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좌명공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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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07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2 1404년 태종의 왕자들을 죽이고 상왕 정종을 섬기려 한 혐의로 제명 3 1409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후에 신원 4 1416년 불충, 불경죄로 인한 제명 5 1411년 이숭인, 이종학을 죽임 혐의로 인한 제명 6 1426년 노비 불법 모집 혐의로 인한 제명, 1456년 세조 때 복권 7 1415년 민무회, 민무휼의 옥으로 인한 제명, 1422년 세종 때 복권 8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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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近
1352년( 공민왕1) ~ 1409년( 태종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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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문신.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 혹은 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혹은 소오자(小烏子).[1][2]2. 생애
명문 안동 권씨 추밀공파의 후손으로 정주학을 익혀 고려에 소개한 권부의 증손이자 검교정승 권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이색과 정몽주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경학과 문학의 양면을 잘 조화시켰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공민왕 때 나이 18세로 과거에 급제했는데 호명에 따라 대궐 뜰에 들어가자 왕이 노해 "저렇게 어린 아이가 어떻게 과거에 급제했느냐?"라고 묻자 이색이 "장차 크게 쓰이게 되면 어리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숭인, 하륜 등 그 정도 나이에 급제한 사람이 드물지 않은데 18세에 어린아이라고 할 정도였으면 권근이 특별히 동안이었거나 공민왕이 그 때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았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권근이 키가 작았다고 하니 공민왕이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이인임 일파에게 숙청되어 귀양을 가 있었는데 왜구가 무서웠던지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로 진포 해전에서 승리하자 온갖 찬사를 첨가한 시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하최원수파진포왜선<賀崔元帥破鎭浦倭船(진포에서 왜선을 깨뜨린 최 원수를 축하하며)>이다. 순풍을 받은 배는 새들도 못 따라간다느니, 주유가 적벽에서 불놓은 일이야 애들 장난거리라느니 등의 찬사로 가득차 있다.
당시 고려에서는 문사를 뽑아 명나라의 남경에서 행하는 과거에 응시토록 했는데 권근이 2번이나 향시에 급제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명나라에는 가지 못하고 성균직강, 예문응교로 임명되었다. 우왕 때 예의군부정랑, 전교부령을 역임한 후 좌사의대부로 임명되었다. 1389년 첨서밀직사사에 이르러 문하평리 윤승순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공양왕이 즉위하자 명나라에서 가져온 문서의 글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다. 그 때 이성계의 구원으로 모면하고 이색의 일파와 같이 청주옥에 갇혔다가 마침 수해로 용서를 받고 익주에 있으면서 <입학도설>을 저술했다. 외교적으로는 다른 신진사대부들처럼 친명 사대의 입장을 고수하였지만 사전 개혁에서는 조준, 정도전 등의 사전 혁파론과 달리 이색과 함께 수조권의 중첩 폐단을 바로잡는 일전일주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390년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거짓말을 한 윤이, 이초 등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정몽주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되었는데 고려 말에는 스승 정몽주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의 명으로 1393년에 정총과 함께 정릉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가 되었다. 정도전이 표전문 사건을 일으키면서 골치를 썩을 때 권근이 자진해서 명나라로 가서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는데 이 때 지은 것이 '응제시'이다.[3][4] 이후 정도전은 권근도 견제 세력으로 보았는지 이 일이 있은 직후 권근을 탄핵하기도 했는데 태조가 "이게 무슨 짓이냐!"며 각하했다. 관련 기록
1398년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이방원의 세력에 섰으며 이방원의 딸 경안공주와 아들인 길창군 권규의 혼인으로 둘은 사돈지간까지 되었다. 이후 정몽주의 신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으며 이방원이 즉위한 후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교육을 맡기도 했다. 그의 장례를 치를 때는 이전같은 불교식 의례가 아니라 <주자가례>에 따라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3. 기타
- 조선 최초의 대제학이었고 친손자가 세조의 수하인 권람이며[6] 외손자는 역시 세조의 수하이자 문장가인 서거정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장 충장공 권율[7]과 왜적들과 싸우다 1592년 순절한 충민공 권종이 6대손이다.
