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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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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한국 고고학의 역사
3. 고고학의 시대 분류4. 고고학과5. 고고학자6. 연관 학문, 세부 분야
6.1. 시대에 따른 분류6.2. 분석 방법과 주제6.3. 연관 학문
7. 사건8. 발굴지9. 관련 정보10. 관련 항목11. 외부 링크12. 창작물

1. 개요

고고학(, Archaeology)은 인류의 물질적 자료, 즉 고고학 자료를 통해 문화, 즉 행위, 사회적 조직, 이념 등을 복원하고 그들의 문화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Sharer and Ashmore, 1993)이다.[1] 이걸 연구하는 학자가 고고학자다. 인류 시대 이전의 생명의 역사를 연구하는 고생물학과는 엄연히 다른 학문이다.

사람들이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기도 하는데, 생각보다 아주 흔한 일이다. 고고학자가 꿈이라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발굴체험을 시키면 십중팔구는 " 선생님, 이제 공룡은 언제 찾으러 가요?"가 튀어나오며, 고고학과를 다니거나 사학과에서 고고학 강의를 들었다고 하면 십중팔구 공룡 이야기가 나온다. 이게 꼭 국내에 한정한 얘기만은 아니라서, 신기한 스쿨버스같은 외국 애니에서도 고고학 얘기하는데 화석 타령을 하는 장면이 꽤 나오기도 한다. 인류 역사의 초창기인 선사 시대의 유물을 다루는 분야인 선사고고학이, 체질인류학이나 고인류학 등 사실상 고생물학에 가까운 분야라서 다루는 시기가 겹쳐서 상호 간에 접점이 많기 때문이고,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고고학이라고 하면 선사고고학을 많이 떠올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2].

일반적으로 특정 시대를 가리지 않고 연구 대상이 된다. 흔히 문헌기록이 없거나 부족한 선사시대 혹은 고대만을 고고학으로 연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중세 근대도 그 적용 방식은 고대와 다를지언정 고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로 들어서도 일제강점기에서 6.25 전쟁, 5.18 민주화운동 시기까지 발굴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사와 관련하여 고고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대표적인 경우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 탐색 작업 및 5.18 당시에 벌어진 계엄군에 의한 학살의 장소로 추정되는 광주교도소의 발굴, 내지는 대한민국 국방부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6.25 전쟁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는 것이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감독인 세실 B. 드밀의 1923년작 영화인 십계의 영화 세트장 유적을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사례도 있다.

그리고 수중고고학은 그 특성상 물 속에 가라앉은 선박이나 유적이 산호같은 수중 생물의 성장이나 바닷물의 염분으로 인한 부식때문에 지속적으로 파괴되어 보존이 어려운 까닭에, 연구 대상인 수중 유적이나 선박, 유물이 대부분 근현대 시기의 것인 경우가 많다[3]. 그래서 이쪽은 육지의 유물을 연구하는 경우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의 것인 고려시대 유물을 인양하는데 성공하기만 해도, 학계의 역사를 새로 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초대박 성과라고 자랑하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산업고고학이라는 용어로 근현대 고고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산업고고학회가 근현대 고고학의 대표적인 학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4]. 산업고고학같은 근현대 시기를 연구하는 고고학 분야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이나 유적을 발굴하는 것[5]말고도, 현존하는 근현대 문화재들을 복원하거나 보존하는 것을 주요 연구 과제로 삼는데, 이런 경우는 연구 대상인 문화재들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유로 보존의 필요성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낮은 탓에, 이들 문화재를 철거하거나 폐기하려는 기업이나 지자체, 정부를 상대로 피말리는 투쟁을 해야하는 상황이다[6].

한반도는 산성 토양이라 땅 속에 묻힌 유기물이 삭아서 없어지기 쉬우며, 이는 한국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데 큰 장애물이다. 고고학은 고분 조사의 비중이 높은데 인골도 삭아 없어지고 나무로 만든 관과 유물들도 없어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2. 역사

고고학은 호고주의(好古主義)라는 과거 유물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다. 학문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며 옛날의 번쩍이는 물건 그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써 르네상스 때에는 주로 딜레탄트(Dilettant)라 불렸다.

