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평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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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918~981) |
<colcolor=#373a3c,#ddd> [내의성] 평장사 |
조맹 최언위 | ||
문벌귀족기 (981~1170) |
[내사문하성] 평장사 | |
최승로 서희 최량 왕융 한인경 유방헌 위수여 진적 유진 최사위 최사위 김심언 진적 이예균 왕동영 최항 최항 강감찬 강감찬 유방 장영 최항 채충순 유방 이공 이공 서눌 서눌 류소 이단 이단 이단 황보유의 이단 류소 황보유의 박충숙 유징필 황주량 황주량 최충 최제안 황보영 이작충 최충 황보영 김영기 김원충 김원충 이자연 이자연 왕총지 김정준 박성걸 김정준 김원정 | ||
[중서문하성] 평장사 | ||
김원정 최유선 임종일 김의진 왕무숭 이정 문정 김약진 이정공 최석 이정공 김양감 최석 김양감 류홍 왕석 김행겸 류홍 최사제 정유산 이안 소태보 소태보 이자위 김상기 류석 김상기 임개 최사추 김선석 황영 최사추 위계정 김선석 임간 임간 이오 이오 위계정 오수증 최홍사 최홍사 이오 윤관 김경용 임의 임의 김경용 오연총 허경 오연총 이위 임간 허경 이자겸 김연 이자겸 김연 조중장 강증 김연 오수증 조중장 김준 임유문 김준 한안인 이자량 김고 임유문 최홍재 김약온 김약온 척준경 척준경 이수 이수 박승중 척준경 김부일 김향 최홍재 최사전 김향 문공인 최자성 최자성 김부식 이준양 임원애 최유 임원준 이자덕 최유 이중 이중 최진 최진 한유충 왕충 임원숙 이인실 이인실 고조기 김영관 최유청 문공원 유필 최관 유필 김영석 최자영 최윤의 이지무 양원준 최함 최유청 박순충 김영부 이지무 최유칭 김영윤 허홍재 허홍재 | ||
무신정권 (1170~1270) |
임극충 서공 임규 양숙 정중부 윤인첨 윤인첨 한취 이광진 기탁성 민영모 송유인 최충렬 이공승 문극겸 한문준 최세보 이의민 박순필 이혁유 임민비 이광정 조영인 기홍수 임유 최당 최당 우술유 기홍수 이문충 최선 임유 기홍수 김준 차약송 최충헌 최충헌 김봉모 노효돈 이극서 조충 류광식 이연수 김의원 최보돈 최보순 왕규 김취려 최홍윤 금의 이규보 이자성 채송년 최린 기윤숙 김창 최자 김태서 류소 최자 김기손 송순 김기손 김기손 이세재 김기손 이세재 이장용 김순 최온 김지대 류경 | |
원 간섭기 (1270~1356) |
류경 김전 채정 김방경 김방경 원부 장길 유천우 황보기 | |
(도)첨의찬성사·도첨의중호 | ||
유천우 류경 원부 박항 송송례 홍자번 홍자번 한강 한강 조인규 인후 강수형 박구 신사전 홍문계 김련 정가신 강수사 송분 인후 정가신 인후 김혼 차신 송분 한희유 정인경 최유엄 한희유 김지숙 최유엄 임익 이덕손 최수황 류비 김혼 차신 채모 김부윤 김혼 안향 최유엄 류비 오윤부 이지저 민훤 정해 왕유소 설영임 조윤통 류비 이혼 김흔 최충소 이혼 김심 김문연 인후 김심 류청신 이진 류청신 배정 박의 권부 이호 권단 홍선 설영임 설경성 민종유 정지연 최비일 오형 권한공 최성지 김사원 이설 김이용 김이 조연수 오잠 오잠 박허중 오잠 박허중 조련 허유전 박전지 윤보 이호 민종유 송영 권준 김이 한악 임중연 전영보 원충 정방길 강융 임중연 전영보 임자송 원충 전언 채홍철 임중연 조적 채하중 민상정 조위 안문개 홍빈 김인연 정천기 오계유 강윤성 윤환 김륜 권겸 박충좌 유방세 김영후 강윤성 전사의 손수경 안축 윤계종 이군해 류돈 이군해 윤신계 손홍량 윤안숙 염제신 허백 윤신계 이곡 류탁 김인호 조일신 조익청 전윤장 윤시우 김자 류탁 정을보 조유 홍언박 김승택 홍언박 류탁 이공수 강윤충 원호 기륜 강순룡 박새안불화 홍언박 윤환 김경직 김인호 김보 최천택 박수년 허백 황석기 강윤충 권적 | ||
