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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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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역대 태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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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 태조 배현경 · 홍유 · 복지겸 · 신숭겸 · 유금필 · 최응
혜종 박술희 · 김견술
정종 왕식렴
광종 유신성 · 서필
경종 박양유 · 최지몽
성종 최량 · 최승로 · 이몽유 · 서희 · 이지백
목종 한언공 · 최숙 · 김승조
현종 강감찬 · 최항 · 최사위 · 왕가도
덕종 류소
정종 서눌 · 황주량 · 최충 · 김원충
문종 최제안 · 이자연 · 왕총지 · 최유선
순종 이정공
선종 문정 · 류홍 · 김상기
헌종 -
숙종 소태보 · 왕국모 · 최사추
예종 류인저 · 윤관 · 김인존 · 위계정 · 왕자지
인종 김부식 · 최사전
의종 최윤의 · 유필 · 문공원
명종 윤인첨 · 문극겸
신종 조영인
희종 최선 · 임유
강종 최이 · 정극온
고종 조충 · 이항 · 김취려
원종 이세재 · 채정
충렬왕 허공 · 설공검
충선왕 홍자번 · 정가신
충숙왕 -
충혜왕 한악 · 이규 · 이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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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왕 이암 · 이인복
공민왕 왕후 · 이제현 · 이공수 · 조익청 · 류숙
우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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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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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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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 고려 초기
(918~981)
<colcolor=#373a3c,#ddd> [내의성] 평장사
최언위
문벌귀족기
(981~1170)
[내사문하성] 평장사
최승로 서희 최량 왕융 한인경 유방헌 위수여 진적 유진 최사위 최사위 김심언 진적 이예균 왕동영 최항 최항 강감찬 강감찬 유방 장영 최항 채충순 유방 이공 이공 서눌 서눌 류소 이단 이단 이단 황보유의 이단 류소 황보유의 박충숙 유징필 황주량 황주량 최충 최제안 황보영 이작충 최충 황보영 김영기 김원충 김원충 이자연 이자연 왕총지 김정준 박성걸 김정준 김원정
[중서문하성] 평장사
김원정 최유선 임종일 김의진 왕무숭 이정 문정 김약진 이정공 최석 이정공 김양감 최석 김양감 류홍 왕석 김행겸 류홍 최사제 정유산 이안 소태보 소태보 이자위 김상기 류석 김상기 임개 최사추 김선석 황영 최사추 위계정 김선석 임간 임간 이오 이오 위계정 오수증 최홍사 최홍사 이오 윤관 김경용 임의 임의 김경용 오연총 허경 오연총 이위 임간 허경 이자겸 김연 이자겸 김연 조중장 강증 김연 오수증 조중장 김준 임유문 김준 한안인 이자량 김고 임유문 최홍재 김약온 김약온 척준경 척준경 이수 이수 박승중 척준경 김부일 김향 최홍재 최사전 김향 문공인 최자성 최자성 김부식 이준양 임원애 최유 임원준 이자덕 최유 이중 이중 최진 최진 한유충 왕충 임원숙 이인실 이인실 고조기 김영관 최유청 문공원 유필 최관 유필 김영석 최자영 최윤의 이지무 양원준 최함 최유청 박순충 김영부 이지무 최유칭 김영윤 허홍재 허홍재
무신정권
(1170~1270)
임극충 서공 임규 양숙 정중부 윤인첨 윤인첨 한취 이광진 기탁성 민영모 송유인 최충렬 이공승 문극겸 한문준 최세보 이의민 박순필 이혁유 임민비 이광정 조영인 기홍수 임유 최당 최당 우술유 기홍수 이문충 최선 임유 기홍수 김준 차약송 최충헌 최충헌 김봉모 노효돈 이극서 조충 류광식 이연수 김의원 최보돈 최보순 왕규 김취려 최홍윤 금의 이규보 이자성 채송년 최린 기윤숙 김창 최자 김태서 류소 최자 김기손 송순 김기손 김기손 이세재 김기손 이세재 이장용 김순 최온 김지대 류경
원 간섭기
(1270~1356)
류경 김전 채정 김방경 김방경 원부 장길 유천우 황보기
(도)첨의찬성사·도첨의중호
