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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1:08:54

익선관

🎩 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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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유래3. 모양
3.1. 익선관 모양이 나타나 있는 어진, 사진3.2. 세종의 익선관 해프닝
4. 기타5. 같이 보기

1. 소개

익선관()[1] 고려, 조선 명나라 베트남에서 사용하던 왕관 및 관모이다. 중국에선 청나라에게 남명이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조선의 경우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후에도 황룡포를 입은 고종이 익선관을 계속 쓴 어진이나 사진 등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고 양장이나 군복과 함께 전통적인 관복으로서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도 이왕이 간혹 익선관을 쓰기도 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완전히 익선관이 폐지된 건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신헌법 시행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왕공족 작위가 상실되고 나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익선관을 쓸 때는 군주의 옷인 곤룡포를 입었다.
파일:external/ww4.sinaimg.cn/0065zVshgw1farvsmd74ej30o70qok04.jpg 파일:external/ww2.sinaimg.cn/0065zVshgw1farw1dgyyxj30dw0ekmze.jpg
명나라 만력제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실로 짠 익선관.[2] 영친왕의 익선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파일:11160000127a3ae89d1e[1].jpg 파일:external/ww2.sinaimg.cn/0065zVshgw1farw1n4edfj30ch0f90wj.jpg
만력제의 오사익선관(烏紗翼善冠).[3]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구룡통천관.

2. 유래

익선관의 유래는 복두로부터 시작되었다. 복두는 위진남북조 북주 무제 때 건(巾)으로 머리를 감싸 묶기 시작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당태종 시기부터의 복두는 건자(巾子)라는 상투에 씌우는 틀을 만들고 여기에 사각형의 검은 직물로 덮어 이마 윗부분까지 감싼 후, 머리 뒤편으로 4가닥으로 모았다. 그리고 그 중 2가닥은 다시 앞쪽으로 당겨 묶었고, 나머지 2가닥은 뒤에서 묶어 아래로 내려뜨려 앞뒤로 각각 날개 모양을 만들어 완성시켰다. 앞쪽의 날개는 문(文)을 상징하고 뒤쪽은 무(武)를 상징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기에 따라 건자(巾子) 재질과 모양을 달리하여 복두의 외형에 변화를 주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머리를 감싸는 건(巾)의 성격이었으나 뒤로 가면서 모체를 만들고 뒷면에는 철사를 이용하여 날개를 만드는 사모와 유사한 관(冠)의 형태로 변해갔다. 그렇게 되면서 모자 앞쪽으로 묶었던 날개는 더이상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퇴화하여 작은 장식으로써만 남게 되었다. 명나라, 조선 시대의 사모 그리고 익선관의 모체 앞부분에 매듭처럼 장식된 것들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파일:external/img2.paigu.com/68215809.jpg
원시적인 복두 착용법[4]

익선관은 당나라 시기의 기록에서 처음 보이는데 당태종이 삭망(朔望)·시조(視朝)의 때 사용할 관모로 익선관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해지는 그림 자료에서는 당태종 복두를 쓰고 있는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당시의 익선관이 날개가 솟아있는 명나라 조선 때의 모습과 유사했는지, 복두와 별다를 것이 없는데 이름만 달리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송나라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시대 복두는 황제의 것은 날개가 위로 꺾이고 신하들의 것은 아래로 내렸다 하였는데 이 것 역시 당태종 시기부터 적용할 수 있는지 마땅한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당나라 기록에서 익선관을 제정하고 착용할 당시에 총신(寵臣)들에게는 진덕관(進德冠)을 하사하여 착용하게 했다는 것을 보면 진덕관과 유사하게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당나라의 복제를 받아들인 통일신라 발해에서도 비슷하게 사용했을 수도 있으나 확인하기 어렵다. 729년 당현종이 폐지하였다고 전해진다.

송나라 시대에는 황제의 상복(常服)에 쓰는 관모로 조사절상건(皂紗折上巾)을 착용하였다. 본래 절상건(折上巾)은 날개(각 또는 뿔)가 위로 솟은 형태를 말하나 송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황제와 신하 모두 평평한 형태의 평각(平角)을 사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송나라 황제는 각이 위로 솟은 절상건을 병행하여 쓰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의 관모는 단순히 복두로 불렸다. 비슷한 시기 고려 군주는 고려도경에 따르면 오사고모(烏紗高帽)를 쓴다고 알려져 있다. 이름대로 풀이해보면 검은색의 높은 형태의 모자로 보이나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파일:external/pic.baike.soso.com/20110830184623-2060739456.jpg
후당 황제 이존욱 초상. 여기 나온 모자가 절상건이다.

