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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0:34:52

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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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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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帝君)
악성제군
명 황제 · 비황족 추존 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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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명장
악충무왕(岳忠武王)
악비 | 岳飛
명 비황족 추존 황제
악성제군 | 岳聖帝君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Yue_Fei_temple_12.jpg
출생 1103년 3월 24일
북송 상주 탕음현[1]
(現 허난성 안양시(安阳市) 탕음현)
사망 1142년 1월 27일 (향년 38세)
남송 임안부
(現 항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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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성씨 악(岳)
비(飛)
부친 수국공(隋國公) 악화(岳和)
모후 주국부인(周國夫人) 요씨(姚氏)
능묘 악비묘(岳飛墓)
형제자매 동생 악번(岳翻)
배우자 불명
자녀 5남
신장 170cm[2]
붕거(鵬挙)
작호 진왕(晉王)
묘호 없음
관직 선무사(宣撫使)
작호 악왕(鄂王)[3]
시호 악무목왕(岳武穆王)
충무왕(岳忠武王)
삼계정마대제
(三界靖魔大帝)
충효묘법천존악성제군
(忠孝妙法天尊岳聖帝君)
}}}}}}}}}
1. 개요2. 생애3. 악비의 무덤4. 재평가
4.1. 정치적 재평가4.2. 군사적 재평가
4.2.1. 악비 열전의 신빙성 문제4.2.2. 부족한 처세술?4.2.3.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 영웅?4.2.4. 통제 불능의 군벌4.2.5. 참고 자료
5. 기타6. 대중문화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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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怒髮衝冠憑欄處 瀟瀟雨歇
성난 머리칼은 관을 뚫을 지경인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抬望眼仰天長嘯 壯懷激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 지르니, 장사의 감회가 끓어오른다.
三十功名塵與土 八千里路雲和月
삼십년의 공명이 한낯 먼지에 불과하고, 팔천리 내달렸던 길도 그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없구나.
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젊었던 머리칼은 어느새 희어졌으니 비감한 마음만 애절할 뿐.
靖康恥猶未雪 臣子恨何時滅
정강의 치욕은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로서의 한을 어느 때나 풀 수 있을 것인가.
駕長車 踏破賀蘭山缺
전차를 몰아 하란산[4]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
壯志饑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배 고프면 오랑캐의 살로 배를 채우며, 목 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옛 산하를 다시 되찾은 후에야 천자를 만나 뵈러 가리라.
만강홍(滿江紅)
중국 북송 말기 ~ 남송 초기의 무장으로, 금나라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 명장이자 서예가이며 명나라 시기에 제군으로 추존되기도 했다.

는 붕거(鵬挙). 시호는 충무(忠武).[5] 남송의 영종이 1204년에 악왕(鄂王)에 봉했기 때문에 흔히 악왕이라고도 부른다. 중국[6]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민족 영웅이자, 명장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며, 한국에서 이순신을 대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7] 국가를 지키려다가 마지막에 간신의 억울한 모함으로 죽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명장인 원숭환과도 이미지가 겹치는 편이다.

명나라 만력제 시기 제호(帝號)인 삼계정마대제(三界靖魔大帝)[8]로 추존되었고, 곧 천존(天尊) 악성제군(岳聖帝君)의 신호가 추시되어 황제와 군신(軍神)을 겸하는 신황(神皇)의 반열에 등극했다.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 정부에서 다문화주의를 강조하여 역사 교과서에서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를 지양하고 있으며 이와 별개로 불분명한 기록과 과장된 전공 때문에 학계에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시《만강홍》(滿江紅)의 창작자이나, 만강홍은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심하며, 명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여겨질 정도이다. 따라서 악비가 만강홍을 지었는지는 불분명하며 되도록이면, 만강홍과 악비를 연결짓지 않는 것이 불필요한 시비나 갈등을 피하는 방법일 것이다.

2. 생애

1103년 하북서로(河北西路) 상주(相州) 탕음현(湯阴縣)[9]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송사 <악비전>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고니처럼 큰 새가 지붕 위에 앉아서 이름이 비(飛)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자도 비슷한 의미인 붕거(鵬擧)라고 지었다. 한편 악비가 태어난 직후 황하가 범람해 고향 마을이 박살났고, 그 과정에서 부친인 악화(岳和)가 홍수에 휘말려 익사하여 어머니 요씨와 함께 하북으로 이주했다.[10] 또 전술한 황하가 범람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악비를 안은 채로 커다란 바구니를 타고 홍수에서 살아남았다는 야사가 있다.

악비는 어려서부터 용맹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뛰어났다. 무술 스승 진광(陳廣)[11]에게 창술과 검술을, 주동(周同)[12]이라는 명궁에게 궁술을 배워 300척 밖까지 화살을 쏘고, 쇠뇌를 8석까지 감당할 정도로 뛰어난 활 솜씨를 갖추었다. 또한 학문 공부 역시 게을리하지 않아 손자, 오자 등을 밤낮으로 탐독했으며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고 전해진다.

1122년, 의용병으로 입대하여 개봉을 수비했으며 동경 유수(東京 留守) 종택(宗澤)의 눈에 들어 승진을 거듭했다. 1126년에 하남을 침공한 금군에 맞서 싸우다가 후퇴했으며 개봉이 함락당하자, 종택의 후임자였던 두충(杜充)과 함께 남하했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반드시 승리하며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아 악비가 지나는 마을의 백성들은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쳤으며, 악비군은 '악가군(岳家軍)'이라고 불렀다. 악가군이 얼마나 강했는지 금나라 병사들은 '태산을 흔드는 건 쉽지만 악비의 군사를 흔드는 건 어렵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악비는 한세충, 장준, 유광세(劉光世) 등의 군벌들과 합세하여 금군의 공세에 맞서 싸웠으며 구릉 지대가 많은 강남(중국)의 이점을 살려 금의 철기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였다.

악비는 정원장군(靖遠將軍), 1134년 청원군 절도사(淸遠軍節度使)를 거쳐 1136년 선무부사(宣撫副使), 1137년에는 선무사(宣撫使)로 임명되었으며 하남의 일부 지역을 수복하고 양양(襄陽)의 방위를 책임졌다. 이후 중원 수복을 위해 악주에 군대를 주둔시킨다.[13]

악비는 시종일관 북벌을 주장했고,이 때문에 주화론자들인 왕백언, 황잠선, 진회 등과 매우 심한 갈등을 빚었다. 진회는 매번 승전을 거듭하는 악비를 극도로 경계하였으며 악비를 비롯한 주전파 군벌들은 주화파 관료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4번에 걸쳐서 북벌을 했다. 마지막 4번째 북벌 시기의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를 여러 번 쳐부수고 낙양과 정주 등을 회복했으며,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에서 불과 40여 리 떨어진 주선진까지 점령했다. 이때 금나라 대장 올출은 여러 번 패전하자 개봉을 버리고 퇴각하려고 했으나, 한 문관의 만류로 개봉을 끝까지 수비한다. 그 문관은 올출의 말고삐를 잡으며 "예로부터 간신이 조정에서 전횡하면 외지에서 아무리 능력 있는 장군도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곧 송나라 내부에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올출은 문관의 말을 들었다.[14]

악비는 원래 을 좋아했지만, 전시에는 이를 금했다. 그런 악비는 금나라 수도 근처의 황룡부까지 진격하면 병사들에게 거나하게 먹자고 약속하고 다음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비는 금 왕조와의 충돌을 피하려 하는 주화파 재상 진회와 더 큰 마찰을 빚게 되었다. 진회는 1141년, 군제 개편을 명목으로 기습적으로 당시 군벌들의 지휘권을 모두 박탈하고 모든 병사들을 중앙군 휘하로 전속시킨다.

남송의 황제 고종의 마음도 진회 쪽에 더 기울어져 있던 터라 그를 12번이나 불러 소환시키고, 악비는 양자인 악운, 악가군 간부였던 장헌과 함께 투옥되었다. 악비는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죽기 전에 유언으로 "나의 결백한 마음은 하늘의 태양처럼 밝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는데, 일설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하지만, 대체로 사약을 받아 사사당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때 악비의 전우이자 또 다른 주전파인 한세충이 "악비의 죄상이 무엇입니까?"라며 따지자, 진회"아마 있을지도 모르오"(막수유, 莫須有)라는 궁색한 대답을 했고, 이에 기가 막힌 한세충은 "고작 그 세 글자로 천하가 납득하겠소이까?!"라며 일갈했다.

악비를 죽인 일 때문에 진회는 민심을 잃었다. 그래서 지금도 진회를 비난하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진회는 중국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 중 하나다. 또한 당대에도 진회의 평은 좋지 않았다. 진회는 재상들을 이간질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진회에 대한 세간의 비판이 극심했다. 진회를 이용해 군벌들을 쳐내고, 악비 숙청에 대한 오명을 진회에게 뒤집어 씌운 황제조차 진회의 권력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진회의 권력은 막강했다.

진회가 죽자, 그를 따르던 도당들은 효종(孝宗) 대에 숙청당하거나 좌천당했고, 진회의 일족은 무사했다. 효종이 진회의 일족을 몰살했다는 이야기는 역사 왜곡이며, 진회의 가문은 영종대에 진회의 왕작을 추탈당하고 충헌이란 시호를 유추라는 나쁜 뜻을 지닌 시호로 격하당한 것, 주전파들의 견제를 받아 좌천당한 것 외에는 딱히 큰 억압을 당하지 않았다.[15]

진회가 권세를 누리던 시절과 비교하면 가세가 많이 기울긴 했지만, 과거 시험을 치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진회의 손자인 진훈(秦壎)은 예부 · 공부 상서를 지냈고, 진훈의 아들로 진회의 증손자인 진거(秦鉅)는 영종(寧宗)대에 치주(蘄州) 통판(通判)으로 금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병력을 조련하는 한편,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존경을 샀다.

금의 대군이 치주를 침공하자, 진거는 이에 맞서 1달 이상을 버텼으며 성문이 뚫린 뒤에도 성안 시가지에서 계속 저항했다. 그러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진거는 관고(官庫)에 불을 지르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었다. 문무를 겸했음에도 간신의 자손으로 손가락질 당하며 자기 능력을 다 펴지 못했고, 조정의 관료들까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처지에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진거의 차남 진준(秦浚), 삼남 진휘(秦瀈)도 부친과 함께 전사했다.

이처럼 진회는 죽어서 오명을 받고 그 자손들까지 손가락질당했으며 악왕묘에 동상이 세워져 부인과 함께 오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 반면, 악비는 미천한 신분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죽어서는 최고의 시호와 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누렸다.[16]

효종이 즉위한 뒤, 악비에 대한 신원이 이뤄졌다. 1178년, 송 효종은 무목(武穆)이란 시호를 내리고 구국의 영웅으로 대우했다.[17] 1204년, 영종으로 추존하여 항저우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하고, 시호를 충무로 개정했다.[18]

3. 악비의 무덤

악비의 무덤인 악왕묘(鄂王墓)는 항저우시 시후구에 조성되어 있다.