유천우 류경 원부 박항 송송례 홍자번 홍자번 한강 한강 조인규 인후 강수형 박구 신사전 홍문계 김련 정가신 강수사 송분 인후 정가신 인후 김혼 차신 송분 한희유 정인경 최유엄 한희유 김지숙 최유엄 임익 이덕손 최수황 류비 김혼 차신 채모 김부윤 김혼 안향 최유엄 류비 오윤부 이지저 민훤 정해 왕유소 설영임 조윤통 류비 이혼 김흔 최충소 이혼 김심 김문연 인후 김심 류청신 이진 류청신 배정 박의 권부 이호 권단 홍선 설영임 설경성 민종유 정지연 최비일 오형 권한공 최성지 김사원 이설 김이용 김이 조연수 오잠 오잠 박허중 오잠 박허중 조련 허유전 박전지 윤보 이호 민종유 송영 권준 김이 한악 임중연 전영보 원충 정방길 강융 임중연 전영보 임자송 원충 전언 채홍철 임중연 조적 채하중 민상정 조위 안문개 홍빈 김인연 정천기 오계유 강윤성 윤환 김륜 권겸 박충좌 유방세 김영후 강윤성 전사의 손수경 안축 윤계종 이군해 류돈 이군해 윤신계 손홍량 윤안숙 염제신 허백 윤신계 이곡 류탁 김인호 조일신 조익청 전윤장 윤시우 김자 류탁 정을보 조유 홍언박 김승택 홍언박 류탁 이공수 강윤충 원호 기륜 강순룡 박새안불화 홍언박 윤환 김경직 김인호 김보 최천택 박수년 허백 황석기 강윤충 권적
여말선초
(1356~1392)
[중서문하성] 평장사·평장정사
류탁 허백 황석기 김용 황석기 김용 전보문 김일봉 김승택 이승경 정자후 이겸 안우 이공수 김용 경천흥 류탁 정세운 정세운 이방실
도첨의찬성사
유인우 김용 이공수 경천흥 황상 이성서 송경 안우경 최영 이인복 이구수 이인복 송경 안우경 최영 이구수 김보 이춘부 이인임 권적 이성서 윤택 안우상 우제
문하찬성사
한방신 황상 안우경 최영 강인유 안사기 목인길 지용기 정몽주 지용기 정몽주 배극렴 설장수 조준 권중화 조준 류만수 권중화 윤호 성석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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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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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세가(世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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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rowcolor=#670000,#fedc89>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 「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 성무부인 소생 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혜종 정종 광종
의화왕후 임씨 · 후광주원부인 왕씨 · 청주원부인 김씨 · 궁인 애이주 문공왕후 박씨 · 문성왕후 박씨 · 청주남원부인 김씨 대목왕후 황보씨 · 경화궁부인 임씨
흥화궁군 · 태자 왕제 · 경화궁부인 · 정헌공주 · 명혜부인 경춘원군 · ( 문성왕후 소생 공주) 효화태자 · 천추전부인 · 보화궁부인 · 문덕왕후
경종 성종 목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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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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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예종
명의태후 유씨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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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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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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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 공민왕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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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 · 장녕공주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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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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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서희
徐熙
파일:서희 표준영정.jpg
출생 943년[1]
사망 998년 8월 13일[2]
(음력 목종 원년 7월 14일) (향년 55세)
고려 개경 개국사
(現 북한 개성시 탄현문)
본관 이천 서씨
이름 염윤(廉允)[3] → 희(熙)
복천(福川)[4]
부모 아버지 서필, 어머니
부인 청주 한씨 정실
소실(小室) - 미상
자녀 서눌 적자
서유걸(徐惟傑)적자
서주행(徐周行)서자
서유위(徐惟偉)적자
직위 태사(太師)[5]
내사령(內史令)[6]

