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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서희 徐熙 |
|
출생 | 943년[1] |
사망 |
998년
8월 13일[2] (음력 목종 원년 7월 14일) (향년 55세) |
고려
개경 개국사 (現 북한 개성시 탄현문) |
|
본관 | 이천 서씨 |
이름 | 염윤(廉允)[3] → 희(熙) |
호 | 복천(福川)[4] |
부모 | 아버지 서필, 어머니 |
부인 |
청주 한씨
정실 소실(小室) - 미상 |
자녀 |
서눌
적자 서유걸(徐惟傑)적자 서주행(徐周行)서자 서유위(徐惟偉)적자 |
직위 |
태사(太師)[5] 내사령(內史令)[6] |
[clearfix]
1. 개요
고려 제6대 성종 대의 관료. 고려 외교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로 신라의 김춘추[7], 정몽주[8], 조선의 이예[9], 최명길 등과 함께 한국 외교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외교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 서희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재상으로서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략가이자 원칙과 책임 의식을 지닌 정치인이기도 했다.
2. 생애
2.1. 전기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여요전쟁 이전 | ||
향직 품계 |
좌승(佐丞)[10] | 향직 품계는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다. 성종 대까지 사용되다가 문산계로 교체되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 서희 때는 정식 품계였다. |
직위 |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 | |
내의시랑(內議侍郞) | ||
병관어사(兵官御事) | 병관어사는 병관의 장관이다. 병관은 지금의 국방부이다. | |
내사시랑(內史侍郞) | 내사시랑평장사의 약칭. 당시 최고 정부기관 내사성[11]에 속한 재상직이다.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북송 관직 | ||
검교직 |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 | 검교는 명예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병부는 지금의 국방부, 병부상서는 병부의 장관이다. 결국 북송의 명예 국방부장관인 셈이다. |
고려의 철혈 군주 제4대 광종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 했던 강직한 재상인 서필의 아들이다.[12] 서희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전전하였고 982년 북송으로 가서 단절된 국교[13]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때 송태조는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검교(檢校) 병부상서'라는 정3품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14]
소손녕 침입 당시 북계 군단 | ||
<rowcolor=#670000,#fedc89> 상군사(上軍士) | 중군사(中軍士) | 하군사(下軍士) |
시중(侍中) 박양유 |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 |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 |
기타 지휘관 | ||
제도(諸道)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 |
993년에 제1차 여요전쟁이 일어나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중군사 자격으로 북방에 참전했다. 이 때 소손녕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며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협박하였는데 고려는 항복하자는 의견으로 모았다. 항복 방식을 두고 그냥 화친하자는 화친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요나라에 떼어준 후 화친하는 할지론으로 갈렸다. 사실 80만 대군은 호왈백만이었다. 당시 소손녕의 군대는 많아봤자 6만 명을 넘기 힘들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추측이다. 당시 거란의 원정은 도통(都統) 이상이 지휘하는 원정과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한데 도통이 지휘하는 원정군은 15만 명 이상인 경우가 많았으나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은 최대 6만 명 정도였다. 소손녕의 당시 직책은 동경(東京)[15] 유수로 도통이 아니었으니 소손녕이 지휘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최대 6만 명이거나 그보다 적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허풍이 먹혔던 것은 최전방 봉산성에서 윤서안(尹庶顔)의 선봉대가 이 병력에게 크게 패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6만 명보다 많았지만 전투 가능한 병력을 동원하고 집결시키는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을 벌어주는데 실패했다. 봉산성 전투 이후 고려가 파견한 사신 이몽전(李蒙戩)에게 소손녕이 다짜고짜 "무조건 항복이나 하라"고 큰소리를 쳐댄 통에 고려 정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16]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17] · 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이니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18]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려 자꾸만 땅을 떼어달라 하면 우리 국토를 모조리 줄 수 있겠습니까? 적에게 국토를 할양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겠습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서희〉
《고려사》 제94권 〈열전 7: 서희〉
그러다가 서경 이북을 할양하는 할지론으로 논의가 굳어져 서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거나 버리고 있었다. 이 때 소손녕의 의도를 파악한 서희는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고 곡식을 버리는 짓을 멈추게 했다. 사실 군신들이 사태를 더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소손녕의 군대가 80만 명일 수 없다는 것 쯤은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8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은 당장 병참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장기전에 돌입하면 부대가 무너지기 십상이었으며 이렇듯 오랫동안 군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전쟁을 속전속결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여야 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손녕이 고려로 넘어와서 벌인 전투는 몇 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면 80만 명치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의심을 해야 옳았다.