여말선초 (1356~1392) |
[중서문하성] 평장사·평장정사 | |
류탁 허백 황석기 김용 황석기 김용 전보문 김일봉 김승택 이승경 정자후 이겸 안우 이공수 김용 경천흥 류탁 정세운 정세운 이방실 | ||
도첨의찬성사 | ||
유인우 김용 이공수 경천흥 황상 이성서 송경 안우경 최영 이인복 이구수 이인복 송경 안우경 최영 이구수 김보 이춘부 이인임 권적 이성서 윤택 안우상 우제 | ||
문하찬성사 | ||
한방신 황상 안우경 최영 강인유 안사기 목인길 지용기 정몽주 지용기 정몽주 배극렴 설장수 조준 권중화 조준 류만수 권중화 윤호 성석린 | ||
정세운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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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鄭世雲? ~ 1362년( 공민왕 11)
고려 후기의 무신. 상호군을 이끌던 김용과 함께 중앙군 중 하나인 용호군(龍虎軍)을 이끌던 인물로 공민왕의 총애를 각별히 받았다. 본관은 광주, 출신지는 전라남도 장흥이다.
2. 생애
2.1. 초기 행적
정세운은 광주 장택현(長澤縣) 사람으로 일찍이 공민왕을 따라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했으며 벼슬을 거듭하여 대호군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1등 공신이 되었고 김용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정세운은 장사성 토벌에 가담하라는 원나라 순제의 뜻에 따른 공민왕의 지시에 따라 유탁, 염제신, 권겸, 원호, 나영걸, 인당, 김용, 이권, 강윤충, 황상, 최영, 최운기, 이방실, 안우, 최원 등 40여 명과 서경 수군 300명, 날쌔고 용맹한 군사를 모집해 공민왕 3년(1354년) 8월 10일 베이징으로 가서 장사성 토벌전에 가담했다.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김남득이 홀적(忽赤) 중랑장 정곡에게 매를 쳐서 욕보이자 정곡의 동료인 권석화 등이 공민왕에게 호소했다. 정세운과 김용은 김남득과 친했으므로 이를 괘씸히 여겨 공민왕에게 부탁해 권석화 등에게 매를 치고 해도(海島)로 유배보냈다. 공민왕이 밀직부사 임군보를 총애하자 정세운은 김용과 함께 이를 시기하여 모함한 끝에 공민왕 4년(1355년) 10월 임군보가 왕지를 거짓으로 전했다는 이유로 제주로 유배보내는데 성공했다.
공민왕은 김용, 홍의, 정세운, 유숙 등에게 매일 궁에 들어와서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일체의 일을 아뢰도록 했다. 정세운을 지문하사에 임명했으며 김용을 중서시랑 문하평장사로 유숙을 동지추밀원사 상의회의도감사로 삼아 국정을 장악하게 했다. 이후 정세운은 참지정사 경천흥, 유숙 등과 함께 "사방에서 군대가 일어나 백성들이 상처받고 굶주리고 있으니 지금 성을 쌓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진언해 성을 쌓는걸 중단하게 했다.