-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다시 제작할 때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 역사 인물을 평가하면서 광개토대왕의 백제에 대한 복수를 '아무리 그래도 오래전 일인데 너무 혹독하게 복수한거 아님?'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이후 학자 안정복이 ' 고구려왕 고국원왕이 죽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럼? 당연히 복수해야지 논평이 왜 이러냐'고 깠다.[9]
-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 출전하기 전에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비장한 각오로 출정한 것을 너무 잔혹하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근데 역시 안정복이 병법을 모른다며 깠다. 이는 부자유친과 대의멸친의 사상이 충돌한 것이다. 본시 권근이 이 논평을 한 일각에 설에 따르면 부자유친을 지켜 설령 계백이 죽더라도 처와 자식들이 신라에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게 권근의 생각이었다. 계백 같은 백제 귀족들의 가족들은 후일 신라 문무왕기에 5두품에 편입된 것을 보면 된다. 반면 서거정, 최부, 안정복의 생각은 병법을 모른다기보단 이후 신문왕 시절 당시 신라와 옛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들이 대문의 난 이후 왕권강화책으로 삼한의 여럿 귀족들이 숙청된걸 염두에 둔 셈으로 비판했던 것이다.
- 조선의 학자들 가운데 당 태종이 과대평가받아 왔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인데, 당 태종이 여자인 선덕여왕을 신라 왕으로 책봉했으니 이후 측천무후가 나타난 것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것도 논리가 조금 이상한데, 사실 당 태종이 처음부터 선덕여왕을 무시하고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건 아니고 측천무후 일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10] 분명한 것은 당태종의 치세가 당태종의 치세로 끝난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선덕여왕 임명으로 측천무후가 집권했다는 이야기는 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11] 사실 이는 조선시대쯤 가면 성리학에 심취해 여자 왕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기 때문에 과거 신라에서 왕을 세운 것을 비판하기 위해 선덕여왕과 조금이라도 관계되었던 사람들(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진평왕, 그걸 말리지 않은 당시 신라의 신료들 등)을 다 까는 중에 한 말이다.
- 불교까 성향도 강해서 <동국사략>에서 이차돈을 깠었는데 불교를 공인하게 한 신라 이차돈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 신라 시대의 종교 갈등이 심해졌다고 썼다. 정도전의 저서 < 불씨잡변>에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다만 그의 동생은 출가한 스님이었고 동생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교까 성향이 타 신진사대부에 비해 특출나게 강했다 볼 수는 없다.