악비의 시체를 진회가 훼손할 것을 염려한 옥지기가 시신을 자신의 집에 있는 나무 밑에 묻었고, 자신이 죽을 무렵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후에 악비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효종 때 악비의 묘는 크게 지어졌고 1204년 과거 고종 때 있던 일을 재평가하여 악비를 악왕(鄂王)으로 추봉하고 커다란 동상도 만들어지게 되어 무덤은 악왕묘(鄂王墓)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매국노 진회는 물론 그 부인 왕씨, 묵기설,[19] 장준[20]과 함께 무릎 꿇고 있는 동상이 만들어져 악비 동상 앞에 놓이게 된다.

참고로 아내의 동상까지 만들어진 것은, 진회가 악비를 죽일 죄명을 찾지 못해서 고민할 때, 아내의 조언으로 처형을 결심하게 되었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도 부부에게 침을 많이 뱉어서 지금 악왕묘를 가보면 동상에 침을 뱉지 말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근데 사람들이 아직도 싫어하는지 침이나 쓰레기 투척은 예사고 오물 투척도 툭하면 일어난다고 한다. 사실 침을 뱉지 않는 목적을 정말로 달성하고자 한다면 동상을 아예 치워버리면 되는데, 그러지는 않고 팻말을 걸어놓는 선에서 방치하고 있는 것은, 공산당 당국에서 어느 정도는 용인하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다.[21]
파일:external/yaplog.jp/dsc00076_p.jpg
침을 뱉지 마시오
진회와 그 일당의 동상

초기에는 이러한 사태로 오물이 넘치자 현장에서 관리할 수 있는 공안들을 배치했다. 그런데, 정작 그 공안들이 더 적극적으로 오물을 투척하거나 심지어 경비용으로 준 총으로 내려치는 등의 문제가 있어 현재는 상시로 공안을 배치하지 않고 있으며 적발되더라도 공안이 오물 투척을 한 사람을 폭력을 안 쓰고 팔짱 끼고 끌고 가는 수준에서 그친다고 한다.[22] 하지만 악왕묘 역시 문화대혁명의 마수는 피해가지 못해서, 홍위병들이 악비의 묘를 파헤치고 유골을 불로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4. 재평가

4.1. 정치적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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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는 몽골족이 중원을 지배하던 원나라 시절에는 잊혔으나, 명대부터 악비에 대한 숭배가 크게 심화되었다. 홍무제는 원 왕조를 몽골 초원으로 몰아낸 업적과 악비를 연관지어 악비를 신격화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위업을 드높이려 했다. 만력제 시기에는 삼계정마대제충효묘법천존악성제군(三界靖魔大帝忠孝廟法天尊岳聖帝君) 이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

명대까지 호국 영웅으로 존경받은 악비의 위상은 악비와 대립했던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기에 쇠락했다. 자신들이 선조로 칭한 금 왕조에 맞서 낙양까지 진격한 신화적인 영웅을 숭배하는 것이 청 황실에게는 부담스러웠던 것. 그래서 청 왕조는 악비에 대한 숭배보다는 관우에 대한 숭배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다만, 인민들이 악비를 숭배하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청의 황제들은 악비의 후손들에게 상과 관직을 내렸으며 강희제(康熙帝)와 건륭제(乾隆帝)는 남순 중에 항주 악왕묘를 참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악비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이들은 청대에 별다른 탄압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 권력과 영화를 누렸다.

강희 연간에 오삼계(吳三桂)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악승룡(岳昇龍)은 천진 총병(天津 總兵)에 사천 제독(四川 總督)까지 지냈고, 그 아들인 악종기(岳鍾琪)는 연갱요(年羹堯)의 후임으로 천섬 총독(川陝 總督)에 영원 대장군(寧遠 大將軍)을 역임했다. 그러나, 악종기는 한인 주제에 군권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만주인들의 견제를 받았고, 준가르 전쟁에서 실책을 범한 것을 빌미로 탄핵당하고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악종기는 건륭 연간에 사천 총독으로 복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는 악비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처우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화했다. 중국 정부는 정치적으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한족 중심주의를 상징하는 악비는 정부의 방침과 잘 맞지 않아서 정부 차원의 기념 사업은 대폭 축소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여러 왕조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전국에 있던 사당이나 목상이 홍위병에게 박살났다.[23] 항저우시에 있던 악왕묘도 홍위병에게 훼손당했다. 이때 파괴된 악왕묘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인 1979년에 서둘러 복원되었다.

당시 홍위병들은 민족주의나 팽창주의를 봉건주의의 잔재로 보고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또한 악비는 여러 차례 농민 반란 진압에 참여했기 때문에 민중 사관을 표방하고 모든 농민 봉기를 기의(起義)로 서술하는 중국 정부의 성향에도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24]

중국 공산당이 악비를 폄훼하기 위해 악비와 대립했던 진회를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진회를 한간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그간 맹목적으로 비난받아 오던 주화파와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있는 것을 왜곡한 것이다.[25][26] [27]

이렇게 청대부터 악비 숭배는 축소되기 시작했으며,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는 중국 정부가 소수 민족의 정서를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악비에 대한 찬양은 상당히 사그라들었다. 이를테면 교과서에서 '한족의 영웅' 이라 표현을, '중국의 영웅' 등으로 소수 민족들을 고려한 표현으로 바꾸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초등학교의 어문 교재에는 악비의 행적이 실리고 있으며, 이는 악비가 체제를 뛰어넘어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김유신이나 계백이 서로 적으로 싸웠지만,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지역을 불문하고 모두 존경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 사정이니 이것이 무슨 한족 패권주의나 국수주의의 발로는 아니다.

무협 소설로 이름난 김용도 아주 세심하게 공을 들여 찬사를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사조 삼부곡은 모두 악비와 연관이 있으며, 그의 의지가 이어져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4.2. 군사적 재평가

악비가 명장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악비는 금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여러 차례 대승을 거두어 왕조의 멸망을 막은 위업이 있다. 충무라는 시호를 받고 왕으로 추숭되어 신의 반열에 선 것은 후손들이 쓴 행장 덕분에 얻어낸 헛된 영광이 아니다. 그렇지만, 악비는 조정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 군벌로서 제멋대로 군을 부려 송군 전체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갈 뻔 했으며 사후에 숭배받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세우지 않은 공적이 추가되거나 과대 평가를 받았다. 이는 현대의 재평가 기조가 나타나는 배경 중의 하나가 되었다.

4.2.1. 악비 열전의 신빙성 문제

정치적인 문제와 별개로 학계에서는 이전부터 악비의 전공을 재평가하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비의 전공은 악비 후손들이 쓴 행장을 바탕으로 한다. 정사인 송사 악비전도 행장을 바탕으로 저술한데다 보병 수백 명으로 수만의 기병대를 몰살시켰다는 식의 황당한 전과가 많아 신뢰성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송사 고종 본기와 금사(金史)에는 악비가 패한 기록이 여러 번 나오거니와, 악비의 전공은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이 안 되거나 공신력 있는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서술이 많기 때문에 사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악비의 최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선진 전투만 해도 동 시기 남송의 사서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繫年要錄)이나[28]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는[29] 아예 주선진 전투가 나오지도 않는다.
괜히 송사 악비전의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학자들이 비판하는 게 아니다. 악비전 기록만 보면 8천으로 조성의 10만 대군을 이겼고, 5백 명으로 주선진에서 올출의 10만 대군을 섬멸했다. 고종 본기에는 명백히 패전했다는 전투가 열전에서는 승리했다고 하고, 8백 명으로 왕선 등의 도적 50만 명을 남훈문에서 격파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허위사실들이 기록되었다.

열전의 악비는 패전이 없는 상승장군이지만, 실제의 악비는 여러 차례의 패배를 경험한 바 있다. 마가도(馬家渡)에서 금군과 맞서 싸우다 종산으로 퇴각한 일이나, 반군들과 싸우다 패전한 일, 상관인 왕언(王彦), 장준(張浚)의 지시를 어기고 출전했다 패전한 일 등 악비의 패전 기록은 곳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악비의 반대편에 있던 금 왕조의 역사서인 금사 완안앙(完顔昂) 열전에는 완안앙이 8천으로 악비의 10만 대군을 물리치고, 악비의 대군을 상대로 병력 1천으로 성을 사수한 일화가 기록되었다.

또한 악비는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동료들의 전공을 흡수하기도 했다. 순창(順昌)에서 금군을 격퇴한 것은 유기(劉錡)와 오개(吳玠) · 오린(吳璘) 형제가 이끈 관서 · 사천의 군대인데 구원군을 보냈을 뿐, 참전은 하지 않은 악비가 전공을 세운 양 이야기가 전해지거나, 여러 가지 전공들이 부풀려져 기록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유기 · 유광세 · 장준(張俊 무관) · 장준(張浚 문관) · 종택(宗澤)[30] · 충사도[31] · 한세충 등 상대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다른 인물들이 재조명받는다. 특히 여러 사서에서 초인적인 업적이 기록되었음에도 후배인 악비의 대중적 인기에 묻혀 부각되지 못했던 한세충이 진정한 만인적으로 인정받는 추세이다.[32][33]

4.2.2. 부족한 처세술?

악비가 숙청당한 원인 중 하나로 그의 처세술을 거론하기도 한다. 황제에게 황태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진노를 샀다는 것이다. 국가의 후계 구도를 든든히 하자는 의도였겠지만, 황제에게는 그야말로 위세등등해진 군벌 세력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수작으로 보였던 것. 그래서 이 때부터 황제가 악비를 견제하고자 주화론을 주장한 진회를 지지했다는 얘기인데, 적폐와도 같은 낭설이다.

과거부터 '건저의' 사건을 이유로 고종이 악비에게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신문 사설과 소설, 커뮤니티에 실리곤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황태자 책봉은 악비 외에 누인량 같은 문관들과 장준 같은 다른 무관들도 건의한 일이어서 황태자 책봉 건의는 악비의 숙청과 관련이 없다. 또한 무장이 조정의 일(황태자 책봉)에 발언하는 것이 월권일 수는 있어도 역린을 건드리는 일은 아니다.

악비의 처신과 관련해 정치에 잘 모르던 악비가 재상 이강(李綱)을 비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강은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할 때 일개 문관의 신분으로 개봉 수성전을 지휘하여 금군을 격퇴했던 구국의 영웅으로, 그 능력과 명성 때문에 고종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싫어하면서도 민심 수습 차원에서 재상으로 기용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황잠선, 왕백언 같은 주화파와 동일하게 취급하며 비난했으니 큰 실수였다는 것.[34]

물론, 양자가 초기에는 오해로 인해 서로 악감정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나, 두 사람은 오해를 풀고 화해했다. 악비는 1132년에 이강의 휘하에서 호광 일대의 반군 토벌에 참여했으며 1136년에는 이강이 양양에서 금군에 맞서는 악비에게 적극적으로 물자를 공급해 주었다. 따라서 악비가 정치에 잘 몰라서 이강을 비난했다는 말은 낭설이며, 양자 간에 있었던 불화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정말 강하게 비난한 자는 남송대부터 지금까지 진회와 같이 비난당하는 왕백언(汪伯彦), 황잠선(黃潛善) 등의 주화파였으며, 악비는 정계 거물인 이들을 비난했던 일이 조정에 알려져 일시적으로 파직당했다.