이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유방과 대도수가 거란군을 막아내자 조정은 할지론에서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안융진 전투 이후 더이상 공세적 군사 행동이 어렵게 된 소손녕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이 때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서희가 홀로 일어나서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성종은 강가까지 나가서 서희의 손을 잡으며 서희를 전송했다.
2.1.1. 외교 담판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여요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고려를 침공한 거란의 의도를 간파해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며, 향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할 강동 6주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둔다.
2.2. 후기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여요전쟁 이후 | ||
삼사 | 태보(太保) | 태보, 태부, 태사 순으로 태사가 제일 높다. |
직위 | 평장사(平章事) | 내사시랑에서 바뀐 직명이다. |
내사령(內史令) | 내사령은 명목상 내사성 최고의 명예 직위로 고위 왕족, 공신들에게 임명했다. 중서령의 다른 이름이다. |
자꾸 서희를 우리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외교관이 아니라 국정 설계자였어요. 이건 다른 거에요. 앞으로 있을
모든 (거란과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공을 세운 사람은 서희에요. 거란 전쟁을 대비해서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전략적 토대를 만들어 놓은 것. 그래서 위대한 국정 지휘자지,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를 내밀 게 아니라고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6부 고려 vs 거란 전쟁 1편. ##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6부 고려 vs 거란 전쟁 1편. ##
서희는 유명한 담판으로만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최고의 외교관' 정도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외교에만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다. 한 번은 성종과 함께 해주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묵는 장막에 들어오려고 하자 서희는 "신의 장막은 존귀하신 왕께서 들어오실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고, 또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자 서희는 "신이 가진 술은 임금께 드릴만한 술이 못 됩니다"라며 술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성종이 직접 어주를 가져다가 천막 밖에서 서희와 술을 마셔야 했다.
공빈령 벼슬에 있던 정우현(鄭又玄)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관한 7가지 문제에 대해 논평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글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성종은 재상들을 모아 "이거 건방시러워서 손 좀 보고 싶은데 어때?"라고 물었고 재상들 역시 왕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서희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이 직분상 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을 가지고 부당하게도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교화에 대한 잘못을 논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정우현의 견해는 실로 적절하니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 서희〉
《고려사》 제94권 〈열전 7 : 서희〉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정우현을 오히려 감찰어사로 등용했으며 정신을 차리게 해준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서희의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 국제 정세 파악 능력과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데 더해 이런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까지 갖춘 강직한 관료였기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강화 사신으로 담판하러 갔고, 거란군 진지에서도 담대한 행동과 함께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회담 이후 고려가 얻은 강동 6주 지역을 2년 동안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開國寺)라는 절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사찰에 시주를 하는 등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려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인 서눌도 덕종 ~ 정종 때에 재상 자리에 올라서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대단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배향공신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20] 서희의 손녀이자 서눌의 딸은 현종의 제6비 원목왕후인데, 자식은 두지 못했다.
3. 평가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서희 동상 |
여요전쟁 승리의 포석을 마련한 국정 설계자이자 전략가로 많은 사람들이 외교관으로 평가하지만 사실상 여요전쟁의 가장 큰 밑그림을 제시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장량도 유방에게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여요전쟁에 한해서는 장량에 비견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거란의 1차 침입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임용한 박사가 언급했듯이 사실상 대(對)거란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1등 공신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이후의 여요전쟁 동안 양규나 강감찬 같은 명장들의 활약이 컸지만 서희가 이 지역을 요새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들도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을 것이고 여요전쟁 동안 개경이 몇 번이고 함락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외교관의 대명사로 손꼽힐 만큼 협상과 언변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장기적인 전략적 안목과 대국을 보는 시야를 갖춘 탁월한 전략가이자 명재상이었던 것. 물론 이는 외교관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서희에 대해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만 내세우는 것은 어쩌면 서희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21]