4. 가족 관계
- 고조부 : 권단(權㫜, 1228~1311)
- 부인 : 숙경택주 경주 이씨(淑敬宅主 慶州李氏) - 우정언(右正言) 증 성균대사성(贈成均大司成) 이존오(李存吾)[13]의 딸
- 장남 : 권천(權踐)
- 차남 : 권제(權踶, 1387~1445)
- 며느리 : 경주 이씨(慶州 李氏) -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이휴(李携, 1372~1448)의 딸
- 손자 : 권지(權摯)
- 손자 : 권람(權擥, 1416~1465) -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좌의정(左議政)
- 손자 : 권반(權攀)
- 손자 : 권마(權摩)[14], 권율 장군의 고조부
- 손자 : 권설(權挈)
- 손자 : 권경(權擎)
- 손녀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권제에게 피살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권제에게 피살
- 손자 : 권추(權揫)
- 장녀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사위 : 이종선(李種善) - 이색(李穡)의 차남
- 외손자 : 이계주(李季疇)
- 외증손자 : 이개(李塏, 1417~1456)
- 차녀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사위 :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
- 외손자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 3남 :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 1393~1421)
- 며느리 :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1415) - 태종의 적3녀
- 손자 : 권담(權聃)
- 손자 : 권총(權聰, 1413 ~ 1480)
- 3녀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4남 : 권준(權蹲)
5. 대중매체
-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이정웅[15]이 연기했다. 이정웅 배우는 1983년 KBS 대하사극 < 개국(드라마)>에서, 최영과 절친했던 문신이자 바른 말을 하는 강직한 충신 정사도(연일 정씨로, 조선 선조 시기 송강 정철의 직계 조상임 / 고려사 열전에 입전되지는 않았지만 정사도의 묘지명이 전해짐) 역을 맡았다. 그리고 용의 눈물과 같은 이환경 님 극본인 < 무풍지대(드라마)>드라마에서 권동진 역(후일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의 김동진)을 맡기도 했다. 여담으로 무풍지대, 야인시대 드라마 방송 당시 드라마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아직 살아계신 생존자들도 있겠기에 그런 경우의 사적 개인 정보 차원에서 가명 내지 별명 등을 임의로 지어 방송한 경우가 있었음
권근은 고려 말기에 조선 건국파의 반대편에 섰기에 지조를 지키고자 이색을 비롯한 인물들과 주로 고문을 당하는 모습으로 자주 나왔다. 실제로 권근은 이인복과 이색의 문생이다(하륜은 권근보다 먼저 급제했으며 역시 이인복과 이색의 문생이다) 그러다 유배를 간 이후에 1390년 윤이·이초의 옥사 사건으로 인해서 유배까지 간 상태에서 불려와 함께 고초를 치르다가 이성계의 자비로 풀려난다.[16] 그 고신까지 겪고 나자 세상사에 염증을 느끼고 아버지를 모신다는 말을 하며 이색 일행과 헤어져 고향으로 떠나며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올라오는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남은을 비롯한 정도전 일파의 대신 일부는 다시 올라올 거면서 왜 그렇게 버텼냐 거리면서 비웃는 모습을 보였다.[17] 범 이방원파에 속하는 시기가 앞당겨졌는데 정도전의 사병 혁파 당시 하륜의 제안을 받은 이방원이 수양딸을 들여 권근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18] 실제 역사보다 일찍 이방원의 사돈이 됐기 때문에 권근이 명나라로 갈 당시 정도전은 "권근은 이방원의 사돈이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신덕왕후의 장례 당시 다른 억류된 사신들 4명이 상복을 입고 곡하는데 참여하지 못했다가 4명이 전부 참형당하는 모습을 설장수와 함께 눈 앞에서 지켜보며 슬퍼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후에는 나름 입지있는 중신으로 꾸준히 출연한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방원에 의해 삼군부로 소환되어 방원 일파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얼굴 마담 역할을 해야 했다. 조준, 설장수, 심덕부 등과 함께 태조 이성계의 어전에 들어(방원의 장인 민제도 함께 삼군부에 있었지만 민제는 가지 않는다) 정도전 등이 주살되었음을 아뢰고, 세자 자리를 바꿀 것을 주청한다. 당시 이성계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조준을 크게 질타하고 권근에 대해서도 경이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한다. 이에 권근은 어쩔 줄 몰라한다. 아뭏든 이후 조정 신하들 회의가 나올 때면 항상 원로로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편이다.
