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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釣魚城 戰鬪
1. 개요
합주 전투라고도 부르고, 서기 1259년 몽골과 남송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몽골은 수십만 명의 인마를 앞세워 남송(南宋) 동천부로(東川府路) 합주(合州) 조어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수장 왕견[1]과 부장 장각의 지휘 하에 군민들이 단결하여 싸운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고, 결국 몽케 칸이 죽고 몽골군이 회군했다.
오늘날의 조어성
2. 전투 이전
몽송전쟁이 발발한 이후, 사천 지역은 몽골군의 파괴약탈이 심각한 지역이었다.[2] 송 이종 가희(嘉熙) 4년(1240), 사천제치부사 팽대아는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동천부로 합주(지금의 충칭 시 허촨 구) 동십리(東十里) 조어산에 감윤(甘允)을 보내 진을 쳤다. 오고타이가 죽은 뒤, 몽골군이 철군하고 남송은 사천 지역에 산성을 쌓음으로써 몽골군을 방어하기로 했다. 이에 남송 이종은 양회 지역에서 공을 세웠던 여개를 사천제치사로 임명해, 사천 전선을 담당하게 하였다. 순우 3년(1243)에 사천제치사(四川制置使) 여개[3]가 염진, 염박 형제의 건의를 듣고 조어성을 쌓고, 이곳에 주치소를 옮겨 중병을 주둔시켜 가릉강(嘉陵江)의 요충지를 장악하였다. 보우 2년(1254) 여개 사후[4] 왕견이 합주 수장을 맡아 대규모로 성을 쌓고 방비하는 등 조어성의 수비를 강화했다. 이에 산시·천북 사람들이 이주해 왔고, 조어성은 수십만의 군사 요충지가 되었다.3. 전투 과정
송 이종 보우 6년(1258) 7월 몽케 칸은 육반산[5]으로부터 3로를 나누었고,[6] 그 중 몽케 칸의 주력부대가 사천(四川)에 입성했다. 12월, 성도를 비롯한 천서·천북의 대부분을 공략한 이후 무승산[7]에 도착하여, 동천부로 합주로 진격하려고 하였는데, 여개가 이미 합주 치소를 조어성[8]으로 옮겼고, 여개 사후 왕견이 수비를 강화했다. 사천 지역의 대부분은 그 곳을 수비하던 남송 장수들이 지레짐작으로 겁먹고 항복하였는데[9], 본격적인 저항은 조어성에서 시작되었다.몽케는 남송의 항장 진국보를 조어성으로 보내 항복을 권하라고 하였으나 진국보는 오히려 왕견에게 죽임을 당했다. 9년 정월, 몽케는 군사가 강하다고 믿고 견성을 피하지 않고 기주, 만동하를 우회하여 천후, 지리적 불리함을 무시하고 조어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왕말형을 파견하여 예의산성(禮義山城, 지금의 거강 동북, 속칭 삼교사채)을 공격하고, 예라독노웅(剌羅獨盧雄)은 양산성(梁山城, 지금의 쓰촨성 파중 서)을 평정하고, 남송 출신 항장 양대연(楊大淵)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합주의 옛 성을 급습하여 외곽의 여러 성과 조어성과의 연계를 끊게 하였다.또 뉴린(新麟)에게 부교를 만들어 송군의 연락을 끊게 했고, 또한 중경으로부터 오는 송군을 저지했다.
1259년 2월 2일 몽케는 군대를 이끌고 닭발톱(지금의 낚시터 동북 계심석)을 건너 성동 자갈산에 주둔했다. 3일 몽케의 친독 제군이 조어성을 공격한다. 7일 몽골군은 일자 성벽을 공격했다. 9일, 몽군은 진서문을 맹공하여 공격하였고, 사천택도 이날 조어성에 도착하여 참전하였다.
조어성은 3월 성의 동쪽에서 연거푸 공격을 받았지만, 신문(新門), 기승문(奇勝門), 진서문(鎭西門), 소보(小甫) 등에서 성을 지키는 군민(軍民)의 완강한 항거에 모두 실패했다.
4월 3일에는 20일 동안 큰비가 내렸다. 22일 초 날씨가 개었을 때 몽골군의 성남호국문에 대한 기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튿날 밤에는 성 북쪽에서 가릉강(嘉陵江) 쪽 일자성(一字城)을 무너뜨렸지만 왕견(王堅)이 용사(勇士)를 이끌고 힘차게 탈환했다. 송 이종은 소식을 듣고 포상을 내려 합주 군민을 격려하였다.