1. 개요2. 생애
2.1. 전기
2.1.1. 외교 담판
2.2. 후기
3. 평가4. 관련 영상5. 중국의 동북공정과 서희6. 기타7.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고려 제6대 성종 대의 관료. 고려 외교관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로 신라 김춘추[7], 정몽주[8], 조선 이예[9], 최명길 등과 함께 한국 외교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외교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 서희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재상으로서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략가이자 원칙과 책임 의식을 지닌 정치인이기도 했다.

2. 생애

2.1. 전기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여요전쟁 이전
향직
품계
좌승(佐丞)[10] 향직 품계는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다. 성종 대까지 사용되다가 문산계로 교체되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 서희 때는 정식 품계였다.
직위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
내의시랑(內議侍郞)
병관어사(兵官御事) 병관어사는 병관의 장관이다. 병관은 지금의 국방부이다.
내사시랑(內史侍郞) 내사시랑평장사의 약칭. 당시 최고 정부기관 내사성[11]에 속한 재상직이다.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북송 관직
검교직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 검교는 명예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병부는 지금의 국방부, 병부상서는 병부의 장관이다. 결국 북송의 명예 국방부장관인 셈이다.

고려의 철혈 군주 제4대 광종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 했던 강직한 재상인 서필의 아들이다.[12] 서희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전전하였고 982년 북송으로 가서 단절된 국교[13]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때 송태조는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검교(檢校) 병부상서'라는 정3품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14]
소손녕 침입 당시 북계 군단
<rowcolor=#670000,#fedc89> 상군사(上軍士) 중군사(中軍士) 하군사(下軍士)
시중(侍中) 박양유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
기타 지휘관
제도(諸道)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

993년에 제1차 여요전쟁이 일어나 거란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중군사 자격으로 북방에 참전했다. 이 때 소손녕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며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협박하였는데 고려는 항복하자는 의견으로 모았다. 항복 방식을 두고 그냥 화친하자는 화친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요나라에 떼어준 후 화친하는 할지론으로 갈렸다. 사실 80만 대군은 호왈백만이었다. 당시 소손녕의 군대는 많아봤자 6만 명을 넘기 힘들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추측이다. 당시 거란의 원정은 도통(都統) 이상이 지휘하는 원정과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한데 도통이 지휘하는 원정군은 15만 명 이상인 경우가 많았으나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은 최대 6만 명 정도였다. 소손녕의 당시 직책은 동경(東京)[15] 유수로 도통이 아니었으니 소손녕이 지휘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최대 6만 명이거나 그보다 적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허풍이 먹혔던 것은 최전방 봉산성에서 윤서안(尹庶顔)의 선봉대가 이 병력에게 크게 패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6만 명보다 많았지만 전투 가능한 병력을 동원하고 집결시키는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을 벌어주는데 실패했다. 봉산성 전투 이후 고려가 파견한 사신 이몽전(李蒙戩)에게 소손녕이 다짜고짜 "무조건 항복이나 하라"고 큰소리를 쳐댄 통에 고려 정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16]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17] · 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이니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18]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려 자꾸만 땅을 떼어달라 하면 우리 국토를 모조리 줄 수 있겠습니까? 적에게 국토를 할양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겠습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서희〉

그러다가 서경 이북을 할양하는 할지론으로 논의가 굳어져 서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거나 버리고 있었다. 이 때 소손녕의 의도를 파악한 서희는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고 곡식을 버리는 짓을 멈추게 했다. 사실 군신들이 사태를 더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소손녕의 군대가 80만 명일 수 없다는 것 쯤은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8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은 당장 병참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장기전에 돌입하면 부대가 무너지기 십상이었으며 이렇듯 오랫동안 군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전쟁을 속전속결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여야 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손녕이 고려로 넘어와서 벌인 전투는 몇 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면 80만 명치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의심을 해야 옳았다.

이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유방 대도수가 거란군을 막아내자 조정은 할지론에서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안융진 전투 이후 더이상 공세적 군사 행동이 어렵게 된 소손녕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이 때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서희가 홀로 일어나서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성종은 강가까지 나가서 서희의 손을 잡으며 서희를 전송했다.

2.1.1. 외교 담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여요전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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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고려를 침공한 거란의 의도를 간파해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며, 향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할 강동 6주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둔다.

2.2. 후기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여요전쟁 이후
삼사 태보(太保) 태보, 태부, 태사 순으로 태사가 제일 높다.
직위 평장사(平章事) 내사시랑에서 바뀐 직명이다.
내사령(內史令) 내사령은 명목상 내사성 최고의 명예 직위로 고위 왕족, 공신들에게 임명했다. 중서령의 다른 이름이다.
자꾸 서희를 우리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외교관이 아니라 국정 설계자였어요. 이건 다른 거에요. 앞으로 있을 모든 (거란과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공을 세운 사람은 서희에요. 거란 전쟁을 대비해서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전략적 토대를 만들어 놓은 것. 그래서 위대한 국정 지휘자지,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를 내밀 게 아니라고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6부 고려 vs 거란 전쟁 1편. ##

서희는 유명한 담판으로만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최고의 외교관' 정도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외교에만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다. 한 번은 성종과 함께 해주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묵는 장막에 들어오려고 하자 서희는 "신의 장막은 존귀하신 왕께서 들어오실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고, 또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자 서희는 "신이 가진 술은 임금께 드릴만한 술이 못 됩니다"라며 술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성종이 직접 어주를 가져다가 천막 밖에서 서희와 술을 마셔야 했다.

