘주(春州)에서 쌀 1말을 6전에 살 만큼 물가가 낮았다. 그리고 서북 지방과 동경도에서는 20 ~ 30만 석에 달하는 곡물을 저장했는데, 이는 전쟁이 자주 벌어져도 충분히 보급할 수 있는 양이었다. 추가적으로 국경의 여러 주에는 화적창(禾積倉)을 설치해서 햇곡식과 묵은 곡식을 바꾸고 백성들에게 낮은 이자로 곡물을 빌려주었다.

요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농민들은 조 · 보리 · 벼 · 기장 등의 곡물과 여러 가지 채소, 과일을 재배하고 위구르에서 수박과 완두를 들여오는 등, 송과 발해, 위구르를 비롯한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작물과 좋은 종자를 도입했다. 이렇게 들여온 작물들은 초원 지역의 기후에 적응해서 새로운 특성을 발현했으며 요의 농민들은 새로운 작물과 품종을 키우면서 자신만의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요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작물은 조(粟)이나, 지역별로 주로 재배하는 작물은 상이하다. 상경도를 위시한 북부 지역에서는 기장을 주로 심고 조, 콩, 마를 재배했다. 그래서 거란인과 북부 지역의 불교 승려들은 손님을 대접할 때 기장죽을 내놓고, 해인들도 기장을 주식으로 먹었다. 반대로 연운 16주를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는 주로 밀과 벼를 재배하고 보리, 조, 수수, 뽕나무도 심었다.

최종적으로, 농업은 풍부한 식량과 각종 농산물을 생산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요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확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목 경제 일변도의 단조로운 경제 구조를 보완해 주었다. 그리고 농민과 유목민의 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생산이 늘어나면서 상공업도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해서 요는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고 210년간 정권을 유지하면서 송과 서하와의 삼각 구도에서 장기간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6.1.1. 상경도와 중경도의 농업 경제

상경도를 비롯한 초원 지역의 농업은 상술한대로 연맹 국가 시절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거란인들이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대하씨 연맹부터였으며 요련씨 연맹 시절에는 야율아보기의 조부인 균덕실과 숙부 술란이 각각 농사 기술과 직조 기술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야율아보기는 형제들과의 내전을 끝내고 요를 세운 뒤부터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세금을 감면해 농사를 장려했다. 건국 이후에는 북대농올부(北大濃兀部)를 2개 부로 분할하고 오곡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여러 유목민 부들이 이를 본받아 농사 짓는 법을 배웠다,

요 태조는 한인 포로들을 초원 지역에 이주시켜 한인의 선진 기술과 좋은 농작물 품종을 도입하고 토지를 개간했으며 926년에 발해를 무너뜨린 뒤에는 많은 수의 발해인들을 상경 지역에 이주시켜 농업 인구를 늘리고 개발을 가속화했다. 후대의 청 왕조도 그랬지만, 한인과 발해인 포로를 잡아와 정착시킨 것은 기술력이 떨어지는 거란인으로서는 농경에 부적합한 초원을 개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요 왕조가 강제 이주 및 정착을 통해 지역 개발과 기술 흡수라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두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요 태종은 아르군 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 구곤석렬(甌昆石烈)을 정착시키고, 수초가 풍부한 오고의 땅에 구근돌려(毆蓳突呂) · 을사발(乙斯勃) · 온납하랄(溫納何剌)의 3개 석렬을 이주시킨 뒤에 해리하(諧里河)와 케룰렌 강(당대 명칭 : 여구하. 臚胊河) 인근의 토지를 분배해주고 농사를 짓게 했다. 이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목민들에게 농업을 장려한 일이다.

지속적인 농업 장려와 이주 정책을 통해 상경도의 농업 경제가 발달하자, 거란인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반농 · 반목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또한 토지가 비옥하고 수초(水草)가 풍부해 농경과 목축 두 가지 모두에 적합한 상경 지역에 정부의 개발 정책이 더해지면서 상경은 농업이 빠르게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농업과 목축업이 공존하는 농 · 목 복합 지역이 되었다.

반농반목으로 전환하긴 했지만, 해인들 만큼 정주화의 정도가 높지 않은 거란인과 여러 유목민들은 부족 내부에 농경 기술을 가진 이들이 부족이 임시로 정주할 때마다 농사를 짓거나 다른 목초지로 떠날 때, 씨앗을 뿌리고 다시 돌아올 때 수확하는 식으로 농작물을 생산했다. 또한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실위계 부족 중에는 남실위인들처럼 농사를 지는 부족들이 존재했으나, 기후가 너무 춥다보니 수확량은 매우 적었다.

상경도 농업의 발전에는 종교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상경도의 불교 승려들과 사찰들은 동 시기 유럽의 수도원처럼 빈민 구제와 인민 교화 외에도 개간과 농경에 힘쓰고 유목민과 지역 농민들에게 농사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이러한 종교계의 활동은 지역 개발과 상경도의 농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상경도의 광대한 초원 지역은 두하주와 같은 유목도성과 여러 거점 도시의 정주민들, 일부 유목민들이 농사를 짓거나 국가가 직접 둔전을 운영하고 곡식을 저장했다. 중앙 정부는 둔전을 중심으로 몽골 초원과 서남부 국경 지역에 농업을 일으키고 몽골인들에게 농업 기술을 전수했다. 성종기에 활동한 야율고욱(耶律古昱)의 경우, 지방 장관으로서 둔전을 운영하며 유목민들에게 농경, 식수(植樹), 직조 기술을 전수해주고 지방 행정 항목에 상술했듯이 야율고욱외에도 여러 절도사들이 지역민들에게 농경과 직조, 공예 기술을 가르치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했다.

또한 성종 초에는 위구르 제국이 세운 가돈성의 폐허에 진주(鎭州)를 설치하고 발해 · 여진 · 한인 등의 700여 가구를 진주 · 유주(維州) · 방주(防州) 세 곳에 이주시키는 등, 변경 지역의 개발에도 힘썼다. 성종은 야율당고에게 명해 케룰렌 강과 진주 인근에 둔전을 만들고 서북 지방 수비군에 군량을 공급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상경도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으면 군량 운송에 따른 손실과 노동력 소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성종의 명을 받아 서북으로 간 야율당고는 15년 동안 내정에 힘써서 수십만 석의 곡물을 비축하고 군량 공급 문제를 해결했으며 막북 지방에 농업의 기초를 세웠다. 요 왕조가 힘써 개발한 이 지역들은 원대까지도 주요 식량 생산지의 하나였으며 초원 통치의 핵심인 진주에서는 몇 전만 주고도 곡식 한 말을 살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요가 멸망하기 직전에 야율적렬이 양왕 야율아리를 옹립하고 북요를 세워 서북 지방으로 이주할 때, 북요 정권은 서북 지방의 곡창에 쌓아둔 막대한 양의 곡물을 징발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한인 · 발해인 · 여진인의 이주, 조정의 지역 개발과 둔전 운영, 종교계의 노력 덕분에 상경도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으며 수초가 풍부한 시라무렌 강(당대 명칭 : 황수. 潢水), 아르군 강, 케룰렌 강, 톨 강(당대 명칭 : 토올납하. 土兀拉河, 중국 명칭 : 土拉河) 유역도 농업이 크게 발전하고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다. 다만, 요 말기에는 기온 하강과 사회적 모순 심화,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둔전호가 몰락하고 유민이 늘어나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일부 지역의 둔전을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중경도는 해인들이 많이 살았고, 해인들은 이미 당대부터 일부 세력이 기장과 마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등, 목축과 수렵 외에 농경에도 종사했다. 송대 학자들인 구양수, 송수, 왕증 등은 해인들의 농사 짓는 방식과 기장죽을 먹는 생활 양식, 해인의 수렵 문화와 궁술에 대해 기록했으며 소송, 소철도 시에서 해인이 경작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본래 유목민으로 출발한 해인들이 농사에도 능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중경도의 농업 경제 성장을 견인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죽영 일대가 요에 편입된 이후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농업에 종사하고, 당과 오대의 국경 지역 주민들의 토지를 소작하던 중경의 해인들 중에서도 소작지를 사들여 어엿한 자작농이 되는 이들도 일부 있었다고 하니 중경도의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력도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해인들은 거란인들보다 더 많이 정주화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송 사신의 기록에 따르면, 거란인들은 이주 생활을 하는 반면에 해인들은 정주화해서 집에서 살고 농경에 능하다고 한다.

6.1.2. 서경도, 동경도, 남경도의 농업 경제

동경도의 중심지인 요양은 수초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했으며 목재 · 철 · 소금 · 물고기 등이 많이 산출돼서 이익이 많았다. 그리고 태종대에 발해인들을, 성종대에 숙여진인들을 요양 지역에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지역 개발에 힘썼다. 이로 인해 동경도의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발전했다. 그리고 황제들은 이주민들이 많은 동경도의 조세와 부역을 낮게 부과해서 동경도의 농업 성장을 촉진시키는 노력을 펼쳤고, 동경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발해인들은 농사 기술이 뛰어나서 동경도의 농업 발전을 증진하고 막대한 양의 농산물을 생산했다. 심지어 성종 태평 연간에 연운 지역에서 기근이 들자, 호부부사(戶部副使) 왕가(王嘉)가 요동의 곡물을 연운의 주민들에게 나눠준 일도 있었다. 후대에 아골타가 동경도를 유린할 때에 요 왕조가 저장한 곡식 수십만 석을 취해 군량을 확보했다고 하니 동경도의 농업 생산력이 상당하고 곡물 비축도 잘 이루어졌다고 평할 수 있다.

동경도 북부의 생여진 부족들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이들은 마, 조, 피 등의 곡물과 파, 부추, 마늘, 박 등의 채소를 재배했다. 송막기문에 따르면, 혼동강( 송화강 중류)와 영강주(길림성 부여현) 일대의 주민들이 복숭아와 자두 같은 과수를 재배하고 냉해 방지법과 추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과수를 키우는 기술을 터득했다고 한다.

요 조정은 서북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북 지역에도 둔전을 설치했는데, 황룡부를 중심으로 조성한 둔전은 주둔군이 먹을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동북의 여진인들에게 농경 기술을 전수하고 동북의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일조했다.

남경도는 거란국지에 따르면 "채소, 과실, 곡식 등 나지 않는 작물이 없고, 상 · 마 · 보리 · 양 · 돼지 · 뀡 · 토끼는 불문가지다. 이곳은 물이 달고 땅이 기름졌으며, 사람들이 재주가 많았다."는 내용이 전해질 만큼 땅이 비옥하고, 남경도와 서경도 남부의 대동부(大同府) · 울주(蔚州) · 응주(應州) · 삭주(朔州) · 무주(武州) · 귀화주(歸化州) · 가한주(可汗州) · 유주(儒州) 등의 지역도 농업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해 농업 중심지로 기능했다. 그러나 당말과 오대의 혼란으로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건국 초기에 한인 포로들을 잡아와서 정착시키고 새로 군현을 세웠다. 그리고 요의 황제들은 농업 인구를 늘리는 것과 농업 생산을 중시했으며 농민들이 편안하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보호하고 연운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6.2. 유목 경제

6.2.1. 목축업

요의 경제는 유목 경제와 농업 경제를 혼합한 이중 경제 체제다. 유목 경제를 떠받치는 유목민들은 거주지의 자연 환경에 따라 목축 · 어업 · 양봉 · 수렵 · 채집 · 농경 · 운송 · 상공업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했으나,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산업은 목축업이었다. 목축업은 유목민들에게 생필품과 군마를 공급해주는 생존 수단이었으며 국가 입장에서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유목민들이 통치를 지탱하고 군사력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목축업은 요를 강성하게 만들어 준 근본이었다.

이전 시기부터 많은 유목 민족과 유목 국가들이 초원에서 목축업을 한 덕분에 요의 유목민들은 목축업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고, 자연 환경도 목축업을 하기에 적합하여[34] 요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유목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 요 조정 또한 부족별로 방목지를 설정해주고 부족 간의 전쟁을 방지해 유목민 사회를 안정시키고 유목민들이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만드는 등,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요의 유목민들은 가축 수를 늘리고 목축업에 대한 지식을 전수 · 발전시켰으며 유제품과 펠트 천 같은 모직물, 공예품을 생산했다.

유목민들은 말 · 소 · 양 · 닭 · 염소 · 낙타 · 돼지 등, 다양한 가축을 길렀으며 심지어는 사슴도 키웠다. 가축 중에서 유목민들이 가장 많이 키우고, 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가축은 양과 말이었다. 유목민들은 양과 말의 소유량에 따라 빈부를 정하고 부족간의 거래와 세금, 공물 납부에도 양과 말을 지불했으며 요 조정이 중국의 왕조들과 교류할 때 선물로 주거나 그들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얻어낼 때도 쓰이는 등, 양과 말은 중요한 경제 수단이었다.[35]

가축 중에서 양은 고기와 털, 젖을 얻는 용도로 키우고 황소와 낙타는 수레를 끌게 했다. 젖소와 암말은 젖을 짰으며 유목민들은 이렇게 얻은 젖으로 유제품을 만들었다. 낙타 사육법은 위구르인들에게서 배운 것이었는데, 낙타는 요에서도 값비싼 동물이어서 황소 한 마리가 양 3 마리 값일 때, 낙타 한 마리는 양 8 마리와 맞먹었다. 염소는 양떼를 이끄는 리더 역할로, 닭은 알과 고기, 돼지는 고기를 얻을 용도로 키웠으며 셋 다 조금만 키웠다. 반면에 도시와 농촌에 사는 정주민들은 돼지를 많이 길렀다.

초원은 4월부터 8월까지는 풀이 무성해 방목하기 좋아서 유목민들은 4월부터 8월까지 초원에서 방목과 이동을 반복하다가 8월말부터 사막으로 옮기거나 가축들을 불러들여 겨울이 지날 때까지 보호했다. 유목민들은 말을 자연스럽게 내버려둬야 번식이 잘 될 거라 생각해서 말에 따로 손을 대지 않았고, 그래서 유목민들이 키우는 말은 발굽을 다듬거나 털을 깎지 않아서 중국의 말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유목민 목동들은 말에게 굴레를 씌우지 않고 채찍으로만 다루어서 하루 종일 달리게 해도 말들이 피곤해하지 않았으며, 2 ~ 3명만으로도 충분히 수백, 수천 마리의 말들을 통제했다. 또한 양들을 키울 때도 울타리 없이 방목하고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게 해주었는데, 그렇게 해도 양들이 잘 번식했다.

다만, 목축업은 농업 만큼이나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산업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가축이 얼어죽거나 풀이 상하는 일도 있는 반면, 너무 적게 와서 풀이 자라질 못해 가축이 굶어죽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요의 유목민들은 눈이나 비가 평시보다 적으면 기우제나 기설제를 지내고 폭풍이나 폭설이 발생하면 제풍제나 기청제를 지냈다.

