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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1:39:53

상나라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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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Shang Dynasty
파일:상나라_영토.jpg
붉은 색은 초기 청동기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유적의 영역,
녹색은 《 죽서기년》 연구에 따라 중국 학계에서 비정하는 영토이다.[2]
기원전 1600년?~기원전 1046년
별칭 (殷)[3], 은상(殷商), 대읍상(大邑商)[4]
위치 중국 화베이
수도 (亳), (殷)[5][6]
국가원수 왕(王), 제(帝)[7]
주요 군주 대을(기원전 16세기)
반경(기원전 13세기)
무정(기원전 13세기)
제신(기원전 11세기)
언어 상고한어
문자 갑골 문자
종교 상족 토속 종교[8]
종족 상족(商族)
통화 조개 화폐
성립 전 황하 문명 이리두 문화(= 하나라?)[9]
멸망 후 주나라, 송나라[10]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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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계보4. 역사5. 국가 구조6. 하?•상•주 3대의 관계7. 상나라의 기술과 문화8. 인신공양
8.1. 아즈텍 제국과의 비교8.2. 《상나라 정벌》에서의 서술
9. 창작물에서10. 기타11. 참고할 만한 사이트 및 문헌

[clearfix]

1. 개요

중국의 고대 국가. 약 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까지 존재했다고 추정된다.[11] 한자로는 (商)이며, 국성(子)였다. 여러번 수도를 옮겼지만, 후술되어있듯 가장 유명한 도읍지였던 (殷)에서 따와 은나라라고도 부른다.

청나라 시대에 고대 기록을 의심하는 의고학[12]이 득세하면서 한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했으나 1899년 갑골문이 발견되고, 특히 20세기 들어 은허가 드러나면서 실존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문헌상 전해지는 국가들 중 고고학으로 입증되는 가장 오래된 중국계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13]

2. 명칭

파일:은허-.png
상나라의 주요 도시이자 후반기 수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허의 위치.

(商)나라가 공식 명칭이다.[14] 다만 20세기까진 (殷)나라라고도 많이들 불렀는데, 합칭하여 은상(殷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은이란 명칭이 상을 멸망시킨 서주 성립 시기부터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15] 상족들과 달리 외부 세력들은 상나라 수도로 오랜기간 작용한 은허[16]에서 유래한 은나라로 부르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 상족[18]들은 은을 도시 이름으로만 쓰고, 부족 이름은 '상'이라 했다. 갑골문에서도 은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참고로 당대에는 '의'(衣)[19] 혹은 '대읍 상'(大邑 商)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갑골문에서 대(大)는 천(天)과 통하므로 '천읍 상'(天邑 商)이라는 표기도 발견된다.

이에 영향을 받아 전한 시대 유명 역사가 사마천이 《 사기》를 쓸때 상나라 부분의 제목을 "<상본기>"가 아니라 "<은본기>"로 썼고, 《사기》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보니 2,000여 년 동안 중국 내에 널리 퍼져 후대에도 은나라라고 알려진 부분이 있다. 물론 당대 유물 등의 역사적인 물적 증거가 은이 아닌 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공식 명칭은 상나라가 맞다.

상인, 상업 등의 자가 이 나라에서 유래되었다. 상나라인들이 장사하며 떠돌아 다니던 데서[20] 기인했다고 한다. 현재 상추시 역시 유래가 같다.

3. 계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상나라/계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사서에 따르면 하나라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이 건국했다. 성탕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되는 왕으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왕일 뿐 창시자는 아니었다.[21][22] 갑골문에서 상의 창시자는 삼황오제 중 한 명인 제곡 고신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제곡 고신씨의 둘째비인 간적의 아들이 상족의 시조인 (卨, 契)이다.[23] 물론 《사기》에서도 상왕실의 시조인 설을 상에 봉한 것이 제순 유우씨 시절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상나라는 이때 건국되었으되, 하나라를 내쫓고 중원의 1인자인 천자가 된 건 탕왕이라는 것이 《사기》의 기록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기록상의 모순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의 역대 왕명은 모두 십간을 따라 지었다. 제정일치 성격이 강했던 상나라 면모의 한 일환으로 보이기도 한다. 참고로 《 사기》를 지은 사마천이 저술을 위해 상나라의 도읍이었던 하남성을 시작으로 수년간 수소문하여 자료를 수집해 기록한 상나라의 왕실 족보는, 20세기에 출토된 상나라의 갑골문 기록과도 대부분 일치한다. 물론 다 같은 것은 아니고 몇몇 부분은 다르기도 하지만 세월을 고려하면 정확한 편. 족보 외 내용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마지막 왕 제신(帝辛)의 기록이 다르다. 덕분에 그동안 제신의 평가는 사마천의 《사기》에 의존해 폭군으로 보는 평가가 대부분이었지만,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일부는 재평가되기도 했다.

《사기》에서는 하, 상, 주의 조상이 모두 황제 헌원씨로 나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장 이상한 경우는 주나라다. 황제 헌원씨에서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걸왕까지 총 20대, 황제 헌원씨에서 상나라 중흥의 군주인 탕왕까지 총 17대이며, 황제 헌원씨에서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제신(주왕)까지는 총 46대이다. 그런데 주나라의 기록에서는 황제 헌원씨에서 서주의 초대 군주인 무왕까지 총 19대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주나라의 족보 기록은 상나라의 것을 바탕으로 가탁한 것일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주나라 희성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행위였던 것으로 추정할 정황 근거가 된다.[24]

4. 역사

상족 기준 중시조격인 탕왕 이후 상나라는 여러 번 천도를 하는데, 발굴되어 확인된 상나라의 도읍으로는 중기의 수도인 박(亳)으로 추정되는 허난성 옌스 유적, 그리고 반경 이후 후반기 수도인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다.[25] 갑골문은 주로 이 안양 은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 출토가 드물다.[26] 반대로 말하면 상나라 전기엔 갑골문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관련 전공 석사 과정 학생이 2022년 중국 고중세사 분야 주요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도 했다. #

사기 탕왕 태갑, 태무, 반경, 무정, 제신왕의 이야기만 비교적 자세하게 나오고, 나머지 왕들은 그냥 제위를 이었다거나 간략한 행적 정도만 소개하고 있다. 은허로 천도한 이후 기원전 13세기 무정 시기에 재차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부자의 과도한 동방 정책[27][28]으로 서방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타 산시성 지역의 주나라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했다. 결국 상나라는 목야대전에서 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말았다.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 주나라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상나라는 제후국이었던 주나라 즉 명분상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신하였던 주나라의 역성혁명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29] 주족이 세운 주나라 입장에서는 이민족인 상족 유민들을 안정시켜야 했으므로 무왕은 제신(주왕)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을 다시 은 지역에 봉해 제후로 삼았다. 하지만 무왕이 사망한 후, 무경은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이른바 '삼감의난'이라는 반란을 일으켰고 진압 당하고 만다. 관숙과 무경은 처형되었고 채숙은 추방되었지만 상족들과 이들에게 협력하는 동이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기에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는 수 년이 더 걸렸다.[30]

삼감의 난을 진압한 주나라는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상나라의 왕족 미자 계 송(宋)나라 국군에 봉해 상나라 유민인 상족들을 다스리도록 했다.[31] 또 나라의 근본인 상(商)의 제사(祭祀)를 계승하도록 했는데, 송나라는 다른 제후국들과는 다르게 주나라 천자의 제례가 허락되는 등 나름 주왕실에서 전 왕조의 후예 대접을 해줬다.[32]

그 외 상나라의 옛 수도인 조가(朝歌)에 무왕의 아우인 강숙 봉을 봉하니 그의 봉국이 위(衛)나라였다. 상나라의 옛 수도에 그대로 봉했던 무경 때와 달리 상나라 왕족 미자 계는 상나라의 옛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봉했고, 송에 가지 않은 상족들도 나누어 관중, 낙읍 지대 등 여러 지역에 분산 이주시키면서 상 세력은 많이 약화된다.

