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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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연
燕 | Yan Dynas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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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하늘색 부분 (4세기 후반) | ||
337년 ~ 370년 | ||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모용선비 | 전진 | |
후연 | ||
서연 | ||
별칭 | 전연(前燕), 모용연(慕容燕) | |
위치 | 중국 화북 동부 | |
수도 |
용성(龍城) (337년 ~ 349년) 계성(薊城) (349년 ~ 357년) 업성(鄴城) (357년 ~ 370년) |
|
면적 | 790,000km² (366년 기준) | |
인구 | 998,000명 (370년 기준) | |
민족 | 선비족, 한족 | |
언어 | 중세 중국어, 선비어, 한문 | |
문자 | 한자 | |
종교 | 대승 불교, 유교, 도교 | |
정치체계 |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337년) → 황제 (352년) | |
국성 | 모용(慕容) | |
주요 황제 |
태조 문명제 (337년 ~ 348년) 열조 경소제 (348년 ~ 360년)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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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 시대에 선비족의 모용부가 세운 국가.실제 국호는 연(燕)이고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훗날 전연을 부활시킨 후연(後燕)과 구분하기 위해 앞 전(前)자를 붙여 전연, 북연(北燕)이라 한다.
요서를 근거지로 발흥하여 모용외 재위 때 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모용황 때는 칭제 건원을 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호십육국의 혼란을 틈타 중원 동부 관동을 차지할 정도로 강대국으로 거듭나 화북 통일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훗날에 전진의 황제였던 부견에 의해 멸망했으나,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부견을 부추겨 비수대전을 일으켜 전진을 망하게 만들고 후연을 건국하기도 하였다.
2. 한국사와의 관계
한국에는 고구려 고국원왕 때 쳐들어와 환도성을 털고,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능을 도굴하며,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납치하는 등 온갖 사고는 다 쳐서 고구려를 패배시킨 숙적으로 유명하다.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시신과 고국원왕의 어머니가 고구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전연에 조공을 바쳤으나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만 돌려보냈다. 오랫동안 조공을 바친 뒤에야 모용준에 의해 고국원왕의 어머니를 데려올 수 있었다. 다만 고국원왕의 군사적 실력이 명백히 광개토대왕에게 미치진 못했고 광개토대왕의 그 고구려보다도 고국원왕의 고구려가 행정, 군사, 문화, 경제 모든 부분이 확연히 열세긴 하였으나, 이 시기 전연의 인구압이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던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이 시기 중국은 전조든 후조든 동진이든 정말이지 석륵 외엔 위정자들이 통치를 개판으로 하는데다 걸핏하면 사람을 죽여대고 세금을 높이 매겨 백성들의 돈을 뺏는 등 한반도의 후삼국, 중국의 5대10국 시절처럼 백성들에겐 헬게이트가 열렸으나, 유독 이 전연만은 마지막 황제 빼면 다들 제정신이 박혔고[1] 나름대로는 백성들을 꽤 신경쓴 명군들이 연이어 정권을 잡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한족이든 이민족이든 상황이 되면 전연으로 인구가 몰려, 이 시기 전연의 인구는 중원 진출 이전에도 이미 90만에 육박해 있던 상황이었다.[2] 이 때의 전연은 북위에게 화북을 빼앗기고 남연이 떨어져나간 후연과 영토는 거의 비슷했으나, 그때의 후연은 요서만 따져봤을 때 인구 50만이었던 상황이었던지라 이 시기 중원 진출 직전 전연의 국력은 북위에게 패해 쪼그라든 후연보다 거의 2배에 가깝게 막강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니 광개토대왕보다 자질도 상황도 대단히 좋지 못한[3] 고국원왕이 광개토대왕 때 후연보다 두 배로 강한데다 연이어 명군들이 즉위한 전연을 이겨내기는 대단히 어려웠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4]