공빈령 벼슬에 있던 정우현(鄭又玄)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관한 7가지 문제에 대해 논평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글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성종은 재상들을 모아 "이거 건방시러워서 손 좀 보고 싶은데 어때?"라고 물었고 재상들 역시 왕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서희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이 직분상 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을 가지고 부당하게도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교화에 대한 잘못을 논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정우현의 견해는 실로 적절하니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 서희〉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정우현을 오히려 감찰어사로 등용했으며 정신을 차리게 해준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서희의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 국제 정세 파악 능력과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데 더해 이런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까지 갖춘 강직한 관료였기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강화 사신으로 담판하러 갔고, 거란군 진지에서도 담대한 행동과 함께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회담 이후 고려가 얻은 강동 6주 지역을 2년 동안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開國寺)라는 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사찰에 시주를 하는 등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려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인 서눌도 덕종 ~ 정종 때에 재상 자리에 올라서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대단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배향공신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20] 서희의 손녀이자 서눌의 딸은 현종의 제6비 원목왕후인데, 자식은 두지 못했다.

3. 평가

파일:external/www.segyetimes.co.kr/20080617000933_0.jpg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서희 동상

여요전쟁 승리의 포석을 마련한 국정 설계자이자 전략가로 많은 사람들이 외교관으로 평가하지만 사실상 여요전쟁의 가장 큰 밑그림을 제시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장량 유방에게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여요전쟁에 한해서는 장량에 비견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거란의 1차 침입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임용한 박사가 언급했듯이 사실상 대(對)거란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1등 공신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이후의 여요전쟁 동안 양규 강감찬 같은 명장들의 활약이 컸지만 서희가 이 지역을 요새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들도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을 것이고 여요전쟁 동안 개경이 몇 번이고 함락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외교관의 대명사로 손꼽힐 만큼 협상과 언변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장기적인 전략적 안목과 대국을 보는 시야를 갖춘 탁월한 전략가이자 명재상이었던 것. 물론 이는 외교관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서희에 대해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만 내세우는 것은 어쩌면 서희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21]
세상은 한갓 구준과 부필[22]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고려에 서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시 서희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절령 이북의 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여사제강》[23] 권3 성종기 계사 성종 12년

4. 관련 영상


캡션

5. 중국의 동북공정과 서희

생전 서희는 중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서희가 사신으로 송에 갔을 때, 송 태조도 서희를 보고 그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검교병부상서(정3품)관직을 주었고,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고려가 곧 고구려이고, 그렇기에 수도를 평양으로 삼았으며, 국경을 가지고 논하면 거란의 동경까지도 모두 우리 경내다."라고 말한 것은 고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후 중국의 < 송사>, < 고려도경>에서 일관되게 "고려는 원래 고구려다"라고 적고 있다. [24]

이런 사람이다 보니 중국 학계에서, 특히 동북공정에 소속된 학자들이 서희에 대해 내놓는 평가는 박하고 싸늘하다. 서희가 고려를 고구려의 후계라고 소손녕에게 일갈한 것을 두고 중국의 학자들은 "일개 장군 나부랭이가 뭘 알기나 하고 떠든 말이었겠냐"[25]며 소손녕이 서희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린 것은 전략적인 퇴각 내지는 소손녕의 실수이고 서희가 "고려가 곧 고구려다" 운운한 것은 서희의 허풍 내지 거짓말이라고까지 몰아세우기도 하는데, 일본에서 안용복을 대하는 시선이 어떠한가를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학자 양바오룽(楊保隆)이나 장룽(張戎)은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고려는 고구려이기에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수도도 평양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한 말은 고려의 수도가 평양이 아니라 개경(개성)에 있었던 점에 비추어 실제 사실이 아니라 역사에 어두운 소손녕 앞에서 고려가 고구려 후계임을 강조하려고 서희가 일부러 즉석에서 지어낸 속임수가 섞인 거짓말이자 궤변술(詭辯術) 내지 말장난(文字遊戱)이라고 폄하하기도 하고[26] 중국의 학자 정촨수이(鄭川水)[27]의 경우는 "고려는 신라를 계승해 건국된 것을 서희가 옛 고구려(高句麗之舊)라고 거짓말했으며, 그리고 당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치소인 평양을 고려가 멋대로 서경으로 바꿔 부르고 고려의 대도호부(大都護府)를 평양에 둔 일을 ‘수도를 평양에 정했다(都平壤)’고 속였으며, 거란의 영역인 압록강여진(鴨綠江女眞)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멋대로 ‘고구려 옛 땅(高句麗舊地)’이라며 거란에 요구했고, 또한 고려가 이 지역을 차지할 합법적인 왕조라고까지 주장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28]