4.2.3.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 영웅?

악비는 명장이며, 충신이었다. 종택 사후에 두충을 따르던 악비는 두충이 금군에 항복하자, 항복을 거부하고 같은 뜻을 가진 자들을 모아 귀환했으며 그 뒤로도 계속 송 왕조에 충성했다. 이는 그가 동 시기에 금 · 송 양대 왕조 사이에서 자기 이익에 따라 밥 먹듯이 편을 바꾸던 군벌과 도적떼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악비는 금군의 역습으로 양양이 함락당해 목에 칼이 들어온 형국이던 남송을 구원했다. 악비는 금군의 공세를 막아낸 뒤, 양양을 수복했으며 장강을 넘어 낙양 앞까지 진군했다. 악비의 승전에 고무된 송군은 공세로 전환해 여러 지역을 수복하고 금군과 제군의 회남 방면 공세를 잘 막아냈다. 악비의 양양 수복과 장강 도하는 당대에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엄청난 업적이었다. 이 공적 덕분에 악비는 32세 나이에 오개 · 유기 · 유광세 · 장준 · 한세충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국가방위의 핵심인 양양 전선을 맡았다.

그러나 악비는 지나치게 성급하고 모험주의적인 기질이 강했다. 위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악비는 상관의 지시와 방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병력을 몰고 나갔다가 패전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함부로 병력을 부려 이기지도 못하고 죄 없는 병사들을 희생시킨 것은 당시 기준이나 현대 기준이나 사형감이다. 이는 제멋대로 칠천량까지 함대를 이끌고 가 수군 전체를 궤멸시킨 원균이 저지른 일과 다를 바가 없다.

원균과 비유하는 것이 악비에게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악비는 정말 원균처럼 큰 위기를 초래했다. 건염(建炎) 4년(1130), 종필의 대군이 남진해 왔을 때, 악비는 명령도 받지 않고 무모하게 초주(楚州)를 구원하러 갔다가 고립되어 패배했다. 이때의 패전으로 장강 방어선이 약화되어 금군이 통주와 태주를 장악, 장강을 도하할 기회를 잡아 전선이 붕괴할 뻔했다.

2차 대전 시기의 독일군처럼 악비는 전술적으로는 뛰어나도 전략적인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은 악비를 계륵처럼 여겼다. 양양을 수복하는 쾌거를 이루고 장강 이북을 탈환한 구국의 영웅이었지만, 걸핏하면 명을 어기고 돌발행동을 해서 안 그래도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남송군의 방어선을 더욱 얇게 만들어 방어전략에 문제를 일으키는 폭탄이었다.

물론, 악비의 승전이 전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금군을 궤멸시키거나 전략적 요충지들을 장악하고 전선을 유리하게 전환해 방어를 굳건히 하지 못한다면 대세에는 큰 영향이 없다. 조정에게 악비의 승전은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악비가 넓혀 놓은 전선은 악재였다. 지역을 탈환하더라도 유지하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악비는 유기가 순창에서 승리한 뒤에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혼자 진군하여 영토를 수복하다가 고립되어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금자패반사(金字牌班師) 사건이다. 순창에서 승전한 뒤 송군은 총반격에 나서 전장의 주도권을 잡고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지나친 진격이 전선 확대와 보급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과거에도 퇴각하던 금군이 역습을 가했던 점, 하남은 평야가 많아 보병 중심인 송군이 기병 중심인 금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는 점을 우려해 각지의 지휘관들에게 철퇴를 명했다.

조정의 명이 내려오자 여러 장군들의 군대는 이를 받들어 퇴각했다. 그러나 악비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12번이나 황명을 무시하고 신나게 진격하다가 고립되었음을 깨닫자마자, 죽고 싶지 않아서 자기가 멋대로 '수복'한 지역의 방위를 다른 장군들에게 떠넘기려 하고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

종필의 대군이 남하해 악비를 잡으려 했지만, 악비는 유기가 보내준 원군과 휘하 지휘관 수십 명과 허다한 병사들을 제물로 삼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주선진 전투의 전말이다. 중국의 민간전승에서는 주선진에서 종필의 대군을 깨뜨리고 개봉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한간 진회에게 놀아난 겁쟁이 고종이 악비의 대업을 막았다고 전하지만, 실제론 야전 사령관이 최고사령부와 군 통수권자의 지시를 몇 번이나 무시하며 혼자 진격하다 병력 다 날려 먹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사건이다.

순창에서 금의 대군을 물리치고 금군의 기마 군단을 무력화했으니 악비에 호응해서 진격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남송은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장장 15년 가까이 전쟁을 이어오던 남송에게 장강 이북의 수복지들로 수십만의 병력을 유지할 물자와 인력을 보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아직 남송이 하남과 산동을 사수하던 시기, 주전파의 핵심인 이강조차 군을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구축한 뒤에 화의를 하여 휴식을 취하고 북벌을 할 군대를 육성하자는 의견을 상주했다.[35]

이미 남송 전역에서 반란과 기근이 일어나 인민이 떼죽음을 당하는 참이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주화파와 이들에게 동조한 고종을 비난하지만, 남송의 전쟁수행동력은 아주 미약했다. 금군의 침공으로 조정이 마비되고 곳곳에 도적떼가 판을 치는 상황에 식량과 의복까지 부족한 지경이었다.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한 군비가 너무 부족해서 지폐를 대량 발행했다가 동전 유통량에 비해 지폐가 너무 많이 유통되는 바람에 물가가 폭등해서 경제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도 군비를 대줄 수가 없어서 남송 중흥 사대장군이라 불리는 이들이 군비를 확충한답시고 약탈을 하고 있었다. 국가가 전비를 대주지 못해서 약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구헌 날 약탈을 자행한 송의 '명장'들을 마냥 옹호해주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악비는 병력과 물자를 추가로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다. 낙양을 눈 앞에 둔 적이 있으니 개봉을 수복하고 황룡부로 달려 나가는 미래가 보였겠지만, 이미 물자부족으로 몇 번이나 장강 이북에서 회군한 전력이 있는 주제에 나라 사정 뻔히 알면서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황제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4.2.4. 통제 불능의 군벌

남송 초기의 군대는 유랑민과 도적, 자경단, 낙오병 등으로 구성되어 질적 수준이 나쁘고 군율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군비를 대어주지 못해서 약탈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이는 명장으로 칭송받는 한세충, 장준(무관), 유광세, 악비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악가군, 한가군 운운하며 높은 군기를 칭송하지만, 이는 소설 속의 일로서 현실 세계에서는 지방관들을 겁박해 관고의 물자를 빼앗고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군비를 대어주지 못하고 통제가 어려우니 남송 초기의 군대는 거의 사병에 가까웠고 위에 언급한 남송의 '명장'들은 몇 만씩 되는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격이었다. 민간 전승과 소설에서는 악가군, 한가군이란 명칭을 긍정적으로 사용하지만, 송 태조 시기에 이런 명칭이 붙은 부대가 있었다면, 즉각 사령관을 직위 해제하고 참수한 다음에 부대를 해체해서 여타 부대에 분산 배치했을 것이다. 황제의 군대가 O가군(家軍) 운운하는 사령관의 사병 집단이 된 셈인데, 진교역(陳橋驛) 병변으로 일어난 나라에서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한세충, 유광세, 악비, 장준(무관), 유기 등 남송 장성들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한세충은 특히 유광세와 사이가 좋지 못해서 유광세의 병력을 빼앗거나 군량 창고에 불을 지른 적이 있으며 양자는 황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화해를 요청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 한세충이 장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가 장준이 무시해서 한세충의 군대가 위험에 처한 적도 있었다. 장준은 또한 한때 부하였던 악비가 자신과 동급이 된 것이 불만이었고, 악비 또한 한때의 상관이었던 장준을 불편해하여 양자가 다툼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악비는 갈등을 빚던 의병장과 그 병력을 도륙하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은 큰 곤란을 겪었다. 당대 송군의 방침은 조정의 통제하에서 각 군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광활한 전선을 유지하고, 가공할 기동력을 지닌 금군의 기마 군단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식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은 금군이 침공을 해오거나, 공세로 전환할 때면 작전을 수립하여 천섬의 오개, 오린, 양양의 악비, 회수 일대의 유광세, 장준, 한세충 등의 사령관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각 군이 상호 협력하면서 금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그러나, 각 군 사령관들의 불화와 지나친 독립성은 대규모 작전의 수행을 어렵게 했다.

이 문제에는 악비의 책임도 일부 존재했다. 초주를 구원하러 갔다 고립되어 패전한 것도 장준과의 불화와 악비의 기질 때문이었다. 전선 재정비와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12번씩이나 퇴각을 명해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싸우러 나간 게 악비였다. 집단군 수준의 거대 병력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전공과 명성에 집착하고, 뒷감당은 다른 이에게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남송의 사정이 나아져 군비를 나름대로 지급할 수 있게 된 뒤에는 군벌들이 기생충마냥 나라를 좀먹기도 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무신들이 이끄는 군부가 중요하고 초창기에 군비를 잘 지급해주지 못한 것도 있으니 군대를 우대해 줬는데, 기고만장해진 군벌들이 선을 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마치 청대의 삼번처럼 엄청난 양의 군비를 요구해댔고 거만하게 굴었다. 군벌들이 요구하는 막대한 전비를 확보하기 위해 조정은 증세를 해 인민을 쥐어짜야 했고, 이는 또 다른 반란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남송의 군벌들은 통제 불능에 충성심도 의심스러웠다. 방위를 맡은 유광세가 명을 어기고 멋대로 퇴각해 황태후가 포로로 잡힐 뻔하고 비빈들이 위험에 처한 일도 있고, 고종 본인이 왕백언, 황잠선 등의 간신과 강리 같은 환관을 중용한 것 때문에 분노한 묘부(苗傅), 유정언(劉正彦) 등이 반란을 일으켜 고종을 퇴위시키고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은 묘부의 난도 있었다. 이 사건은 황제측이 한세충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해 충성파 군벌로 반란군을 제압하는 것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묘부, 유정언의 난 외에도 남송 초기에는 무수히 많은 군사 반란과 배신이 일어났다.

그래서 황제와 조정은 군부를 통제하기 위해 병권을 제한하거나 회수하려 했지만, 군부의 격렬한 저항에 휘말렸다. 1137년에 여러 장군들을 이간질하여 군부를 분열시킨 다음, 병권을 회수하려 했다가 무려 4만이나 되는 병력이 금 왕조에 투항하는 회서병변(淮西兵變)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방어선이 붕괴해 국가 존망이 위태로워지자, 황제는 장준(무관)에게 회서를 방어할 것으로 명했는데 장준은 임지에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명을 거부했다.

