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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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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제환공, 송양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

1. 개요2. 춘추오패3. 선정기준4. 패자들의 말년5. 같이보기

1. 개요

중국 춘추시대의 5대 패자(霸者). 당시 여러 제후국의 군주가 모여 맹약을 맺는 것을 회맹(會盟)이라 했으며, 회맹을 주도하는 이를 일러 패자(霸者)라 했던 데에서 유래했다. 패자라는 개념 자체는 주나라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강태공에게 관백(혹은 방백)을 제수하여 뭇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삼음으로써 생겨난 개념으로서, 춘추시대의 특징을 고려했을 때 이 회맹의 기본적인(또는 명목상의) 목적은 주왕실을 수호하고 주나라 천자에 의한 천하를 외부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외교 행사를 성사시키고 제후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외교력만 보유해도 가능했으나, 주왕실의 힘과 권위가 갈수록 쇠퇴함에 따라 실제로 회맹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포함하여 강력한 국력 역시 필요했다. 이런 배경에서 사실상 춘추시대의 패자는 당시 가장 강력한 제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통용되었고, 실제로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춘추오패를 구성하는 제후들은 이상의 다양한 조건에 따라 사서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만, '춘추오패'라는 단어만 보고 춘추시대에 다섯 명의 패자만 존재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패자'는 비공식적인 호칭이며 주왕실이나 제후 간의 합의로 '1대 패자', '2대 패자' 같은 식으로 직함을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에서 주나라 공인 마지막 방백은 그 당시의 회맹을 주도한 진효공으로, 관점에 따라서는 이 인물도 패자의 일원이다. 패자는 단순히 회맹을 주도한 제후들에게 후대 평가가 곁들여져 불리는 호칭이기 때문에, 이 중 다섯 명을 꼽아 '춘추오패'라고 칭하는 것은 단순히 음양오행설의 영향에 불과하고 역사서마다 기준이 달라 각각 서로 다른 다섯 명의 제후를 꼽고 있다. 따라서, 아래에 서술되어 있는 여러 제후들이 모두 강력한 제후로 군림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문단들을 볼 것.

전국사군자가 어느정도는 동시대에 살았듯 춘추오패도 동시대에 산 관계들이 많다. 준패자까지 합쳐서 보면 제환공, 진목공, 송양공의 재위기가 겹치고[1] 진문공은 세사람과 동시에 재위가 겹치지는 않으나 동시대 인물이라 제환공이 죽고 7년 뒤에 즉위했으며 초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일하게 타 춘추오패들과 생몰이 겹치지 않는 듯하다. 이후로 따져보면 제경공, 합려, 부차, 구천이 같은 시대[2] 인물이다.

2. 춘추오패

일찍이 춘추시대의 패자로 평가받는 이들이 여럿 있으나 춘추오패(春秋五霸)라 함은 이 가운데 다섯 사람을 일컫는다. 굳이 다섯을 꼽는 이유는 음양오행설 때문이다. 이 범주에 포함된다고 언급되는 군주들은 아래와 같다.

이 가운데 시대상 앞선 다섯 인물, 제 환공, 진 목공, 송 양공, 진 문공, 초 장왕을 가리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을 꼽기도 하는 등 여러 이견이 있다. 하지만 제환공, 진문공이 제외되는 경우는 없으며, 그 다음으로는 일반적으로 초장왕과 진목공이 이에 해당하며, 그 외에 경우에 따라 오왕 부차, 합려, 월왕 구천, 송양공 등이 포함된다.

각 사료에 나오는 오패의 구성.
사기(史記)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 송양공
사자강덕론(四子講德論)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 월왕 구천
백호통(白虎通)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 오왕 합려
사통(辭通)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 정장공
한서주(漢書注)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 송양공 오왕 부차
순자(荀子)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

3. 선정기준

이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준들로는 다음의 것들을 꼽을 수 있으며,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1. 천자를 대신해 제후를 소집하여 회맹을 주도하고 여기에서 결정된 내용들을 토대로 당시 국제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가.
  2. (이를 위해) 외교력과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군사력을 포함한 강대한 국력을 갖추고 있는가.
  3. (이와 같은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패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대하고 훌륭한 통치력과 성품을 갖추었는가.
  4. (그리고 위 항목들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중원, 즉, (명목상으로) 주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를 운영하고 지켜낼 능력을 갖추었는가.'

이와 같은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제환공과 진문공은 이 기준들을 대체적으로 모두 충족시킨 춘추시대 패자의 전형으로 여겨져 춘추오패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경우는 없다. 유사하게 초장왕, 진목공 역시 약간의 결격사유를 가진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3], 대체적으로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오왕 합려, 부차, 월왕 구천, 송양공등의 경우는 보기에 따라 위의 군주들에 비해 여러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질 수 있어[4] 비교적 자주 언급되는 패자들은 아니다.

작위를 패자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방백의 위치에 오른 군주들은 주나라 창건이래 후작 이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진(秦)목공은 후작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문공이나 장왕의 패업보다 한수 아래로 두는 시각도 있다. 물론 초나라는 공식적으로는 자작이었지만 실제로는 초성왕 이후부터는 칭왕하였으며, 주변 제후국에서도 이를 사실상 인정하였다. 마찬가지로 월나라와 오나라도 제후들의 회맹에 참석하였을 때에는 월자와 오자로 각각 칭해였으나, 실제로는 칭왕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춘추오패라는 개념을 통해서 "춘추 시대에는 다섯명의 패자가 있었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주요 역사서에서도 춘추오패에 포함시키는 패자가 다르듯이, 춘추시대에는 여러 패자들이 쟁패했던 시기이며, 다섯명을 굳이 뽑는 이유는 음양오행설의 영향이다. 따라서, 춘추오패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춘추오패는 개별 군주를 일컫는 개념으로, 춘추시대 전체는 전반적으로 진(晉)과 남쪽의 초(楚)의 대결로 요약할 수 있다. [5]

4. 패자들의 말년

일반적으로 패자들의 화려한 업적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것을 넘어서 이들의 말년까지 살펴봄으로써 춘추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해당 패자들이 이끌던 국가의 보다 넓은 역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패업 달성 이후의 모습이 비교적 좋지 않았던 패자들과 달리 다음의 패자들은 초심을 잃지 않고 패업을 단단히 하여 후대로 이어지게 하는데 기여했다.

