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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2:24:16

원숭환

명사(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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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color: #800000"
1·2·3권 「태조기(高祖紀)」 4권 「공민제기(恭閔帝紀)」 5·6·7권 「성조기(成祖紀)」
주원장 주윤문 주체
8권 「인종기(仁宗紀)」 9권 「선종기(宣宗紀)」 10·11·12권 「영종·경제기(英宗景帝紀)」
주고치 주첨기 주기진 · 주기옥
13·14권 「헌종기(憲宗紀)」 15권 「효종기(孝宗紀)」 16권 「무종기(武宗紀)」
주견심 주우탱 주후조
17·18권 「세종기(世宗紀)」 19권 「목종기(穆宗紀)」 20·21권 「신종·광종기(神宗光宗紀)」
주후총 주재후 주익균 · 주상락
22권 「희종기(熹宗紀)」 23·24권 「장렬제기(莊烈帝紀)」
주유교 주유검
※ 25권 ~ 99권은 志에 해당. 100권 ~ 112권은 表에 해당. 명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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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f0c420> 113·114권 「후비전(后妃傳)」 ||
효자고황후 · 손귀비 · 이숙비 · 곽영비 · 효민양황후 · 인효문황후 · 소헌귀비 · 공헌현비 · 성효소황후 · 선묘현비 · 곽애 · 선묘현비 · 공양장황후 · 효장예황후
효숙황후 · 정혜경황후 · 오폐후 · 효정순황후 · 효목황후 기씨 · 효혜황후 · 공숙귀비 · 효강경황후 · 효정의황후 · 효결숙황후 · 장폐후 · 효열황후 · 효각황태후
효의장황후 · 효안황후 · 효정황후 · 효단현황후 · 효정황황후 · 공각귀비 · 효원정황후 · 효화황태후 · 효순황태후 · 이강비 · 효안황후 · 장유비 · 장열민황후
공숙귀비
115권 「종실전(宗室傳)」
주표 · 주우원
116·117·118·119·120권 「제왕전(諸王傳)」
주상 · 주강 · 주숙 · 주정 · 주부 · 주재 · 주기 · 주단 · 주춘 · 주백 · 주계 · 주영(朱楧) · 주식 · 주전(朱㮵) · 주권 · 주폐 · 주혜 · 주모 · 주영(朱楹) · 주경(朱桱) · 주동 · 주이 · 주남 · 주웅영 · 주윤통 · 주윤견 · 주윤희 · 주문규(朱文奎) · 주문규(朱文圭) · 주고후 · 주고수 · 주첨용 · 주첨선 · 주첨점 · 주첨은 · 주첨오 · 주섬강 · 주첨개 · 주첨게 · 주첨연 · 주견린 · 주견순 · 주견주 · 주견택 · 주견준 · 주견치 · 주견패 · 주견제 · 주우극 · 주우륜 · 주우빈 · 주우휘 · 주우운 · 주우저 · 주우팽 · 주우순 · 주우추 · 주우해 · 주후위 · 주재기 · 주재수 · 주재로 · 주재려 · 주재궤 · 주재숙 · 주익익 · 주익령 · 주익류 · 주상서 · 주상순 · 주상치 · 주상호 · 주상윤 · 주상영 · 주상부 · 주유학 · 주유즙 · 주유모 · 주유허 · 주유전 · 주자연 · 주자육 · 주자경 · 주자랑 · 주자훤 · 주자형 · 주자소 · 주자환 · 주자찬
121권 「공주전(公主傳)」
태원장공주 · 조국장공주 · 임안공주 · 영국공주 · 숭녕공주 · 안경공주 · 여령공주 · 회경공주 · 대명공주 · 복청공주 · 수춘공주 · 남강공주 · 영가공주 · 함산공주 · 여양공주 · 보경공주 · 복성공주 · 경양공주 · 강도공주 · 남평군주 · 영안공주 · 영평공주 · 안성공주 · 함녕공주 · 상녕공주 · 가흥공주 · 경도공주 · 청하공주 · 진정공주 · 덕안공주 · 연평공주 · 덕경공주 · 순덕공주 · 상덕공주 · 중경공주 · 가선공주 · 순안공주 · 숭덕공주 · 광덕공주 · 의흥공주 · 융경공주 · 가상공주 · 고안공주 · 인화공주 · 영강공주 · 덕청공주 · 장태공주 · 선유공주 · 태강공주 · 영복공주 · 영순공주 · 장녕공주 · 선화공주 · 상안공주 · 사유공주 · 영안공주 · 귀선공주 · 가선공주 · 봉래공주 · 태화공주 · 수양공주 · 영령공주 · 서안공주 · 연경공주 · 영창공주 · 수녕공주 · 정락공주 · 운화공주 · 운몽공주 · 영구공주 · 선거공주 · 태순공주 · 향산공주 · 천대공주 · 회숙공주 · 영덕공주 · 수평공주 · 낙안공주 · 곤의공주 · 장평공주 · 소인공주
122권 「곽자흥등전(郭子興等傳)」 123권 「진우량등전(陳友諒等傳)」 124권 「확곽첩목아등전(擴廓帖木兒等傳)」
곽자흥 · 한림아 진우량 · 장사성 · 방국진 · 명옥진 확곽첩목아 · 진우정 · 파잡라와이밀
125권 「서달등전(徐達等傳)」 126권 「이문충등전(李文忠等傳)」 127권 「이선장등전(李善長等傳)」
서달 · 상우춘 이문충 · 등유 · 탕화 · 목영 이선장 · 왕광양
128권 「유기등전(劉基等傳)」 129권 「풍승등전(馮勝等傳)」
유기 · 송렴 · 엽침 · 장일 풍승 · 부우덕 · 요영충 · 양경 · 호미
130권 「오량등전(吳良等傳)」
오량 · 강무재 · 정덕흥 · 경병문 · 곽영 · 화운룡 · 한정 · 구성 · 장룡 · 오복 · 호해 · 장혁 · 화고 · 장전 · 하진
131권 「고시등전(顧時等傳)」
고시 · 오정 · 설현 · 곽흥 · 진덕 · 왕지 · 매사조 · 김조흥 · 당승종 · 육중형 · 비취 · 육취 · 정우춘 · 황빈 · 엽승
132권 「주량조등전(朱亮祖等傳)」
주량조 · 주덕흥 · 왕필 · 남옥 · 사성 · 이신
133권 「요영안등전(廖永安等傳)」
요영안 · 유통해 · 호대해 · 경재성 · 장덕승 · 조덕승 · 상세걸 · 모성 · 호심 · 손흥조 · 조량신 · 복영
134권 「하문휘등전(何文輝等傳)」
하문휘 · 엽왕 · 무대형 · 채천 · 왕명 · 영정 · 김흥왕 · 화무 · 정옥 · 곽운
135권 「진우등전(陳遇等傳)」 136권 「도안등전(陶安等傳)」
진우 · 엽태 · 범상 · 송사안 · 곽경상 · 양원호 · 원홍도 · 공극인 도안 · 첨동 · 주승 · 최량 · 도개 · 증로 · 임앙 · 이원명 · 악소봉
137권 「유삼오등전(劉三吾等傳)」
유삼오 · 안연 · 오백종 · 오침 · 계언량 · 송눌 · 조숙 · 이숙정 · 유숭 · 나복인 · 손여경
138권 「진수등전(陳修等傳)」
진수(陳修) · 양사의 · 주정 · 양정(楊靖) · 단안인 · 설상 · 당탁 · 개제
139권 「전당등전(錢唐等傳)」
전당 · 한의가 · 소기 · 풍견 · 여태소 · 이사로 · 엽백거 · 정사리 · 주경심 · 왕박 · 장형
140권 「전당등전(錢唐等傳)」
위관 · 도후중 · 유사훤 · 왕종현 · 여문수 · 왕관 · 도동 · 노희 · 청문승
141권 「제태등전(齊泰等傳)」
제태 · 황자징 · 방효유 · 연자녕 · 유대방 · 탁경 · 진적 · 경청 · 호윤 · 왕도(王度)
142권 「철현등전(鐵鉉等傳)」
철현 · 포소 · 진성선 · 장병 · 송충 · 마선 · 구능 · 장륜(張倫) · 안백위 · 왕성 · 요선 · 진언회
143권 「왕간등전(王艮等傳)」
왕간 · 요승 · 주시수 · 정본립 · 황관 · 왕숙영 · 황월 · 왕량 · 진사현 · 정통 · 고외 · 고현녕 · 왕진(王璡) · 주진 · 우경선
144권 「성용등전(盛庸等傳)」 145권 「요광효등전(姚廣孝等傳)」
성용 · 평안 · 하복 · 고성 요광효 · 장옥 · 주능 · 구복 · 담연 · 왕진(王真) · 진형
146권 「장무등전(張武等傳)」
장무(張武) · 진규 · 맹선 · 정형 · 서충 · 곽량 · 조이 · 장신 · 서상 · 이준 · 손암 · 진욱 · 진현 · 장흥 · 진지 · 왕우
147권 「해진등전(解縉等傳)」 148권 「양사기등전(楊士奇等傳)」 149권 「건의등전(蹇義等傳)」
해진 · 황회 · 호광 · 김유자 · 호엄 양사기 · 양영 · 양부 건의 · 하원길
150권 「욱신등전(郁新等傳)」
욱신 · 조공 · 김충 · 이경 · 사규 · 고박 · 진수(陳壽) · 유계호 · 유진 · 양지 · 우겸(虞謙) · 여승 · 탕종
151권 「여상등전(茹瑺等傳)」
여상 · 엄진직 · 장담 · 왕둔 · 정사 · 곽자 · 여진 · 이지강 · 방빈 · 오중 · 유관
152권 「동륜등전(董倫等傳)」
동륜 · 의지 · 추제 · 주술 · 진제 · 왕영 · 전습례 · 주서(周敍) · 가잠 · 공공순
153권 「송례전(宋禮等傳)」 154권 「장보등전(張輔等傳)」
송례 · 진선 · 주침 장보 · 황복 · 유준(劉儁) · 여의 · 진흡 · 이빈 · 유승 · 양명 · 왕통
155권 「송성등전(宋晟等傳)」
송성 · 설록 · 유영 · 주영(朱榮) · 비환 · 담광 · 진회(陳懷) · 장귀 · 임례 · 조안 · 조보 · 유취
156권 「오윤성등전(吳允誠等傳)」
오윤성 · 설빈 · 오성(吳成) · 김충 · 이영 · 모승 · 초례 · 모충 · 화용 · 나병충
157권 「김순등전(金純等傳)」
김순 · 장본 · 곽돈 · 곽진 · 정진 · 시차 · 유중부 · 장봉 · 주선 · 양정(楊鼎) · 황호 · 호공진 · 진준 · 임악 · 반영 · 하시정
158권 「황종재등전(黃宗載等傳)」
황종재 · 고좌 · 단민 · 장창(章敞) · 오눌 · 위기 · 노목 · 경구주 · 헌예 · 황공소
159권 「웅개등전(熊概等傳)」
웅개 · 진일 · 이의 · 진일 · 이당 · 가전 · 왕우 · 최공 · 유자(劉孜) · 이간 · 원걸 · 팽의 · 모봉 · 하훈 · 고명 · 양계종
160권 「왕창등전(王彰等傳)」
왕창 · 위원(魏源) · 김렴 · 석박 · 나통 · 나기 · 장선 · 장붕 · 이유
161권 「주신등전(周新等傳)」
주신 · 이창기 · 진사계 · 응이평 · 임석 · 황종 · 진본심 · 팽욱 · 하시 · 황윤옥 · 양찬 · 유실 · 진선 · 하인 · 진장 · 장병 · 송단의
162권 「윤창륭등전(尹昌隆等傳)」
윤창륭 · 경통 · 대륜 · 진조 · 유구 · 진감 · 종동 · 장륜 · 요장 · 예경 · 양선(楊瑄)
163권 「이시면등전(李時勉等傳)」 164권 「추집등전(鄒緝等傳)」
이시면 · 진경종 · 유현(劉鉉) · 형양 · 임한 · 사탁 · 노탁 추집 · 익겸 · 황택 · 범제 · 요양 · 좌정 · 조개 · 유위 · 단우 · 장소 · 고요
165권 「도성등전(陶成等傳)」 166권 「한관등전(韓觀等傳)」
도성 · 진민 · 정선 · 왕득인 · 엽정 · 오기 · 모길 · 임금 · 곽서 · 강앙 한관 · 산운 · 소수 · 방영 · 이진 · 왕신 · 팽륜 · 구반 · 장우
167권 「조내등전(曹鼐等傳)」 168권 「진순등전(陳循等傳)」
조내 · 광야 · 왕좌 · 손상 · 원빈 진순 · 왕문 · 강연 · 진문 · 만안 · 유후 · 유길 · 윤직
