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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20:36:40

여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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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전쟁
麗蒙戰爭
고려-몽골 전쟁 | 高麗-蒙古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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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대몽 항쟁.jpg

▲ 여몽전쟁의 전개도
시기 1231년 ( 고종 19년) ~ 1259년 (고종 46년)
장소 한반도 전역
원인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와 몽골의 관계 악화.
교전국 <rowcolor=black> 몽골
(공세)
고려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오고타이 칸 (원 태종)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귀위크 칸 (원 정종)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몽케 칸 (원 헌종)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철 (고려 고종)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우
참가자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살리타이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탕우타이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아무칸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보르지긴 야쿠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잘라이르 자랄타이
참가자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윤후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서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경손
파일:고려 의장기.svg 대집성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춘명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자성
파일:고려 의장기.svg 채송년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2차 침입 수행중 최고 사령관 전사 정규군 (3군) 절반 이상 손실
- 민간인 사상자 상당수 발생
결과 몽골의 승리, 고려의 패배
- 무신정권의 붕괴 및 몽골 제국과의 강화조약 체결.
- 고려의 전 국토 초토화
영향 몽골 제국의 고려 왕실 내정간섭
- 착취를 위한 통치기구 설립
- 고려의 정치·경제 쇠퇴.
- 권문세족의 성장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제1차 침략3.2. 제2차 침략3.3. 제3차 침략3.4. 제4차 침략3.5. 제5차 침략3.6. 제6차 침략3.7. 제7차 침략~제9차 침략
3.7.1. 제7차 침략 - 몽골군의 상륙 작전3.7.2. 제8차 침략3.7.3. 제9차 침략
3.8. 대몽골 강화와 개경 환도, 삼별초의 난
4. 결과5. 평가6. 비판7. 관련 인물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231년( 고종 19년) 8월부터 1259년(고종 46년) 3월에 이르기까지 28년간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 제국 고려 침공으로 촉발된 전쟁.
대몽항쟁, 항몽전쟁 등으로도 불리며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패배로 끝난 여요전쟁과 달리 몽골 제국을 향한 고려의 항복으로 끝난 고려 전쟁사 최악의 암흑기로, 그야말로 전 국토가 잔혹하게 짓밟혔다.

2. 배경

칭기즈 칸의 주도하에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하며 유목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서역을 정리하자 몽골 제국은 중원으로 눈을 돌렸고, 1차 목표는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여진족의 금나라였다.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남북으로 공격하니 금나라는 비참하게 멸망했다. 이때 거란 잔당의 일부는 동요[1]를 세우고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하며, 다시 몽골군에 쫓기게 되어 1216년(고종 4년), 고려를 침략했다.

이에 몽골 제국은 여진족의 동하[2]와 동맹을 맺고 거란의 잔당( 후요)들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쳐들어왔다. 고려도 거란 잔당 소탕을 위해 군사를 동원, 몽골 제국-동진 연합군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했다. 이것이 바로 강동성 전투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몽골 제국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마치 큰 은혜나 베푼 듯이 제멋대로 행동했고,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으며, 몽골 제국의 사신들은 고려에 들어와 깽판을 부렸다.[3] 이러니 고려에선 당연히 반몽 정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러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제국의 사신 저구유(저고여, 箸告與)가 귀국하던 도중 국경에서 자객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 제국에서는 고려의 소행이라 주장했고, 이에 맞서는 고려에선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고 주장해[4]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졌고, 결국 국교 단절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몽골 제국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했다.[5]

현재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 중에는 왜 몽골이 끈질기게 고려를 복속시키려고 시도했는가가 있다. 엄청난 영토를 지닌 몽골 제국에게 고려는 한 줌도 안되는 별볼일없는 땅이고, 몽골을 적극적으로 위협할 만한 세력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땅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이라기엔 전투에서 압살해놓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냥 놔두고 다른 곳으로 군대를 돌린 나라들도 몇몇 존재한다. 몽골 제국 동부의 장군들이 독자적으로 침공했다는 설이 잠시 돌았으나 《원사》에 의하면 그런 정황은 찾아볼 수 없다.

