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부타이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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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db1> 몽골 제국군 총사령관 [ruby(ᠰᠥᠪᠡᠭᠡᠳᠡᠢ, ruby=Sübegedei)] [ruby(ᠪᠠᠭᠠᠲᠥᠷ, ruby=Baɣatur)] 수베게데이 바가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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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비사⟫에 수록된 삽화, 1989[1] | ||
씨족 | 오량카이([ruby(ᠤᠷᠢᠶᠠᠩᠬᠠᠢ, ruby=uriyangqai)])[2] | |
부족 | 자르치고드([ruby(ᠵᠠᠷᠴᠢᠭᠣᠳ, ruby=J̌arčiɣud)]) | |
작위 |
1206년 → 천호장([ruby(ᠮᠢᠩᠭᠠᠲᠣ, ruby=mingɣato)] [ruby(ᠵᠢᠨ, ruby=in)] [ruby(ᠨᠣᠶᠠᠨ, ruby=noyan)])[3] 1229년[4] → 몽골 제국군 총사령관 ([ruby(ᠶᠡᠬᠡ, ruby=yeke)] [ruby(ᠵᠠᠩᠴᠦᠨ, ruby=J̌angJ̌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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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colbgcolor=#004db1> 중세 몽골어 | 수베게데이([ruby(ᠰᠥᠪᠡᠭᠡᠳᠡᠢ, ruby=sübegedei)]) |
현대 몽골어 | 수베에데이(Сүбээдэй) | |
한자표기 |
速不台(속불태), 速不臺(속불대), 雪不台(설불태)[5] 하남왕(河南王), 충정(忠定)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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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75년 부르칸 칼둔 산, 헹티 아이막, 몽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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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48년 (향년 73세) 톨 강, 울란바토르, 몽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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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자르치고다이([ruby(ᠵᠠᠷᠴᠢᠭᠣᠳᠠᠢ, ruby=J̌arčiɣudai)])[6] 형: 젤메([ruby(ᠵᠡᠯᠮᠡ, ruby=J̌elm-e)]) 아들: 오량카다이([ruby(ᠤᠷᠢᠶᠠᠩᠬᠠᠳᠠᠢ, ruby=uriyangqadai)])[7] 손자: 아조([ruby(ᠠᠵᠣ, ruby=aJ̌u)])[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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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부타이([ruby(ᠰᠥᠪᠡᠭᠡᠳᠡᠢ, ruby=Sübegedei)])는 몽골 제국의 장군이다. 3명의 대칸(카안)을 섬긴[9]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우량카다이의 아버지였다.칭기즈 칸이 가장 신임한 장수들인 사준사구 중 맹장형이었던 4구 중의 한 명으로, 《 몽골비사》에는 '용감한 수부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내에선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유럽 침공 과정에서 사실상 주치 울루스와 몽골-타타르의 멍에의 기반을 다진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수부타이는 동쪽의 금나라에서 서쪽의 폴란드에 이르는 광대한 전선에서 역사에 기록된 것만 해도 32개의 나라를 정복하거나 멸망시키고 61번의 회전에서 승리했는데, 이런 활동 반경과 군사적 업적 측면에서는 세계사 전체를 뒤져봐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 명장이다.
2. 칭호
수부타이의 이름은 해외에서도 유독 어러 가지 변형[10]이 많은 편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수부타이'이다. 그러나 사실 '수부타이'라는 이름은 중국 한자 발음인 速不台(Sù bù tái)를 그대로 읽은 중국식 발음으로, 실제 이름이 아니다.그의 이름은 몽골어 'Сүвээ'(수베에)와 'дэй'(데이)[11]가 합쳐진 이름으로, 이 중 'Сүвээ'(수베에)의 중세 발음과 몽골 문자 표기법[12]이 '수베게'이기 때문에 당대 그의 이름은 '수베게데이'가 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중간의 '게' 발음이 장음으로 대체되어 '수베에데이'라고 표기된다.
여담으로, 만주족의 청나라 제6대 황제였던 고종 건륭제의 치세때 만주 문자[13]로 편찬된 《몽고원류》에서도 수부타이의 이름을 수베게데이(Subegedei)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확실히 《 몽골비사》와 교차검증이 되는 부분이다.
'Сүвээ'(수베에)[14]의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의 옆구리[15]" 또는 "산, 성벽, 건물 등의 옆면"을 의미하는데, 공통적으로는 무언가의 옆면을 의미한다. 흔히 "수베에를 찌르다"(сүвээ рүү хатгах)와 같은 용법으로 쓰이는데, 이는 직역하면 "옆구리를 찌르다"라는 의미이지만 실제 뉘앙스는 "약점을 찌르다"에 더 가깝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дэй'(데이)의 경우 '~하는 남자'(혹은 ~가 있는 남자, ~의 남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남성의 이름에만 붙는 접미사로, 단어와 인물을 붙이는 역할을 하는데, 차가타이, 오고타이, 살리타이 등의 인명에 들어가는 그것과 완벽하게 같다.
