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9:32:37

공민왕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670000"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6700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태조 혜종 정종(定宗) 광종
<rowcolor=#670000>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경종 성종 목종 현종
<rowcolor=#670000>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덕종 정종(靖宗) 문종 순종
<rowcolor=#670000>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선종 헌종 숙종 예종
<rowcolor=#670000>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인종 의종 명종 신종
<rowcolor=#670000>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희종 강종 고종 원종
<rowcolor=#670000>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rowcolor=#670000>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rowcolor=#670000> 제33대 제34대
창왕 공양왕
}}}}}}}}}}}}
공민왕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고려의 왕자
[[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6700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9D00, #FFB200 20%, #FFB200 80%, #FF9D00); color: #670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양헌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6700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B2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6594B;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B2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안경공|{{{#!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6700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B2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9d537;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670000; font-size: .7em"
국왕 · 왕후 · 왕태후 · 왕태자
후궁 : 태조 ~ 예종 · 의종 ~ 공양왕
왕자 : 국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왕녀 : 태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하늘신 <colbgcolor=white,#000> 하느님 · 환인 · 옥황상제도교 · 천지왕제주도
통치신 환웅 · 대별왕과 소별왕제주도
국조신 단군 · 해모수 · 동명성왕 · 박혁거세 · 수로왕 · 고을나왕제주도
자연신 마고할미 · 미륵불교 · 웅녀 · 해당금이 · 손돌 · 도수문장 · 설문대할망제주도 · 오늘이제주도
산신 산신령 · 선도성모 · 정견모주 · 석탈해 · 운제산성모 · 단종 · 금성대군
수신 유화부인 · 용왕 · 사해용왕도교 · 경강적룡
사방신 청룡도교 · 백호도교 · 현무도교 · 주작도교
무조신 바리데기 · 걸립신
농업신 풍백 · 우사 · 운사 · 고수레 · 자청비제주도
탄생신 삼신할미
운명신 구삼승할망 · 사라도령 · 할락궁이 · 감은장아기제주도
사신 염라대왕불교 · 강림도령 · 이덕춘 · 해원맥 · 연직사자불교 · 시직사자불교
복신 칠성신(북두칠성) · 부근신
재물신 칠성신(뱀)제주도
가택신 성주신 · 조왕신 · 삼신할미 · 터주신 · 문전신 · 철륭신 · 업신 · 정랑각시 · 제석신 · 우물신
수호신 장승 · 선묘 · 두두리 · 괴목신 · 지귀 · 부군신 · 궤네깃또제주도
역병신 역신 · 호구별성
왕신 경순왕 · 공민왕 · 궁예 · 문무왕 · 단종
군웅신 이순신 · 강감찬 · 최영 · 김유신
}}}}}}}}}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제31대 국왕
공민왕 | 恭愍王
파일:화장사에 봉안된 공민왕 어진를 찍은 유리건판 사진.jpg
출생 1330년 5월 31일[1]
(음력 충혜왕 즉위년 5월 6일)
즉위 1352년 1월 22일[A]
(음력 1351년, 공민왕 즉위년 12월 27일)
사망 1374년 11월 4일[B] (향년 44세)
(음력 공민왕 23년 9월 22일)
능묘 현릉(玄陵)
재위기간 고려 제31대 국왕
1352년 1월 22일[A] ~ 1374년 11월 4일[B]
(음력 1351년, 공민왕 즉위년 12월 27일 ~ 공민왕 23년 9월 22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고려: 기(祺) → 전(顓)[6]
몽골: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7]
부모 부왕 충숙왕
모후 명덕태후
형제자매 3남 중 3남
왕비 노국대장공주, 왕대비 안씨, 순정왕후
후궁 혜비 이씨, 궁인 한씨, 반야(고려)
자녀 1남
종교 불교
이재(怡齋) / 익당(益堂)
봉호 강릉대군(江陵大君) →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시호 고려: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 공민(恭愍)
}}}}}}}}}

1. 개요2. 존호3. 생애4. 평가5. 기타6. 가계7. 어진8. 대중매체
8.1. 소설8.2. 영화8.3. 드라마8.4. 만화8.5. 게임
9. 관련 인물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려 제31대 군주. 시호는 고려 우왕이 독자적으로 올린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명나라가 하사한 공민왕(恭愍王). 고려에서 올린 시호 경효대왕(敬孝大王)을 따 경효왕(敬孝王)이라 부르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제25대 충렬왕의 고려 시호인 경효왕(景孝王)과 혼동할 수 있어 많이 쓰이지 않는다. 고려식 는 전(顓), 몽골 이름은 왕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 말기 군주 중 마지막으로 재위 중 종신(終身)하며 정권을 장악한 군주였기에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로 평가되기도 한다.

