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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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제국과 호라즘 왕조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몽골 제국에 의한 서방 원정의 계기가 된 전쟁이었다.2. 배경
칭기즈 칸이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중앙아시아쪽에서는 셀주크 튀르크로부터 독립한 호라즘 왕조가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당시 호라즘 왕조의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 즉 무함마드 2세는 동방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라고 불릴 정도로 정복 활동을 펼치면서 호라즘 왕조의 영토를 넓히고 있는 중이었다. 칭기즈 칸은 서요(카라 키타이)를 멸망시킨 이후 호라즘과 교역 관계를 맺기 위해 호라즘 영토에 대규모의 상단을 파견했으나 호라즘령 오트라르 성의 주인인 이날추크가 몽골 상단을 모조리 죽이고 재물을 가로채는 참사가 발생했다.( 1218년)이에 칭기즈 칸은 분개했고 곧바로 무함마드 2세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이날추크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무함마드 2세는 요청을 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사신들 중 일부는 처형시키고 나머지 일행은 수염을 깎아 몽골로 돌려보냈다. 칭기즈 칸은 이것이 자신을 무시하며, 조롱한 행위로 간주하고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호라즘 원정을 단행했다.
3. 칭기즈 칸의 침공
1220년 칭기즈 칸은 대략 150,000명 이상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호라즘 영토로 진격하여 군대를 4개의 진영으로 나누었는데 먼저 칭기즈 칸은 막내아들인 툴루이와 함께 본대를 이끌고 부하라를 공격했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는 각각 오트라르(現 카자흐스탄 Отырар) 등의 호라즘 제국의 주요 도시를 공격하여 무너뜨린 다음, 수도인 사마르칸트에 집결하도록 했다. 병력의 수는 호라즘군이 400,000명 정도로 우위였지만, 당시는 호라즘이 영토 정복을 끝낸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여서, 각 지방의 반란 위험이 적지 않았고, 결국 몇 군데에 병력을 분산시켰는데 이것이 호라즘의 참패에 있어 큰 원인이 되었다.당시 무하마드 2세의 입장에서는 병력도 더 많았고, 자신의 영토에서 싸운다는 이점도 있었으며, 오트라르를 넘어 아무다리야 강 사이에는 키질쿰 사막이라는 거대한 자연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의 소집과 진격속도를 오판하고, 대규모 회전 대신 몽골군이 전열을 정비할 때까지 각 중요 거점의 방어를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칭기즈 칸은 몽골군을 4개 부대로 나눈 후, 주요 부대를 아들들에게 맡겼다. 우군은 장남인 주치가 지휘하도록 했고, 좌군은 2남인 차가타이와 3남인 오고타이가, 중군은 칭기즈 칸 자신과 4남인 툴루이가 지휘했으며, 별동대는 제베에게 맡겼다. 칭기즈 칸은 두 방향으로 부대를 나누었는데, 우군은 호라즘 제국의 북부 지역을 향하는 준가리아 지역의 알라타우(Ala-Tau) 산맥 사이의 골짜기를 넘었고, 다른 한 부대는 위구르를 지나 투르키스탄 북쪽 천산 산맥을 빠르게 돌파하여 본대에 합류했다.