3. 전개

3.1. 제1차 침략


파일:external/www.cgsociety.org/199463_1358905891_large.jpg
파일:external/www.bbggnews.com/1_L_1347593397.jpg
몽골군 (※ 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 블로그)

제2대 태종 오고타이 칸은 숙적인 금나라를 치기 위해 배후의 위협을 미리 차단하기를 원했고[6] 이에 권황제였던 살리타이(撒禮塔)에게 군사 30,000명을 주어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군은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 철주 등을 단숨에 함락시키며 남하했고, 고려군은 이에 맞서 자모산성 전투 동선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안북성 전투에서 희대의 패착을 거두며 전황이 급속도로 불리해졌다. 귀주성 전투에서의 혈전 속에 그 지역을 수비하던 박서 김경손 등의 맹활약으로 10,000명의 몽골 북로군을 귀주에 묶어두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황에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몽골군이 수도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났다. 그 후 왕족인 회안군 왕정을 적진에 보내어(사실상 인질) 강화를 맺었고, 제1차 침입은 종료되었다.

이때 좀 어이없는 사건도 하나 있었다. 충주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던 관리들이 도주하자 양민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문제는 몽골군이 철수한 후 돌아온 관리들이 성안의 재물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처벌한 것이다.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몽골군 격퇴의 공을 높이 평가한 고려 조정은 반란을 용서했다.

3.2. 제2차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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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전황에서 고려는 잠시라도 피하고자 몽골과 강화를 했지만 이는 고려의 작전상 후퇴였고,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우는 앞으로 있을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해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도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결국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하자 이에 분노한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입했다. 이때 몽골군은 서북부를 다시 초토화시킨 뒤 홍복원의 배신으로 서경을 함락하는 데 성공하고, 그 뒤에 그를[7] 앞세워 개경을 함락시킨 후 남경도 함락시킨 뒤, 계속 남하했다. 해전에 약한 몽골[8]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거절했다. 이에 몽골군은 다시 남하하여 처인부곡을 공격했지만 김윤후라는 승려[9]의 화살에 사령관인 살리타이가 전사하는 바람에 퇴각했다.
파일:external/i61.tinypic.com/vsdowp.jpg
고려군 출처

한편, 몽골군이 철수하자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3,000명을 주어 앞서 배반한 역적 홍복원을 토벌하고, 그의 가족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이 제2차 침입 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고,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3.3. 제3차 침략


금나라 1234년에 처참하게 멸망하자, 몽골은 1235년(고종 22년)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탕우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공격하도록 했다.[10] 몽골은 여러 차례 패배를 하면서도 4년간에 걸쳐 고려 영토를 초토화시키고 점령했다. 몽골군은 1, 2차전에 털어버린 황해도, 경기도뿐만 아니라, 대구, 경주(동경) 등 현재의 경상북도까지 털었다. 이때 몽골군은 황룡사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고, 황룡사 대종 등 문화재를 약탈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고려에게 안겼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며 저항했고, 부처의 힘을 빌려 난국을 타개하고자 1236년 팔만대장경》의 제조를 시작했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몽골군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결국 1238년 겨울, 고려 조정에서 몽골에게 강화를 제의했고, 몽골도 고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1239년 4월에 철수했다.

철수 후 고려는 약조를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이 독촉하자 왕의 신병을 이유로 입조가 불가능함을 알렸다. 그 대신 왕족인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을 왕의 아우라 칭하며 몽골에 보냈다. 그리고 2년 후인 1241년(고종 28년)에 신안공 왕전의 사촌 형인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3.4. 제4차 침략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제3대 정종 구유크 칸이 즉위한 후, 몽골은 고려가 약속한 입조와 강화도에서의 출륙을 여전히 지키지 않자 1247년 7월에 아무칸(阿母侃: 아모간)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하여 염주(鹽州)에 진을 쳤다. 그러나 곧 1248년에 구유크 칸이 붕어하고 후계자 문제로 오고타이 가문과 툴루이 가문 사이에 분규가 생겨 고려의 '선철군 후입조'를 받아들이며 임시 철군했다. 1249년 2월에야 구유크의 사망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고, 고려는 어차피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기에 뻗대고 있었다. 그러자 1249년 9월부터 1250년 2월까지 몽골의 속국인 동진(東眞)의 군대가 쳐들어와 이를 막아냈으며 그러던 중에 고려의 권력자였던 최우가 1249년 11월에 사망하고, 뒤를 이어 최항이 집권자가 되었다.

3.5. 제5차 침략



몽골 내부에서 대칸의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주변국으로의 출병이 줄어들었으나, 후계 분쟁이 끝나고부터 고려에 대한 침략 역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제4대 헌종 몽케 칸이 즉위한 후, 그는 고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어 1253년(고종 40년) 황족인 보르지긴 야쿠[11]를 시켜 고려를 침공했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9월부터 10월 초까지 동주(東州: 철원)·춘주(春州: 춘천)·양근(楊根: 양평)·양주(襄州: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충주성엔 21년 전 처인성 전투의 그 김윤후가 있었다. 충주성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으며 1개월 이상 시간을 끌었다. 이 항전으로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다. 이때(11월) 돌연 야쿠가 병을 이유로 귀국했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화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야쿠의 사신과 회견했으며[12],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 혹은 안경공 강)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했다. 안경공 왕창은 몽골에서 생활하다가 1254년 8월에 고려로 귀국했다.