또한, 수부타이에게는 당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바가토르'라는 칭호가 반드시 따라붙는데, 바가토르는 '용감함'과 '영웅'을 합친 의미이다. 때문에 수부타이의 실제 이름과 칭호는 '수부타이'가 아닌 '수베게데이 바가토르'이며, 현대 몽골어 발음으로는 '수베에데이 바아타르'이다.
3. 생애
3.1. 종군 전후
우량카이족 출신으로, 사준사구의 일원이자 칭기즈 칸 초기 파티의 2인자였던 우량카이 젤메의 아우였다. 숲속 부족 출신이라 하여 기마술을 장성해서 배웠다는 설이 있는데, 이 또한 비만설과 같은 낭설로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 따르면[16], 우량카이족은 삼림 우량카이, 우량카이 두 부족으로 나뉘며, 수부타이와 젤메는 명확히 후자라고 명시되어 있다. 즉 삼림 부족 출신이 아니었으며, '우량카이'족은 삼림 우량카이와 다르게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의 한 부족이라고 구분하여 기록했다. 또한 삼림 우량카이족 또한 사는 영역이 삼림 지역일 뿐, 명확히 유목생활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7] 즉 삼림 우량카이든, 우량카이든 모두 어린 시절부터 유목생활, 즉 말타기를 했으며, 수부타이가 장성한 후에야 말타는 법을 배웠다는 것 또한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18]어머니는 수부타이를 낳다가 사망했으며, 아버지 자르치고다이는 대장장이였다.[19] 젤메에 이은 막내로서, 가업인 대장장이를 이어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략 14세 때 형인 젤메, 또 다른 형제인 차오르칸과 함께 테무진 칸의 카마그 몽골 군대에 입대했다. 그때부터 테무진 칸의 막사에서 각종 시중을 드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스럽게 테무진 칸 휘하 장군들의 전략 및 전술회의에 배석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20] 이로 인해 어릴 때부터 전략/작전 수준의 관점으로 전술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각 및 이해력이 길러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향후 베수트 제베라는 명장의 부관으로 복무하며, 정교한 전술적 능력을 흡수해 압도적인 전공을 세운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러 전공을 올린 형 젤메나, 제베 같은 명장들에 비하면 당시 경험은 조금 부족했던지 수부타이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지휘할 때 칭기즈 칸이 수부타이를 아끼면서도 걱정하는 뉘앙스의 조언들을 했던 기록도 존재한다.[21] 위에서도 언급되었던 '숲속 부족 출신이라 말을 타는 법을 장성하고 나서야 배웠다.'라는 설은 이 기록을 오해한 것으로 추측된다. 칭기즈칸 입장에서는 수부타이가 다른 지휘관들에 비하면 경험이 적으니, 본격적으로 지휘에 나설 때 여러 조언을 했던 것이 와전된 것으로 추측된다.[22]
1204년, 테무진 칸이 동 나이만족의 타양 칸과 싸운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철륜차로 산맥을 돌파하여, 적진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1205년 메르키트족의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1206년 몽골 초원이 통일되자 천호장에 임명되었다. 형 젤메는 통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3.2. 호라즘 침공과 추격전
칭기즈 칸의 서정군에 제베[23]와 함께 참전하여 호라즘 제국을 공격해( 1219년), 당시 제7대 술탄이었던 알라 웃 딘 무함마드[24] 2세를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몰아넣어 죽게 했으며( 1220년), 몽골로 귀환하는 김에 전리품을 좀 더 챙겨 가자고 해서 이란, 캅카스의 여러 도시와 루시 남부의 공국들을 쓸어버리면서 공략했다. 크림 반도에서는 이탈리아계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군을 제압하기도 했으며,[25] 1223년 20,000명의 군대로 키예프 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을 포함한 6개 이상의 루시 공국이 연합한 80,000여명의 군대를 칼가강 전투에서 전멸시켰다.[26] 이 전투로 60-90퍼센트의 연합군이 사망했으며 6명의 대공을 죽였고,[27]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전부 처형했다. 이 전투 이후 루시 공국들의 야전 역량이 무너져, 훗날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던 바투의 동유럽 원정 때는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되었다. 수부타이가 러시아에서 돌아오자 그의 나이를 걱정해서 칭기즈 칸은 후방에서 쉬게 하려고 했지만 수부타이는 칸이 전선에 나서는데, 어떻게 자신이 뒤에서 쉬고 있겠냐며 거부했다.3.3. 금나라 정벌
그러나 금나라를 정벌하던 도중에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게 되는데, 1231년 당시 금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던 완안진화상이 이끌던 금나라 군대와 맞붙은 도회곡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한 것이다. 완안진화상은 수부타이의 뒤를 쫒아 추격전을 벌였다.[28] 그러나 실패도 잠시, 끝내 1233년 금나라의 도읍인 변경을 함락하여 금나라를 멸망( 1234년) 직전까지 몰아넣었다.3.4. 유럽 원정에서의 맹활약과 회군, 사망