일단 오고타이와 차가타이의 좌군이 현 카자흐스탄 지역의 오트라르를 포위했다. 수 개월 동안의 포위 끝에 오트라르를 함락시킨 후,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았으며, 양국 관계 악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이날추크를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이때 칭기즈 칸의 맏아들이었던 주치는 현 우즈베키스탄 북부 지역에 위치한 호라즘 북부의 거점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우르겐치 방향으로 진격했고, 다른 진영의 부대는 현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부근에 있었던 도시인 파나카트를 점령했다. 다만 이때 주치와 다른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주치는 가급적 수비수들과 협상을 하면서 도시의 최대한 많은 부분이 손상되지 않도록 항복을 유도했지만, 차가타이는 우르겐치가 주치가 향후 분봉받게 될 주치 울루스[1]에 속한 것을 의심하면서, 제대로 공략하지 않는다고 형인 주치를 깠다. 이후 오고타이가 주치 대신 사령관에 임명되어 도시를 함락시켰는데, 이러한 형제들 사이의 갈등으로 주치와 다른 형제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되었지만, 칭기즈 칸의 봉합으로 그럭저럭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툴루이와 같이 본대를 이끌던 칭기즈 칸은 호라즘의 중심부를 공략하기 위해 아주 기막힌 수를 썼는데, 바로 사막을 건너는 것이었다. 무려 460km나 되는 키질쿰 사막을 건너서 부하라 이북 지역까지 우회하는 데 성공했고, 부하라를 점령했다. 물론 무작정 사막을 돌파한 것은 아니었고, 오아시스의 위치 등 사막 지리에 능한 길잡이들을 포섭해 비교적 안전한 경로로 이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코 일반인의 상상력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위업이었다.
이후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포위하고, 외곽의 방어진지를 하나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이때 칭기즈 칸은 테르켄 하툰이나 무함마드 2세의 이름으로 가짜 법령을 반복적으로 발표하여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고, 이미 분열된 호라즘군의 지휘 구조를 더욱 엉키도록 만들었다. 한편 무함마드 2세는 공성전 중에 두 차례 구원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단 11일 만에 사마르칸트가 함락되었다. 무함마드 2세는 간신히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칭기즈 칸은 그를 추격하기 위해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병력 30,000명을 주었다. 이들은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카스피해 인근 지역의 여러 도시를 갈아버렸다.
무함마드 2세는 추격의 공포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다가, 결국 카스피해의 외딴 섬에서 죽었다.
4. 잘랄 웃 딘의 등장
비참하게 죽은 무함마드 2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장남이었던 잘랄 웃 딘이었다. 그는 군대를 수습하여 몽골군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호라즘의 옛 수도인 우르겐치로 입성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할 뻔하여 우르겐치에서 탈출했다. 이후 잘랄 웃 딘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모아 나름대로 군대의 규모를 늘리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의제였던 시키 코토코에게 30,000명의 병력을 주어 잘랄 웃 딘을 치도록 했다.그러나 잘랄 웃 딘은 파르완 전투에서 시키 코토코가 이끄는 몽골군 30,000명을 전멸시키면서 몽골 제국에게 호라즘 원정에서의 첫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를 기점으로 몽골에게 점령당했던 일부 도시에서 몽골군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반란으로 인해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차가타이의 장남이었던 무투겐과 칭기즈 칸의 사위가 전사하게 되었다. 이에 격노한 칭기즈 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저항하고 있었던 호라즘의 여러 도시들을 정벌하고 곧바로 잘랄 웃 딘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칭기즈 칸이 잘랄 웃 딘을 제거하려던 시점에, 당사자인 잘랄 웃 딘은 파르완 전투의 승리 이후 휘하 장수들 사이의 반목으로 인해 군대를 재정비하는데 실패하고, 일부 병력이 이탈하는 전력 약화를 겪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서자 호라즘 군대는 다시 밀리기 시작했으며, 결국 인더스 강 방면까지 후퇴한 끝에 군대를 재정비하여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잘랄 웃 딘은 분전하여 숫적으로 우세한 몽골군을 오히려 밀어붙여 잠시나마 우세를 점했지만 칭기즈 칸이 별동대를 호라즘군의 측면에 투입시키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호라즘군은 전멸했다. 