19세기가 되면서 지질학 원리가 확립되고 진화론이 나타나며, 인류의 태고성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면서 고고학은 점차 학문적 성격으로 변화하게 된다. 찰스 라이엘이 동일과정설을 주장[7]하게되고 이 영향 속에서 찰스 다윈 진화론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프랑스 솜강에서 고인류의 인골과 석기, 골기가 발견[8]됨에 따라 인간은 창조된 것이 아닌 진화를 통해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아가 크리스티안 톰센에 의해서 3시대법[9]이라는 시대구분론이 주장되게 되었고 이후 존 러복에 의해서 구석기와 신석기를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부터는 이러한 고고학의 태동기를 거쳐 근대적 학문으로써 자리잡게된다. 플린더즈 페트리와 피트 리버스는 발굴의 몇가지 원칙 및 조사 방법론, 연구 방법론을 주장하였으며 오스카 몬텔리우스는 진화론에 입각한 형식학적 방법을 체계화시켜나갔다.[10] 이러한 방법론의 등장 속에서 고든 차일드는 마르크스 주의에 입각하여 유럽 및 중동의 선사시대 유물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광범한 편년체계를 완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주, 전파주의적 관점의 해석을 하였으나 자연과학적 분석방법이 나오면서 그의 이론은 흔들리기 시작했고[11] 유물, 유적을 이해하는 방법론과 관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주와 전파라는 비교적 단순한 해석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루이스 빈포드에 의해서 이른바 과정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고학을 과학의 분야로 간주하여 인간 행동의 일정한 법칙을 찾으려했으며 연역적인 방식으로 가설을 세우고 입증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다양한 이론과 방법론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의 중범위 이론이 대표적이며 연구 방법들 중에서는 민족지고고학, 실험고고학 등이 해당한다. 과정주의 고고학의 풍조가 거치면서 단순히 유물의 기술(記述)의 수준에서 벗어나 왜 유물(또는 유물의 조합)이 어떠한 문화 속에서 관계를 맺어가고 변화해가는지 원인과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고학은 완연한 학문으로써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최근[12]에 들어서는 이안 호더, 크리스토퍼 틸리 등에 의해 이러한 과정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탈과정주의적 고고학[13]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과정주의 고고학에서 내세운 몇가지 관점들을 비판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간 활동의 이면에 일률적으로 작용하는 법칙은 없다는 것이었다. 일반화, 진화론 일변도의 주장과 이론 등을 배격하고 다양한 관점의 고고학─ 구조주의 고고학, 상징주의 고고학, 마르크스 주의 고고학, 젠더 고고학, 퀴어 고고학, 비판 고고학 등을 주창하였다. 다만 탈과정주의의 등장이 과정주의의 종언은 아니며, 탈과정주의의 해체주의적인 질문들은 여전히 현대 고고학에 있어서 큰 질문이자 과제이며 현재의 고고학은 과정주의적 관점과 탈과정주의적 관점이 병존하고 있다.

