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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0:50:12

면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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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가 재현한 조선 군주의 9류 면류관
파일:면_류관.jpg
중국 황제의 12류 면류관의 구조

1. 개요2. 역사
2.1. 중국2.2. 한국2.3. 베트남2.4. 일본
3. 구조4. 가시 면류관5. 가상 매체에서6. 같이 보기

1. 개요

면류관()은 중국에서 유래해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각국 군주가 썼던 왕관의 일종이다. 복두나 익선관이 만들어지기 전인 고대 중국에서는 면류관만이 왕관이었으며 조회나 즉위식 등 공식 석상에서 착용하였다.[1] 면관(冕冠) 또는 평천관(平天冠)이라고도 하며 보통 세트로 입는 곤복과 합쳐 면복이라고 부른다.

원래 고대 중국 왕조(, )에서 숭배 대상인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의복이었다. 하늘과의 소통, 즉 제사는 하늘의 대행자인 천자(天子)만이 주관할 수 있었는데 이때 제사장이 쓰는 모자가 면류관. 다시 말해 제정이 일치했던 시대로부터 유래된 유물이다.

따라서 유교의 영향력 아래 들어 있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왕관 하면 곧 면류관이었다.[2] 면류관은 보통 군주가 쓰지만 류의 개수나 곤복에 들어가는 무늬의 개수에 차등을 둬서 황족 또는 신하들도 쓸 수 있도록 허락한다.[3]

면은 위의 넓직한 판이라 달리 평천판이라 부른다. 류는 앞뒤에 드리워 얼굴을 가리는 구슬 꿴 발을 뜻하나, 류를 면류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류를 드리우지 않고 판만 있는 작변(爵弁)이라는 모자도 있다.

청나라 황제의 만주족식 사발형 관과 더불어 중국 황제관의 양대 스테레오타입이다.

2. 역사

2.1.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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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자들이 평상시와 행사 때를 불문하고 항상 쓰던 왕관이 면류관이다. 제정분리가 안된 상고시대에 종교 지도자가 얼굴을 가리던 모자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고대에는 긴 구슬로 천자의 얼굴을 가리는 왕관이었으나 시대가 갈수록 구슬의 길이가 짧아졌다. 시대가 흘러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 천, 비단이나 말총 등으로 만들어 더 가벼운 복두관을 써, 평상시에는 복두관, 즉위식, 종묘 제사, 조회 등 국가적 행사 때에만 면류관을 썼다.[4] 이러한 풍조는 후대 왕조에도 이어져 송나라 때는 전각복두[5]와 절상건[6]이, 명나라 때는 익선관이 천자가 평상시에 쓰는 왕관이 되었다.

면류관 자체는 고대부터 시작되어 명나라 때까지 존속했지만 왕조마다 그 제도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가령 면류관에 늘어뜨리는 류에 들어간 구슬이 백옥인지 아니면 5가지 옥 또는 7가지 옥인지, 평천판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관모에 꽂는 비녀가 옥잠인지 아니면 금잠인지 등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청나라 때는 중화풍의 면류관을 사용하지 않고 만주족의 전통 관을 썼지만[7] 청조 멸망 후 위안스카이 홍헌제제를 통해 중화제국 선포하며 황제를 자칭했을 때 잠시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류가 없다. 중국 드라마 삼국연의(84부작)에 묘사되는 면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fficial_at_Yuan_Shikai%27s_1913_visit_to_the_Temple_of_Heaven.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nli-Emperor.jpg
위안스카이의 제천의식에 참여한 내무총장 주치치엔(朱啓鈐)의 사진[8] 명나라 만력제의 초상화.[9]

파일:면류관.jpg

파일:대진부 진시황제.jpg

중화권 매체에서 묘사되는 면류관은 보통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흔히 잘 알려진 명나라 조선 대 어진에서 보이는 머리를 완전히 뒤덮는 일반적인 형태이고 또 하나는 위에 사진처럼 머리를 거의 노출한 체 긴 형태로(장관) 된 면류관이다. 대부분 상투 위에 상투관처럼 사용하며 고정을 위해 비녀를 사용하였다. 보통 후자는 고대 왕조들을 묘사한 경우 군주들이 주로 착용하는 것으로 나온다.[10][11]