공민왕 5년(1356년) 병신정변으로 그동안 기황후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던 기철 일당이 주살되었으며 공민왕은 기철 일당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을 공신으로 삼았는데 정세운은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2.2. 홍건적의 침공에서의 대활약
홍건적 4만명이 국경을 넘어 서경을 함락시키자 공민왕은 1360년에 정세운을 서북면도순찰사로 삼았으며 정세운은 황주에서 돌아와 보고했다.적이 서경에 들어가 땔나무를 쌓고 성을 수리하여 진격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이니 원컨대 놀라게 하거나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이후 참지정사로 전임된 그는 왜구가 양광도를 침입했을 때 개경에 계엄령을 내리고 백관들로 하여금 종군하라는 공민왕의 지시에 따라 간관(諫官)들이 왕궁에 나아가 사직하는걸 보고 반대했다.
간관이 종군한다는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한 일이니 나라의 체통이 어찌 되겠습니까?
이에 공민왕이 간관들은 종군하지 않게 하라고 명했다. 이후 고려군은 안우, 이방실, 김득배의 지휘하에 반격에 나서 적을 섬멸하고 서경을 되찾았다.
그러나 공민왕 10년(1361년) 10월 20만에 달하는 홍건적이 또다시 고려를 침공했는데 공민왕은 김용을 총병관으로 삼아 적을 막게 했지만 끝내 철령 방어선이 무너지자 안동으로 피신했으며 정세운은 추밀 겸 응양군 상장군으로서 국왕을 호종했다. <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렴했으며 밤낮으로 걱정하고 분개하면서 적을 소탕하여 개경을 회복하겠다고 자임해 왕이 그를 의지하고 믿었다고 한다. 정세운은 공민왕에게 여러차례 청했다.
빨리 애통교서를 내리시어 민심을 위로하시고, 또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징발하는 것을 독려하십시오.
공민왕은 이를 수락하고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교서를 내렸다.
천하가 편안하면 재상에 주의가 두어지고, 천하가 위태로우면 장수에 주의가 기울여진다. 생각하건대, 때와 형세의 가볍고 무거운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왕업을 개창하시고 여러 성인들이 이어서 계승하여 생민을 쉬게 하고 기르시었는데, 과인에 이르러서는 편안함에 익숙하여져서 군대의 일을 폐하고 강구하지 않아서 홍두적이 침범하여 파천하여 남쪽으로 오기에 이르렀으니, 매번 종묘와 사직을 생각함에 가슴이 아픈 것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지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어 군사를 합하여 적을 공격하려 하여 이에 정세운에게 명령하여 지휘권을 주었으니, 가서 군사를 감독하고 명령을 따르는 자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상과 벌을 주도록 하라.
정세운이 도당에 이르러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매우 한미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도
재상이 되니 나라가 어지러운 것이 마땅했다.
또한 유숙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일 군사를 출발시킬 것이니, 공은 돌아가서 군사를 점검하시오.
유숙이 말했다.
군대는 이미
죽령 대원에 도착했소.
정세운이 말했다.
만약 군대가 기한에 늦는다면 공 또한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또 김용에게 일러 말했다.
지금 두
정승이 적을 구경하기만 하고 무찌르기를 도모하지 않으니, 누가 이를 본받지 않겠소. 만약 적을 소탕하지 않는다면, 산골짜기로 도망가서 숨더라도, 살 수 있을 것이며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시중 이암이 그런 그를 격려했다.
지금 적이 난입함에 군주와 신하가 파천(播遷)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소. 공이 앞서서 대의를 부르짖고 지휘권을 가지고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는데, 사직이 다시 안정되는 것은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오직 공은 그것에 힘쓰시오. 우리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이 개선하여 돌아오기만 바라오.
이후 정세운은 중서평장사로 승진해 지위가 2상(相)과 3재(宰)의 사이에 있게 되었다. 공민왕이 우달적 권천우를 보내 의복과 술을 하사하자 정세운이 부쳐 아뢰었다.
여러 장수들 가운데 적을 잡았다고 보고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먼저 상을 의논하지 마십시오. 신은 비록 적을 잡았더라도 감히 자주 보고하여 역기(驛騎)를 번거롭게 하지 않겠으며 큰 전투를 치른 후에 장계를 갖추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얼마 후 서경 사람 고경이 군영 앞에 와서 말했다.