제2대 오고타이 칸의 치세때인 1236년에 시작된 바투의 유럽 원정에도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는데 총사령관인 바투의 실책과 무능력까지 메꿔가며[29] 큰 공을 세운 뒤에 귀환했다. 당시 러시아 제공국을 거의 초토화시켰고, 1241년 4월에 벌어진 레그니차 전투 및 사요강 전투에서는 각각 3~50,000명 가량의 폴란드/ 튜튼, 헝가리 군세를 전멸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사요강 전투는 패퇴하는 헝가리군 수만 명을 수일 동안 포위 기동으로 추적하며, 수백 km에 이르는 구간에 걸쳐 끝까지 학살했다. 이 시기에 이미 중국의 남송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멸망되었고 중국의 금나라, 중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을 시작으로 러시아와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수부타이에 의해 멸망되었다. 수부타이는 극도로 냉정하고 철저한 성격의 장군으로, 유목민족인 자신들을 상대로 피지배국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보급에 차질이 생기고 지배의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 고의적으로 잔혹하게 파괴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몽골군의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로 인해 도시마다 주검과 핏물, 잿더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유럽 지역에 남아있는 몽골에 대한 공포는 이 전역들에 기반한 것이다.[30] 명목상의 총사령관은 바투였으나, 실제로 해당 전역들을 주관한 것은 수부타이였으며, 이로 인해 킵차크 칸국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중유럽의 강국인 신성 로마 제국[31]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던 도중, 몽골 본토에서 오고타이 칸의 병사( 1241년 12월) 소식이 알려지자 새로운 칸을 뽑기 위해 본토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에 참가하기 위해 회군하게 되었다. 이후 수부타이가 유럽에 가는 일은 없었으며, 1246년 8월 제3대 대칸의 자리에 오른 구유크 칸은 수부타이를 중국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1248년 귀환 중 몽골의 톨 강에서 7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서방 원정 당시 이미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쇠약해져 말도 제대로 못 타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도 중세 몽골인치고는 꽤나 장수한 편이었다.
사후 그의 우량카이 일족은 몽골 제국 및 원나라의 4대 명문가 중의 하나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나머지 세 가문은 무칼리의 잘라이르 가문, 보오르추의 아를라트 가문, 티라운의 술두스 가문이었다. 수부타이의 아들인 우량카다이와 손자인 아쥬도 몽골 제국의 명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4. 평가
자세를 잡는 수부타이의 초상화.
그가 이끈 군대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떨어지는 당대의 전쟁 기준으로도 적군 포로는 물론 민간인에게마저 극도로 잔혹하고 악랄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전투에 한정하자면, 수부타이는 단점을 찾아볼 수 없는 궁극의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당대 기준에선 73년이란 긴 생애 동안 무려 32개의 나라를 정복하거나 멸망시켰으며, 61번의 회전에서 승리했다.[32][33] 그는 다양한 국가의 역사가들로부터 역대 최강의 전투 지휘관으로 꼽히며, 지휘관으로서 정복한 영토의 크기 또한 인류사 1위에 해당하는 강하고 지배적인 정복자이다. 수부타이는 평생 그가 만난 여진족의 금나라, 한족의 남송, 탕구트족의 서하, 몽골계와 튀르크계의 각 유목 부족,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아랍, 이란, 튀르크 계열 십수 개 국가, 동슬라브족의 러시아, 남슬라브족의 불가리아, 서슬라브족의 폴란드, 마자르족의 헝가리, 조지아족의 조지아, 아르메니아족의 아르메니아의 군대들을 현지에서[34] 모조리 격파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티베트(토번)의 가르친링 등처럼 1개 제국과 격전을 벌이거나, 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 금나라의 완안진화상, 남송의 악비 등처럼 본국에서 훌륭한 방어전만 펼쳐도 위대한 명장으로 대우받는 인물이 세계 역사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그런 회전을 수십차례 치르고 심지어 외지 공격이 대부분이었음에도 승리했던 수부타이의 전적이 얼마나 넘사벽인지 알 수 있다.
전술적 역량과 신기술에 대한 활용능력도 흠잡을 데가 없다. 당시 유목민이던 몽골군은 변변한 성을 쌓아본 적조차 없고 견고한 성채를 공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공성 작전의 기초는 물론이고 투석기와 같은 기본적인 공성병기조차 제대로 쓸 줄 몰랐다. 그러나 수부타이는 수 년 동안 전투를 거치며 노획한 공성병기를 분석해 적재적소에 활용했고 천재적인 응용력을 보여 공성전에서도 탁월한 성적을 냈다. 역사 속의 많은 명장들이 신무기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실책을 냈던 것을 보면 수부타이는 당시 시대는 물론, 현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창의적이었던 장군인 셈이다. 심지어 숙적인 금나라의 기술자들을 과감하게 군대로 편입하는 정치력까지 갖고 있었다.
