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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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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 김정희
金正喜
파일:추사 김정희 초상.jpg
당대 명화가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이한철[1]이 그린 초상화. 보물 547호.
원춘(元春)·추사(秋史) #
완당(阮堂) 등[2]
본관 경주 김씨 상촌공파[3]
출생 1786년( 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4]
사망 1856년( 철종 7) 10월 10일 (향년 70세)
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리 과지초당[5]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부모 부친 - 김노경(金魯敬, 1766 ~ 1837)
모친 - 기계 유씨 유준주(兪駿注)의 딸
형제자매 남동생 - 김명희(金命喜, 1788 ~ 1857),
김상희(金相喜)
부인 예안 이씨 - 이병현(李秉鉉)의 딸
자녀 (서자) - 김상우(金商佑 또는 金商禹)
측실 한씨 소생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5. 관련 문서6. 관련 기관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고증학자·서예가·역사학자·금석학자이다. 추사체라는 글씨나 금석문의 대가 정도로 많이 알려졌으나 후학도 많고 관직에도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추사(秋史), 호는 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본관은 노론 벽파 명가인 경주 김씨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증손주인데 화순옹주는 자식이 없었고 김정희의 조부가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6] 직접 피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와는 먼 친척뻘인데 김정희의 양증조부 김한신은 정순왕후의 7촌 숙부이다.

2. 생애

1786년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혹은 1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젖을 떼자마자 을 가지고 놀았는데 부친 김노경이 붓을 빼앗으려 하자 사력을 다해 붓을 쥐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훗날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 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보고는 명필이라고 칭찬했다는 영재로[7] 그의 영특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정조 때 집안 친척들이 많이 죽었지만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아버지 김노경이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어머니를 결혼 직후인 1801년에 잃고 20살 때 아내, 계모, 스승 박제가도 잃었으며 3년상 후 1809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한다. 1810년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 군관으로 따라갔다. 60일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최고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8] 이후 벼슬에 나오지 않으면서 <실사구시론>과 같은 책을 썼으며 1816년 무학대사 고려 태조 왕건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의 비를 신라 시대의 진흥왕 순수비라고 고증했던 선대 학자들의 고증이 올바름을 확실하게 했다.[9] 그리고 또다른 순수비인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도 머나먼 개마고원에 있어서 직접 찾아가 수습하지는 못했지만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깨진 것을 수습하고 원위치를 부탁, 비각을 세우고 현판을 만들어 보내는 등 황초령비의 보존에도 김정희의 공이 컸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병조참판에까지 올랐는데 1827년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인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되었다. 하지만 1830년 효명세자가 죽자 안동 김씨 김우명 탄핵하여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다. 아마도 김우명이 공주목 비인현감으로 있을 때 파직된 일로 앙갚음을 한 듯하다. 김정희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순조가 죽던 해에 복귀되어 아버지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온다. 순조는 귀양을 보낼 때도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딴 거밖에 없구나.'하는 투로 말했다. 안동 김씨 기세에 눌렸지 순조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1835년 풍양 조씨 정권을 잡자 복귀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10] 하지만 관직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복귀한지 5년이 지나 1840년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었다.[11] 이 때 김정희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려달라.'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죽음을 면한 대신 대정현[12]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8년간 유배당하는데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저번에 보내온 음식들은 태반이 썩었다. 좋은 음식 좀 보내라."하고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먼 제주도까지 보내야 했으니 음식이 제대로 도착하는게 이상하다. 설상가상으로 재혼한 부인도 1842년 11월에 죽었는데 부인이 병들었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부인이 죽은 뒤였다. 2달이 지나 뒤늦게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정희는 슬퍼하며 '내생에 다시 부부가 되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다.'는 애절한 를 쓰기도 하였다. 유배 기간에 추사체를 만들었는데 2014년 1월 28일 방영된 KBS <다큐공감>에서 위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 당시 김정희가 먹었을 음식인 강조밥( 좁쌀만으로 지은 밥)과 생된장을 백종원이 직접 먹어보는데 거칠고 먹기 힘든 음식이라는 반응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대립 사이에서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을 하던 영의정 권돈인과도 친했는데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로 1851년 같이 파직되어[13] 함경도 북청도호부로 유배를 갔다. 67살 늙은 나이였는데 유배 기간 동안 고대 석기를 연구했으며 「석노가」(石砮歌)에서 그는 귀신의 조화로 보던 돌도끼나 돌화살촉을 생활 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내고 토성 유적과 갈라서 보자고 주장했다.[14]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1852년 겨울에야 풀려났는데 이로써 3년+8년+1년으로 도합 12년 유배.