몽케 칸은 안경공 창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안경공이 그 전에 인질로 간 영녕공 왕준의 동생이라고 여겨서 후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민칭(閔偁)이란 자가 사실을 고발해서 영녕공이 고려의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았다. 물론 영녕공은 자기가 국왕의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 박박 우겼으며,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왕의 친자(親子)는 아니지만 왕의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니 그게 왕의 아들이라는 뜻임'이라며 콤비로 우겼다. 당연히 몽케 칸은 증거를 가져오라며 그 전에 고려에서 몽골에게 보낸 표문을 읽어 보았는데 정말로 표문에도 친자식(親子)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 이에 몽케 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불문에 부친 채 넘어가야 했다.[13]

3.6. 제6차 침략


몽케 칸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최항을 대동한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했다. 결국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잘라이르 자랄타이[14] 정동원수(征東元帥)[15]로 삼고 대군을 지휘하여 고려를 침략하도록 했다.

한편 이번에는 몽골이 수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1254년 2월, 하동군의 갈도 약탈).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몽골의 앞잡이가 된 고려인 이현(추밀원 부사)을 바다에 던져 죽여버리니 휴전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자랄타이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것이 이른바 다인철소 전투[16]로 이 전투 역시 중앙군 없이 주민들이 향리인 지씨와 어씨의 지휘 아래 몽골군을 막아냈다. 이 일로 다인철소는 익안현으로 승격했고 다인철소의 천민들도 모두 면천되었다. 이에 자랄타이는 다시 우회해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계속 남하하여 지리산까지 내려가 진주를 눈 앞에 두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령으로 군을 개경으로 돌이켰다. 그러나 이 짧은 5개월 사이 고려가 입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여 《고려사》에서 포로가 206,800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했을 정도였다.[17]

3.7. 제7차 침략~제9차 침략

일시: 1255년 9월 ~ 1259년 3월

몽골군의 장기 주둔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다. 사실상 제6차 침입 이후의 연속 전쟁에 가까웠다. 경우에 따라 제6차 침입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3.7.1. 제7차 침략 - 몽골군의 상륙 작전


몽골은 1255년 2월부터 8월까지 지속적으로 국지적인 약탈을 자행하다가 9월에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삼고, 인질로 갔던 영녕공 홍복원을 대동하며 침입하여, 전라도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강화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이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군은 서경으로 일시 철수했다. 그러나 몽골군의 산발적인 공격은 끊이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3.7.2. 제8차 침략


1257년(고종 44년), 고려에서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중단하자 분노한 몽골이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했다. 그 사이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지 1개월도 되지 않은 1257년 5월이었다.

그간 고려 조정은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의 허락을 얻었는데 몽케 칸은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했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철군 후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했다.[20]

하지만 최의는 그 다음해 김준 일파에게 살해당했다.(무오정변)

3.7.3. 제9차 침략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쪽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폈다. 약속했던 고려 태자가 오지 않자, 김준이 정권을 잡은 지 1개월 만에 몽골군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도 몽골군에 대한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여 항전하는 방식을 택했다.[21]

3.8. 대몽골 강화와 개경 환도, 삼별초의 난

그러던 1259년 8월, 몽골의 몽케 칸이 붕어하고, 몽케의 동생들인 쿠빌라이 아리크부카 형제 사이에서 칸위 계승 전쟁(툴루이 내전)이 벌어질 시점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몽골로 향하던 고려의 태자 왕전이 이후 새롭게 제5대 대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講和)를 논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귀국한 태자는 7월에 승하한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났지만 고려 조정의 의견 불일치로 개경 환도(還都)만큼은 계속 지연되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거듭 표시했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무진정변)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왕창을 임시로 즉위시키니 이 사람이 영종[22]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에 물러났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다가 등창으로 죽었다.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했지만 몽골의 군사적인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경오정변) 12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100년 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강화를 맺은 지 10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 배중손 김통정 등 일부의 무신들이 환도에 극렬히 반대하며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으나 여몽연합군에 의해 1271년 진도에서 배중손이 전사하고, 1273년 제주도에서 김통정이 살해된 후, 삼별초가 전멸당하면서 끝이 났다.

