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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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의 제2비 정화궁주 |
|
시호 | 없음 |
작위 |
정신부주(貞信府主) 정화궁주(貞和宮主) |
관저 |
정신부(貞信府) 정화궁(貞和宮) |
본관 | 개성 왕씨(開城 王氏) |
생몰연도 | ? ~ 1319 |
1. 개요
고려 제25대 왕 충렬왕의 제2비. 정신부주(貞信府主) 또는 정화원비(貞和院妃)[1]라고도 한다. 성은 왕씨이다.충렬왕의 정실이지만,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제2비로 떨어졌을 뿐 아니라 갖은 수모를 겪으며 살아야 했다.
2. 친정 가문
고려 제20대 왕 신종의 증손녀이다. 할아버지는 양양공(襄陽公) 왕서(王恕), 아버지는 시안공(始安公) 왕인(王絪)이다.왕인에게는 3남 1녀가 있었는데, 아들 중 한 명이 충선왕의 제3비 정비 왕씨(靜妃 王氏)의 아버지 왕영(王瑛)이고, 딸이 정화궁주다.
3. 정화궁주가 겪은 수모
정화궁주는 충렬왕이 태자 시절이던 1260년 결혼하여 정식으로 왕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야 했다. 이미 태자비가 있었던 충렬왕조차도 그러했다. 충렬왕과 정화궁주가 결혼한 지 14년이나 지난 1274년,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가 충렬왕의 제1비가 되었고, 정화궁주는 제2비로 밀려났다. 14년간이나 정실부인의 위치에 있다가 갑자기 일개 첩실로 떨어진 것이다.제국대장공주는 기가 세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데다 남편 충렬왕에게 그다지 사랑 받지 못했고, 충렬왕의 잦은 엽색 행각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질투심이 굉장히 심해서 충렬왕에게 여자 문제를 자주 따졌다. 그럼에도 충렬왕이 바뀌지 않자, 제국대장공주는 화풀이로 충렬왕의 다른 여자들과 그 자제들에게 직간접적인 위해를 가했다. 특히 자신이 시집오기 이전에 정실이었던 정화궁주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가지고 엄청나게 괴롭혔다.
1275년,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을 낳았다. 이미 정화궁주가 낳은 아들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가 있었지만, 왕위는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인 충선왕에게 돌아갔다. 제국대장공주의 득남을 축하하는 연회가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처음에는 제국대장공주와 정화궁주의 자리가 동등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고, 결국 제국대장공주가 정화궁주의 상석에 앉게 되었다.
연회 도중 정화궁주가 제국대장공주에게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렸는데, 이때 충렬왕은 신경이 쓰였는지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국대장공주는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제가 정화궁주에게 막 대한다고 그러십니까?"라면서 따지고는 "더 이상 이 자리에 못 있겠다"며 화를 냈다. 연회는 파토났고, 제국대장공주는 아들에게 가 버렸다. 다만 제국대장공주의 입장에서는, 다른 자리도 아니고 기껏 왕자를 낳고 자신을 위해 열린 연회에서 자신보다 지위도 낮은 전 여자와 같은 위치에 앉게 한다면 화가 날 만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에게 "정화궁주에게 가느냐"고 따지거나, 자신과 정화궁주의 시종 수를 비교하면서 질투하기도 했다.
1276년에는 누군가 "정화궁주가 무녀(巫女)를 시켜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트려 정화궁주를 모함하기도 했다. 분노한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를 감금했고, 정화궁주는 류경(柳璥)[2]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1284년에는 정화궁주가 소송에 휘말리는 사건이 있었다. 정화궁주는 일반 백성을 천민으로 잘못 알고 종으로 삼았는데, 이 백성은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충렬왕의 지시로 정화궁주에게 유리한 판결이 났는데, 이 판결을 내린 관리가 판결 다음날 갑자기 의문사했다. 정화궁주를 공격했던 이행검(李行儉)만이 홀로 목숨을 건졌다. 참고로 이행검의 사위 기자오는 기황후의 친정 아버지였다.
이런 일들로 인해 정화궁주는 약 40여년 간 따로 떨어진 별궁에 거처했다. 이렇듯 정화궁주가 겪은 수모는, 당대 원나라 공주 출신 고려 왕비들의 횡포를 잘 보여준다.
4. 말년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죽었고, 이듬해인 1298년에는 충렬왕이 아들 충선왕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별궁으로 쫓겨나 있던 정화궁주는 그제야 충렬왕의 곁으로 돌아와 함께 살 수 있었다. 정화궁주는 1319년 사망했다.5. 자손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낳았다.- 장남 :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
- 손자 : 단양부원대군(丹陽府院大君) 왕후(王珛)
- 손자 :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
- 손자 : 연덕부원대군(延德府院大君) 왕훈(王塤)
- 장녀 : 정녕원비(靖寧院妃). 제안공의 후처.
- 차녀 : 명순원비(明順院妃)
연덕부원대군의 외손자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재미있는 것은 공양왕은 왕영(王瑛)의 현손자라는 것. 왕영의 장남 왕분의 증손자가 공양왕이다.
6. 정화궁주와 전등사
강화도에 있는 절인 전등사는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또한 전등사는 정화궁주의 원찰(願刹)[3]이기도 했다. 전등사 대웅전의 4군데 귀퉁이의 추녀에는 나무로 만든 나부상(裸婦像)이 조각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정화궁주를 질투하고 괴롭힌 제국대장공주를 나부로 조각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1]
원비는 고려의 후궁 제도에서 궁주(宮主)보다 한 단계 아래인 원주(院主)가 비(妃)일 경우에 부르는 호칭이다. 즉 궁주에서 원주로 하락했다는 소리가 된다.
[2]
김준, 박송비와 같이 1258년
최의를 피살하고 최씨
무신정권을 끝낸 무오정변의 주역. 특이하게도 무신 집권기임에도 불구하고 김준 정권에서 무신이 아닌 문신 지도자였다. 비록 얼마 못 가 무신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내려오게 되지만, 무신 집권기에 문신인
류경이 지도자에 오를 수 있던 것은 그만큼 무신들의 권력 기반이
최충헌과
최우 때에 비하면 많이 약해진 것. 김준도 무신 단독 지도자가 아닌
집단지도체제의 얼굴마담과 같은 형태였다.
[3]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하는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