드디어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 후 정몽주 복권 요청을 하는 장면에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19] 이미 드라마 상에서, 권근은 이성계 즉위 얼마 후(아직 조선이라는 정식 국호도 정하기 전인 1392년 시점) 아버지의 권유로 조정에 출사한 첫 자리에서, 정몽주를 충신이라고 일컬으며 명예 회복, 신원을 이성계에게 주청했었다. 방원도 그 점을 기억하고 있다가 권근의 청을 받아들여 어명으로 정몽주의 명예를 회복하고 영의정을 추증한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 직후인 110회 시점에서 타임 워프(방원과 원경왕후의 머리카락에도 흰색이 섞이고, 세자 양녕 및 여러 왕자들이 성장함) 이후 더욱 수염이 희어진 모습으로 나온다. 해설로 방원과 권근이 서로 사돈임이 나오지만, 왕의 사돈이라는 티는 전혀 안 나는 한결같은 학자 문신이다. 태종이 내탕고 왕실의 자금까지, 서책을 찍어내기 위한 활자 제조에 쓰겠다고 하자 매우 감격스러워하는 학자 문신의 면모를 보인다.
평소에 민제와 절친한 사이였기에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 대해서 동정적이고 나중에 태종이 권근의 집에 문병왔을때도 그 사람들(민무구, 민무질)이 그래도 공을 많이 세웠다고 하며 용서해 주실 것을 간곡하게 청한다. 권근이 병석에 누운 와중에.... 이화와 민제가 세상을 떠나고.. 민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회차인 129회에서 마침내 권근도 세상을 떠난다. 눈을 뜨고 숨을 거둔 권근의 눈은, 옆에 있던 하륜이 감겨 주며.. 이강식 성우의 권근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용의 눈물 드라마에 출연한 조정 문신들 가운데에서 비중있는 문신 가운데 한 명으로 연출되었다. 조준과 더불어 태종과 사돈간이며, 좌명공신에도 책록된 점 등이 그 이유가 아닌가 한다.
6. 관련 문서
[1]
'새끼 까마귀'라는 뜻으로 권근이 키가 작고 얼굴이 거무스름했기 때문에 스스로 지은 호다.
[2]
11살 차이나는 동생 권우의 초명은 권원(權遠).
[3]
후에 손자인 권람이 이 시에 주를 달았는데
응제시주이다.
[4]
표전문 사건 때 표의를 지은 이들은 죄다 명나라로 끌려갔는데 명나라는 정도전을 데려오라고 했지만 권근이 자기가 가겠다고 자청해서 정도전 대신에 갔다. 억류 생활이었지만
황제와 직접 시도 주고 받을 정도로 화기애애했는데
주원장이 억류된 사신들보고 "권근이 맘에 들어서 너네들도 풀어줄게."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는 날 당시 조선은 현비(
신덕왕후)의 장례 기간이라 이를 추모하기 위해 권근을 제외한(권근은 황제가 하사한 옷을 입었다.) 나머지는 죄다 흰 옷을 입어서 "남의 나라 일로 왜 상복 입냐?"해서 권근빼고는 남았다가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다만 이면에는 권근이 정도전과 척을 진 이방원 편이고 나머지는 정도전 편이라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5]
교육학에서는
한국 최초로 삽화를 삽입한 교재라고 한다. 삽화가 있는
세계 최초의 교재로 널리 인정받는 것은 1658년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가 쓴 <세계도회>인데 입학도설이 쓰인 것은 1390년으로 270여 년 이르지만 <세계도해>는 여러 국가에서 쓰인 반면 입학도설은 유배지에서 일부 아이들의 교육용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교육학적면으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
[6]
권람의 아버지이자 권근의 아들인
권제는 판서까지 지낸 관리였으나 사적으로는 술과 여색에 심지어는 권람에게 학대까지 가했던 내놓은 자식 취급이다.
[7]
권율의 부친이자 권근의 5대손인 권철은 생전에
영의정을 했다. 오성과 한음의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8]
원래는
강북에서 그냥 갖고 온건데 권근이
강남에서 가져왔다고 말해버렸다. 다만 권근이 말한 강남은 현재
중국의 강남 지방이 아니라 그냥 중국을 말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훈민정음>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을 강남이라고 부른다."라고 나와 있다. 당시 사람들이 중국을 통틀어 강남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9]
사실 오래전 일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런 것이 고작 20여 년 정도 지난 일이었다.