169권 「고곡등전(高穀等傳)」 170권 「우겸전(于謙傳)」 171권 「왕기등전(王驥等傳)」
고곡 · 호영 · 왕직 우겸 왕기(王驥) · 서유정 · 양선(楊善) · 왕월
172권 「나형신등전(羅亨信等傳)」
나형신 · 후진 · 양녕 · 왕래 · 손원정 · 주감 · 양신민 · 장기 · 마근 · 정신 · 백규 · 장찬 · 공용 · 등정찬 · 왕식 · 유병
173권 「양홍등전(楊洪等傳)」
양녕 · 석정 · 곽등 · 주겸 · 손당 · 범광
174권 「사소등전(史昭等傳)」
사소 · 무개 · 허귀 · 주현 · 구신 · 왕새 · 노감 · 유녕 · 팽청 · 강한 · 안국 · 항웅
175권 「위청등전(衞靑等傳)」
위청 · 동흥 · 하홍 · 유옥 · 구월 · 신영 · 조웅 · 풍정 · 장준 · 양예
176권 「이현등전(李賢等傳)」 177권 「왕고등전(王翱等傳)」
이현 · 여원 · 악정 · 팽시 · 상로 · 유정지 왕고(王翱) · 연부 · 왕횡 · 이병 · 요기(姚夔) · 왕복 · 임총 · 엽성
178권 「항충등전(項忠等傳)」 179권 「나륜등전(羅倫等傳)」
항충 · 한옹 · 여자준 · 주영(朱英) · 진굉 나륜 · 장무 · 황중소 · 장창(莊昶) · 추지 · 서분
180권 「장녕등전(張寧等傳)」
장녕 · 왕휘 · 모홍 · 구홍 · 이삼 · 위원(魏元) · 강진 · 왕서(王瑞) · 이준 · 왕규 · 탕내 · 강관 · 강홍 · 조린 · 팽정 · 방반 · 여헌 · 엽신 · 호헌 · 장홍지 · 굴신 · 왕헌신
181권 「서부등전(徐溥等傳)」 182권 「왕서등전(王恕等傳)」
서부 · 구준 · 유건 · 사천 · 이동양 · 왕오 · 유충 왕서(王恕) · 마문승 · 유대하
183권 「하교신등전(何喬新等傳)」
하교신 · 팽소 · 주경(周經) · 경유 · 예악 · 민규 · 대산
184권 「주홍모등전(周洪謨等傳)」
주홍모 · 양수진 · 장원정 · 부한 · 장승 · 완성 · 부규 · 유춘 · 오엄 · 고청 · 유서
185권 「이민등전(李敏等傳)」
이민 · 가준 · 황불 · 장열 · 사종 · 증감 · 양경 · 서각 · 이개 · 황가 · 왕홍유 · 총란 · 오세충
186권 「한문등전(韓文等傳)」
한문 · 장부화 · 양수수 · 허진 · 옹태 · 진수(陳壽) · 번형 · 웅수 · 반번 · 호부 · 장태 · 장내 · 왕경(王璟) · 주흠
187권 「하감등전(何鑒等傳)」
하감 · 마중석 · 육완 · 홍종 · 진금(陳金) · 유간 · 주남 · 마호
188권 「유천등전(劉蒨等傳)」
유천 · 여충 · 조우 · 대선 · 육곤 · 장흠(蔣欽) · 주새 · 탕예경 · 허천석 · 장사륭 · 장문명 · 범로 · 장흠(張欽) · 주광 · 석천주
189권 「이문상등전(李文祥等傳)」
이문상 · 손반 · 호관 · 나교 · 엽쇠 · 대관 · 황공 · 육진 · 하양승 · 하준
190권 「양정화등전(楊廷和等傳)」 191권 「모징등전(毛澄等傳)」
양정화 · 양저 · 장면 · 모기 · 정이 모징 · 왕준(汪俊) · 오일붕 · 주희주 · 하맹춘 · 풍희 · 서문화 · 설혜
192권 「양신등전(楊愼等傳)」
양신 · 왕사 · 장충 · 유제 · 안반 · 장한경 · 장원 · 모옥 · 왕시가 · 정본공 · 장왈도 · 양회 · 장찬 · 곽남
193권 「비굉등전(費宏等傳)」
비굉 · 적란 · 이시 · 고정신 · 엄눌 · 이춘방 · 진이근 · 조정길 · 고의
194권 「교우등전(喬宇等傳)」
교우 · 손교 · 임준 · 김헌민 · 진금(秦金) · 조황 · 추문성 · 양재 · 유린 · 장요(蔣瑤) · 왕정상
195권 「왕수인전(王守仁傳)」 196권 「장총등전(張璁等傳)」
왕수인 장총 · 계악 · 방헌부 · 하언
197권 「석서등전(席書等傳)」 198권 「양일청등전(楊一淸等傳)」
석서 · 곽도 · 웅협 · 황종명 · 황관 양일청 · 왕경(王瓊) · 팽택 · 모백온 · 옹만달
199권 「이월등전(李鉞等傳)」
이월 · 왕헌 · 호세녕 · 이승훈 · 왕이기 · 범총 · 왕방서 · 정효
200권 「요막등전(姚鏌等傳)」
요막 · 장정 · 오문정 · 채천우 · 첨영 · 유천화 · 양수례 · 장악 · 곽종고 · 조시춘
201권 「도염등전(陶琰等傳)」
도염 · 왕진(王縝) · 이충사 · 오정거 · 방양영 · 왕광 · 왕월 · 서문 · 장방기 · 한방기 · 주금 · 오악
202권 「요기등전(廖紀等傳)」
요기(廖紀) · 왕시중 · 주기옹 · 당룡 · 왕고(王杲) · 주용 · 문연 · 유인 · 손응규 · 섭표 · 이묵 · 주연 · 가응춘 · 장영명 · 호송 · 조병연
203권 「정악등전(鄭岳等傳)」
정악 · 유옥 · 왕원석 · 구천서 · 당주 · 반진 · 이중 · 구양탁 · 도해 · 반훈 · 여경 · 구양중 · 주상(朱裳) · 진찰 · 손무 · 왕의(王儀) · 증균
204권 「진구주등전(陳九疇等傳)」 205권 「주환등전(朱紈等傳)」
진구주 · 적붕 · 손계로 · 증선 · 정여기 · 양수겸 · 상대절 · 해일귀 · 양선(楊選) 주환 · 장경 · 호종헌 · 조방보 · 이수 · 당순지
206권 「마록등전(馬錄等傳)」
마록 · 정계충 · 장규 · 정일붕 · 당추 · 두란 · 엽응총 · 해일귀 · 육찬 · 소경방 · 유세양 · 위양필
207권 「등계증등전(鄧繼曾等傳)」
등계증 · 주제 · 양언 · 유안 · 설간 · 양명(楊名) · 곽홍화 · 유세룡 · 장선 · 포절 · 사정천 · 왕여령 · 양사충
208권 「장근등전(張芹等傳)」
장근 · 왕응진 · 소명봉 · 제지란 · 원종유 · 허상경 · 고제 · 장교 · 여산 · 위상신 · 여관 · 팽여실 · 정자벽 · 척현 · 유회 · 전미 · 홍원 · 주사겸 · 안경
209권 「양최등전(楊最等傳)」
양최 · 풍은 · 양작 · 주이 · 유괴 · 심속 · 심연 · 양계성 · 양윤승
210권 「상교등전(桑喬等傳)」
상교 · 사유 · 하유백 · 서학시 · 여여진 · 왕종무 · 주면 · 조금 · 오시래 · 장충 · 동전책 · 추응룡 · 임윤
211권 「마영등전(馬永等傳)」 212권 「유대유등전(俞大猷等傳)」
마영 · 양진 · 왕효 · 주상문 · 마방 · 하경 · 심희의 · 석방헌 유대유 · 척계광 · 유현(劉顯) · 이석 · 장원훈
213권 「서개등전(徐階等傳)」 214권 「양박등전(楊博等傳)」
서계 · 고공 · 장거정 양박 · 마림 · 유례건 · 왕정(王廷) · 갈수례 · 근학안
215권 「왕치등전(王治等傳)」
왕치 · 구양일경 · 주홍조 · 첨앙비 · 낙문례 · 정이순 · 진오덕 · 왕문휘 · 유분용
216권 「오산등전(吳山等傳)」
오산 · 육수성 · 구경순 · 전일준 · 황봉상 · 여계등 · 풍기 · 왕도(王圖) · 옹정춘 · 유응추 · 당문헌 · 이등방 · 채의중 · 공내 · 나유의 · 요희맹 · 허사유 · 고석주
217권 「왕가병등전(王家屏等傳)」 218권 「신시행등전(申時行等傳)」 219권 「장사유등전(張四維等傳)」
왕가병 · 진우폐 · 심리 · 우신행 · 이정기 · 오도남 신시행 · 왕석작 · 심일관 · 방종철 · 심확 장사유 · 마자강 · 허국 · 조지고 · 장위 · 주갱
220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1권 「원홍유등전(袁洪愈等傳)」
원홍유 · 왕정첨 · 곽응빙 · 경정향 · 왕초 · 위시양 · 학걸 · 조참로 · 장맹남 · 이정 · 정빈
222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3권 「성응기등전(盛應期等傳)」 224권 「엄청등전(嚴清等傳)」
성응기 · 주형 · 반계순 · 만공 · 오계방 · 왕종목 · 유동성 · 서정명 엄청 · 송훈 · 육광조 · 손농 · 진유년 · 손비양 · 채국진 · 양시교
225권 「장한등전(張瀚等傳)」 226권 「해서등전(海瑞等傳)」
장한 · 왕국광 · 양몽룡 · 양외· 이재(李戴) · 조환 · 정계지 해서 · 구순 · 여곤 · 곽정역
227권 「방상붕등전(龐尚鵬等傳)」
방상붕 · 송의망 · 장악 · 이재(李材) · 육수덕 · 소름 · 가삼근 · 이이 · 주홍모 · 소언 · 손유성 · 사걸 · 곽유현 · 만상춘 · 종화민 · 오달가
228권 「위학증등전(魏學曾等傳)」 229권 「유대등전(劉臺等傳)」
위학증 · 이화룡 유대 · 부응정 · 왕용급 · 오중행 · 조용현 · 애목 · 심사효
230권 「채시정등전(蔡時鼎等傳)」 231권 「고헌성등전(顧憲成等傳)」
채시정 · 만국흠 · 요신 · 탕현조 · 녹중립 · 양순 · 강사창 · 마맹정 · 왕약림 고헌성 · 고윤성 · 전일본 · 우공겸 · 사맹린 · 설부교 · 안희범 · 유원진 · 엽무재
232권 「위윤정등전(魏允貞等傳)」
위윤정 · 왕국 · 여무형 · 이삼재
233권 「강응린등전(姜應麟等傳)」
강응린 · 진등운 · 나대굉 · 이헌가 · 맹양호 · 주유경 · 왕여견 · 왕학증 · 장정관 · 번옥형 · 사정찬 · 양천민 · 하선
234권 「노홍춘등전(盧洪春等傳)」 235권 「왕여훈등전(王汝訓等傳)」
노홍춘 · 이무회 · 이기(李沂) · 낙우인 · 마경륜 · 유강 · 대사형 · 조학정 · 옹헌상 · 서대상 왕여훈 · 여무학 · 장양몽 · 맹일맥 · 하사진 · 왕덕완 · 장윤의 · 추유연
236권 「이식등전(李植等傳)」 237권 「부호례등전(傅好禮等傳)」
이식 · 강동지 · 탕조경 · 김사형 · 왕원한 · 손진기 · 정원천 · 이박 · 하가우 부호례 · 강지례 · 포견첩 · 전대익 · 풍응경 · 오종요 · 오보수 · 화옥
238권 「이성량등전(李成梁等傳)」 239권 「장신등전(張臣等傳)」
이성량 · 마귀 장신 · 동일원 · 두동 · 소여훈 · 달운 · 관충병 · 시국주 · 진백우
240권 「엽향고등전(葉向高等傳)」 241권 「주가모등전(周嘉謨等傳)」
엽향고 · 유일경 · 한광 · 주국조 · 하종언 · 손여유 주가모 · 장문달 · 왕응교 · 왕기(王紀) · 손위 · 종우정 · 진도형
242권 「진방첨등전(陳邦瞻等傳)」
진방첨 · 필강무 · 소근고 · 백유 · 정소 · 적봉충 · 홍문형 · 진백우 · 동응거 · 임재 · 주오필 · 장광전
243권 「조남성등전(趙南星等傳)」 244권 「양련등전(楊漣等傳)」
조남성 · 추원표 · 손신행 · 고반룡 · 풍종오 양련 · 좌광두 · 위대중 · 주조서 · 원화중 · 고대장 · 왕지채
245권 「주기원등전(周起元等傳)」 246권 「만조천등전(滿朝薦等傳)」
주기원 · 요창기 · 주순창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만경 만조천 · 강병담 · 후진양 · 왕윤성
247권 「유정등전(劉綎等傳)」 248권 「매지환등전(梅之煥等傳)」
유정 · 이응상 · 진린 · 등자룡 · 마공영 매지환 · 유책 · 이약성 · 경여기 · 안계조 · 이계정 · 방진유 · 서종치
249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0권 「손승종전(孫承宗傳)」
주섭원 · 이운 · 왕삼선 · 채복일 손승종
251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2권 「양사창등전(楊嗣昌等傳)」