4. 결과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6,800여 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 《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

전쟁 고려의 강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고려는 몽골군에게 굉장한 인명 손실과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덕분에 몽골 침입 이전의 목조 건물도 많은 피해를 봤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한국 고건축 상당수가 1300년대에 중창된 사실을 비추어 봤을 때 수많은 건축이 큰 타격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보다 피해가 적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건물의 소실 기록 중 임진왜란이 많이 언급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이 워낙 전란이 많아 과거 시점으로 갈수록 기록이 없어져 임진왜란 때의 기록이 많이 남아서 그런거지, 여몽전쟁의 피해가 적다는 뜻은 아니다.[23] 당시 한반도 내 주요 도시와 고을 대부분은 피해를 보지 않았던 지역이 없었을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항복하러 간 훗날의 원종이 되는 태자와 고려 사절에게 쿠빌라이 칸 당태종도 못한 것을 자신이 해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쿠빌라이는 강력한 칸위 경쟁자이자 카라코룸을 장악하고 있었던 동생 아리크부카의 도전에 맞서기에는 명분상 취약한 상태[24]였는데, 고려는 30여 년간의 장기간에 걸친 저항으로 인해 꽤 알려진 지역이었으며, 동시에 만주 지역에서 상당한 위상을 지닌 고구려의 계승국가였으므로,[25] 고려가 자신에게 항복한 것은 자신이 대칸의 자격이 있다고 선전하기에 매우 충분하고도 합당한 명분이 되었다. 여기에 고려 공략에 동원되었던 만주 지역의 동방 3왕가로 대표되는 초원 이남 지역 몽골 귀족들이 쿠빌라이에게 동조하면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 측면에서도 밀리지 않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공급되던 물자 운송로를 끊어서 결국 아리크부카를 항복시킬 수 있었다.

원종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 칸은 이후 원종이 임연에 의해 강제 폐위되자 원종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 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곧 짐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천명하며 원종이 복위되고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본인에게 정치적 이득을 안겨준 덕분인지 쿠빌라이는 고려와 강화를 맺으면서 고려 측의 요구인 "고려 고유의 전통과 체제를 바꾸지 않는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26] 조항을 받아주었다. 즉 고려의 독립성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무신정권이 몰락하자 1270년에 고려 조정은 정식으로 개경으로 환도했고, 원종이 정식으로 카라코룸의 몽골 황궁에 입조하여 쿠빌리아 칸과 회담을 하면서 39년간의 여몽전쟁은 정식으로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 고려는 몽골에 결혼 동맹을 제안했고[27] 몽골 측에서 받아들여 훗날의 충렬왕이 되는 세자 왕심이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보르지긴 쿠툴룩켈미시(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다.

과거에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고려 측에서 최소한의 자주성이라도 보장받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왜냐하면 충렬왕은 대칸의 사위가 되는데, 몽골에서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할 때 쿠릴타이라는 회의를 통해서 결정한다. 여기엔 칸의 사위도 참석할 수 있으므로 고려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게 되었고, 몽골의 사신들과 관리들도 고려 국왕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부마국의 위치로 자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한국의 국사책과 인터넷의 몽골 제국 강역 지도 부분에서 "우리나라는 마치 독립국처럼 몽골의 지배영역에 들어가지 않았다" 라고 나온다. 물론, 어디까지나 고려가 몽골 제국에 패배하지 않았다는 서술에 불과할 뿐이다.

몽골은 자국이 정복한 나라를 향해서 이른바 6사(六事)라는 여섯 가지 조건을 관철시키는데 그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28]
  1. 납질(納質): 인질을 보낼 것.
  2. 조군(助軍): 군대를 보내어 몽골의 정벌을 도울 것.
  3. 수량(輸糧): 몽골군에 군량을 조달할 것.
  4. 설역(設駅): 역참을 설치할 것.
  5. 공호수적(供戸数籍): 호구 수를 조사하여 바칠 것.
  6. 치달로화적(置達魯花赤): 다루가치를 둘 것.