명나라는 1370년에 황제의 관모로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을 정하였는데 원나라시대에도 복두 제도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당나라 송나라 제도를 참고해 가면서 신하들의 사모와 함께 손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 홍무제가 건국 당시에는 원나라의 모자를 쓰기도 하였다는 것을 보면 제도가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전까지는 원나라 관복도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405년(영락 3년)에 제도 재정비 끝에 익선관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익선관에 황반령착수포[5]를 입고 옥대를 매고 피화(皮靴)를 신었다. 명나라 황태자의 관모도 처음에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으로 부르다가 영락 3년(1405년)에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으로 다시 익선관으로 명명했다. 친왕(親王)·군왕(群王) 친왕세자도 같았다.
파일:external/ww4.sinaimg.cn/0065zVshgw1farx269ta4j30jg0t541j.jpg 파일:external/ww3.sinaimg.cn/0065zVshgw1farx27nzraj30jg0t878g.jpg
홍무제의 10남 노황왕(魯荒王) 주단(朱檀)[6] 무덤에서 출토된 오사절상건 2정.[7]

조선 시대 형태의 익선관은 우왕 때 명나라의 관제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8] 다만, 여기서 생각해볼 부분이 있는데 명나라 공민왕 말기에 군주의 면복과 조복, 신하들의 제복(祭服)은 하사해주었으나 평시 집무복인 상복(常服)[9]은 지속적인 요청에도 계속 사여해 주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의 설장수와 홍무제의 대화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는데 홍무제는 상복에 관해서는 " 고려가 알아서 적당히 지어입으면 그만인 것을 굳이 나에게 물을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설득 끝에 설장수는 사모, 단령 세트를 입고 귀국하였고 고려에서는 그 관복을 보고 명나라 관복제도를 시행했다. 하지만 군주가 입는 오사절상건과 용포를 가져왔다는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가져왔다면 분명히 기록으로 있을 것이지만 고려사 여복지에서도 확인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명나라 관복제도가 시행되었으나 ' 우왕과 신하들은 그 옷을 입지 않았다'라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 부분은 우왕이 신하들과 똑같은 차림새의 관복을 입기 싫어했다는 것인지[10], 오사절상건과 용포를 별도로 제작하였는데도 거부한 것인지를 자세히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기록에서 일부 관료들은 명나라 관복을 거부하고 호복(胡服)을 고집하였다는 것이 꽤 보이는 점, 우왕 역시 신하들에게는 명나라의 제도를 잘 따라야 한다고 해놓고는 호복(胡服)을 입고 말 타고 달렸다면서 호복을 입은 것이 강조되거나, 철령위 사건 이후로는 백성들에게 변발을 하게 하고[11] 신하들에게는 원나라 관복을 입게 하였으며, 원나라 연호를 다시 쓰게 했던 것을 보면 우왕은 오사절상건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12] 고려사에서는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이 물러나고 창왕이 즉위하면서 '전하께서 친히 중화의 제도를 따랐다'는 기록이 관복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다.[13] 이런 것을 본다면 창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명나라 제도의 오사절상건과 용포를 입었을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조선에서는 태종시기에 명나라에서 익선관(翼善冠)이라 부르면서 이 이름이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오사절각향상건의 모양이 매미의 날개 모양과 닮았다 하여 '매미 선(蟬)'을 써서 익선관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는 선(善)자가 익선관의 모양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선(善)자에서 구(口)자가 익선관의 전면부인 전옥(前屋)을, 나머지는 후면부인 후산(後山)과 날개인 절각(折角)을 닮았다는 것이다.
파일:익善관.png
익선관 善자의 의미

한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444년에 명나라로부터 익선관을 한차례 사여받은 유일한 기록이 보인다. 보통은 면복이라던가 강사포 같은 급이 높은 관복만 사여해줬으나 이 때는 특별하게도 면복에 익선관 1정과 그와 함께 입는 상복(常服)용 곤룡포 3습을 서비스로 보내온 것이다. 세종대왕도 이 사례는 전에는 없던 일이라며 기뻐하였다고 전해진다.[14]

3. 모양

2단으로 턱이 지고 앞보다 뒤쪽이 높으며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대.소각(大.小角) 2쌍이 윗쪽을 향해 달려 있다.[15] 앞면의 사변(絲辮)[16] 이 뒷면의 두 절각(折角) 사이를 얽게 되어 있다. 겉감은 기본적으로 흑색이나,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서 자색과 홍색의 사(紗) 또는 나(羅)로도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날개가 위로 치솟은 형태를 취하여 옆으로 벌어진 형태를 띠고 있는 신하들의 사모[17]와 구별한다.