정촨수이는 더 나아가서 엄연히 거란의 영역 안에 여진인들이 살고 있던 곳을 서희가 멋대로 ‘고구려 옛 땅(高句麗舊地)’이라 속여서 고려가 그 지역의 합법적인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소손녕에게 요구하고 거부당하자(?)[29], 당시 거란과 송의 대결 국면을 이용해 송과의 조빙을 거란으로 바꾸는 것과 ‘고구려 옛 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며 그 땅을 고려에게 양보할 것을 다시 요구한 것에 요 성종이 영토 주권을 양보하는 매우 믿기 어려운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으며, 이후 거란은 고려로부터 강동 6주를 반환받기 위해[30] 일곱 번에 걸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적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자 고려에 대한 군사적 침공까지 했던 것이라고, 서희의 협상이 거짓과 궤변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물론 여요전쟁의 발발까지도 고려에 그 원인을 돌려 버리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31]

압록강 유역이 애초에 고구려령이고[32] 애초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고구려부흥운동 발해 건국으로 당나라는 평양의 안동도호부 치소를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신성으로 옮겨야 했을 정도로 제대로 통치하지도 못한 데다 당이 멸망한 뒤에는 '번인(여진인)들이 멋대로 드나드는 황폐한 땅'[33]으로 변할 정도로 통치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점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것은 물론, 고려에서 평양이 서경(西京)이라 불리며 고려 왕조 내내 준수도급 대접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중국 학자들의 지적은 다분히 악의적인 것을 넘어 제대로 역사를 왜곡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34]

굳이 중국 학자들의 주장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면,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 외의 다른 시각에서 서희의 외교와 그 영향을 바라보고 평가할 여지를 한국 학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서희의 말이 거짓말이고 궤변이라고 몰아붙이는 한편으로 거란의 입장에서 고려에서 철군하게 된 상황을 분석하는데, 거란의 입장에서 일단 '1차 상대'라고 부를 상대는 당연히 남쪽의 송이었고, 후방의 고려가 송과 통교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마치 명청교체기 후금 명나라, 그리고 조선의 구도와 같다. 그리고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간 이유와 마찬가지로 거란 역시도 송과의 전쟁을 위해 후방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고려에 대한 침공을 결정했다.

청 태종과는 달리 고려의 봉산군(蓬山郡)[35]을 차지한 거란의 소손녕은 그 시점에서 더 남진해서 개경까지 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속히 투항하고 얼른 땅 내놔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오는데, 서희는 이 시점에서 성종에게 “그들과 화의(和議)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有可和之狀)”[36]고 주청하면서 당시 고려 조정에서 일던 할지론을 무위로 돌리고 협상에 나섰다. 흥미롭게도 서희는 거란의 군사 동원을 ‘거란이 침공했다(契丹之侵)’이 아니라 ‘거란이 왔다(契丹之來)’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화의를 주청한 시점에서 이미 거란이 현재 고려로 더 치고 내려올 생각이 없고, 그저 군사를 동원해 유세를 떠는 것임을 서희는 간파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란의 소손녕이 거느린 대병력이 고려로 쳐들어온 것이 고려 멸망이나 영토 획득보다는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후방인 고려 지역을 진정시키는 데에 있었고 그 철수도 순전히 협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거란 입장에서도 다분히 전략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는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이다. 서희와의 협상 직전에 고려 조정에서 이몽전을 보내 소손녕과 만난 자리에서 소손녕이 온 이유를 물었을 때, 소손녕은 "너의 나라가 백성들을 잘 살피지 않아서 이제 우리가 천벌을 대행하러 왔다(汝國不恤民事, 是用恭行天罰)"고, 자신들이 고려로 쳐들어온 이유를 '고려가 백성들을 잘 살피지 않아서'라고 대고 있다. 협상 이후 고려의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 회복이나 '선 여진 축출 후 거란 수교'를 골자로 하는 소손녕의 협상 결과를 전해 받은 요 성종은 "고려가 이미 화의를 청해 왔다. 군사를 돌리라"(高麗旣請, 和宜罷兵)고 명령해 거란은 고려에서 철수했다. 고려 영토 획득이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일단 소손녕의 거란군에게는 부차적이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소손녕으로서도 마냥 고려에 머무르며 고려와의 일전을 벌이기도 힘들었던 것이, 고려에서 답이 없자 소손녕이 화풀이 삼아 공격한 안융진(安戎鎭)에서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 고려에 귀부했던 발해 태자 대광현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 낭장(郞將) 유방(庾方, 고려의 명장이자 개국공신인 유금필의 손자이다.)에게 패전을 겪은 상태였다. 화끈하게 차라리 전쟁 한 판 가자면 소손녕으로서도 못할 바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될 경우 후방에서 치고 내려올 양규나 대도수, 유방의 고려군과 전방에서 항전을 각오할 고려 조정 및 고려 남부 지방군과의 항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거란이 승리하더라도 송과의 대치 상태에서 중요한 병력을 까먹는 분명한 양패구상(兩敗俱傷)[37]이 되기 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희는 소손녕이나 요 성종에게 물러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체면'[38]을 살려준 것이다.[39]