수부타이의 혁신적인 전술, 전략과 철저함은 약 700여년간 무시되었으나 바실 헨리 리델 하트에 의해 1차 대전 이후 재발견되었다. 유명한 수부타이 추종자로는 에르빈 롬멜과 조지 패튼이 있으며 이 둘은 수부타이를 존경해 몽골의 전쟁사를 깊게 공부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다른 장군보다 낮은 편이다. 한국 한정으로는 차라리 여몽전쟁에 참여한 살리타가 더 유명한데, 실제 한국어로 구글에 검색했을 때 살리타가 결과가 많고, 뉴스에 언급되는 빈도 수도 높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면서 수부타이의 활약상이 인터넷 등 매체에서 알려져 유명세가 옛날보다는 높아진 감이 있다.
미국 《 암체어 제너럴》에서 2008년 선정한 100대 세계사 명장에 뽑힌 바 있다. 세계사 관련 역사학자들이 서술한 책 《 What if》에서는 역사상 가장 무시당한 장군, 군인, 용장, 명장으로 꼽히기도 했다.
5. 여담
《 몽골비사》에 철수레에 관한 언급이 2회 등장하는데, 모두 수부타이에 관한 내용이다. 그로 인해 일각에서는 수부타이만 철수레를 탔다는 잘못된 해석을 근거로 비만 및 당뇨설을 제기하는데, 이는 논란이 있는 주장이다. 수부타이의 체격이 비대했다는 내용은 《몽골비사》에도 없고, 별도로 당시에 기록된 사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철수레 사용에 대한 해석으로 비만설이 최초로 제기된 저서는 리처드 퍼시벌 리스터(Richard Percival Lister)가 집필한 《The Secret History of Genghis Khan》인데 해당 저서에는 비만에 대한 인용 출처가 없고, 별다른 근거 내용 또한 찾을 수 없다. 문제는 이 책을 근거로 후대에 수부타이의 비만 및 당뇨설과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낭설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수부타이는 당시의 몽골인치고 장수한 편인데, 이것이 13세기 몽골의 의료 환경에서 당뇨환자였다면 과연 가능했을 것인지도 살펴볼 부분이다.[35][36]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된 《몽골비사》의 원문을 보면 수부타이만 철수레 혹은 철윤차를 타고 전쟁에 임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몽골비사》의 메르키트족 추적에 관한 부분을 보면 "소의 해에 테무진은 수부타이의 군대를 '테무르 테르겐'으로 무장시켜 톡토아베키의 아들들과 그 추종자들을 쫒게 했다."[37]라는 구절로, 수부타이만 철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내용이 아니다. 또한 이 '테무르 테르겐'의 해석이 애매하여, 철수레 혹은 철골 전차 등으로 내용이 다른 형태로 해석한 책들이 존재한다. 철골 전차로 해석한 르네 그루세는 험한 지역과 협곡에서 사용된 특수 전차의 의미로 번역했다. 이 경우 수부타이만 탄 것이다 하더라도, 숲속 부족 출신설을 차용하여 비교적 기마술이 부족했을 수도 있는 수부타이를 위한 배려였다고 가정하여도, 비만과 당뇨로 철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38] 또 철수레로 해석한 쪽에서는, 물자 수송용 수레를 험지에서의 내구성 때문에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의 나무 수레는 나무를 구하기 힘든 초원에서 유지 보수에 난점이 많았으나, 대장장이의 아들인 수부타이가 철테를 두른 수레바퀴 등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수레와 수부타이가 같이 언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수부타이는 대장장이의 아들답게, 새로운 기술 도입 및 운용에 적극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 예로 중국 및 중앙아시아, 러시아 지역의 대장장이와 기술자들을 휩쓸다시피 동원하여 모든 전역에 데리고 다녔다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또, 사요 강 전투에서 헝가리군 석궁병들의 거센 반격을 제압하기 위해 투석기를 활용하여 공격했다.[39] 이런 내용들을 살펴보면 수부타이와 철수레에 대한 언급은 수부타이의 기술 수용에 대한 적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40] 라시드 앗 딘의 《집사》[41]에는 철수레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 구절은 "...소해, 즉 612[/1217]년에 쿠두 및 그의 형제들을 치기 위해 수베테이 바하두르를 군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병사들을 위해 많은 수레를 준비하고 그것을 쇠못으로 단단하게 하여, 돌 위에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했다."