서경부의 백성 가운데 적으로부터 탈출한 자가 무려 1만 명이나 되니 장수를 보내어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세운은 크게 기뻐하며 예부상서 이순을 보내 그들을 위로하게 하고 개경으로 가도록 독려했다. 이후 공민왕 11년(1362년) 1월 정세운은 동교에서 김득배, 안우경, 이구수, 최영, 이성계 등 제장들이 모은 20만 대군을 집결시켰으며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개경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물러나 도솔원(兜率院)에 주둔했다. 그 후 홍건적이 괴멸되고 개경이 수복되자 정세운은 대장군 김귀한과 중랑장 김경을 보내 승리를 알리는 글을 받들고 행재소로 가게 했는데 그가 공민왕에게 보낸 장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세상을 구제할 마음을 품으시고 널리 인재를 구하셨는데, 신은 군무를 맡으라는 명령을 삼가 받들고서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흥하고 쇠함은 운수에 달렸고 다스리고 어지러움은 다함이 없으며, 민을 편안하게 하는 요점은 적을 막는 것이 가장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태왕이 빈(邠)의 땅을 떠난 것은
적인(狄人)의 침략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고,
명황(明皇)이
촉(蜀)으로 행차한 것은
갈구(猲狗)의 침략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미(赤眉)를 소탕하여 유씨(劉氏)의
한(漢)이 중흥하고
황건적(黃巾賊)을 쳐부수어
조조(曹操)의
위(魏)가 정통을 계승한 것은 모두 오직 시운(時運)이었으며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해 11월에 천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적을 만났는데, 그 방자하고 독하기를 논하자면 승냥이나 범이라도 그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이 군사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역시 손무(孫武)나 오기(吳起)라고 하더라도 막기 어려웠을 것이니, 나날이 방자해져서 세상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이미 천하를 횡행하다가 멀리 와서 우리나라로 곧 들어오니 마침내 크게 떨쳤습니다. 성난 칼끝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풍문만 듣고도 모두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백만의 정예병이 갑자기 도성(都城)에 주둔하니 수많은 민들이 길바닥에서 흩어져 떠돌게 되었습니다. 아아!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것보다 심한 고통을 받았고 하물며 전하께서도 수레를 타고 멀리 떠나시니 실로 장수와 재상들이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드디어 구름처럼 모인 군사들을 일으켜 개미떼 같이 모여든 오랑캐를 공격하였는데, 사졸들은 물이 쏟아지는 것과 같은 기세를 탔으니 적에게 나아가기가 어찌 어려웠겠습니까?
완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혼백이 쪼개지는 대나무처럼 칼을 맞고 갑자기 흩어져버렸습니다. 천하에서 제압할 수 없었던 자들을 제압하였고 온 세상도 벨 수 없었던 자들을 베어버리니, 적들은 솥 안에 든 물고기와 그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토끼였습니다. 전단(田單)의 어느 기이한 책략을 무엇 하러 본받겠습니까? 제갈량(諸葛亮)의 8진(陣)이라야 스승으로 삼을 만합니다. 눈을 밟고 성(城)에 들어간 이소(李愬)가 채주(蔡州)의 땅을 취하였으며, 물을 등지고 진(陣)을 친 한신(韓信)이 조벽(趙壁)의 깃발을 빼앗았는데, 사건은 비록 같지 않으나 의로운 점에서는 진실로 같습니다. 지난 기해년(己亥年, 1359)에 군사를 모아 일찍이 조선(朝鮮)에서 적을 소탕하고 재차 적의 강력한 침략을 이겨낸 것은 모두 신 등의 공적이 아니라 이 모두가 삼가 전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하늘이 내리셨고 성스러움과 공경함은 나날이 올라갔습니다.
아름다운 풍속이 멀리까지 전파되어 3대의 예악을 따랐으며, 문덕을 널리 펼치시니 두 섬돌에서 문무(文武)의 춤을 추었습니다. 불효자[梟獍]를 길들이고 하찮은 자들을 복종시킨 것은 성스러운 교화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고 또한 모두 지극한 인덕에 국한됩니다. 자연의 이치는 막혔다가 다시 통하는 법이니 이것이야말로 중흥할 때이고 진실로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신 등이 감히 다투어 매가 날아오르듯이 용맹을 떨쳐서 조정을 맑고 밝게 하여 손뼉 치는 정성을 펼치지 않겠습니까? 행재소를 우두커니 멀리서 바라봅니다.