왕관이라고는 해도 신라 금관과 예식용 면류관처럼 휘황찬란하고 권위 넘치는 간지 아이템은 아니지만 유교적인 이념에는 여러모로 부합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명이 망한 뒤로는 소중화적 의식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한동안 높이가 올라가는 경향을 띠기도 했으나[18] 19세기 흥선대원군의 예복 간소화 정책으로 고종대에는 매우 낮아졌다. 흔히 검은색이 가장 유명하지만 조선 말로 접어들면서 붉은색, 보라색 등 꽤 다채로운 색상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조선의 군주가 항상 익선관만 쓴 것은 아니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곤룡포[19]와 익선관은 평상시에 착용했고 망궐례, 종묘제례 등에는 면류관 곤복(면복), 신하들의 하례를 받을 때는 강사포 원유관[20]을 쓰기도 했다.

문명 5 세종대왕은 익선관이 너무 높게 솟아있어 고증오류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당시의 익선관은 높이가 훨씬 낮았다.

조선 군주들이 썼던 익선관의 본 고장인 명나라의 익선관은 명 초중반에는 검은색으로 된 아무런 장식없는 단순한 모양이였으며, 명 중후반 이후(어진으로 본다면 융경제 이후로 추측) 기존 익선관에 금이룡희주(金二龍戱珠) 장식이 추가된 오사(烏紗)익선관이 사용되었다.[21] 정통제 이후로 명나라 황제 곤룡포[22]도 보기에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해졌고, 명나라 초반 황제 어진과 중반 이후의 황제의 어진을 비교한다면 전자는 단순하며, 후자는 화려하지만 어지러울 정도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또다른 종류인 황금실로 만든 금사(金紗)익선관은 황제가 죽은 뒤에 무덤에서 착용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로 생전에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력제의 무덤인 정릉에 묻힌 복식들은 모두 생전에 만들어져 착용하던 것들로 금사익선관도 동일한 성격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것을 착용한 이렇다할 기록이나 회화 자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사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몇몇 그림 자료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으며, 사후를 위한 관이라면 만력제의 시신이 금사익선관을 쓰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또한 정릉에서는 황후들의 봉관(鳳冠)도 기존제도를 벗어나는 것들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명 후기에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생겨났던 것으로 보이지만 명황제 중에서는 만력제의 정릉이 유일한 발굴 사례이기 때문에 정확한 등장 시기는 불분명하다. 금사익선관은 오사익선관과는 다르게 직물로 덮지 않은 형태이므로 통기성이 좋기 때문에 만력제가 여름철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23]

중국에서는 익선관을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하는데, 모체 전면부를 전옥(前屋), 후면부를 후산(后山) 그리고 날개인 절각(折角)으로 부른다. 전옥은 앞집, 후산은 뒷산이라는 뜻이다.

3.1. 익선관 모양이 나타나 있는 어진, 사진

파일:태조 어진 얼굴 확대.jpg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익선관의 높이가 낮다.

파일:세조(조선).png

조선 세조 어진 초본(草本). 태조에 비해 익선관의 높이가 제법 높아졌으며 이 때쯤이면 매듭 장식을 꼬아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일:영조.png

조선 영조 어진. 익선관의 높이가 매우 높아졌다. 보기에 멋있기 때문에 사극에서는 시대에 관계없이 이런 높은 익선관이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파일:attachment/iksun5.jpg

대한제국 고종의 사진. 익선관 높이가 다시 낮아졌다. 흥선대원군 시절 사치 금지 및 의복 간소화 정책에 따라 관복의 문양, 장식을 크게 간소화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의 의복도 예외가 아니어서 익선관의 높이가 낮아지고 곤룡포의 용보도 축소되었다.[24]

3.2. 세종의 익선관 해프닝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3022700700005303_P2.jpg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3022700710005301_P2.jpg
세종의 것으로 추정되었던 익선관 마감재로 사용된 훈민정음 활자본이 보인다.