세상은 한갓
송에
구준과 부필[22]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고려에 서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시 서희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절령 이북의 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여사제강》[23] 권3 성종기 계사 성종 12년
《여사제강》[23] 권3 성종기 계사 성종 12년
4. 관련 영상
5. 중국의 동북공정과 서희
생전 서희는 중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서희가 사신으로 송에 갔을 때, 송 태조도 서희를 보고 그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검교병부상서(정3품)관직을 주었고,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고려가 곧 고구려이고, 그렇기에 수도를 평양으로 삼았으며, 국경을 가지고 논하면 거란의 동경까지도 모두 우리 경내다."라고 말한 것은 고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후 중국의 < 송사>, < 고려도경>에서 일관되게 "고려는 원래 고구려다"라고 적고 있다. [24]이런 사람이다 보니 중국 학계에서, 특히 동북공정에 소속된 학자들이 서희에 대해 내놓는 평가는 박하고 싸늘하다. 서희가 고려를 고구려의 후계라고 소손녕에게 일갈한 것을 두고 중국의 학자들은 "일개 장군 나부랭이가 뭘 알기나 하고 떠든 말이었겠냐"[25]며 소손녕이 서희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린 것은 전략적인 퇴각 내지는 소손녕의 실수이고 서희가 "고려가 곧 고구려다" 운운한 것은 서희의 허풍 내지 거짓말이라고까지 몰아세우기도 하는데, 일본에서 안용복을 대하는 시선이 어떠한가를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학자 양바오룽(楊保隆)이나 장룽(張戎)은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고려는 고구려이기에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수도도 평양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한 말은 고려의 수도가 평양이 아니라 개경(개성)에 있었던 점에 비추어 실제 사실이 아니라 역사에 어두운 소손녕 앞에서 고려가 고구려 후계임을 강조하려고 서희가 일부러 즉석에서 지어낸 속임수가 섞인 거짓말이자 궤변술(詭辯術) 내지 말장난(文字遊戱)이라고 폄하하기도 하고[26] 중국의 학자 정촨수이(鄭川水)[27]의 경우는 "고려는 신라를 계승해 건국된 것을 서희가 옛 고구려(高句麗之舊)라고 거짓말했으며, 그리고 당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치소인 평양을 고려가 멋대로 서경으로 바꿔 부르고 고려의 대도호부(大都護府)를 평양에 둔 일을 ‘수도를 평양에 정했다(都平壤)’고 속였으며, 거란의 영역인 압록강여진(鴨綠江女眞)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멋대로 ‘고구려 옛 땅(高句麗舊地)’이라며 거란에 요구했고, 또한 고려가 이 지역을 차지할 합법적인 왕조라고까지 주장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28]
정촨수이는 더 나아가서 엄연히 거란의 영역 안에 여진인들이 살고 있던 곳을 서희가 멋대로 ‘고구려 옛 땅(高句麗舊地)’이라 속여서 고려가 그 지역의 합법적인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소손녕에게 요구하고 거부당하자(?)[29], 당시 거란과 송의 대결 국면을 이용해 송과의 조빙을 거란으로 바꾸는 것과 ‘고구려 옛 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며 그 땅을 고려에게 양보할 것을 다시 요구한 것에 요 성종이 영토 주권을 양보하는 매우 믿기 어려운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으며, 이후 거란은 고려로부터 강동 6주를 반환받기 위해[30] 일곱 번에 걸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적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자 고려에 대한 군사적 침공까지 했던 것이라고, 서희의 협상이 거짓과 궤변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물론 여요전쟁의 발발까지도 고려에 그 원인을 돌려 버리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31]
압록강 유역이 애초에 고구려령이고[32] 애초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고구려부흥운동과 발해 건국으로 당나라는 평양의 안동도호부 치소를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신성으로 옮겨야 했을 정도로 제대로 통치하지도 못한 데다 당이 멸망한 뒤에는 '번인(여진인)들이 멋대로 드나드는 황폐한 땅'[33]으로 변할 정도로 통치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점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것은 물론, 고려에서 평양이 서경(西京)이라 불리며 고려 왕조 내내 준수도급 대접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중국 학자들의 지적은 다분히 악의적인 것을 넘어 제대로 역사를 왜곡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34]
굳이 중국 학자들의 주장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면,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 외의 다른 시각에서 서희의 외교와 그 영향을 바라보고 평가할 여지를 한국 학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서희의 말이 거짓말이고 궤변이라고 몰아붙이는 한편으로 거란의 입장에서 고려에서 철군하게 된 상황을 분석하는데, 거란의 입장에서 일단 '1차 상대'라고 부를 상대는 당연히 남쪽의 송이었고, 후방의 고려가 송과 통교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마치 명청교체기 후금과 명나라, 그리고 조선의 구도와 같다. 그리고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간 이유와 마찬가지로 거란 역시도 송과의 전쟁을 위해 후방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고려에 대한 침공을 결정했다.