2.1. 한국 고고학의 역사

근대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이 국내에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과거의 유물과 유적에 대한 관심은 매우 낮았다. 고려ㆍ조선시대에는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금기였으므로 가끔 도굴사건이 나고서 복구하거나, 도굴 당해 버려진 고구려 왕릉 내부 구경 후 벽화 등에 대해 감상문을 남기는 정도의 기록이 남는 정도였다. 그리고 유적을 발굴한다해도(물론 발굴된 기록은 없다.) 기술적인 한계점이 많았다보니 한백겸이 고구려 시대에 건축된 평양 궁성 유적을 보고서 이를 고조선대의 유적으로 착각해서 한 동안 해당 유적이 기자의 정전으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예외적으로 추사 김정희 진흥왕 순수비를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상당히 자세하게 연구하고, 신라진흥왕릉고를 통해 진흥왕릉의 위치를 전진흥왕릉 대신 서악동 고분군으로 비정하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에 밝혀진 성과와도 부합한다. 그러나 김정희의 금석문 연구는 개인적이었고 당대에 끊어져 고고학이 자생할 바탕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최초의 근대적인 고고학 연구는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한국으로 건너 온 일본 학자[14][15]들의 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시기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후 1910년 강제병합 이후로는 일본인들이 모든 고고학 자료를 독점한다. 이들은 새로 일본땅이 된 조선 전역의 유적을 일제히 조사하여 조선고적도보를 편찬했다. 일제는 특히 식민사관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고자 먼저 가야 지역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해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일본 고고학계의 낮은 발굴 수준으로 사실상 도굴이나 다름없는 작업들이 행해졌고,[16] 많은 경우 제대로 된 보고서도 작성되지 않았다.[17] 임나일본부의 증거로 쓸 만한 부분을 찾지 못한 일본인들은 이번에는 평양 낙랑 유적으로 눈을 돌려 한사군 유적을 발굴해 한국이 고대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결국 일본학계의 연구는 한국의 선사시대의 변천을 신석기에서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로 변한다는 식으로 다루었으며, 석기만 쓰다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철기를 받아오면서 성장하는 식으로 중국과 일본이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고 하려던 시도에 불과했다. 물론 가야가 일본에 철을 수출한 것 등이 이후 드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입지만 좁아진 걸 보면 뭐... 이외에 유적지 밀도가 월등히 높고 금관 같은 주목할만한 간판 유물이 나온 경주시도 상당히 관심을 받았으나 그 외 나머지 지역은 일제 학자들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였고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런 빈틈을 노려 일본인 중 가루베 지온 같은 자는 일제 정부의 주목을 덜 받던 공주시 지역에서 사실상 무차별 도굴에 가까운 활동을 지속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인 학자들이 한반도의 고고학을 독점하고 조선 사람은 그저 인부로만 동원됐다보니, 해방 이전에는 제대로 훈련받은 한국인 고고학자가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30년대 도유호, 한흥수, 김재원은 각각 빈, 프라하, 뮌헨 대학에 유학해 고고학을 공부했다. 도유호는 해방 이후 한흥수와 더불어 북한행을 택하고 북한 고고학계를 발전시킨다.

북한은 모든 토지가 국가의 소유였기 때문에 발굴에 용이했고, 선사시대의 무계급 이상 사회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고고학 연구 환경이 용이했다. 북한 고고학계는 한반도에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는 과거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5~60년대 북한은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존재를 증명하고, 도유호는 '조선원시고고학'이라는 한국 최초의 고고학 개설서를 출간한다. 그러나 70년대 김일성 유일 체제가 들어서면서 모든 학문적 토론은 중단되고 고고학 해석의 교시가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그 해석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남한의 고고학은 북한의 고고학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고고학 발굴을 위한 자금 확보 문제나 토지권 해결 문제 등이 있었고 무엇보다 인재가 부족했으며 고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김재원은 해방 이후 미 군정하에서 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하고 국립 박물관을 건립한다. 김재원은 광복 직후, 아직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던 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를 붙잡고, 그와 함께 1946년 호우총 은령총을 발굴했다. 1959년 약탈 문화재 반환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에 왔던 황수영 교수는 우연히 일본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일본 고대 절터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김정기 선생을 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재원은 김정기에게 편지를 보내 귀국해 국립박물관에서 일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이 요청을 승낙한 김정기는 귀국 후 국립박물관에 들어가 건축학을 바탕으로 한국 고고학에 큰 기여를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남한 고고학은 말만 고고학이지 발굴 수준은 그저 땅을 파헤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일본에서의 발굴 경험을 바탕으로 실측과 여러 기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던 김정기는 남한 고고학에 실측 개념을 도입하고 고대 건축물의 발굴과 해체를 가능케 했다.

또 1961년 김원용이 서울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고고인류학과를 개설해 고고학을 강의하고 뒤이어 다른 대학과 국가 기관에서 고고학 조사를 시작하며 연구 인력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70년대 초에는 편년체계의 큰 틀이 갖추어졌고[18], 60년대 학번들이 해외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세계 고고학 사조를 국내에 알리기도 했다. 무령왕릉 졸속발굴 사건이란 큰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워낙 충격적이었던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후에는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는 체계가 갖추어졌고, 경험이 쌓이면서 남한의 고고학 연구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활기를 더욱 띄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유일 체제 이후 발전이 멈춘 북한의 고고학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발달했다.

그러나 유적조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19] 조사 지연, 졸속 발굴, 발굴 자료의 사장과 같은 문제가 새롭게 발생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며 연구 수준을 높이는 것이 21세기 한국 고고학의 과제가 되었다.