5. 국가 구조

이와 더불어, 하나라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가 일개 성읍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원에는 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는 그 수많은 성읍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사기》의 사마천 등 후대의 중국인 역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 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 주 등 중원의 '왕조'들도 진, 한 등과 같은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한규, 《천하국가》, 57쪽
해당 저서에서 보이듯, 상 역시 국가 구조가 후대의 통일 왕조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전의 얼리터우 등 도시 문화들에 비하면 상이 적극적인 대외 정복 활동을 펼쳤고, 나름 제국을 형성했다고 추정된다. 또 중화권 최초의 문명 왕조라고 볼 수 있다.[33] 다만 국제사회라는 표현은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현대의 표현이기 때문에 고대사까지 소급해서 적용하기는 다소 곤란할 수 있다.[34]

왕이 가지는 권력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다. 당시 중국에는 상나라를 섬기는 성읍국가와 상나라를 섬기지 않는 많은 이민족이 공존했으며, 이들이 어느 지점을 경계로 나뉜 것도 아니었다. 이민족 집단 사이에 상나라 성읍이 있기도 했으며 상나라 성읍 사이에 이민족 부락이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35] 이는 주나라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상, 주의 영향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으니 더 많은 성읍들이 복종해왔으며 시간이 갈수록 이민족은 토벌되거나 동화되어 사라졌다. 결국 한나라 시대가 되면 파촉, 형남, 강남 정도에는 가야 이민족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부락민족들이 동화되었다.

영토형 국가가 아니라 상나라가 주도하는 성읍국가 간의 네트워크였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정치체제 발전이 덜 되었던 것도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시 중원의 자연환경이었다. 상고시대만 해도 황하 주변은 많은 지역이 습지 밀림이었다.[36] 이 때문에 몇몇 거점을 중심으로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잦은 전쟁 때문에 이후 황하 유역은 점차 평지가 되었고, 교통이 발달했으며 거대한 국가가 등장했다. 반면 남쪽의 장강 유역은 여전히 밀림이 많아 인구 밀도가 낮았거니와 그마저도 몇몇 거점도시에 밀집되어 그 밖으로는 이민족이 여전히 많았다.

6.?•상•주 3대의 관계

중국 학계에서는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의 유적으로 추정하긴 하나 아직은 추정 수준이다. 상나라 이전에도 중원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병존했고, 하나라가 실존했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성읍 또는 부족국가일 뿐이었을 확률이 높다. 현대인들은 하나라가 멸망하고 상나라가 건국되었으며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한 후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이와 달랐을 양상이 높다는 것.

중국의 청동기시대에는 아직 후대의 진, 한과 같은 중앙집권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상→주 교체는 가장 강한 성읍 또는 집단의 교체일 뿐 전 왕조가 외부의 침입으로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후로 패권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간 것처럼 명조대전과 목야대전 전후로 패권이 하→상, 상→주로 넘어간 것이다. 또 패권이 스파르타에 넘어갔다고 아테네가 멸망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하, 상이 패권을 잃었다고 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패권을 쥔 성읍은 하→상→주 순으로 바뀌었지만, 기타 여러 성읍의 지배계층과 주민들은 큰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부연하자면 춘추시대까지도 하나라의 후손은 기나라, 상나라의 후손은 송나라의 왕족으로 대우받았다.[37]

우선 하와 상의 관계를 보면 갑골문에는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하왕조 같은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 하(夏)라는 글자는 보이지도 않고, 1년을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만 구별했다. 또한 하나라 후기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와 상나라 초기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가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하-상의 교체는 상-주의 교체와 달리 지배층 내부의 계승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반면 상과 주의 관계는 성격이 다르다. 위치가 낙수, 황하, 제수 사이로 비슷한 하-상과 달리 주의 근거지는 관중 분지 지방이었다. 또 주나라가 승리한 후 산동 지역에 친척을 분봉하고 강족을 이주시켜 토착 세력을 통제하려고 했다. 문화면에서도 제사 대상은 제→천으로 바뀌고 점을 치는 방법은 동물뼈→나뭇가지로 변화했는데 문화가 큰 변화가 없는 하-상과는 차이가 있다. 《사기》, 《시경》 등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는 문왕의 조부 고공단보 대에 융적을 피해 기산 아래에 정착했다. 그 후 서방에서 인심을 얻으며 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초기에는 상나라와 대립했으나 점차 상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주나라의 근거지인 기산, 풍경, 호경이 있는 관중 지방은 상나라의 영향력이 약한 지역이었고 주나라의 세력도 무시못할 만큼 강력했기 때문에 상나라의 복사를 보면 '주를 정벌할까요?' 같은 기록이 나올 정도로 주나라를 경계했다.[38] 주문왕의 아버지인 왕계( 계력)가 상왕 문정에게 감금되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주문왕이 상나라 왕을 만나러 갔다는 기록도 있는데, 상나라는 주나라가 일단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언제 통수칠지 모른다고 여긴 것 같다.

전통적으로 주나라의 국성인 희성은 강성과 통혼하는 관계였다. 고공단보의 아내로 계력의 어머니였던 여성은 태강이었고, 주무왕의 아내는 강태공의 딸 읍강이었으며 훗날 주유왕이 포사를 총애하면서 내친 신나라 출신의 왕비 또한 신나라가 강성 제후였기 때문에 강성이었다. 그런데 주나라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다른 성이랑 통혼하는 경우도 생겼는데 주문왕의 어머니는 임(任)성이었고, 아내는 사(姒)성이었다. 《주역》의 <효사>를 보면 상나라 주왕의 아버지였던 제을이 주문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내용이 있다. 이는 상나라가 주나라와 결혼동맹을 맺어야 할 정도로 주나라의 세력이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왕(제신)이 문왕을 유리에 감금한 것도 주나라에 대한 견제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상왕 문정이 계력을 감금해 죽였지만 계력의 아들인 서백 창, 즉 주문왕의 시대가 되면 상나라의 근거지와 가까운 우, 예, 숭 등을 정벌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졌다. 제신이 서백 창을 유리에 감금하면서 계속 견제는 했지만 결국 서백 창의 아들인 주무왕 희발의 치세때 주나라를 수장으로 강(羌), 용(庸), 촉(蜀), 무(髳), 노(盧), 팽(彭), 복(濮) 등 서쪽의 국가들이 연합하여 목야에서 상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패권을 쟁취했다. 이후 주나라는 상나라 유민들을 여러 곳에 분산 이주시킨다.

문화면에서 주나라와 상나라는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고공단보 시절이면 몰라도 상나라와 한판 붙은 증손자 주무왕 시절의 유물을 보면 상나라와 대동소이하다. 꾸준히 상나라와 교류하면서 주나라 문화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 또한 상나라처럼 동물뼈로 점을 친 흔적이 있는데, 민족의 기원은 달랐을 수 있어도 상주교체기 무렵에는 문화가 비슷해진 모양이다.

7. 상나라의 기술과 문화

파일:attachment/vasefromShangdynasty.jpg
상대의 청동 항아리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철문[39]이 아로새겨진 청동기다. 즉, 상나라는 청동기 문명권이었음을 알 수 있다.[40]

이 시기 청동기들은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 등이 상•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들은 종류까지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느라 애를 먹는다.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케임브리지 중국고대사》 <선진>편에 따르면 대략 4~5개 정도의 구분이 존재한다.

당시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은 주나라 이후처럼 대량생산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귀한 청동기들은 주로 제사에 쓰였다. 주나라 시대로 가면 장식이 다소 간략해져서 이전 시대보다도 오히려 청동기 주조기술이 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주조기술이 후퇴해서라기보단 청동기가 단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나라의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 유물의 주인이 주 왕실로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 자랑을 구구절절하게 새겼음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료적인 가치는 오히려 주나라 것이 더 높다.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나라의 건축 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41] 자주 지붕을 갈아야 함은 둘째 치고, 한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인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잦아서 건물을 짓기 전 인간 제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해지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지진으로 건물이 자주 무너지던 일본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원시문명에도 있었던 풍습으로, 이때문에 상대의 건축물 기둥 유적 아래에서 사람의 인골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이때 건축물들이 어땠냐 하면...
파일:external/2.bp.blogspot.com/fig+x+shang+dynasty+building+n.jpg 파일:external/www.sott.net/china_huanbei.jpg
다른 링크 이게 건물터. 참고로 이 건물들의 정체는 바로 당시의 궁전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inxu.jpg
은허 박물관에서 복원한 상나라 시대의 궁전. 지붕은 짚으로 되어 있다.