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 수레를 내구성을 위해 철제 부품으로 보강했다는 것과, 병사들을 위한 것으로 수부타이만 타고 다닌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비만인 수부타이를 위해 철수레를 제작해 홀로 타고 다녔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수부타이가 중앙아시아 및 동유럽에서 지휘한 전역들의 기동 거리가 1~2,000km에 육박하고 1,600km에 달하는 거리를 칭기즈 칸의 소환으로 홀로 여행했다는 기록들을 봤을 때, 당시 기술로는 평소 승차감이 극도로 열악했을 철수레를 타고 이동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즉, 철수레는 부대 차원에서 특수 목적 혹은 수송용으로 운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수부타이의 비만 및 당뇨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6. 대중매체에서
6.1. 드라마
6.1.1. <칭기즈 칸>
2004년 방영된 중국 드라마 < 칭기즈 칸>에선 칭기즈 칸이 호라즘을 발라버리고 돌아갈 때 부하들이 "수부타이는 어쩌고요?"라고 묻자 별 걱정도 안 하고 그냥 돌아가 버린다. 물론 수부타이의 행적을 보면 걱정 안 해도 되긴 했지만 말이다.6.2. 소설
6.2.1. <칭기즈 칸>
소설가 이재운이 쓴 본작에서는 작중 주인공이 제베인고로 큰 너프를 먹었다. 작품 내내 제베에 이은 2인자처럼 묘사되며, 작품 초반에는 제베와의 일기토에서 패배해 말에서 떨어지는 굴욕까지 겪은 바 있다.6.2.2. 《크로니클 레기온》
라이트 노벨 《크로니클 레기온》에서 주인공의 정체가 수부타이인 것으로 추측된다.6.3. 게임
- 칭기즈 칸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는 게임에서 자주 나오는 인물로 < 천지를 먹다 2>의 외국내수판에서는 조운이 수부타이가 되었고,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도 영웅 유닛( 기마 궁사)으로 나온다. < 미디블2: 토탈 워>에서는 "수바다이"라고 나온다.
6.3.1. < 크루세이더 킹즈 2>
몽골 제국의 가신으로 등장하며, 1241년 시나리오에서는 킵차크 칸국의 카안인 바투 휘하의 칸이다. 형인 젤메도 몽골 제국의 가신으로 등장한다.6.3.2. < 징기스칸 시리즈>
- 코에이의 < 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대활약하는데, 칭기즈 칸 본인 다음으로 전투력이 강하게 묘사된다.
-
<
징기스칸 3 원조비사>에서는 전투력이 A인 반면 지휘력이 C인 애매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몽골 기병 지휘시에 지휘력이 A나 B이면 기동력 15를 모두 쓸 수 있는 반면, C는 기동력이 14가 되기에 이동거리도 짧아지고 한 턴에 쓸 수 있는 명령 수도 줄어든다. 통상 공격과 궁시 공격은 기동력 3 소모에 돌격은 5 소모이기에 모두 15의 약수로 떨어지기에 기동력 14는 공격 4번하면 기동력이 2가 남아 뭘 해볼 명령이 없어 굉장히 애매해진다. 때문에 전투력은 낮아도 지휘력은 높은 젤메보다도 활용하기 애매한 면모가 있다. 한국판에서는 이름을 스부타이라고 표기했다.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과 3에 출연했다. 정17/전93/지44에 내정 및 전투 특기로 등용/기동, 돌격, 복병이 있으며, 병과 적성은 보병: B, 궁병: B, 기병:S, 수군:E의 능력치로 전투력과 근접전 특기와 적성이 우수하지만 다른 능력치가 암울하다. 정치 지모 저평가도 그렇지만 전투력도 그의 행적에 비하면 너무나 아쉬운 수치이다. 그래도 능력치 배분이 짠 이 게임에서 전투력 93이면 같은 세대 세계구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능력치라 일반적인 상황이면
전투 원툴에 낮은 지모로 수많은 변수 발발조차 감안할 만한 강점이어야 하지만. 문제는 이 게임의 적폐병종이자 수부타이가 소속된 몽골의 주력인 궁기병을 쓰려면 연사 특기가 필수에 그 외에 중요한 능력치가 지휘 병력>궁병 적성>전투력>기동특기 순이라 연사도 없는데다 일반 장수에 궁병 적성까지 낮은 수부타이는 쉽게 말해 시스템빨을 더럽게 못 받는다.
전술한 이유로 수부타이를 제대로 운용하려면 전투 경험을 쌓아[42] 최소한 연사 특기를 얻게 해 주고 가능하면 궁병도 A이상으로 올려주는 것이 좋다.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전투력 60대인 쥴치타이가 '훨씬' 강캐인 촌극이 벌어지고 같은 조건으로 경험을 쌓아준다면 친족 장수인 차가타이와 비교하여 일장일단을 따지는 수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작업을 해줄 필요가 없는 사기캐들이 몽골 고원에는 존재하고 심지어 얘들은 지모도 높아 단점이 사실상 없거나 자잘한 수준이다. 실제 역사에서 수부타이의 업적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물이 날 지경.