그런데 이 여섯 가지 조건 중에서 고려에 제대로 관철된 것은 인질을 보내라는 납질 정도밖에 없다. 먼저 다루가치는 원 간섭기 초반인 충렬왕 대에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왜냐하면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속국들에서는 다루가치가 속국의 왕들보다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다루가치가 속국을 좌지우지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고려의 경우에는 국왕이 원나라 황제의 부마이기 때문에 다루가치보다 그 서열이 높았으며 이 때문에 다루가치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쿠빌라이 칸이 직접 다루가치를 둘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1278년 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또 조군과 수량 역시 충렬왕 때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 쿠빌라이가 사망하면서 전쟁이 전무해졌기에 거의 유명무실해졌으며 설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공호수적은 고려의 완강한 반대로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다. 당시 고려는 이것마저 공개할 경우 몽골에 벌거숭이처럼 모든 걸 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했던지, '저희 나라의 미미한 호구를 알아 본들 크나큰 대원대몽골국에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는 구우일모의 예까지 들어 가며 반대했다. 그래서 몽골은 당시 고려의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 경제 규모가 어떤지 군사력은 어떤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29]

몽골 제국은 원 간섭기 치하의 고려 왕실을 자신들의 지배 범위에 두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관제 개혁, 군사 기구 개혁 등 상부 구조 지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하부 구조에까지는 철저하게 관철되지는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몽골은 고려의 호구 조사를 실시하지도 못했고 그로 인해 고려의 호구와 군사의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도 못했다. 또한, 고려의 경제적 기반인 노비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나 이 역시 고려 측의 완강한 반대로 불발되었다. 따라서 정치사만 놓고 보면 고려는 원나라에 종속적이었으나 노비 제도 개혁, 조세, 호구 등 사회 하부 구조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는 제한적인 것에 불과했다. 관직 제도와 왕실의 호칭 역시 천자국에서 제후국에 걸맞게 격하되긴 했지만 그 역시 고려가 유지해 왔던 근본적인 틀이 백지화된 게 아니라 제후국에 걸맞은 것으로 부분 수정되었을 뿐이다. 원나라가 산동의 기근 때문에 빌려간 미곡이 얼마후 3배로 고려의 기근 때 3배로 돌려받은 것, 제국에서 선제권을 행사하는 수혜를 받은 것 등도 있다. 충렬왕은 제국의 황실 권위를 빌려 고려 내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1278년 7월 다루가치와 주둔군 설치를 간청했으나 쿠빌라이가 다루가치는 왜 필요하며, 국방은 고려인들 뽑아서 알아서 하라고 거절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몽골 제국 전체적으로 각지에서 수탈이 일어났지만 고려 왕실 자체는 그 제국에서 칸의 아들들 사이에서도 중위권에 앉을 수 있는 제국 n위권 황족으로 격상되었다. 당대 최고 권리인 제국 선제권을 비교하자면 훗날 500년 뒤 미국이, 영국이 세금만 걷고 주지 않은 당대 최고 권리인 의회 투표권과 비교할 만하다. 그리고 미국은 프랑스군의 막대한 지원으로 독립했다. 원 황실은 고려 왕실에게 망한 송나라에서 약탈한 보물들이나 가축을 선물로 하사하고 고려 왕실은 말과 곡물을 진상하는, 여몽전쟁 이후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세계 제일 대제국과 그 주변국인 만큼 당연히 평등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우호적이었다. 1354년 홍건적의 반란 진압 때 고려 왕실을 입지를 격상할 기회로 봐서 참여했고, 그전 나얀의 반란 때도 먼저 참전해도 되겠냐고 물은 건 고려였다.

다만, 일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몽골 측에서 전진 기지격으로 세웠던 정동행성이 점차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과 식민통치 기구로 변질되면서 고려를 더욱 옥죄는 계기가 되었고, 몽골의 입김에 따라 국왕이 폐위되고 복위되는 이른바 중조 현상도 2번이나 나타났지만, 반대로 원 황실에 반기를 든 반란군이나 황실의 태자까지 고려로 압송해서 유배보내는 걸 보면 그냥 당대 서로 죽고 죽이는 제국 황실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충선왕이 권력을 얻은 경우도 유배된 몽골 왕자의 옹립이 성공해서다.

사실 여몽전쟁 이후에 몽골보다는 홍다구를 비롯한 매국노들에 의해 피해를 더 입었다. 쿠빌라이는 재차 강조해서 고려인들을 납치하지마라고 명령을 내렸고, 김방경도 힌두 같은 장군보다는 홍다구 같은 원에 먼저 붙어서 지속적인 모함으로 고려 전체를 접수하려는 매국노들에게 학을 떼었다. 충렬왕도 쿠빌라이에게 원나라에서 군을 주둔하기를 원하면 몽골군이나 한족이라도 규모 불문하고 좋으니, 맡은 군사에 대한 것을 넘어 월권해서 국정에 사사건건 개입하려는 홍다구의 군대는 데려가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런 매국노들 때문에 영토도 상실되었는데 먼저 1233년에 고려의 홍복원이 귀주를 비롯한 서경 도호 40여 성을 들어다가 몽골에 갖다 바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몽골은 이 지역을 심양로(瀋陽路)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1258년 조휘 탁청 등이 화주 일대를 몽골에 갖다 바쳤고, 이 땅에 식민지배를 위한 통치기구인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 그리거, 1270년에는 최탄과 이연령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서경의 부, 주, 현, 진 60개 성을 들어서 몽골 제국에 갖다 바쳤고, 그 탓에 자비령에서 고려와 몽골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몽골은 이 지역에도 똑같이 식민통치를 위한 통치기구인 동녕부를 설치했다.[30] 마지막으로 삼별초의 난이 평정된 후 1273년에 몽골은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목마장을 경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지역들은 몽골이 강제로 빼앗았다기보다는 고려의 매국노들이 스스로 갖다바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녕부는 1290년에 다시 고려로 반환되었고, 탐라총관부는 1301년에 반환되었으며[31] 쌍성총관부 공민왕 때인 1356년에 무력으로 저항하여 다시 되찾아왔다.[32]