상나라는 신권정치 사상이 강고한 국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했던 신은 (帝)였다.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이 죽으면 제가 된다고 믿었다. 즉,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받드는 고대 신정국가였다. 왕은 제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했다. 제는 혈통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었다. 이를 통해 상나라가 씨족들이 모인 도시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천제께 제사를 지내는 제례는 천자의 특권이었기 때문에, 상나라가 멸망하고 나서도 비교적 세속적인 주나라 사람들을 비롯한 당대 인식은 함부로 상나라 자성 왕실의 후예를 멸족시킬 순 없었던지, 상당수는 그들을 낮게 보면서도 상당수는 귀하게 여긴 복합적인 양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帝) 신앙은 상나라 멸망 후에도 불멸에 가까울 정도로 유지가 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영성 조씨의 진나라에서는 위대한(皇) 상제(上帝)라는 뜻의 황제(皇帝)가 등장했고, 진나라 멸망 후 전한과 후한 시기에 발흥한 도교 신앙과 결합이 되어 도교의 최고 신인 옥황상제가 등장했다. 그리고 16세기때는 다소 뜬금없게도 외부 종교와 결합을 했는데 바로 기독교였다.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중국어로 표현하기 위해 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수집했고, 결국에는 상제라는 단어가 중국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져 상제로 번역을 해 이후 교리상 천주 외에는 어떠한 단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교황의 칙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선교에서 폭넓게 쓰였다.

8. 인신공양

丁巳卜:其燎于河, 牢沈妾?
정사일에 점을 친다. 장차 불로 지내는 제사를 하(河, 황하)에 지내려는데, 우리에서 기른 소와 첩을 강물에 빠뜨릴까?
《갑골문합집》 32161[42]
丙戌卜, 大貞: 告執于河燎, 沈三牛?
병술일에 점을 치며 정인 대가 묻는다. 특정 사안을 고하며 포로를 바치는 제사를 하(河)에 지낼 때 불로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소 세 마리를 황하에 빠뜨릴까?
《갑골문합집》 22594
甲子卜,㱿貞:妥以巫
갑자일에 점을 치면서 묻는다.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에 주술사(巫)를 쓸까?
《갑골문합집》 5658
貞: 今丙戌燎□[43], 有從雨?
묻는다. 오늘 병술일에 재라는 주술사를 불로 태우면 큰 비가 있을까?
《갑골문합집》 9177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4472211245_9211423faa_b.jpg
성을 쌓으면서 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사람은 귀족 무사이고, 뒤쪽의 도끼를 든 사람은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이다.
머리를 풀고 윗옷이 벗겨진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이다.

상나라는 인신공양 풍습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상나라뿐만 아니라 고대에 인신공양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 현상이었지만[44], 상나라는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한 수준이었다.

상나라의 인신공양 내용과 방법은 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주 대상은 노예나 이민족이었고, 갑골문 기록 중에는 사로잡은 적국의 고위 여성을 이렇게 죽일지 점친 기록이 있다. 갑골문의 기록을 볼 때 농사가 안 되거나 천재지변이 벌어지면 주술사를 제물로 쓰기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도 희생당했고,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나 되었다. 그리고 당대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건물이 무너지기 쉬웠는데 이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신공양을 했다. 주로 건물의 기초에 제물이 된 사람의 시체를 파묻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외에도 인신공양 제사의 흔적으로 1999년에 청동솥 안에 삶긴 사람 머리가 발견된 적도 있다.[45]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대로 묻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자르고 묻었다. 이를 두고 '죽어서는 생각도 못한 채 명령에만 순종하도록 만들어 부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생각하는 기관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라고 봤다. 때문에 무덤 주인 혼의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치 산사람들이 보양식을 먹는 것처럼 영혼의 보양식 개념으로 순장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때 잘린 머리들은 공장으로 보내져 뼈 그릇을 만드는 데 쓰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두개골들은 윗부분이 톱 같은 도구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한자에도 인신공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제물로 바치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문자로 눈()에 을 박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당대 인신공양에 처해지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 꿇린 뒤 밧줄로 묶었으며, 이를 묘사한 인형도 발굴되었다. 민()의 기원은 이와 같은 잔인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붉을 '적'()은 사람 모양 아래 불 모양이 있는 형태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피 '혈'(血) 역시 그 형상이 제기()에 담긴 사람의 피를 나타낸다. 십이지의 하나인 '묘'()자는 형벌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글자로 쓰이기도 했다. 한자의 모양처럼 제물로 삼기 위해 세로로 두 토막을 내는 방법으로,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을 정형할 때 모습과 비슷하다.

이러한 인신공양 풍습은 상나라가 본격적인 정복 전쟁이라는 개념이 시작된 청동기 시대에 존속했다는 점에서 한 원인을 추측할 수 있다. 신정일치 국가이기도 했던 상나라에서 적대적인 부족이나 나라와의 전쟁으로 사로잡은 많은 포로들을 처리하기 위해 본인들이 믿는 에게 제물로 바친 것으로 보인다.[46]

하지만 이 시기가 청동기라고 해도 완전히 원시부족 사회는 아니었고, 엄연히 인륜이나 도덕 개념도 점차 생긴 시절인데다, 포로들도 단순히 밥만 축내는 식충이가 아닌 부릴 수 있는 노동력으로 인식되면서 적국의 포로를 대상으로 하는 인신공양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47] 중국의 역사학자 리숴에 따르면, 고고학적으론 상나라 초기만 해도 인신공양이 두드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70~100년 이후부터 심해지기 시작하다 말기에 들어 다시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주변 부족들의 원망은 여전했다. 결국 상나라가 멸망한 주요한 원인들 중에는 제후국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행했던 이런 잔혹한 인신공양의 대상이었던 주변 제후국들이 같은 제후국인 주나라를 지지한 것도 있다고 추정된다.

상나라가 인신공양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나라 시대부터 자세한 기록 문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란 주장도 있지만 이는 엄밀히 따지면 고고학적으론 틀린 말이다. 일단 상나라의 갑골 문자 이전에도 그 원형인 골각문자가 있었고, 기록 여부를 떠나 고고학적으로도 상나라의 인신공양 흔적이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상나라보다 오래된 얼리터우 문화에서도 인신공양 흔적은 일부 발견되지만, 순장 흔적은 없고 인신공양의 규모도 상나라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은나라(상나라)의 주왕 제신 포락지형 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사기》의 기록이 약간 잘못된 것이다.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상나라에서 행해왔던 것이다.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에 따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공양을 줄이려고 했는데,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어 《사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나라 멸망 이후 서주 시절 인신공양 풍습은 점차 사라져 중기 이후부턴 그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허나 서주가 견융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고 권위를 잃은 동주( 춘추전국시대)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신공양은 다시 부활하게 된다.[48] 봉건제 특성상 지역 혹은 제후마다 제도나 풍습을 달리 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보이는데, 주왕실의 권위가 강할 때는 악습을 금지하라는 명을 제후국이 따랐지만 약화되자 명을 받들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중화권에서 이와 같은 악습은 유가[49] 등 지식인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아 차츰 줄어들었고, 순장같은 경우 수나라 시절 완전히 사라졌지만, 이후 북방 정복왕조의 중원 침입 등이 겹쳐 부활 금지를 반복하다 청나라 중기 강희제 대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진다.