다행히 나름대로 복수는 할 수 있었는데 전진이 전연을 격파하자 고구려로 쫓겨 온 전연의 태부 모용평[5]을 붙잡아 전진으로 쫓아낸 것이다.[6] 이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대에 전연의 후계국인 후연을 정벌하며 수도까지 위협하고 요동을 차지하며 미천왕과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의 원수를 갚는다. 가야하고는 북방의 유물과 군사문화, 기마전술을 전해 주는 등 친선 관계를 맺었고 대표적인 유물로 청동 솥이 있다. 사실 전연-후연-북연의 문화는 일명 '삼연 문화'라고 해서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에 고고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과제다. 특히 군사적인 부분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는 전연에게 당한 패배를 거울삼아 소수림왕 때부터 절치부심하고 전연의 군사 문화를 많이 배우려 노력했으며, 신라는 고구려의 신하국 및 동생 나라로 지내던 시절 역시 굴욕을 참고 전연을 많이 벤치마킹한 고구려 군사 문화를 배우려고 노력했다. 한편 백제와 가야 또한 고구려군에게 하도 거듭 패배를 당해 삼연 문화를 많이 받아들여 고구려식으로 소화한 고구려 군제를 배우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신라와도 연합군을 자주 편성하다 보니 신라 군제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가야로부터 기마전술, 철기ㆍ토기 제작 기술, 군사문화를 전수받은 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3. 기타
무협소설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모용씨의 부흥을 꾀하는 모용세가라는 세력의 모티브이다.4. 역대 황제
<rowcolor=#fff>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고조(高祖) | 선무황제(宣武皇帝) [7] | 모용외 | - | - | - |
1대 | 태조(太祖) | 문명황제(文明皇帝) [8] | 모용황 | - | 337년 ~ 348년 | 용평릉(龍平陵) |
2대 | 열조(烈祖) | 경소황제(景昭皇帝) | 모용준 |
원새(元璽) 352년 ~ 357년 광수(光壽) 357년 ~ 360년 |
348년 ~ 360년 | 용릉(龍陵) |
3대 | - |
유제(幽帝)[9] 헌무황제(獻武皇帝) [10] |
모용위 | 건희(建熙) 360년 ~ 370년 | 360년 ~ 370년 | - |
[1]
그렇다고 마지막 황제인 모용위가 막장이라는 것은 아니다. 즉위할 때는 나이가 어렸고 성인이 되자마자 나라가 망했다.
[2]
한성백제박물관 시리즈 요서 편 참조
[3]
전연이랑 전쟁하면 굴욕적으로 털리고 백제하고 전쟁하면 데꿀멍하는게 일상이었다(...)
[4]
역덕들 입장에서는 이 전연과 광개토대왕이 대결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흥미진진하겠지만, 드림 매치는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이 시점에서는 고구려가 아직 백제와 충돌하기 전이라 이중전선에 대한 걱정은 거의 없는 편이고, 이때 백제는 침미다례의 복종을 받아내 왜-가야와의 무역로를 장악하여 국력이 상당히 팽창하기 전이었기에 광개토대왕이 고국원왕보다 크게 상황이 유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신왕은 가야, 왜와의 외교를 잘해 이 두 나라에서 꽤 많은 용병을 데려와서 몇 번이고 안 되는 승부를 고구려와 신라에게 걸어볼 수 있었으며 침미다례한테서도 늘 상당한 세입금을 거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근초고왕은 이 둘 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5]
근데 이 모용평이 고구려 입장에서는 자기편 X맨이나 다름없는 것이 잘나가던 전연을 망하게 한 주범이기 때문이다.
[6]
심지어 이 때 왕은 전연에게 매번 털린 고국원왕. 치욕은 많이 겪었지만 재위기간이 40년씩이나 되어서 전연의 존속기간은 고국원왕의 재위기간 안에 들어간다.
[7]
경소제 추증
[8]
경소제 추증
[9]
서연의 모용홍이 추존.
[10]
남연(南燕)의 모용덕이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