이표 · 유홍훈 · 전용석 · 성기명 · 하여총 · 서광계 · 문진맹 · 장덕경 · 방악공 양사창 · 오성(吳甡)
253권 「왕응웅등전(王應熊等傳)」 254권 「교윤승등전(喬允升等傳)」
왕응웅 · 장지발 · 설국관 · 정국상 · 진연 · 위조덕 교윤승 · 조우변 · 손거상 · 조광 · 진우정 · 정삼준 · 이일선 · 장위
255권 「유종주등전(劉宗周等傳)」 256권 「최경영등전(崔景榮等傳)」
유종주 · 황도주 최경영 · 황극찬 · 필자엄 · 이장경 · 유지봉
257권 「장학명등전(張鶴鳴等傳)」
장학명 · 동한유 · 조언 · 왕흡 · 양정동 · 웅명우 · 장봉익 · 진신갑 · 풍원표
258권 「허예경등전(許譽卿等傳)」
허예경 · 화윤성 · 위정윤 · 모우건 · 오집어 · 장정신 · 황소걸 · 부조우 · 강채 · 웅개원 · 첨이선 · 탕개원 · 성용 · 진룡정
259권 「양호등전(楊鎬等傳)」
양호 · 원응태 · 웅정필 · 원숭환 · 조광변
260권 「양학등전(楊鶴等傳)」
양학 · 진기유 · 웅문찬 · 연국사 · 정계예 · 정숭검 · 소첩춘 · 여응계 · 고두추 · 장임학
261권 「노상승등전(盧象昇等傳)」 262권 「부종룡전(傅宗龍等傳)」
노상승 · 유지륜 · 구민앙 부종룡 · 왕교년 · 양문악 · 손전정
263권 「송일학등전(宋一鶴等傳)」
송일학 · 풍사공 · 임일서 · 채무덕 · 위경원 · 주지풍 · 진사기 · 용문광 · 유가인 · 유지발
264권 「하봉성등전(賀逢聖等傳)」
하봉성 · 남거익 · 주사박 · 여유기 · 왕가정 · 초원부 · 이몽진 · 송사양 · 마희 · 왕도순 · 전시진
265권 「범경문등전(范景文等傳)」
범경문 · 예원로 · 이방화 · 왕가언 · 맹조상 · 시방요 · 능의거
266권 「마세기등전(馬世奇等傳)」
마세기 · 오인징 · 주봉상 · 유이순 · 왕위(汪偉) · 오감래 · 왕장 · 진량모 · 진순덕 · 신가윤 · 성덕 · 허직 · 김현
267권 「마종빙등전(馬從聘等傳)」 268권 「조문조등전(曹文詔等傳)」
마종빙 · 장백경 · 송공 · 범숙태 · 고명형 · 서견 · 녹선계 조문조 · 주우길 · 황득공
269권 「애만년등전(艾萬年等傳)」
애만년 · 이비 · 양구주 · 진우왕 · 후량계 · 장령 · 맹여호 · 호대위 · 손응원 · 강명무 · 우세위 · 후세록 · 유국능
270권 「마세룡등전(馬世龍等傳)」 271권 「하세현등전(賀世賢等傳)」
마세룡 · 하호신 · 심유용 · 장가대 · 노흠 · 진양옥 · 용재전 하세현 · 동중규 · 나일관 · 만계 · 조솔교 · 관유현 · 하가강 · 황룡 · 김일관
272권 「김국봉전(金國鳳等傳)」 273권 「좌양옥등전(左良玉等傳)」
김국봉 · 조변교 · 유조기 좌양옥 · 고걸 · 조관
274권 「사가법등전(史可法等傳)」 275권 「장신언등전(張愼言等傳)」
사가법 · 고홍도 · 강왈광 장신언 · 서석기 · 해학룡 · 고탁 · 좌무제 · 기표가
276권 「주대전등전(朱大典等傳)」
주대전 · 장국유 · 장긍당 · 증앵 · 주계조 · 여황 · 왕서전 · 노진비 · 하개 · 웅여림 · 전숙락 · 심진전
277권 「원계함등전(袁繼鹹等傳)」
원계함 · 김성 · 구조덕 · 심유룡 · 진자룡 · 후동증 · 양문총 · 진잠부 · 심정양 · 임여저 · 정위홍
278권 「양정린등전(楊廷麟等傳)」
양정린 · 만원길 · 곽유경 · 첨조항 · 진태래 · 왕양정 · 증형응 · 게중희 · 진자장 · 장가옥 · 진방언 · 소관생
279권 「여대기등전(呂大器等傳)」
여대기 · 문안지 · 번일형 · 오병 · 왕석곤 · 도윤석 · 엄기항 · 주천린 · 장효기 · 양외지 · 오정육
280권 「하등교등전(何騰蛟等傳)」
하등교 · 구식사
281권 「순리전(循吏傳)」
진관 · 방극근 · 오리 · 요흠 · 고두남 · 여언성 · 사성조 · 오상 · 사자양 · 황신중 · 하승 · 패병이 · 유맹옹 · 만관 · 엽종인 · 왕원 · 적부복 · 이신규 · 손호 · 장종련 · 이기(李驥) · 왕영 · 이상 · 조예 · 조등 · 증천 · 범충 · 주제 · 범희정 · 유강 · 단견 · 용사언 · 정적 · 전탁 · 당간 · 탕소은 · 서구사 · 방숭 · 장순 · 진유학
282·283·284권 「유림전(儒林傳)」
범조간 · 사응방 · 왕극관 · 양인(梁寅) · 조방 · 진모 · 설선 · 호거인 · 채청 · 나흠순 · 조단 · 오여필 · 진진성 · 여남 · 소보 · 양렴 · 유관 · 마리 · 위교 · 주영(周瑛) · 반부 · 최선 · 하당 · 당백원 · 황순요 · 진헌장 · 누량 · 하흠 · 진무열 · 담약수 · 추수익 · 전덕홍 · 왕기(王畿) · 구양덕 · 나홍선 · 오제 · 하정인 · 왕시괴 · 허부원 · 우시희 · 등이찬 · 맹화리 · 내여덕 · 등원석 · 공희학 · 안희혜 · 증질수 · 공문례 · 맹희문 · 중어폐 · 주면 · 정접도 · 정극인 · 장문운 · 소계조 · 주천 · 주서(朱墅)
285·286·287·288권 「문원전(文苑傳)」
양유정 · 호한 · 소백형 · 왕면 · 대량 · 위소 · 장이녕 · 조훈 · 서일기 · 조총겸 · 도종의 · 원개 · 고계 · 왕행 · 손분 · 왕몽 · 임홍 · 왕불 · 심도 · 섭대년 · 유부 · 장필 · 장태 · 정민정 · 나기 · 저권 · 이몽양 · 하경명 · 서정경 · 변공 · 고린 · 정선부 · 육심 · 왕정진 · 이렴 · 문징명 · 황좌 · 가유기 · 왕신중 · 고숙사 · 진속 · 전여성 · 황보효 · 모곤 · 사진 · 이반룡 · 왕세정 · 귀유광 · 이유정 · 서위 · 도륭 · 왕치등 · 구구사 · 당시승 · 초횡 · 황휘 · 진인석 · 동기창 · 원굉도 · 왕유검 · 조학전 · 왕지견 · 애남영 · 장부
289·290·291·292·293·294·295권 「충의전(忠義傳)」
화운 · 왕개 · 손염 · 모로 · 왕강 · 왕의(王禕) · 웅정 · 역소종 · 금팽 · 황보빈 · 장영(張瑛) · 왕정 · 만침 · 주헌 · 양충 · 오경 · 곽은 · 손수 · 허규 · 황굉 · 송이방 · 왕면 · 진문시 · 왕부 · 전순 · 주부 · 손당 · 두괴 · 황천 · 왕덕 · 왕일중 · 소몽양 · 장진덕 · 동진륜 · 공만록 · 관양상 · 서조강 · 희문윤 · 주만년 · 장요(張瑤) · 하천구 · 반종안 · 장전 · 하정괴 · 고방좌 · 최유수 · 정국창 · 당환순 · 이헌명 · 장춘 · 염생두 · 왕조곤 · 손사미 · 교약문 · 장병문 · 언윤소 · 길공가 · 형국새 · 장진수 · 등번석 · 장혼방 · 장윤등 · 장광규 · 이중정 · 방국유 · 하승광 · 방유 · 윤몽오 · 노겸 · 공원상 · 왕신 · 사기언 · 양지인 · 왕국훈 · 여홍업 · 장소등 · 왕도(王燾) · 장가징 · 서상경 · 완지전 · 학경춘 · 장극검 · 서세순 · 무대열 · 전조징 · 성이항 · 안일유 · 반홍 · 진예포 · 유진지 · 이승운 · 관영걸 · 장유세 · 왕세수 · 허영희 · 이정좌 · 노세임 · 유인 · 하섭 · 조흥기 · 하통춘 · 진미 · 심길신 · 노학고 · 진만책 · 허문기 · 곽이중 · 최문영 · 서학안 · 풍로운 · 채도헌 · 장붕익 · 유희조 · 왕손란 · 정양주 · 황세청 · 양훤 · 당시명 · 단복흥 · 간인서 · 사오교 · 도임 · 축만령 · 진빈 · 왕징준 · 정태운 · 하복 · 장나준 · 김육동 · 탕문경 · 허담 · 왕교동 · 장계맹 · 유사두 · 왕여정 · 윤신 · 고기훈 · 장요(張耀) · 미수도 · 경정록 · 석상진 · 서도흥 · 유정표
296·297권 「효의전(孝義傳)」
정렴 · 서윤양 · 전영 · 요비 · 구탁 · 최민 · 주완 · 오홍 · 주후 · 유근(劉謹) · 이덕성 · 심덕사 · 사정가 · 권근 · 조신 · 국상 · 왕준(王俊) · 석내 · 사오상 · 주오 · 정영 · 부즙 · 양성장 · 사용 · 하경 · 왕원(王原) · 황새 · 귀월 · 하린 · 손청 · 유헌 · 용사언 · 유자(兪孜) · 최감 · 당엄 · 구서 · 장균 · 왕재복 · 하자효 · 아기 · 조중화 · 왕세명 · 이문영 · 공금 · 양통조 · 장청아
298권 「은일전(隱逸傳)」
장개복 · 예찬 · 서방 · 양항 · 진회(陳洄) · 양인(楊引) · 오해 · 유민 · 양보 · 손일원 · 심주 · 진계유
299권 「방기전(方伎傳)」
활수 · 갈건손 · 여복 · 예유덕 · 주한경 · 왕리 · 주전(周顚) · 장중 · 장삼봉 · 원공 · 대사공 · 성인 · 황보중화 · 동인 · 오걸 · 능운 · 이시진 · 주술학 · 장정상 , 유연연,
300권 「외척전(外戚傳)」
진공 · 마공 · 여본 · 마전 · 장기(張麒) · 호영(胡榮) · 손충 · 오안 · 전귀 · 왕천 · 주능 · 왕진(王鎭) · 만귀 · 소희 · 하유 · 진만언 · 방예 · 진경행 · 이위 · 왕위(王偉) · 정승헌 · 왕승 · 유문병 · 장국기 · 주규
301·302·303권 「열녀전(列女傳)」
정월아 · 제아 · 정금노 · 노가랑 · 탕혜신 · 묘총 · 만의전 · 왕묘봉 · 당귀매 · 양태노 · 정은아 · 두묘선 · 초낭맹 · 호귀정 · 오길고 · 서아장 · 양옥영 · 우봉랑 · 예미옥 · 고형와 · 항숙미
304·305권 「환관전(宦官傳)」
정화 · 김영 · 왕진(王振) · 조길상 · 회은 · 왕직(汪直) · 양방 · 하정 · 이광 · 장종 · 유근 · 장영(張永) · 곡대용 · 이방 · 풍보 · 장경 · 진증 · 진구 · 왕안 · 위충현 · 왕체건 · 최문승 · 장이헌 · 고기잠 · 왕승은 · 방정화
306권 「엄관전(閹黨傳)」
초방 · 장채 · 고병겸 · 최정수 · 유지선 · 조흠정 · 왕소휘 · 곽유화 · 염명태 · 가계춘 · 전이경
307권 「영행전(佞倖傳)」
기강 · 문달 · 이매성 · 계요 · 강빈 · 육병 · 소원절 · 도중문 · 단조용 · 공가패 · 호대순 · 전옥 · 왕금 · 고가학 · 성단명 · 주융희
308권 「간신전(奸臣傳)」 309권 「유적전(流賊傳)」
호유용 · 진녕 · 진영 · 엄숭 · 주연유 · 온체인 · 마사영 이자성 · 장헌충
310권 「호광토사전(湖廣土司傳)」
311·312권 「사천토사전(四川土司傳)」
313·314·315권 「운남토사전(雲南土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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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C420><colcolor=#ffffff> 원숭환
袁崇煥
파일:명나라 말기 장군 원숭환 袁崇煥.jpg
시호 영상(瀛祥)[1]
이름 원숭환(袁崇煥)
원소(元素)
자여(自如)
출생 1584년 6월 6일
대명 광동성 광주부 동관현
사망 1630년 9월 22일 (향년 46세)
대명 북경 순천부
복무 및 지휘 명군(明軍)
관직 병부 직방사주사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
계료독사
참전 영원성 전투, 기사의 변