청 태종과는 달리 고려의 봉산군(蓬山郡)[35]을 차지한 거란의 소손녕은 그 시점에서 더 남진해서 개경까지 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속히 투항하고 얼른 땅 내놔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오는데, 서희는 이 시점에서 성종에게 “그들과 화의(和議)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有可和之狀)”[36]고 주청하면서 당시 고려 조정에서 일던 할지론을 무위로 돌리고 협상에 나섰다. 흥미롭게도 서희는 거란의 군사 동원을 ‘거란이 침공했다(契丹之侵)’이 아니라 ‘거란이 왔다(契丹之來)’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화의를 주청한 시점에서 이미 거란이 현재 고려로 더 치고 내려올 생각이 없고, 그저 군사를 동원해 유세를 떠는 것임을 서희는 간파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란의 소손녕이 거느린 대병력이 고려로 쳐들어온 것이 고려 멸망이나 영토 획득보다는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후방인 고려 지역을 진정시키는 데에 있었고 그 철수도 순전히 협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거란 입장에서도 다분히 전략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는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이다. 서희와의 협상 직전에 고려 조정에서 이몽전을 보내 소손녕과 만난 자리에서 소손녕이 온 이유를 물었을 때, 소손녕은 "너의 나라가 백성들을 잘 살피지 않아서 이제 우리가 천벌을 대행하러 왔다(汝國不恤民事, 是用恭行天罰)"고, 자신들이 고려로 쳐들어온 이유를 '고려가 백성들을 잘 살피지 않아서'라고 대고 있다. 협상 이후 고려의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 회복이나 '선 여진 축출 후 거란 수교'를 골자로 하는 소손녕의 협상 결과를 전해 받은 요 성종은 "고려가 이미 화의를 청해 왔다. 군사를 돌리라"(高麗旣請, 和宜罷兵)고 명령해 거란은 고려에서 철수했다. 고려 영토 획득이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일단 소손녕의 거란군에게는 부차적이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소손녕으로서도 마냥 고려에 머무르며 고려와의 일전을 벌이기도 힘들었던 것이, 고려에서 답이 없자 소손녕이 화풀이 삼아 공격한 안융진(安戎鎭)에서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 고려에 귀부했던 발해 태자 대광현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 낭장(郞將) 유방(庾方, 고려의 명장이자 개국공신인 유금필의 손자이다.)에게 패전을 겪은 상태였다. 화끈하게 차라리 전쟁 한 판 가자면 소손녕으로서도 못할 바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될 경우 후방에서 치고 내려올 양규나 대도수, 유방의 고려군과 전방에서 항전을 각오할 고려 조정 및 고려 남부 지방군과의 항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거란이 승리하더라도 송과의 대치 상태에서 중요한 병력을 까먹는 분명한 양패구상(兩敗俱傷)[37]이 되기 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희는 소손녕이나 요 성종에게 물러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체면'[38]을 살려준 것이다.[39]
즉 고려는 거란과의 협상으로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인정받고[40] 동시에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수복하는 실익을 얻었지만, 거란도 반대 급부로 고려로부터 자신들의 요나라가 중국의 여느 '정통' 왕조처럼 정삭(正朔)을 가진 정통성 있는 왕조[41]라는 인정, 나아가 송과의 대치 상황에서 후방인 고려 방면의 안정을 군사적 정복 없이 무혈로 얻어내는 동시에 고려와 송의 군사동맹을 표면적으로나마 와해시켜[42] 고려 방면에 남겨 두어야 할 힘을 온전히 송으로 쏟을 수 있었다. 중국 학자 정촨수이의 주장처럼 요 성종이 '강동 6주 할양'이라는 서희와의 협상 결과를 수용한 것이 마냥 '퍼주기 협상'은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강동 6주가 전략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땅인지를 거란은 뒤늦게 알게 되고, 이 상황을 다시금 무력으로 되돌리기 위해[43] 벌인 2차례의 큰 전쟁과 수십 차례의 국지전은 제대로 고려 땅에서 피를 보고 끝나면서 거란이 꿈꾸었을 장밋빛 미래는 무너졌지만, 이건 훨씬 후대의 협상 외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정촨수이는 서희가 고려가 고구려라는 주장이 소손녕에게 먹히지 않자(?) 방향을 바꾸어 거란과 송의 대결 국면을 이용해 송과의 조빙을 거란으로 바꾸는 것과 ‘고구려 옛 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며 그 땅을 고려에게 양보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며 서희를 '요 성종과 소손녕을 상대로 사기를 친 궤변가에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려고 하지만, 애초에 상대의 내부 사정을 파악해서 자신에게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해 내는 것, 동시에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불편함에 사로잡히지 않게끔 적절한 선에서 피차간 체면과 실익을 살려 주는 것도 훌륭한 협상 능력이자 탁월한 외교술이다. 이건 분명하게 거란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고려 외교술의 승리이고, 서희라는 인물이 고평가되면 고평가되었지 정촨수이의 주장처럼 마냥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6. 기타
- 조선 시대 선비들이 심심해서 그 때까지의 역사 인물 모두를 인재풀로 하여 드림팀 올스타전 내각을 설정하는 만고도목 놀이를 할 때 항상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판서 자리에는 서희를 넣었다고 한다.[44] 외교관으로서의 이미지는 현재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절대적이었던 듯하다. 1999년 말기에도 사람들을 상대로 비슷한 설문조사 설정 놀이가 있었는데 외교 장관에는 서희, 대한민국 대통령에는 세종,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에는 이순신이 뽑혔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2동 국립외교원 야외에 그의 흉상이 있고, 외교부 청사 리셉션홀은 현판을 서희홀로 하면서 서희의 초상화까지 걸려있다.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이자 영원한 모범으로서 그의 위상을 반영한 모습들이다.