요의 영토에는 유목민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목초지 외에도 국영 목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군목(群牧)이 있다. 군목은 야율아보기 때 군마를 조달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서 북추밀원의 감독하에 담당자인 군목사(群牧使)와 군목부사(群牧副使)의 자녀들, 요역을 부과받은 평민과 부호들이 관리했다. 군마의 수가 전투력에 직결되는 만큼, 조정은 군목의 운영에 신경 써서 정기적으로 군목의 장부를 검사해 가축의 번식 상황을 파악하고 가축의 증감에 따라 군목관의 승진과 해임을 결정했다. 군목에서 키우는 가축들은 복속시킨 유목민들에게 받은 공물, 약탈물, 자연 번식한 것들이었고 그 수가 매년 증가해 전성기 때는 군목의 마필 숫자가 100만 두를 넘을 정도였다.[36]

군목의 설치 목적이 군마를 조달하는 것이었던 것 만큼, 군목에서 사육하는 수만 필의 말은 기병대와 5경의 군대에 보내서 군에서 필요로 하는 군마를 조달하고 황실과 귀족의 사냥용 말로 쓰기도 했다. 또한 군목은 복지 차원에서 가난한 유목민들에게 말을 나눠주고 송과의 무역을 진행할 때 결제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 다만, 흥종 후기부터 군목의 관리가 부실해지고 관료들이 군목의 말을 밀매한 탓에 도종대에는 군목이 유명무실해져서 새로 장부를 정리하고 군목을 재정비해야 했다. 게다가 11세기 후기의 기온 하강으로 폭풍이나 폭설과 같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가 늘어나 가축이 상하는 일이 빈발했으며 1083년(도종 태강 8년)에는 가축의 6 ~ 7할이 죽어나가는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천조제 시절에는 금과의 전쟁 때문에 민간의 말까지 징발하다보니 말 값이 폭등해서 군목의 군마 대부분이 밀매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도 야율대석이 요의 잔존 세력을 이끌고 이동할 때 전부 다 가져가 버려서 요의 군목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37]

6.2.2. 어업&어로, 채집, 수렵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수산물을 먹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요 태조가 오림하에서 사람들이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고 거란인들의 겨울 낚시와 고기 잡이를 묘사한 송의 기록, 요사에 '유목민들은 전시가 아니면 사냥과 낚시를 한다.'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어 요의 유목민들이 수산물을 꺼리지 않고 어업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지역별로 요의 유목민들 중에 삼림과 해안, 강을 끼고 살아가는 이들은 목축업과 어렵(漁獵), 채집을 병행했으며[38] 다른 유목민들도 기회가 되면 어렵 활동을 했다. 또한 여진족과 몽골, 삼림 지역 민족들도 채집과 수렵, 어업을 중요시했으며,[39] 옛 발해의 고토와 여구하, 호륜호 일대는 수산 자원이 풍부해서 일부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요의 황제가 순행 중에 직접 낚시를 했던 사실로 봤을 때, 요의 유목 경제에서 어업이 목축업만큼은 아니더라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냥은 경제적으로 목축업과 함께 유목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산업이며, 유목민들에게는 생계 수단이면서 생활의 일부였다. 요의 유목민들은 사슴과 들소를 주로 사냥하고 담비와 해달 · 족제비 · 여우 · 토끼 · 물새 · 호랑이 · 표범도 사냥했다. 그리고 계절별로 사냥하는 동물의 종류가 달라서 봄에는 오리나 거위, 기러기를, 4 ~ 5월에는 사슴, [40] 8 ~ 9월에는 호랑이와 표범을 잡았다. 담비 · 해달 · 족제비 · 여우는 고가의 모피를 얻을 수 있어서 잡으면 모피를 벗겨 옷으로 지어 입거나 상인들에게 판매했으며 호랑이나 표범도 잡으면 가죽과 이빨을 취했다. 유목민들은 날씨가 따뜻할 때도 사냥을 했지만, 유목 활동이 한가한 겨울철에는 사냥이 일상이었다. [41] [42]

그리고 상류층에게 사냥은 하나의 오락이지만, 황제에게는 오락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요의 황제들은 사냥을 통해 스스로 무예를 익히고 병사들을 훈련했으며 황제가 친렵(親獵), 친어(親漁)해서 처음 잡은 두아(頭鵝, 고니)와 두어(頭魚)는 풍어(豊漁)와 풍렵(豊獵)을 기원하는 것으로 중국의 황제들이 친경(親耕)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43] 또한 원정 중에 군량이 없으면 사냥을 통해 군량을 보충했으며[44] 송의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에도 사냥한 곰 · 기러기 · 백조 · 사슴 · 담비 · 꿩 · 토끼 고기를 대접했다.

전반적으로 사냥과 어업은 북쪽 연안과 삼림 지대에 사는 오국부, 생여진, 타타르 같은 민족들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유목민들에게도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고 유목 경제의 보조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요대의 무덤에서 당시에 사용한 여러 가지 사냥 도구와 낚시, 고기 잡이용 도구들이 출토되고 있고 거란인이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들이 당대의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다.

6.3. 상업

건국 이전의 거란인들은 내부적으로는 물물교환을 하고 초원에 유목도성을 건설해서 주변국과 교역을 하는 수준이었으나, 건국 이후에는 점차 농업, 목축업, 수공업이 발전해 잉여가 쌓이고 재화의 교환이 빈번해지면서 교역량이 늘어나고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다. 요의 시장에서 주로 거래하는 재화는 곡물과 식료품, 가죽 세공품이나 유제품, 비단과 아마포, 모직물, 각종 공예품과 생필품이며 외국에서 수입해 온 각종 사치품과 진귀한 재화도 판매했다.

조정 역시 상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어서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량형에 맞지 않는 물품은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 성종대에는 인민의 가계 경제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개의 교역로를 개방하고 부세를 줄여 상거래량을 늘려주기도 했다.

오경은 중요한 상업 · 무역 중심지가 되어 상인들이 모이고 저택과 상점이 줄지어 세워졌다. 오경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고 상업이 발전하자, 요는 상경, 남경, 서경에 상세원(商稅院)을 설치하고 점검(點檢), 도감(都監), 판관(判官) 등을 임명해서 상세 징수와 시장 관리를 맡겼다. 추가로 상경과 동경에는 호부사(戶賦使), 서경과 동경에는 전운사(轉運使)를 설치해 통상과 무역 등의 사무를 관리했다. 추가적으로 각 주현에는 전백사(錢帛使) · 염철사(鹽鐵使) · 상국원(桑麴院) · 장상각주 등과 같은 기관을 설치해서 동전 · 비단 · 소금 · 철 · 술 등을 관리했다.

지역별 상업 활동에 대해 알아보자면, 오경 중에 가장 번화하고 풍요로운 도시는 남경이었으며 중경과 서경도 그에 못지 않게 번화한 도시였다. 상경의 경우에는 한인 포로들과 종교인들이 가져 온 기술과 문화 덕에 도시가 발전하고 상업이 번영했다. 상경의 남쪽 성인 한성(漢城)은 한인들의 거주지면서 점포와 누각이 늘어선 상업 지구이고, 상경 서쪽 지구는 상점들과 상공업자 · 기술자 · 관료 · 종교인 · 유학자들이 사는 주거지가 존재했다.[45] 또한 상경에는 회골영(回骨營)이라는 위구르인 거주 구역이 있어서 위구르 상인들이 이 곳에 거주하면서 상행위를 벌였다.

중경은 상경과 마찬가지로 남쪽에 상업 지구를 두었다. 중경의 상업 지구는 넓은 거리에 커다란 광장과 300여개의 회랑이 연결되어 있고 주민들은 이 곳에서 가게를 열고 장사를 했다. 동경은 외성을 한성이라 불렀고 이 곳에는 남시와 북시라는 2 개의 시장이 있어서 상인들은 새벽에는 남시, 저녁에는 북시에 모였다.[46] 서경은 다른 수도들에 비하면 군사 도시에 가까워서 서경의 상업은 다른 4경과 비교하면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리고 남경은 요의 최대 도시로 가장 거대하고 가장 풍요로웠다. 대부분 한인이긴 하지만, 30만 호 이상이 거주하고 26개 지구로 나뉘었다. 남경의 거리와 광장은 질서정연하고 거대했으며 남경의 상업은 다른 4경 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취급하는 재화도 더 많았다.

이밖에도 동경도의 건주 · 요서주, 서경도의 삭주 · 울주, 중경도의 흥중부 · 금주 · 의주 · 택주, 남경도의 유주 · 순주 · 영주 · 계주 · 노현 · 범양현, 상경도의 경주 · 조주 등의 도시들도 상업 중심지였다. 남경도 계주의 신창진은 행상들이 모여 각지의 재화가 쌓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상경도의 경우에는 유목 경제가 발달해서 도시가 아닌 행궁에서도 시장이 열렸다. 그래서 조정은 행궁시장순검사(行宮市場巡檢使)를 설치해 행궁의 시장에서 이뤄지는 상업 활동을 관리했다.

국경 무역 시장인 각장도 운영했다. 조정은 상세와 아전(牙錢)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상인들에게 각장 출입과 상행위를 허용했다. 국가 입장에서 각장은 수입 확보와 무역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 국경 지역도 안정화시킬 수 있어서 이익이 많았다. 서경 삭주의 각장(榷場)에 진귀한 재화가 모이고 교역이 활발했다는 기록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상업 발전은 화폐 경제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요 왕조는 태조대에 처음 동전을 사용하고 태종 시기에 오야태사를 설치해서 철전을 관리했다. 경종대에는 주전원(鑄錢院)을 설치해 매년 500만 관(貫)의 동전을 발행하고 동광과 철광이 풍부한 동경도의 장춘주 · 평주 · 서요주 · 울주 등의 지역에 전백사(錢帛使)를 설치해서 화폐를 주조했다. 또한 법적으로 사주전(私鑄錢) 주조와 동전의 해외 유출, 외국과의 동 · 철 매매를 금지하고 이와 관련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는 중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연호전(年號錢) 제도를 도입해서 황제가 즉위하거나 연호를 고칠 때마다 화폐를 새로 주조했다. 화

대체로 요가 발행한 동전들은 그 종류는 다양하지만, 수량은 비교적 적은 편이고 오대와 송의 동전을 대량으로 수입해서 부족한 수량을 충당했다. 그래서 요 왕조는 자국에서 발행한 동전보다 중국의 동전이 훨씬 더 많이 통용될 정도였다.[47] 그러나 완전히 화폐 경제 체제로 전환한 것은 조금 늦어서 전기에는 양과 말, 베와 비단을 실물 화폐로 사용하고 동전과 혼용했다. 조정에서는 성종 시기부터 베와 비단과 같은 실물 화폐 사용에 따른 문제를 우려해서 비단과 베를 화폐로 쓰는 것을 금지하자는 논의를 꾸준하게 이어갔으며, 마침내 도종대에 비단과 베를 상거래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추가적으로 요 왕조는 국가 사업으로 도로와 다리, 역참을 건설했다. 특히 성종 연간에는 여러 차례 도로를 건설해 연운 16주와 주요 도로망을 정비하고 태평 7년(1027년)에 도로 폭을 30보로 확장하는 칙령을 내렸다. 요의 도로망과 역참은 초원 지역과 각 지역의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지역간 교류를 촉진시켰다. 덕분에 유목민과 대상들이 수월하게 각지를 이동하고 정보 전달과 물자 운반도 용이해졌다. 소식을 전하는 전령은 마패라 할 수 있는 은패를 지참하고 있다가 역참에 들러 은패를 보여주고 말을 갈아타거나 물자를 수령했다.

요는 도로를 건설할 때, 땅을 다지고 모래와 자갈을 썼으며 도로의 폭을 매우 넓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의 도로는 자연재해에 취약해 여름에는 먼지가 일고 우기에는 진흙길이 되어 여행자들이 불편을 느꼈다.[48] 또한 판석을 깔아 포장하지 않고 물이 노면에서 흘러 나가도록 설계하지 않아서 자연 재해가 일어나거나 큰 비만 내리면 도로가 손상되어서 매년 정기적으로 도로망을 보수해줘야 했다. 도로와 다리의 유지 및 보수, 건설은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에게 부과한 요역이고 매년 있는 일이라 부담이 상당했다.

그래서 요의 도로망은 적대적인 자연 환경과 상대적으로 낮은 기술력 때문에 송의 도로망보다는 그 수준이 낮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송은 주요 도로망은 물론, 여러 지역을 잇는 간선 도로망도 구축해 두었고 도로폭이 넓고 평탄해 바퀴 지름이 2m에 가까운 커다란 마차도 다닐 수 있었다.

6.3.1. 대외 무역 및 속국과의 조공 무역

요는 개방적인 국가라서 대외 관계가 넓었고 초기부터 오대의 국가들과 교역했다. 후진과는 매년 30만 필의 세공을 받으면서 국경 지역에서 교역을 진행했으며 매년 무역 규모가 커져서 상당한 숫자의 거란인들이 국경 지역으로 가서 장사를 했다. 심지어는 거란 상인들이 후진을 통과해 남당까지 가서 교역을 하기도 했다.[49] 송이 건국된 이후에도 요는 국경 무역을 이어나갔으나, 양국간의 관계가 자주 나빠지고 군사적 충돌이 빈번해 무역이 단절되는 일이 잦았다. 다행히 전연의 맹을 체결함으로서 양국의 국경 무역이 부활하고 그 규모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요 · 송 양국은 국경 일대에 각장과 관청을 설치해서 호시의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경 무역을 통제했다.[50]

요는 은화와 직물 · 양 · 말 · 낙타 · 모피를 가져와서 송의 유황 · 염초 · 명반 · 차 · 비단 · 물소뿔 · 상아 · 향료 · 비단 · 칠기 · 약재 등과 교환했다. 요가 소비재와 기호품, 사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송은 전연의 맹을 맺던 경덕 연간부터 요와의 무역을 통해 매년 40만 냥의 수입을 취했다. 양국은 수출 · 입 금지 품목을 정해서 송은 동 · 철 · 유황 · 염초 · 명반 · 차 수출을 금하고 [51] 국가 기밀이 빠져나가는 것을 우려해서 일부 서적의 수출도 금하는 한편, 전매를 하는 소금의 수출도 엄금했다. 또한 송은 지나친 동전 유출을 우려해서 동전 수출을 통제하기도 했다.

반대로 요는 송의 군사력 강화를 경계해 비정기적으로 군마의 수출을 통제하고 서하와 여진을 협박해 그들이 송에 군마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또한 송과 마찬가지로 국가 기밀 유출을 우려해 서적의 수출도 제한했다. 이러한 통제는 요와 서하의 강력한 기병대에 맞설 기병 전력이 부족한 송에게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송은 군마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서하와 여진에 비단을 주고 우수한 군마를 수입했다. 송은 최하품 군마에도 수십 필의 비단을 지불하는 금전적 보상을 통해 서하와 여진이 요의 보복이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이후, 서하와 여진이 자신의 명을 거부하고 송에 군마를 매각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요는 격노하여 서하와 여진에 사자를 보내어 이를 추궁하고 재차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서하와 여진은 일시적으로나 군마 매각을 중지할 뿐,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군마를 판매해 요와 갈등을 빚었다.