1. 개요2. 생애
2.1. 등용2.2. 활약
2.2.1. 영원성 전투2.2.2. 영원(寧遠)•금주(錦州) 전투
2.3. 해임과 복귀2.4. 조선에 있었던 모문룡을 참수하다2.5. 기사년의 변(己巳之變, 기사지변, 기사만족대겁략)2.6. 반간계2.7. 최후
3. 죽음 이후4. 평가
4.1. 명장 논쟁4.2. 모문룡 처형4.3. 성격
5.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명나라 말기 격렬했던 명청전쟁에서 맹활약한 문신이자 명장[2]이다. 시호 청나라에서 추시한 영상(瀛祥)이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대승한 이후 명나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던 누르하치 영원성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의 공격[3]마저 막아내는 등 무너져 가던 명나라를 지탱했으나 누명을 쓰고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명실상부한 명나라 최후의 명장이었으며 후세 역사가들이 그의 죽음이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라고 평가할 정도이다. 현대에는 서로마 제국 최후의 명장들에 원숭환을 빗대서 명나라의 스틸리코 또는 명나라의 아에티우스[4]라고도 부른다.

2. 생애

2.1. 등용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조선의 대규모 연합군을 대파한 사르후 대전이 일어났던 만력 47년, 3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렇듯 그는 본래 문관이었으나, 명나라에서는 군부의 지나친 힘을 견제하기 위해 문관들도, 총병이 무관이면 부총병은 반드시 문관인 식으로 전쟁 및 군사 업무에 투입되었기에[5] 문관이 무관으로 전환하거나 무관에 가까운 업무를 맡는 일은 비일비재했다.[6][7]

또한 그는 본래 평상시에도 군사적 업무에 관해 토론하길 즐긴 일종의 밀덕후였다.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지나가는 군사들이나 군졸들을 보면 항상 변방의 정세를 물었고 친구와는 군사적인 일을 잠도 안 자고 토론하며 즐길 정도였다고 한다.

어사 후순(侯恂)은 원숭환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쓸 만하다고 판단해 병부(兵部)의 직방사주사(職方司主事)로 임명했다. 그래서 1622년부터 병주에 부임했는데 혼자 위장을 하고 적의 진영을 직접 염탐하는 충공깽 수준의 일을 벌이고는 돌아와 말했다.[8]
"병마와 군량을 주신다면 저 한 명으로 충분히 산해관(山海關)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9]
그리하여 산해관을 맡게 된 원숭환은 바로 떠나지 않고 고향을 돌며 병사를 모은 후 산해관에 입성했다.

2.2. 활약

2.2.1. 영원성 전투

중국에서는 영원지전(寧遠之戰) 혹은 영원대첩(寧遠大捷)이라고 부른다.

당시 명나라는 무려 120~300만 명 수준의 대군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요동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후금군에게 패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세를 반전시킨 것이 요동경략사 웅정필이었다. 웅정필은 신종 만력제에게
“안에서 신을 흔들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신의 발목을 잡지 말아 주십시오.”
라며 다짐을 받고서 요동경략이 된 이후 후금군이랑 전면전을 하면 못 이기니까 이른바 <삼방포치책>을 도입하여 180,000명의 대병력을 모아 이를 조련하고, 언제 후금군이 쳐들어와도 알 수 있도록 각기 연락 체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산해관의 방비를 강화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으며 수군으로 찔러서 후금을 상대하자라는 전략으로 후금과의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누르하치 역시 이를 보고 경계하여 결국 1년 동안 명군은 성공적으로 후금군을 막아냈다. 그러나 웅정필을 밀어주고 국방 부분에서의 사고력은 정상이었던 만력제가 붕어하고, 뒤이어 즉위한 광종 태창제 역시 29일만에 붕어하여, 목수질에만 열중하고 정치 교육을 받지 못했던 희종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이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즉 요동순무 왕화정이 명군이 후금으로 쳐들어가면
몽골에서 400,000명의 대군이 호응하고, 이영방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모문룡이 가도에서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금으로 쳐들어간다.
는 말도 안되는 소문을 믿고서
"60,000명만 주면 후금을 멸망시키겠다."
라며 상관인 웅정필을 흔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웅정필은 꿈과 같은 소리라며 디스했지만 왕화정은 계속 고집을 부리면서 웅정필의 방책을 따르지 않다가 결국 믿었던 자기 부하에게 배신당하고, 누르하치에게 털리면서 요동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이 참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왕화정에게 있었고, 웅정필은 단지 명목상의 상관이었을 뿐이었지만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환관 위충현의 참소로 웅정필은 1625년,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당하고 그 머리는 변방 각지로 돌려져 전시되었다.[10] 이렇게 당시 누르하치의 기세는 파죽지세나 다름이 없었고, 요동의 거의 대부분이 후금의 손에 있었다.