8.1. 아즈텍 제국과의 비교

도시국가 집단 + 주변의 이민족들 + 대규모의 인신공양이라는 특징을 놓고 볼 때 역사 속에서 상나라와 가장 닮은 문명은 아메리카에 위치한 아즈텍 제국이다. 상나라의 식인 행위도 사료[50]에 심심찮게 나오는데, 이 또한 아즈텍과 비슷하다.[51] 또한 상나라가 있었던 시절에는 중국 대륙에 습지가 있는 밀림 지역이 많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그 상조차 아즈텍의 그것보단 덜해서, 아즈텍은 멸망하기 직전까지 대규모로 식인이 행해졌다.

애초에 상기된 주 문왕의 사례 및 춘추전국시대에 나오는 식인 일화는, 당대 서술에서도 극악한 죄라고 낙인이 찍힌 친지를 요리해 짐승 고기라고 속여 먹임으로써 씻을 수 없는 죄의식과 굴욕을 느끼게 하는 패륜을 범하게 만드는 ' 처벌'의 의도가 강했기에[52], 일상적인 제도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에 반해 아즈텍은 인육 자체가 사회적인 금기로 치부되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많은 문화권에서 인신공양까진 몰라도 식인은 단발성의 소규모라도 잘 보기 힘든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아즈텍은 전쟁조차도 살해가 목적이 아닌 생포해서 먹는 방향으로 무기와 전술 자체가 기형적으로 변이될 만큼 인육이 군사, 사회, 정치를 잠식했다. 이 방식은 훗날 에르난 코르테스와의 전쟁 당시 아즈텍군에게 지장이 되었을 정도였다. 살상 목적이 아니라 잡아가서 먹으려고 생포하기 위한 전투를 하니 무기도 날카롭지 않고 적당히 상처를 입히는 식으로 발달했는데, 코르테스 휘하의 스페인 용병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살해할 목적으로 최대한 위력이 강한 철제 무기로 무장했다.

의식이나 국가 행사의 경우, 고대 중국에서는 대중의 참여보다는 귀족이나 주술사 같은 제의 당사자의 복잡한 예식과,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덜 자극적인 생매장과 수몰을 선호했다. 반면 아즈텍 제국을 위시한 메소아메리카에서는 북적북적한 축제를 벌이며 사방에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시 중심부의 높은 제단에 희생자를 눕힌 후 배나 가슴을 가르는 모습을 보며 군중이 환호하는 퍼포먼스가 하이라이트였던 자유분방함이 특징인 대중적인 오락거리였던 점이 다르다.

한편, 인신공양 외 상과 아즈텍의 공통점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칭하는 명칭과 외부 민족들이 칭하는 명칭이 각기 달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스스로 메시카(Mēxihcah)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겐 아즈텍이라 불렸고, 상나라 또한 주변 지역민들에 의해 은이라고 불렸던 점이 유사하다. 참고로 이 메시카는 오늘날 멕시코의 어원이기도 하다.[53]

8.2. 《상나라 정벌》에서의 서술

2022년 중국의 기자 출신 역사학자 '리숴(李碩)'는 대중역사서 《전상(翦商)》을 출간했고, 2024년 한국에서는 《상나라 정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 상나라 정벌에서 서술된 주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54]

- 신정일치 국가인 상나라에서 인신공양은 보편적이었다.[55] 상나라 이전 ' 하나라( 얼리터우)'에서도 소규모의 인신공양 흔적이 발견된다.

- 의외로 상나라 초기 70~100여년간은 의식에 돼지 등 가축을 주 희생물로 썼지 인신공양 풍습은 발견되지 않았거나 두드러지지 않았다. 허나 이후 상나라가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인신공양 풍습이 일종의 국가종교 수준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 상 전기 말[56], 사람이나 가축 대신 청동기만 묻는 일종의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어 고위층 차원의 인신공양 폐지 시도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개혁파가 패하면서[57] 급격한 복고로 이어졌으며 그 반동으로 중기 상나라는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인신공양의 횟수와 잔혹성이 크게 증가했다.

- 상나라의 외부 거점 중 하나인 후베이 판룽청 지역은 특이하게도 현지 문화와 어느정도 동화되면서 인신공양 문화가 순화된 양상을 보인다. 이것이 당대 상 왕실에까지 영향을 끼쳐 종교 개혁을 불러왔을 확률이 있지만, 복고 과정에서 반대파들이 일종의 교훈(?)을 얻었는지 이후 상나라 지배층이 현지 세력과 문화가 융합되는 현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비슷한 봉건제지만 주나라와의 차이다.

- 주는 명칭만 같을 뿐 크게 3개로 나뉘는데, 강성주족[58]이 첫번째고, 2번째는 무정이 분봉한 상족 제후국 주가 있지만 이쪽은 존속 기간이 매우 짧았다. 그리고 3번째가 상나라를 멸망시키는 희성주족이다. 이 3개를 학자들도 잘 구분하지 못하다 보니 고대사가 복잡하게 꼬인 감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 상나라는 주로 서쪽의 이민족인 강족[59]을 대상으로 인신공양을 하면서 발전했다. 상족의 종교관에서 는 변덕스럽고 잔혹한 신이었기 때문에, 꾸준한 제사로 만족시켜야 했다.

- 희성주족은 후직 아들 부줄 이후 북방 산지 오랑캐 구역에 스스로 들어가 나름 평온하게 혼란을 피해 살다[60], 시간이 지나 주문왕의 조부 고공단보 때 다시 내려와[61] 친척뻘인 강족 사냥을 하면서 상나라에 이권을 제공받는 속국이 되었다. 주족은 오랫동안 상나라에 봉사하면서 상당히 상나라화 된다.

- 후기 상나라는 반경 은허 천도로 시작된다. 이전과 달리 은허는 벽으로 둘러쌓인 도시가 아니라 상족에서 유래한 각 씨족 (상나라는 배타적이었기 때문에 족내혼을 했다)의 읍이 집합을 이루는 형태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성내 귀족이 형성되지 않고 각 읍의 씨족은 독립성이 어느정도 보장되었으며, 인신공양은 중앙 귀족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행사가 아니라 각 읍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덕분에 읍 중에서는 인신공양 풍습을 거부한 읍도 일부 있었다.

- 후기 상나라의 인신공양은 왕족의 경우 자신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거나 아이가 남아인지와 같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사유에 대해서도 인신공양을 지낸 갑골문이 남아있을 정도로 일상적이었으며, 꾸준히 대규모 순장을 지냈다.

- 저자는 상나라의 제사는 조상신에게 제수품을 주는 의미도 있으나, 한편으론 제사하고 남은 음식들을 먹는 축제의 성격도 있었기에, 상족 중하류층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그토록 제사행위가 활발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 상 말기인 제을, 제신때에 이르러 상 왕족들은 스스로를 조상신 제와 동일시했으며, 이러한 왕권 강화의 일원으로 인신공양의 대상을 기존의 강족, 강족 족장 뿐 아니라 상족 귀족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행보는 상족 씨족집단의 큰 원한을 샀으며, 이후 은주혁명에서 일부 상족이 주족에 동조한 원인으로 분석한다.

- 백읍고는 상에 불경을 저질러 살해당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상과 주의 동맹 의식으로 볼 여지가 있다. 상 주왕 입장에선 주 문왕 가족을 자기 선조들에게 제수품으로 바치고 함께 먹기까지 했으니, 오히려 상나라 종교 질서 안에 미개한 주족들을 포함시켜 축복한 것이라는 논리다. 허나 주왕의 속내가 무엇이었든간에 다른 문화권인 주족 입장에선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었고, 이는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킬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된다.

- 허나 초기엔 문왕조차 아직 상족의 종교 이론을 부정할 확신이 없었기에 긴가민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문왕은 상족의 역괘를 배워 본인 나름대로 발전시켰는데[62], 본인 자택에서 상왕만 할 수 있는 갑골복사를 몰래 흉내낸[63] 흔적도 있어 상나라 정벌 이전 상제에게 스스로 교감해 불운을 피하고 역괘와 갑골복사 둘을 섞으려는 일종의 종교 실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상족 외 종족도 상제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왕의 점술 능력이 집대성화된게 역경이고, 오늘날 주류 해석들과 달리 역경의 원문은 주 문왕이 개인사를 점치면서 일종의 종교적 신비에 빠져들었던 기록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대 문화사를 추정한다.