북청부에서 돌아온 뒤 김정희는 과거 아버지가 과천에 마련해둔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71살되던 1856년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1856년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하는데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으로 세상을 떠나기 4일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김정희가 얼마나 작품에 열정적이었던지 평생 동안 벼루 10개에 구멍을 내고 붓 1000자루를 닳게 했다고 한다.[15]

3. 기타

仙風道骨水仙花 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三十年過到我家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다
茯老曾携使車至 복암 이기양이 옛날 사신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秋史今移浿水衙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으로 옮기었다오
窮村絶峽少所見 외딴 마을 동떨어진 골짝에서는 보기 드문
得未曾有爭喧譁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한다
穉孫初擬薤勁拔 어린 손자는 처음으로 억센 부추잎에 비유하더니
小婢翻驚蒜早芽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싹이라며 놀란다
縞衣靑ㅇ相對立 흰 꽃과 푸른 잎새 서로 마주 서 있으니
玉骨香肌猶自浥 옥 같은 골격 향그런 살결에서 향내가 절로 풍기는데
淸水一盌碁數枚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라
微塵不雜何所吸 티끌조차 섞이지 않았으니 무엇을 마시는지

4. 대중매체

유명세에 비해 매체에서의 출연 빈도는 낮다. 아무래도 활동 시기가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시대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게 원인인 듯.
파일:대원군 김정희.png }}} ||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와서 지인들과 만나는 장면에 등장. 여유있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나온다. 이 때 흥선군 이하응( 임동진 분)과 정수동( 임현식 분)도 있었는데 정수동이 여러 어그로성 드립을 많이 쳐서 흥선군이 열받아하자 도리어 정수동 본인이 먼저 나가버리고 흥선군이 뒤따라 간다. 같이 있던 기생 초월( 김영란 분)이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지만 두 사람의 성품을 잘 아는 김정희는 별 일 없을 것이라 안심시킨다. 알고보니 정수동은 흥선군의 자질을 알아보고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고 “똑똑하면 죽소. 잘난 척 마시오”라고 넌지시 충고한다. 이에 깨달음을 얻은 흥선군은 철종( 최수종 분) 사망 때까지 파락호 폐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파일:빅토3 김정희 1.2.4.png }}} ||
조선의 지식인 지도자로 등장한다. 꼼꼼함, 낭만적, 외교관의 인물 특성을 지니고 있다.