지난해 11월에 천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적을 만났는데, 그 방자하고 독하기를 논하자면 승냥이나 범이라도 그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이 군사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역시 손무(孫武)나 오기(吳起)라고 하더라도 막기 어려웠을 것이니, 나날이 방자해져서 세상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이미 천하를 횡행하다가 멀리 와서 우리나라로 곧 들어오니 마침내 크게 떨쳤습니다. 성난 칼끝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풍문만 듣고도 모두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백만의 정예병이 갑자기 도성(都城)에 주둔하니 수많은 민들이 길바닥에서 흩어져 떠돌게 되었습니다. 아아!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것보다 심한 고통을 받았고 하물며 전하께서도 수레를 타고 멀리 떠나시니 실로 장수와 재상들이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드디어 구름처럼 모인 군사들을 일으켜 개미떼 같이 모여든 오랑캐를 공격하였는데, 사졸들은 물이 쏟아지는 것과 같은 기세를 탔으니 적에게 나아가기가 어찌 어려웠겠습니까?
완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혼백이 쪼개지는 대나무처럼 칼을 맞고 갑자기 흩어져버렸습니다. 천하에서 제압할 수 없었던 자들을 제압하였고 온 세상도 벨 수 없었던 자들을 베어버리니, 적들은 솥 안에 든 물고기와 그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토끼였습니다. 전단(田單)의 어느 기이한 책략을 무엇 하러 본받겠습니까? 제갈량(諸葛亮)의 8진(陣)이라야 스승으로 삼을 만합니다. 눈을 밟고 성(城)에 들어간 이소(李愬)가 채주(蔡州)의 땅을 취하였으며, 물을 등지고 진(陣)을 친 한신(韓信)이 조벽(趙壁)의 깃발을 빼앗았는데, 사건은 비록 같지 않으나 의로운 점에서는 진실로 같습니다. 지난 기해년(己亥年, 1359)에 군사를 모아 일찍이 조선(朝鮮)에서 적을 소탕하고 재차 적의 강력한 침략을 이겨낸 것은 모두 신 등의 공적이 아니라 이 모두가 삼가 전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하늘이 내리셨고 성스러움과 공경함은 나날이 올라갔습니다.
아름다운 풍속이 멀리까지 전파되어 3대의 예악을 따랐으며, 문덕을 널리 펼치시니 두 섬돌에서 문무(文武)의 춤을 추었습니다. 불효자[梟獍]를 길들이고 하찮은 자들을 복종시킨 것은 성스러운 교화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고 또한 모두 지극한 인덕에 국한됩니다. 자연의 이치는 막혔다가 다시 통하는 법이니 이것이야말로 중흥할 때이고 진실로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신 등이 감히 다투어 매가 날아오르듯이 용맹을 떨쳐서 조정을 맑고 밝게 하여 손뼉 치는 정성을 펼치지 않겠습니까? 행재소를 우두커니 멀리서 바라봅니다.
공민왕은 기뻐하여 김한귀에게 황금 25량과 비단 2필, 김경에게 비단 2필을 하사했고 내첨사 이대두리를 보내 정세운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했으며 태후와 공주 역시 의복과 술을 하사했다.