정치력이 바닥을 기지만 등용 특기가 있어서 재수 좋으면 국가를 멸망시킨 후에 FA로 풀린 수많은 재야의 우수한 장수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또 다른 메리트로는 수명이 길어서 장기간 사용 가능하다. 열전에서 출몰년도가 ???? 년 ~ ???? 년으로 되어있고, 출생년도는 에디터로 뜯어보면 1173라고 나온다. 명백한 고증 오류. 웃긴 점은 유저들이 만든 시나리오에서도 수부타이의 생몰년도가 전혀 수정되지 않는다.[43]
참고로 수부타이의 아들 우량카다이와 손자 아술도 수부타이처럼 전투 원툴로 나온다.
6.3.3. < 도미네이션즈>
몽골족 울록(도미네이션즈)의 추가 정보에서 언급된다.
[1]
삽화 왼쪽에 작성된 문구는 "수베게데이 바가토르는 오량카이 성을 가진 칭기스의 4명의 장군 중 한 명"이라는 의미다.
[2]
'오랑캐'의 어원이 되는 부족으로, 부족명은 '선두를 이끄는'이라는 의미이다. 서기 7세기부터 역사에 기록된 유서깊은 부족인데, 기록에 따르면 전장의 선두에서 업적을 남긴 바가토르가 많아 '오량카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후손들이 몽골의 바얀 오르기, 울란바토르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3]
몽골 제국 건국 후 88명의 천호장들 중 52번째 천호장에 해당한다.
[4]
오고타이 칸 즉위 후 하사받은 작위이다.
[5]
《
원사》(元史) <열전> 9권에서 사용한 표기이다. 《원사》는 그 특성상 몽골계 인물을 대거 다루었는데, 워낙 서둘러 편찬된 탓에 몽골 인명의 한자 표기를 통일하지 않는가 하면, 같은 이름을 다르게 표기한 것을 별개의 인물로 착각하여 한 사람에 대한 열전을 두 편이나 쓴 경우도 있었다. 수부타이도 그런 경우로, '速不台'라는 표기와 '雪不台'라는 표기를 서로 다른 인물로 착각하여 <열전> 8권에서 '速不台'라는 이름으로 다룬 것을 9권에서 또다시 '雪不台'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다.
[6]
대장장이로, 칭기즈 칸의 부족인 키야트 보르지긴과 본래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젤메를 테무진의 부하로 바치기 위해 예수게이 바가토르를 찾아간 바가 있었다.
[7]
오늘날의 운남성에 있었던
대리국을 멸망시켰으며, 제1차 베트남 원정의 총사령관이었다. 제1차 원정에서 당시의 수도인
탕롱을 점령하고 초토화시켰으나,
쩐 태종이 도망간 이후 베트남 지역의 습도와 더위, 풍토병, 여기에 더해 특유의 게릴라 전술로 시간이 지연되자 수도를 통제할 현지 조달 자원이 없다고 판단하여 퇴각했다.
[8]
양양 공방전을 몽골군의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으로, 남송의 대몽항쟁 전선을 무너트려 사실상의 멸망을 초래했다. 또한,
쿠빌라이의 쿠데타를
바얀과 함께 적극 지지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9]
칭기즈 칸,
오고타이 칸,
귀위크 칸이다. 임시 대칸으로 2년 동안 재위했던 칭기즈 칸의 4남
톨루이까지 합치면 4명의 대칸을 섬겼다.
[10]
Subetei, Subetai, Subotai, Tsubotai, Tsubodai, Tsubetei, Tsubatai
[11]
모음조화로 인해 남성 모음이 앞에 올 경우 'дай'(다이)가 된다.
[12]
몽골 문자는 시대의 흐름으로 구어가 바뀌어도 단어와 문법을 옛 형태 그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중세
고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3]
만주 문자는
몽골 문자에 몇 가지 문자 기호를 추가한 문자이기 때문에 읽는 방법에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14]
ᠰᠦᠪᠡᠭᠡ(수베게)
[15]
뼈가 없이 내장이 노출된 부위
[16]
라시드 앗딘의 《집사》 1권, <부족지> 258페이지 -우량카트-
[17]
최근까지의 우량카이족 후손들은 반유목 반정착 생활을 했는데, 봄부터 늦가을까지 유목과 식량을 비축해 두는 생활 양식을 보이며, 겨울철에만 정주지에 거주하며 지낸다.