2. 존호

기나긴 여몽전쟁이 끝나고 원 간섭기에 들어선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자 원 천자의 제후로 편입됐다. 그 일환으로 고려는 5묘제 태묘를 사용하며 독자적인 묘호와 시호를 올리지 못하게 됐고, 묘호가 올려진 임금들은 모두 시호로 격하됐다. 신하로서 군주에게 시호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충렬왕부터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의 고려 국왕들은 묘호가 없다.

이후 《고려사》 <예지> -태묘- 조에는 공민왕이 다시 7묘제 9실 제도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이 종묘에서 섬긴 아홉 군주는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이었다. 잘 보면 묘호가 올려졌던 임금들은 모두 묘호를 회복했지만 묘호가 없던 군주들은 묘호를 추가로 올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공민왕이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했기 때문인데,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여력이 남아 있던 원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래서 종묘 제도는 천자의 것을 따르되 묘호를 새로 올리지는 않았고, 대신 공민왕은 충렬왕 이하의 군주들에게 독자적인 시호를 올려 자주성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공민왕 본인 역시 묘호가 없고 명나라가 우왕 11년에 내린 '공민왕'(恭愍王)이라는 시호만 존재한다. 다만 우왕이 재위 2년에 올린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약칭 '경효대왕'(敬孝大王)이라는 시호는 있으며, 명나라가 시호를 보내주기 전까지는 이 이름으로 주로 불렸다. 양국의 시호를 합쳐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라고도 한다.

나중에라도 묘호가 올려졌다면 좋았겠지만 다음 왕인 우왕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폐위당했고, 그 다음 왕인 창왕과 함께 <우창비왕설>에 휘말려 처형당했으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 조선 건국으로 인해 폐위당하면서 묘호를 올릴 사정이 되지 않았다. 이후 들어선 조선 왕조 역시 자신들의 건국 정당성을 위해 고려 왕조의 묘호 없는 왕들에게 묘호를 올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충렬왕부터 공양왕까지 묘호가 없는 고려 국왕들은 오늘날까지도 시호로만 불리고 있다. 그나마 시호조차 없어 휘를 그대로 쓴 우왕이나 창왕보다는 대접이 나은 편이다.

3. 생애

<colcolor=#670000> 역대 강릉(江陵)의 가신
1대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만(王卍)
2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왕전(王顓)
3대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왕우(王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공민왕/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평가

史臣贊曰 王之未立也, 聰明仁厚 民望咸歸焉 及卽位 勵精圖治 中外大悅想望大平。自魯國薨逝 過哀喪志 委政辛旽 逐殺勛賢 大興土木 以斂民怨。狎昵頑童 以逞淫穢 使酒無時 歐擊左右。又患無嗣 旣取他人子 爲大君 而慮外人不信 密令嬖臣 汚辱後宮 及其有身 欲殺其人 以滅其口。悖亂如此 欲免得乎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승려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노국공주의 영전 건설 같은 무리한 건축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을 시켜 후궁 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 <공민왕> - 논평-[8]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반원(反元) 정책을 펼친 고려의 회광반조를 상징하는 인물로 불리는 한편, 아내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이후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암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공민왕이 가장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바로 의심이 많아 신하를 함부로 죽이거나 숙청하는 일을 자주 벌였다는 것이다. 그 예로 들 만한 사건이 당시 '3원수'라 불리며 홍건적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구해낸 당대의 명장인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세운을 한꺼번에 왕명을 빌미로 사실상 처형한 사건인데, 이들은 권력을 탐했던 간신 김용의 모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인물들로써 후에 이러한 모략이 밝혀졌고, 김용도 본인이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탓에 공민왕의 지시를 받은 최영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다만 이런 무장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공을 세워 세력을 키워간 무인 세력들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행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공민왕은 1356년 병신정변 당시 무신들의 회의 기구였던 정방을 가장 먼저 없애버렸다. 그가 얼마나 무장 세력들을 경계하고 있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