결국 요동 지역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나서 명나라의 방어는 산해관에 집중되었다. 당시 만리장성의 끝인 산해관은 말 그대로 명나라 방어의 핵심이었고, 열리지 않으면 반드시 지킬 수 있지만 열리기만 하면 명나라는 바로 끝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원숭환은 이런 산해관의 위험 부담을 좀 더 줄이기 위해 산해관 밖 200리 지점인 영원(寧遠)에 성을 만들자고 주청을 올렸지만 이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원숭환은 굴하지 않고 계속 주청을 올렸고,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이 원숭환의 의견을 존중해 이는 드디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후 요동원수가 된 원숭환은 영원성(寧遠城)을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영원성이 만들어지자, 명나라는 기존의 산해관에서 200리나 앞에 방어선을 하나 더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유럽에서 수입하던 홍이포의 자체 제작에 막 성공했는데, 원숭환은 그 위력에 주목하여 서광계가 산해관에 설치해 놓았던 홍이포들을 영원성 요지에 재배치하고, 대포를 다룰 수 있는 화포 전문가를 불러서 포병들의 교육에 힘썼다. 이 선택은 정말 탁월한 것이었는데, 당시 명군은 후금의 막강한 기병을 제압하는데 여러모로 힘이 들었으나[11] 홍이포의 강력한 화력 덕분에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군사들의 훈련이 이루어지고 영원성도 완성되자 원숭환은 자신감을 가지고 1624년 14,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요서 일대를 순찰했다. 이때 원숭환군의 기세는 대단해서 명나라 군대를 밥으로 알던 후금군도 이때만큼은 전혀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원숭환은 손승종에게 금주(錦州), 송산(松山), 대릉하(大陵河), 소릉하(小凌河) 등의 요새에 군사를 배치해 요서 방위를 더 단단하게 굳힐 것을 건의했고, 손승종이 여기 흔쾌히 응하여 병력을 파견하여 요서 일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때 다시 한 번 위기가 있었다.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였던 위충현이 자기 말을 잘 안 듣는 손승종을 몰아내고, 고제(高第)라는 용렬한 인물을 산해관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해 버린 것이었다. 특히 고제는 원숭환과 손승종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요서 방어선을 모조리 포기하고, 산해관으로 방어선을 후퇴시킨다는 어이없는 결정을 내렸다. 원숭환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상대는 위충현이 임명한 정권의 실세였고, 원숭환의 반대에는 아랑곳없이 영원성을 제외한 다른 요새 지대의 병력과 식량을 모조리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켜 버렸다. 영원성 한 곳만 남겨둔 건 원숭환보고 거기서 싸우다가 죽으라는 고제의 고약한 심사였다.

원숭환이 산해관 200리 앞에 있는 영원성을 건설하고, 요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바람에 영토를 요서까지 확장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누르하치는 고제의 삽질을 최고의 기회로 보고 1626년 100,000명[12]의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때까지 수백 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을 만큼 신출귀몰의 평가를 얻고 있었던 영웅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했다. 자세한 것은 영원성 전투 항목을 참조 .

이 싸움의 결과는 누르하치에게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안겨주었는데
"짐이 25세부터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하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때의 패배 과정에서 누르하치가 중상을 입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설이 있지만 청나라의 기록으로는 병사이며, 누르하치는 이 전투 이후로도 정무를 처리하고 몽골 원정도 감행했다가 8개월 후에 68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그래서 대포를 맞고 8개월간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죽었다고 하기에는 큰 의문이 있다. 실제 누르하치 사망설은, 영원성 전투 당시 명나라 장수 원숭환과 함께 있다가
'대포를 쏘더니 이겼구나' → 이후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아 그러고 보니 이전에 영원성에서 누르하치가 대포에 맞아 이틀 만에 퇴각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때 죽었구나!'
라고 한 조선의 역관 한원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정황 증거로 봤을 때 병사보다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원성 전투의 패배에서 입은 심리적인 타격이 누르하치의 죽음에 간접적인 원인이 된 건 분명해 보인다. 직접적으로 몸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심했던 것이다.

2.2.2. 영원(寧遠)•금주(錦州) 전투

중국에서는 영금지전(寧錦之戰) 혹은 영금대첩(寧錦大捷)이라고 부른다. 영원성 전투는 명나라 입장에서는 참으로 기적 같은 대승이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였던 환관 위충현은 어떤 의미로 봐도 극악무도한 악인에다가 요동 방어선의 붕괴와 지장 웅정필의 죽음에도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위인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원숭환의 대승에 기뻐하며 고제를 해임하고, 원숭환을 요서 방어의 총책임자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나름대로 빠방한 지원을 해주었다.병 주고 약 주기 이는 나라가 망하면 부정축재는 커녕 자기 목숨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기도 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원숭환은 다시금 금주과 송산 등의 요새에 병력을 배치하고 성을 강화하며 다음 싸움에 대비하던 중 누르하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그의 죽음을 조문했다. 적이지만 일세의 영걸이 분명하니 그의 죽음을 조문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제로는 누르하치 사후 후금의 정세를 살펴보려는 목적이었다. 이 조문 이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조문에 대한 답례를 하고, 또한 후금의 지위를 인정하고 세폐를 보내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하기도 하는 등 그와 원숭환 사이에 여러 번 사자가 왕복하게 되는데, 이는 홍타이지와 원숭환 둘 다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의 허락도 없이 한터라 이는 원숭환 개인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때의 일이 훗날 그가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의 처형 당시 죄목을 보면 이때부터 후금과 내통했다고 되어 있다.

다음해인 1627년 조선 정묘호란 패전 이후 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침공을 개시했다. 후금군은 대릉하성과 소릉하성을 비롯한 여러 작은 요새들을 점령하고는 금주성(錦州城)을 포위했다. 홍타이지로서는 부왕 누르하치의 원수를 갚고, 새로 즉위한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영원성 공략의 전초전으로 임한 전투였지만 여기서 홍타이지는 체면을 제대로 구겼다. 원숭환이 명나라 조정의 지원을 받아 성벽을 강화하고, 믿을 수 있는 부장 조솔교(趙率敎)가 지휘하는 30,000명의 병력과 충분한 식량을 준비해 둔 데다가 홍이포까지 대량으로 배치된 금주성의 방어력은 간단하게 점령할 수 있는 잔챙이 요새로 생각했던 홍타이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14일 동안이나 금주성을 포위 공격하고도 함락이 되지 않자 홍타이지는 방향을 돌려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금주성이 안 되는데 영원성이 될 턱이 있나. 홍타이지는 영원성 공략에 실패하고 방향을 돌려 다시 금주성을 공략해보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평생 동안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뛰어난 지략과 판단력이 이때만은 작동하지 않는 듯, 홍타이지는 금주성과 영원성 사이를 우왕좌왕하며 그답지 않은 모습들만 잔뜩 보여주다가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군사를 물려 후퇴했다.

아버지 누르하치도 아들 홍타이지도 중국사를 조금만 읽어본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 빼어난 인물들이다. 원숭환은 이런 영웅 부자들과 싸워서 승리한 희대의 공을 세운 것이다.

이때 홍타이지도 마음 속 깊이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원숭환이 살아있는 한 요서 방어선의 돌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2.3. 해임과 복귀

이때 정사는 환관 위충현에게 모두 맡겨버리고, 목수 일에만 열중하던 천계제가 붕어하고 동생인 의종 숭정제가 즉위하면서 명나라 조정에 큰 변화가 생겼다.

막 즉위한 숭정제의 한 마디로 역사상 환관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고 평가받는 위충현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고,[13] 당연히 후속 조치로 그의 세력들도 숙청당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이런 정세 변화의 불똥이 엉뚱하게 원숭환에게까지 튀어서 뜬금없이 원숭환이 위충현의 지원을 받은 점 때문에 그의 일당으로 몰려 해임되고 조정으로 소환된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시대가 바로 명나라 말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가장 큰 위협이 후금이며, 이를 막아낼 적임자로 원숭환 이상의 인물이 없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아는 사실이었다. 결국 여러 신하들의 청원으로 1628년 숭정 원년에 원숭환이 다시 요서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또한 승진까지 해서 병부상서(兵部尙書)[14] 겸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 계료독사(薊遼督師)라는 지위에다가 휘하의 모든 장병을 보고 없이 주살(誅殺)해도 좋다는 특권 및 이를 상징하는 상방보검(尙方寶劍)까지 하사받게 된다.

그런데 이때 숭정제와 대면한 자리에서 원숭환은
"5년 안에 요동을 평정하겠습니다."
라고 장담했다. 물론 인구와 경제력 등을 고려한 총체적인 국력은 여전히 명이 후금을 압도했으나, 당장의 군사력은 여러 번의 전투를 통해 후금에 계속 밀리고 있었던 것이 당시 명나라의 현실이었다. 비록 영원대첩과 영금대첩 2번의 전투에서 대승했으나, 야전이 아닌 모두 수성전에서 성공한 전투였으므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는 후금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가 가능하다. 비록 당시 후금은 군사적으로는 강력했으나, 경제적으로 극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흔히 후금의 중심 민족인 여진족을 수렵이나 채집 활동을 중심으로 여의치 않으면 한반도나 중국을 약탈하는 야만인들로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여진족 유력 세력들의 생계는 후금 건국 이전부터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당장 태조 누르하치의 경우를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군이 오인해 억울하게 살해당했고, 명나라의 장수 이성량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누르하치에게 말 30필과 교역에 관한 문서 30통을 주었다. 다시 말해, 청태조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목숨 값인 30개의 물목 거래권으로 군자금을 마련한 것이었다. [15]

그런데 명나라와의 교역은 당연히 양국이 적국으로 돌아섰으니 완전히 정지되었고, 후금은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개해보고자 점령한 요동 땅의 한족들을 동원해 농지도 개간하고 정묘호란도 일으켜 조선에게서 물자를 얻어내려고도 했다. 그러나 요동 한족들의 반감으로 개간 작업 진행은 더디었고, 조선도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16]

설상가상으로 그 시기에는 이상 기후인 소빙하기로 명나라와 후금 모두에서 인육을 먹을 정도로 흉년이 이어졌다. 그로 인해 명나라에서도 민란이 이어졌는데 조정에서도 이런 백성들의 어려운 현실을 이해하여 유화책을 쓰다가 그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자, 홍승주가 강경책을 주장하여 무자비하게 반란을 진압하면서 다소 잦아들었다. 그러나 농지도 훨씬 적고, 존속 기간도 훨씬 짧으며 여러 세력이 연합한 정치 형태에 백성들도 여러 민족들이 혼재된 후금은 명나라보다 훨씬 상황이 위험했다. 이와 관련한 후금의 일화들을 보면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강화 조건 중 하나가 명나라로부터 일정량의 물자를 받는 것이었는데 전술했듯이 명나라도 상황이 안 좋아서 이행되지 않자, 청나라가 적장인 원숭환에게
'여의치 않으면 약속한 양의 절반이라도요.'
라면서 구걸조의 글을 보내야 했을 정도였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황제의 친정임에도 정공법이 아니라 인조만을 목표로 북방의 조선군을 무시하고 남하하는 다소 위험한 전격전을 전개한 것도 이러한 물자 부족이 원인이었고, 심지어 청태종은 상식적으로 전쟁 전 여러 부대들의 손발을 한 번 맞춰볼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량이 모자라서 청나라 휘하의 몽골족 군대에게 '출전 직전에 올 것'을 명령할 정도였다.[17] 그나마 병자호란은 1637년에 일어난 것으로, 후술할 기사년 이후 요동 방어선 우회를 통한 약탈전으로 어느 정도 청나라의 상황이 나아진 상황이었는데도 이러했다는 것을 볼 때 원숭환이 숭정제에게 장담할 당시 후금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용맹해도 먹지 않고는 싸울 수 없는 법. 현재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원숭환은 이렇게 열악한 후금의 상황을 인지하고, 숭정제에게 저렇게 장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2.4. 조선에 있었던 모문룡을 참수하다

재기용된 다음해인 숭정 2년 1629년 4월, 원숭환은 수군 좌도독 모문룡에게
"군사 문제로 의논할 일이 있으니 쌍도(雙島)에서 만나자"
라는 전갈을 보냈다.