이렇듯 송 · 요 양국은 매우 강력한 통제 정책을 펼쳤지만, 완전한 무역 통제에는 실패하여 민간 무역의 성행을 막지 못했다. 요에서 유입된 밀매염이 송의 소금 전매 제도에 큰 타격을 주고, 송이 여진과의 밀무역으로 군마를 조달해 요가 이를 간 적도 있다. 그리고 요나라 사람들이 워낙 송의 시와 문학을 좋아하다보니 금령에도 불구하고 송의 서적과 문인들의 시집이 지속적으로 유출되었고, 요의 사신이 송 조정에 대놓고 위야(魏野)의 시를 요청해서 진종이 시집을 하사한 일도 있었다.[52]

요는 송과의 무역 이외에도 비단길 중 하나인 초원길을 장악하고 진무군(내몽골 화림격이 지역)과 영강주, 동 · 서부 국경 지역에 호시를 열어 고려, 서하, 천산 위구르, 고창, 구자, 우전, 여진, 조복 등과 교역했다. 이들 주변국과의 경제 교류는 대부분 조공과 국경 무역인 호시를 통해 이루어졌다.

서하와의 대외 무역은 양국 간의 우호적인 관계에 기반한 조공 무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요 · 서하 양국은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교류했는데, 서하의 사신단은 조공 무역과는 별도로 요의 도시를 지날 때마다 그곳의 상인들과 사무역을 했다. 서하의 조공품은 말 · 낙타 · 비단 · 소금 · 보석 · 가죽 등이며 요는 하사품으로 직물 · 말 · 활 · 포도주 · 과일 · 비단 등을 주었다.

고려와와는 보주(지금의 의주)를 고정적인 무역 시장으로 삼아 상거래를 벌였다. 고려는 요에 여러 가지 금은 세공품 · 직물 · 구리 · 인삼 등을 조공품으로 바치고 요는 답례로 각종 장식품 · 말 · 양 · 활 · 비단 등을 주었다.

요는 또한 이슬람 제국과 페르시아의 여러 국가와 일본, 그밖의 나라들과도 교류했다. 고창, 구자, 우전과 같은 실크로드 국가들은 3년마다 400명 정도의 규모로 사신단을 파견했는데, 요 조정은 사신단이 가져온 옥 · 유향 · 호박 · 강철 · 마노 · 보석 등의 조공품을 받고 그에 대한 답례로 최소 40만 관 이상을 지불했다. 실크로드 국가들과의 공무역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중에서도 천산 위구르와의 교역이 가장 많았는데, 상업 항모에 서술했듯이 수도 상경에 회골영이라 부르는 위구르 상인들만을 위한 거주 지구가 존재할 정도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후지와라노 무네타다가 저술한 중우기(中右記)에 요에 몰래 무기를 판매하고 재화를 받아온 이들이 적발당한 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후지와라노 코레후사가 금지된 사무역을 벌이다 발각당해 처벌당한 일도 있어 요 - 일본 간의 사무역은 강하게 통제된 상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외교적 선물도 상호 교류의 수단이었다. 고려는 종이 · 묵 · 쌀 · 동 · 인삼 · 직물 등을, 서하와 천산 위구르는 진주 · 옥 · 물소뿔 · 유향 · 호박 · 철기 · 말 · 낙타 · 모직물 등을 선물했으며 요는 안장 · 말 · 활 · 화살 · 모피 · 견직물 등을 답례로 주었다. 그리고 요는 자국에서 생산한 재화를 주변국과 교역했을 뿐 아니라 국경 무역을 통해 얻은 상품을 다른 지역에 되팔아 중간 이익을 얻기도 했다. 여진에게서 진주를 구해 송 황실에 매각하거나, 천산 위구르에게서 야생마 가죽과 호피를 구매해 송에게 되파는 등,[53] 요는 주변국과의 조공, 사여, 선물, 국경 무역을 통해 여러 가지 재화를 직, 간접적으로 교역했다.

속국, 속부와의 무역과 상거래도 많았다. 숙여진은 금과 비단 · 직물 · 밀랍 · 잣 · 꿀, 백부자와 천삼성, 인삼과 같은 약재를, 동북의 생여진과 철리(鐵離), 말갈(靺鞨), 우궐(于厥) 등은 담수 진주 · 날다람쥐 · 담비 가죽과 상어 껍질 · 소와 말 · 낙타 · 모직물을, 조복과 오고, 적렬 같은 몽골 유목민들은 소와 말, 낙타, 각종 가죽 등의 특산물을 조공품으로 바치고 답례물을 받았으며 조공품 외에 가져온 재화들을 시장에서 거래했다. 《요사》 「식화지」에 이들 삼림, 유목 민족들 중에 요와 교역을 하려는 자들이 도로에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과의 무역이 상당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 조정은 송과의 무역과 마찬가지로 외국과 속국, 속부와의 무역과 상거래를 할 때에 금지 품목을 정했다. 서하와의 무역에서는 금과 철의 유출을 금하고 천산 위구르와 조복과의 무역에서도 철의 판매를 막았다. 아무래도 철이 갑옷과 무기, 화살촉을 만들 수 있는 자원이기 때문에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6.4. 광업 · 금속 공업

건국 이전의 거란은 살랄적이 공방을 설치하면서부터 금속 가공 기술을 습득하고, 야율아보기의 치세에는 은광과 철광을 개발하고 한성에 공방을 설치해서 한족들의 선진 기술을 흡수했다. 발해를 무너뜨리고 요동의 패권을 차지한 뒤부터는 요동의 풍부한 철과 발해인의 우수한 야금 기술을 이용해서 제철업을 더욱 발전시키고 요동에 갈술석렬(曷述石烈)을 설치해 노예들을 시켜 철을 채굴했다.[54] 시간이 지나 생산력과 생산 방식이 발전하자, 성종은 석렬을 부로 승격시키고 노예는 평민으로 올려주었다.[55]

다만, 요는 초기에 노예 경제를 운영하고 당의 관영 수공업 제도를 받아들인 영향으로 인해 관영 공방의 장인들은 모두 관노비였고 죄수들도 동원했다. 죄수 노역자의 경우, 상서나 시랑급의 고위급 인사가 죄를 짓고 일정 기간 공방에서 노역을 하기도 했는데, 황제의 진노를 사거나 중죄를 진 경우에는 거의 평생토록 노역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반대로 송은 장인들에게 매년 20일의 요역을 부과하는 당의 번장제(番匠制) 대신에 장인들을 모집해 급료를 지급하는 모장제(募匠制)를 시행하여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거나 공공 사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조선의 선혜청처럼 민간과 계약을 체결해 물품을 조달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56] [57] 그래서 운영에 있어서는 요가 송에 비해 미진한 면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철기는 무구 뿐만 아니라 농업, 목축, 어렵 등의 주요 산업에 필요한 도구와 생필품을 만드는데도 필수적이어서 요 조정은 제철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요의 철기는 그 품질이 매우 높아져 요는 철기로도 유명해졌다.

요의 주요 금속 생산 지역으로는 요동 안산의 수산(手山, 현재의 안산시 수산, 首山), 삼출고사(三黜古斯), 유습하(柳濕河) 일대가 있으며 요는 이 지역에 광산과 공방을 설치하고 금속을 생산했다. 특히나 발해 고토 지역은 철이 풍부하고 철을 생산하는 제철 공방이 많아 발해 정복 이후, 발해가 보유한 철산지들은 그대로 요의 주요 철 생산 지역이 되었다.[58]

동경도 동주(요녕성 개원현)과 동평현, 상경도 요주 장락현(내몽골 임서현)에서는 수백 호의 주민들이 제철업에 종사하고 생산한 철을 세금으로 바쳤으며, 중경도 유하 유역의 발해인들도 제철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남경도에는 관영 광산인 경주 용지야, 영주 신흥야가 있으며 요는 이 두 곳에 감을 설치하고 생산과 운영을 관리했다.

요의 금 · 은 생산은 태조가 연운 지역의 한인 포로들을 끌고 와 은광과 철광을 채굴하도록 한 것이 시초이다. 성종 연간에는 요하와 황하 유역에서 금, 은 광맥을 발견하고 광산을 개발했다. 금속과 금 · 은 같은 비철금속의 채굴 및 제련, 가공은 주로 한인과 발해인 장인들이 맡았으나, 거란인과 솜씨 좋은 여진인 장인들도 참여했다.

요의 대표적인 은광으로는 동경도 은주(요녕성 철령)와 남경도 어양 · 도봉 · 대석 · 보흥, 중경도 택주 · 엄주 등이 있다. 그 중에서 택주의 함하야는 요 태조가 성채를 쌓고 은 채굴, 제련을 한 곳으로 청대까지 은을 생산할 정도로 매장량이 많았다. 그리고 내몽골 대청산 일대의 음산에도 은 광맥이 있어서 요는 1027년에 서남로 초토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방을 설치하고 금, 은을 생산했다.

그리고 요는 이른 시기부터 난하 상류 지역과 흑거자실위(黑車子室韋)가 거주하는 광제호[59]에서 소금을 생산·판매했으며 발해와 연운 16주를 차지한 뒤부터는 해염(海鹽)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요의 제염업은 매우 발달해서 요의 소금은 내수 시장에서 팔릴 뿐만 아니라 송의 국경 지역에서도 밀매되었다. 이렇게 밀매된 소금 덕분에 요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송은 밀매염 때문에 국경과 하북 지방에서 소금 전매를 실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북로(河北路)에서 소금 전매를 실시하려 한 시도가 두 번이나 실패했고[60] 결국에는 하북로에서의 각염(搉鹽, 소금 전매)을 완전히 중지해야 했다.

사족으로 서북 지방의 경우에도 질 좋기로 유명한 서하의 청백염이 대량으로 밀매되어 송의 소금 전매제를 위협했다. 송에게는 불편한 일이지만, 국경 지역에서는 요와 서하 같은 두 잠재적 적국 때문에 소금 전매제가 흔들렸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6.4.1. 금속 기술 발전

요대에는 금속 기술력도 크게 성장했다. 야철 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발달해서 광산 몇 곳은 갱도 깊이가 18m 이상이었다. 구리와 철 제련 기술도 매우 발달해서 요의 기술자들은 순동과 황동을 제련하고 안정적인 금속 제련법을 터득해 요대의 쇠못 성분은 근현대의 것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요의 장인들은 농업용 도구와 수공업 공구, 각종 생활용품 등, 다양한 종류의 금속 제품들을 생산하고 농업용 도구 중에 어떤 것은 근대에 사용한 공구와도 매우 비슷할 정도였다. 그래서 금대 후기까지 연운 지역의 농기구는 요대에 이용하던 것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요는 동경도 하주에 군기방, 현주에는 갑방, 중경도 지역에도 무구 공방을 세워 무기와 갑옷을 생산했다. 요가 만든 무구 중 일부는 고품질의 저탄소강을 사용한 것이어서 무기 제조 기술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요의 금속 공예 기술은 아주 정교했다. 요대 금속 공예의 시작은 포로로 잡아온 한인, 발해인 장인들이 철기 제작을 시작하면서부터였으며 점차 금은 세공품도 만들기 시작했다. 요대 금속 공예품들은 당과 오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송의 영향이 짙어졌다.

요의 금속 장인들은 금 · 은으로 도금하거나 여러 무늬를 새기고 화려한 장식을 한 생활용품들, 예컨대 마구와 안장, 고삐, 식기, 장식품을 제작했으며 불상도 만들었다. 또한 금속 공예 기술과 도예, 직조 기술을 융화해 금도금 백자, 금사나 은사로 자수를 놓은 가죽 장화, 은도금을 입힌 가죽 장화도 제작했으며 고급 공예품들은 황실에 진상했다. 이 시기에 제작한 유물들은 현재까지 남아서 요대 금속 공예의 높은 수준을 알려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요의 금·은 공예 기술은 당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지만, 조형면에서는 유목민 예술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요대의 금속 공예품은 다른 왕조의 유물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정리하자면 요는 한인과 발해인들의 기술을 흡수하고 유목민의 미적 감각을 접목시켜 고유한 금속 공예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채광 기술력도 키워내어 금속 생산량을 늘렸다.

6.5. 공예업

6.5.1. 직조업

요는 건국 이전에도 자체적으로 직조 기술을 습득하고 있어서 펠트나 가죽, 아마포를 생산했으나, 기술력은 뒤떨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란의 위정자들은 직조업을 장려하고 영토에 삼과 뽕나무를 심어 직물을 생산했다. 그러나 요의 직조업을 발전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자체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한인과 발해인들을 흡수해서 그들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요는 한인, 발해인 포로들과 연운 16주의 한인들로부터 직조 기술을 습득해 직조업을 발전시키고 견직물을 생산했다. 한인들의 기술이야 말할 필요가 없으며 발해는 예전부터 방직업 기술이 뛰어나고 특산물로 직물이 유명한 곳이 많았다.[61] 초창기에는 기술 수준이 떨어져서 거칠고 수수한 직물만 만들었지만, 점점 수준이 오르면서 거의 모든 종류의 견직물을 생산하고 직물도 섬세해져서 중국에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62]

요에서 생산하는 비단은 능(綾) · 라(羅) · 기(綺) · 금(錦)의 4 종류가 있고 자수 기술을 비롯해 각종 문양과 무늬를 새기는 기술이 뛰어났다. 이러한 요의 직조 기술과 도안, 문양은 당, 송과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또한 목축업이 번창함에 따라 그 부산물인 모직물과 가죽옷도 꽤 많이 생산했으며 그 기술력도 상당히 높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유행이 바뀌어 사람들이 두꺼운 비단인 금(錦) 대신에 얇은 비단인 라(羅)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는 중국의 유행을 따라해 금보다 라를 더 많이 생산했으며 라의 직조 기술도 상당히 높았다. 요에서 생산한 번라(蕃羅)는 요 · 송 무역에서 송의 상인들이 좋아하는 재화였고 그중에서도 품질이 우수한 견직물은 송에서도 진귀한 것으로 취급했다. 또한 호흠영의 요대 무덤에서 출토된 비단 유물들 중에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직물들도 나왔으며 비단으로 무늬를 넣은 나문사직물(羅紋絲織物)은 송과 같은 수준이었다. [63]

직조업과 더불어 직물에 염색을 하는 날염업도 함께 성장해서 요는 남경과 중경에 염원(染院)을 설치하고 사제점원사(使提點院事)를 두어 날염 공정을 관리했다. 요는 당대에 개발한 협힐(夾纈)과 납힐(蠟纈) 기술을 터득했고 요의 염색공들은 다양한 종류의 무늬와 도안을 염색할 수 있었다.

지역별로 가장 직조업이 발전한 지역은 연운 16주와 그 중심지인 남경이며 중경도와 동경도가 뒤를 따른다. 남경은 관영 직조업의 중심지이면서 요의 직조 기술 발전을 선도한 선진 지역으로 그곳에서 생산한 비단은 아름답고 수준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64] 요 조정은 연운 16주의 뛰어난 직조 기술을 타 지역에 전파하기 위해서 16주의 한인들을 중경과 상경, 동경도 지역에 보내었다. 덕분에 3개 도의 직조업이 크게 발전하고 관영 공방은 물론 민간에서도 견직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직물을 생산했다.