2.3. 최후
그러나 정세운은 며칠 후 예상치 못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사실 김용은 이전까지만 해도 정세운과 한 배를 함께 탄 동지였는데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함께 했고 기철 일당을 제거했으며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정사를 주관했다. 그러나 김용은 정세운이 총병관을 맡아 홍건적을 괴멸시키는 공을 세우자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이보다 앞서 총병관을 맡아 개경으로 쳐들어오는 홍건적에 맞서 철주 방어선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끝내 실패하여 수도를 적에게 내준 바 있었다. 그런 마당에 정세운이 홍건적을 괴멸시켰으니 장차 국왕의 총애가 누구에게 쏠릴지는 불보듯 뻔했다. 이에 김용은 홍건적 토벌을 진두지휘한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을 꼬드겨 정세운을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왕지를 꾸며 글을 써서 조카인 전 공부상서 김림으로 하여금 몰래 안우 등을 찾아가 정세운을 죽일 것을 도모하도록 했는데 이 때 김림은 안우 등에게 말했다.정세운이 평소에 경들을 꺼렸으니 적을 격파한 후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먼저 그를 도모하지 않는가.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에 찾아가 말했다.
지금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으며, 김용의 글이 이와 같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소.
김득배가 말렸다.
이제 겨우 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마땅히 우리끼리 서로를 죽이겠는가. 옛날
사마양저(司馬穰苴)는 마음대로
장가(莊賈)를 죽였으나,
위청(衛靑)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귀감이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소. 만약 부득이하면 그를 잡아서 궁궐 아래에 이르게 하여 상(上)의 처분을 듣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안우와 이방실은 이에 물러나와 병영으로 돌아갔으나 밤이 되어 다시 와서 말했다.
정세운을 토벌하는 것은 군주의 명령이오. 우리들이 공을 세우고 군주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가, 그 후환을 어찌하겠는가.
김득배는 끝까지 거부했지만 안우 등이 그를 강요했으며 결국 세 사람은 술자리를 차려두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불러서 오게 했다. 정세운이 오자 안우가 장사들에게 눈짓을 해 좌석에서 그를 때려 죽이게 했는데 이후 장군 목충이 군전으로부터 행재소로 찾아와 말했다.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살해하고 비밀로 하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공민왕은 문하시중 홍언박, 김용, 경천흥, 찬성사 유탁, 추밀원사 유숙을 불러서 의논하고 직문하 김전을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용서한다는 뜻을 반포하고 행재소로 올 것을 독려해 마음을 안심시키도록 했다. 이 때 복주 수령 박지영이 재추소에서 와서 말했다.
이방실이 홀로 정세운을 벨 것을 모의했고, 안우 등 또한 해를 당했습니다.
이에 인심이 위태롭고 흉흉하자 공민왕은 김전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군사를 보내 토벌하려 했다. 얼마 후 판태의감사 김현과 상장군 홍사우가 와서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비난한 글을 바치자 공민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금, 은, 포, 비단을 하사했다. 공민왕은 다시 김전 등을 보내 용서한다는 뜻을 반포하고 박지영을 불러 책망한 후 관직을 파면시키고 향리로 돌아가게 했으며 지주사 원송수를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옷과 술을 하사했다. 얼마 후 김용이 진실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해 공민왕을 찾아 뵈려던 안우를 살해하고 군사를 보내 김득배와 이방실까지 죽였다. 그 후 공민왕은 정세운 암살 사건과 관련된 교서를 발표했다.
불행하게도 국가가 외적의 침략을 당하여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였으니, 생각건대 이것은 임금인 나의 부덕(不德)의 소치이고, 또한 장수들이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 군율이 서지 않아 적의 침략을 제대로 막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쓸개를 씹는 괴로움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먼저 패전한 군대에 대한 벌을 일단 중지하고, 이어서 문하평장사 상의회의도감사 응양군상장군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절월을 하사하여 나를 대신해 모든 일을 집행하도록 했다. 이어서 칙서를 내려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는 뜻을 선포함으로써, 대장과 소장들이 모두 약속에 따라 감히 군율을 어기지 않게 하려고 했다.
과연 조종의 영령들이 위에서 인도해 주시고 충성스런 군사들이 아래에서 노력해 준 덕분에 사방에서 협동 공격하여 적의 무리를 거의 다 섬멸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개선을 기다려 두둑하게 상을 주어 공로에 보답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에도 안우 등이 자기의 공로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정세운과 사이가 나빠지니 국가의 법률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아침의 분노를 풀어버렸다. 총병관이 나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집행하는데 아랫사람이 감히 함부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를 무시한 것이다. 윗사람을 능욕하고 침범한 죄보다 큰 것이 무엇이냐? 돌이켜보건대, 안우 등은 나라의 군인이 되어 수년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하여 공로를 크게 세웠는데도,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앞서의 공적을 모두 버렸으니 내가 진실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다.