- 문왕 사후 왕이 된 주 무왕은 상을 진짜 멸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면서도 부친이 재해석해 창시한 상제 종교 원리나 동생 단의 덕이란 개념을 완전히 믿진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목야대전의 승리 후 대규모 인신공양제사로 나타나게 됐다고 보기도 한다. 목야대전의 기적적인 승리 후 주왕이 분신자살하자[64] 무왕은 이를 종교 의식적으로 타파해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인신공양제사를 지내는데, 주로 주에 마지막까지 반항하던 상족 포로들이 대상이었다. 저자는 이런 행위를 크게 2가지 관점에서 추론했는데, 하나는 무왕의 복수극이고, 다른 하나는 무왕 자신의 상화[65]로 봤다. 때문에 무왕은 수명이 길었다면 상을 무너뜨린 창업군주이긴 하지만 무정처럼 살육의 제사를 벌인 암도 있는 군주로 기록되었을지 모른다며, 굴원의 '천문'에 따르면 동생 주공 단은 무왕이 상의 전철을 다시 밟으려 한다고 생각해 불만을 표시했다고 봤다.

- 무왕이 상을 멸한 후 불과 22개월만에 사망하고[66], 어린 성왕 대신 주왕실은 주공단 섭정하게 된다. 이시기 '삼감의 난'이 일어나고 이를 토벌하면서 은허의 은상 유적은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는데, 저자는 이를 주공단 세력이 은상의 인신공양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문헌과 기록을 말소함으로써 주족의 흑역사와 상족의 악습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도록 은폐하려 한 흔적으로 봤다. 그리고 여기에 '천명'으로 대표되는 주나라의 새로운 세속화된 신앙 문화를 개찬한다. 서주 초 집권 세력들은 망각이 효과적인 악습 철폐 방법이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 주나라는 강대한 상족 세력을 분리시키기 위해 유민들을 주의 근거지인 관중으로 이주시키거나 에 보내고, 낙읍 천도도 행하는데[67] 이때도 상당수 상족들 사이에선 인신공양 적폐가 남아있었는지 고고학적으로 다른 상족 이주 지역은 거의 없거나 덜한데, 낙읍 일대 특히 상족 청동기 제작 일대 특수 작업장에서 심했다고 한다. 이는 수십년이 지난 주목왕때가 되어서야 폐기되는데, 다른 제사장에서도 정도가 덜할 뿐 발견되는 것을 봐 이른바 상나라 전통 문화를 고수하려는 완고한 백성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지역이 낙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낙읍 내에서도 주족 지역은 이런게 없어 서로 같은 도시권에 살면서도 상족과 주족 문화가 분리되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족의 행태에 성왕과 주공이 분노했다고 보여지는 대목이 상서에 전해진다.[68]

- 이외에도 주 왕조의 통제 범위 밖 이민족 지역이나 송과 사씨 설국처럼 주에 정복되지 않은 상족 방국에서도 악습 형태가 간간이 보이나 서주 전기를 지나면서 많이 사라진다. 연나라 도성에서도 의외로 순장자 비율이 높은데, 이는 연나라 이전 그 지역에 살던 이민족 문화가 연 초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왕실에서 거리가 먼 영향도 있을듯. 관중 지역에도 상 유민이나 한중 지역 출신으로 보이는 무덤에 순장 흔적이 있는데, 상 멸망전에 함께 뛰어든 맹우 신분이라 주나라도 첨엔 강하게 금지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대다수가 서주 중기에 가면 없어진다.

- '상제' 개념도 계승은 하나 점점 약화시켜 '천' 개념으로 변화하고, 상족에겐 상제, 주족에겐 '덕' 개념을 설파한다.[69] 결국 하늘은 변덕스러워 인간이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어려우니, 인간 세상의 의무(덕?)를 잘 수행하면 하늘은 알아서 돕는다는 것이다. 성왕이 즉위하면서 주공과 소공은 농부, 농노 등 소민들의 보호 개념도 설파하는데, 이는 귀족의 지나친 학대, 착취에서 그들을 보호해야 천명의 보살핌을 얻는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문자 기록은 서주시대에 거의 없앴으나, 구전은 막을 수가 없어서 주왕실의 권위가 약해진 춘추시대부터 다시 일부 제후국에서 인신공양 풍습이 벌어지게 된다. 상의 후예인 송양공이 흉내낸 흔적도 보인다. 허나 양공의 형 사마자어가 "가축을 희생시키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데 사람은 어떠한가"라고 비판한 것을 보면 송에서도 이미 인신공양 문화가 한동안 근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공단의 장남이 세운 노나라도 삼환 계평자 시절[70] 처음으로 거나라 정벌 뒤 포로를 제물로 바치는데, 당시 한 노나라 귀족에게 "주공의 영령이 아마도 다신 노나라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받는다.[71] 그리고 이런 행위는 유가 등 지식인들의 거센 비판을 받아 주류화되지 못한다.

- 약 500년 뒤 인물인 공자 역경을 연구하면서[72] 이러한 주 문공의 기록말살[73]과 그 배후에 있던 상나라의 인신공양 풍습을 어느정도 알아차린 것으로 보이나, 상나라의 후예였던 그는 주공의 그러한 은폐에 동조했으므로 상나라의 인신공양 문화는 고고학을 통해 다시 밝히기 전까지 잊혀졌다고 주장했다.

물론 해당 내용은 학계의 정설이라기보단 저자의 설일 뿐이므로 따져볼 내용은 있다. 일단 저자의 전공은 상주시대가 아니라 위진남북조시대인데다[74] 사료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부분[75]에서는 어느 정도 비약이 존재하는 등 지나치게 주관적인 주장도 담고 있다.[76] 중국의 상주시대 전문가인 절강대학교 우쩡치앙(吴铮强) 교수는 "이 작품은 다량의 고고학 자료와 고전을 소재로 하고, 학술적 성과도 많이 흡수하고 있어 일반 독자들에게는 학문적으로 보이지만, 이 책의 혁신적 서술의 상당수는 역사적 자료와 논리를 바탕으로 추론한 학문적 결론이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고대사는 많진 않은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밖에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도 맹신보단 어느정도의 근거를 갖춘 흥미로운 주장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9. 창작물에서

10. 기타

11. 참고할 만한 사이트 및 문헌

해당 문서는 레퍼런스 표기 없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전공자가 일부 교정을 봤지만, 실제 과제나 레포트에 참고하기에는 제법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신뢰할 수 있는 참고 사이트 및 문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고대문명연구소(IREC)의 상(商)나라 관련 강연들[77]

2. 《중국고대사》(리펑 저, 이청규 역, 사회평론):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현재 미국의 중국고대사 학계를 주도하는 리펑 교수의 역작이다. 이청규가 번역했고 역자 후기에 따르면 심재훈 교수가 상당수 감수를 맡았다고 한다. 책 초반 고고학사 서술 관련 부분은 의고 사조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으며, 중국계이신 저자의 학술 지향이 반영된 부분이라 유의할 필요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중국 고대사 입문서로서 필독서이다.