중경도의 경우, 중경도 영하(靈河 지금의 대릉하) 유역의 일부 주현이 뽕나무와 마를 재배하기 적합해 요 초에 황제들이 한인 포로 중에 방직에 능한 이들을 안치시켰다. 한인들이 정착하고 안정적으로 직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직조업이 크게 성장했다. 특히 영하 유역에 위치한 홍정현과 백천주는 높은 품질의 명주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해져 요 조정은 매번 북송으로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백천주에서 생산한 견백을 예물로 보냈다.

동경도는 발해 시기에 현주의 직물, 용주의 명주가 특산물로 유명하고 이 지역 외에도 발해 전역에서 비단을 비롯한 각종 직물을 생산할 정도로 직조업이 발전했고 동란국 시기에는 마포 10만 단을 조공으로 바친 전력이 있어 연운 16주처럼 요의 지배를 받기 전부터 직조업이 발전한 지역이었다. 요 조정 또한 이러한 지역의 사정을 알고 있어 상경과 중경처럼 연운 16주의 한인 직공들을 정착시키고 양잠과 직조를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해 동경 일대의 직조업을 성장시켰다. 재밌는 점은 발해만과 요동 반도 일대에 살던 숙여진인들도 직조와 양잠 기술을 터득하고 있어서 각종 직물과 비단을 공물로 바치거나 상거래에 활용했다.

또한 요는 상경, 중경, 조주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 관영 견직물 공방인 능금원(綾衾院)을 설치하고 한인과 발해인, 거란인 직공들을 모아 황실에 쓸 견직물을 생산했으며 중경도의 의주(요녕성 의현) · 천주(요녕성 표남) · 금주 · 패주(요녕성 조양)와 동경도 현주에 뽕나무와 마를 심어 능금원에 필요한 원료를 조달했다.

민간에서는 요의 주민들도 중국인들처럼 방직업을 부업으로 삼아 뽕나무를 키우고 질 좋은 견직물을 생산했으며 이렇게 생산한 견직물을 세금으로 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경도의 일부 주민들 같은 경우에는 생사나 견직물만 납부하고 곡물은 납부하지 않아서 사잠호(絲蠶戶)라고 불렸다. 요 조정은 이런 식으로 징수한 견직물을 관료에게 하사하거나 외국에 선물로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6.5.2. 도예 · 가죽 공예 · 목공예

요는 오대와 당 · 송의 도예 기술을 받아들이고[65] 그들의 도자기를 모방했으나, 단순히 중국의 도예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목 문화의 개성을 더해 요삼채(遼三彩)와 요 백자 같은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냈다.

요삼채는 이름 그대로 당삼채(唐三彩)를 계승한 것이나, 중국 도자기의 역사에서 요삼채가 탄생한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뜬금 없는 사건이다. 원래 당삼채는 중당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맥이 끊기고 8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인데, 200년이 지나 그것도 거란족의 나라인 요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추측하자면 당이 쇠퇴하면서 당삼채 기술이 산서 · 하북의 국경 지역으로 전해지고, 요가 산서와 연운 16주 일대를 차지하고 한인의 기술,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요삼채가 탄생한 것으로 추측된다.[66] 요삼채는 당삼채처럼 색상이 황색 · 녹색 · 백색이며[67] 요의 도공들은 요삼채로 접시 · 병 · 쟁반 등을 만들었다. 요삼채 중에 유명한 계관호(鷄冠壺)는 닭볏을 얹은 듯한 모양을 한 편평한 병(편호, 扁壺)으로 그 형태는 유목민들이 쓰는 가죽 부대를 발전시켜 만든 것이다.[68]

요 백자는 송의 정요(定窯) 백자를 계승한 것으로서 요삼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발 · 접시 · 쟁반 등이었다. 요 백자는 정요를 모방하긴 했지만, 가장 자리를 금 ·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요 백자 그릇처럼 고급스럽고 정교한 자기는 원본인 정요의 도자기를 능가하는 수준의 예술품이다. 그리고 요삼채에서 계관호가 유명한 것처럼 요 백자는 긴 목을 한 장경병(長頸甁)과 소의 넙적 다리처럼 생긴 우퇴병(牛腿甁), 봉황의 머리를 한 봉수병(鳳首甁)이 유명하다. 그외에도 요의 도공들은 사슴 무늬가 그려진 게르의 모양을 한 창식관(倉式罐)을 만들었는데, 이 창식관들은 유골 단지로 사용했다. 그리고 지역별로는 특히 중경에서 도자기를 많이 생산했으며 중경 송산주에는 큰 규모의 도요가 있어서 이 곳에서 많은 양의 요대 도자기들이 출토되었다. 발굴한 도자기의 대부분은 거친 백자에 다양한 종류의 생활 용기와 장난감, 주사위로 구성되어 있었고, 도자기를 빚을 때 쓰는 유약과 무늬도 종류가 다양해서 여러 가지 무늬와 색을 그린 도자기들이 출토되었다.

문화적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거란인은 한인과는 생활 양식이 달라서 서로 사용하는 도자기의 종류가 달랐다. 그래서 요는 전통적인 중국풍 도자기도 생산하지만, 유목민의 예술을 가미한 도자기도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손잡이 달린 잔을 제작한 것과 승마 중에 휴대할 수 있게끔 설계한 도자기를 제작한 것이 있다.[69]

요의 유목민들은 가죽 공예와 목공예도 수준이 높은 편이었으며 유목민의 필수품인 마구의 생산을 중시했다. 특히나 요에서 만드는 안장과 고삐는 송인들이 "요의 안장, 서하의 검이 천하제일이며 다른 곳에서는 모방을 해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았다. 요의 장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안장과 고삐를 제작했는데, 그 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금 · 은으로 용과 봉황을 새겨 넣은 안장, 여러 종류의 닥나무 껍질을 쓰고 은을 새긴 안장, 비단과 금으로 장식한 말 고삐와 사슴과 물범 가죽으로 만든 고삐들이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정교하고 수준 높은 예술품이다. 그외에도 요의 유목민들은 사냥과 목축을 하면서 얻은 가죽과 털, 뼈로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활 시위, 가죽 공예품과 뼈 공예품, 펠트 천을 비롯한 모직물을 생산했으며 요 조정은 속국과 유목민들로부터 진귀한 모피를 받아 각국에 선물하거나 교역품으로 활용했다.

목공예의 경우, 다양한 종류의 공구를 사용하고 상당히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주로 생산한 '목공예품'은 유목민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교통수단인 마차였다. 요는 건국 이전에 마차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흑거자 실위인들로부터 마차 제작 기술을 배운 적이 있으며 해인과 발해인들의 마차 제작 기술도 뛰어나서 요는 그들의 기술을 흡수했다.[70] 또한 불교 승려들도 마차 만드는 기술이 대단해서 거란인 귀족들은 승려들이 만든 마차에 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요에서 제작한 마차는 이주용 물품 운송 마차, 부녀자와 노약자용 마차, 귀족과 부자들이 쓰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마차 등, 그 종류와 용도가 아주 다양했다. 그리고 요는 국가 단위에서도 마차 제작에 신경 써서 상경에 거자원(車子院)을 설치하고 마차 생산을 관리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 요의 마차 제작 기술이 높았으며 마차 제작 산업의 규모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차 외에도 요는 의자와 탁자, 침대 같은 가구와 각종 목공예품을 제작했으며 활과 화살도 잘 만들었다. 그리고 한인과 발해인들로부터 조선술을 배워 여러 가지 종류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었으며 [71] 흥종대에 수군을 육성해 황하에서 송을 상대로 수전을 걸어서 승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인 기술자들로부터 제지 기술과 목판 제작 기술을 습득해 제지업과 목판 제작으로도 유명세를 얻었으며 자국의 목판 제작 기술로 대장경을 제작할 만큼 요의 제지 기술은 그 수준이 높았다. 요에서 제작한 대장경은 요장(遼藏), 또는 거란장(契丹藏)이라 부르며 고려에서도 이 대장경을 수입했다.

7. 사회

요는 귀족, 평민, 천민으로 구성된 계급 사회이면서 유목민과 정주민이 공존하는 다민족·다문화 사회였다. 요의 귀족들은 유목민 귀족, 관료,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 지방 세력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지주이거나 개인 영지를 가진 영주였다.건국 초기의 귀족들은 대부분이 유목민 귀족이고 경제적 기반은 두하주를 비롯한 개인 영지였으나, 점차 요의 사회 · 경제가 고도화되면서 농민과 계약 관계를 맺는 지주들이 등장하고 장원 영주들도 점차 농장 지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요가 멸망할 때까지 농민을 인신 지배하는 장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의 황족과 귀족들은 국가로부터 직역을 수행하는 대가로 수조권과 토지, 관직을 받았다. 귀족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세선제를 악용해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주요 지방관직의 선출에 개입해서 기득권을 유지했다. 또한 이들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음서의 혜택도 가지고 있어서 귀족의 지위를 자손들에게 계속 물려줄 수도 있었다. 전쟁에서는 평민들보다 더 많은 약탈품과 포상을 받을 수 있어서 귀족들은 성종대까지 벌어진 정복 전쟁에서 많은 이득을 취했다.

평민들은 국가에 세금과 노동력을 제공했다. 평민 유목민들은 각 부에 소속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는 부유층과 중산층, 서민과 빈민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유목민 세력가들은 절도사나 상온 같은 고위직 임용에 개입하고 많은 숫자의 가축과 고용인들을 거느렸지만, 빈민들은 가뭄이 들면 먹을 식량도 부족해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요 조정은 빈민들을 진휼하고 이들을 위해서 군목의 가축들을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유목민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서 조정과 절도사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자신이 속한 부를 이탈할 수가 없고, 평소에는 부의 거주 지역에 살다가 국경 방위 의무를 이행할 때는 방위 지역으로 떠났다.

다만, 유목민들은 군역과 요역 부담이 점점 높아져서 어려움을 겪었고 귀족들처럼 전쟁으로 이득을 얻기도 어려워서 일부 유목민들이 전쟁을 치르다 파산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사회, 경제가 고도화하면서 성종대부터 빈부격차가 발생해 일부 유목민들이 빈곤으로 고생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반란과 전쟁이 늘어나 군역 부담도 높아졌다. 이로 인해 군역을 부담하던 서민과 중산층들이 몰락하고 빈민화하는 유목민들이 늘어났다. 특히 부담이 큰 것은 서북과 동북 국경 지대를 지키러 가는 의무였는데, 중산층은 물론이거니와 부유층들까지 파산할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계속해서 식량과 가축을 제공하고 진휼 정책을 실시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유목민들의 몰락은 요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졌다.[72]

정주민들은 주현에 편입되어 있고 정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들은 소작농과 자영농, 두하주와 사찰에 소속된 이세호(二稅戶)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하주에 소속된 인민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 출신으로 두하주의 영주인 황족과 귀족들의 지배를 받았고 일반 주현에 편입된 평민들보다 인신 지배의 강도와 착취의 정도가 높은 데다 그 지위도 낮아서 고충이 컸다. 그리고 사찰에 소속된 이세호는 말 그대로 세금을 두 번 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국가에도, 소속된 곳에도 세금을 내야 했으며 두하주에 소속된 평민들처럼 지위도 낮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두하주에 소속된 이들은 천천히 두하주가 해체되어 일반 주현으로 변경되면서 나아졌지마는 이세호는 요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 이세호로 살아야 해서 계속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 소속된 알로타의 궁분인들은 제궁제할사(諸宮埞轄司)의 관리를 받았고 이들은 오르두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저장호는 죄를 지은 황족, 외척과 대신의 가속들이며 이들은 복역(僕役)·시종(侍從)·경위(警衛) 등의 일을 맡았다. 초기의 궁분인은 한인 · 발해인 · 거란인 지원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전쟁 포로, 황후와 후궁을 호종한 자, 주현과 부족에서 뽑힌 이들이었으며 대다수가 농업과 수공업, 목축업과 수렵에 종사했다. 궁분인들은 평민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황제를 호종하면서 행궁에서 필요한 물자, 노역을 부담해야 해서 일반 평민들보다 착취의 정도가 높고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밖의 계층으로는 상인을 특기할 수 있는데, 상인들은 의외로 지위가 높아서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들 중에 일부는 관료가 되기도 하고 어떤 상인은 외교 사절단의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노예는 채무 노예와 포로 노예, 죄를 짓고 신분이 하락한 노예들이 있었다. 초기에는 한인, 발해인, 유목민 포로 노예들이 많았으나, 점차 요의 사회 경제가 발전하고, 성종을 비롯한 요의 위정자들이 여러 차례 노예들을 해방하고 새로이 편제한 부에 소속시켰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숫자가 줄어들었다. 다만, 건국 초에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한인과 발해인들을 함부로 다루고 학살하는 일이 많아, 성종대에 대규모 노예 해방 정책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상당한 숫자의 한인, 발해인들이 착취와 폭압에 고통받았다.

여성 인권의 경우, 요의 여성들은 높은 권리를 향유했다. 요는 유학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성리학처럼 성별에 따라 직업과 업무, 가정 내에서의 의무를 엄격하게 구분짓지 않아서 거란인 여성들은 다른 유목 민족의 여성들처럼 사냥과 목축에 종사하고 남편이 전장에 나갔을 때는 집안 재산을 관리하는 등, '남성들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하고 능동적으로 생활했다. 그리고 상류층 여성들은 더 나아가서 국가 운영에 참여해 행정 업무와 군사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순흠황후(淳欽皇后) 술율평(述律平)과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작(蕭綽)이 수렴청정을 하면서 엄청난 수준의 권력을 행사한 사례가 있다.

순흠황후는 태자인 야율돌욕( 의종(요) 추존) 대신에 동생인 야율요골( 요태종)을 옹립할 만큼 권력이 강했으며 자신에게 순장을 강요하는 신하들을 역으로 무덤에 집어넣고 자신은 한 팔만 잘라 남편의 무덤에 바치는 기지를 발휘할 정도로 재기가 뛰어났다. 그리고 순흠황후는 수십년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요 태종이 그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며[73] 군사력도 상당해서 태종 사후에는 손자인 세종과 내전을 벌였다.