즉 고려는 거란과의 협상으로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인정받고[40] 동시에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수복하는 실익을 얻었지만, 거란도 반대 급부로 고려로부터 자신들의 요나라가 중국의 여느 '정통' 왕조처럼 정삭(正朔)을 가진 정통성 있는 왕조[41]라는 인정, 나아가 송과의 대치 상황에서 후방인 고려 방면의 안정을 군사적 정복 없이 무혈로 얻어내는 동시에 고려와 송의 군사동맹을 표면적으로나마 와해시켜[42] 고려 방면에 남겨 두어야 할 힘을 온전히 송으로 쏟을 수 있었다. 중국 학자 정촨수이의 주장처럼 요 성종이 '강동 6주 할양'이라는 서희와의 협상 결과를 수용한 것이 마냥 '퍼주기 협상'은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강동 6주가 전략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땅인지를 거란은 뒤늦게 알게 되고, 이 상황을 다시금 무력으로 되돌리기 위해[43] 벌인 2차례의 큰 전쟁과 수십 차례의 국지전은 제대로 고려 땅에서 피를 보고 끝나면서 거란이 꿈꾸었을 장밋빛 미래는 무너졌지만, 이건 훨씬 후대의 협상 외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정촨수이는 서희가 고려가 고구려라는 주장이 소손녕에게 먹히지 않자(?) 방향을 바꾸어 거란과 송의 대결 국면을 이용해 송과의 조빙을 거란으로 바꾸는 것과 ‘고구려 옛 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며 그 땅을 고려에게 양보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며 서희를 '요 성종과 소손녕을 상대로 사기를 친 궤변가에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려고 하지만, 애초에 상대의 내부 사정을 파악해서 자신에게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해 내는 것, 동시에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불편함에 사로잡히지 않게끔 적절한 선에서 피차간 체면과 실익을 살려 주는 것도 훌륭한 협상 능력이자 탁월한 외교술이다. 이건 분명하게 거란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고려 외교술의 승리이고, 서희라는 인물이 고평가되면 고평가되었지 정촨수이의 주장처럼 마냥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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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중매체