게다가 고려 전체를 뒤흔들며 시궁창 속으로 몰아넣었던 무신정권이 끝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득배 등의 자식들을 공민왕이 위로했던 것은 이런 불가피한 숙청 이후의 나름의 속죄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공민왕 사후, 고려 정계에서 무장 세력들의 힘은 더욱 커졌으며 이들을 견제하던 이인임마저 무진피화 사건으로 인해 몰락한 이후, 권력은 그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최영과 신예 이성계가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세우기에 이른다. 이 결과를 볼 때 무장 세력들에 대한 경계는 타당한 것이긴 했지만 하여튼 이러한 공민왕의 끊임없는 의심은 신하들의 불안감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후에 홍륜이 공민왕을 시해한 결정적인 이유로 제기되기도 했다.

성격 면에서도 꽤나 문제가 많았는데 우유부단하여 개혁을 시도한다고 했지만 중요한 순간에서 우물쭈물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기에 《 고려사》나 《 고려사절요》에서도 이런 점들을 공민왕의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성격은 공민왕이 어린 시절부터 무려 10년씩이나 원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한데다가 즉위 이후에도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하고는 든든한 지지 기반이 하나도 없었던 점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국정을 주도하던 대신들의 대부분은 공민왕이 척결해야 할 권문세족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신하들 또한 공민왕 입장에서는 왕실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모후인 명덕태후 또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지지기반이 하나도 없었던 점과 공민왕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 합쳐져 우유부단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여러 가지로 한계나 단점도 많았던 군주로 고려 멸망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고려사》나 《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에 편찬되었고, 공민왕 본인이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위치에 있는 만큼 그에 관한 기록과 평가는 주의해 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공민왕이 이루어낸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의 회복, 영토 확장, 권문세족의 세력 약화, 신진 사대부의 성장 등의 긍정적인 측면 역시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신흥 무인들에게 존경받는 무장이었던 유탁,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에게 존경받는 유숙까지 숙청해 버린 바람에 《 고려사》, 《 고려사절요》에 실린 공민왕에 대한 평가가 추락하고 말았다.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도 이 두 사서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도 공민왕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된 말년에 대한 왜곡 가능성과 조선의 평가가 어땠든 간에 공민왕은 객관적인 교차검증을 하면 할수록 비판점이 오히려 더 쏟아지는 판국이다.

실질적으로 개국공신들의 스승이자 상관들인 인당, 정세운, 안우, 이방실, 유숙, 유탁, 홍언박, 김득배 등 명망 있던 여러 문•무 신료들이 결과적으로는 공민왕의 손에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위 말기의 평이 조선 왕조의 손을 떠나서 좋은 평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정치적인 숙청도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필요한 만큼만 해야 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나친 숙청은 신하들에게 두려움만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군주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까지 품게 만들며 쿠데타의 빌미가 될 수 있다. 훗날 말년의 공민왕을 살펴보면 본인이 권력을 쥐어주고서도 믿지 못해 숙청한다든지, 자신의 힘에 좀 가깝다 싶으면 무작정 죽여버리는 무자비한 모습이 보인다.

신하들을 복종시켜야 할 그의 리더십도 굉장히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나중에 덕흥군을 따라 고려에 침입한 최유도 한때는 공민왕을 따랐었고, 호종공신이던 조일신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런 면의 카리스마는 부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결정적으로 공민왕은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거나, 신하들에게 위엄을 보일 정도의 뚝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공민왕은 즉위 후 기철 일파 척결을 포함한 반원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음에도 늘 자신의 입지에 대해 불안해했으며, 원, 명과의 외교적 갈등이나, 조정 내부의 정쟁은 그의 섬세한 성격상 본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즉, 고려 말의 혼란한 외교관계와 더불어 이미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존재하지 않는 신하들과의 권력투쟁을 견뎌내기에는 공민왕의 성격이 너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로 공민왕의 명으로 쌍성총관부 수복 작전에 선봉에 섰던 유인우 역시 나중에는 공민왕을 배신하고, 덕흥군의 편에 붙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근본적으로 공민왕 주변에 형성된 측근 세력 자체가 미래의 출세를 위해 공민왕에게 의탁했던 호종공신이나 자신의 외척 등으로 좁았던 것도 문제였다. 이마저도 공민왕은 이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여튼 이러한 연유로 큰 권력을 쥐어주고 적절한 시기에 숙청을 반복했고 이러한 점은 최측근들조차 추후에 공민왕의 통수를 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의 육성이 당시까지는 미비했다. 동시 공민왕이 이들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 것이 한계라 할 것이다. 공민왕 자신의 사상에서도 성리학을 깊게 이해하고 수용하기보다 기존의 한•당 유학의 전통과 불교에 심취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공민왕과 비슷한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던 기성 유학자들은 기존 권문세족과 일정 부분 유착 관계에 있어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어려웠다. 이러다보니 정도전, 윤소종, 정몽주, 권근, 조준과 같은 소장 성리학파 세력들은 공민왕 대까지는 젊어서 중책을 맡기기 어려웠고, 공민왕 말기에는 국왕이 실의에 빠진 채 신하들을 불신해 개혁을 추진하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신진 사대부들은 공양왕 때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 중 정도전, 조준 등을 비롯한 강경파들은 고려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아예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건국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