비록 그러하나 적을 격파한 공로는 한 때 간혹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토록 용납할 수 없는 바로서, 그 경중은 너무나 명백하여 도저히 덮어줄 수 없는 것이니, 이 자를 석방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써 옳고 그름을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유사에 명령하여 도원수 안우와 원수 김득배, 이방실, 민환, 김림 등을 법에 따라 처벌한 것이다. 또한 그들의 옛 노고를 생각하여 처자식에게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지휘하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모두 유사에게 명령하여 공로를 헤아려 서용할 것이다.
악당으로서 공로를 배반하고 손수 정세운을 해친 낭장 정찬은 도주 중에 있으니 사면시킬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실정을 알면서도 자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죄를 용서하고 사면하니, 전국에 포고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하라. 생각건대 너희 장병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힘써서 너희 직분을 넘지 않도록 함으로써, 끝까지 몸을 보전하도록 하라.
과연 조종의 영령들이 위에서 인도해 주시고 충성스런 군사들이 아래에서 노력해 준 덕분에 사방에서 협동 공격하여 적의 무리를 거의 다 섬멸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개선을 기다려 두둑하게 상을 주어 공로에 보답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에도 안우 등이 자기의 공로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정세운과 사이가 나빠지니 국가의 법률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아침의 분노를 풀어버렸다. 총병관이 나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집행하는데 아랫사람이 감히 함부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를 무시한 것이다. 윗사람을 능욕하고 침범한 죄보다 큰 것이 무엇이냐? 돌이켜보건대, 안우 등은 나라의 군인이 되어 수년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하여 공로를 크게 세웠는데도,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앞서의 공적을 모두 버렸으니 내가 진실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다.
비록 그러하나 적을 격파한 공로는 한 때 간혹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토록 용납할 수 없는 바로서, 그 경중은 너무나 명백하여 도저히 덮어줄 수 없는 것이니, 이 자를 석방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써 옳고 그름을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유사에 명령하여 도원수 안우와 원수 김득배, 이방실, 민환, 김림 등을 법에 따라 처벌한 것이다. 또한 그들의 옛 노고를 생각하여 처자식에게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지휘하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모두 유사에게 명령하여 공로를 헤아려 서용할 것이다.
악당으로서 공로를 배반하고 손수 정세운을 해친 낭장 정찬은 도주 중에 있으니 사면시킬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실정을 알면서도 자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죄를 용서하고 사면하니, 전국에 포고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하라. 생각건대 너희 장병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힘써서 너희 직분을 넘지 않도록 함으로써, 끝까지 몸을 보전하도록 하라.
정세운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추증되고 예를 갖추어 장사되었으며 공민왕을 호종하고 개경을 수복한 공로가 추록되어 1등 공신이 되었으나 홍언박( 홍륜의 조부)은 그의 죽음을 듣고 말했다.
총병이 출정할 때 말과 태도가 매우 오만하였으니 그것은 당연하다.
3. 평가
정세운은 흔히 국난에 처한 고려를 구하고자 떨쳐 일어나 홍건적 10만을 괴멸시키고 개경을 탈환하는 큰 공을 세웠으나 간신 김용의 모함에 걸려들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면서도 사실과 꽤 어긋난다. 그는 김용과 함께 공민왕에게 절대적으로 총애받았고, 김용과 함께 권석화, 임군보 등을 숙청시키고, 기철 일당을 주살하는 등 홍건적의 난 이전까지 김용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었다. 또한 그는 개경 공방전 때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도솔원에서 관전했고, 실제 지휘는 안우, 이방실, 김득배, 최영, 이성계 등이 수행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를 순수한 충신이자 명장으로 간주하기엔 꽤 무리가 있다.이에 대해 총사령관이 후방에 남아서 전장을 지휘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반박이 있으나 실제 <정세운 열전> 기록을 보면 전장에서 홍건적에 맞서 싸운 안위, 이방실 등이 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처단하자고 제안할 때 "지금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선의 장수들은 정세운이 단순히 최고 사령관이라서 후방에 있다고 본 게 아니라 적을 두려워해서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다고 여겼다.