3. 《중국고고학》(류리 천싱찬 저, 김정열 역, 사회평론): 숭실대에서 중국 고고학을 가르치는 김정열 교수의 번역서이다. 여담이지만 김정열 교수는 숭실대에서 서주 문헌 연구로 박사를 한 후 중국사회과학원으로 넘어가 고고학 박사를 역임한, 박사 학위가 2개 있는 교수이다. 2, 3 두 개의 논저는 그래도 2000년대 후반까지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4. 《상 문명》(장광직 저, 윤내현 역, 민음사, 1988년): 이외에 재야사학계의 신(?)이라 불리는 단국대 윤내현이 번역한 《상 문명》이라는 책도 유명하다. 중국 고대사학계의 거장이셨던 장광직이 쓴 책인데 1970년대까지의 연구성과가 집약되어 현재로서는 다소 낡은 감이 있다. 윤내현이 한국 고대사 관련 논의로는 학계에서 수용받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 중국 고대사 전공자로서는 손색이 없다. 그의 제자인 단국대 사학과의 심재훈 교수가 현재 한국의 동아시아 고대사 담론을 주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 역시 해당 교수가 조교 시절에 초벌 번역에 참여, 중국 고대사 공부의 본격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2016, 푸른역사 참조)

5. 《갑골학 일백년》(왕우신 양승남 저, 하영삼 역): 갑골문을 공부하려는 사람의 필독서이지만, 사실 갑골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고급 수준의 현대 중국어와 한문(고문) 실력이 기본 베이스로 깔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유념해야 한다. 전공 수준으로 들어갈 사람이 아니라면 섣불리 도전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6. 《중국 청동기 시대》(장광직 저, 하영삼 역):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사의 대가인 하버드 故 장광직 교수의 명저이나 역시 현재 중국 고대사 학계 기준으로는 다소 옛날 담론들도 존재한다. 상•하 2권이다.

7. < 이리강 상 제국론의 허와 실>: 중국고중세사연구(KCI 등재지) 논문. 상나라 전기에 관련된 최근 연구로는 작년 출간된 해당 논문이 있다. 다만 한자가 많고 도판이 없으며, 고대 근동과의 비교문명적 접근도 있기 때문에 중국 고대사에 흥미가 있는 비전공자로서도 접근하기 쉬운 논문은 아니다. 중국고대사 블로그에 관련 논문이 요약되어 있다. 이리강(二里崗; 얼리강) 상(商) 문화 맛보기.