또한, 고려에서는 원 간섭기가 이어지면서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은 부원배 매국노들인 이른바 권문세족이 출현했다. 이들은 고려 전기부터 있었던 문벌귀족의 일부와 무신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원나라와의 친선관계를 통하여 새로 등장한 유력가문이자 호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권문세족은 막강한 원나라의 힘을 앞세워서 고위급 관직들을 독점하고, 백성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면서 양민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면서 노비로 삼는 등 각종 폐단을 일삼았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 고려사》나 《 동국병감》, 《 동국통감》등에서 이 전쟁의 기록을 했다고 하지만, 이 시기가 워낙에 암흑기였기 때문인지 생각만큼 당시 전쟁 기록이 구체적이진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당대 사료인 원사 외국열전 고려편이 있다고 하지만, 원사 자체가 졸속으로 기록된 역사서인데다가 원나라의 시선으로 기록된 사료인지라 한계점이 있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의 경우는 《 난중일기》와 《 징비록》, 《 선조실록》과 《 선조수정실록》등으로 초기 이후의 기록이 구체적이었던 것과 달리 여몽전쟁에서는 이러한 전쟁을 담은 일기나 실록이 생각보다 많이 누락되어 있다. 즉, 이때의 일을 누군가가 일기나 사략 형식으로 더 구체적으로 담았더라면 원 간섭기 치하 당시 고려의 실황을 자세히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병자호란(조청전쟁)의 경우는 여몽전쟁보단 짦은 전쟁이었지만 여러 일기나 야사록이 쏟아졌을 만큼 당시 기록들이 여럿 남았다.

다만, 당시 고려의 상황을 보면 총체적인 상황을 기록하고 정리할 만한 현장의 컨트롤 타워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는 있다. 임진왜란의 경우도 왜군에게 조선이 거의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가 개전 반년 후 왜군이 경상남도 일부에서만 버티고 있었기에, 어쨌든 조선 조정은 도서 지역이 아닌 본토에서 버티고 있었으며, 지방관들과의 연결도 고려보다는 훨씬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임진왜란의 주전장이 되었던 경상도조차도 계속 경상감사가 현장에 남아 지휘하며 전황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니 전황이 계속 《 조선왕조실록》에 남을 수 있었다. 류성룡이 《 징비록》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모든 전황을 보고받는 전시재상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순신이 《 난중일기》에 다른 지역의 소문이나 전황을 적을 수 있었던 것도 조선의 행정망이 살아남아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고려의 경우는 안그래도 조선보다 지방 통제력이 약한 상황에서 전란까지 맞아 그 빈약한 행정망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파견되는 이들도 '방호별감' 등의 임시직이라 체계적으로 현장의 상황을 정리하고 기록할 만한 역량은 되지 못했다. 여담으로 ,병자호란과 여몽전쟁을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비교해봐야 큰 의미는 없다. 병자호란은 민생의 피해보다도 왕을 포함한 왕실 일가가 모조리 잡혔다는 점에서도 완패였고, 여몽전쟁은 왕실은 도망쳤지만 국토 전체가 불타버렸다는 점에서 완전한 완패였다.

두 전쟁 모두 중앙 조정에서 정책적인 판단을 그르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전력은 임진왜란의 피해에서 회복하지 못한 조선보다 분명히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대비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더불어 인조가 강화도 몽진에 실패하면서 문제가 더 커졌다. 인조가 몽진에 성공하고 근왕군이 성공적으로 집결하여 제대로 전투를 치렀다면 병자호란은 승자가 바뀔 수도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군대가 강한 세력이었어도 장기전을 치를만한 역량은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인조가 직접 숭덕제를 상대로 아홉번 절을 하면서 항복 의식을 치르는 것은 물론이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까지 볼모로 끌려갔다.