[10]
사실 측천무후는 당태종 당시에는 그냥 후궁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측천무후가 권력을 쥐고 여황제가 될 수 있도록 길을 터놓은 인물은 태종의 아들 고종이었고(선왕의 후궁이었던 무후를 황후로 임명했고 정치에 대해서도 고종은 몸이 약해서 무후와 자주 상의하고 그녀를 통해 왕명을 내렸다.) 태종은 오히려 무후를 견제하는 쪽이었다.
[11]
사실 당태종이 선덕여왕을 깠던 것은 그냥 선덕여왕이 무능했기 때문이었다. 선덕여왕의 부정적 평가에 보면 나와 있듯이 당시 신라는 백제의 맹공으로 대야성을 잃는 등 사직이 바람 앞의 촛불이었는데도 선덕여왕이 한 일이라고는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드는 등 대규모 공사를 해서 현실도피를 한 것밖에는 업적이 없다시피했고 이게 당태종 귀에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반면 당태종은 김춘추에 대해서는 매우 좋게 보았다.
[12]
1385년(우왕 11) 4월 서성군 염국보(염제신의 맏아들), 정당문학 정몽주가 주관한 과거 시험에 급제함(당시 권우와 함께 급제한 동방들 가운데 드라마 '용의 눈물' 태종 시기 초에 등장한 문신 박신(박영목 배우님이 연기), 함부림(왕자의 난 직전 즈음에 등장 / 김봉근 배우 역), 한상덕(한명회의 할아버지인 한상질의 동생), 정도복(정도전의 동생), 변계량('용의 눈물' 드라마에서 김종결 배우 역), 김여지의 형인 김자지, 박석명(용의 눈물 드라마에서 김성수 배우 역) 등이 있다. 어떤 책에는 정몽주가 순절하기 직전 제자 권우도 좌주이자 스승인 정몽주와 동행하여 선죽교로 향하였는데, 정몽주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권우에게 얼른 반대길로 돌아서 먼저 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3]
이존오(정몽주 등과 함께 급제한 동방)는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공민왕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고향인 공주 석탄에 낙향하여 울분을 삼키며 지내다가 31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2차 왕자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좌명공신이자 태종묘정배향공신인
이래(李來)가 아들이다.
[14]
권휘(權 麻+非+手)?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권마(權摩)라고 기록하고 있다.
#
[15]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 휘하의
공직 역을 맡았는데, 건강 문제로 일찍 하차했다. 여담으로 당시 권근은 첫 등장 당시를 고려하면 30~40대였는데, 상당히 나이 든 모습으로 나왔다.
[16]
이 때 고신을 하던 대신이 들어가기 전에는 온갖 모욕과 무시를 하다가 공민왕과 이성계의 자비로 풀리니까 굽실거리며 자기는 그냥 시켜서 한 것뿐이니 잘 이해해달라고 염치 없는 모습을 보였다. 반말을 하며 고문을 가한 대신 역 배우는
한현배(배우) 배우이다.
[17]
물론 그냥 먹고 살기 힘들어서 올라온 것은 아니고, 권근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나라를 생각하기 보다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위해 나라에서 관직을 얻어라 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다시 올라온 것으로 묘사된다. 후에 후술될 작품들 중에서 그 부분에 대해선 이미 관직을 얻은 것으로만 묘사된다.
[18]
권근의 아들인
권규가 실제 역사에서 태종의 3녀인 정안공주와 결혼한 것은 태종이 즉위한 이후인
1403년이다. 극중 시점(1393~1394)에서야 경안공주와 권규가 태어났으며, 실제 역사에서 그녀는 1415년, 권규는 1421년에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다.
[19]
정몽주는 조선 왕조에서는 역적으로 기록된데다 복권 요청을 받는 왕은 다름아닌 고려 말기 정몽주에 대한 암살을 주도한 태종이다.
[20]
권근의 6대손인
권율 전문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