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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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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황주군 黃州郡 Hwangju County |
<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행 정 구 역 |
<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상위 | 황해북도 |
하위 | 1읍 28리 | |
주 요 인 물 |
대의원 | |
시당 |
림명철[1] (황주군당 책임비서) |
|
인민위 |
위희선[2] (황주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
|
면적 | 517.10㎢ | |
시간대 | UTC+9 | |
인구 | 155,215명 ( 2008년) | |
인구밀도 | 300명/km² ( 2008년) | |
관청 소재지 |
황주군 인민위원회 (위치 미상)
|
|
황주군 지도 |
[clearfix]
1. 개요
2008년 기준 인구 155,215명. 황주읍이 중심이다. 서쪽으로 대동강 하구에 있는 지역으로 재령강과도 접한다. 황해도의 '황'을 맡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2. 지리
인근 남포시와 함께 사과의 생산지로도 알려진 곳이다.[3] 위성사진으로 황주 일대를 보면 토양이 붉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테라로사 토양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다.3. 역사
한사군 시대에는 낙랑군(樂浪郡) 소속이었던 둔유현(屯有縣)[4]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삼국시대에 고구려가 이 땅을 차지했는데 이 때는 동홀(冬忽)이라고 불렀다.[5]
신라가 이후 이곳을 병합하면서 신라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했다.[6] 일단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상으로는 신라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했는데, 신라 후기에 한주와 구분되는 특수 행정구역 패강진을 신라 서북면에 설치했다는 설을 긍정한다면 이 곳도 위치상 패강진 관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삼국시대에는 고구려계 호족과 유민의 근거지 중 하나가 되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같은 패서 출신의 고구려 유민 계통 대호족인 왕륭, 유천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황보제공이 황주 일대를 다스리는 호족으로서 왕건을 도왔고, 황주 황보씨는 신정왕태후와 이후 천추태후까지 배출해 고려 초기 정국을 주도하는 주요 세력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명인 황주가 되었다. 고려 성종 2년에 목을 둘 때 황주목이 되었고, 8목으로 개편될 때도 목으로 남았다. 고려 말기에는 잠깐 북계로 이속됐다가 우왕 14년에 다시 서해도로 돌아왔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황해도 소속이 되어 황해도의 '황'에 해당되는 큰 도시로서 이름이 쭉 이어졌다. 그러나 1895년 23부제 실시 당시에는 기존 황해도 소속 군들 중 유일하게 평양부에 소속되어 있었다가, 13도제로 다시 바뀌면서 황해도로 돌아왔다. 철도에 설치되어 있었던 철화현은 1338년에 주현이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황주와 합쳐졌고 1396년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1408년에 도로 황주에 합쳐진 것을 끝으로 복현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도 대동강에 접한 겸이포(송림) 지역이 항만, 제철로 크게 발달했다. 1931년 읍으로 승격한 겸이포(송림)는 읍이었음에도 인구가 가장 적은 부(오늘날의 시)인 경상남도 진주시에 맞먹었을 정도(5만3천)였다. 하지만 겸이포(송림)가 해방과 함께 송림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반토막이 났다. 광복 당시 황주군(송림 포함) 인구는 16만.
이북 5도 행정구역상 남쪽으로 봉산군, 동쪽으로 서흥군, 서쪽으로 재령강을 건너 안악군, 대동강을 건너 평안남도 용강군, 북쪽으로는 평안남도 중화군과 접한다. 한편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한때 평양시와 접하였으나 평양의 일부 지역을 쳐내면서 옛날 이야기가 되었으며[7], 봉산군에서 승격된 사리원시(인구 30만)와 남쪽에 접한다.
부군면 통폐합 | |||||||||||||||||||
1912년 |
내동리 內洞里 |
내남리 (內南里) |
내서리 (內西里) |
내북리 (內北里) |
외남리 (外南里) |
색곤리 (塞昆里) |
남천리 (南川里) |
외중리 (外中里) |
외서리 (外西里) |
향교리 (鄕校里) |
사직리 (社稷里) |
예동리 (禮洞里) |
덕명리 (德明里) |
녹사리 (綠沙里) |
화동리 (和洞里) |
상운리 (上雲里) |
하운리 (下雲里) |
||
1914년 |
덕월리 (德月里) |
황강리 (黃崗里) |
적벽리 (赤壁里) |
성남리 (城南里) |
벽성리 (碧城里) |
제안리 (齊安里) |
예동리 (禮洞里) |
천황리 |
성북리 (城北里) |
운봉리 (雲峰里) |
신상리 (新上里) |
4. 교통
평부선의 황주역이 있고, 송림선이 여기서 뻗어나간다. 황주군의 일부인 흑교는 교통 취락으로 평안남도 중화군 바로 남쪽에 위치하며, 흑교역이 있다.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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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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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군 黃州郡 / Hwangju Coun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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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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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당시 면적 | 822㎢ |
이북5도 행정구역 | 1읍 11면 |
- 황주읍(黃州邑)
- 구락면(龜洛面)
- 구성면(九聖面)
- 도치면(都峙面)
- 관할 리 : 도치(都峙), 가와(加瓦), 금송(金松), 노동(蘆洞), 대송(大松), 상산(商山), 성동(城洞)
- 삼전면(三田面)
- 인교면(仁橋面)
- 관할 리 : 소매(小梅), 능산(陵山), 묵치(墨峙), 문수(文秀), 상매(上梅), 여이(汝伊), 인제(仁濟), 창대(昌垈), 천파(川波)
- 주남면(州南面)
- 천주면(天柱面)
- 청룡면(靑龍面)
- 청수면(淸水面)
- 관할 리 : 금광(金光), 묵천(墨川), 석평(石坪), 원정(遠井), 인포(仁浦), 진교(榛橋), 청원(淸源), 토정(土井)
- 인포리는 북한 치하에서 2008년에 송림시로 넘어갔다.
- 흑교면(黑橋面)
6. 명승고적
월파루(月波樓)
月波樓의 一名은 湧金亭이라 하야 黃州城邑을 등지고 赤壁江沿岸에 놉히소사잇는 樓閣으로 高麗時代의 建物이며 그 建造에 잇서 藝術美를 極盡하야 자못 雄雅한 맛이잇고 附近에 風光이 明麗하야 西鮮唯一의 景勝地이다
7. 여담
- 대표적인 전래동화 심청전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1]
2022년
[2]
2022년
[3]
이북5도에서 쓰는 황주군 군기에도 사과가 들어가 있다.
[4]
공손강이 이 둔유현을 기준으로 이남에 있는 지역을 대방군으로 삼았다.
[5]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불렸다.
[6]
세종실록 지리지 기준으로는 경덕왕 때 취성군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7]
바로 위가 상원군, 중화군인데 여기가 평양에 들어갔다가 도로 분리되면서 엉뚱하게도 황해북도에 붙었기 때문.
[8]
지도에서
송림시가 겸이포읍으로 써져 있다.
[A]
광복 당시 및 1950년 국군의 수복 당시에는 없던 역이다.
[A]
[11]
沈 자의 특성상 심촌역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