고려의 경우는 무신정권의 모르쇠 외교가 일을 키웠다. 저고여 피살 사건으로 대표되는 우봉 최씨 정권의 무능은 피해갈 수도 있었던 전란을 일으켜서 전 국토를 불살랐다. 전쟁 과정에서의 졸렬함도 두드러져서, 전 국토가 피폐해지는 와중에도 정예부대는 강화도에만 놔두고 몽골 제국에 저항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으며, 체계적인 방어 전략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후의 왕들은 어린 시절을 원나라에서 보내고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은 탓에 스스로 고려인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사실, 여몽전쟁의 패배나 삼전도의 굴욕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굴욕이었는지를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선을 더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몽전쟁을 굴욕이라 할 것이고, 고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병자호란이 더 굴욕이라고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학자 임용한이 말했듯 "왜 패배했는가?"로부터 나오는 교훈이지, 어느 쪽이 굴욕인지, 혹은 잃은 것만 기억하고 받은 건 무시하면서 굴욕이라고 억지로 믿는 것이야말로 미련하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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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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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인물

8. 관련 문서



[1] 대요국(大遼國)이라고도 한다. [2] 동진국(東眞國)이라고도 한다. [3] 대표적인 사신의 깽판으로 《 신원사》에 기록된 포리대완( 푸타우)의 일을 들 수 있다. 포리대완은 사신으로 왔을 때 객관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고종이 나와서 맞이하라고 꼬장을 부렸으며, 다음날 조서를 고려 측 관료나 환관에게 주지 않고 고종의 손을 직접 잡고 건넸다. 《신원사》에 의하면 이때 고종 이하 관료들은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고 하는데, 설령 고려의 풍습을 잘 모르고 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고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무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4] 저고유 살해 사건 내막에 금나라가 개입했다는 설이 있다. [5] 저고여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몽골이라면 치를 떨던 고려의 민중들은 좋아했지만, 최씨 무신정권에선 긴장했다. [6] 일본을 공격한다급의 뜬금없는 공격은 아니었다. 금나라는 거의 형식상 수준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고려의 상국이었기 때문이다. [7] 홍복원은 고려 입장에선 배신자로 성문을 열어 몽골군에 협조한 매국노이다. 그의 아들 홍다구도 몽골에서 출세하여 고려로 파견나와 김방경을 고문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부원배짓을 일삼았다. [8] 몽골은 물이 부족한 탓에 전통적으로 물에 대한 금기가 대단했다. 워낙 기후가 건조해서 몸의 분비물이 적으니 빨래를 안 하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고인 물에 오줌을 누면 사형일 정도였다.(1999년 발간된 《신현덕의 몽골 풍속기》참조.) [9] 이설(異說)이 있다. 이후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장수가 되었다. [10] 특히 1233년에 몽골이 멸망시킨 동진의 군대가 선두에 서서 침략해왔으며 이후로도 여몽전쟁이 끝나는 1259년까지 계속 몽골과 보조를 맞추어 고려로 쳐들어온다. [11] 한자: 야굴(也窟) 또는 야고(也古) [12] 이때 강화도의 성벽을 헐라는 몽골의 요구에 송나라 해적들이 강화도를 털어요라며 나중에 하겠다고 박박 우겼다. 점령지에 달로화적( 다루가치)을 두고 10,000명의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도 반대했다. [13] 출처: 《고려사》 <열전> 12권 최유청 중 부 최린 부분 [14] 한자: 차라대(車羅大) 또는 札剋兒帶 [15] 정동행성의 그 '정동'으로 '동쪽을 정벌한다'는 뜻이다. 다만 국사에서 유명한 정동행성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가 완전히 항복하고 난 이후, 더 동쪽에 있는 일본을 정벌하려고 한 원나라의 일본원정 때 생겼다. 어쨌든 뜻은 같다. [16] 또는 유학산성 전투라고도 한다. [17] 다만 몽골군의 병력수를 미루어 보아 피해 규모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8] 候騎 [19] 여기서 말하는 포차는 투석기다. [20] 고종이 연로하여 목표는 고려 태자의 입조로 낮춰졌다. [21] 심지어 최씨 정권보다 한 술 더떠서 1260년에는 강화도를 떠나 제주도로 천도하기 위해 나득황을 파견해 조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삼별초의 난보다 11년 앞선 일이었다. [22] 훗날의 시호 [23] 몽골의 침입으로 많이들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황룡사다. 임진왜란도 그 건축사적 손실이 여몽전쟁과 비견되는 수준이다. 