[18]
당대에 이미 우량카이, 삼림 우량카이는 모두 칭기스 칸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젤메와 수부타이의 부족으로 나름 중용되었다. 만일 수부타이가 삼림 우량카이였더라도 숲속 부족이라 기마술이 약했다면 같은 논거로 젤메와 다른 삼림 우량카이족 남자들 모두 기마술이 떨어졌겠는가? 그랬다면 기병 위주의 몽골군이 작전을 수행했을 때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며, 부족 대부분이 칭기스 칸 휘하에서 복무하지 못했거나 중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19]
테무진이 고생하던 시절, 자르치고다이가 식량을 제공해주고 여러 도움을 줬다는 설이 존재한다.
[20]
원래 젤메는 테무진과 같은 달에 태어나, 아버지 자르치고다이가 테무진의 아버지인 예수게이에게 테무진의 노예로 바쳤다. 그러나 갓 태어난 테무진을 키우기에도 벅찬 예수게이가 장성하면 보내라며 돌려보냈고, 예수게이 독살 이후 가난하고 어렵게 살던 테무진이 장성하자, 예수게이의 죽음으로 약속 이행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젤메를 테무진에게 보냈다. 그로 인해 젤메는 테무진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고, 그와 유사한 행적을 보인 동생 수부타이도 어릴 때부터 각별한 신임 속에 각종 군사 기술을 배웠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21]
이 조언은 《
원조비사》에 있는 내용으로, 칭기즈칸이 수부타이에게 이러한 조언을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22]
칭기즈 칸은 시시콜콜하다 싶을 정도로 수부타이에게 조언을 자세히 했는데, 그만큼 칭기즈칸과 젤메, 수부타이 형제는 정말 친밀한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위의 수부타이의 과거사를 보면 단순한 부하와 주군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대부터 인연이 있었던 사이였고, 형인
젤메는 칭기즈칸의 목숨을 구해주기까지 했으니, 칭기즈 칸이 여러모로 수부타이를 아꼈다고 봐도 될 듯하다.
[23]
수부타이가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은 제베의 부관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 타이치우드족 진영이었다가 항복하여 카마그 몽골 측에 새로 합류한 제베의 뛰어난 실력을 파악한 칭기즈 칸은 그로 하여금 사실상 그보다 고참인 수부타이를 지도하게 하여 그의 포텐을 만개시키도록 이끌었다. 인재를 파악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기용하는 칭기즈 칸의 과감함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4]
그의 아들이
파르완 전투에서 몽골군을 처음으로 패퇴시킨
명장
잘랄 웃 딘이었다.
[25]
이후 제노바 공화국에서 군대가 오자 수부타이는 이미 전리품은 다 챙겼으므로 퇴각했다. 이때 한 설에 의하면 시체를 성 안에 던져놓고 갔다고 한다. 다만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해당 설은 출처가 매우 불분명한 허위 사실이라는 평가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특히 이 내용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 실제로는 당시 크림 반도에 없었고, 그저 당시의
카더라 통신에 의존해서 썼기에 해당 사실의 신뢰성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식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그런 식의 공격은 효과가 있기 힘들다고 과학자들은 이야기한다.(그나마 심리적인 공포 면에서는 효율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26]
이 무렵 스승인 제베가 귀환 도중 사망했다.
[27]
공국은
공작이 통치하는 국가를 뜻하는데, 1번의 전투로 여섯 개 나라의 국가 통치자들을 죽여버린 것이다.
[28]
이 기록은 《금사》 <이랄포아(移刺蒲阿) 열전>에 나와 있다. 1231년 1월, 수부타이가 동관을 공격했으나, 완안진화상의 충효군 1,000여 명이 (이랄포아에게) 지원을 오자 몽골군이 퇴각했고, 금나라군이 골짜기 입구(谷口)까지 추격했다. 다만, 기록상 전투 과정과 피해 수치가 전혀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전략적 후퇴가 패배로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병력이 전멸할 정도의 대패를 당한 것인진 알 수 없다. 일단 지휘관인 수부타이는 잘 살아서 복귀하는데 성공했으나, 공성군이 수성군의 역습에 패해 상당히 먼 거리를 내쫒겼다는 점과 오고타이 칸에게 크게 질책을 당하고 옆에서 보던 툴루이가 그만 갈구라며 말렸다는 기록, 그리고 이후 몽골군의 작전이 툴루이가 설계한 새로운 작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들을 조합해보면 상당히 아픈 패배였던건 확실하다.
[29]
바투가
모히 전투에서 엄청난 실책을 저질러 패배할 위기에 처하자 수부타이가 원군을 이끌고 구해줬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이다. 바투가 능력이 딸렸음에도 현재까지 몽골인들에게 좋은 왕, 좋은 칸이었다고 인정받는 이유는 자신의 지휘 능력이 딸리는 걸 인정하고, 처음부터 수부타이에게 실질적인 총사령관 역할을 넘겼다는 과감하고 왕다운 태도 때문이다. 사실 수부타이는 이 시점에서 몽골군의
레전드가 되어버려서 바투가 군주라고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예를 갖춰야 하는 레벨이긴 했지만.