2013년 2월 세종의 익선관이 발견되었다고 했으나 결국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바 있다. 세종의 익선관이 아니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이후 세종대왕의 익선관이 아니라 궁중 여성용 모자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 일단 모자에 그려진 용의 발톱이 4개인데 1444년부터 5조룡을 썼던 세종이 훈민정음 종이로 보아 1446년 이후에 제작된 이 4조룡 관모를 썼다는 것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 형상 측면에서도 익선관에 필수요소인 매미 날개가 없는데다, 익선관은 단색으로 만드는 것이 명나라 조선이나 원칙인데, 화려한 무늬가 놓여 있다는 것이 이 모자는 익선관이 아니라 여성용 모자라는 주장의 근거이다. 게다가 모자에 새겨진 자는 불교의 상징인데 당대 조선 군주의 종교 유교였으며 불교는 되려 탄압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세종대왕은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장본인 태종의 아들이며 자신의 아버지가 탄압했던 대상의 상징물을 자신의 왕관에 새겨넣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에 대해서 사실 세종의 종교는 불교였고 궁궐 내에 내불당을 만들고 법회에 참석하는 등 열렬한 불교 신자여서 그랬다는 반론도 있었다. 실제로 조선 전기만 해도 공적으로는 철저한 유학자일지라도 사적으로는 불교 신앙을 가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군주가 사적으로 법회에 참석하거나 개인적인 영역에 법당을 두는 것과 정무에서 착용하는 의복에 불교 문양을 새겨넣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거기에 모자의 형식 자체도 위에 나온 반론처럼 익선관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어 처음 세종대왕 익선관 설을 주장했던 교수도 이것은 세종대왕의 것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4. 기타

옥션같은 쇼핑몰에서도 판다. 결혼식 폐백 의상이나 연극 소품용으로 팔지만 중국산이자 저가형은 대부분 금실로 화려하게 장식된 명나라 익선관 스타일이고 금실 장식없이 단색으로 된 조선 익선관 스타일은 오히려 고급형으로 쉽게 찾기 어렵다.

사극에서는 21세기 들어서 조선의 군주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물론이고 어전회의처럼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익선관을 생략하고 곤룡포와 상투를 장식하는 작은 관만 쓰고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연산군이 연극에 너무나도 집중한 나머지 광대들에게 익선관을 갖다 바치는 충격적인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아무리 똘끼 충만한 연산군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익선관을 광대들에게 갖다 바치는 짓거리 자체가 임금의 체면을 버리는 짓거리라 주변 신하들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후궁 장녹수조차 놀랐을 정도다. 분위기는 당연히 얼어붙고 연극을 하고 있던 광대들 본인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인데 연극의 주인공인 부패한 벼슬아치 역을 맡은 광대 장생이 기지를 발휘해 겨우 수습한다.

군대에서는 가끔씩 똘끼 충만한 장병들이 전투모를 가지고 익선관을 만들어 임금님 노릇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이 말년병장이 아닌 이상 이짓거리 했다간 고문관으로 등극하기 십상이니 군생활 편하게 하고 싶거든 절대로 하지 말자. 사실 2012년 이후부터 베레모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젠 전투모로 익선관 흉내 내고 싶어도 못 낸다. 그런데 2020년 7월 전투모가 부활해서 다시 익선관 놀이가 가능해졌다.