- 무관직을 제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장군이 아니다. 서희가 받은 병관어사(兵官御事)는 상서성 소속의 문관직이며 제1차 여요전쟁 당시 받은 중군사(中軍使) 직은 고려가 임시 군단을 조성한 뒤 비상설직으로 봉하는 지휘관 정도의 직위라 정식 무신 직위에 임명된 적이 없다. 고려 시대 군권은 문신들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고 본다. 그래도 중군사 직책을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장군 호칭을 쓸 수는 있다.[45][46] 1980년대~1990년대에 나온 역사 만화 등을 보면 서희는 갑옷을 입은 장군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아직도 여주에 있는 서희 묘 안내판에도 서희 장군 묘라고 쓰여 있다.
- 서희의 후손들도 여러 이야기를 남겼다. 제주도 설화에 서희의 15대손인 서련(徐燐)[47]이 제주 판관으로 부임해 왔는데 그 지역에는 100년 묵은 구렁이가 판을 쳐 사람들이 매년 그 구렁이에게 마을의 처녀들을 바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서린이 군졸들을 이끌고 구렁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구렁이를 죽였다고 한다. 이에 무당이 어떤 일이 있어도 뒤돌아 보지 말라고 했고 서린 역시 뒤를 보지 않고 달리다가 제주성 동문에서 자신의 부하가 소리치자 뒤를 돌아보다가 말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고작 19세 때의 일로 뱀 날에는 이 사람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서린이 마을 산적이나 도적을 토벌하다가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 그리고 성종이 바른 말로 상소를 올린 정우현을 벌을 주려고 하자 서희가 '신하가 바른말을 하는 데는 벼슬의 높낮이가 따로 없는 법이니 정우현에게는 벌을 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어야 한다'라고 말을 한 뒤 서희의 말을 들은 성종이 정우현의 벼슬을 올려 주고 서희에게는 귀한 선물을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
- 서희의 외교 담판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협상'에 관련하여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다.
- 2003년 4월, 이라크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공병 부대인 '서희 부대'는 그의 이름을 땄다.
- KBO 리그 역사상 첫 단일 시즌 200안타를 친 서건창이 서희의 후손이다.
- 자칭 역사 유튜버 간다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서희의 외교가 담판이라고 해서 뭐 당당하고 강력하게 기로 찍어 눌러서 담판을 지은 게 아니라 일단 고려 대표로 거란 애들을 달래러 갔는데→거란도 식량 문제로 본격적인 침공은 무리이며 고려가 송나라와의 전쟁에 관여하는 걸 막으려고 무력 시위를 하러 온 것임을 눈치채고 적당히 딜 쳐서 돌려 보낸 거고→외교 당국자라면 당연한 걸 했어야 했을 뿐인데 뭐 엄청 대단한 외교술 펼친 게 아닌데(?)→서희의 외교 담판을 국뽕들이 덮어놓고 찬양만 해 댄다, 는 황당한 주장을 폈는데, 애초에 외교 담판이 무조건 간다효 말처럼 당당하고 강력하게 기로 찍어 눌러야만 제대로 된 담판이라는[49] 발상도 말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 당연한 것을 하지 못해서 외교로 풀 문제를 전쟁까지 끌고 가는 경우가 동서고금 막론하고 적지 않다는 점만 생각해도 간다효의 주장이 얼마나 역사, 외교를 전혀 알지 못하고 떠드는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50]
7. 대중매체
- 1973년 KBS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강화 협상으로 소손녕의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거나 강동 6주를 획득할 것을 주장했고, 강조의 야심을 간파해 그를 꺼리기도 했으며, 김치양과 천추태후로 인해 국사가 어지러운 것을 통탄하면서 사망했다.