이리강이라는 용어에 대해 부연하자면, 하나라로 추정되는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이리두(얼리터우) 문화라 부르는 것처럼 상나라 전기는 고고학적으로 이리강(얼리강; Erligang 二里崗)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시기 역시도 문자 기록은 없기 때문에 고고문화적인 유사성만으로 막연히 이리강이 상나라라고 단정할 뿐이다. 여담으로 중국 고고학 전공 모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 '이리'(二里)가 붙은 지명은 흔하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왕십리 비스무리한 표현으로 보면 된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한어 발음은 staŋ, 현대 중국어로는 Shāng. 商은 현대의 한자이며 갑골 문자로는 다음과 같다. # [2] 녹색으로 칠해진 영역 모두가 실제 지배했던 영역은 아니며, 상고시대 국가의 특성상 간접적 영향력을 미친 지역을 포함해 작성된 것이다. 중국 역사학계 일각의 국가주의적 색채 역시 감안해야 한다. 영어권의 상나라 연구자인 데이비드 키틀리는 상나라의 영역이 "스위스 치즈"와 같이 영역 내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고 그 구멍 내에는 비상(非商) 정치체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리펑 저, 이청규 역 《중국고대사》 참조. 여담으로 이 책은 역자 후기에도 언급되어있듯 국내에 극소수인 미국 유학파 중국고대사 전공자인 단국대 심재훈 교수가 교정에 참여했다. [3] 현대 중국어로는 Yīn. [4] 읍은 현대 한국에서는 면(面)보다 큰 행정단위의 의미가 있으나 중국 상고시대에는 도시를 뜻했다. [5] 당시 명칭은 은으로 은허는 '은의 터, 유적'이라는 뜻이다. 은은 반경왕 시대부터의 수도였다. [6] 상나라 전기에 수도를 여러번 옮겼고, 말기에는 '조가(朝歌)'로 천도했다. [7] 당시 '帝'는 황제라기보다는 최고신(最高神; 영어로는 Supreme deity)의 의미가 있었고 상나라 군주들이 왕권을 드높이기 위해 帝를 자처했다고 하나, 왕권 강화 의도였는지는 추론의 영역으로 보이며 직접적인 갑골 증거가 있는지 검증이 필요하다. 물론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이 제신으로 불린 것은 사실이다. [8] 상족의 최고신으로 상제(上帝)를 섬겼다. 신탁(神託)을 받아 통치하는 상나라의 왕들 역시 제(帝)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했었는데 이것은 후에 황제(皇帝)의 어원이 된다. [9] 고고학적으로 보면, 상나라 전 황하 유역에 국(國)이라 불릴만한 제법 큰 도시 문화가 있었던건 사실이다. 다만 이리두(얼리터우) 문화를 문헌사학의 하나라와 '동일시'할 명확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단지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개연적인 추정들만 할 뿐이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물론 문헌 속 하나라가 이리두 문화와 동일하든 말든, 이리두 문화 자체는 고고학적 실재가 입증되어있다. [10] 상나라 본토는 주나라에게 상실되었지만, 주나라에 협조한 상나라 자성 왕실과 유민들이 송나라로 옮겨졌다. [11]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로 추정한 것이며, 정확한 건국 및 멸망 연도는 알기 어렵다. 멸망 시점을 기원전 1112년으로 보는 설도 있다. [12] 당대에는 고대사를 의심 혹은 부정하는 의고(疑古; 의고체 할 때 擬古가 절대 아니다.) 사조가 유행했으며, 지금도 서구 학계에서는 의고 사조가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사실 극단적인 의고는 지양해야 하지만 고대사에 대한 사료 비판으로서 의고는 서구 학계 뿐 아니라 중국 학계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지지를 얻고 있다. [13] 이는 문헌 속의 하나라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 그렇다고 상나라 전 중국에 국가가 없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고고학적 시각에서 상나라 전 중국은 이미 도시를 건설할 정도로 발달했고, 충분히 국(國)이라 불릴만한 정치체들이 있었다. 단지 이 정치체들을 문헌 속 하나라와 동일시할 증거가 없을 뿐이다. 즉, 고고학계가 의문시하는 건 '하나라'이지 '상나라 전 국가'가 아니다. (참고: 이유표. 「‘夏文化’의 함정 ― ‘禹’, ‘夏’, ‘二里頭’의 관계 ―」 중국고중세사연구 no.58[2020]) [14] 서구인들도 Shang이라고 하며(은은 한어 병음 표기에 따라 Yin), 21세기 들어선 중국에서도 상이라고 부르는 추세다. 다만 학계에서도 갑골문은 주로 은에서 나왔기 때문에 갑골학사에서는 은이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15] 초기에는 상과 혼용하다가 나중에 은으로만 부르게 되었다. 이를 주나라 사람들이 부른 폄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16] 은허는 '은의 터, 유적'이라는 뜻이고 당시 명칭은 은이었다. 막판에는 약간 아래 있는 '조가(朝歌)'로 가기도 했다. [17] 이는 중동의 히타이트와 비슷하다. 히타이트도 네샤에서 하투샤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들 스스로는 계속 네샤인이라 불렀으나 주변 국가들은 하투샤인이라는 뜻의 하티라고 불렀다. [18] 학계에서는 상나라를 건국하고 지배한 종족에 대해 독립적인 표현을 쓸 때 상(商)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따 상족(商族)이라고 칭하고 있다. [19] 갑골문에서 은(殷)의 통가자로 의(衣)를 사용했다. 衣와 殷은 상고한어에서 끝소리가[r] 또는 [l]로 추정되며, 나중에 이것이 [j]와 [n]으로 갈라진 듯 하다. [20] 멸망 후 유민들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하고, 상나라 건국 전후 시기부터 이미 무역에 정통했기에 이렇게 불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21] 다만 일반적으로 중국 왕조사에서 "건국자" 내지는 "개국군주"(바이두 백과에서 성탕을 이와 같이 규정한다) 같은 표현은 기존에 있었던 중원 왕조를 밀어내고, 새로운 왕조가 중원에서 패권을 잡도록 한 군주에게 사용되기에 성탕이 건국자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제후국 수준이던 상나라를 천자국으로 중흥시킨게 성탕이었다고 이해하면 말이 된다. 애초에 갑골문에서도 읍을 건설한다는 서술은 있어도 건국이라는 표현 자체는 쓰지 않는다. '국'(國)은 전근대에 States를 지칭하기보다는 도시에 사용했다. [22] 이것보다 현대 학계에서 더 의문시하는건, 현존하는 갑골문에는 상이 하를 멸망시켰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하가 존재했다는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에 반론측에선 애초에 갑골문은 점 치는데 쓴 기록이라 왕조변천사는 안쓴 것 혹은 없어진 갑골문에 있었지 않겠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23] 물론 오늘날엔 진짜 설이 제곡과 연관이 있는지 후대의 미화인지는 알 길이 없다. 여담으로 주족의 시조인 후직(后稷) 역시 제곡과 연결되는데, 여긴 모친인 강원이 제곡의 정비였다고 한다. 허나 이 역시 아무래도 후대에 미화,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주족 계보는 당시 상의 계보를 토대로 가탁하여 자신들의 조상 계보를 돋보이게 하고, 왕실의 권위를 미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성이 보인다. 강원이 제곡 고신의 첫번째 비고, 간적이 두번째 비라는 것만 봐도.. [24] 사실 이건 오늘날에도 특별한 일은 아니라, 상당수의 중국 성씨들이 황제 헌원씨의 후예로 가탁하거나 일부는 염제 신농씨 등 삼황오제의 후예로 가탁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것이 전한의 한량태조 유방이 염제를 뜻하는 적제의 후손임을 사칭해 사람들에게 자신을 천자의 재목인 것처럼 현혹한 일이다. 이와 같은 맥락의 주나라 기록은 당시 상나라 기록의 정합성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명 수준 및 국가 체계의 권위를 방증한다고 볼 수도 있다. [25] 막판엔 약간 아래쪽인 조가(朝歌)로 도읍을 이동했다고 보기도 한다. [26] 물론 아예 없는건 아니라 관중 지역의 주문왕 저택에서도 갑골문이 발견된 바 있다. [27] 오거가 (걱정하며) 말했다. "(하나라) 걸왕은 유잉에서 회맹한 후 유민에게 배반당했고, (상나라) 주왕은 여산에서 회맹한 후 동이에게 배반당했으며, (주나라) 유왕은 태실에서 회맹한 후 융적에게 배반당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지막이 중요하니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伍舉曰 "桀為有仍之會 有緡叛之 紂為黎山之會 東夷叛之 幽王為太室之 戎 翟叛 君其慎終" - 《사기》 [28] 이러한 동방 진출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된다. [29] 여담으로 전국시대 7웅 중 전제의 선왕은 맹자에게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의 주왕을 죽이며 상나라를 무너뜨린 것에 대하여 '신하가 왕을 죽여도 되느냐'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인의(仁義)를 잃어버리면 왕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一夫)일 뿐이므로 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일부(一夫)를 죽인 것이라며 역성혁명을 정당화했다. 다만 일각에선 법가 계열이 진짜 왕도 법 안지키면 얄짤없이 처벌해야 된다고 봤던 반면, 유가는 최대한 간언하면서 군주를 깨우치게 하다가 도저히 안되면 역성혁명이라도 일으켜라고 봤던 것으로 뉘앙스 차이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도가는 소국과민에서 알 수 있듯 애초부터 제국 따위를 만드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30] 유의할 점은 선진시대의 동이(東夷)는 우리가 생각하던 고조선이 아닌 산동 반도 지역의 이민족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애당초 동쪽 오랑캐라는 표현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지칭 대상이 극히 유동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비전공자나 재야사학계에서 선진 문헌의 기록을 고조선과 끊임없이 연관짓고 싶어하는 기류가 있는 데 유의해야 할 접근이다. [31] 여담으로 훗날 동아시아 문화권에 큰 영향을 기친 노나라 사람 공자도 가문이 송나라 출신이었다. 좀 더 정확하겐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에서 상왕실의 후손인 공자의 부친이 자성 송씨에서 자성 공씨로 바꾸고, 노나라에 건너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자 역시 상나라 출신이라고 본인을 생각해 상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장례할 것을 유언했다. 다만 공자의 위명이 더해져 후대에 과장 혹은 창작된 기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공자는 아비가 일찍 사망하는 등 거의 반사생아 수준의 몰락한 집안 출신이었다. [32] 물론 수주대토 등의 일화에서 보이듯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사람들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상당수는 그들을 낮게 보면서도 상당수는 귀하게 여긴 일종의 양가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일듯하다. [33] 참고로 문화와 문명을 구분짓는 주요 기준이 주로 도시화, 야금술 혹은 계급 분화, 문자 보유 여부이다. 다른 문화도 문명 수준의 발전을 이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역사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얼리터우도 문자 유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있어도 부락 수준이었다. [34] 국제사회는 미국 위주로 돌아가긴 하나 명목상 대등한 관계이다. 