악비에 대한 숙청도 군벌 통제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12 금자패 사건은 악비가 벌인 여러 가지 기행 중의 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금자패 사건 이전에도, 악비는 지속적으로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멋대로 군을 움직였다. 다른 장군들이 명을 받들 때, 악비가 이를 무시한 일도 꽤나 있었으며 황제가 직접 친필 조서를 써서 수십 번씩 명을 전해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악비가 조정의 명을 따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은 악비가 승전했다는 것보다 명을 받들었다는 것에 더 기뻐할 지경이었다.

유광세의 병력을 달라고 했다가 황제가 장준에게 이를 넘기자, 어머니의 상을 이유로 진영을 무단 이탈한 일도 있다. 국가 안보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를 방위하는 군단의 사령관이 기분 나쁘다고 죽은 어머니를 팔아 탈영을 한 것이다. 송 왕조 초기였다면, 하나 하나가 능지처참을 해도 모자를 죄들을 남송 중흥의 명장들은 태연하게 수백 번씩 저지르고 있었다.

금자패 사건 이후, 고종은 그간 추진하던 병권 회수 정책을 가속했다. 황제 입장에서 바라볼 때, 평소에도 수십 번씩 명령을 들으라고 조서를 전해야 하는데다 12번이나 금자패를 받은 뒤에서야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는 사령관이 이번에는 진교역과 같은 일을 할지, 다시 군영으로 돌아갈지 알 수가 없었다. 병권 회수는 필연적인 조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은 악비, 장준, 한세충의 군권을 회수하는 령을 내렸다. 그런데, 장준과 한세충은 곧바로 명을 따른 반면, 악비 혼자 명을 받고도 1주일 동안 미적거리다 조정에 나아갔다. 이로써 세 사람은 황제의 재가를 받은 뒤에 병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고종, 진회 일당이 국가 영웅을 탄압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통제 불능 상태의 군벌들로부터 군권을 회수해 최고 사령부와 정부가 군 통수권을 확립한 사건이었다. 이후, 악비는 다시 병권을 되돌리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국가 영웅의 비참한 최후였다.

위와 같은 행적을 보면, 악비에 대한 통제와 병권 회수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물론, 고종과 진회가 기록을 윤색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정사의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당시 남송군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에 악비가 다른 군벌들처럼 행동했을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따라서 악비는 명장이며 충신으로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영웅이었지만, 전략에 대한 안목이 좁고 전공에 집착하며 제멋대로 구는 군벌이었다.

4.2.5. 참고 자료

- 남송 초기의 변란집단에 관한 연구 : 출현배경을 중심으로
- 군사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악비의 죽음
- 남송초 대금관계의 변화와 하남, 섬서 지역
- 남송시기 전쟁이 화폐에 끼친 영향
- https://cafe.naver.com/booheong/152993

5. 기타

6. 대중문화에서

6.1.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62.jpg
삼국지 12, 13, 1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나온다. 일러스트도 39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미청년으로 나왔다. 물론 삼국지 한정으로 미래무장이다. 능력치는 정치력 빼고 삼국지 무장들과 고대무장들, 심지어 삼국지 시리즈에 잠시 등장했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무장들보다 능력치가 매우 좋다. 상술되어있듯 악비에 대한 재평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이 게임 속에선 대놓고 먼치킨형 능력치를 보여준다. 11편에서부터 지력이 78으로 내려가나 12편에서 80대 중반으로 늘어나며 거의 완전체가 되었다. 그리고 12편부터 미래무장[42]이 대거 삭제가 되었는데 악비만 나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95/무력 91/지력 87/정치력 56. 보병, 기병, 궁병 관련 전법은 각각 2개 이상에 궁기병, 지식, 모략, 책략 관련 병법은 1개인 완전체 무장이다. 의리와 지력이 높으니 이간지랄과 허보도 안 통한다.

삼국지 10에서는 지력 80, 정치력 37으로 내려가고 매력 97이 추가되었다. 특기 수는 14개이며 주로 장합 조운과 비슷한 편이다.

삼국지11에서는 통솔력 95/무력 91/지력 78/정치력 31/매력 98의 능력치이다. 지력이 70대 후반으로 너프됐지만 특기가 통찰이기 때문에 계략이 먹히지 않는다. 말그대로 개사기 무장이다. 다만 병종적성은 창적성 S 외에는 병기 빼고 올A란 점으로 밸런스가 어느 정도 맞는 편이다. 아무리 창병적성이 S지만 창장이 아니면 거의 방어력이 약한 부대에 불과하고, 가능한다면 지도를 가진 무장과 조합하여 병과적성(극병, 노병, 기병)를 키워주는 게 좋다. 친애무장은 관우 강유. 혐오무장은 초주이다.

삼국지 12에서도 젊은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보다 상승하여 통솔력 99/무력 91/지력 86/정치력 31이고 병종은 기병. 전법은 의용병으로 안 그래도 기병 자체가 완전체 병종이라 무시무시한 성능을 자랑한다. 또 내정 특기는 연병, 병심, 감시, 보수, 일기에 신무장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호걸과 귀모 특기를 동시에 가진 무장이다. 게다가 기병이라 신속도 있다. 매력 삭제로 인한 보상책인지 지력이 꽤 높아져서 군사 특기를 얻으면 군사로 사용해도 좋다.

삼국지 13에서도 등장한다. 능력치는 12편 시절과 마찬가지로 통솔력 99, 무력 91, 지력 86, 정치 31. 특기는 훈련 9, 순찰 9, 위풍 7, 신속 8, 분전 9, 연전 9, 공성 5, 수영 7, 일기 8, 호걸 8, 귀모 4에 병과적성은 창병이 S이며 기병과 궁병이 A다. 전법은 손견의 고유전법인 사자분신, 중신특성은 창술조련이다. PK 들어서는 이상위명으로 비장군을 부여받았는데, 악비와 어울리는 위명이지만 천하명장이 더욱 사기인 위명인 데다 악비와 더 잘 어울리는 듯하고, 단어의 뜻만으로는 충용의열 위명도 악비와 잘 어울리니 바꿔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삼국지 14에서는 통솔력 96/무력 92/지력 78/정치력 31/매력 95의 능력치로 11에 비해 매력이 3 떨어지고 통솔력과 무력이 1증가했다. 개성은 황금개성인 투장과 통찰 그리고 호걸, 불굴, 담력을 보유하고 있고 전법으론 단기구, 연노, 대갈, 교란, 구축을 보유하고 있는 매우 좋은 무장이다.