그리고 예지황후는 수렴청정 초기에 송 태종이 북벌을 일으키자, 스스로 갑옷을 입고 군을 소집해 송의 공세를 3번이나 막아냈으며 수렴청정을 하면서 국가를 잘 운영했다. 그밖의 사례로는 성종이 예지황후의 맏언니였던 소호련(蕭胡輦)에게 오고부와 영흥궁의 군사를 이끌고 서북 변경을 지키게 한 일이 있으며[74] 서요에서는 감천태후(感天太后) 소탑불연(蕭塔不煙)과 승천태후(承天太后) 야율보속완(耶律普速完)이 거의 황제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며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요의 여성 인권이 상당히 높았으며 황제의 친족에 한정된 일이기는 하나, 여성이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류층 여성들은 주로 중매 결혼을 하고 가문의 이해 관계 때문에 정략 결혼을 하는 일이 많았지만, 중하류층 여성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요에서는 한인들이 중시한 처녀성 같은 것은 무시했고, 요의 미혼 여성들은 한인들이 보기에는 '문란한' 수준의 성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그녀들은 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는데, 노래의 내용은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가사 능력, 자기 집안의 지위에 대한 것들이었다. 요에서는 약탈혼(掠奪婚)이 성행해서 거란족 남성들은 한인과 거란인 여성을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약탈혼'이 단순히 결혼 준비 과정 중 하나로 일종의 퍼포먼스[75]였으나, 일부 경우에는 진짜로 여성을 납치해서 강간하는 것이라 문제가 되었다. 거란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소수민족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수의 한인 여성들은 기존의 성관념을 따랐을 것으로 보이나, 일부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구는 요 태조 때 40만 호 · 200만 명, 태종대에 57만 호 · 280만 명이었으며 성종 초에 600만, 도종 중기에 750만, 천조제대까지 900만 ~ 1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전체 인구에서 민족간의 인구 비율은 거란인을 75만, 한인을 200 ~ 300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송 사신 허항종의 『봉사여정록』에 따르면,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중국어로 대화를 했다고 하니 중국어가 공용어처럼 쓰인 듯 하다. 거란인들이 지배층이긴 하지만, 인구의 대다수가 한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변한 것으로 추정되며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나는 중국어를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지만, 중국어로 말하지는 않는다."고 신하들 앞에서 이야기한 일, 여러 거란인 관료와 문인들이 한시와 한문학에 정통했던 것을 생각해볼 때, 거란인들도 중국어를 익히고 사용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8.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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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시대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당시 의복, 생활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이원화된 행정과 제도를 가진 요나라답게 한족과 거란족의 복식이 서로 달랐다. 한족은 중국 전통복장을 입고, 상투를 틀며, 관모를 쓴 반면, 거란족은 자신들의 전통복장과 변발을 고수했다.

9. 종교

거란족은 민족 고유의 샤머니즘과 텐그리즘 신앙을 믿어서 하늘, 땅, 태양, 산, 강 등을 모두 숭배하고 중요한 일에는 하늘과 땅의 신들과[76]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거란족은 여러 신들 중에서도 특히 태양을 크게 숭배해서 태양이 뜨는 동쪽을 중요시하고 제사는 모두 동쪽을 향해 지냈다.[77] 그리고 흑산(黑山)을 영혼이 돌아가는 곳이라 믿고, 흑산의 산신이 모든 영혼들을 관장한다고 생각해 매년 동지날마다 흑산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를 지내지 않고는 감히 흑산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거란인들은 지금의 시라무렌 강과 요하가 만나는 백음(白音) 지역에 있는 목엽산(木葉山)을 전설상의 시조인 기수가한의 발상지로 보아 목엽산을 경배하고 흑산과 마찬가지로 매년 제사를 지냈다. 이는 불교를 수용한 뒤에도 마찬가지라서 요의 황제들은 불교 사찰과 불상을 목엽산에 지을지언정, 목엽산에 대한 제사는 항상 충실하게 지냈다.

거란인들은 어렵 활동을 할 때에 처음 잡은 것은 무조건 텐그리를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고 제례에는 꼭 백마와 백양, 백조 같은 하얀색의 동물을 제물로 썼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산 속에 안치한 뒤, 3년이 지난 후에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 이러한 풍장 문화는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뒤부터 장례를 치른 뒤에 곧바로 매장을 하거나 시신을 수습한 뒤에 화장을 하는 식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거란인들이 인신 공양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순장 문화가 있어 생전 고인과 친분이 깊던 이들이나 배우자, 지원자, 노예들을 함께 묻었다. 사회 항목에 서술했듯이 순장 문화는 정적을 제거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다만, 요의 순장 문화는 순장을 극도로 증오하는 한인, 발해인 유학자들의 강력한 비판과[78] 생명을 중시하는 불교계의 반대가 이어져 점차 사라져갔다.

요가 중앙집권화되고 점점 유 · 불 · 도의 영향력이 강해져 거란인들이 샤머니즘과 텐그리즘을 버리고 불교로 경도되었다는 학설도 있지만, 요는 멸망하는 그날까지 고유의 신앙을 유지해 태무(太巫)를 임명하고 황제의 즉위식과 주요 행사에 꾸준히 텐그리즘 제례를 진행했다. 따라서 불교에 경도되긴 했어도 텐그리즘을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고 종교 혼합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게 옳을 것으로 파악된다.

거란인들은 건국 이전부터 한인 지식인들을 흡수하고 유학자를 비롯한 종교인들을 포로로 끌고 와 유목도성에 살게 했기 때문에 유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 태조를 비롯한 요의 황제들은 유학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공자에게 존경을 표했다. 건국 초기에 태조는 역사적으로 큰 업적이 있는 사람들을 정해 제사를 지내려 했는데, 태자 야율배가 ''공자는 대성인으로 만세에 존중받을 사람이니, 마땅히 가장 먼저 해야 한다.'고 진언해서 태조는 수도 상경에 공자의 사당을 짓고 직접 제사를 지냈다. 심지어 요의 수뇌부 다수가 유학의 도덕 규범을 인재 임용과 도덕 수양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요는 유교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79]

한인 지식인, 관료들도 거란인에게 유학을 전파하는데 적극적이라서 성종 초에 추밀사를 지낸 설방이 서경 무일편을, 시독학사 마득신이 당 고조, 태종, 현종의 행적 중 본받을 만한 것을 성종에게 올리기도 했으며 흥종 때는 추밀사 마보충이 불교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진언하고 불교를 비판했다. 그리고 도종은 경연관이 『논어』 <팔일>편에 '이적에게 군주가 있더라도 중국에서 군주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구절을[80] '이적'인 자신 앞에서 감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81] ''과거 흉노족은 방탕하고 예법이 없어 오랑캐라 불렀지만, 내가 문물을 배워 기품을 갖춘다면 중화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인데, 무얼 거리끼겠는가?'' 고 말하고, 그 구절을 그대로 해석하라고 명했다. 신료들을 모아놓고 경연을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할 만큼, 도종이 유학에 능통하고 자신감이 넘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요의 황제들은 유교 경전을 배우고 존중했으며 통치에 도움이 되는 점들을 흡수해 국가 운영에 활용하고 유교의 도덕규범을 이용해 인민을 교화했다.

그리고 유교 외에 도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의 도교는 끌려온 도사들과 한인 도교 신자들이 전파한 것에서 시작한 것으로서 점차 세력을 늘려 상경에는 천장관, 중경에는 통천관이란 도관을 세우고 일부 주와 성에도 도사와 도관들이 많이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또한 일반 백성 뿐만 아니라 일부 거란인 상류층들도 도교를 믿어서 성종은 도교와 불교 모두에 능통했고, 성종의 동생인 야율융유는 동경 유수 시절에 궁관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도원을 설치해 도사들을 데려올 정도로 아주 독실한 도교 신자였다. 이런 식으로 도교가 세를 얻자, 요의 황제들은 일부 고위 도사들을 고위 승려들과 동등하게 예우하고 관직을 하사하기도 했다.[82] 그리고 도교의 전파는 도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유행시켜서 요 초기에 도사 유해선이 도교 경전을 저술하고 야율배가 음부경을 번역한 바 있고, 성종대에는 우전 출신의 장문보가 성종에게 내단서를 바쳤다. 추가적으로 도교는 요의 장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쳐서 요대 고분 중 일부에서 도교의 사신도가 그려진 석관이나 화상석, 도교의 영향을 받은 벽화나 부장품,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러 유목민들은 거란족과 같이 샤머니즘 신앙과 텐그리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이만, 케레이트, 옹구트 같은 일부 몽골 부족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다.[83] 그리고 산서, 하북 지역에 요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가 발견된 적이 있어서 한인 인구가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밖에도 상경에 회골영이라는 위구르인 거주 구역이 있었던 만큼, 위구르인들이 믿는 마니교도 요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9.1.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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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궁사 목탑. 현존 최고(最高) 목탑이다.[84] 요나라 시대 관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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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 다퉁 화엄사의 요나라 시대 불상들. 화엄사의 요나라 불상들은 그 조형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중국의 비너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요는 원래 샤머니즘, 텐그리즘을 신앙하던 민족이나, 연맹 시절부터 중국과 교류한 영향으로 건국 이전부터 불교를 깊게 숭상했으며, 잡아온 한인 포로들 중에도 승려 불자들이 많아 한인을 중심으로도 불교가 성장했다.[85] 정부 차원에서는 902년에 개교사(開敎寺)를 세우고 신책 3년(918년)에 상경 임황부에 사찰을 건설하는 등, 불교를 후원했다. 같은 해, 요 태조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을 선정해 제사를 지내기로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부처를 사당에 모시고 가장 먼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태자 야율배가 혼자 반대하고 공자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 일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거란인 고위층들이 불교를 깊게 믿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만, 거란인을 비롯한 요의 유목민들은 종교 혼합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를 믿을지라도 텐그리 신앙을 중요시했고 거란인 귀족들은 불교 뿐만 아니라 유교, 도교에도 정통한 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종, 흥종, 도종인데, 성종의 거란어 이름은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따온 문수노(文殊奴)이며 성종 자신은 불교 뿐만 아니라 도교 교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유학에 대한 이해도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흥종 도종도 신실한 불교 신자이면서[86]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렇듯 초기에도 불교가 성장하고 있었으나, 요의 불교가 급격히 성장하게 된 시점은 연운 16주를 흡수하면서부터였다. 불교계는 황실의 보호와 후원을 받아 사찰 건립이나 불상 조영, 경전 판각 같은 사업을 진행하고 불사를 벌였다. 요 조정은 당제를 모방해 승관 제도를 만들어 승정, 승판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경전에 능한 이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진행해 교리에 정통하고 자질이 뛰어난 승려들을 법사로 임명했다. 또한 5경 뿐만 아니라 각 주군에도 사찰을 설립하여 덕망 있는 승려들로 지역 승려들을 지도하게 하고 경전 연구, 암송, 참선 수행에 힘쓰게 했다. 이러한 조치는 불교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교리에 능하고 신앙심이 깊은 고승들의 수가 늘어나고 교학 연구도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조정은 불교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허락 없이 사적으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손끝이나 이마를 불로 지지면서 기도하는 등의 행위를 금지했다.

요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불교 종파는 화엄종(華嚴宗)이었다. 요의 서남부 국경에 위치한 산서 오대산(五台山)은 예전부터 화엄종의 중심지로 유명했으며 요대에는 국가 전체의 불교 중심지로 군림했다. 또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로 유명한 화엄 사상이 다민족 · 다문화 국가인 요의 성격에 잘 맞았던 것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민중들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는 정토종(淨土宗), 미륵불(彌勒佛)을 믿는 미륵 신앙을 가장 많이 믿었다. 그밖에도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밀교(密敎), 선종(禪宗)이 존재했으며 아미타불과 미륵불 외에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약사여래(藥師如來), 관음보살(觀音菩薩)도 인기가 좋았다.[87] 그리고 성종의 이름이 문수보살의 이름을 따온 문수노이고 상술한 오대산이 문수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문수보살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한다. 요는 선종 중심이었던 송과는 정반대로 당대 불교의 계승자로서 교종 중심적이었으며 선종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또한 요의 불교는 동시기 고려와 마찬가지로 귀족적인 성향을 띠었다.

민간에서는 고려에서도 성행한 읍사(邑社)가 나타났다. 여러 지역에서 승려와 불교 신자들이 읍사를 조직해 각종 불사를 벌이고 사찰 건설, 중창, 불상 조영에 참여했으며 신자들은 이러한 활동에 금전이나 물자, 노동력을 제공했다. 다만, 모든 읍사가 이 모든 활동을 진행하는 것은 아니어서 불상 조영에 치중하는 읍사, 사찰에 식량을 공급하는 읍사, 사찰 수리 및 불상 조영을 하는 읍사 등, 한 두 가지 목적만 정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읍사는 빈민 구제나 구휼과 같은 자선 활동도 벌였으며 읍사는 내부적으로 읍장, 읍정, 읍록 등의 직책을 두고 각종 업무를 맡겼다. 요대에 가장 성행한 읍사는 1천 명으로 구성된 '천인읍사(千人邑社)'이며 사찰에서 나서서 읍사를 조직하고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행사에 읍사를 참여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읍사의 활동과 지원으로 불사가 더욱 성행하게 되고 신자들의 대중적 지지를 통해 불교 신앙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사회적으로 불교계는 빈민 구제와 구휼, 기근과 홍수 같은 재해에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한 원조 같은 자선 사업과 불교 교리와 문자,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 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며 경제 항목에 상술했듯이 동 시기 유럽의 수도원들처럼 농경에 힘쓰고 지역 주민들에게 농업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요대의 유명한 승려로는 화엄 사상을 토대로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주장한 선연(鮮演), 인도 출신으로 국사가 된 자현, 대각국사 의천과 시를 주고 받은 지길 등이 있다.[88] 이러한 유명 사찰의 승려들은 황제와 시를 주고 받으며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다. 요 후기에는 이전보다 더 거대한 사찰과 불상의 건립, 대장경 간행이 이루어지고 유명 승려들이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불교가 발전했던 만큼 요는 수많은 탑을 세웠다. 특히 백탑(하얀 탑)을 많이 지었으며 현재까지도 14개이 탑들이 남아 있다. 요의 불탑 건축 문화는 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훗날 금나라의 불교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의 광우사 백탑[89] 역시 금나라 세종 때 지어진 요나라 양식의 백탑이라는 주장이 있다.

황실의 국찰인 산시성의 화엄사는 금나라 때 다시 중건하긴 했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며 고려도 대장경을 만들 때 요나라 불경을 참조했다.[90] 지금까지 남아있는 요나라 불교 관련 유물, 유적들을 보면 그 규모와 화려함에 거란을 단순히 야만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

요나라 쇠퇴의 원인으로는 권신의 전횡으로 인한 국정의 혼란이 거론되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 불교에 심취한 요나라 황실이 지나치게 많은 액수를 절에 시주했고 불교 관련 잦은 토목 공사가 끊이지 않아 재정 악화가 가속화한 점도 꼽힌다. 요나라 황실은 중, 후반기로 들어갈수록 불심이 아주 깊어졌는데 절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시주는 기본이었고 대규모 불상과 절을 건설하느라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요사에는 도종 때 하루에 3000명이 출가한 기록이 있으며 36만 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다고 적혀 있다. 덕분에 요나라는 화려한 불교 문화 유산을 남길 수 있었지만, 동시에 거란 고유의 샤머니즘 신앙이 쇠퇴하고 상무 정신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요 조정에서는 불교계의 구휼과 자선 사업에 많은 기대를 했는데, 요를 방문한 송의 사신,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당수 사찰이 고리대로 인민을 착취했다고 한다. 상당수 사찰이 고리대로 돈을 불리고 있었다고. 후대에는 비구, 비구니로 출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계(受戒) 내리는 것을 제한했을 정도였다.