조어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몽케 칸은 여러 장수들에게 진취적인 계책을 상의하라고 명령했다. 대장 술속홀리(術速忽里)는 견고한 성의 아래에 병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불리하므로, 차라리 소수의 부대를 남겨 괴롭히게 하고, 주력부대는 장강 수륙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쿠빌라이 등의 군사와 만나 남송을 일거에 멸망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교만하고 횡포한 장수들은 강공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속시원한 말로 일관했다. 몽케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성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송군은 사천을 구원하려 했으나 몽골군의 저항에 막혀 끝내 조어성 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개월 동안 포위 공격당한 조어성은 여전히 물자가 풍부해 수비 투지가 높았다. 남송 수군은 1일 15kg짜리 생선 두 마리와 밀가루 떡 백여 장을 성 밖 몽군에게 던지고 10년만 더 지켜도 몽골군이 조어성을 공략할 수 없다고 서신을 보냈다. 그에 반해, 성밖의 몽골군의 형편은 매우 좋지 않았다. 몽골군이 성 아래에 오래 머물렀고, 폭염의 계절이었는데, 몽골인들은 원래 더위를 두려워하고 습한 데다 물과 토양이 맞지 않아 열사병, 말라리아 돌림, 콜레라 등의 질병이 유행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6월 초 사천제치부사 여문덕은 전선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몽골군의 봉쇄를 뚫고 중경으로 들어갔다. 이어 천여 척을 이끌고 가릉 강을 따라 북상하였으나, 사천택의 군대에 가로막혀 중경으로 되돌아갔다. 비록 원군은 저지되었으나, 날씨가 더워지고 역병이 유행하면서 몽골군 전력은 크게 줄은 등 전황은 몽골군에 불리했다. 왕견은 그 틈을 타서 여러 차례 몽골군의 막사를 야습하여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함으로써 밤에 편안하지 못하게 했다. 초5일 새벽 몽골군 원수 왕덕신[10]이 군사를 이끌고 밤을 틈타 외성 마군채를 돌파하자 왕견은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치렀다. 날이 밝을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몽골군의 공성병기가 부서져 퇴각하였다.
몽골군이 성을 공격한 지 5개월이 지나도록 내리지 못하자 왕덕신은 필마단기로 조어성에 항복을 권유하다가 날아오는 돌에 맞아 진운산에 있는 사찰에서 죽었다. 몽케는 크게 노하여 군사를 시켜 동문 밖에 건물을 짓고 성 안의 허실을 염탐하여 결전을 치르게 하였다. 7월 21일, 몽케가 직접 현장에서 조어성의 상황을 관측하였는데, 이를 본 남송군이 포를 쏘았고, 몽케는 포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어 조어성에서 철수해 금검산 온탕협으로 향하던 몽케가 사망했다.
《 원사》본전과 원인문집중의 비전, 행장 등에 의하면, 몽케 칸을 따라 출정했던 장수들이 조어성 아래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어성 전투의 혹독함과 몽골군의 피해가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설에는 몽케가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성을 함락 즉시 성의 군민들을 몰살시키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막대한 피해를 입은 몽골군은 마침내 조어성의 포위를 철수하고 북쪽으로 귀환하였다.
4. 이후
조어성 전투 이후 왕견은 가사도의 질시를 받아 죽었고, 이후에는 왕견의 부하였던 장각이 사천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였고, 중경, 합주 일대에서 몽원 군대를 막아냈다. 나중에 쿠빌라이는 한족 신하들의 옹호를 받으며 원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1278년 중경이 함락되는 등 악재가 발생하였고, 남송이 멸망한 해인 1279년, 쿠빌라이는 성 안의 백성들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수장 왕립은 그제서야 성을 버리고 투항했다. 성을 버리고 연민을 구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성을 지키던 32명(일설 36명)이 모두 검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조어성 전투 이후 사천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원에 항거한 장각은 강에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하고, 대도로 압송되던 와중 측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1]5. 영향
조어성 전투는 몽골 제국과 세계사 및 남송 정권에 큰 영향을 끼쳤다.먼저, 남송 정권을 20년이나 지속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사천으로 진격하던 몽골군은 철수하고 몽케 칸의 관을 북쪽으로 후송해야 했다. 쿠빌라이는 동로군을 이끌고 장강 천험을 돌파하여 악주를 포위하였고 악주를 공격하였으며, 동생 아리크부카와 가한 자리를 다투기 위해 철수하고 북쪽으로 귀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사도와 문제의 화약을 체결했다.《 송사》에서는 가사도가 먼저 장강을 국경으로 삼고, 매년 세폐를 바치겠다는 내용의 매국적인 거래를 했다고 나왔지만, 진순신은 《이야기 중국사》에서 쿠빌라이가 철군 도중이라도 공격을 덜 받기 위해 온갖 골동품으로 가사도를 매수했다고 하며 또한, 가사도가 매국적인 거래를 했을 리가 없다고 서술했으며, 다른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고 한다.