더불어 원,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무장들의 수훈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토지를 분배해야 했으며, 이는 재정 악화로 이어져 군비 조달의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원의 제도 하에서 사병 집단을 거느리던 장수들을 통제하거나 사병을 혁파하기도 어려워져 개혁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공민왕은 계속 현실적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세력 유지와, 개혁을 위한 기성세력 제거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으며 현실적 힘도 제약되었다.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전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이성계가 군권을 거의 장악했던 공양왕 대였으며, 그때조차도 기성세력의 무수한 반발이 있었다.

거기다가 공민왕 본인부터가 직접적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호종공신 혹은 인척 등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측근에 의존하고, 편 가르기, 숙청, 암살, 배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들로 국정을 운영하였던 것도 자충수였다. 결국 이 일련의 잔혹한 숙청 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장애물들은 없어졌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신임할 수 있는 신하들도 같이 사라져버린 셈이다.

신돈을 기용했을 때도 이런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권문세가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하나같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비판하며 타락한 고려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동시에 신진 사대부들이 권문세족들을 비판하지만, 막상 신진 사대부들조차 권문세족과 서로 통혼하기를 원하며, 심지어 권력을 잡으면 권문세족과 똑같아진다는 식이었다. 또한, 통치자의 역할이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현실을 말하기보단 그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공민왕 본인의 이 발언은 어찌 보면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연고 없는 신돈이라는 외부인사를 기용해 개혁을 다시 시도했지만 신돈마저 권력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그도 숙청한 후엔 아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신돈 숙청 후 자제위를 동원해 엽색 행각을 벌였다는 기사가 있지만 어느 정도 왜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고, 공민왕 역시 실패한 군주로 남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정도전 등과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부여해 주었고, 이는 조선 건국의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막장이던 고려의 국세도 생각보다 많이 회복하여 공양왕 대로 가면 조선 후기보다 국가에 등록된 전답의 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이 시기 고려가 조선보다 농업이 발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농업은 당연히 조선이 고려보다 훨씬 앞섰으며 고려가 회복되어 갔다 해도 왜구들 때문에 여전히 나라는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 무신 정권, 몽골, 권문세족으로 인해 처참하게 망해버린 고려의 국력을 꽤 회복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의 사당 종묘에도 공민왕 사당이 건립되기도 했고 곳곳에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많이 세워졌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창전동에 위치한 공민왕 사당. 이는 이성계에 의해서인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공격에 내응하기도 했고, 그런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는 만 21세의 나이로 공민왕 앞에서 격구 실력을 뽐내기도 했으니, 이러한 인연들 그리고 이성계가 공민왕을 진짜 고려의 왕다운 왕으로 여겼는지 종묘에 공민왕을 모시게 된 것이다. 영정을 보면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지고는 했는데 거의 공인 커플로 인정받은 셈이다.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
고려사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자신들의 손으로 멸망시킨 왕조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실 종묘에 사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공민왕을 대우한 조선이었지만 그의 천성을 잔인하다고 힐난했다. 역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이 성군으로 평가받은 경우는 없다. 물론 공양왕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공민왕을 진정한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기도 하므로 《 고려사》가 조선 왕조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특히 이성계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우왕부터 신돈의 핏줄로 조작해야 했기에 당연히 부왕인 공민왕의 재위 후반기 부분부터 지어내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민왕의 평을 담은 《고려사》는 세종이 불공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몇 번이나 고친 것이지만 완성본은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나왔기 때문에 세종은 살아서 이 을 못 봤다. 생전 세종의 성격을 고려할 때 완성되었다면 또 수정하라고 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전조의 사서라고 해서 무조건 조작부터 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옳지 못한 시선이다. 그 증거가 분명치 않은 사건인 우왕의 출생에 관한 건이라든지, 공민왕이 자제위를 시켜 후궁들을 범하게 했다든지 등 공민왕이 말년에 보인 엽색 행각이나 방종이 조작이라고 해도 나머지 사건들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김득배, 안우, 이방실의 숙청 건, 신돈을 중용했다가 내친 건과 같은 것들은 조작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들이다. 김득배, 안우, 이방실은 이성계, 최영, 정도전 등과 같은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 사대부였고, 특히 김득배의 제자는 조선 초기에 재평가받으며 존숭되기까지 했던 정몽주였는데 일찍이 그는 김득배의 문생이어서 이 일을 한없이 한탄했다고 한다. 특히 후대로 가면서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몽골 출신이라는 것에 더해 윤이•이초 사건과 그 뒤를 이은 표전문 사건이 1차 왕자의 난으로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등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본격적인 혹평이 쏟아진 것.