또한 홍건적들이 도망가게 정세운이 고려군에게 명령하여 도망갈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록을 잘 살피지 않은 상태에서 도출된 단견이다. 기록을 자세히 잘 보면 고려군은 개경을 탈환하긴 했지만 고려군 지휘부는 만약 궁지에 몰린 홍건적이 필사적으로 저항해 올 경우 고려군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을 하여 고려군 지휘부는 의도적으로 동문인 숭인문과 동북쪽의 탄현문을 개방하여 퇴로를 열어주었다. 홍건적들이 달아날 길을 열어준 것이 정세운의 단독 제안이었다는 얘기가 없으며, 단지 그렇게 합의되었다고 나와 있을 뿐이다.
정세운이 대승을 거둔 직후 살해된 것은 왕의 총애가 그에게 쏠릴 것을 두려워한 김용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강력한 군세를 거느린 총사령관이 된 정세운이 실제로 전투를 지휘한 장수들에게 전혀 신임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세운이 자신들을 해칠 거라는 김림의 말에 안우 등이 넘어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수들은 정세운이 공로를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들을 해치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에게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며 나아가지 않았다."는 말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실제 전투엔 참가하지 않았으면서 홍건적을 괴멸시킨 전공을 홀로 독차지하는 정세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렇듯 장수들에게 신뢰를 잃고 반감을 샀으니, 참혹한 최후를 모면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안우 등이 주장인 정세운을 죽인 것은 김용이 건낸 위조된 교지 때문이다'며 정세운이 장수들의 반감을 산 게 아니라는 반박이 있으나, 김용의 조카 김림이 "정세운이 평소에 경들을 꺼렸으니 적을 격파한 후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자 장수들이 넘어간 것을 보면 단순히 조작된 교지만 믿고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낮다. 안우 등은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정세운이 자신들을 시기해 음해하려 들 거라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신과 두려움을 품고 있던 중 마침 김용이 정세운을 죽이라는 왕의 교지를 전하자, 그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조작된 것인지 알아보려 하지 않고 일을 벌인 것이다.
다만 원래 인성이 어떻든 행적이 어떻든 간에 외적의 침략으로 수도가 함락당하고 국왕이 멀리 파천하게 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나 20만 대군을 집결시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는 발판을 마련한 것은 실로 엄청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 고려사>의 평과는 달리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공민왕에 대한 충성심과 고려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만약 그가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김용이 후일에 감히 공민왕을 시해하려 들지는 못했을 것이고 공민왕은 안정된 기반을 토대로 개혁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신임하던 김용이 휘하 장수들을 충동질하여 정세운을 암살하고 제장들조차 모살한 후 공민왕마저 시해하려고 흥왕사의 변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처형되자, 공민왕의 입지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인 공민왕의 마음에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후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마저 자신의 곁을 떠나자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고, 고려는 회생할 기회를 상실한 채 끝내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확실한 건, 정세운 등의 제거는 최영과 이성계의 출세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정세운의 개인적인 문제야 어떻든 간에 그와 휘하 제장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조선 왕조는 애초에 시작조차 못 했을지도 모른다. 정세운의 최후에 매우 충격을 받은 공민왕은 나중에 최영이 도성을 떠나지 못하게 했으며, 실제로 최영이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제주도로 목호의 난들을 토벌하러 간 동안 공민왕이 시해당했다. 이 때문에 최영은 나중에 요동 정벌 당시 우왕의 간절한 부탁으로 그의 곁에 남아서 위화도 회군을 막지 못해 고려 왕조가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건국했으니 이 모든 것이 정세운 암살로부터 시작된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