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杜杲(1173~1248)남송 말기 명장이자 학자로, 회서 지역에서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자는 자흔, 호는 어경, 소무 성관(지금의 복건) 사람.
2. 생애
2.1. 초기
그는 벼슬아치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 부친 두영은 강서 지역에서 형벌을 제청하였다.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해문염장에서 근무하던 두고는 부임하지 않고 복건제점형옥 진팽수(陳彭壽)에 의해 대리민위로 불려갔고, 이후 강ㆍ회제치사 이각에 의해 막료로 초빙되었다.2.2. 금군 격퇴와 반란 평정
가정(嘉定) 12년(1219년), 금나라의 군대가 추주(秋州, 지금의 안후이(安徽) 흥추(興秋)현)를 포위 공격하자 그는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였다. 격전 중에 그는 얼굴에 두 발의 화살을 맞았음에도 침착하게 전투를 지휘하여 사기를 북돋우고 격퇴하였고, 금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이 일은 그의 출중한 군사 재능을 보여 주어 강산현승으로 전보하였다. 여주[1]의 절도추관을 맡았을 때, 병란이 일어나 두고가 단독으로 말을 타고 가서 반란을 무마했다.당시 위린 부에 주둔하고 있던 수만 명의 금병을 투항시켰는데, 금병이 투항한 뒤에 죽여 치중을 빼앗으라는 건의가 있었다. 그는 금병을 교육한 뒤 모두 추방할 것을 주장했다.2.3. 몽골군 격퇴
단평 원년(1234년)에 금은 남송·몽골에 의해 멸망했다.조정은 금이 차지한 삼경(개봉·낙양·상구)을 되찾으라 명하고, 이에 전자재와 대장 조규·조범이 출정한다. 두고는 이에 반대하나, 기각되었다.가희 원년(1237년)에 몽골 구온불화가 안풍(安豊)을 공격하자 안풍군의 군민을 회성(會城)으로 옮기고 아들 두서(杜庶)[2]에게 은곡을 압송하여 공급하도록 하여 복병을 사방에 두었다. 몽고군이 허공에 떨어지자, 그는 곧 군대를 이끌고 맹타를 퍼부어 대승을 거두었고, 몽고군은 패퇴하였다. 몽골군은 또 화포를 이용해 성을 공격하여 안풍성의 성루를 모두 파괴하였다. 두고도 처음에는 잘못되면 바로 보충을 하였으나, 나중에 두고가 목재로 만든 이동목루를 고안하였는데, 높기 때문에 호성호 옆에 놓기도 하고, 그 위에 활창을 만들어 사격할 수 있도록 하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목으로 연결하여 마치 성벽 위에 있는 것과 같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 건물의 견고함이 일반 성루의 3배에 달하였으며, 또한 이는 제작이 편리하여 두고가 한꺼번에 몇백 개씩 올라가서 방어선을 만들기도 하였다.
오랜 공방 끝에 몽군은 안풍의 호성호(護城湖) 강에 27개의 교량을 메워 안풍성을 직접 공격할 수 있게 했지만, 두고는 곧 송병을 보내 호성호 안쪽의 27개의 교두를 공격해 제압했다. 몽군은 또 결사 용사를 조직하여 십여 겹의 소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갑옷을 입고 얼굴까지 가린 채 송군을 향해 충격을 주었다. 두고는 특수 제작된 작은 화살을 사용했고, 이를 이용해 수많은 몽골군을 사살했다.
몽골군의 공성이 길어지면서 여러 갈래의 송군 원군이 안풍에 접근했는데, 여문덕이 안풍성 밖에 도착한 것은 지주가 처음이다. 그는 몽고군의 포위망을 일거에 뚫고 안풍성 안으로 들어가 두앙과 합류했다.송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외곽에 있는 송군의 배치와 작전계획도 알아냈다.
이에 다시 몽골군이 바람을 등에 업고 화공에 실패하자, 두고는 결사용사를 모집하여 몽골군을 향해 반격하여, 몽군이 호구천을 메우는 둑다리를 빼앗고, 약속시간 동안 안풍성 안의 두고군, 여문덕군, 안풍성 밖의 여개[3]군, 조규군, 하귀[4]군 등 안팎으로 몽군을 협공하여 몽군을 물리치고 몽군을 물리쳤다.미처 철수하지 못한 기구가 모두 파괴되자 몽골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1만7000여 구의 유해를 받고 황급히 철수했다. 안풍의 석 달 동안의 전투는 송군이 양회 전투에서 거둔 또 하나의 큰 승리였다. 이후 회서제치부사 겸 지려주로 승진하였다.