2.2. 한국

파일:209146_73557_5151.jpg 파일:익종어진1.png 파일:attachment/hwomyung123.jpg
이명기가 모사한 신라 경순왕 어진 조선 효명세자 초상

아직 유교식 예법이 보급되기 전인 삼국시대의 군주들은 주로 백라관, 오라관, 금관 등 한국식 관을 사용했다. 고구려의 오회분 5호묘와 통구 사신총 벽화에 면류관을 쓴 신선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면류관의 존재 자체는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

이후 진덕여왕 시기 신라가 당나라의 복식 제도를 수용하고 삼국을 통일하면서 금관 대신 복두를 쓰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면류관도 같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단속사라는 절에서 소장하던 경덕왕의 어진에 면류관이 그려져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12] 삼국유사에 실린 원성왕 즉위 설화에서도 면류관이 언급된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어진에는 4개의 류가 달린 사각형 면류관이 표현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윗면에 해와 달을 표현한 듯한 문양이 있다.

한편 발해도 당식 의복을 받아들인 만큼 면류관을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기록이 전무하다.

중국식 면류관의 사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점차 나타난다.[13] 고려사에 따르면 문종 19년(1065년) 4월 11일 요나라에서 9류관과 9장복을 사여해준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 이후 계속 타국에서 면류관과 면복을 선물 받는다. 고려 숙종이 동생 대방공을 봉할 때 대방공의 복장 제도가 구장(九章)에 이르렀다는 언급으로 보아, 숙종 대에 제후 중 공작급은 구장 면류관과 면복을 입은 듯 하다.[14]

인종 18년(1140년) 4월에는 드디어 조서를 내려 제사를 지낼 때 국왕이 9류면을 쓰고 칠장복을 입도록 정했으며, 신하들도 1품은 7류면, 2품은 5류면을 쓰도록 했다. 이후 의종 대에는 의종고금례[15]를 만들어 면류관 예법을 정하는데, 국왕이 쓰는 9류면은 각 류에 12개의 구슬을 빨강, 하양, 파랑 순으로 꿰고, 뒤가 조금 들리고 앞이 살짝 내려온 모습이었다. # 신하들이 쓰는 면류관도 다시 정했다. #

상술한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관리들도 직급에 따라 면류관을 썼다. 그러다가 여몽전쟁 종전 이후 원 간섭기에 면류관이 폐지되어 몽골식 사발형 관모로 대체되었다. 이후 공민왕에 의해 면류관이 부활했는데, 이때부터 신하들의 조복에는 금관[16]을 쓰게 되면서 면류관은 국왕과 왕태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익선관이 왕의 평상시 왕관으로 자리잡았고, 이때 면류관도 같이 들어왔는데 1403년에 명나라로부터 사여받은 이후 대한제국 때까지 면류관은 행사용으로만 사용했다. 결국 특별한 날에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장교 정복과 의미가 비슷하다. 면류관을 쓸 때는 옷도 평상시의 곤룡포가 아니라 ' 곤복'이라는 더 복잡한 구조의 옷을 입는다. 1474년 간행된 국조오례의서례에는 조선 전기 당시의 면류관을 그린 삽화가 있어 참고할 만하다. #

각각 영친왕 순종황제의 면류관 #, #

2.3. 베트남

파일:external/5170b48ffe09e91c10f0c3ad83d9e56b8c6ad362f63db89586c4b5a011b880f0.jpg
베트남 응우옌 왕조 카이딘 황제