모문룡은 당시 압록강변의 가도(椵島)에 주둔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주면 요동 전 지역을 수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인물로, 바다의 싸움에서는 조금 재주가 있었지만 사람됨이 좋지가 못했다. 애초에 요동에서 후금군 5,000명의 병력에 참패하여 도망친 뒤에는 조선 땅의 의주군으로 들어가 광해군 인조를 압박하며 여러 차례 행패를 부리고 다녔으며, 조선의 평안북도 철산군 가도에 주둔하여 이후 밀무역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정묘호란 때도 후금군에게 무수히 패배하는 등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18] 명나라 조정에는 후금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한다고 거짓으로 말하며 막대한 군사비를 타먹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평안도 해안을 약탈하고, 적인 후금을 상대로 조정에서 금지한 물품을 팔아먹는 등 해적이나 밀수꾼 두목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막강한 함대와 수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휘하의 수하들을 보고없이 주살할 수 있는 상방보검을 하사받은 인물이었기에 후금이나 원숭환도 쉽게 여길 대상은 아니었다.

모문룡은 갑자기 원숭환이 자신을 소환하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원숭환은 그의 직속상관이었으므로 그가 군사 일을 의논하자고 소환하는 데 불응할 수는 없었다.[19] 이에 모문룡은 28,000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쌍도로 갔다.

모문룡은 1629년 5월 26일 쌍도에 도착했다. 6월 1일 원숭환과 모문룡 두 사람이 만나 회견을 하고 군사일을 의논했다. 6월 3일 모문룡은 원숭환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깊어가자 이 자리에서 원숭환은 은근히 모문룡에게 은근히 은퇴를 종용했지만 모문룡은 요동의 위급함이 남아있어 은퇴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이때 요동이 안정되면 조선을 기습하여 차지하겠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모문룡이 조선을 얼마나 만만한 먹이감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20]

6월 5일에도 두 사람은 만나서 원숭환 휘하와 모문룡 휘하의 병사들 사이에 활쏘기 경기를 했다. 활쏘기 경기가 끝나자 원숭환은 비밀리에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며 섬의 산꼭대기에 설치해 둔 장막으로 모문룡을 데려갔다. 이때 장막 부근에는 이미 복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원숭환은 몇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부하들에게 모문룡을 포박하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 수 년 동안 병마와 전량(錢糧)을 공급받으면서도 조정의 감사를 전혀 받지 않은 것. 전공이 없으면서도 공을 세웠다고 황제를 속인 것, 나라에서 금하는 시장을 멋대로 열어 오랑캐와 무역한 것, 도적이 되어 상인들을 약탈한 것, 민간의 부녀자들을 빼앗아 음행을 일삼은 것, 위충현을 숭배하고 환관들과 결탁한 것, 몇 년이나 군사를 맡고 있으면서 촌토도 수복하지 못하고 관망만한 것 등 12가지 죄를 거론하며 모문룡을 질책했다.
“장수가 외부에 있을 때는 감독을 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거부했고, 있지도 않은 승전 사실을 조작해 허위로 보고하여 감히 황제 폐하를 속였으며, 사사로이 시장을 열어 오랑캐와 내통했고, 상선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조선 백성들을 마구 죽여 이웃나라에 피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10년 동안 수만 석의 곡식을 받아 가면서도 한 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너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을 살려둬서 무엇에 쓰겠느냐?”

모문룡은 겁에 질려 대답도 못했다. 원숭환은 북경을 향해 절을 한 뒤에 죄인 모문룡을 죽이겠다고 외친 뒤 숭정제로부터 하사받은 상방보검으로 모문룡의 목을 베었다. 이때 원숭환이 말한 12가지 죄는 실제로 모문룡이 지은 죄들로 그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처형당할 중죄였다. 모문룡이 데려온 28,0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은 일이 너무 급박하게 벌어진데다가 원숭환의 추상같은 위엄에 몸이 굳어 모두 식은땀을 흘리며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 원숭환은 다음날 모문룡의 장례를 치러주고, 죄는 모문룡에게 있을 뿐 모문룡의 수하들에게는 죄가 없다며 그들을 위로하고는 다시 재배치했다. 가도는 모문룡의 부하였던 부총병 진계성(陳繼盛)에게 지휘하게 하고, 자신의 부하인 부총병 서부주(徐敷奏)를 파견하여 이를 감시하도록 했다.

이후 원숭환은 모문룡을 참수한 후 조선의 국왕이었던 인조에게 첩문을 보내
"모문룡이 가도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국왕의 덕분으로 호사를 누렸는데,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명나라에 수치를 끼쳤으니, 황제 폐하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모문룡을 제거했습니다"
라고 밝혔다. 그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흠명출진행변독수계요천진등래등처군무병부 상서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欽命出鎭行邊督帥薊遼天津登萊等處軍務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 원숭환(袁崇煥)은 삼가 조선 국왕께 첩문(帖文)을 보냅니다.

지난해 황제 폐하께 주문(奏文)을 올리는 일과 관련, 영광스럽게도 국왕께서 변변치 못한 본관을 잊지 않으시고 대도(大道)를 일러주시며 국휼(國恤)에 대해 잊지 않고 정성껏 교시해 주셨으니, 혈기를 가진 자로서 잊지 못할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요동 지역에 나오게 되었으니 국왕과는 숙연(夙緣)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전해오는 국왕의 소식을 들으면, 마치 서로 얼굴을 대하는 듯 설레이기만 합니다. 되돌아 보건대 동이(東夷)가 제멋대로 포학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우리 중원(中原)의 봉시(封豕)는 그냥 놔둔 채 국왕의 강토만 잠식해 왔습니다. 병인, 정묘년의 전역(戰役)에서 노추(老酋)가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노추(奴雛)가 2번이나 넋이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긴 했지만 동쪽의 산하에서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 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애태웠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황천(皇天)께서 이를 애달프게 여겨주지 않으시고 희종 황제(憙宗皇帝)를 앗아갔는가 하면, 나 역시 먼저 참소로 인해 돌아가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위신이 손상되어 떨쳐지지 못했으므로 내가 정말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아마 국왕께서도 같은 심정으로 슬퍼해 주셨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자께서 천고에 뛰어난 신성(神聖)함과 영무(英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중흥에 뜻을 깊이 두시어 이 조무라기 오랑캐들을 섬멸해 버리려고 하시는데, 불초 본관이 그 길을 안다고 여기시어 특별히 조칙을 내려 시골 가운데에서 불러 세우셨습니다. 제가 요동 땅을 잊지 못하는 만큼 어찌 국왕의 밝은 덕을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행인(行人)이 왕래하노라면 바닷길이 아득하기만 할 것이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패려한 도수(島帥) 때문에 거듭 사신의 여정이 고달파질 것이기에 공도(貢道)를 서령(西寧)으로 개정할 것을 특별히 청하여 제가 마초(馬草)를 공급하여 국왕의 풍유(風猷)를 접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저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관련되는 것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정신을 쏟아오면서 하동(河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대체로 군사 작전은 기세로써 제압하고 기틀을 보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 기세를 쌓아두었다가 잠깐 사이에 기틀을 보아 결정을 내리는 것이므로, 한 순간의 결정을 위해 1백 년 동안 축적하는 것입니다. 국왕께서도 스스로 힘을 축적하시어 기틀을 보아 결판을 낼 준비를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활집을 단단히 잡아 매고 국왕과 함께 동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바다와 육지로 병진(竝進)하면서 앞 뒤에서 합동 공격을 펼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행히 하늘에 계신 영령의 도움을 받게 되면 한 번 북을 쳐서 중조(中朝)의 12년에 걸쳐 쌓인 분노를 씻고 국왕의 나라 역시 금성탕지(金城湯池)의 형세를 다시 이룩할 수 있을 것인데, 국왕께서는 이러한 뜻이 없으십니까?

모수(毛帥)는 절도(絶島)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국왕 덕택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획성이 없는 무인(武人)이라서 탐욕스럽기만 하여 도둑 떼를 길러내며 국왕의 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수치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에 황상께서 만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고 저에게 상방검(尙方劍)을 빌려주시어 군중(軍中)에 나아가 그를 주벌토록 하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섬에 있는 수만 명의 목숨을 보전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속국의 화란을 해소시켜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밝으신 천자의 깊으신 의도라 하겠습니다.

군대를 해도(海島)에 머물려 두고 멀리 국왕의 나라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찾아뵐 수 없는 처지이기에 사자 한 명을 하집사(下執事)에게 보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또 종자(從者)에게 공급하는 일로 번거로움을 끼쳐드릴까 염려되었습니다. 편지만 제대로 통하게 되면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마음이 같아질 것이니, 오직 국왕께서는 더욱 힘써 충성스럽고 곧은 마음을 다하시어 단숨에 이 적을 멸하심으로써 왕의 공적을 마무리짓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빛나고 빛나는 황령(皇靈)께서도 실로 아름답게 여기는 동시에 이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모문룡에 대해서도 따로 편지를 보내 언급했다.
“성조(聖朝)에서 매우 후하게 관심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난수(亂帥)는 패역한 행동을 하여 복주(伏誅)를 재촉하였으므로 삼가 황위(皇威)를 선포하고 함께 동녘을 평정할 것을 맹세하는 일에 대해 자문(咨文)을 띄웁니다.

살펴보건대, 본부원(本部院)이 명을 받들어 정벌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날마다 오랑캐 평정할 일을 강구해 왔습니다만, 우리 내부의 적도 아직 조용히 만들지 못한 터에 어떻게 오랑캐를 진압시킬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귀국이 우리 중국 조정을 공경하며 따른 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지난 기미년의 전역(戰役) 때에는 우리도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임했습니다마는 귀국 역시 잇따른 내변(內變)이 있어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선제(先帝)께서 모문룡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귀국의 왕을 봉하는 조처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폐조(廢朝)를 엎고 새로이 반정한 데 따른 전범(典範)이라 하더라도 모문룡으로서는 생색을 낼 일이 아니라 당연히 명확하게 보고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먼 나라를 자애롭게 대해주시는 인덕(仁德)을 지니셨기에, 변방의 제후국이 조근(朝勤)하는 예절을 삼가 따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 밖에 안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 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륙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시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 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본부원은 천토(天討)의 명을 봉행하여 장차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필부로 하여금 거만스레 행동하게 하면서 그냥 놔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정을 높이고 사이(四夷)에게 위엄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두렵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황명(皇命)을 청하여 동쪽으로 순시나와 해변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모문룡의 죄를 묻게 된 것입니다. 금년 6월 5일 군대를 쌍도(雙島)에 주둔시키고 여러 장수와 관리들을 집결시킨 뒤, 모문룡이 참형(斬刑)을 받아야 할 대죄(大罪) 12개 조목을 뜰에서 열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들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전(軍前)에서 효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조정의 난수(亂帥)를 제거한 것일 뿐 아니라 귀국의 화도 동시에 진정시킨 것입니다.