차이점이라면 현대까지 살아남은 거대 건축물들 대부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한 번 불탔고 이후 재건되었지만, 여몽전쟁 때 불타 없어진 거대 건축은 상당수가 다시 재건되지 못한 것이다. [24] 몽케 칸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몽케조차 혼낼 정도로 그동안 보여준 유목민의 전통에서 동떨어진 행태로 인해 워낙 명분에서 밀려서 몽골 귀족들의 지지가 없다보니 자파만으로는 대칸 선출 회의인 쿠릴타이조차 열 형편이 아니었다. [25] 다만 이에 대해서는 쿠빌라이의 고려 왕조에 대한 교묘한 이간책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 왕조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국가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 이전의 삼한(여기서 삼한이란 고려, 후백제, 신라의 후삼국을 의미하지만 넓게 보아서 후기 신라 이래의 고구려, 백제에 대한 '삼한일통' 의식의 연장이기도 했다)을 통합해 세워진 나라이기도 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하는 나라라면 이는 거꾸로 보아서 옛 고구려가 아니었던 백제나 신라, 나아가 제주(탐라)는 지금의 고려 왕조와는 별 상관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으며, 제주(탐라) 지배에 대한 고려의 권리를 희석시키고 나아가 고려 내부에서의 백제나 신라 옛 지방 세력들의 분리 의식을 획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미 고려 고종 때에 '제주'라는 이름이 있었던 제주도를 굳이 '탐라'라고 옛 이름대로 부르거나 혹은 아예 '백제'라고 부른 것도 제주가 고려와는 애초부터 별개의 존재이자 오래된 독립 왕국이었던 역사를 들춰내면서 그것을 탐라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 주장이나 탐라 지배 개입을 차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출처: 김일우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 어떻게 생각하면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제1조에 일본이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라는 조항을 넣은 것도 전통적으로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치고 형식적으로 그 신하국임을 자처해 온 조선에 청나라가 개입할 여지를 미리 차단해 두려는(조공을 받는 중국 입장에서는 필요할 경우, 조선의 요청에 따라 조선에 지원을 할 의무 비슷한 것이 있었으므로)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과도 비슷하다. [26]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한다. [27] 흔히 몽골이 먼저 고려에 왕자들을 몽골에 장가보내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 고려사》에는 분명히 원종이 먼저 몽골과 사돈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초에 몽골은 황금씨족이 아니면 절대로 아무하고 결혼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몽골 측에서 그런 국혼을 먼저 제안할 리가 없다. [28] 고려사 > 세가 권제26 > 원종(元宗) 9년 > 3월 > 몽고 황제가 약속 불이행을 질책하는 조서를 보내다 [29] 이는 원나라 치하의 중국(특히 구(舊) 남송 지역)도 어느 정도 비슷했다. 원나라 자체가 금나라 및 남송까지 이어지던 중앙집권제가 없어지고 봉건제로 퇴보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나라의 행정력은 같은 북방 기마민족계 정복왕조였던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보다도 훨씬 떨어졌다. [30] 최탄은 서경유수(西京留守) 최년(崔年), 판관(判官) 유찬(柳粲), 사록(司錄) 조영불(曹英紱), 용주(龍州) 수령 유희량(庾希亮), 영주(靈州) 수령 목덕창(睦德昌), 철주(鐵州) 수령 김정화(金鼎和), 선주(宣州) 수령 김의(金義), 자주(慈州) 수령 김륜(金潤)을 죽였고, 그 나머지 각 성의 원리(員吏)들도 다 적에게 살해당했으며 성주(成州) 수령 최군(崔群)은 부하의 손에 죽었다. 김정화의 처는 대경(大卿) 이덕재(李德材)의 딸로, 처음 고을로 들어올 때 그 미색을 뽐내느라 얼굴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최탄의 부하들이 김정화를 기둥에 묶어놓고 보는 앞에서 그 처인 이씨를 강간했다. 또한 선주수 김의는 사람됨이 굳세었는데 적들이 술을 부으라 하니 분을 못이겨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다. [31] 다만 탐라는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실질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탐라 현지에서 목장을 관리하던 몽골인 세력들이 쥐고 있었다. 탐라가 완전히 고려에 귀속된 것은 1374년 탐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하고 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32] 동녕부와 탐라는 반환되고 쌍성총관부는 반환하지 않아 무력으로 탈환해야 했던 이유를 '세조구제'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의 고유한 풍속을 헤치지 않겠다는 것인데 동녕부와 탐라는 '세조구제'를 선포한 이후에 넘어갔지만 쌍성총관부는 그전에 넘어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