확실히 3원수 숙청 건만 놓고 보면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 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는 평가도 틀린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언젠가 측근들을 쳐낼 수밖에 없었다는 옹호나 변명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앞의 평가의 경우, 명군으로 호평받는 고려 광종이나 조선 태종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며, 사실 저런 면이 없는 군주는 찾기 힘들 정도로 드문 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이 후에 화근이 될 수 있는 측근 및 신하들을 쳐낼 수 있을 때인지를 적절히 판단하는 것에 더해 그 측근을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쳐낼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내는 것은 오로지 임금의 몫이다. 결국 공민왕은 그 판단을 그르쳐버렸고 이 탓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했던 홍륜에게 역으로 시해당했던 것이다. 조선 성종 때가 되면 공민왕은 수양제급으로 묘사되었고, 영조 대에는 《 영조실록》의 내용으로 보아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되는 임금으로까지 격하되었다. 실제로 광해군을 공민왕과 맨 처음 비교한 것은 조선 왕조였을 정도.

5. 기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eonsandaeryeopdo.jpg
<천산대렵도>

6. 가계

7. 어진

파일:창덕-13222.jpg 파일:공민왕 노국공주.jpg
종묘에 모셔진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10] 경기도 박물관에 모셔진 공민왕과 노국공주 어진. 경기도박물관 소유.
파일:attachment/gonminwang2.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Kongmin_of_Koryo.jpg
개성 인근 화장사에 보관되고 있었던 원본 어진. # 조선 후기 영정 (작자 미상)
파일:공민왕 어진(복원).jpg
비공식 채색본[11]