후대에 세조 쿠빌라이 칸은 송, 요, 금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요는 불교 때문에 멸망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91], 중국에서 이러한 평가를 오래도록 정설로 인식할 만큼 요대의 불교는 그 명암이 뚜렷했다.

10. 주요 인물

요 조정에서 활동한 한인 관료로는 요 태조의 참모였던 강묵기(康默記), 조사온(趙思溫),[92] 유성(劉晟), 요의 이한(二韓)이라 불린 한연휘(韓延徽)와 한지고(韓知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잡혀온 한인 지식인과 억류당한 외교관들이었다. 그리고 항복한 한인 관료 출신으로는 요군에게 공성술을 가르친 노문진(盧文進), 전연의 맹을 중재한 왕계충(王繼忠), 검소한 것으로 칭송받은 장검(張儉) 등이 있다. 또한 이들의 자손들도 대를 이어 관료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한지고의 손자인 한덕양이다.

한덕양 예지황후와 부부관계였으며 성종 초기에 요의 국정을 총괄한 실력자로 군림했다. 예지황후는 한덕양(韓德讓)을 총애하여 국성을 하사하고 야율융운(耶律隆運)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은 물론, 황제와 태후의 직할령인 오르두를 만들 권리도 주었다. 심지어 황제인 성종까지도 그에게 아버지를 대하는 예법을 취할 정도로 한덕양의 권세는 무지막지했다. 황제가 태후의 재혼남에게 아버지를 대하는 예법을 취하는 것이 어이 없이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거란의 전통과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덕양은 살아생전엔 문충왕(文忠王)이란 관작을 받고 죽어서는 장례 규모가 예지황후와 버금갈 정도로 컸으며, 후대에 죄에 연루되어 관작이 깎이거나 부관참시당하는 일도 없어서 청대의 도르곤보다 더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다. 한덕양은 내정면에서는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는 평을 받을 만큼 일처리가 뛰어났으며, 의외로 군사적인 재능도 있어서 송의 북벌군이 남경을 포위하고 공성을 시도하는 것을 잘 막아낸 바 있다. 그러나 한덕양은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 인민들이 그를 싫어했고,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송이 2차 북벌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한덕양은 파벌을 조성해 권력 기반을 강화했는데, 이로 인해 붕당의 폐단이 발생해서 요 조정은 한덕양이 은퇴하고 나서도 한덕양파와 왕계충을 중심으로 하는 반 한덕양파 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밖에도 한덕추(韓德樞) · 실방(室昉) · 유신(劉伸) · 양길(楊佶) · 마인망(馬人望) · 대공정(大公鼎) 등의 한인 · 발해인 관료들은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가르치고 세금을 낮춰 인민들의 부담을 낮춰주었으며, 폐단을 없애고 분쟁을 조정해 명성이 높았다.

여기서 실방은 태종대에 과거에 급제해 태종, 세종, 목종, 경종, 성종의 5대를 섬긴 요의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인망은 실무에 밝아 인민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공정하게 조세를 걷고 각종 공사와 민원을 빠르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말년에 금군의 공세를 막고 조정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바람에 세간의 조롱을 받는 신세가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한덕추, 대공정 등도 명신으로 활약했다.

강공필 · 시립애 · 양박 · 우중문 · 유언종 ·조의용 · 좌기궁 · 한기선 등은 요의 관료로서 금에 항복한 자들이다.

우중문은 문예로 유명하며 요 말에 과거에 급제한 양박(陽朴)은 발해 대족 출신으로서 교서랑까지 진급한 관료이다. 요군이 요동에서 대패를 거듭하여 금군이 밀고 들어오자, 양박은 금에 항복하여 금국에 종사했다. 능력이 출중하여 금 태조에게 여러 가지 헌책을 올리고 중용받았으며 요사보다는 금사에 더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다.

한기선은 한지고의 후손으로 금에 항복한 인사이다. 그 능력이 뛰어나고 강직하여 유능한 관료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수십 년 동안 고위 관료로 종사했다. 재밌는 점은 선조인 한지고는 요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후손인 한기선은 금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다. 양자 모두 양대 정복 왕조에서 중용받은 한인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거란인 관료 중에는 야율달렬(耶律撻烈), 야율말지(耶律抹只), 야율사진(耶律斜軫), 야율학고(耶律學古), 야율해리(耶律海里), 야율휴가(耶律休哥), 소달람(蕭撻覽),[93] 소배압(蕭排押), 소유자(蕭柳者), 소한가노(蕭韓家奴), 소효목(蕭孝穆) 등이 활약했다. 이들은 모두 인민을 잘 다스리고 치국에 공헌해 명신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며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자들도 있다.

야율휴가는 고량하에서 송의 북벌군을 대파한 명장으로 남경유수(南京留守)와 남면행영총관(南面行營摠管)을 겸임하면서 민 · 군정 양면에서 치적을 남겼다. 군정면에서는 수비군의 복무를 균등하게 배분해 교대로 휴식을 주고, 내정면에서는 농상을 장려하고 군수품을 잘 관리하는 등, 국경 지역을 잘 다스렸다. 야율말지는 개원군 절도사((開遠軍 節度使) 재임 중에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었고, 소효목은 북원 추밀사(北院 樞密使)로 있으면서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요역을 균등하게 할 것을 진언해 조세를 이전보다 더 공평하게 조정했다.

소효목은 송과의 평화 유지를 유지하고 전연의 맹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 송 · 요 양국 사이에서 벌어질 뻔한 전쟁을 막아냈다. 특히 소효목은 거란인이고 대연림(大延琳)이 세운 흥료국(興遼國)을 무너뜨린 장군 출신인데도 같은 거란계 강경파와 군부의 주전론에 반대했으니 식견이 높은 인물로 평할 수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연운 16주의 백성들이 전쟁에 대한 걱정 없이 살고, 남북이 서로 왕래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소한가노와 야율소 등은 동북과 서북 국경 지역을 안정시킬 방안을 제안하고 요역과 세금을 경감해 줄 것을 건의했다.

야율달렬은 남원대왕[94] 재직 중에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고 농사를 권장해 유목민들을 교화했으며, 인구를 늘리고 생계를 개선해서 인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야율해리는 주민 생계를 개선하고 지역을 관대하게 통치해 그가 재임한 뒤부터 인구가 늘어나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소달람도 서북로 초토사를 역임하면서 국경을 안정화하고 지역을 잘 다스려 이름이 높았으며 1004년 침공 때는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서 황제의 기마 군단을 개봉이 보이는 전주까지 이끌었던 명장이었다. 그런 그가 정찰 중에 쇠뇌에 맞아 죽었을 때는 예지황후가 크게 통곡하고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5일이나 조회를 파했으니[95] 소달람의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문예로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는 요사 탁행전에 기록된 소차랄, 야율관노, 소포리불과 요사 문학전에 이름을 올린 왕정, 야율맹간 등이 있다. 여기서 왕정은 도종대에 활동한 사람으로서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고 시문과 정무에 능해 도종대의 제도와 법령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야율을신이 총애하는 애첩과 인척 관계가 있고 야율을신이 죽인 소황후의 비행을 기록한 금초록을 작성해서 야율을신의 당파로 간주받았고 후에 을신이 주살당할 때에 좌천당했다.

야율맹간은 총명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야율을신의 전횡을 여러 번 간하다가 유배당했다. 유배 중에 태자 야율준이 주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해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에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고 천조제 초기에 육원부 태보와 고주 관찰사를 지냈다. 육원부 태보 시절에 법령에 구애받지 않고 임의로 일을 처리해 사람들이 비웃었으나, 맹간은 상고 시대에는 문서로 된 법령이 없었으나, 태평성대였고 법령을 이유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낫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11. 참고 문헌

1번 ~ 10번 항목까지의 참고 문헌

12. 한국사에서의 위치

거란과 그들이 세운 요 왕조는 고대 예맥계 국가들과 고려와의 충돌이 잦았다. 초기의 거란인들은 그 세력이 약해 일부 부족이 고구려에 종속한 적도 있고, 거란의 중심 세력인 대하씨 연맹도 고구려와는 별다른 갈등을 빚지 않았다. 그러다, 고 - 당 전쟁을 계기로 대하씨 연맹이 당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고구려와 충돌했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영주 도독 조문홰(趙文翽)가 폭정을 일삼자, 대하씨 연맹은 봉기했다. 무주와 거란 연맹이 싸우는 틈을 타서 당의 통제에 놓여 있던 영주의 고구려 유민들은 대조영(大祚榮)과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중심으로 결집해 요동으로 도주, 발해를 세웠다.

거란인들은 고구려를 공격한 적도 있지만, 세간의 평이나 나무위키의 여러 항목의 내용과 달리, 거란인들은 요련 연맹 시기까지도 발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발해가 크게 팽창하던 선왕(宣王) 시기에 이르러 발해와 거란 연맹 간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기 시작하여 요 태조의 치세에는 태조 본인이 발해와는 대대로 원수였다고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다.

발해 왕 대인선(大諲譔)과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시대에 발해 - 요 양국은 정말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고 서로의 영토를 침탈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요 왕조의 강력한 공세로 요양(遼陽)이 함락당하자, 발해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요양이 무너져 발해의 방어선에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요양을 취한 요군은 이를 이용해 발해에 심한 방어 부담을 가중하고 다방면으로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26년, 요군은 부여부(扶餘府)를 급습해 빠르게 발해의 방어 병력을 무력화하고 상경성을 포위, 3일 만에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요 왕조는 지나치게 넓어진 국토, 요 태조의 급사, 황위 계승 분쟁, 발해 지방군의 반격, 부흥 세력의 강력한 저항 등 문제로 인해 발해 고토 지역의 지배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요 왕조는 발해 고토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서 동란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간접 지배하는 형식을 취했음에도 발해유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지 못했고 유민들이 결집하여 부흥 운동을 전개할 시간을 허용하게 되었다.

발해의 후속 국가인 후발해(後渤海), 정안국(定安國), 올야국(兀惹國) 등의 발해부흥운동 세력들이 발해 고토 지역을 중심으로 할거하고 발해인 장군 연파(燕頗), 고욕(古欲)이 반란을 일으켜 부여부를 공격하고 상경 용천부에서 저항했다. 발해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들은 숙여진을 비롯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력이 발해 고토 지역으로 흩어져 점차적으로 요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 때문에 요는 발해 고토 지역의 발해유민 세력들을 제압하는데 애를 먹었고, 성종대에 와서야 겨우 발해 부흥 세력들을 거의 제압하고 지속적으로 국경을 침탈하던 생여진 부족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12.1. 고려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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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의 관계는 건국 초에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궁예(弓裔)의 태봉(泰封) 정권 시기에는 요 왕조에 보검을 선물하고 2차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한 일이 있고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자, 요 태조는 사절단을 보내 말과 낙타, 양탄자 등을 선물했다. 925년, 고려는 이에 대한 답방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나 발해는 형제국이라는 고려의 인식과는 별개로, 후백제(後百濟)와의 전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요양을 장악하고 발해에 공세를 취하는 요 왕조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양면 전선을 자초하는 자살 행위였기 때문에 고려는 현실적인 방안을 취했다. 심지어는 발해가 멸망한 직후에도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925 ~ 27년 동안 총 4회에 걸쳐 사절단을 보냈다. 또한 요나라도 의외로 이 시기에는 중원 국가들보다도 고려를 꽤 대우해준 편이었다. 중원 국가들은 주로 신라와 관계를 맺었던 전통이 있었기에 신흥국인 고려의 위상을 가급적 깎아내리려 하면서, 고려를 신라의 신하국에 불과하니 급이 안 맞는다며 가끔 국서 접수를 거절하거나 사신을 박대하곤 했다. 마찬가지 입장이었던 후백제는 가급적 중원 국가들의 비위를 맞춰주려 노력한 편이었으나, 별로 중원 국가들에게 전혀 아쉬울 것 없었던 고려는 이런 측면에서 애써가면서까지 자세를 낮출 필요가 없었고, 때문에 931년 경순왕의 칭신 이전에는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고려와 중원 국가들의 관계는 어느 정도 냉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나라는 이런 중원의 외교 전통은 아오안이었던지라 딱히 고려와 이런 신경전을 벌이는 일 없이 쿨하고 흔쾌하게 고려의 존재를 백퍼센트 인정하였다.

다만, 발해가 멸망한 뒤부터 고려 태조는 요 왕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점점 적대하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나와 결혼했다.", "발해는 친척의 나라다."는 표현을 후진의 외교관에게 말할 정도로 발해에 대해 우호적인 외교적 수사를 표현했고 발해유민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기류 변화를 느꼈는지, 요 왕조는 927년에 공산(空山) 전투에서 고려가 대패하자, 즉각 후백제에 사절단을 파견했다.[96]

그리고 고려 - 요 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요 왕조에서 보내온 외교관들을 섬에 유배 보내고 선물로 보내온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 놓고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이다. 920년대에는 통일 전쟁의 부담 때문에 요 왕조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했지만, 만부교 사건이 있던 942년에는 이미 통일을 이뤄 부담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고려 태조는 대단히 강경하고 어찌 보면 외교적으로는 심각하게 무례한 일을 벌였다.[97] 이때부터 고려와 요 왕조 간의 관계는 파탄이 나버렸고 3차에 걸친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첫 번째 침공은 원정군 총수인 소손녕 서희와 교섭을 진행해 고려가 양국 사이에 놓인 강동6주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요조가 인정하는 대신, 고려는 사대 관계를 맺는다는 조건으로 양국은 화평을 맺었다.

두번째는 요군이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을 분쇄하고 수도 개경까지 함락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흥화진(興化鎭)의 양규(楊規)에게 전쟁 기간 내내 괴롭힘을 당하고, 전쟁 목표인 고려의 항복, 강동 6주의 반환에 대해서는 달성하지 못해 고려 현종이 입조한다는 조건으로 철군하여 실익이 없었다.

마지막은 강감찬에게 그야말로 참패하고 만다. 여요전쟁 이후, 요는 고려와 화친하고 상호 적대적이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일반적인 사대 관계로 전환했다. 덕분에 금 왕조가 탄생하기 전까지 약 100여 년 동안, 동북아시아는 송 - 요 - 고려 - 서하의 4개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벌어졌다.

1차 여요 전쟁 직후에는 고려 조정에서 거란어 학습을 지시하고 유학생들을 요에 파견하기도 했다. 종교면에서는 교류가 더욱 활발하여 불교 경전이나 이론 등의 유입이 잦았고 이때 수입한 요 왕조의 불경들은 훗날 팔만대장경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98] 또한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은 송 · 요 양국에서도 인정받는 유명 인사였다.