그러나 상(商)나라는 갑골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최소한 주변 국가들에게 명목상으로도 상나라의 주도권을 인정할 것을 촉구한 듯 보인다. [35] 소위 '스위스 치즈'와 같은 영역, 즉 상나라 영역 내에 다수의 뻥 뚫린듯한 비상(非商) 영역이 있었다는 데이비드 키틀리의 비유가 유명하다. [36] 상나라 유적에서 현재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 열대 기후의 코끼리와 코뿔소 화석이 나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마크 엘빈은 《코끼리의 후퇴》라는 기후사 서적에서 이 점을 고찰한 바 있다. [37] 논어》의 유명한 "하나라의 예법은 기나라가 증명해줄 수 없으며 송나라의 예법은 은나라가 증명해줄 수 없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가 유명한데, 중국의 고대사 학계에서도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를 비유할 때 자주 사용한다. [38] 허나 이는 해석 오류라는 주장도 있다. 역사학자 리숴에 따르면 (아마도 무정 시기) 상이 정벌하려 했던 세력은 희성주족이 아니라 희성주족의 친척뻘인 강성주족이라는 것. [39] 도철은 재물과 음식을 몹시 탐낸다는 사흉 중 하나인 상상의 동물이다. [40] 철기는 주나라 서아시아를 통해 유입되었다. 본격적인 철기 시대가 열리는건 전국시대 무렵부터. [41] 기와는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42] 이해 편의상, 갑골문 원문을 한자로 치환해서 적었으며, 해석은 상명대 중국어 문학과 김경일 교수의 것을 참조했다. 다른 인용문도 같다. [43] 女와 才가 붙은 글자인데, 일단 임시로 '재'로 읽었다. [44] 상나라와 동시대였던 중동에서도 여러 인신공양 기록이 남아 있는데, 가령 성경에 나오는 바알 신은 유아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바이킹은 중세 중기까지 인신공양을 행했으며, 마야 아즈텍같은 중남미 문명엔 15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올 때까지도 이런 풍습이 남아 있었다. [45] 발굴된 솥에 삶긴 사람의 두개골과 치아 등을 분석한 결과, 지금의 안후이성 루안시 지역에서 잡혀온 소녀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충치가 없는 것으로 보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지체 있는 집안의 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안시와 은허 사이의 거리는 500km가 넘는데, 당시 상나라가 실행한 정복전쟁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다. [46] 다만 아즈텍과는 달리 식인을 확증할만한 고고학적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일단 아즈텍의 경우에는 주변에 단백질 공급원이 그닥 많지 않았지만, 중국 같은 경우는 훗날 가축이 될 여러 동물들이 많았다. [47] 다만 미국의 갑골 연구자 키틀리에 따르면, 상나라에는 유물론자들이 소위 고대 노예제 사회라고 하며 자주 쓰는 서구권의 노예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48] 예를 들어 (상나라 세력이 만든) 송나라의 양공과 패자 소리까지 듣던 진나라 목공도 죽으면서 신하들을 대거 순장시켰다고 알려져있다. [49] 공자와 유가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인신공양의 풍습을 철폐했다는 기록은 상당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유가에서 ' 괴력난신을 멀리해야 한다'라고 말한 이유도 이와 관련있다. 공자는 순장 대용 인형인 용(俑)조차도 좋지 않게 봤고, "이걸 발명한 사람은 대가 끊어지리라!"라고 저주한 바 있다. [50] 기록상으로도, 상나라의 주왕 제신 주문왕 희창의 장자인 희 백읍고를 죽이고 요리해서 그것을 문왕에게 먹였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51] 사족으로, 에게해의 고대 크레타 문명 또한 주변 국가들에게서 유력자들의 어린 자식들을 제물로 받아 잡아먹는 식인 문화가 있었는데, 고대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상대로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식인 행위를 한 것은 그 사례를 종종 찾을 수 있다. 참고로 크레타 문명의 식인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미노타우로스 전설이다. 항목 참고. [52] 다만 주왕을 옹호하는 측에선 오히려 주왕이 상나라 풍습에 따라 같이 피를 나눠마시며 동질 의식을 표한 것이라는 정반대의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멀쩡한 가족 잃은 문왕 일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53] 아즈테카란 명칭은, 국가가 존재했던 당시, 복속되거나 적대한 메소아메리카인들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더군다나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도 아즈테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즈틀란 섬에서 남쪽 멕시코 고원지대로 이주했다는 설화는 메시카인들만이 아니라, 여러 나우아틀계 부족들이 공유하던 신화 체계였다. 즉,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명칭인 것이다. 테노치티틀란을 위시한 멕시코 영향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한 것은 1843년 윌리엄 H. 프레스콧의 저서 《멕시코의 정복》에서 스페인화된 이후로도 수도와 국명으로 쓰이는 멕시코란 명칭이 직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스페인 점령 이전 멕시코를 "아즈텍"이라고 명명했던 것이 역사학계에 큰 영향력을 미쳐 표현이 굳어진 사례이다. [54] 다만 일부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보자. [55] 파일:1712451991.jpg [56] 저자는 태무~ 중정 무렵으로 추정했다. [57] 저자는 이를 고전에 서술된 상나라 내전기로 추정했다. [58] 산해경에 따르면 후직의 아우 태새의 아들 숙균 후손들이 상나라 진출 이전부터 쭉 관중 주원 땅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상왕 무정 시기 정벌당한 것으로 보인다. 즉, 후직의 희성주족이나 태새의 강성주족(강족)이나 이렇게 보면 먼 친척뻘이다. [59] 훗날 주무왕을 도와 상을 멸망시킨 강태공도 강족(강성주족)이었다. [60] 다만 리숴가 말하는 설과 달리, 일부 학자들은 주족이 관중 평야지대에 살던 정주민이었다 산에 간게 아니라, 애초에 유목민이었다가 고공단보 시절 정주 생활로 전환했다고 보기도 한다. [61] 저자는 사서엔 융적에게 위협당해 내려왔다고 하지만 고고학적으론 침입 흔적이 딱히 보이지 않아, 상나라 무을 시절 서쪽 확장을 하면서 고공단보 세력을 일종의 스카웃했을거란 추론을 펼치기도 했다. [62] 덕분에 유리성에 몇년간 갇히는 위기를 겪었음에도 주왕에게 재신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 문왕이 주왕 원정에 점을 봐준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63] 20세기 발굴된 문왕 자택의 숨겨진 지하 토굴에서 매우 작은 글씨로 갑골점을 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아무래도 문왕이 직접 행했을 확률이 가장 높다. [64] 이것도 종교 의식적으로 보면 주왕이 마냥 절망해 자살했다기보단, 본인의 봉헌 행위 즉 자신이 제신이 되어 하늘에서 너희를 벌하리라라는 종교적 근거를 가지고 벌인 일로 해석하기도 한다. [65] 투항했지만 여전히 그들 특유의 종교 의식은 투철한 상족들 감화용 혹은 원망스런 상족 세력 약화를 위한 의도적 학살극 또는 이정도 제물을 바쳐야만 상왕실의 상제가 주왕실의 상제로 바뀔거란 종교적 기대 등. [66] 이때 주공단은 제사를 지내며 아픈 형 대신 자신을 데려가라고 하늘에 기원했는데, 저자에 따르면 주공단 역시 이때까지는 진짜 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었는지 약간의 위선을 부려 형의 병을 낫게 해달라며 제사 의식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대신 신이 직접 와 받아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식으로 신의 능력을 떠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세속적인 도덕 논리는 이후 구체적으로 구축됐다고 봤다. [67] 이 일은 소공석이 담당했다고 한다. 다만 성왕은 친정 후 낙읍에서 조금만 머물다 다시 호경으로 돌아가는데, 저자는 낙읍 거주민 중 다수를 차지하는 상족들과의 어색함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래도 낙읍은 이후에도 상족과 주족 등이 어울려 살며 대읍으로 기능하는데(호경이 털린 동주 시대엔 아예 수도가 된다), 주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상 유민들의 복벽 시도는 없었다고 한다. [68] 상나라 주민들이 왕조가 바뀐 위대한 천명을 모르고 여전히 제사를 공경히 지내지 아니하고 포학하니 등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이번엔 말로만 설교하지만 왕명을 받들지 않으면 담엔 처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화낸 기록이 보인다. 또 상의 옛 핵심지역에 분봉된 위강숙에게 형 주공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직접 형벌을 가하고 죽이거나 코를 베고 귀를 자르라고 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 인신공양이라고 적시하진 않았지만 고고학 연구물과 관련 지으면 인신공양 풍습과 관련된 것으로 볼 개연성은 있다. [69] 현실 정치에 맞게 정치를 이원화한 것인데, 주공은 상나라가 망한건 폭음 문화 때문도 있다고 보고 금주령을 내려 어길 시 주족은 사형, 폭음 문화가 있던 상족은 일단 타일러 가르치라고 명한다. [70] 노나라 사람 공자가 약 20세이던 무렵이다. [71] 이에 대해 저자는 망각이 오히려 후손들의 이해에 역효과를 낸 사례라고 봤다. [72] 사실 공자는 점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말년 무렵엔 역경에 큰 관심을 가져 뚫어져라 쳐다봤다고 전해진다. 이를 위편삼절이라 한다. [73] 허나 주공단도 차마 부친이 쓴 역경은 건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지만, 난해한 문구로 보기 좋게 재해석했다고 저자는 판단했다. 저자는 화하문명이 이렇게 급격히 전향한 것은 주공세대가 은허에서 백읍고를 잃는 등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릴 경험을 하면서 다시는 이와 같은 문화를 접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74] 다만 저자는 저서에서 고대사를 전문으로 하는 동지들 덕을 많이 봤다고 서술했다. 애초에 이 동지들이 없었으면 고대사 서적을 쓸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75] 예를 들어 고대인의 기록되지 않은 감정 등. [76] 예를 들어 강태공이 전국시대부터 진한시대까지의 문헌엔 낚시꾼이 아닌 상 도읍인 조가에서 소 잡는 백정 노릇을 했거나 황하강가 맹진 혹은 극진에서 여관 종업원을 했던 것으로 나온다며, 낚시꾼 설화가 훗날 이를 감추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문헌 자료가 있다니 그러려니 하지만, 강태공이 은허에 제물로 바쳐질 강족 포로로 잡혀왔다 풀려나 생활한 백정 천민일 수 있다는둥 그래서 뼈 구하러 온 상 점술사들의 내막을 잘 알았을 수 있다, 그래서 점술에 관심이 많은 주문왕과 친해져 훗날 주무왕과 결혼하는 강태공 딸 읍강이 원래는 (포로잡이로 사이가 좋지 않은) 주족과 강족의 재연합을 위해 장남인 백읍고랑 먼저 혼인했을 수 있다 같이 확신할 수 없는 가설도 많다. [77] 고대문명연구소는 2020년 심재훈 교수가 설립한 기관으로 중국 외에도 세계의 고대 문명 강연을 제공한다.( 홈페이지 고대중국 청동기 강연 및 중국고대사 재생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