5. 같이 보기



[1] 매미 선()자를 쓰기도 한다. 말 그대로 매미날개 모양의 관이라는 뜻이다. [2] 명나라 황제가 죽은 뒤에는 금익선관을 쓴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출토 당시 만력제는 검은색 오사익선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익선관은 다른 관모들처럼 만력제의 머리 윗편에 안장되어 있었다. [3] 죽은 만력제가 쓰고 있던 익선관의 복제품. 실제 유물과 완전히 동일하게 복제된 것은 아니다. 비교해보면 다른 곳들이 눈에 띈다. [4] 상투에 씌우는 건자(巾子)의 모습을 달리하여 모양을 굽히거나 높일 수 있었다. [5] 黃盤領窄袖袍 . 반령(盤領)은 원령(圓領)보다 옷깃이 좁고 높은 형태이며 착수(窄袖)는 좁은 소매를 말한다. 가슴과 등, 양측 어깨에 금룡이 하나씩 직성되었다. 뒤로 가면서 원령(圓領)을 쓰고 넓은 소매인 대수(大袖)가 유행하게 된다. [6] 생몰년 1370년 3월 15일 ~ 1390년 1월 2일 [7] 오른편의 오사절상건이 태조 이성계의 것과 흡사하다. [8] 그 이전에 고려는 송의 관복을 사용했고, 이후 원의 관복을 사용했다가 공민왕 때 다시 폐지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9] 고려사에서는 이를 뭉뚱그려 편복(便服)으로 칭함. [10] 왜냐하면 사모, 단령을 가져와서 그 샘플을 보고 명제(明制) 관복을 만들었는데 군주가 신하와 똑같은 것을 입으면 품위가 안 산다. 좀 예외적인 경우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종 태종이 각각 군주의 자리에 있을 때 사모와 단령을 입은 기록이 2건 있기는 하다. 전자는 종묘에 제향(傳香)할 때 그렇게 입고 나왔다가 대신들에게 앞으로는 면복을 입으셔야 한다며 한소리 듣기도 했으며, 후자는 즉위 후 고명을 가져오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였다. 고명 받은 후에 면복을 입었다고 하니 이들은 아주 잠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1] 원래 원나라가 망했어도 고려에서는 변발을 했던 백성들이 많았으나, 철령위 사건 직후 명나라 사신이 고려로 들어오자 나라에서 잠시 금했던 적이 있었다.(1388년 3월) 그러나 4월에 요동정벌을 시행하게 되면서 원나라 풍색을 하도록 하였다. 이것들은 2개월 이내로 위화도 회군(5월)과 군주 교체(6월)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금지되었다. [12] 설장수와 홍무제의 대화내용 중에는 또 이러한 부분이 있는데, 설장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에 우왕이 압록강까지 사람을 보내서 반드시 명나라 관복을 얻어올 것을 다시 한번 간곡히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모, 단령을 입은채로 돌아오면 모든 관료들에게 착용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설장수 이전에 명나라 관복을 요청하러 갔던 사신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막 돌아왔던 때로 우왕이 황망해하며 다음으로 출발했던 설장수에게 급하게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던 관복을 얻었건만, 거부했다는 우왕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대화내용에서도 군주의 관복을 요청했다거나, 관련 내용이 나오거나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13] 고려사 조준 열전 참고 바람. [14] 조선왕조실록 세종 26년(1444년) 3월 7일 1, 2번째와 14일 1번째, 26일 2번째 기사 참고 바람. [15] 영조시기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보서례 국조상례보편에 따르면 크고 작은 각(角) 각각 두개씩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는 실 유물로 남아있는 고종 영친왕 익선관(각각 세종대학교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명나라의 익선관은 절각이 한쌍뿐이기 때문에 조선도 처음에는 한쌍으로 하다 후에 늘어났을 수도 있으나 이전의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16] 익선관 모체 앞면에 달린 밧줄처럼 꼬아놓은 매듭 장식을 말한다. 비단실 같은 것을 여러개 꼬아서 만든다. 이것의 특별한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나 직물을 땋는 것(꼬는 것)을 두고 사변(絲辮)이라 한다거나 변사(辮絲)라고 하기도 한다. 영조 어진에서는 청색이기 때문에 흔히 청사변(靑絲辮)으로 부르며, 고종과 영친왕 유물은 홍색과 자색으로 되어 있다. [17] 내시의 사모에는 날개(뿔)가 없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 선조시대에 그려진 김새신 초상화와 구한말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 내시 그림을 보면 흉배 단령에 날개 달린 사모를 쓰며 일반 신하들과 다름 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다. [18] 청나라 황제는 익선관을 쓰지 않고 청나라만의 독자적인 왕관을 썼기 때문에 굳이 조선 군주가 쓰는 익선관의 높이에 대해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청나라의 왕관은 익선관과 달리 복두 계열의 왕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양부터가 사발 모양으로 완전히 달랐다. [19] 여기서는 상복(常服)용을 말한다. 원래 곤룡포는 용무늬가 있는 용포를 말하는 것으로 상복(常服) 용포와 면복 모두 포함이 된다. 구별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면복을 곤복, 곤면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에서는 면복이 곤룡포로 적혀 있는 경우도 많으니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담이지만 청나라시대에는 용포라는 옷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용이 있다고 아무 옷이나 용포로 부르면 안 된다. [20] 고종이 황제가 된후에는 통천관으로 변경 [21] 항상 이렇게 금룡이 장식된 익선관을 사용한 것은 아니고 회화자료를 보면 장식이 단순하거나 아예 없는 것들도 병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22] 이것은 곤복으로 불리나 면복과 구분하기 위하여 12장 곤복으로 부르기도 한다. 면복의 경우는 곤복으로도 부르지만 혼란이 올 수 있어 곤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12장 곤복은 제왕의 최고등급 관복인 면복의 기능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평시에는 다른 용포들을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3] 앞서 노황왕의 익선관의 경우 두 종류가 남아있는데, 하나는 흑칠한 대나무를 엮어서 모체를 만든 후 검은 직물로 덮은 것이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흑칠한 철사로 만들고 직물은 덮지 않았다. 전혀 다른 재료와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무언가 의도가 있다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여름 철에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력제의 금사익선관처럼 직물을 덮지 않은 하계용 익선관이 명 초부터 존재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24] 이 영향으로 구한말에 촬영된 사진에서 등장하는 양반의 모습을 보면 크기도 마치 중인의 패랭이마냥 작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사극에서 등장하는 큰 갓은 흥선대원군의 정책 이전이고 고구려와 신라, 발해 벽화에서도 등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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