가희 2년(1238년) 가을, 그러니까 몽골군이 안풍(安豊)에 실패한 지 반년여 만에 몽골의 대수 차간이 다시 양회[5]를 대거 진격하자, 몽골군은 80만 대군(大軍)이라 불리며 여주(呂州, 지금의 안후이(安徽)를 포위해 여주를 쳐부수려 한 뒤, 소호를 기지로 삼아 수군을 훈련시켜 장강을 건너게 했다.
이번에 몽골군은 당초의 안풍 때 공격했던 것보다 몇 배 더 충분한 준비를 마쳤다.그러나 몽골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안풍(安豊)을 지키는 데 공을 세운 두고양이 회서제치부사(會西制治副使) 겸 지려주(知麗州)에 올라 제치부사를 여주(呂州)에 두게 한 것이다.
반 년 전 안풍의 전투처럼 몽골군과 송군의 도병들이 와서 공수 기구를 싸웠고, 몽골군은 송군의 증원을 막기 위해 60리 길이의 흙담을 쌓아 여주를 에워쌌지만, 결국 두유에게 파괴를 주었고, 몽군은 계속 여주를 향해 포를 쏘았지만, 이번에는 여주성 안에 충분한 물자와 저번에 설계한 목루에 포루를 더 설치하여 몽군과 함께 몽군을 공격하였다.전. 이러한 공성전이 한참 진행되자 몽군은 두고의 수비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위를 철회하고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두고는 이때 이미 안풍(安豊)전 때보다 훨씬 큰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몽군이 태반 이상 철수하기를 기다렸다가 승승장구하여 몽군의 후군을 습격하였다.송나라 장수 육왕과 이위(李威)는 200여 명의 결사 장병을 이끌고 몽군의 후군을 직접 쳐들어 몽군을 물리쳤고, 그는 다른 송군을 지휘하여 수십 리를 추격하고서야 회군하였다.또 여문덕 등을 보내 수군을 이끌고 회수를 제압하여 몽군을 더 이상 남하시킬 수 없게 하였다. 이 전투 후 회서제치사에 임명되었다.
제3 년도에 몽고군이 또 대거 쳐들어오자, 두고는 몽골군이 지친 틈을 타서 아들 두서와 여문덕 등으로 하여금 감군을 통제하도록 명하고, 외지에서부터 공격하여 연거푸 승전보를 27회 전하였다. 조정이 놀라 두고를 권형부의 상서로 승격하고 그는 정중히 사절하였다.
2.4. 만년
순우 원년(1241년)에 두고가 거듭 사의를 표하자 조정에서는 공부상서를 수여하고 직학사직으로 퇴직하였다.순우 2년(1242년)에 몽골군이 대거 남침에 이르러 두고응조는 관직으로 임명되어 태평주(太平州, 지금의 안휘당도)의 지주를 거쳐 곧 화문각 학사, 연강제치사(延江制治使), 지건강(知建康, 지금의 강소성 난징)부에 발탁되었고, 행관은 남아 안경(安慶, 지금의 안휘성 안경시), 허저우(和州, 지금의 안휘 화현), 무위(安徽無爲, 지금의 안휘 무현)의 3군을 절제하였다. 진주에서 또 몽군을 대패시키는 공을 세웠다.
순우 8년(1248년) 일흔다섯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조정에서 그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하였다.
3. 가족관계
- 두서(杜庶, ?~1261): 두고의 아들로, 자는 강후(康侯)이다. 1261년 가사도가 타산법을 시행할 때 옥에 갇혀 목숨을 잃는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억울해하였다.
[1]
오늘날
안휘성
합비시이다.
[2]
1261년 재상
가사도가 타산법을 시행할 때 옥에 갇혀 목숨을 잃는다.
[3]
양회 전선에서 공을 세운 뒤, 사천 지역에 투입되어 사천 지역에 수많은 산성을 쌓는 등 사천 지역의 방어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염진ㆍ염박 형제의 도움으로 조어성을 쌓았다. 여담으로, 맹공의 휘하였던
왕견이 여개의 수하였는데, 그는 조어성의 수비를 더욱 강화한다.
[4]
맹공 사후 남송의 호국 대장이었으나, 만년에는
정가주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데다 그 이듬해인 1276년에는 절조를 지키지 못하고 원에 투항한다.
[5]
회서, 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