- 2009년 KBS 대하드라마 《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천추태후( 채시라 분)의 우군에 가깝게 묘사되지만, 그녀를 따라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으며 실제 인물이 그러하듯 굉장히 강직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이 강조된다.
- 2023 ~ 2024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서희의 사후 벌어진 2~3차 여요전쟁을 다루는 만큼 직접적인 등장은 없었지만, 9회에서 소배압이 동생인 소손녕이 고려로 와 서희와 담판을 벌인 과거를 들먹였고, 이후 10회에서 채충순이 강감찬에게 한 발언과 23회에서 흥화진을 바라보면서 유방이 강감찬에게 '염윤처럼 목숨을 건 외교를 했다.'라는 식으로 언급이 되었다. 이 때 소배압을 제외하고 채충순이나 유방은 서희를 이름 대신 '염윤'이라고 표현했는데, 자막에 '염윤'을 '자(字)'라고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 고려 거란 전쟁/역사 탐구 문서의 10회 혹은 23회 문단 참조.
- 최수종이 욕심내고 있는 역할이라고 한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가사 중에 ' 바다의 왕자 장보고, 발해 대조영, 귀주대첩 강감찬, 서희 거란족'이라는 소절이 있는데, 최수종은 서희를 제외한 3명의 위인을 다 맡았기에 서희까지 하고 싶다는 마음을 MBC 예능 라디오 스타에서 주저없이 드러냈다.
[1]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했을 때 세는나이로 18세였다.
[2]
율리우스력
8월 8일
[3]
서희의 '자'라고 적은 서적도 있는데,
고려사 서희 열전의 원문에는 '소자(小字)'라고 적혀 있다. 이 단어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뜻하는 한자어다.
[4]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서희의 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역시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마전군 편에 서희의 호는 복천이라고 한다. 서희의 본관인 이천에는
복하천이라는 하천이 있는데 이를 딴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다.
[5]
사후 덕종이 추증.
[6]
생전 직위가 이어져 추증됨.
[7]
당나라라는 외세와
동맹을 맺어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일 때문에 김춘추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한국인이 아닌 신라인으로서의 김춘추는 무결점의 외교관이자 영웅이었다. 또한 당시 삼국시대는 같은 민족으로서 동질성도 없었고 서로 적이었다. 같은 민족으로서 완전히 동질성을 갖추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8]
다른 분야에서도 워낙 먼치킨이어서 그렇지, 고려 말 악화되었던 대명관계를 개선시켰으며, 왜국에 끌려간 고려 백성 수백명을 구출해오는 등 외교관으로서도 탑급 능력을 보여주었다. 자세한 것은
정몽주 문서 참조.
[9]
조선 초기에 활약한 정치인 겸 외교관.
중인 출신이었으나
왜구의 침입 때 군수를 끝까지 따라가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중인 신분에 벗어났다.
세종 대에 대일 외교의 최전선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예도 서희와 함께
국립외교원에 동상이 같이 세워져 있다.
[10]
3품 2등위 품계
[11]
부서명은 내의성 → 내사성 →
중서문하성 순으로 바뀌었다.
[12]
사실 서희의 아버지 서필은 광종의 숙청에 직언을 날린 강직한 재상인 동시에
과거 제도 같은 광종의 여러가지 개혁 정책에서는 찬성을 표하며 적극적으로
서포트하는 등 광종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서필은 당시 광종이
후주 출신의
쌍기 등 귀화한 외국인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신하들의 토지를 빼앗자 "어차피 뺏길테니 미리 제 집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인물이다.
[13]
10년 전에
송나라가 건국되자 송나라는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했는데 송나라 사신이 항로로 고려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어서 실패했다.
[14]
동아시아 전근대 국가에서 다른 나라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경우가 다 그렇듯 역시 명예직이다. '검교'라는 수식어가 원래 명예직임을 표시하기 위해 붙는 것. 하지만 이러한 처우는 그만큼 서희를 예우했다는 뜻이다.