[1]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했을 때 세는나이로 18세였다. [2] 율리우스력 8월 8일 [3] 서희의 '자'라고 적은 서적도 있는데, 고려사 서희 열전의 원문에는 '소자(小字)'라고 적혀 있다. 이 단어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뜻하는 한자어다. [4]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서희의 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역시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마전군 편에 서희의 호는 복천이라고 한다. 서희의 본관인 이천에는 복하천이라는 하천이 있는데 이를 딴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다. [5] 사후 덕종이 추증. [6] 생전 직위가 이어져 추증됨. [7] 당나라라는 외세와 동맹을 맺어 같은 민족인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일 때문에 김춘추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한국인이 아닌 신라인으로서의 김춘추는 무결점의 외교관이자 영웅이었다. 또한 당시 삼국시대는 같은 민족으로서 동질성도 없었고 서로 적이었다. 같은 민족으로서 완전히 동질성을 갖추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8] 다른 분야에서도 워낙 먼치킨이어서 그렇지, 고려 말 악화되었던 대명관계를 개선시켰으며, 왜국에 끌려간 고려 백성 수백명을 구출해오는 등 외교관으로서도 탑급 능력을 보여주었다. 자세한 것은 정몽주 문서 참조. [9] 조선 초기에 활약한 정치인 겸 외교관. 중인 출신이었으나 왜구의 침입 때 군수를 끝까지 따라가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중인 신분에 벗어났다. 세종 대에 대일 외교의 최전선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예도 서희와 함께 국립외교원에 동상이 같이 세워져 있다. [10] 3품 2등위 품계 [11] 부서명은 내의성 → 내사성 중서문하성 순으로 바뀌었다. [12] 사실 서희의 아버지 서필은 광종의 숙청에 직언을 날린 강직한 재상인 동시에 과거 제도 같은 광종의 여러가지 개혁 정책에서는 찬성을 표하며 적극적으로 서포트하는 등 광종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서필은 당시 광종이 후주 출신의 쌍기 등 귀화한 외국인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신하들의 토지를 빼앗자 "어차피 뺏길테니 미리 제 집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인물이다. [13] 10년 전에 송나라가 건국되자 송나라는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했는데 송나라 사신이 항로로 고려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어서 실패했다. [14] 동아시아 전근대 국가에서 다른 나라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경우가 다 그렇듯 역시 명예직이다. '검교'라는 수식어가 원래 명예직임을 표시하기 위해 붙는 것. 하지만 이러한 처우는 그만큼 서희를 예우했다는 뜻이다. [15] 일본 도쿄가 아니라 거란의 5경 중 하나인 요양부(遼陽府)를 말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요녕성)의 지급시인 랴오양시(요양시)로 남아 있다. 고구려 요동을 편입하고 요동성을 설치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는 지력(地力)이 떨어져 농업이 쇠퇴하고 산업 발전도 정체된 지역이다. 공업화가 일본 제국 만주국 시절에 이루어졌던 동네라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부 해안 지역이 경제 개발할 동안 쇠퇴해버린 것. [16] 당시 거란군은 대부분 기병이었다. 보통 전근대에 기병은 보병 10명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에 6만 명이었다한들 고려 조정은 60만 군대가 쳐들어온 것 같은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17]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 [18] 여기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도 포함된다. [19] 수 양제가 113만 명을 동원하였던 고구려 원정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20] 서희의 부친 서필도 내의령(후에 내사령으로 추증)까지 지냈고, 광종의 배향공신이 되었고, 서희의 아들 서눌도 살아서는 내사령을 지냈고, 죽어서는 10대 정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21] 이렇게 한 가지 이미지에 고착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 비슷한 예로 정몽주가 있는데 정몽주 역시 지나치게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이미지에 치우쳐 있는 나머지 제도 개혁을 위해 노력했거나 왜구에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명재상이라는 면이나 왜구 토벌에서 활약했다는 등 왕좌지재로 평가받은 능력과 업적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22] 북송의 재상들로 거란의 침입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구준은 송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맞자 겁을 먹은 진종을 설득해서 진종을 친정하게 만든 재상이고, 부필 역시 거란과의 외교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23] 조선 현종 때 학자인 유계가 지은 고려 시대 역사서. 동국통감에도 동일하다. [24] 출처 : 박용운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한 종합적 검토> [25] 후술하겠지만 서희는 무장이 아니고 문관이며, '일개 장군 나부랭이'로 치부될 그저 그런 가문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26] 楊保隆, '論高句驪與王氏高麗無前後相承關係'(社會科學 戰線, 1999-1) 158쪽 및 蔣戎, 遼朝與高麗朝貢關係淺析(東北史地, 2008-6) 33쪽 [27] 이 사람은 2006년에 <역대 중국 왕조의 동북 변경 통치 연구>라는 논문에서 " 전국시대 연나라 한강 유역까지 진출해 진번조선과 국경을 마주했다"는 주장을 했다. # [28] 鄭川水, 2003-1, 遼聖宗及遼與高麗藩交考略 , 《遼寧大學學報》, 33~37쪽 [29] '고려는 고구려이다'라는 서희의 주장에 소손녕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30] 반환받기 위해서라는 말이 웃긴 게, 강동 6주는 고려가 그 지역을 점거한 여진을 내쫓고 차지한 땅이지 애초에 거란이 실효지배한 적이 없다. 