피도(皮島)는 원래 중국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동강(東江)에 주둔시킨 한 부대에 영을 내려 서쪽으로 이동해서 진격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그전처럼 징수하고 토색질하여 귀국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귀국에서도 해사(該司)에 통지하여 각각 강역을 안정시키고 군민(軍民)의 마음을 안온케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전처럼 중국 군대가 국경을 넘어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경우 즉시 보고만 해주면 바로 다스려 경계시키겠습니다. 또 공도(貢道)의 경우 바다로 운행하게 되어 있어 실로 사자를 번거롭게 하기에 본부원이 이 점을 매우 염려하여 의논한 결과, 모든 조공을 한 번으로 통일하고 영원(寧遠)의 길로 바꾸도록 하는 동시에 사자 한 사람을 보내 우리의 소식을 통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동의 옛길을 택한 것은 귀국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천부적으로 신무(神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변방의 계책에 관심을 쏟으시니, 필시 변방의 관리들이 일에 태만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부원 역시 몸을 기꺼이 나라에 바쳐 기필코 오랑캐를 평정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일을 미지근하게 수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士馬)가 이미 배불리 먹고 사기가 충천하니 일을 이룰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국 역시 요즘 한가한 때를 이용해서 속히 군비를 정돈하고 우리와 연합하여 잃은 땅을 수복하도록 하십시오. 《시경》(詩經)에 ‘내 그대와 옷을 함께 함은 어찌 그대의 옷 없음 때문이리오. 혹시라도 국가가 위급하면 창을 잡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네.’ 하지 않았습니까.

모문룡은 오랑캐나 마찬가지로 귀국에게는 고질적인 병폐였습니다. 과거 모문룡은 귀국이 은밀히 오랑캐와 내통하며 때때로 도와준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부원은 귀국이 평소에 의리에 따라 우리를 순종했으니 필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상께서도 만리 밖을 내다보시는 명철한 안목으로 흉포한 자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어김없는 천도(天道)이고,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야말로 또한 당연히 행해야 할 인사(人事)입니다. 우리 황상의 덕은 너르고 너르시어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다 하여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의 국왕께서 충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을 대대로 밝히시면 후손에 이르기까지 왕업(王業)을 향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본부는 거듭 집사(執事)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하지만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것은 실책이었음이 이후 결과로 드러나는데, 원숭환이 모문룡의 부하들을 적극적으로 후대하며 포상까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의 부하들 중 일부는 가도를 떠나 각지에서 군벌로 활동했다. 이후 이들은 해적이 되거나,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다가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후금에 투항했다. 이중에 대표적인 인물들이 청나라 입관 후에 번왕으로 임명되는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이었다. 이들의 입관 이후 운명은 삼번의 난 참조.

원숭환을 옹호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모문룡은 언제든 명나라를 배신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배신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일 때만 해도 분명히 모문룡은 명나라의 신하를 표명하고 있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었어도 한 번도 후금을 위해 직접적으로 활동한 적은 없었다. 또한 그가 속한 동강진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명나라와 후금, 그리고 조선의 대치 상태가 최대한 오래 가는 것이 그에게 이득이었다.[21] 그러나 모문룡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후에 그의 부하들은 명나라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거나 줄줄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 중에서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는 결국 모문룡이 통제하고 있었던 병력과 화포를 가지고 후금에 투항했다.

또한 원숭환이 모문룡의 부하들을 후대했기 때문에 모문룡의 부하들이 원숭환의 통제를 따랐는데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여서 명나라의 통제를 떠났다는 것 역시 아무런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원숭환이 모문룡의 부하들을 후대한 것은 맞지만 모문룡의 부하들 중 상당수는 원숭환의 모문룡 살해 이후 가도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당장 공유덕과 경중명만 봐도 원숭환 밑에 속하지 않고 산둥성 등주의 손원화에게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비록 군사적 실재는 형편없더라도 수많은 해군과 무역으로 번영하던 가도 병자호란 이후 청과 조선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을 삥 뜯으려는 점은 모문룡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멸망할 때까지 조선에는 민폐만 끼친 집단이었다. 오죽하면 그 형편없는 인조 정권에서 가도를 원정할 생각까지 했을까.

하여간 이렇게 모문룡 주살에는 성공했지만 이건 원숭환의 상당한 월권행위였다. 비록 숭정제로부터 휘하의 부하들을 보고없이 참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진짜 행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 법이다. 더구나 모문룡은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상방보검까지 하사받은 거물이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주살한 사실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고 있겠다며 조정에 보고했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주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거의 기절할 만큼 놀랐다고 하는데[22] 모문룡의 악명은 이미 이전부터 조정에 보고되고 있었고 모문룡 집단의 실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는 각료가 많았으며, 가장 중요한건 원숭환이 없으면 요서 방위를 책임질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모문룡 주살 건은 원숭환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비교적 조용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이 정도 큰 사건은 당장은 주위의 상황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당사자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는 순간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문룡 주살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원숭환이 처형당했다고 알고 있고, 실제로 중국에서도 그런 글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원숭환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모문룡 주살이 아니라 바로 아래에 나오는 기사년의 변이었다.

2.5. 기사년의 변(己巳之變, 기사지변, 기사만족대겁략)

영원 및 금주 전투에서 체면을 구긴 홍타이지의 가슴에는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어 있었다. 바로 원숭환이 지키는 한, 명나라의 요서 방어선은 절대 돌파할 수 없다라는 뼈저린 현실이었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방어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중대한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첫 번째 방향 전환은 침공 경로의 변경이었다. 후금의 근거지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최적 루트는 누가 봐도 요서를 지나 산해관을 통하는 길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원숭환이 버티고 있어 돌파가 불가능했다. 후금으로서는 우회가 불가피했다. 홍타이지가 선택한 경로는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일대를 우회하여 몽골족의 영역을 지나 하북 북방의 장성 일대인 용정관(龍井關)과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 경로의 장성 북쪽 일대는 수렵, 채집과 원시적 농경민족인 여진족의 땅이 아니고 유목민인 몽골 호르친 부족의 영역으로 후금에게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후금은 여러 번의 전쟁과 혼인을 통한 회유[23] 등으로 호르친 부족을 완전히 포섭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향 전환은 바로 전쟁 목적의 변경이었다. 그 동안 후금의 전쟁은 조선을 복속시키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던 정묘호란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복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땅은 모두 자신들의 영토가 되었고 그 주민들은 모두 자신들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부터 전쟁의 목적은 정복을 통한 영토 획득이 아니라 인력과 물자 획득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정복전에서 약탈전으로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홍타이지는 사촌 아우인 지르갈랑에게 영원과 금주 등을 가볍게 공격하게 하여 원숭환의 시선을 요서 일대에 묶어두고는 1629년 10월 2일 100,000명의 대군을 직접 지휘하여 장성을 넘었다. 경로는 위에서 말했던 용정관(龍井關),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였다. 장성을 넘은 후금군은 10월 26일 마침내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성 코앞까지 진격해왔다. 명나라로서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명나라 조정과 북경 시민에게 전쟁이란 무릇 1,000리 밖 요서의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북경성 자체가 포위되어 버렸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아직 홍타이지가 요서를 우회하여 북방으로 침공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히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방어선에 막혀 산해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꿈도 못 꿀 후금군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다고, 사람이 어이없는 사태를 만났을 때 정상적 사고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다 화풀이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북경 시민들에게 원숭환이 길을 내주어 후금의 오랑캐들이 침공할 수 있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원숭환의 정치적 반대파인 엄당(閹黨)[24]에서 이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엄당에게 원숭환은 자기 일파인 모문룡을 죽인 정적인 동시에 해마다 모문룡이 보내오던 뇌물을 차단한 경제적 원수이기도 했다. 또 당시 조정 대신들은 북경 인근에 토지와 별장을 가진 자가 많았다. 이들도 자신의 재산이 침해된 원인을 원숭환에게 돌렸다. 결국 조정 대신들과 북경 주민들의 마음속에 원숭환을 원망하는 마음이 커졌다.

게다가 사태를 제대로 인지한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불행히도 옛날식 세는 나이로 19살, 지금 한국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애송이였던 숭정제 역시 사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원숭환을 탓했다.

원숭환은 예전부터 후금이 자신이 지키는 요서를 우회하여 북방으로부터 침공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조정에 알리고 경계를 촉구했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렇게 갑자기 후금의 우회 침공이 시작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 하다.

후금의 북경 침공 소식을 들은 원숭환은 대경실색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급히 모아 북경으로 달려왔다. 산해관에 도착하자 준화성(遵化城)[25]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참장 조솔교에게 4,000명의 군사를 나눠주며 후금의 공격을 받는 준화성을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원아(王元雅)가 사수하던 준화성은 조솔교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되었고[26]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후금의 복병을 만나 조솔교와 그가 이끈 원병도 전멸하고 말았다. 후금군은 함락된 준화성에서 약탈과 대학살을 벌였는데 이 소식은 그대로 북경에 전해져 북경 시민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고, 원숭환에 대한 원망도 같이 깊어졌다.(준화성 전투)

한편 원숭환은 9,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11월 17일 북경 광거문(廣渠門)에 도착했다. 부총병 주문욱은 먼길을 달려와 병사들이 몹시 지쳤으니 일단 북경 안으로 들여보내 휴식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원숭환은 거절하고 북경성 밖에 주둔했다. 그리고 11월 20일 광거문 밖에서 원숭환이 인솔하는 9,000명의 병사는 6시간에 걸쳐 후금군과 10차례 이상 싸워 결국 이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광거문 전투) 혹자는 이때 원숭환이 후금의 대군 100,000명과 싸웠다고 하지만 당시 후금군의 대부분은 약탈에 바빴으니 아마도 실제로는 후금의 선봉 일부와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원숭환이 이끄는 명나라 군사들이 과거와 달리 얼마나 잘 훈련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 군대는 단 한 번도 후금군과 평지에서 싸워 이겨보지 못했다. 아니 평지는커녕 수성전조차 못하고 지리멸렬하다가 원숭환 등장 이후에야 겨우 제대로 된 수성전을 보여주게 된다. 그런 약졸 명나라군이 1,000리의 먼 길을 달려온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평지에서 후금군을 무찌른 것이다. 이는 원숭환이 수성전만이 아니라 야전에서도 충분히 유능하며, 다수의 적과 평지에서 싸우는 것도 회피하지 않을 정도로 용감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1월 23일 후금군을 물리친 원숭환은 병사들이 오랜 행군과 전투, 그리고 장기간의 노숙으로 지칠대로 지쳤으니 성 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이미 숭정제의 머리에는 원숭환에 대한 의심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27] 이때문에 원숭환이 이끄는 병사들은 음력 11월 북경의 차가운 겨울 날씨 속에서도 성밖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원숭환은 11월 27일 북경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시 후금군을 격파했다.(좌안문 전투) 평지의 싸움에서도 원숭환을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북경 함락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홍타이지는 군사를 남해자(南海子)[28]까지 철수시켰다. 하지만 약탈전은 계속되었다. 통주(通州)[29]에서는 1,000척에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우기도 했다. 또한 하북 일대는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이때의 약탈은 대단한 성공이어서 병사 1명당 우마(牛馬) 1마리씩이 돌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더불어 수만 명의 남녀 포로도 획득했다. 후금 최대의 약점은 인구 부족이었기에 잡혀간 이들은 후금의 영토로 끌려가 요동 일대의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하게 될 것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후금의 약탈전이 기사년의 변이었지만 후금 입장에서는 엄청난 대박이었다. 후금의 가장 큰 약점인 인구 부족과 고질적인 물자 부족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명나라의 약점을 발견한 후금은 이때부터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하북과 산서의 장성 루트를 통해 10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약탈전들을 감행한다. 이제 후금에게 전쟁은 위험은 적고, 수익은 높은 최고의 경제 활동이 되었다.