5. 관련 문서

6. 관련 기관



[1] 이한철은 이외에도 철종과 헌종, 고종의 어진을 담당했으며 대원군의 초상화도 그렸다. 특유의 단아하면서 부드러운 모습이 일품인데 윤승운 화백은 맹꽁이 인물열전에서 이 초상화를 보며 평생 고생은 하나도 안 하신 듯한 온화한 얼굴이라며 촌평을 내렸다. 이 초상화 외에도 전해지는 초상화가 몇 점 더 있는데 하나는 추사의 제자 소치 허련이 스승을 그린 초상화가 있다. 밑에 나오는 영상 섬네일의 초상화가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는 추사가 말년에 직접 그린 자화상이 있다. 고되고 기나긴 유배 생활로 하도 고생을 했는지 이 초상화와 달리 수척하고 늙은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2] 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다수 있다. 완당은 자신이 존경했던 청나라의 학자인 완원(阮元)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라고 한다. 유홍준이 쓴 김정희 평전의 제목도 '완당평전'. 말년에는 노과를 즐겨 썼다. 확인된 것만 총 72개에 실제로는 100개 이상의 호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한국사에서 아호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꼽힌다. 이렇게 아호가 많은 이유는 그림마다 매번 다른 별명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3] 경주 김씨 상촌공파 16세손 '喜'자 항렬이다. [4]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5] 대한민국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 [6] 다만 김한신의 형의 아들 즉 친조카이다. 조선 후기에는 항렬을 맞추는 한에서 훨씬 먼 친척도 양자로 들였는데, 최대한 가까운 친척인 3촌 조카를 고른 것이다. [7] 채제공과 관련된 야사가 있는데 정치적 반대파라 평상시에 말도 섞지 않던 채제공이 자신의 집에 온 것에 놀라서 김정희의 아버지가 연유를 물으니 채제공은 김정희의 글을 보고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오. 허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하고 예언했다고 한다. 예언이 적중하기라도 했을까? 김정희는 부모를 일찍 잃고 아내들과도 사별하며 고문당하고 귀양을 2번이나 가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8]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했다. [9] 이 때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의 탁본을 떠서 금석과안록에 해석문을 첨부하고 비석의 옆면에는 자신이 해석해냈다는 것을 기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원본 옆면을 보면 당시에 새긴 기록이 있다. [10] 1837년 아들과 함께 고생했던 아버지 김노경이 사망한다. 그런데 두산백과에는 김노경이 1840년 유배 후 사사당했다고 나오는데 사실은 죽고 나서 밑에 나오는 윤상도의 옥에 연루돼 1840년 관작이 추탈되었다. 위키백과 한민족문화대백과에는 1837년에 사망했다고 제대로 명시되었다. [11] 순조 때 윤상도가 호조판서 박종훈, 유수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 탐관오리라고 비난하며 탄핵한 사건이다. 윤상도는 상소문에서 거친 언행으로 안동 김씨 일족의 비리까지 말하며 비난했다. 이에 안동 김씨 일족이 분노하여 윤상도는 오히려 고문당한 다음 귀양갔다가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김정희는 윤상도의 상소 초안을 맡아준 일로 연루되었다. [12] 현재의 제주도 서귀포시 서부 지역이다. 조선시대 제주도에는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3개 고을이 설치되었는데, 제주목은 현재의 제주시와 관할구역이 일치하며, 대정현과 정의현은 각각 서귀포시 서부와 동부에 해당한다. 대정현과 정의현의 중심지는 각각 현재의 대정읍 표선면이었다. [13] 사실 권돈인은 이것뿐 아니라 진종 조천 문제에서 의견을 낸 것도 문제가 되었다. [14] 실제로 북한의 도유호는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인 시각을 가진 고고학자로 김정희를 제시했고 이는 대한민국 학계에서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사실 김정희는 북청부에서 한 조사만이 아니라 이전 경주의 신라 왕릉을 어찌 인식했는지 보면 상당한 고고학적 재능이 있었다. [15] 김정희가 사망하고 다음 해 김노경과 김정희 부자는 복권된다. [16] 사실 이하응과 김정희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족보상으로 5촌 진이당숙(아버지의 이종 사촌)과 조카 사이였다. 김정희의 양어머니(실제로는 큰어머니) 홍씨와 은신군의 부인이자 이하응의 양할머니 홍씨가 서로 자매이기 때문. 