5. 같이보기



[1] 이 세 사람이 모두 겹치는 시기는 송양공이 즉위하는 BC 651년에서 제환공이 죽는 BC 643년까지다. [2] 최소한 합려가 죽고 부차와 구천이 즉위하는 BC 496년까지 네 사람은 한 시기에 살았다. [3] 주왕실을 수호하는 제후의 역할을 수행했는지의 여부 등 [4] 중원의 제후인지의 문제, 실제 강대한 국력과 외교력을 투사했는가의 문제 등. [5] 사실 오와 월의 전쟁도 이 대결의 대리전에 가깝다. 진나라가 필 전투에서 패배 후 전면전으로는 답이 없다는 걸 깨닫고 배후의 오를 적극 지원했고 초는 질세라 속국에 가깝던 월을 지원했기 때문. [6] 물론 이전에도 그들은 관직에 있었으나 관중의 견제로 중용되진 못했다. 관중은 진작부터 이들을 경계했다. 단 관중은 생전에 이들을 견제했으면서도 이들과 나쁘지는 않게 지냈다. [7] 또, 제나라 패자 환공을 빛냈던 관중, 포숙, 습붕같은 주옥같은 신하들이 이즈음에는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에 인재가 없었던 탓도 있다. [8] 이로인해 제환공을 평범한 범군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9]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제환공도 보통 인물은 아닌게 자기가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관중을 측근의 말 한 마디에 용서해주는 것은 물론 장사 했다가 말아먹고 관직에 올랐다가 3번이나 쫓겨나고 전쟁 나갔다가 3번이나 쫓겨난 별볼일 없는 사람을 대뜸 특급 승진을 시켜주고 재물에 중보라는 호칭(중보란 한자를 풀어보면 아버지에 버금간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제환공으로서는 최상위 예우를 해 준 것이다.)까지 내려주는 등 당대는 커녕 역사상으로도 찾기 힘든 초특급 대우를 해 준데다 또 그런 관중의 말은 앞에 나온 단 한 마디의 말만 빼고 다 들었다. 특출난 군주라기에는 모자란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 평범한 범군이라기에는 일반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등용과 특별 대우에 더군다나 그런 사람을 일평생 견제 하나 안 하고 신임하는 모습은 범군은 고사하고 명군들에게도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당장에 제환공과 비슷한 평을 받는 유선은 제갈량을 종종 의심하곤 했었다는걸 생각해 보자, 게다가 유선의 촉나라는 굉장히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었는데도 저정도인데 춘추시대 초기의 저 상황에서, 그것도 정상적인 계승이 아니라 형제간에 목숨 건 대결 끝에 계승한 사람이 저렇게나 사람을 한결같이 믿고 맡긴 것은 정말 보기 드물다. 게다가 관중만 그런 것도 아니고 관중을 추천한 포숙아와 포숙아 못지않게 명신인 습붕도 잘 써먹었다. 그리고 제환공도 자기 그릇 정도는 파악할 줄 알았다. [10] 경공시기에는 재상 안영의 활약으로 다시 강대해지기도 했다. [11] 하지만 합려의 바로 전왕도 초 평왕이 죽고 난 다음에 공격했다. [12] 그래도 월나라는 구천 사후에도 100여년 정도 동안은 제법 강성함을 유지했다. 월왕 주구 시절만 해도 증자가 당대 강국으로 제나라, 초나라, 삼진과 함께 월나라를 꼽았을 정도였으며, 월왕 예 초기에만 해도 제나라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월나라가 쇠망하기 시작하는건 월왕 예 말의 일이다. 다만 이 시기에도 주구가 아버지인 월왕 불수를 죽이는 등 극심한 권력 다툼 등으로 국력이 지속적으로 국력이 소진되고 있었으며, 이후 주구 이후부터는 무전을 제외하고는 마지막 왕인 무강까지 시해당하거나 폐위당한 왕밖에 없다. [13] 다만 초장왕 시기 벌어진 하희와 신공 무신 사건이 이후 오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계기이기 하지만 이건 초장왕의 잘못이 아니라 초장왕이 죽은 후 신하들이 벌인 일로, 장왕의 과오로 평가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면이 있다. [14] 이 부분에 대해서 반박하는 부분도 있는데 남송 때의 명사인 소식(소동파)은 삼량이 순장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원한 게 아니냐는 주장을 했었다. '목공은의'라는 말처럼 남에게 은혜를 종종 입힌 목공의 덕을 갚고자 전횡의 고사를 인용한 것. [15] 소설 열국지에서는 소동파의 주장을 적으면서 춘추좌씨전을 비판하였다. [16] 진 목공이 순장하라 명령을 내린게 아니라 그 아들이 실행한 일이기에 진 목공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다만 춘추시대에는 원래 순장 풍습이 있었고 이 때문에 결초보은의 이야기와 같이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가 죽으면 다른 이를 순장 하지 말라고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진목공이 아예 잘못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