[15]
일본
도쿄가 아니라 거란의 5경 중 하나인 요양부(遼陽府)를 말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요녕성)의
지급시인 랴오양시(요양시)로 남아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편입하고
요동성을 설치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는 지력(地力)이 떨어져 농업이 쇠퇴하고 산업 발전도 정체된 지역이다. 공업화가
일본 제국의
만주국 시절에 이루어졌던 동네라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부 해안 지역이 경제 개발할 동안 쇠퇴해버린 것.
[16]
당시 거란군은 대부분
기병이었다. 보통 전근대에 기병은
보병 10명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에 6만 명이었다한들 고려 조정은 60만 군대가 쳐들어온 것 같은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17]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
[18]
여기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도 포함된다.
[19]
수 양제가 113만 명을 동원하였던 고구려 원정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20]
서희의 부친
서필도 내의령(후에 내사령으로 추증)까지 지냈고, 광종의 배향공신이 되었고, 서희의 아들 서눌도 살아서는 내사령을 지냈고, 죽어서는 10대 정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21]
이렇게 한 가지 이미지에 고착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 비슷한 예로
정몽주가 있는데 정몽주 역시 지나치게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이미지에 치우쳐 있는 나머지 제도 개혁을 위해 노력했거나
왜구에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명재상이라는 면이나 왜구 토벌에서 활약했다는 등
왕좌지재로 평가받은 능력과 업적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22]
북송의 재상들로 거란의 침입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구준은
송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맞자 겁을 먹은 진종을 설득해서 진종을 친정하게 만든 재상이고, 부필 역시 거란과의 외교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23]
조선
현종 때 학자인 유계가 지은
고려 시대 역사서.
동국통감에도 동일하다.
[24]
출처 : 박용운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한 종합적 검토>
[25]
후술하겠지만 서희는 무장이 아니고 문관이며, '일개 장군 나부랭이'로 치부될 그저 그런 가문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26]
楊保隆, '論高句驪與王氏高麗無前後相承關係'(社會科學 戰線, 1999-1) 158쪽 및 蔣戎, 遼朝與高麗朝貢關係淺析(東北史地, 2008-6) 33쪽
[27]
이 사람은 2006년에 <역대 중국 왕조의 동북 변경 통치 연구>라는 논문에서 "
전국시대
연나라가
한강 유역까지 진출해 진번조선과 국경을 마주했다"는 주장을 했다.
#
[28]
鄭川水, 2003-1, 遼聖宗及遼與高麗藩交考略 , 《遼寧大學學報》, 33~37쪽
[29]
'고려는 고구려이다'라는 서희의 주장에 소손녕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30]
반환받기 위해서라는 말이 웃긴 게, 강동 6주는 고려가 그 지역을 점거한 여진을 내쫓고 차지한 땅이지 애초에 거란이 실효지배한 적이 없다. 여진 이전에는 당연히 발해, 고구려령이었다.
[31]
鄭川水, 2003-1, 앞의 글, 34~37쪽. 이밖에 중국의 학자 임형귀(林榮貴)는 요 성종이 압록강 동쪽 수백 리를 고려에 '하사'한 것은 고려로 하여금 신하의 절도를 잘 지키게 하고, 동시에 고려의 북진 정책을 정지한다는 교환 조건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林榮貴, '北宋與遼的邊疆經略', 《中國邊疆史地硏究》, 2000-1, 34쪽) 임형귀의 주장과는 달리 고려는 거란에 대해 신종한 적도 없고, 멸망하는 순간까지 북진 기조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32]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33]
삼국사기 궁예열전에서 궁예가, 고려사 태조세가에서 왕건이 모두 공통되게 말하고 있는 점이다.
[34]
애초에 고려처럼 수도를 한 곳에 두지 않고 여러 곳에 나눠서 두는 것은
삼경제를 운영했던
고구려나
사비성으로 천도한 뒤에도
웅진성을 부수도로 두고
익산에도 따로 수도를 세우기도 했던
백제, 삼한일통 이후 확장된 국토에 9주 5소경을 운영했던
신라,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두었던
발해 등 고려 이전의 한국사에서 이미 선례가 충분히 존재해 왔다.
당나라에서도
장안과
낙양을 동서 양경(兩京) 체제로 운영해 모두 수도처럼 운영했고,
요나라나
금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류의 '부수도'를 아무래도 왕이 실제 상주하는 궁성이 있는 수도(왕성)와의 1:1 비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훈요십조에서 왕건 본인이 서경에 대해서 "후대 왕들은 서경에서 연중 100일은 머물러라"라고 명기한 것을 볼 때 서경을 마냥 껍데기뿐인 행정수도 취급만 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려 왕조의 별도로 운영되었던 동경(경주)이나 남경(서울)도 이 정도 우대는 받지 못했다.