6.2. 영걸전 시리즈

파일:The Legend of Cao Cao Yue Fei.png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 무목악왕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병과는 중기병. 능력치는 무력 94, 지력 79, 통솔 99, 민첩 88, 행운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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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권 「공주전(公主傳)」
진(秦)국대장공주 · 위(魏)국대장공주 · 노국대장공주 · 진(陳)국대장공주 · 서국대장공주 · 빈국대장공주 · 양국대장공주 · 옹국대장공주 · 위(衛)국대장공주 · 형국대장공주 · 장혜국공주 · 승국대장공주 · 주진국대장공주 · 진로국대장공주 · 곤국대장공주 · 연서국대장공주 · 서국대장공주 · 위초국대장공주 · 위국대장공주 · 한위국대장공주 · 주국장공주 · 당국장공주 · 담국장공주 · 서국장공주 · 진국공주 · 진국장공주 · 가덕제희 · 영덕제희 · 순숙제희 · 안덕제희 · 무덕제희 · 수숙제희 · 안숙제희 · 숭덕제희 · 가국공주 · 문안공주 · 화정공주 · 제안공주 · 안강군주 · 기국공주 · 주한국공주
249권 「범질등전(范質等傳)」 250권 「석수신등전(石守信等傳)」
범질 · 왕부 · 위인포 석수신 · 왕심기 · 고회덕 · 한중윤 · 장령탁 · 나언괴 · 왕언승
251권 「한령곤등전(韓令坤等傳)」 252권 「왕경등전(王景等傳)」
한령곤 · 모용연쇠 · 부언경 왕경 · 왕안 · 곽종의 · 이홍신 · 무행덕 · 양승신 · 후장
253권 「절덕의등전(折德扆等傳)」 254권 「후익등전(侯益等傳)」
절덕의 · 풍계업 · 왕승업 · 이계주 · 손행우 후익 · 장종은 · 호언가 · 설회양 · 조찬 · 이계훈 · 약원복 · 조조
255권 「곽숭등전(郭崇等傳)」
곽숭 · 양정장 · 송악 · 상공 · 왕언초 · 장영덕 · 왕전빈 · 강연택 · 왕계도 · 고언휘
256권 「조보전(趙普傳)」 257권 「오정조등전(吳廷祚等傳)」 258권 「조빈등전(曹彬等傳)」
조보(趙普) 오정조 · 이숭구 · 왕인섬 · 초소보 · 이처운 조빈(曹彬) · 반미 · 이초
259권 「장미등전(張美等傳)」
장미 · 곽수문 · 윤숭가 · 유정양 · 원계충 · 최언진 · 장정한 · 황보계명 · 장경
260권 「조한등전(曹翰等傳)」
조한 · 양사 · 당진(黨進) · 이한경 · 유우(劉遇) · 이회충 · 미신 · 전중진 · 유정한 · 최한
261권 「이경등전(李瓊等傳)」
이경(李瓊) · 곽경 · 진승소 · 이만초 · 백중찬 · 왕인호 · 진사양 · 초계훈 · 유중진 · 원언 · 기정훈 · 장탁 · 이만전 · 전경함 · 왕휘
262권 「이곡등전(李穀等傳)」
이곡 · 잠거윤 · 두정고 · 이도(李濤) · 왕역간 · 조상교 · 장석 · 장주 · 변귀당 · 유온수 · 유도 · 변광범 · 유재(劉載) · 정우(程羽)
263권 「장소등전(張昭等傳)」 264권 「설거정등전(薛居正等傳)」
장소(張昭) · 두의(竇儀) · 여여경 · 유희고 · 석희재 · 이목 설거정 · 심륜 · 노다손 · 송기 · 송웅
265권 「이방등전(李昉等傳)」 266권 「전약수등전(錢若水等傳)」
이방(李昉) · 여몽정 · 장제현 · 가황중 전약수 · 소역간 · 곽지 · 이지 · 신중보 · 왕면 · 온중서 · 왕화기
267권 「장굉등전(張宏等傳)」 268권 「시우석등전(柴禹錫等傳)」
장굉 · 조창언 · 진서 · 유식(劉式) · 유창언 · 장계 · 이유청 시우석 · 장손 · 양수일 · 조용 · 주영 · 왕계영 · 왕현
269권 「도곡등전(陶穀等傳)」
도곡 · 호몽 · 왕저 · 왕우(王祐) · 양소검 · 어숭량 · 장담 · 고석
270권 「안간등전(顏衎等傳)」
안간 · 극가구 · 조봉 · 소요 · 고방 · 풍찬 · 변후 · 왕명 · 허중선 · 양극양 · 단사공 · 후척 · 이부(李符) · 위비 · 동추
271권 「마영종등전(馬令琮等傳)」
마영종 · 두한휘 · 장정한 · 오건유 · 채심정 · 주광 · 장훈 · 석희 · 장장영 · 육만우 · 해휘 · 이도(李韜) · 왕진경 · 곽정위 · 조연진 · 보초
272권 「양업등전(楊業等傳)」
양업 · 형한유 · 조광실 · 장휘 · 사초
273권 「이진경등전(李進卿等傳)」
이진경 · 양미 · 하계균 · 이한초 · 곽진(郭進) , 우사진, · 이겸부 · 요내빈 · 동준회 · 하유충 · 마인우
274권 「왕찬등전(王贊等傳)」
왕찬 · 장보속 · 조빈(趙玭) · 노회충 · 왕계훈 · 정덕유 · 장연통 · 양형 · 사규 · 전흠조 · 후지 · 왕문실 · 적수소 · 왕신(王侁) · 유심경
275권 「유복등전(劉福等傳)」
유복 · 안수충 · 공수정 · 담연미 · 원달 · 상사덕 · 윤계륜 · 설초 , 정한 조도, · 곽밀 , 부사양 이빈(李斌), · 전인랑 · 유겸
276권 「유보훈등전(劉保勳等傳)」
유보훈 · 등중정 · 유반 · 공승공 · 송당 · 원곽 · 번지고 , 곽재, · 장병(臧丙) · 서휴복 · 장관 · 진종신 · 장평 · 왕계승 · 윤헌 · 왕빈(王賓) · 안충
277권 「장감등전(張鑒等傳)」
장감(張鑒) · 요탄 · 삭상 · 송태초 · 노지한 · 정문보 · 왕자여 · 유종 · 변곤 · 허양 · 배장 · 우면 , 장적, · 난숭길 · 원봉길 · 한국화 · 하몽 · 신지례
278권 「마전의등전(馬全義等傳)」
마전의 · 뇌덕양 · 왕초(王超)
279권 「왕계충등전(王繼忠等傳)」
왕계충 · 부잠 · 대흥 · 왕한충 · 왕능 · 장응 · 위능 · 진흥 · 허균 · 장진 · 이중귀 · 호연찬 · 유용 · 경전빈 · 주인미
280권 「전소빈등전(田紹斌等傳)」
전소빈 · 왕영 · 양경(楊瓊) · 전수준 · 서흥 · 왕고 · 이중회 · 백수소 · 장사윤 · 이기 · 왕연범
281권 「여단등전(呂端等傳)」 282권 「이항등전(李沆等傳)」 283권 「왕흠약등전(王欽若等傳)」
여단 · 필사안 · 구준 이항 · 왕단 · 상민중 왕흠약 · 임특 · 정위 · 하송
284권 「진요좌등전(陳堯佐等傳)」 285권 「진집중등전(陳執中等傳)」 286권 「노종도등전(魯宗道等傳)」
진요좌 · 송상 진집중 · 유항 · 가창조 · 양적 · 풍증 노종도 · 설규 · 왕서(王曙) · 채제
287권 「양려등전(楊礪等傳)」 288권 「임중정등전(任中正等傳)」
양려 · 송식 · 양사종 · 이창령 · 조안인 · 진팽년 임중정 · 주기 · 정림 · 강준 · 범옹 · 조진(趙稹) · 임포(任布) · 고약눌 · 손면
289권 「고경등전(髙瓊等傳)」 290권 「조이용등전(曹利用等傳)」
고경 · 범정소 · 갈패 조이용 , 손계엄, · 장기(張耆) · 양숭훈 · 하수은 · 적청 , 장옥 손절, · 곽규
291권 「오육등전(吳育等傳)」
오육 · 송수 · 이약곡 · 왕박문 · 왕종
292권 「이자등전(李諮等傳)」
이자 · 정감 · 하후교 · 성도(盛度) · 정도 · 장관 · 정전 · 명호 · 왕요신 · 손변 · 전황
293권 「전석등전(田錫等傳)」
전석 · 왕우칭 · 장영(張詠)
294권 「장우석등전(掌禹錫等傳)」
장우석 · 소신 · 왕수(王洙) · 서언 · 유식(柳植) · 섭관경 · 풍원 · 조사민 · 장석 · 장규 · 양안국
295권 「윤수등전(尹洙等傳)」
윤수 · 손보 · 사강 · 엽청신 · 양찰
296권 「한비등전(韓丕等傳)」
한비 · 사항 · 장무직 · 양호 · 양휘지 · 여문중 · 왕저 · 여우지 · 반신수 · 두호
297권 「공도보등전(孔道輔等傳)」
공도보 · 국영 · 유수 · 조수고 · 곽권 · 단소련
298권 「팽승등전(彭乘等傳)」
팽승 · 혜영 · 매지 · 사마지 · 이급 · 연숙 · 장당 · 유기(劉夔) · 마량 · 진희량
299권 「적비등전(狄棐等傳)」
적비 · 낭간 · 손조덕 · 장약곡 · 석양휴 · 조사형 · 이수 · 장동 · 이사형 · 이부(李溥) · 호칙 · 설안 · 허원 · 종리근 · 손충 · 최역 · 전유 · 시창언
300권 「양해등전(楊偕等傳)」
양해 · 왕연(王沿) · 두기 · 양전(楊畋) · 주담 · 서적(徐的) · 요중손 · 진태소 , 마심 두증, · 이허기 · 장부 · 유헌경 · 진종역 · 양대아
301권 「변숙등전(邊肅等傳)」
변숙 · 매순 · 마원방 · 설전 · 구감 · 양일엄 · 이행간 · 장빈 · 진염 · 이유 · 장병(張秉) · 장택행 · 정향 · 곽진(郭稹) · 조하(趙賀) · 고적(高覿) · 원항 · 서기 · 장지 · 제곽 · 정양
302권 「왕진등전(王臻等傳)」
왕진 · 어주순 · 가암 · 이경(李京) · 여경초 · 오급 · 범사도 · 이현 · 하중립 · 심막
303권 「장온지등전(張昷之等傳)」
장온지 · 위관 · 등종량 · 이방(李防) · 조상 · 당숙 · 장술 · 황진(黃震) · 호순지 · 진관(陳貫) · 범상 · 전경
304권 「주위등전(周渭等傳)」
주위 · 양정(梁鼎) · 범정사 · 유사도 · 왕제 · 방해 · 조영숙 · 유원유 · 양고 · 조급 · 유식(劉湜) · 왕빈(王彬) · 중간
305권 「양억등전(楊億等傳)」 306권 「사필등전(謝泌等傳)」
양억 · 조형 · 유균 · 설앙 사필 · 손하 · 주태부 · 척륜 · 장거화 · 악황목 · 시성무
307권 「교유악등전(喬維岳等傳)」
교유악 · 왕척 · 장옹 · 동엄 · 위정식 · 노염 · 송단 · 능책 · 양담 · 진세경 · 이약졸 · 진지미
308권 「상관정등전(上官正等傳)」
상관정 · 노빈 · 주심옥 · 배제 · 이계선 · 장단 · 장후 · 장길
309권 「왕연덕등전(王延德等傳)」
왕연덕 · 상연신 · 정덕현 · 우연덕 · 위진(魏震) · 장질 · 양윤공 · 진희 · 사덕권 · 염일신 · 근회덕
310권 「이적등전(李迪等傳)」 311권 「안수등전(晏殊等傳)」
이적 · 왕증 · 장지백 · 두연 안수 · 방적 · 왕수(王隨) · 장득상 · 여이간 · 장사손
312권 「한기등전(韓琦等傳)」 313권 「부필등전(富弼等傳)」 314권 「범중엄등전(范仲淹等傳)」
한기 · 증공량 · 진승지 · 오충 · 왕규 부필 · 문언박 범중엄 · 범순인
315권 「한억전(韓億傳)」 316권 「포증등전(包拯等傳)」 317권 「소항등전(邵亢等傳)」
한억 포증 · 오규 · 조변 · 당개 소항 · 풍경 · 전유연
318권 「장방평등전(張方平等傳)」 319권 「구양수등전(歐陽修等傳)」 320권 「채양등전(蔡襄等傳)」
장방평 · 왕공진 · 장변 · 조개(趙槩) · 호숙 구양수 · 유창(劉敞) · 증공 채양 · 여진 · 왕소(王素) · 여정 · 팽사영 · 장존
321권 「정해등전(鄭獬等傳)」
정해 · 진양(陳襄) · 전공보 · 손수 · 풍직 · 여회 · 유술 · 유기(劉琦) · 전의 · 정협
322권 「하담등전(何郯等傳)」
하담(何郯) · 오중복 · 진천 · 왕렵 · 손사공 · 주맹양 · 제회 · 양회 · 유상 · 주경(朱京)
323권 「울소민등전(蔚昭敏等傳)」
울소민 · 고화 · 주미 · 염수공 · 맹원 · 유겸 · 조진(趙振) · 장충 · 범각 · 마회덕 · 안준 · 상보
324권 「석보등전(石普等傳)」 325권 「유평등전(劉平等傳)」
석보 · 장자 · 허회덕 · 이윤칙 · 장항 · 유문질 · 조자 유평 · 임복 · 왕규 · 무영 · 상역 · 경부 · 왕중보
326권 「경태등전(景泰等傳)」
경태 · 왕신(王信) · 장해 · 장충 · 곽은 · 장절(張岊) · 장군평 · 사방 · 노감 · 이위 · 왕과 · 곽자 · 전민 · 시기서 · 강덕여 · 장소원
327권 「왕안석등전(王安石等傳)」
왕안석 · 왕안례 · 왕안국
328권 「이청신등전(李淸臣等傳)」
이청신 · 안도 · 장조(張璪) · 포종맹 · 황리 · 채정(蔡挺) · 왕소(王韶) · 설향 · 장절(章楶)
329권 「상질등전(常秩等傳)」
상질 · 등관 · 이정(李定) · 서단 · 건주보 · 서탁 · 왕광연 · 왕도 · 왕자소 · 하정신 · 진역
330권 「임전등전(任顓等傳)」
임전 · 이참 · 곽신창 · 부구 · 장경헌 · 두변 · 장괴 · 손유 · 허준 · 노사종 · 전상선 · 두순 · 두상 · 사린 · 왕종망 · 왕길보
331권 「손장경등전(孫長卿等傳)」
손장경 · 주항 · 이중사 · 나증 · 마중보 · 왕거경 · 손구 · 장선 · 소심 · 마종선 · 심구 · 이대림 · 여하경 · 조무택 · 정사맹 · 장문 , 진순유 악경 유몽, · 묘시중 · 한지 · 초건중 · 장힐 · 노혁
332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등원발 · 이사중 · 육선 · 조설 · 손로 · 유사웅 · 목연
333권 「양좌등전(楊佐等傳)」
양좌 · 이태(李兌) · 심립 · 장섬 · 장도 · 유충 · 유근 · 염순 · 갈궁 · 장전 · 영인 · 이재 · 요환 · 주경(朱景) · 이종 · 주수륭 · 노사굉 · 단후 · 양중원 · 여양굉 · 반숙
334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서희 , 이직(李稷), · 고영능 · 심기(沈起) · 유이 · 웅본 · 소주 · 도필 · 임광