[30]
사요 강 전투 역시 바투의 실책으로 전세가 몽골군에게 불리해졌을 때, 수부타이의 기가 막힌 전술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혹자는 바투가
병크를 저지를 것을 미리 알고 수부타이가 페이크 전술을 쓴 것이라고까지 보기도 한다.
[31]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유럽의 중심이자
로마의 정통 후계국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며 굉장한 상징성을 가진 국가였다.
[32]
회전(會戰, pitched battle)이란 두 군대가 적당한 장소에 결집해 '
모 아니면 도'식으로 벌이는 전투를 말한다. 《
삼국지연의》에서조차 동탁의 전횡에서부터 사마씨의 진나라 건국까지 묘사되는 회전의 숫자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니, 수부타이가 일생 동안 치른 회전의 횟수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알 수 있다.
[33]
회전에서 승리한 횟수가 65회라고도 한다.
[34]
즉, 홈그라운드 측이 가지는 이점마저도 극복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성격 또한 치밀하고 신중하여, 낯선 지역에 가면 상인 등과 접촉하며 그 지역 정보를 부지런히 수집했다고 한다.
[35]
중세 몽골의 의술은 13세기 이전에는
샤머니즘과 유목 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은 뜸요법, 정골요법, 외상에 대한 치료법, 사혈요법, 말젖을 이용한 마유주 요법 수준이었으나 칭기즈칸 시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인도, 티베트, 중국 등과의 문화적 교류 및 풍부해진 임상 경험을 토대로 기존의 요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및 발전시켰고 약물학이나 방제학 지식이 보다 심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행정으로는 1204년 의사에 대한 세금 면제, 1260년 국가적 보건행정기구 설립, 1272년 약품 유통에 관한 법률 정비, 1292년 중동 지역의 약물전문연구기관인 회회약물원의 설치 등을 통해 의료 발전을 도모했다.
[36]
몽골의 의료 수준이 국가적 차원에서 정립되고, 체계적으로 발전된 것은 인도와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중국, 티베트, 중동 등이 정복되며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뒤에서야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대략 1240~1260년 사이 이후 단계적으로 진행됐을 것으로 보이며 1248년에 사망한 수부타이가 당뇨 환자였다면 해당 제도와 약물학 등의 혜택을 그리 많이 받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37]
국내에 번역된 사계절 출판사/유역수 역주의 《몽골비사》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그 소해(1205년)에 칭기스 카한이 철제 전차를 가진 수베에테이를 톡토아의 아들들인 코도, 칼, 칠라온을 추격하도록 보내면서 수베에테이에게 명령을 받들게 하기를...", "...하고 명령을 내리고 추격하여 끝장을 낼 수 있도록 철제 전차를 만들어 소해(1205년)에 출정하게 했다."
[38]
고대에 사용된
전차는 열악한 주행 성능과 승차감으로 주로 평지에서 운용되었고, 기병의 발전과 더불어 전장에서 도태된 물건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차량 완충 장치들의 초기 모델은 17세기에서나 조금씩 발명되었고,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자동차의 발전과 더불어 19세기부터 이루어졌다. 즉 수부타이와 그 부대가 사용한 '테무르 테르겐'에는 승차감과 주행성능을 개선시킬 완충 장치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따라서 당시 최고 수준의 기병을 보유한 몽골군에서 이미 도태된 전차를, 더욱이 사용하기 힘든 험지에서 운용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인지 깊이 살펴볼 부분이다.
[39]
이는 유럽 사서의 기록상 최초 혹은 초기에 기록된 야전에서의 공성병기 운용술에 해당한다고 한다.
[40]
칭기스칸의 패배와 비극적 일화들조차도 사실 그대로 서술한 《몽골비사》의 성격상, 수부타이에게 비만 등의 문제가 있었다면 있는 그대로 명시했을 것이다. 즉, 철수레를 굳이 비만에 대한 은유나 암시로써 언급한 것인지 의문이다.
[41]
《집사》는 당대보다 조금 후대에 중동에서 쓰여진 특성상, 몽골 혹은 중국쪽 사서와 일부 차이가 있지만, 일 칸국의 가잔 칸의 요청으로 현재에는 구할 수 없는 자료와 학자들을 중국 및 몽골 등에서 지원받아 편찬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확하여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뛰어난 역사서이다.
[42]
정확하게는, 해당 전투 특기를 가진 장수를 포로로 잡으면 일정 확률로 특기를 배운다. 여기서 포로를 잡는다는 것은 해당 장수와 전투를 벌어서 잡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지만, 일하고 있는 장수를 잡아도 일정 확률로 배운다. 단, 도시에 있는 장수는 수성전을 치른 장수를 제외하면 해당사항 없음.
[43]
솔직히 몽골 제국이 주인공인 게임에서 수부타이 생몰연도도 날림으로 고증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