참패한 잘랄 웃 딘은 몽골군의 거센 추격을 피하면서 인도 방면으로 도주하는 데 겨우 성공했다. 잘랄 웃 딘이 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은 그를 추격하지 않은채 호라즘의 남은 영토를 점령하는 데 신경을 썼고, 결국 잘랄 웃 딘은 탈출에 성공하여, 델리에 있었던 노예 왕조의 술탄 일투트미쉬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1224년 칭기즈 칸이 몽골 고원으로 귀환하자 이를 틈타 잘랄 웃 딘은 이스파한으로 갔고, 이후 이란 북부에 있는 타브리즈를 근거지로 삼아 호라즘 제국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칭기즈 칸이 서하 원정 중에 병사하면서 몽골 제국이 차기 카간 계승 문제와 금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하게 되었고, 중앙아시아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잘랄 웃 딘은 자신의 세력을 순조롭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랄 웃 딘의 세력 확장에 경계를 하던 룸 셀주크 왕조 및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던 끝에 1230년 에르진잔 전투에서 룸 셀주크-아이유브 연합군과 맞서게 되었으나 대패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5. 오고타이 칸의 침공
여기에 몽골 제국의 제2대 카간에 등극한 오고타이 칸이 보낸 초르마간 노얀 휘하의 몽골군까지 등장하면서 결국 잘랄 웃 딘은 캅카스 지방으로 도주했고, 이후 여러 산속을 전전하다가 1231년 그에게 원한을 가진 쿠르드족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잘랄 웃 딘이 죽은 이후 몽골군이 구 호라즘 왕조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하게 확립하게 되면서 호라즘 왕조의 역사는 1231년에 종식되었다.6. 결과 및 영향
몽골 제국이 호라즘 왕조가 지배하던 중앙아시아 지역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고, 동•서무역을 장악하게 되면서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기존에 갑옷 착용 비율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던 몽골군이 갑옷으로 무장한 호라즘군과의 싸움을 계기로 갑옷 착용 비율을 늘리게 되었다. 오늘날 몽골군의 갑옷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이 몽골-호라즘 전쟁을 기점으로 완성된 셈이다.반면 호라즘 술탄의 통치 아래 비단길을 통한 동•서 무역으로 번창하던 중앙아시아 지역은 몽골군의 잔혹한 파괴 행위로 인해 쇠퇴하게 되었다. 더구나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던 중앙아시아 역대 왕조들의 유적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현대에도 이 악영향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 전쟁은 유럽 역사를 크게 흔들게 되었다. 당시 칭기즈 칸의 명령을 받아 무함마드 2세를 추격하던 제베와 수부타이의 별동대 30,000명은 추격하는 길목에 있었던 캅카스의 기독교 왕국인 조지아는 물론, 루스 제공국의 연합군까지 전멸시키고 귀환했다.[2]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여 년 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으로 일어난 바투와 수부타이의 유럽 정벌로 인해 헝가리 왕국, 폴란드 제공국을 포함한 동유럽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었고, 특히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지역은 무려 200여년 동안 킵차크 칸국(주치 울루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즉 술탄 한 명의 잘못된 행보로 인해, 애꿎은 동유럽 국가들이 큰 피해를 보고, 더 나아가 세계의 역사를 크게 바꾸는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 일대의 사건이 몽골-호라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7. 여담
- 몽골 전통주인 아르히와 한국 전통주인 소주가 처음 생겨난 계기가 된 전쟁이기도 했다. 옛 호라즘 왕조의 영토를 정복한 몽골 제국이 페르시아식 증류주를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오늘날의 아르히가 되었고, 훗날 원 간섭기때 고려가 몽골풍으로 인해 아르히를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오늘날의 소주가 되었다.
- 몽골군과의 전쟁에서 대다수의 도시들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 특히 호라산 지역의 피해가 막심했다. 특히 니샤푸르, 메르브 같은 곳은 도시 째로 갈려나가, 사마르칸트와 같이 후대에 재건된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이 지역은 재건을 못하고 떨어진 곳에 새 도시를 지어 이름만 승계받고, 규모마저 과거의 영화에 못 미치게 되었다. 바미얀의 경우도 도시와 인근 인구가 전멸하여 현재 바미얀은 수백년 후 인근 지역에 새로 재건된 마을이고, 이전 위치였던 샤흐르 골골라(Shahr-e Gholghola)[3]와 샤흐르 주하크(Shahr-e Zuhak)는 오늘날에도 완전한 폐허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