요의 대군이 출하점(出河店)에서 대패하고, 1115년에 금 왕조가 개창해 요의 쇠퇴가 가시화되자, 고려는 1117년에 압록강변의 보주를 급습해 장악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금 왕조의 수뇌부들이 불편해 하긴 했으나, 요와의 전쟁이 급하다는 이유로 고려와의 충돌을 피했다. 대요수국(후요)의 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고려로 침공해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농성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

전반적으로 고려 - 요 왕조 간의 관계를 살펴 보자면, 양국 간의 관계가 극단을 달렸던 여 · 요 전쟁 이후부터 고려와 요 왕조는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되어 서로 정기적으로 사신단을 파견하고 고려가 황제, 황후, 황태후의 생일 때마다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요 왕조와의 교류를 더욱 확대했으며 양국이 상호 간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의례도 체계화되었다. 이렇게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한 횟수는 200회가 넘고, 고려는 요 왕조와의 교류가 송 왕조보다 더 빈번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2회에 걸쳐 요군의 공세를 격퇴한 현종은 3차 전쟁 이후에 요 성종에게 신칭(臣稱)하고 왕자와 자신의 책봉을 청해 요 왕조로부터 정식으로 책봉받았다. 이후 대요 사절단에 보내는 고려의 국서에는 국왕의 성씨와 이름을 그대로 서술했으며 연호도 요 왕조의 것을 사용하고, 국서에 고려 국왕이 스스로를 말할 때는 신(臣)이라 칭했다. 송 - 요 - 고려, 3국이 평화를 유지할 때는 고려가 요 왕조를 배려해 송조에 보내는 국서에 송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년도와 날짜만 써서 송조의 관료들이 격분해 고려 사절단이 곤욕에 빠진 적도 있을 정도였다.

2차 여 · 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고려는 요 왕조에 여러 차례 국서를 전달하며 저자세를 보였으나, 이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였을 뿐, 내부적으로는 병력을 증강하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전쟁에서 승전한 뒤에는 퇴각하는 성종에게 사신을 보내 회군에 감사를 표명하고 요를 상국으로 대하며 예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성종의 입조 요구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3차 여 · 요 전쟁에서 승전했을 때에는 이전처럼 회군에 감사를 표명하지 않고, 요 왕조가 먼저 강경한 태도를 바꾸어 화친을 칭할 때까지 기다리며 여유를 부리는 등, 고자세를 취하며 요조에서 먼저 화친을 칭하게 만들었다.

이에 양국 간의 관계 회복 필요성을 절감한 요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오자, 고려는 그제서야 사신을 보내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의사를 밝히고 상호 간의 평화 체제를 구축했다. 이로써 고려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숙원이던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거의 완전하게 확보했고, 요 왕조로서는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거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서를 살펴 보면, 고려가 요 왕조에 대해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사실이 드러나기에 고려가 사대 관계를 맺은 것이 이상해 보일 수는 있으나, 고려는 승전했음에도 2차 여 · 요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양규와 김숙흥(金叔興)이 후방을 헤집고 서경이 굳건히 버텼지만, 수도 개경과 경기도 일대는 초토화되고 국왕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반대로 패전국인 요 왕조는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국으로 군림했다. 그 송 왕조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군사 강국인 요 왕조는 건재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 왕조와의 장기적인 적대 관계는 고려에게 좋지 못했고, 조공 - 책봉 관계를 수립하고 강동 6주의 영유권과 장기적인 평화를 확보하는 게 국익에 부합했다. 그래서 고려는 실리를 따져 요 왕조와 사대 관계를 수립하는 대가로 평화와 강동 6주를 보장받았다.

이후, 고려는 상호 공존과 인정에 기반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장기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했으며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거의 완전하게 인정받았다. 요 왕조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고, 고려는 송 · 요 양대 세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 실리를 추구했다.

요 왕조의 책봉을 받고 정상적인 사대 관계를 수립한 상황에서, 고려 국왕은 요조의 사신이 왔을 때에 북면하지 않고 서면하는 예법을 취했으며 송 왕조로부터는 상당한 수준의 경제 이익을 얻어내고 문화적 혜택을 받았다. 이는 고려가 송 · 요와 같은 대국들과 사대 관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국익을 추구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요 왕조가 동 여진을 치기 위해 고려에 통행권을 요청했을 때는 통행권 허용을 거부하거나, 요 왕조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 부족장의 직첩과 관인을 임의로 회수하고 고려의 관직을 내린 사례, 국경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자는 요구를 여러 차례 거부하고 민간 무역을 통제한 사례들을 보면, 고려의 외교 노선이 장기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고려는 철저하게 국익과 현실에 부합하는 외교 정책을 구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상호 대등한 관계도 굴종하는 속국 관계도 아닌, 대국을 상국으로 인정하고 받들어 주면서 실리를 추구하고 때로는 상국을 상대로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등, 상호 공존하는 정상적인 사대 - 조공 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 있어 고려의 사대 관계는 외재적인 면이 강하고, 예와 의로서 상국을 존중하는 내재적인 면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는 명 · 청이라는 강력한 통일 왕조를 상대로 해야 했던 조선과는 또 다른 형식의 사대였다.

13. 요나라가 등장하는 대중매체

사실 거란족 자체는 사극에서 주로 간접적으로 언급되거나 주인공 세력의 적으로 나오는 편( 광개토태왕, 대조영)이나 이후 요나라로 건국되어 존속했던 시점(금 멸망 이후 후예까지 거론하면)인 고려 시대를 다룬 사극이 많지 않은 편이다.[99]

2000년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이후 간혹 언급만 나오다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물론 모두 적으로 나온다.
이 대하드라마는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궁중암투가 이후 주를 이루게 되는데 역사 왜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7화부터 28화까지의 내용을 보면 거란이 나오는 비중 자체가 적거나 아예 없으며, 현종이 나중에 뜬금없이 말을 타고 폭주하다 사고를 당하고 원정황후가 질투심에 미쳐서 악녀가 되어버리고 실존하지도 않은 인물이었던 박진이 김훈 최질을 배후에서 조종해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고 세상을 떠나는 등 고려 거란 전쟁이 아니라 고려 궐안 전쟁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고 있다. 제3차 여요전쟁 부분은 천추태후보다 많이 보여주긴 했지만 생략된 전투도 많이 있었고 귀주 대첩의 마무리가 아쉽게 되었다.

14. 역대 황제 목록


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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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 대수 묘호 시호 (거란식/중국식) 연호 재위 기간
1대 태조(太祖)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야율억(耶律億)
신책(神冊, 916년 ~ 922년),
천찬(天贊, 922년 ~ 926년),
천현(天顯, 926년)
916년 ~ 926년
2대 태종(太宗) 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야율요골(耶律堯骨)/
야율덕광(耶律德光)
천현(天顯, 927년 ~ 938년),
회동(天顯, 927년 ~ 938년),
대동(大同, 947년)
926년 ~ 947년
3대 세종(世宗) 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야율올욕(耶律兀欲)/
야율원(耶律阮)
천록(天祿, 947년 ~ 951년) 947년 ~
951년
임시 - - 야율찰할(耶律察割) - 951년
4대 목종(穆宗) 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야율술률(耶律述律)/
야율경(耶律璟)
응력(應曆, 951년 ~ 969년) 951년 ~
969년
5대 경종(景宗) 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야율명의(耶律明扆)/
야율현(耶律賢)
보녕(保寧, 969년 ~ 979년),
건형(乾亨, 979년 ~ 982년)
969년 ~ 982년
6대 성종(聖宗) 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
야율융서(耶律隆緖)
건형(乾亨, 982년),
통화(統和, 983년 ~ 1012년),
개태(開泰, 1012년 ~ 1021년),
태평(太平, 1021년 ~ 1031년)
982년 ~ 1031년
7대 흥종(興宗) 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야율지골(耶律只骨)/
야율종진(耶律宗眞)
경복(景福, 1031년 ~ 1032년),
중희(重熙, 1032년 ~ 1054년)
1031년 ~ 1055년
8대 도종(道宗) 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야율열린(耶律查剌)/
야율홍기(耶律洪基)
청녕(清寧, 1055년 ~ 1064년),
함옹(咸雍, 1065년 ~ 1074년),
태강(太康, 1075년 ~ 1084년),[103]
대안(大安, 1085년 ~ 1094년),
수창(壽昌, 1095년 ~ 1101년)[104]
1055년 ~ 1101년
9대 - 천조황제
(天祚皇帝)
야율아과(耶律阿果)/
야율연희(耶律延禧)
건통(乾統, 1101년 ~ 1110년),
천경(天慶, 1111년
~ 1120년),
보대(保大, 1121년 ~ 1125년)
1101년 ~ 1125년

15. 추존 황제

<rowcolor=#ece5b6> 묘호 시호 성명 재위 기간 능호 비고
숙조(肅祖) 소열황제(昭烈皇帝) 야율누리사(耶律耨里思) - - 천조제 추숭, 천조제의 12대조부
의조(懿祖) 장경황제(莊敬皇帝)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 - - 천조제 추숭, 천조제의 11대조부
현조(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 - 흥종 추숭, 흥종의 태조부
덕조(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살랄적(耶律撒剌的) - - 흥종 추숭, 흥종의 열조부
의종(義宗) 문헌흠의황제(文獻欽義皇帝) 야율배(耶律倍) - 현릉(顯陵) 세종 추숭, 태조의 장자
- 장숙황제(章肅皇帝) 야율이호(耶律李胡) - - 목종 추숭, 태조의 3자
순종(順宗) 대효순성황제(大孝順聖皇帝) 야율준(耶律濬) - - 천조제 추숭, 천조제의 부친
- 사원황제(嗣元皇帝) 야율씨(耶律氏) - - 덕종 추숭, 덕종의 조부

16. 요나라 계열 국가

16.1. 괴뢰국

16.1.1. 동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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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잔존국

16.2.1. 북요(北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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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 서요(西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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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부흥 운동 국가