3. 고고학의 시대 분류

19세기 초 덴마크의 학자, C.J.톰센은 인류의 도구 발전 단계를 따라 선사시대를 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 3시대 구분법(Three-age system)을 주장하였다. 톰센의 제자, 보르사에(Jens Jacob Asmussen Worsaae)는 층위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톰센의 이론을 가다듬는다. 그 후 영국의 학자, 존 러벅(John Lubbock)이 석기시대를 구석기와 신석기로 분리하며 선사시대를 5시대로 구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구분법은 유럽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다른 지역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죠몬 시대가 지나자 중국과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청동과 철기 문화를 한꺼번에 받아들여 청동기와 철기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각 나라의 고고학자들은 유럽의 시대 구분법을 벗어나 독자적인 시대 구분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한국 고고학에서는 구석기, 신석기[20], 청동기, 초기철기시대, 원삼국시대(철기시대, 삼한시대)[21], 삼국시대로 시대를 구분한다.

4. 고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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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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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관 학문, 세부 분야

6.1. 시대에 따른 분류

6.2. 분석 방법과 주제

6.3. 연관 학문

7. 사건

8. 발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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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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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련 항목

11. 외부 링크

12.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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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성락, 2005,『한국 고고학 입문』 [2] 동북아시아 이집트의 대중들 한정으로는 삼국시대 고대 이집트같은 고대 문명의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떠올리지만, 이들 국가에서도 선사고고학으로 넘어가는 순간 비전공자들 사이에서 공룡 타령이 나오기는 매한가지다. [3]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Drain the Oceans에서는 수중고고학자들이 선박의 잔해를 수중탐사를 통해 연구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는데,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난파선의 대부분이 19세기의 것이다. 종종 다른 시대의 난파선이 나온다고 해도 거진 다 태평양 전쟁 시기의 것들이다. [4] 김동일, 2020, 「한국의 산업고고학 연구」, 『영남고고학보』88, 영남고고학회. [5] 근현대 시대에 벌어진 학살의 현장이나 전쟁터의 전사자 유해들을 발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6] 대표적인 예로 서울특별시청 구청사의 철거에 대한 논란과,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철거 과정에 대한 당대 소련 고고학계의 반응이 있다. [7] 층위학적 해석이 가능해졌다. [8] 1838년, 부셰 드 페르테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9] 층위학적 이해와 진화론 속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10] 플린더즈 페트리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11] 그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또 원인 중의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12] 사실 최근은 아니다. 80년대 부터 있어왔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적 사조가 기존의 과정주의적 고고학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여 왔다. 이안 호더가 대표적인 예 [13] 일부는 과정주의와의 연속성을 인정해서 후기과정주의 고고학이라고 번역한다. [14] 일본의 근대고고학은 1877년 E·S 모스(Morse)에 의해서 오오모리(大森) 패총이 발굴되면서 부터 시작한다. 이후 1890년대에는 교토대학교에 인류학과설치되면서었고 본격적인 고고학 연구가 개시된다. [15] 일본인 학자들의 조사는 초창기엔 인류학적 조사였는데, 지금의 현대적 인류학적 조사가 아닌 인종적, 문화적 차원의 조사였다. 여기서 부터 스멀스멀 한민족의 타율성을 제기하는 식민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6] 금관총처럼 스케치도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다시 재조사를 해서 기록을 남겼다. 오히려 층위적 발굴이 아니라 봉분 위에서 개석을 따고 들어가는 식의 도굴이었던 점이 더 큰 문제. 낙랑 목곽묘나 전실묘를 보면 천정을 부수고 들어간다. [17]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일부 보고서는 그 당시 수준에서는 공들여서 작성하였다. 일본 학자들이 한국 유물을 아껴서가 아니라 이제는 이곳이 일본이라 생각하고 임한 것. 여담으로 세키노 타다시의 조수는 정교한 도면을 공들여 작성했다. [18] 이 과정 속에서 일본인들에 의해서 타율성론을 강조하기 위해 형성되었던 시대 구분론이 완전히 해소되었으며 한국고고학이 성장하는 발판이 될 수 있었다. [19] 이는 한국의 경제 발전과 맞물리며 구제(救濟) 발굴이 늘어난 것이다. [20] 다만 외국에서는 한국의 신석기시대가 즐문토기시대, 청동기시대가 무문토기시대 라고 소개 되기도 한다 [21] 학자들마다 구분법에 대한 이견이 많다.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를 합쳐서 철기시대 혹은 삼한시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삼한시대라는 용어는 경남지역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사용되며, 보편적으로는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로 지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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