8. 대중매체

8.1. 소설

8.2. 영화


8.3. 드라마

8.4. 만화

8.5. 게임

9. 관련 인물

10.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wiki style="margin:-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9d537><tablebgcolor=#f9d537>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공민왕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9d537,#2d2f34><colcolor=#670000,#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 생애 | 제1차 요동정벌
관련 문서 현정릉
기타 상지은니묘법연화경
}}}}}}}}}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calc(1.5em + 6px); word-break: 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세가(世家)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rowcolor=#670000,#fedc89>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 「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 성무부인 소생 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혜종 정종 광종
의화왕후 임씨 · 후광주원부인 왕씨 · 청주원부인 김씨 · 궁인 애이주 문공왕후 박씨 · 문성왕후 박씨 · 청주남원부인 김씨 대목왕후 황보씨 · 경화궁부인 임씨
흥화궁군 · 태자 왕제 · 경화궁부인 · 정헌공주 · 명혜부인 경춘원군 · ( 문성왕후 소생 공주) 효화태자 · 천추전부인 · 보화궁부인 · 문덕왕후
경종 성종 목종
헌숙왕후 김씨 · 헌의왕후 유씨 · 헌애왕태후 황보씨 · 헌정왕후 황보씨 · 대명궁부인 유씨 문덕왕후 유씨 · 문화왕후 김씨 · 연창궁부인 최씨 선정왕후 유씨 · 궁인 김씨
- 원정왕후 · 원화왕후 - }}}
현종
원정왕후 김씨 · 원화왕후 최씨 · 원성태후 김씨 · 원혜태후 김씨 · 원용왕후 유씨 · 원목왕후 서씨 · 원평왕후 김씨 · 원순숙비 김씨 · 원질귀비 왕씨 · 귀비 유씨 · 궁인 한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평양공 왕기 · 검교태사 왕충 · 효정공주 · 천수전주 · 인평왕후 · 경숙공주 · 효사왕후 · 효경공주 · 경성왕후 · 아지
덕종 정종
경성왕후 김씨 · 경목현비 왕씨 · 효사왕후 김씨 · 이씨 · 유씨 용신왕후 한씨 · 용의왕후 한씨 · 용목왕후 이씨 · 용절덕비 김씨 · 연창궁주 노씨
상회공주 · ( 유씨 소생 공주) 애상군 왕방 · 낙랑후 왕경 · 개성후 왕개 · 도애공주
문종
인평왕후 김씨 · 인예순덕태후 이씨 · 인경현비 이씨 · 인절현비 이씨 · 인목덕비 김씨
대각국사 왕후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 왕탱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 왕경 · 조선공 왕도 · 부여후 왕수 · 진한후 왕유 · 적경궁주 · 보령궁주
순종 선종
정의왕후 왕씨 · 선희왕후 김씨 · 장경궁주 이씨 정신현비 이씨 · 사숙태후 이씨 · 원신궁주 이씨
- 한산후 왕윤 · 경화왕후 · ( 사숙태후 소생 공주) · 수안택주
숙종 예종
명의태후 유씨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징엄 · 대방공 왕보 · 대원공 왕효 · 제안후 왕서 · 통의후 왕교 · 대령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령궁주 승덕공주 · 흥경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인종 의종 명종
폐비 이씨 · 폐비 이씨 · 공예태후 임씨 · 선평왕후 김씨 장경왕후 김씨 · 장선왕후 최씨 광정태후 김씨
대령후 왕경 · 원경국사 충희 · 승경궁주 · 덕녕궁주 · 창락궁주 · 영화궁주 효령태자 왕기 · 경덕궁주 · 안정궁주 · 화순궁주 왕선사 · 왕홍기 · 왕홍추 · 왕홍규 · 왕홍균 · 왕홍각 · 왕홍이 · 연희궁주 · 수안궁주 }}}
신종 희종
선정태후 김씨 성평왕후 임씨
양양공 왕서 · 효회공주 · 경녕궁주 창원공 왕지 · 시령후 왕위 · 경원공 왕조 · 대선사 경지 · 충명국사 각응 · 안혜태후 · 영창공주 · 덕창궁주 · 가순궁주 · 정희궁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강종 고종 원종
사평왕후 이씨 · 원덕태후 유씨 안혜태후 유씨 순경태후 김씨 · 경창궁주 유씨
수령궁주 안경공 왕창 · 수흥궁주 시양후 왕이 · 순안공 왕종 · 경안궁주 · 함녕궁주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제국대장공주 · 정신부주 · 숙창원비 김씨 계국대장공주 · 의비 · 정비 · 순화원비 홍씨 · 조비 · 순비 허씨 복국장공주 · 조국장공주 · 경화공주 · 명덕태후 홍씨 · 수비 권씨
강양공 왕자 · 소군 왕서 · 정녕원비 · 명순원비 세자 왕감 · 덕흥군 용산원자
충혜왕 공민왕 공양왕
덕녕공주 · 희비 윤씨 · 화비 홍씨 · 은천옹주 임씨 휘의 노국대장공주 · 혜비 이씨 · 익비 한씨 · 정비 안씨 · 신비 염씨 순비 노씨
석기 · 장녕공주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 신창(창왕)) }}}}}}}}}}}}