16.3.1. 동요(東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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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 후요(後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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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란어 발음은 모스 키타이 구르(Mos Kitai gur)로 재구되기도 한다. 거란국을 거란 문자 대자로 표기한 예시 [2] 중국에서 작성한 지도이기 때문에 간체자인 辽로 되어 있다. [3] 907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을 통일했으며, 칭제한 것은 916년부터이다. [4] 1120년 금나라의 상경 함락 후, 경을 임시 수도로 삼았던 천조제는 1121년 중경마저 함락되자 응주 ( 불궁사가 있는 산서성 )로 도주한다. 이에 야율대석이 천조제의 숙부 야율순을 옹립하여 연운 16주의 남경 석진부 (베이징)에서 북요 정권을 수립한다. 하지만 1123년 야율대석이 천조제에 망명해버리자 그해 북요 정권은 북송과 금나라의 협공 끝에 후자에게 멸망했다. 응주의 천조제 정권 역시 1124년 야율대석이 이탈해 서요를 세운 후 1125년 금나라에 멸망한다 [5] 발음은 홍디(hong-di), 그 외 가한(可汗)을 뜻하는 하안(ha-an)이라는 고유 군호도 있었다. 이하 주석의 '거란 문자의 발음' 출처 참고 [6] 거란 발음으로는 '예룰드'에 가깝다 [7] 927년부터 발행한 천현통보(天顯通寶)부터 1120년까지 발행한 천경원보(天慶元寶)까지. [8] 영토만 놓고 보면 송보다 훨씬 방대해 보이지만 대부분이 인구가 희박한 유목 지대인데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간접 지배인지라 인구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 요와 송의 인구 차이는 10배 이상 되었다. [9] 거란 문자 소자 표기 [10] Daniel Kane. (2009). "The Khitan Language and Script." Handbook of Oriental Studies/Handbuch Der Orientalistik. vol. 19. [11] 전한과 후한을 단일 왕조로 보고 중간의 신나라까지 합치면 한나라가 425년으로 단연 1위이다. [12]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북송과 남송을 합쳐서 보면 319년으로 2위이다. [13] 아골타가 말한 요는 여기서 거란을 의미한다. 아골타는 이 말을 남길 때에 요와 거란이란 단어를 동일시했다. 아골타가 착각을 한 것이 아니다. [14] 요하나 요산, 요나라 모두 멀 요/료(遼) 글자를 쓰는데, 전한 시절 중국에는 탁요(度遼)장군이라는 직함이 있었고 북방민족의 토벌, 또는 방비를 책임지는 작위였다. 글자의 훈이 단순 '땅이름 료'가 아니라 '멀다'이므로 애초에 요하(요수)/요산/요동/요녕 모두 이런 전차로 고유명사化 되었을 수도 있다. 앞서 '요'의 유래가 불분명하다고 말은 하지만, 거란인 입장에서는 그저 춘추전국시대의 한 글자짜리 중국식 국호처럼 자신들이 발원한 땅의 중국식 이름(國)이 '료/요'라고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15] 흔히 키탄이 거란의 원음이고 키타이는 중앙아시아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이신기오로 울히춘(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ᡠᠯᡥᡳᠴᡠᠨ, 愛新覺羅 烏拉熙春)의 연구에 따르면 거란은 키타이로 재구된다. 논문 참조 또한 거란 문자로 키드-운-이(Qid-un-i)로 읽히기도 한다. 거란 문자의 발음 [16] 아관(牙官. 衙官)이라고도 부른다. 요련 연맹 시기에는 이리근(夷離菫)이라 불렀다. [17]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대항한 사람이나 역적의 이름을 개명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진충과 손만영의 이름을 개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성씨도 개명시키던 측천무후가 이진충의 성씨는 갈아치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하의 이원호를 비롯해 국성을 받은 인사들은 반란을 일으키면 바로 국성을 회수당하고 예전의 성씨를 붙여줬는데, 이진충의 조부인 대하굴가(大賀窟哥)가 당에 귀순하면서 받은 당의 국성인 이씨(李氏) 성은 갈아치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입장에선 전조(前朝)인 당의 국성까지 갈아치울 이유는 없었던 듯하다. 무주군은 거란군의 기만전술에 휘말려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 몽땅 포로로 잡혔고, 이진충이 이들로 하여금 거짓 첩문을 쓰게 함으로써 연비석과 종회창 모두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한다. [18] 주 - 거란 전쟁의 추이를 살펴보던 돌궐 제2제국의 묵철가한은 거란에게 참패를 거듭하던 주와 교섭하여 하서 지역의 돌궐인들을 돌려받는다는 조건으로 주에 원병을 제공했다. [19] 장수규가 이간계로 그를 제거한다. [20] 키르기즈가 위구르를 멸망시키고 무주공산이 된 몽골 초원을 차지하지 않은 것은 위구르 제국을 무너뜨린 전염병과 기온 하강에 따른 초원의 황폐화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21] 카마그 몽골과 타타르, 나이만, 케레이트, 메르키트를 아우르는 몽골 부족들을 이르는 말 [22] 아보기가 황태자 야율배를 동란국왕으로 삼은 것은 일종의 거란 – 발해 동군 연합 정권을 구성하려 한 시도였다고 파악하는 학설도 있다. [23] 원래는 일석이조였다. 황위 계승 투쟁에서 패배해 후당으로 망명한 야율배였지만, 그래도 조국에 대한 애착은 남아 있어 동생인 요 태종과 내응하여 요군의 침공을 도왔다. 다시 조국의 품으로 귀환하면 되는 찰나에 이종가가 같이 현무루(玄武樓)로 올라가 자살하자는 것을 거부했다가 주살당했다. [24]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018년 5월 출간/ 97~98쪽. [25] 원문: 我不知中國之人難制如此! 한글 음 : 아부지 중국지인 난제여차! 출처 : 자치통감 286권. 후한기 1. 실제로 학사 장려(張呂)가 태종이 지적한 자신의 잘못들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헌책을 올렸으나, 태종은 듣지 않았다. [26] 시일이 흐른 뒤, 조모를 유폐한 것에 문제 의식을 느낀 관료들이 간언하자, 세종은 순흠황후를 풀어준다. [27] 양계업의 재능을 아까워한 성종과 요의 수뇌부들이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양계업은 이를 거부하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다 죽었다. [28] 이렇게 평화 협정을 맺긴 했지만, 송은 워낙 요를 얄미워해서 북송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수호전 등에는 원래 없던 요나라와 맞서는 부분이 추가되기도 했다. [29] 파일:attachment/요나라/liaodynasty.jpg [30] 케르만(키르만이라고도 하며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는 치얼만) 왕조라고 부르며, 후서요(後西遼)라고도 표기한다. [31] 출처 : 움직이는 국가, 거란 [32] 거란인의 역사는 결국 중국의 역사가 되기도 하고 몽골이 다룰 수 있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다만 현대 중국의 행태와 역사 관념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현시점 자국 영토에 존재했던 민족과 국가는 모든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무조건 중화의 역사로 간주하며 우기는 것에서 거의 모든 역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33] 농민과 유목민들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는 분쟁이 농지와 목초지의 경계선 문제와 토지 침탈 문제, 그리고 가축의 농지 훼손 문제인데 요의 황제들은 농업이 주는 이익과 농민들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분쟁에서 주로 농민의 편을 들어주었다. [34] 요의 초원 지역은 케룰렌 강과 시라무렌 강, 요하, 아르군 강이 흘러서 수초가 풍부했기 때문에 목축업을 하기 적합했고, 요의 중심부인 상경과 그 인근 지역도 토지가 비옥해 농업 뿐만 아니라 목축업을 하기에도 알맞았다. [35] 세금으로 걷은 양 중에 일부는 봉양(俸羊)이라고 해서 관료들에게 급료로 주기도 했다. 양과 말 다음으로 많이 키우는 가축은 소와 낙타였다. 그리고 유목민들의 영향을 받아서 요의 한인들 중에도 목축업을 하는 이들이 많았고, 이들은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로 양과 말의 보유량에 따라 빈부를 정했다. [36] 다만, 이 기록은 1086년(도종 대안 2년)의 것인데, 1083년(도종 태강 8년)에 가축의 태반이 상한 상태였기 때문에 100만은 과장이고 수십만 두를 보유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37] 야율대석의 군목 '징발'은 의도치 않게 금을 엿먹이기도 했다. 파죽지세로 요를 멸망시킨 금군은 요의 군목을 뒤져 군마 손실분을 벌충하려 했는데, 야율대석이 이미 다 털어가 버렸으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나중에 금군이 개봉을 취하고 하남과 회수 일대를 휘저을 때는 군마 손실이 누적되고 전투력이 떨어져 곤란을 겪었으니 야율대석의 '큰 그림'이 제대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8] 채집의 경우, 삼림 지대의 민족들은 호박과 송진, 과일, 석청, 밀랍 같은 것들을 채집하고 해안 지역의 민족들은 진주, 호수와 하천, 강에 사는 민족들은 담수 진주와 사금을 채취했다. [39] 몽골 오고부 지역은 큰 물고기가 잡혀서 주민들은 이것을 양식으로 삼았다. [40] 거란인들은 뿔피리로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불러들이는 식으로 사슴을 사냥하기도 했다. [41] 송의 사신 소송은 겨울만 되면 요의 땅은 사냥하는 곳이 된다는 기록을 남긴 적 있다. [42] 사족으로 북쪽 추운 지방에 사는 민족들은 눈이 너무 많이 오면 사냥하다 몸이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삼림 지대에서 말 대신 스키를 타고 다녔다. [43] 요 성종과 소태후가 직접 고기 잡이를 하는 일도 있었고, 요의 황제가 철갑상어를 낚는 일도 있었다. [44]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몽골의 부족들과 위구르를 정벌할 때 수천 마리의 동물을 잡아 군사들의 식량을 충당한 적이 있고 요 태종도 순행하면서 경기병 수천 명과 사냥을 한 일이 있다. [45] 이곳에 사는 한인의 대부분은 연운 16주와 하북 출신이었다. [46] 남시와 북시 가운데에는 간루(看樓)가 있다. 간루는 성문루 내지 망루로 보인다. [47] 태종대에 석경당이 바친 동전을 쓰거나 유인공이 북경의 대안산에 숨겨둔 동전을 찾아낸 적도 있고, 전연의 맹 이후에는 국경 무역을 통해 송의 동전을 꾸준하게 수입했다. [48] 요에 사신으로 간 소철은 도로 환경이 나빠서 하루에 30km 이상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마차 보다는 걷는 일이 많아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길이 험해 작은 수레들은 쉽게 파손되고 큰 수레들은 진창이 된 길에 빠져서 이용하기 힘들었다고 평했다. [49] 남당과의 교역 사례로는 요 태종 때 사신을 남당에 파견해 선물을 주고 3만 마리의 양과 300필의 말을 팔아 비단과 약, 차를 구매한 일이 있다. [50] 송은 요와의 국경 무역에서 거래하는 상품의 가치를 시세보다 조금 더 후하게 쳐주었다. [51] 개인이 사적으로 만든 사차(私茶)와 사적으로 유황, 염초, 명반을 판매하는 것을 통제했다. 국가가 관리하는 차와 유황, 염초, 명반은 허용했다. [52] 그것도 위야가 이미 죽어서 시집을 찾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수소문해서 구해줬다. [53] 야생마 가죽과 호피는 요에서도 진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다른 가죽을 염색해 호피로 사칭을 하는 일도 있었다. [54] 발해 멸망 이전에도 아보기는 발해와의 전쟁 중에 잡아온 포로들 중에 야금 기술을 아는 자들을 모아서 제철업에 종사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요주 장락현의 발해인 1천호가 철을 생산하고 납부한 것이다. [55] 이들은 부로 승격된 이후에도 철을 세금으로 냈는데, 요가 이런 기술에 특화된 부에는 생산물을 세금으로 걷었던 것으로 보인다. [56] 당에 비해서 개선되긴 했지만, 송의 장인들은 그 지위가 낮고 장인이란 것을 암시하는 문신까지 새기는 일도 있어 한계점이 명확했다. 사족으로 대명 안찰사를 비롯한 여러 중국 사극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장인과 목수들이 공공 사업의 입찰에 참여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이는 실제 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고증에 맞다고 할 수 있다. [57] 독자 연구 : 여러 서적과 자료에서 관영 공방의 장인들은 관노비였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성종이 중경 건설을 위해 건축, 토목공들을 모집한 일, 거란인 장인의 존재, 한인 직공들을 각 지역에 파견한 일, 상술한 갈술석렬의 면천 같은 사례가 있어서 국가에서 동원하는 장인들이 모두 노비는 아니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58] 대부분의 지역이 철산지로 유명하나, 대표적인 지역을 한 군데 지목하자면, 발해 철리부(鐵利府)에 속한 광주(廣州)는 요에 넘어가서 철리부가 철리주(鐵利州)로 개명된 뒤에도 철 생산량이 많기로 유명했다. [59] 廣濟湖, 또는 학랄박 鶴剌泊, 대염박 大鹽泊, 지금의 내몽골 달포소염지. 즉, 소금호수 [60] 송은 인종 시기에 다시 한 번 더 소금 전매를 재개하려 했지만, 여정과 장방평 등의 관료들이 전매를 실시하면 소금 값이 올라 하북 인민들의 원망을 살 뿐만 아니라 요의 소금 밀매업자들이 날뛸 것이고, 이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면 송 · 요 양국 간의 평화가 깨질 것이라 진언해서 인종은 하북로에서의 소금 전매를 포기했다. [61] 요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세운 동란국에 공물로 아마포 10만 단을 요구한 것을 발해의 직조 기술이 높았던 증거로 보기도 한다. [62] 송 진종은 건국 초에 받은 요의 직물과 성종에게 받은 직물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초기의 것은 거칠고 수수한 반면, 성종에게 받은 것은 섬세하다고 분석하고 연운 16주에 속한 유주에서 전부 생산한 것으로 판단했다. [63] 나문사직물 생산은 송대가 최고 수준이다. [64] 도종이 칙령을 내려 남경의 민간에서 사적으로 황제가 사용하는 비단을 직조하지 못하게 금지했던 것으로 보아 남경의 기술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정은 남경에서는 염 · 철세를 비단으로 대납하는 것을 허용하여 비단을 추가로 확보하기도 했다. [65] 중기가 되면 당과 오대의 영향이 감소하고 이웃한 송의 영향이 강해졌다. [66] 발해 삼채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67] 당삼채는 여러가지 색을 썼으나, 주로 황색 · 녹색 · 백색이다. [68] 초기의 계관호는 아예 가죽 부대 끈에 있는 봉제 표시까지 표현했다. [69] 위구르와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과 교류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손잡이 달린 잔은 원래 중국에서도 당대 초기까지 제작하다가 이후로 사라진 도자기이다. [70] 국영 공방에서 마차 장인이나 목공예 장인으로 일하는 발해인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거란인들은 해인들이 자기들보다 더 마차를 잘 만든다고 생각해서 거란인 장인이 만든 것보다 해인 장인이 만든 마차를 더 선호했다. [71] 독자연구 : 성종대에 발해만을 통해 식량을 수송하자는 계획을 논의했던 것으로 보아 많은 화물을 수송할 수 있는 큰 배도 건조할 수 있고, 해운업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72] 후대의 원 왕조도 군역 때문에 유목민들이 몰락하여 군사력이 약화되는 문제로 고생했다. [73] 요 태종이 개봉에서 연운 16주로 퇴각한 것에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순흠황후 세력이 자신의 부재를 틈타 본토에서 세력 확장을 꾀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74] 서북 지역은 요의 가장 중요한 국경 지역 중 하나로서 이 곳을 수비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임무였다. 아무리 친족이라지만, 이 임무를 여성인 소호련에게 부여했다는 것은 요가 다른 중국 왕조들보다 여성 임용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75] 여성이 '약탈'에 합의하면, 남성은 여성을 '약탈'하고 서로 관계를 맺었으며 그 뒤에 여성의 집으로 가서 부모에게 서로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를 배문(拜門)이라고 한다. [76] 거란족이 믿는 천신과 지신은 흰말을 탄 남성과 파란 소를 탄 여성의 모습을 한 존재였다. [77] 이를 '제동(祭東)'이라 하며 거란인들은 유르트를 세울 때에도 동향을 향하게 했다. 이는 의례에도 적용되어 중국의 예법에서는 황제가 남면하지만, 요의 황제들은 동향을 향하고 신하들은 남, 북면에 입시했다. [78] 유학의 개조인 공자는 순장을 대체하는 인형인 용조차 극렬하게 비판했으며 유학자들은 공자를 본받아 시대를 막론하고 순장 제도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79] 야율아보기 시절에 역사 기록을 맡은 야율상가도 '사단오륜은 정치와 교육의 근본이고, 육부삼사는 백성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후대의 인물인 야율초재는 『회고일백운』란 시를 쓰면서 '요는 중국의 제도를 존중했다.'는 내용을 적었다. [80] 원문 :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한글 음 : 이적지유군, 불여제하지망야. 해석 : '오랑캐에게 군주가 있더라도, 하가 망한 것만 못하다.' [81] 북위의 최호가 선비족의 역사를 한인의 입장에서 서술했다가 태무제와 선비족의 분노를 사서 그 일족들까지 주살당한 전례가 있고, 도종처럼 '한화'된 '이민족' 황제 앞에서 이적 운운하는 것은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대의 청 왕조 시절에도 이러한 '사상' 문제 때문에 문자의 옥이 여러 번 일어나 한인 지식인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만큼, 정복 왕조의 황제 앞에서 '이적'을 논하는 것은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82] 성종이 도사 풍약곡에게 태자중윤 직을 수여한 사례가 있다. [83] 나이만과 케레이트 같은 유력 몽골 부족들이 기독교를 믿었다는 것이 상당히 뜬금 없이 들릴 수도 있는데, 회창의 폐불령에 타격을 입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북중국과 초원으로 탈출해 몽골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 일부 부족장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당시 몽골 초원에는 상당한 숫자의 기독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84] 다만, 완공은 금나라때 되었다고 한다. [85] 발해인들도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어서 발해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86] 도종은 아예 산스크리트어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황제들이 호불 군주였던 점은 여요전쟁 이후 고려와 요나라 불교계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87] 거란인의 민족 성산이며 텐그리 신앙의 중심지인 목엽산에 관음상을 세우고 민족 수호신으로 삼을 정도였다. [88] 도종 역시 의천으로부터 원효의 저술을 받아 읽고 대승기신론소를 극찬한 바 있다. 사실 의천은 요나라에서도 유명 인사라 도종의 국사로 추증되기도 하고 고려에 오는 요의 사신들이 의천을 만나고 싶어했다. [89] 요양(랴오양)에 있어 요양백탑이라고도 부른다. [90] 송의 대장경 출간에 맞대응해 요는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거란 대장경을 출간했고 이 대장경은 문종 때부터 요나라 사신들을 통해 고려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91] 아이러니하게도 쿠빌라이 칸 본인부터가 종파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불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92] 조사온은 순흠황후와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순흠황후의 역공에 걸려 순장당할 뻔했다가 살아남은 인물이다. [93] 소달람은 소달름(蕭撻凜), 또는 소달람(蕭撻覽)이라 부르며 이 문서에서는 편의상 소달람을 채택한다. [94] 김용의 무협지, 천룡팔부의 주인공 소봉이 요 도종으로부터 받은 그 직책이다. [95] 원래 대신이 죽었을 때는 조회를 3일 파하는데, 곽광과 같은 권신이나 뛰어난 명신들은 예외적으로 조회를 5일 파하기도 했다. [96] 이 때 사절단을 보낸 것과는 별개로, 신라와 후백제 등은 요 왕조와 이전부터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97] 만부교 사건이 벌어질 당시 후진 석경당이 죽고 뒤를 이은 석중귀가 거란과 적대했는데 고려도 후진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946년 석중귀가 거란애게 패해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후진과의 동맹 시도는 소득은 없었을 것이다. [98] 참고로 발해도 대장경을 만든 적도 있었는데, 이것이 훗날 요나라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 [99] 여말선초 무렵을 다룬 사극들은 많지만, 고려사를 전반적으로 다룬 경우는 없다. [100] 해당 시기와 비슷한 시점을 다룬 MBC의 < 무신>도 해당 부분을 간접적으로 그렸다. [101] 강감찬을 소대로 한 드라마가 1970~80년대에 있었다고 하나 남아있지 않다. [102] 서희가 활약했던 제1차 여요전쟁은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갔다. [103] 혹은 대강(大康) [104] 혹은 수륭(壽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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