김정희와 이하응이 5촌 관계인 것은 남양 홍씨 집안 기준이며 김정희의 양증조모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이기 때문에 전주 이씨 집안 기준으로 볼 때는 족보상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고손자인 이하응과 10촌 형제가 된다. [17] 남성 불자를 뜻하는 말로 흔히 대중매체에 쓰이는 처사는 잘못된 표현이다. 처사라는 말은 서경덕이나 조식 같은 초야에 묻혀 사는 학식높은 선비를 이르는 말로 불교와 사이가 나빴던 유학자들이 알면 펄쩍 뛸 일. [18] 그럴만도 한게 김정희의 비판 발언 중 백파긍선에게 "망증" 운운하고 백파긍선은 "아몰랑"하는 등 상당히 거친 면도 있었다. [19] 다만 김정희 본인은 후폭풍을 우려해서인지 옹정제가 쓴 글이라는 것은 숨겼다. [20] 그는 예산에서 태어난 후 어린 시절을 증조부였던 월성위 김한신이 거주한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일대에 살았는데 근처 월성위궁에 있던 백송을 보고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21] 실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12그루 정도 되는데 이 중 북한에 있는 개성 백송을 제외한 6그루는 해제되어 현재 남아있는 백송은 5그루(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서울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신대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22] 스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필했던 제자로 근대 남도 화단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이름을 련(鍊)에서 유(維)로 개명하여 허유라고 불리기도 한다. [23] 세대적으로 김정희는 정약용이나 초의선사의 1세대 아래 정도 뻘이고, 개화파의 시조로 평가받고 김정희와 교분이 깊던 박규수나 오경석 등은 김정희의 1세대 아래 뻘이다. [24] 陽朱陰王. 낮에는 주자(성리학)를 따르지만 밤에는 왕수인(양명학)을 따른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속으로는 양명학에 동의하면서 숨기고 몰래 공부했다는 이야기. [25] 이광사의 아버지 이진검과 백부 이진유가 신임옥사 당시 소론의 행동대장으로 노론 축출에 앞장섰기 때문에 이후 권세를 잡은 노론에 찍혀서 이광사와 아들 이긍익(〈 연려실기술〉의 저자)까지 연좌제로 피해를 입었다. [26] 이삼만은 특히 이광사의 글씨체를 보고 서예를 익혔기에 추사가 싫어할 만했다. 이삼만은 어릴 적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아버지가 뱀에 물려 죽자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그 후 이삼만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뱀만 보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려 그 살기에 눌린 뱀들도 얼씬하지 못했다. 전주 지방에서는 뱀을 퇴치하기 위해 이삼만의 이름이 씐 종이를 부적 삼아 문에 붙이고 그의 이름을 3번 외치면 뱀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었다. [27]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28] 처음에는 그 모양이 너무 후줄근해서 주민들이 욕을 많이 했다고 한다. [29] 손창근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화재 소장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1천억 원 상당의 임야를 국가에 기부했다든지 현금 1억 원을 "갑자기 1억원이 생겼으니 통장 번호를 부르시오"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부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있다. # [30] 그런데 양웅을 들먹이는 것도 사실 은근 비꼬는 얘기이다. 양웅은 전한-신-후한 교체기 때 인물로 박식하고 문장에 능한 인물이였으나 왕망과 결탁해 어용문인 노릇을 한 사람이기에 후대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31] 유홍준의 〈완당평전〉에는 그의 은사인 동주 이용희의 강연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김정희는 까다로와도 보통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하면서 강연을 시작한다. 유홍준이 이용희에게 물으니 "위창 노인이 역매(오경석의 호) 어르신에게 들었다."라고 했다 한다. [32] 충남 유형 문화재 43호, 1976년 1월 8일 지정 [33] 흔히 제주향수선화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꽤 흔한 품종이다! [34] 몽은 말(馬), 마농은 마늘을 뜻하는 제주어다. [35] 예산군의 지역 특산물인 사과로 만든다. [36] 용의 눈물》에서는 류정현 역, 《 태조 왕건》에서는 경순왕 역, 《 제5공화국》에서는 김윤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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