335권 「충세형전(种世衡傳)」 336권 「사마광등전(司馬光等傳)」 337권 「범진전(范鎭傳)」
충세형 사마광 · 여공저 범진
338권 「소식전(蘇軾傳)」 339권 「소철전(蘇轍傳)」 340권 「여대방등전(呂大防等傳)」
소식 소철 여대방 · 유지 · 소송
341권 「왕존등전(王存等傳)」 342권 「양도등전(梁燾等傳)」
왕존 · 손고(孫固) · 조첨 · 부요유 양도 · 왕암수 · 정옹 · 손영
343권 「원강등전(元絳等傳)」 344권 「손각등전(孫覺等傳)」
원강 · 허장 · 등윤보 · 임희 · 장지기 · 육전 · 오거후 · 온익 손각 · 이상(李常) · 공문중 · 이주 · 선우신 · 고림 · 이지순 · 왕적 · 마묵
345권 「유안세등전(劉安世等傳)」
유안세 · 추호 , 전주 왕회(王回) 증탄, · 진관(陳瓘) · 임백우
346권 「진차승등전(陳次升等傳)」
진차승 · 진사석 · 팽여려 · 여도 · 장정견 · 공결 · 손악 · 진헌 · 강공망 · 진우 · 상안민
347권 「손고등전(孫鼛等傳)」
손고(孫鼛) · 오시 · 이소기 · 오사례 · 왕한지 · 황렴 · 주복 · 장순민 · 성도(盛陶) · 장형 · 안복 · 손승 · 한천 · 공정신 · 정목 · 석단 · 교집중
348권 「부즙등전(傅楫等傳)」
부즙 · 심기(沈畸) , 소복, · 서적(徐勣) · 장여명 · 황보광 · 석공필 , 장극공, · 모주 · 홍언승 · 종전 · 도절부 · 모잠 · 왕조도 · 장장 · 조휼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학질 · 가규 · 두순경 · 유창조 · 노정 · 연달 · 요시 · 양수 · 유순경 · 송수약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묘수 · 왕군만 · 장수약 · 왕문욱 · 주영청 · 유소능 · 왕광조 · 이호 · 화빈 · 유중무 · 곡진 · 유격 · 곽성 · 가암 · 장정(張整) · 장온 · 왕은 · 양응순 · 조륭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조정지 · 장상영 · 유정부 · 하집중 · 정거중 · 안요신 · 장강국 · 주악 · 유규 · 임터 · 관사인 · 후몽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당각 · 이방언 , 여심 설앙 오민 왕안중 왕양 조야 조보(曹輔) 경남중 왕우(王㝢),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하율 · 손부 · 진과정 · 장숙야 · 섭창 · 장각(張閣) · 장근(張近) · 정근 · 우문창령 · 허기 · 정지소 · 공원 · 최공도 · 포유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심수 · 노창형 · 사문관 · 육온 · 황식 · 요우 · 누이 · 심적중 · 이백종 · 왕해 · 하상 · 엽조흡 · 시언 · 최단우 · 유율 · 채의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가역 · 동돈일 · 상관균 · 내지소 · 엽도 · 양외 · 최태부 · 양급 · 여가문 · 이남공 · 동필 · 우책 · 곽지장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유증 · 전휼 · 석예 · 좌부 · 허돈인 · 오집중 · 오재 · 유병 · 송교년 · 강연명 · 채거후 · 유사명 · 장정(蔣靜) · 가위절 · 최언 · 장근(張根) · 임량 · 주상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하관 · 이희정 · 왕운 · 담세적 · 매집례 · 정진(程振) · 유연경 이강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종택 · 조정(趙鼎) 장준(張浚)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주승비 · 여이호 · 범종윤 · 범치허 · 여호문 이광 · 허한 · 허경형 · 장각(張愨) · 장소(張所) · 진화 · 장유(蔣猷)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한세충 악비 유기(劉錡) · 오개 · 오린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이현충 · 양존중 · 곽호(郭浩) · 양정(楊政) 왕덕 · 왕언 · 위승 · 장헌 · 양재흥 · 우고 · 호굉휴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장준(張俊) · 장종안 · 유광세 · 왕연(王淵) · 해원 · 곡단 왕우직 · 이보 · 성민 · 조밀 · 유자우 · 여지 · 호세장 · 정강중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백시중 · 서처인 · 풍해 · 왕륜(王倫) · 우문허중 · 탕사퇴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주탁 · 왕륜(王綸) · 윤색 · 왕지망 · 서부 · 심여구 · 적여문 · 왕서(王庶) · 신병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주변 · 정망지 · 장소(張邵) · 홍호 장구성 · 호전 · 요강 · 이태(李迨) · 조개(趙開)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등숙 · 이병 · 등강 · 장수 · 부직유 · 풍강국 상동 · 장치원 · 설휘언 · 진연 · 위강 · 반량귀 · 여본중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상자인 · 진규(陳規) · 이릉 · 노지원 · 이구(李璆) · 이박 · 왕상 · 왕의 · 진각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위부민 · 유각 · 호순척 · 심해 · 유일지 · 호교수 · 기숭례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장의 · 한초주 · 진공보 · 장학 · 호송년 · 조훈(曹勛) · 이직(李稙) · 한공예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하주 · 왕차옹 · 범동 · 양원 · 누소 · 구룡여연 · 설필 · 나여즙 · 소진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범여규 · 오표신 · 왕거정 · 안돈복 · 황귀년 · 정우(程瑀) · 장천 · 홍의 · 조규(趙逵)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장도 · 황중 · 손도부 · 증기 · 구도 · 이미손 진준경 · 우윤문 · 신차응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진강백 · 양극가 · 왕철 · 엽의문 · 장패 · 엽옹 · 엽형 갈필 · 전단례 · 위기 · 주규 · 시사점 · 소수 · 공무량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유공 · 왕린 · 황조순 · 왕대보 · 금안절 · 왕강중 · 이언영 · 범성대 황흡 · 왕응진 · 왕십붕 · 오패 · 진량한 · 두신로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주집고 · 왕희여 · 진양우 · 이호 · 진탁 · 호기 · 당문약 · 이도(李燾) 우무 · 사악 · 안사로 · 원추 · 이춘 · 유의봉 · 장효상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이형 · 왕자중 · 가원 · 장강 · 장대경 · 채광 · 막몽 · 주종 · 유장 · 심작빈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주필대 · 유정 · 호진신 조여우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팽귀년 · 황상 · 나점 · 황도 , 주남, 임대중 · 진규(陳騤) · 황보 · 첨체인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호굉 · 하담(何澹) · 임율 · 고문호 · 진자강 · 정병 · 경당 · 사심보 · 허급지 · 양여가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누약 · 이대성 · 임희이 · 서응룡 · 장하 · 왕원 · 왕질 · 육유 · 방신유 · 왕남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사호 · 왕회(王淮) · 조웅 · 권방언 · 정송 · 진겸 · 장암 서의 · 오렵 · 항안세 · 설숙사 · 유갑 · 양보 · 유광조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여단례 · 이벽 · 구화 · 예사 · 우문소절 · 이번(李蘩) 정각 · 왕정수 · 구여 · 고등 · 누인량 · 송여위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왕신(王信) · 왕대유 · 원섭 · 오유승 · 유중홍 · 이상(李祥) · 왕개 · 송덕지 · 양대전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신기질 · 하이 · 유재(劉宰) · 유약(劉爚) · 시중행 · 이맹전 진민 · 장조(張詔) · 필재우 · 안병 · 양거원 · 이호의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조방 · 가섭 · 호재흥 · 맹종정 · 장위 왕약해 · 장운 · 유약(柳約) · 이순신 · 손봉길 · 장영(章穎) · 상비경 · 유영 · 서방헌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이종면 · 원보 · 유불 · 왕안거 최여지 · 홍자기 · 허혁 · 진거인 · 유한필 두범 · 양간 · 전시 · 장복 · 여오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오창예 · 왕강 · 진복 · 왕정 고정자 · 고사득 · 장충서 · 당린 누기 · 심환 · 조언약 · 범응령 · 서경손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탕숙 · 장중진 · 모자재 · 주비손 · 구양수도 맹공 · 두고 · 왕등 · 양섬 · 장유효 · 진함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조여담 · 조여당 · 조희관 · 조언눌 · 조선상 · 조여환 · 조필원 사미원 · 정청지 · 사숭지 · 동괴 · 엽몽정 · 마정란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부백성 · 갈홍 · 증삼복 · 황주약 · 원소 · 위진(危稹) · 정공허 · 나필원 · 왕수(王遂)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오연 · 여개 · 왕입신 · 상사벽 · 호영 · 냉응징 · 조숙원 · 왕만 · 마광조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교행간 · 범종 · 유사 · 조규 · 사방숙 오잠 · 정원봉 · 강만리 · 왕약 · 장감(章鑑) · 진의중 · 문천상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선증 · 설극 · 진귀의 · 증종룡 · 정성지 · 이명복 · 추응룡 · 여천석 · 허응룡 · 임략 · 서영수 · 별지걸 · 유백정 · 김연 · 이성전 · 진위 · 최복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왕백대 · 정채 · 응요 · 서청수 · 이증백 · 왕야 · 채항 · 장반 · 마천기 · 주습 · 요호신 · 대경가 · 피룡영 · 심염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양동 · 요희득 · 포회 · 상정 · 진종례 · 상무 · 가현옹 · 이정지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임훈 · 유재소 · 허흔 · 응맹명 · 증삼빙 · 서교 · 도정 · 정필 · 우대년 · 진중미 · 양성대 · 이지효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오영(吳泳) · 서범 · 이소 · 왕매 · 사미공 · 진훈 · 조여주 · 이대동 · 황순 · 양대이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육지지 · 서록경 · 조봉룡 · 조여등 · 손몽관 · 홍천석 · 황사옹 · 서원걸 · 손자수 · 이백옥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유응룡 · 반방 · 홍근 · 조경위 · 풍거비 · 서림 · 서종인 · 위소덕 · 진개 · 양문중 · 사방득