2.4. 일본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일본도 천황들은 면류관을 사용했다. 7세기 스이코 덴노 시절 관복을 정비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발표하는 학회 모습). 정창원에서는 아직 면류관을 비롯한 관련 복식 유물들이 남아 있다고 하나 이를 묘사한 그림만 공개하였을 뿐 유물 자체는 일반에 공개한 적이 없다. 또 다른 면류관으로는 고메이 덴노의 것이 남아 공개하고 있다. 이 면류관들은 관 위에 햇살 모양 욱광이 뻗어나오는 태양 장식과 일본식 삼족오라고 비유할 수 있는 야타가라스 모양 장식이 있는 등 중국식 면류관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중에 헤이안 시대 부터는 상류층 정장이 단령에서 유래한 소쿠타이 칸무리가 주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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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류관을 쓴 고다이고 덴노 # 잘 보면 그냥 스이에이노칸 위에 괴이한 평천판과 면류를 올려놓은 모양새.. 고메이 덴노가 생전에 쓰던 면류관. # 자세히 보면 앞과 뒤에만 류가 있는 다른 면류관과는 달리 모든 방향으로 류가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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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복원한 모습(위)와 당시 복식을 고증해 그린 그림(아래). #

3. 구조

면류관의 구조를 보자면 관모 위에 '평천판(平天板)'을 얹어놓았으며 앞뒤로 '면류(冕旒)'라고 하는, 실에 구슬을 꿰어놓은 것을 매달아 만들었다. 그런데 무조건 아무렇게나 만드는 게 아니라 임금의 관모이니만큼 만드는 것부터도 격식이 중요했다. 명나라 천자가 쓰는 면류관과 조선 임금이 쓰는 면류관은 면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명나라 천자의 면류관은 면류가 앞뒤로 각 12개씩 24개를 달아서 만들도록 되어 있는 반면 조선 임금의 면류관은 앞뒤로 각 9개씩 18개를 달아서 만든다. 면류에 꿰는 구슬도 아무렇게나 꿰는게 아니라 황제는 붉은색-백색-푸른색-누른색-검은색의 순서로 1줄당 12개를, 조선 국왕은 1줄당 9개를 꿴다. 양 옆에는 간신배들의 아첨하는 소리로부터 귀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청옥을 귀 부분에 늘어뜨린다. 곤복도 명나라 황제는 12가지 무늬가 들어간 12장복, 조선 왕은 9가지 무늬가 들어간 9장복으로 차별되었다. 그 후계자들인 황태자/왕세자들은 각각 한 단계씩 낮추어 9류면 9장복, 8류면 7장복을 입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들어선 청나라 만주족 고유의 황제복을 도입했기 때문에 익선관과 장복은 폐지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대한제국에서는 황제국의 예를 따라 12면류관 12장복으로 승격되었다. 현재도 종묘제례 행사 재현 때 황사손 또는 황사손을 대신해 황제 역을 하는 분은 12면류관 12장복을 입고 참석한다.

삼국지 시리즈를 보면 헌제 조환 등이 면류관을 쓰고 있다. 면류의 숫자를 세어보면 12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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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황제즉위식을 거행하는 이원 황사손이 12면류관 12장복을 착용하고 있다.

4. 가시 면류관

파일:external/jarrettbanks.files.wordpress.com/crown-of-thorns.jpg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마태오 복음서 27장 27-31절( 가톨릭 성경)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마르코 복음서 15장 16-20절( 가톨릭 성경)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요한 복음서 19장 2-3절( 가톨릭 성경)
성경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퍼지자, 예수를 잡아서 처형하려는 로마 제국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로마 제국 황제가 쓰는 월계관을 본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예수의 머리에 강제로 씌워서 가혹행위를 했다. 이때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나자렛 사람 예수, 유다인들의 임금'(I.N.R.I.[17])이라는 명패 십자가에 달았고, 예수가 피를 흘리며 강제로 쓴 가시관을 왕관이라 불렀다. 이후 동아시아 문화권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월계관을 면류관으로 번역한 것이다.