운남에서 광서를 거쳐 북상하던 우량카다이의 군대는 승승장구하며 담주[12]성 아래로 들어갔으나, 몽케의 죽음으로 쿠빌라이가 파견한 부대의 접대를 받아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돌아갔다. 우량카다이는 그 이후 쿠빌라이에게 충성하게 된다.
둘째, 몽골군의 제3차 서정을 멈추었다. 몽골군은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을 위협하였다. 몽케 칸은 1252년 동생 훌라구를 파견해 제3차 서정(西征)을 일으켜 지금의 이란인 페르시아,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의 넓은 땅을 차례로 공략했다. 훌라구는 이집트로 진군하려 할 때[13]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적은 수의 군대를 남겨두고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귀환하였다. 결국 몽골군은 중과부적으로 이집트군에 패배했고 몽골군은 끝내 아프리카에 진출하지 못했다. 몽골의 대규모 확장 움직임은 이때부터 저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어성 전투의 영향은 중국을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셋째, 쿠빌라이가 몽골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몽케 칸은 몽골의 보수주의자로 여전히 전통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몽골 부족과 서역의 색채가 짙은 이러한 정책은 몽골이 점령한 중국 지역을 통치하는 부분에서는 매우 부적합했다. 쿠빌라이는 몽골 지배 집단에서 드물게 한족의 문화를 흠모하였다. 몽케가 칸에 즉위한 후 쿠빌라이는 남쪽의 한족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는 한족의 학자, 선비들을 대대적으로 초빙하여 중국화를 심히 추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몽케와 그 보수 신료들의 의심을 사서, 쿠빌라이는 파직당했고, 그의 중화정책은 취소됐다. 쿠빌라이는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계속 친중국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몽골군의 정주민에 대한 정책을 점진적으로 온건하게 바꾸어 중국 남부의 경제와 문화를 더 크게 파괴하지 않도록 했다.
몽케는 조어성을 함락시킬 시 군민들을 몰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279년 수장 왕립(王立)이 원에 항복하여[14] 성중 군민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무기를 자진하여 버리고 저항을 중지함으로써 비로소 조어성은 몽골의 손에 넘어갔다. 산성 방어체계의 대표격인 조어성은 방어역할을 제대로 수행했고, 몽골군이 공략하기 어려운 보루로 자리잡았다. 중국 인민혁명군사박물관 고대전쟁관은 중국 고대전쟁사에서 조어성 전투의 중요한 위치를 보여주기 위해 조어성 옛 전장의 모래 모형을 제작하기도 했다.
[1]
처음에는
맹공의 수하였고, 이후에는
여개의 밑에서 몽골군과 싸웠다.
[2]
사천 지역은 남송 정권의 세금을 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3]
제1차
몽송전쟁 당시 양회 전선에서
두고,
하귀,
여문덕과 함께 공을 세웠다.
[4]
남송 조정이 자신에 대한 무고를 맹신한 것으로 인해 급사하고 만다.
[5]
지금의
닝샤후이족 자치구 일대
[6]
쿠빌라이의 군대는 형호 방면,
우량카다이의 군대는 대리, 광서를 거쳐 북상
[7]
지금의 무승 현도 부근
[8]
오늘날 충칭 시 허촨 구에 있는 조어산 부근에 있다. 조어성은 가릉강·거강·부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남·북·서 3면이 물을 둘러싸고, 장벽이 강 주 123리, 모두 장수의 돌담을 쌓고, 남북으로 각각 강중의 일자성벽을 쌓고, 성안에는 크고 작은 연못 13개, 우물 92개가 있어, 군사의 정량과 수원이 충분하며, 강변에는 수사의 부두를 축조하여, 군사를 통제할 수 있는 배가 설치되어 있다. 아래에는 삼강을 통제할 수 있다.
[9]
대표적인 인물이
양대연이다. 그는 몽케의 사자를 죽이지만 이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해 몽골군에 투항하고 이후 사천성 지역에서 남송군을 공격한다.
[10]
몽골 제국 개국공신인
왕세현의 아들로, 왕고부족 사람이다. 왕세현의 뒤를 이어 남송의 산성 방어 체계에 맞섰고, 몽케가 주력군을 이끌고 사천 지역을 침공했을 때 선봉으로 맹활약해 성도를 점령한다.
[11]
문천상이 이를 듣고, 장각을 칭찬하는 내용의 글("도제치사 장각")을 지었다.
[12]
지금의 장사
[13]
그 이전 훌라구는
아사신 세력,
압바스 왕조,
아이유브 왕조를 멸망시키고
맘루크 왕조만 남겨둔 상태였다.
[14]
남송 멸망 2달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