[1] 율리우스력 5월 23일 [A] 율리우스력 1352년 1월 14일 [B] 율리우스력 10월 27일 [A] [B] [6] 1366년(공민왕 15) 개명하고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요청하는 표문을 올림. [7] 몽골어 바얀은 '풍요로운'이란 뜻을, 테무르는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 용비어천가》식 몽골어 표기를 참고하면 당대에는 '바얀터물'이나 '바얀터믈'에 가깝게 음차되었을 것이다. [8] 이 부분은 조선 시대 사관의 의도적인 오기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즉 폐신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입막음을 위해 죽이려 한 게 아니고, 단지 사통한 자를 죽이려고 했다는 견해이다. [9] 원래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서강 일대 주민들 중심으로 제사를 모셨다가 2004년부터 양력 10월 21일로 변경되었다. [10] 이성계가 종묘를 세울 당시 바람결에 날아들어온 그림이라 전해진다. 바람결 운운이 정치적 은유임을 고려해 보자면,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임금이 어디까지나 공민왕임을 내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꽤 높다. 우왕 창왕은 아예 왕씨가 아니라 신돈 자손인 신씨라는 것이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입장이었고, 공양왕은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에게 공손히 양위한 임금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당대 작품이 아닌 이모본(移模本)으로 보인다.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홍포단령에 홀을 들고 있다. 관복이 송나라 것에 가까운데 실제로 익선관을 쓰는 형식의 명나라 관복은 우왕 때나 들어왔다. 노국대장공주는 복잡한 머리 장식에 남편과 마찬가지로 송나라 양식의 복제를 하고 있다. 최근에 역사저널 그날에서 원나라 복식을 하고 있다는 해석을 전했는데, 저 복제는 송나라 시대의 것이 맞다. 몽골식 복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11] 일러스트레이터/만화가인 우용곡이 화장사에 보관되어 있던 공민왕 어진을 찍은 사진을 보고 작업한 어진 링크. 색채와 문양 등은 추측이라 실제와 다를 수 있다고 한다. [12] 실제로 정보석은 이 당시 신돈의 또 다른 주인공인 공민왕 역에 상당한 애착을 보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연기 역시 공민왕 말기의 광기 어린 모습을 잘 표현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13] 역할 바꾸기 놀이를 해서 홍륜에게 굽실거리며 술을 따라주거나 을 들어먹으면서 이를 즐기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 [14] 사실 말이 안되는 얘기인게, 탈문의 변은 1457년에 일어났고 공민왕은 그보다 훨씬 전인 1374년 시해되었다. 더구나 원나라면 모를까 훨씬 후대의 명나라 황제가 훨씬 전에 죽은 고려 왕과 관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차라리 조선의 왕이 언급되는 게 맞는 고증이다. 애초에 드라마 자체가 역사왜곡이 너무나 많은 작품인지라... [15] 그래도 고려 국왕 중에서는 가장 높은 편으로 정치 63, 전투 54, 지모 51의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다. [16] 사실 고려에서 화포가 실전에 투입된 건 우왕 치세부터니 틀린 묘사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17] 게임에서 장수들은 문화에 따라서 병종 등에 추가 능력을 얻는 시스템이었다. 예를 들어서 서유럽 문화권 출신이면 십자군을 지휘할 때 능력치가 상승하는 식이다. 대부분은 자신의 문화권이 정해져 있고 가상 장수들은 등용된 도시의 문화도에 따르는데 문제는 왕의 자손들은 의 출신 문화와 왕비의 출신 문화 가운데서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국대장공주를 몽골 문화로 설정하면 태어나는 왕자가 몽골 문화로 탄생해서 몽골 기병에 플러스 효과를 받는 상황이 일어나는데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18] 무로마치 막부와 동맹을 맺는 선택지도 있는데 게임에서 고려와 명나라는 문화권이 같지만 일본과는 문화권이 달라서 동맹 기간 및 성공 확률에도 패널티가 있다. 가끔 컴퓨터의 무로마치 막부가 고려와 먼저 동맹을 제의하는 경우도 있으니 상황 보고 잘 판단하면 된다. 명나라의 북경이 문화도가 높아서 교역을 통해 고려의 문화도를 올리기 쉽고 명나라가 남경에서 다자이후를 계속 공격하기 때문에 다자이후의 방어도가 약해진 틈을 타 어부지리로 점령할 가능성도 있어서 더욱 이득이다. 또는 조금 멀지만 가도가 깔려있는 북원 카라코룸을 점령해서 몽골 기병과 화포병을 확보해도 괜찮다. 후계자는 고려의 문화치와 공민왕의 능력으로는 좋은 왕자를 생산하기가 어려우므로 공주를 이성계에게 시집보내 사위 무장으로 삼는게 무난하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