426권 「순리전(循吏傳)」
진정 · 장륜 · 소엽 · 최립 · 노유개 · 장일 · 오준로 · 조상관 · 고부 · 정사맹 · 한진경 · 엽강직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주돈이 · 정호 · 정이 · 장재 · 소옹 · 유현 · 이유 · 사량좌 · 유초 · 장역 · 소병 · 윤돈 · 양시 · 나종언 · 이동 · 주희 · 장식 · 황간 · 이번(李燔) · 장흡 · 진순 · 이방자 · 황호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섭숭의 · 형병 · 손기 · 왕소소 · 공유 · 공의 · 최송 · 윤졸 · 전민 · 신문열 · 이각 · 최이정 · 이지재 · 호탄 · 가동 · 유안(劉顔) · 고변 · 손복 · 석개 · 호원 · 유희수 · 임개 · 이구(李覯) · 하섭 · 왕회(王回) · 주요경 · 왕당 · 진양(陳暘) · 소백온 · 유저 · 홍흥조 · 고항 · 정대창 · 임지기 · 임광조 · 양만리 · 유자휘 · 여조겸 · 채원정 · 육구령 · 육구연 · 설계선 · 진부량 · 엽적 · 대계 · 채유학 · 양태지 · 범충 · 주진 · 호안국 · 진량 · 정초 · 이도전 · 정형 · 유청지 · 진덕수 · 위료옹 · 요덕명 · 탕한 · 하기 · 왕백 · 서몽신 · 이심전 · 엽미도 · 왕응린 · 황진(黃進)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송백 · 양주한 · 주앙 · 조인기 · 정기 · 곽욱 · 마응 · 화현 · 풍길 · 고적(高頔) · 이도(李度) · 한부 · 국상 · 송준 · 유개 · 하후가정 · 나처약 · 안덕유 · 전희 · 진충 · 오숙 · 황이간 · 서현 · 구중정 · 증치요 · 조간 · 요현 · 이건중 · 홍담 · 노진 · 최준도 · 진월 · 목수 · 석연년 · 소관 · 소순흠 · 윤원 · 황항 · 황감 · 양파 · 안태초 · 곽충서 · 매요신 · 강휴복 · 소순 · 장망지 · 왕봉 · 손당경 · 당경 · 문동 · 양걸 · 하주 · 유경 · 포유 · 황백사 · 황정견 · 조보지 · 진관(秦觀) · 장뢰 · 진사도 · 이치 · 유서 · 왕무구 · 채조 · 이격비 · 여남공 · 곽상정 · 미패 · 유선 · 예도 · 이공린 · 주방언 · 주장문 · 유엄 · 진여의 · 왕조 · 엽몽득 · 정구 · 장얼 · 한구 · 주돈유 · 갈승중 · 웅극 · 장즉지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강보예 · 마수 · 동원형 · 조근 · 소함 · 진전서 · 첨량신 · 이약수 · 유겹 · 부찰 · 양진 · 장극전 · 장확 · 주소 · 사항 · 손익(孫翊) · 곽안국 · 이연 · 이막 · 서규 · 진구 · 조불시 · 조령성 · 당중 · 서휘언 · 상자소 · 양방예 · 증고 · 유급 · 정양 · 여유성 · 곽영 · 한호 · 구양순 · 장충보 · 이언선 · 조립 · 왕충식 · 당기 · 이진 · 진구도 · 최종 · 임충지 · 등무실 · 위행가 · 염진 · 조사가 · 역청 · 호빈 · 범왕 · 마준 · 양진중 · 고가 · 조우문 · 진인 · 허표손 · 진륭지 · 왕익 · 이성지 · 진원규 · 장순 · 범천순 · 우부 · 변거의 · 진소 · 윤옥 · 이불 · 윤곡 · 조묘발 · 당진(唐震) · 조여석 · 조회 · 조양순 · 강재 · 마기 · 밀우 · 장세걸 · 육수부 · 서응표 · 진문룡 · 등득우 · 장각(張珏) · 고민 · 경사충 · 왕기 · 장흥조 · 곽호(郭滸) · 오혁 · 이익 · 조사륭 · 진쉬 · 황우 · 학중련 · 유유보 · 우호 · 위언명 · 유사영 · 적흥 · 주필 · 공즙 · 이긍 · 능당좌 · 양수중 · 강예 · 곽선 · 사마몽구 · 임공재 · 황개 · 손익(孫益) · 왕선 · 오초재 · 이성대 · 도거인 · 고영년 · 국사복 · 손소원 · 증효서 · 조백진 · 왕사언 · 설경 · 손휘 · 송창조 · 이정(李政) · 강수 · 유선 · 굴견 · 정담 · 요흥 · 장기(張玘) · 왕공 · 유태 · 손봉 · 유화원 · 호당로 · 왕주 · 유안(劉晏) · 정진(鄭振) · 맹언경 · 고담 · 연만부 · 설양현 · 당민구 · 왕사도 · 조시상 · 조희계 · 유자천 · 여문신 · 종계옥 · 경세안 · 정보 · 미립 · 후핍 · 왕효충 · 고응송 · 장선옹 · 황신 · 진달 · 소뇌룡 · 추붕 · 유사소 · 진동 · 구양철 · 마신 · 여조검 · 양굉중 · 화악 · 등약수 · 진보 · 모겸지 · 서도명
456권 「효우전(孝友傳)」
이린 · 서승규 · 유효충 · 여승 · 나거통 · 제득일 · 이한징 · 형신류 · 허조 · 호중요 · 진긍 · 홍문무 · 역연경 · 동도명 · 곽종 · 고흔 · 주태 · 성상 · 진사도 · 방강 · 방천우 · 유빈 · 번경온 · 영서민 · 기위 · 하보지 · 이빈(李玭) · 후의 · 왕광제 · 강백 · 구승순 · 상진 · 두의(杜誼) · 요종명 · 등중화 · 모안여 · 이방(李訪) · 주수창 · 후가 · 신적중 · 학인 · 지점 · 등종고 · 심선 · 소경문 · 태형 · 앙흔 · 조백심 · 팽유 · 모순 · 양경(楊慶) · 진종 · 곽의 · 신세녕 · 구여령 · 왕주(王珠) · 안후 · 장백위 · 채정(蔡定) · 정기
457·458·459권 「은일·탁행전(隱逸卓行傳)」
척동문 · 진단 · 충방 · 만적 · 이독 · 위야 · 형돈 · 임포(林逋) · 고역 · 서복 · 공민 · 하군 · 왕초(王樵) · 장유(張愈) · 황희 · 주계명 · 대연 · 진열 · 손모 · 유역 · 강잠 · 연서 · 장찰 · 유여상 · 양효본 · 등고보 · 우문지소 · 오영(吳瑛) · 송강어옹 · 두생 · 순창선인 · 남안옹 · 장여 · 서중행 · 소운경 · 초정 · 왕충민 · 유면지 · 호헌 · 곽옹 · 유우(劉愚) · 위섬지 · 안세통 · 유정식 · 소곡 · 서적(徐積) · 증숙경 · 유영일
460권 「열녀전(列女傳)」
주아 · 학절아 · 진당전 · 여양자 · 동팔나 · 한희맹 · 모석석
461·462권 「방기전(方伎傳)」
조수기 · 왕처눌 · 묘훈 · 마소 · 초지란 · 한현부 · 사서 · 주극명 · 유한 · 왕회은 · 조자화 · 풍문지 · 홍온 · 소징은 · 정소미 · 조자연 · 하란서진 · 시통현 · 견서진 · 초연 · 지언 · 회병 · 허희 · 방안시 · 전을 · 지연 · 곽천신 · 위한진 · 왕노지 · 왕자석 · 임령소 · 황보탄 · 왕극명 · 사의도인 · 손수영
463·464·465권 「외척전(外戚傳)」
두심기 · 하영도 · 왕계훈 · 유지신 · 유문유 · 유미 · 곽숭인 · 양경종 · 부유충 · 시종경 · 장요좌 · 왕이영 · 이소량 · 이용화 · 이준욱 · 조일 · 고준유 · 상전범 · 장돈례 · 임택 · 맹충후 · 위연 · 전침 · 형환 · 반영사 · 오익 · 이도(李道) · 정흥예 · 양차산
466·467·468·469권 「환자전(宦者傳)」
두신보 · 왕인예 · 왕계은 · 이신복 · 유승규 · 염승한 · 진한 · 주회정 · 장귀숭 · 장계능 · 위소흠 · 석지옹 · 등수은 · 양수진 · 한수영 · 남계종 · 장유길 · 감소길 · 노수근 · 왕수규 · 이헌 · 장무칙 · 송용신 · 왕중정 · 이순거 · 석득일 · 양종길 · 유유간 · 이상(李祥) · 진연 · 풍세녕 · 이계화 · 고거간 · 정방 · 소이섭 · 뇌윤공 · 염문응 · 임수충 · 동관 · 양사성 · 양전(楊戩) · 소성장 · 남규 · 풍익 · 마거위 · 진원 · 감변 · 왕덕겸 · 관례 · 동송신
470권 「영행전(佞幸傳)」
미덕초 · 후막진리용 · 조찬 · 왕보 · 주면 · 왕계선 · 증적 · 장설 · 왕변 · 강특립
471·472·473·474권 「간신전(姦臣傳)」
채확 · 형서 · 여혜경 · 장돈 · 증포 · 안돈 · 채경 · 조양사 · 장각(張覺) · 곽약사 · 황잠선 · 왕백언 · 진회 · 묵기설 · 한탁주 · 정대전 · 가사도
475·476·477권 「반신전(叛臣傳)」
장방창 · 유예 · 묘부 · 두충 · 오희 · 이전
478권 「남당세가(南唐世家)」 479권 「서촉세가(西蜀世家)」 480권 「오월세가(吳越世家)」
이경(李景) 맹창 전홍숙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유창(劉鋹) 유계원 주행봉 · 고보융 · 유종효 · 진홍진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한통 · 이균 · 이중진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서하 · 고려 · 교지( 정조 전여조 이조 진조) · 대리 · 점성 · 진랍 · 포감 · 막려 · 삼불제 · 도파 · 발니 · 주련 · 단미류 · 천축국 · 우전 · 고창 · 회골 · 대식국 · 층단국 · 구차 · 사주 · 불름국 · 유구국 · 정안국 · 발해 · 일본 · 당항 · 토번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계동만 · 매산동만 · 성주만 · 휘주만 · 남단주만 · 무수주만 · 황원주만 · 여동만 · 환주만 · 서남이 · 여주만 · 공부천 · 풍파만 · 보새만 · 미강만 · 동만 · 석문부 · 남광만 · 보패만 · 무주부 · 유주만 · 검주만 · 시주만 · 고주만 · 육수만 · 준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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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相州 湯陰縣. [2] 출처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나온 키이다. [3] 사후 60여 년 뒤 권신이자 재상이었던 한탁주가 북벌을 준비하면서 추존을 주도했다. 아마도 고향이 같은 허난성 안양시라서 더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후대에 개정되지 않은 걸 보면 당대 여론도 부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4]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위치한 산. 따라서 북방 야만족들을 격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5] 1178년 송효종이 무목(武穆)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1225년 송이종이 시호를 충무(忠武)라고 바꾸었다. 참고로 중국 인물 중 충무(공/후)란 시호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료 한세충, 제갈량 곽자의 등이 있다. 그리고 시법에 따르면 무목 역시 무관의 시호로는 충무, 충장과 함께 최고위급의 시호이다. [6] 특히 한족 [7] 이순신 역시 난중일기에서 감찰을 명분 삼아 수군 지휘관들을 징계하던 유몽인을 진회 같다며 비난했으며 제갈량과 악비와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기록하기도 했다. 악비 역시 역사에 남은 충신이다보니 제갈량처럼 이순신이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8] 출처 [9] 현대의 허난 성 안양 탕음현 [10] 악화가 살아남아 악비가 8살이었을 때에 재회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11] 악비의 외조부 요대옹(姚大翁)이 고용했다. [12] 수호전 주동(朱仝)과 혼동하지 말자. 애당초 한자부터 다르다. [13] 오늘날 우한시 우창구. 악주는 양양과 함께 나중에 남송 정권의 또다른 요충지가 된다. 