여진 이전에는 당연히 발해, 고구려령이었다. [31] 鄭川水, 2003-1, 앞의 글, 34~37쪽. 이밖에 중국의 학자 임형귀(林榮貴)는 요 성종이 압록강 동쪽 수백 리를 고려에 '하사'한 것은 고려로 하여금 신하의 절도를 잘 지키게 하고, 동시에 고려의 북진 정책을 정지한다는 교환 조건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林榮貴, '北宋與遼的邊疆經略', 《中國邊疆史地硏究》, 2000-1, 34쪽) 임형귀의 주장과는 달리 고려는 거란에 대해 신종한 적도 없고, 멸망하는 순간까지 북진 기조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32]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33] 삼국사기 궁예열전에서 궁예가, 고려사 태조세가에서 왕건이 모두 공통되게 말하고 있는 점이다. [34] 애초에 고려처럼 수도를 한 곳에 두지 않고 여러 곳에 나눠서 두는 것은 삼경제를 운영했던 고구려 사비성으로 천도한 뒤에도 웅진성을 부수도로 두고 익산에도 따로 수도를 세우기도 했던 백제, 삼한일통 이후 확장된 국토에 9주 5소경을 운영했던 신라,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두었던 발해 등 고려 이전의 한국사에서 이미 선례가 충분히 존재해 왔다. 당나라에서도 장안 낙양을 동서 양경(兩京) 체제로 운영해 모두 수도처럼 운영했고, 요나라 금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류의 '부수도'를 아무래도 왕이 실제 상주하는 궁성이 있는 수도(왕성)와의 1:1 비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훈요십조에서 왕건 본인이 서경에 대해서 "후대 왕들은 서경에서 연중 100일은 머물러라"라고 명기한 것을 볼 때 서경을 마냥 껍데기뿐인 행정수도 취급만 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려 왕조의 별도로 운영되었던 동경(경주)이나 남경(서울)도 이 정도 우대는 받지 못했다. [35]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과 태천 사이의 지역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아는 황해도 봉산이 아니다! [36]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2, 성종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12년조. [37] 양쪽이 아무 이익도 못 얻고 피차 손해만 보는 것을 말한다. 피로스의 승리와 비슷하다. [38] 중국어로는 미엔쯔(面子)라고 부르는데,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체면은 때로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경우는 상대가 한족이 아닌 거란족이니 조금 다르겠지만, 적어도 거란의 입장에서도 겉으로나마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관철시킨 셈이었다. [39] 성종 13년(994년) 고려 조정에서 거란의 통화 연호를 처음 사용하고 넉 달 뒤인 6월에 고려에서는 원욱(元郁)을 송에 사신으로 보내서 "송의 군사를 빌려 작년 거란과의 전투에 복수하고 싶다"고 알렸는데, 송에서는 "북방 국경이 이제 겨우 편안해졌는데 군사를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며 원욱을 후하게 대접하고 돌려 보냈고, 이때부터 송과 공식적으로 단교했다고 고려사 성종세가 및 『송사』(宋史) 권5 본기(本紀)5 태종(太宗)2 돈화(淳化) 5년 6월 무신일 기사 및 같은 책 고려열전에도 실려 있다. [40] 적어도 이후 간행된 『 송사』 및 『 고려도경』에서는 고려가 고구려라고 해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인정했다. 『요사』의 고려 열전에서도 "고려는 나라가 있은 이래로 서로 왕위를 전해온 것의 길고 짧음이나 그 인민(人民)ㆍ토전(土田) 등에 대해서는 역대 사적에 각기 그 기록이 있는데, 고려가 요와 더불어 지낸 것은 요나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2백여 년이다(高麗自有國以來,傳次久近,人民土田,歷代各有其志,然高麗與遼相為終始二百餘年)"라고만 했다. 대충 "고려의 선대를 보고 싶으면, 다른 역사책에 나오니 찾아 봐라"라는 뜻. [41] '정삭'이란 달력을 말하며, 당시 달력을 만들기 위한 기준이 되는 연호는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42] 공식적으로는 고려와 송이 단교했지만 이후로도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거란도 이를 뻔히 알았지만 막지 못했다. [43] 애초에 요 성종이나 소손녕이나 강동 6주를 온전히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설령 지금 고려의 영토로 인정해 주더라도 나중에 또 힘으로 을러서 빼앗아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요 성종이나 소손녕의 '도둑놈 심보'가 17세기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이라면 어느 정도 통했겠지만, 10세기 고려에는 씨알도 안 먹혔다는 것이다. [44] 다만 조선시대때 만들어진 만고도목은 전원 중국 인물로 뽑았다고 한다. 서희를 포함한 한국인이 만고도목에 포함된것은 일제강점기 시절 최남선이 만든 <기인비관>이 그 시작이다. [45] 강감찬, 윤관, 김부식도 마찬가지. 이들 중 윤관은 지군국중사(知軍國重使)라는 별도의 임시 직위를 받았기에 임시 무관 정도로 볼 수는 있다. [46] 권율 역시 쭉 문관이었다가 갑자기 임진왜란이 나고 이치 전투 행주대첩에서의 기적적인 전공으로 임시 무관이 되었는데, 그 자리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장군인 도원수였다. 도원수란 전쟁 때만 쓰는 장군직인데, 국가 원수(왕)를 대리하는 총사령관 장군이라 5스타 장군 같은 것이며, 육군과 수군 모두를 한 총사령관이 관리하는 것과 같다. [47] 다만, 서련에 대해서는 연산 서씨라고 하는 설도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48] 남당의 존속 시기는 937 ~ 975년이며, 송나라가 남당을 평정하기 전에 사망했다. [49] 외교적 수사라는 말이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자. [50] 서희의 외교 담판은 과장 좀 보태면 미 - 중 무역 전쟁에 낀 대한민국의 외교부 장관이 미국의 숨은 의도와 원하는 바를 파악해서 미국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며 우리에게 걸린 외교 제약을 모두 풀고 덤으로 북한 문제까지 처리하고 온 정도의 급이다. 결코 간다효 말처럼 '그거 별거 아니다' 식으로 저평가될 것이 아니다. 정치외교학과 나왔다는 인간이 저런 소리나 하고 있는 게 기가 찰 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