복음서 원문에는 그냥 '가시 왕관'( 마르코 복음서, 요한 복음서에서는 ἀκάνθινος στέφανος(thorny crown).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στέφανος ἐξ ἀκανθῶν(crown made from thorns). 루카 복음서에는 언급 없음)으로 나온다. 요한묵시록 등에서 '면류관'으로 번역된 어휘 역시 원문에서는 그냥 στέφανος이다.

해당 가시나무는 지중해, 아라비아 원산의 대추나무의 일종인 Ziziphus spina-christi로 여겨진다. 영칭은 Christ's-thorn jujube.

현재 공식적으로 예수의 가시면류관으로 믿어지는 성유물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입수하였다고 하며,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었다. 다만 2019년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가 발생하자 이 가시면류관의 안전에도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다행히 안전하게 확보되어 루브르 박물관에 임시 안치 되어 있었고 재개장 이후 새롭게 단장되었다.

5. 가상 매체에서

6. 같이 보기



[1] 아무래도 류가 주렁주렁 달려서 활동하기에 매우 거추장스러운 형태이다 보니, 면류관만이 군주의 관이었던 고대에도 평상시에는 류가 없는 작변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2] 유교에 나오는 예법은 주나라 왕실 예법이므로. [3] 가령 후한 시기 배경으로 한 중화권 삼국지 드라마를 보면 황제가 아닌 제후들도 면류관을 쓰고 나온다. 코에이 삼국지 게임에도 익주의 주목 유장이 작변을 쓴 일러스트가 있다. [4] 유럽에서도 철 왕관, 성 이슈트반 왕관, 삼중관 등 금속으로 된 왕관이 점점 예식용, 투구 등으로 밀려나면서 군주들이 평상시에는 천으로 된 모자를 쓰거나 아예 모자를 안 쓰게 된 것과 유사하다. [5] 일반 신하들이 쓰는 전각복두 사모와 달리 매미날개가 엄청나게 길다. [6] 일반 복두와 달리 익선관처럼 매미날개가 위쪽을 향한다. [7] 거란족의 요나라,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 금나라는 면류관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요나라가 초대 황제부터 면류관을 쓴 반면 금나라는 3대 황제부터 비로소 면류관을 쓰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복왕조인 원나라조차 면류관을 썼다. [8] 위안스카이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용모도 다르고 위안스카이는 당시에 이미 수염이 하얗게 세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의 사진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류'가 없는 작변이기 때문에 군주라고 할 수 없다. [9] '류'가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일부러 류를 돌려서 그렸다. [10] 신하들이 쓰는 진현관이나 금관은 머리를 다 덮는 형태인 것과 대조적으로 황제나 왕들은 상투관 형식의 면류관을 착용한다. [11] 예시로 든 인물은 드라마 대진제국 시리즈에서 진 혜문왕을 열연한 푸다롱(부대룡)과 시황제를 맡은 장로일. [12] 김일손의 속두류록에는 "숲 속에 절이 있는데 편액에 '지리산 단속사'라 쓰여 있고 (...)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 금당)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질박하며, 벽에 면류관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제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고 한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 이는 삼국유사에서 "경덕왕의 진영을 단속사 금당 뒷벽에 두었다"라고 한 기록과 부합한다. # 참고로 '유순'은 삼국사기에 단속사의 창건자로 등장하는 경덕왕 대의 인물 이순(李純)을 잘못 적은 것이다. [13] 경기도 연천 숭의전에 있는 태조 왕건 어진에는 앞이 9류, 뒤가 4류인 금색 면류관이 그려져 있으나, 보통 조선 후기에 그려진 상상화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므로 실제 왕건의 복식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10세기 당대의 자료인 왕건 청동상은 면류관이 아닌 통천관을 쓰고 있다. [14] 아니면 대방공이 말 그대로 제후니까 그냥 제후 지위의 비유일 수도 있다. [15]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16] 위의 금관과는 다르다. 위의 금관은 금으로 만들어진 관이지만 이 금관은 금칠을 했을 뿐이다. [17] Jesus Nazarenus, Rex Judæo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