서쪽으로는 사천, 북쪽으로는 경호 방면, 동쪽으로는 양회 방면을 원조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14] 그러나 사실 이 악비의 북벌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악비의 후손이 쓴 일종의 행장인 금타졸편(金佗稡编)과 금타속편(金佗续编)에 기초하기 때문에 거의 믿을 수 없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주선진 전투만 봐도 그 출처는 악비의 후손이 쓴 행장과 송사 악비 열전 정도가 전부이며 앞의 기록들 외에는 과연 주선진 전투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정말로 존재했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조차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기록들을 보면 금나라와 송나라는 이 당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고, 주선진 전투는 설령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단순히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주선진 전투의 병력에 대해서도 악비군은 5백 명인데 금나라의 군사를 10만 명으로 잡아 엄청난 대첩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만약 이 묘사가 사실이라면 이런 대단한 전투를 치러 악비가 이겨 카이펑의 코앞에서 금나라의 주력을 박살내고도 송나라는 이후 수도를 수복하려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고 다른 사가들은 하다못해 주선진 전투에서 이겼는데 송나라군이 카이펑으로 왜 진군하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없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송나라가 카이펑을 되찾을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을 그냥 무시해버렸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15] 진회의 가족과 관련된 의혹으로는 진회의 양자인 진희(秦熺)가 사서를 편찬하며 부친의 악행을 대부분 삭제했다는 것이 있다. 그와 별개로 진회는 죽어서도 수난을 당했는데, 남송 말기의 명장 맹공(孟珙)이 진회의 무덤을 지나갈 때마다 휘하의 병사들에게 똥과 오줌을 싸라고 지시를 했고 병사들 또한 진회를 증오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던지라 거리낌 없이 진회의 무덤가에 똥과 오줌을 매일같이 싸대서 그의 무덤은 취총(냄새나는 무덤)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얻었다. [16] 오죽했으면 후손인 진대사(자는 간천)조차도 "사람들은 송 왕조 이후로 "회"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악비의 무덤 앞에서 "진"이라는 성 때문에 참담해 하는구나!" 라면서 자신의 조상인 진회를 매우 깠다. [17] 최고의 시법은 충(忠), 무(武), 장(壯), 목(穆) 네 글자 중에 구성된 '충무-충장-장목-무목'인데, 악비는 덕분에 무관의 최고급 시호인 충무(忠武)와 문관의 최고급 시호인 무목(武穆)을 모두 받게 되었다. [18] 효종의 즉위하자, 악비의 자손들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계속 상소했으며 효종은 이를 받아들여 악비를 신원하고 후손들에게 관작을 내렸다. [19] 万俟卨, 여기서 万俟는 만사가 아닌 墨棋(mo qi)와 같은 발음으로 묵기라 읽는다. 진회를 도와준 간신. 후에 일을 잘못해 쫓겨나 유배 생활을 했다가 진회 사후 재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고향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묵기라는 성씨를 모두 개성(改姓)해버렸고 그 성씨는 현존하지 않는다. [20] 원래 항전파였으나 나중에 악비를 배신했다. [21] 그러나, 진회의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는 야사이며 고종이 진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악비에 대한 처형을 밀어붙였다는 설도 있다. [22] 공안들도 충신인 악비를 존경하고 한간인 진회를 증오하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즉 침을 뱉고 오물을 투척한 사람들을 체포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큰 잘못도 아니니만큼 대충 요식행위로 가볍게 연행하는 수준으로 그치는 것. [23] 사실 악왕묘는 전란 중에 여러 번 파괴되었다가 1918년 중화민국 시절 다시 재건된 것으로 역사적 가치는 높지 않다. [24]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국제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도리어 민족주의를 배격하는 편이다. 1920년에 이뤄진 외몽골의 독립은 중국 입장에서는 영토 상실이었지만, 유명한 좌익 문필가이자 고전학자였던 곽말약이 독립을 찬양했을 정도였다. 사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장아이핑 같은 민족주의 성향의 당원들은 이를 상당히 아쉬워 했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주도한 일이라 대놓고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공산당의 개국공신인 장아이핑 장군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참모들에게 "외몽골은 원래 중국땅이었어"라고 말했다가 홍위병들에게 "봉건주의 반동분자"으로 비판받아 두들겨 맞고 숙청당했고, 5년간 감방에서 지내다가 석방되었으나 후유증으로 인해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었다. 반대로 장제스 중화민국은 끝까지 몽골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장제스가 죽을 때까지도 몽골 공화국의 영토를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25] 정부에 의해 검열되는 바이두 백과에서는 진회를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간신중의 하나로 기술하고 있다. "是中国历史上著名的奸臣之一" 중국언론의 한 기사에서는 진회를 민국시절에 일본에 붙은 한간 왕징웨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 [26] 이러한 주장은 중국 정부의 사관에 반발을 품는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소수 민족사까지도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중국 정부의 입장상 소수 민족사를 다룰 때 갈등 요소(정복 왕조의 침공이나 민족 갈등으로 인한 충돌 등의 역사)는 회피하려 하고 소수 민족 정권에 우호적인 서술도 다소 기입하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 불만을 품고, '정부가 하다하다 이젠 진회같은 놈까지도 재평가한다'라는 식의 허수아비 공격을 하는 것이다. [27] 일부 역사학자들은 진회의 대금 유화책을 송나라의 한계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하며, 이러한 연구 결과를 보고, 진회를 옹호한다며 오독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학술적인 연구를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별다른 근거 없이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비난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한 일이다. [28] 남송의 이심전(李心傳, 1166∼1243)이 남송 초기의 대요를 적은 역사책. 200권. 1127년부터 1166년까지 40년간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였다. [29] 휘종, 흠종, 고종 등 3조(朝)의 치세를 기록한 책으로 12세기 중 약 50년간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간의 전쟁과 화평의 교섭관계를 기록하였다. 남송의 서몽신(徐夢莘)이 자료 200여 종에 입각하여 편년체로 편집한 250권짜리 저서이다. 1194년에 완성되었다. [30] 1059~1128. 북송 말~남송 초의 장군으로 "강을 건너라!("過河! 過河!)" 하는 유언이 유명하다. 하남에서 송군을 이끌고 개봉을 사수하며 금군의 공세를 수없이 막아낸 장군이다. 북벌의 의지를 죽을 때까지 버린 적이 없던 터라 틈만 나면 고종에게 북벌과 개봉 환도를 간언했으나, 고종과 주화파들은 종택의 의견을 묵살했다. 다나카 요시키 창룡전에서 해당 고사를 얘기하면서 " 제갈량과 더불어 '한 사람의 죽음에 전군이 통곡한' 사례"라며 극찬한 바 있다. 악비 또한 종택에게 발탁받아 휘하에서 활동한 바 있다. 또한 중국식 전통 화퇴를 처음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31] 충사도(种师道) 할아버지 충세형, 아버지 충악과 함께 충가장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32] 오래 전부터 겁쟁이 고종과 종택을 질시한 황잠선 · 왕백언 등 주화파가 개봉에 환도하지 않아 북벌을 그르쳤다는 '통설'이 대세였다. 그러나 이 시기 금군은 송군의 하남 방어선을 일부 돌파하여 남양까지 진군한 상태에 여러 차례 개봉의 성벽을 두들기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금군 수뇌부가 개봉에 환도한 고종을 노려 우회기동을 성공시키고 개봉을 뒤에서 치면, 고종은 도망도 못 치고 꼼짝 없이 부황과 황형처럼 될 판이었다. 그래서 종택의 개봉 환도 요구가 무모했고 고종이 신중하게 대처했다는 지적도 있다. 종택 사후에 금군이 송군의 방어를 뚫고 고종을 양주까지 몰아붙여 붙잡기 직전까지 갔던 일을 생각하면, 고종이 혜안을 보여준 것으로 평할 수도 있다. 다만, 종택은 황제가 환도해야 나날이 어려워지는 방어가 수월해지고 군대의 사기가 올라 하남을 사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개봉 환도를 둘러싼 갈등은 고종에게만 책임을 묻기 보다는 종택과 고종 사이의 의견 · 인식 차이로 일어났다고 봐야 할 터이다. [33]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금군의 남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은 물론 심지어 중국 대륙의 남쪽인 절강성까지 순식간에 쳐들어갔다. 심지어 훗날 몽골군조차 그렇게 빨리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지는 못했다. [34] 당시 송나라 사람 사이에서 영토를 빼앗고 굴욕을 준 철천지원수인 금과 화의하겠다는 주화파는 매국노와 거의 동등한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35] 같은 시기에 침략자들에 맞서 항전하던 동로마 제국 또한, 십자군의 도움으로 아나톨리아 중부의 이코니움까지 수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선이 너무 넓어지고 유지할 여력이 없어 포기해야 했다. 이후로 동로마 제국군은 멸망하는 그날까지 이코니움에 이르지 못했다. [36] "진심으로 충성해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뜻이다. [37] 덤으로 한세충 특별출연했다. [38] 단, 여기서 원문 언급은 악왕묘가 아닌 악묘로, 악비가 아닌 오악(태산, 화산, 숭산, 형산, 항산)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39] 임진왜란 초기 탄금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신립과 관련해서도 이 비슷한 야사가 전한다. [40] ...였다고는 하나 소설 자체에 병맛스런 전개가 많은 편이라 오히려 정사를 뼈대로 하고 적당한 오리지널 요소와 소설의 요소들을 아주 약간 섞었다고 하는 게 다 타당하다. [41] 칭기즈 칸이 한세충과 대결을 벌리는데 신분 설정이 훗날 황제가 될 쿠빌라이 칸의 아버지라서 쉴드가 자동으로 쳐지는가 하면, 악비가 죽자 금나라가 침공하는데 악비의 아들의 반격으로 금나라 본토까지 쳐들어가서 항복을 받아낸다는 등등 초월적인 전개가 보인다. [42] 고숙, 양대안, 진경지, 위지공, 진경, 이세적, 진양옥, 정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