[35]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과 태천 사이의 지역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아는 황해도 봉산이 아니다!
[36]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2, 성종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12년조.
[37]
양쪽이 아무 이익도 못 얻고 피차 손해만 보는 것을 말한다.
피로스의 승리와 비슷하다.
[38]
중국어로는 미엔쯔(面子)라고 부르는데,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체면은 때로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경우는 상대가
한족이 아닌
거란족이니 조금 다르겠지만, 적어도 거란의 입장에서도 겉으로나마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관철시킨 셈이었다.
[39]
성종 13년(994년) 고려 조정에서 거란의 통화 연호를 처음 사용하고 넉 달 뒤인 6월에 고려에서는 원욱(元郁)을 송에 사신으로 보내서 "송의 군사를 빌려 작년 거란과의 전투에 복수하고 싶다"고 알렸는데, 송에서는 "북방 국경이 이제 겨우 편안해졌는데 군사를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며 원욱을 후하게 대접하고 돌려 보냈고, 이때부터 송과 공식적으로 단교했다고 고려사 성종세가 및 『송사』(宋史) 권5 본기(本紀)5 태종(太宗)2 돈화(淳化) 5년 6월 무신일 기사 및 같은 책 고려열전에도 실려 있다.
[40]
적어도 이후 간행된 『
송사』 및 『
고려도경』에서는 고려가 고구려라고 해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인정했다. 『요사』의 고려 열전에서도 "고려는 나라가 있은 이래로 서로 왕위를 전해온 것의 길고 짧음이나 그 인민(人民)ㆍ토전(土田) 등에 대해서는 역대 사적에 각기 그 기록이 있는데, 고려가 요와 더불어 지낸 것은 요나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2백여 년이다(高麗自有國以來,傳次久近,人民土田,歷代各有其志,然高麗與遼相為終始二百餘年)"라고만 했다. 대충 "고려의 선대를 보고 싶으면, 다른 역사책에 나오니 찾아 봐라"라는 뜻.
[41]
'정삭'이란 달력을 말하며, 당시 달력을 만들기 위한 기준이 되는
연호는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42]
공식적으로는 고려와 송이 단교했지만 이후로도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거란도 이를 뻔히 알았지만 막지 못했다.
[43]
애초에 요 성종이나 소손녕이나 강동 6주를 온전히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설령 지금 고려의 영토로 인정해 주더라도 나중에 또 힘으로 을러서 빼앗아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요 성종이나 소손녕의 '도둑놈 심보'가 17세기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이라면 어느 정도 통했겠지만, 10세기 고려에는 씨알도 안 먹혔다는 것이다.
[44]
다만 조선시대때 만들어진 만고도목은 전원 중국 인물로 뽑았다고 한다. 서희를 포함한 한국인이 만고도목에 포함된것은 일제강점기 시절 최남선이 만든 <기인비관>이 그 시작이다.
[45]
강감찬,
윤관,
김부식도 마찬가지. 이들 중 윤관은 지군국중사(知軍國重使)라는 별도의 임시 직위를 받았기에 임시 무관 정도로 볼 수는 있다.
[46]
권율 역시 쭉 문관이었다가 갑자기 임진왜란이 나고
이치 전투와
행주대첩에서의 기적적인 전공으로 임시 무관이 되었는데, 그 자리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장군인
도원수였다. 도원수란 전쟁 때만 쓰는 장군직인데, 국가 원수(왕)를 대리하는 총사령관 장군이라 5스타 장군 같은 것이며, 육군과 수군 모두를 한 총사령관이 관리하는 것과 같다.
[47]
다만, 서련에 대해서는
연산 서씨라고 하는 설도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48]
남당의 존속 시기는 937 ~ 975년이며,
송나라가 남당을 평정하기 전에 사망했다.
[49]
외교적 수사라는 말이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자.
[50]
서희의 외교 담판은 과장 좀 보태면 미 - 중 무역 전쟁에 낀 대한민국의 외교부 장관이 미국의 숨은 의도와 원하는 바를 파악해서 미국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며 우리에게 걸린 외교 제약을 모두 풀고 덤으로 북한 문제까지 처리하고 온 정도의 급이다. 결코 간다효 말처럼 '그거 별거 아니다' 식으로 저평가될 것이 아니다. 정치외교학과 나왔다는 인간이 저런 소리나 하고 있는 게 기가 찰 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