이렇게 전쟁이 최고의 경제 활동이 된 것은 후금 정부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전쟁은 후금의 백성 개개인에게도 최고의 경제 활동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이 일어나 가족이 출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온 가족이 비탄에 잠겨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만주족 가정에서는 이와 반대로 전쟁이 일어나 집안의 가장이 전투에 나가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울음소리는커녕 집집마다 환성이 터져 나왔다. 당시 기록을 보면 거리에서 들리는 환호성을 듣고 원정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전쟁은 참전하는 팔기병 개개인과 그 가족들에게도 위험은 적으면서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주는 대박의 기회였다. 재산은 물론이고 잘하면 사회적 지위까지 일거에 상승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는 팔기병만이 아니라 이민족이나 노예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었고, 그들까지 어떻게든 전쟁에 한 발 담그기 위해 노력했다.

하북, 산서, 산동 등 명나라의 황하 이북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유린당했으며, 그 결과는 명나라 재정의 붕괴와 도적의 창궐이었다. 물론 이자성이나 이자성 이전의 두목인 고영상이 도적이 된 것은 후금의 약탈보다 조금 이전이지만, 명나라의 무능함에 질려버린 각지의 백성들이 이자성을 비롯한 도적들을 따르게 됨으로써 도적떼를 농민군으로, 더 나아가 왕이나 황제를 자처하는 군웅의 레벨로까지 성장케 한 원동력으로 후금의 만리장성 우회 약탈전을 지목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명나라로서는 후금의 이런 침공을 막아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후금의 침공로로 이용되고 있는 하북, 산서의 장성 일대에 요서 방어선에 버금가는 방어선을 건설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걸 이룰 수 있는 인물은 명나라가 아무리 땅이 넓고 사람이 많다고 해도 단 한 사람, 원숭환 뿐이었다. 하지만 이때 그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2.6. 반간계

원숭환에 대한 반간계는 너무나 유명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후금은 광거문 밖의 전투에서 비록 원숭환에게 패배했지만 마방태감(馬房太監)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이라는 궁중의 환관 두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명나라 조정에서 환관이 받는 대접을 잘 아는 후금군은 두 사람의 환관 포로를 비교적 관대하게 대접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둘이 구금되어 있었던 바로 옆방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홍타이지의 부하였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이 밀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숭환과 홍타이지 사이에 이미 북경을 공취(攻取)하기로 약속했으니 북경은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두 환관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밀담을 들었다. 자신들이 여기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두 사람이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11월 29일, 홍타이지는 명나라 조정에 평화를 제의하면서 양춘과 왕성덕 두 사람도 풀어주었다. 풀려나 황궁을 돌아온 두 사람은 숭정제에게 자신들이 들은 바를 고했다. 이전부터 원숭환을 의심하던 숭정제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만주인들이 《 삼국지연의》에서 주유 장간을 이용해 채모 장윤을 모살한 부분에서 힌트를 얻어 이 계책을 꾸몄다고 한다. 주유가 반간계로 채모와 장윤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소설에 불과하고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지만 당시 무식한 만주인들은 실제 역사는 잘 모르고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은 잘 알았기 때문에 그 계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너무 작위적이라 예로부터 그 진실성을 많이 의심받아 왔다. 다만 에피소드 자체는 훗날 만들어진 이야기일지 몰라도 반간계 자체는 존재했던 게 분명하다.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1630년 인조 8년 2월 27일 정축 2번째 기사에 후금에 사신으로 갔던 박난영이 보낸 글에
골대가 좌우를 물리치고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원공(袁公)이 과연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일이 누설되어 체포당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반간계(反間計)를 쓰는 말이 분명합니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 동년 2월 12일 《 승정원일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 (전략) 원 군문에 대해 말하기에 이르러서는 용골대가 좌우에 있는 사람을 피하게 하고 은밀히 말하기를, ‘원공(袁公)이 결국 우리나라와 마음이 합하였소만 그 말이 누설되어 명나라에서 잡아 가두었습니다. 또 그 외에도 우리나라와 마음을 같이하는 자가 있습니다. 나는 사신과 평소부터 친하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아예 입 밖에 내지 마시오.’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히 명나라와 우리 사이를 이간하려는 계책인 것입니다. 신이 그에게 역모사건을 말하고 잇달아 말하기를,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친하여 이미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어떤 사고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통지하여 주는 것이 신의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용서해 주고 유배시킨 자가 그 죄악을 고치지는 않고 감히 역적 모의를 하였으니, 그대 나라에서 처음부터 이런 말을 숨기고 알리지 않은 것이 무슨 도리란 말입니까. 변방에 있던 백성들이 고발하여 역적 도당이 다 잡혀 죽었던 것입니다.’ 하였더니, 용골대 등이 조금 무안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마는 실은 속으로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후략)

명나라 조정의 신하도 아닌 외국인 조선의 사신에게까지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이는 당시 후금이 주도하는 대 원숭환용 반간계가 다방면으로 펼쳐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직접적인 증거인 셈이다.

위의 일화는 원숭환이 체포된 이후의 일이니 어쩌면 원숭환의 체포 당시에는 반간계가 없었더라도 원숭환의 구금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부르며 원숭환의 완전한 제거를 위해 불리한 증거들을 마구 만들어 퍼뜨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건 당사자인 후금이 자기 쪽에서 조작하는 일이니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조선 사신도 듣자마자 코웃음을 치는 이런 유치한 속임수에 어느 바보가 넘어가겠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숭정제가 평생토록 보여준 지독한 의심증과 당시 명나라 조정의 고질적인 당쟁은 이런 유치하고 졸렬한 속임수가 충분히 통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었고, 명나라 조정은 자신들의 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30] 다르게 말하면 이런 반간계가 통할 정도로 명나라 내부 상황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31]

2.7. 최후

1629년 12월 1일, 아직 후금군이 물러가지 않고 북경 조금 아래쪽에 주둔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원숭환을 군량에 관해 의논할 것이 있다는 구실을 붙여 황궁으로 소환했다.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으니 당연히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은 원숭환은 수하인 총병 만계(滿桂)와 그의 부장 흑운룡(黑雲龍) 두 사람만을 대동하고 황성으로 달려갔다. 후금군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으니 성문을 열 수 없다면서 문은 열리지 않았고, 성 위에서 큰 바구니가 내려왔으며, 원숭환은 그 바구니를 타고 북경성으로 들어가 황궁에서 숭정제를 만났다.

그러나 원숭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군량에 대한 의논이 아니고, 배신에 대한 숭정제의 추궁과 힐난이었다. 생각도 못했던 급작스런 추궁에 원숭환은 당황하여 제대로 입을 열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것을 숭정제는 배신의 또 다른 증거로 보았는지 불문곡직 원숭환을 금의위 감옥에 투옥하고 만다. 원숭환이 대동했던 총병 만계와 만계의 부장 흑운룡에게는 승진과 함께 상이 내려졌다.

북경성 아래에 있었던 원숭환의 수하 조대수는 원숭환 구금의 소식을 듣자 자기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해관을 넘어 도망쳤다. 애초에는 후금에 투항하려고 했지만 숭정제의 명령으로 원숭환이 옥중에서 보낸 서신과 손승종의 만류로 도로 귀환했다.

원숭환이 체포 구금되었다는 소식에 먼저 조정의 대신들이 놀랐다. 즉각 그를 구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먼저 내각 대학사 성기명(成基命)이, 뒤를 이어 손승종이
“적이 성 아래에 와 있는 상황에서 원숭환을 죽이는 것은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리는 일과 같습니다.”
라고 말하며 구명을 청했다. 반대로 원숭환을 즉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즉 엄당(閹黨)의 인물들이었다. 천계제 시절 권세를 누리던 환관 위충현이 만든 엄당은 위충현의 실각과 함께 세력이 약해졌으나 이 기회에 다시 세력을 만회하려는 목적으로 동림당의 지지를 받는 원숭환을 말살하려고 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엄당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막대한 뇌물을 보내주는 고마운 화수분이었던 모문룡을 죽여버린 원숭환이 증오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북경 시민들의 여론도 결코 원숭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장 원숭환을 죽이라고 성화를 부렸다.

원숭환을 구명하려는 동림당과 그를 죽이려는 엄당의 논쟁은 몇 개월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결국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니 오히려 원숭환 처형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 바로 숭정제였고, 엄당은 그런 황제의 의도를 간파하여 열심히 원숭환 처형을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1630년 음력 8월 16일 원숭환은 황제를 속인 죄와 모반의 죄로 서시(西市) 거리에서 책형(磔刑)에 처해졌다. 책형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명•청시대에는 능지형이었다.[32] 시장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점이 한 점씩 잘려나가는 형벌로 적게는 수백 번, 많게는 1,000번이 넘는 칼질을 받을 동안 죄인은 살아 있다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이때 원숭환의 죽음을 지켜보던 북경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나눠진 그의 살점을 씹었다고 한다.[33]

결국 누르하치 홍타이지라는 2명의 영웅을 패퇴시키며 조국인 명나라를 수호하던, 어쩌면 명나라의 마지막 희망이었을지도 모를 원숭환은 그가 지키고자 했던 조국의 백성들 앞에서 능지형을 받으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명장의 억울하기 그지없는 최후로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원숭환의 죽음이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부분에서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3. 죽음 이후

원숭환이 북경에 소환될 때 동행했던 두 사람인 총병 만계와 그의 부장 흑운룡이 숭정제로부터 상을 받고 승진했다는 이야기는 위에 적었다. 만계는 원숭환의 구금 직후 상방보검을 받고 경략으로 승진한 뒤, 북경 방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때 후금군이 다시 몰려와 북경성을 포위하자 숭정제는 만계에게 나가 싸울 것을 명령했다. 만계는 전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성을 나가 싸우면 승산이 없으니 농성할 것을 건의했지만 숭정제는 계속 나가 싸울 것을 재촉했다. 원숭환이 처단된 상황에서 숭정제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 죽음을 의미했다.

12월 15일 만계는 어쩔 수 없이 수하인 흑운룡, 마등운(麻登雲), 손조수(孫祖壽) 등을 대동하고 북경성을 나가 영정문(永定門) 밖 2리 되는 곳에 진영을 세우고 다음날인 12월 16일 후금군과 싸웠지만 대패했다. 만계와 손조수는 전사하고 흑운룡과 마등운 등은 후금군에 생포되었다.(영정문 전투) 흑운룡은 훗날 탈출하여 명나라로 귀환했다. 그후 흑운룡은 북경성으로 이자성의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노인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항복을 거부한채 아들들과 함께 저항하다가 순절했다.

홍타이지가 인솔하는 후금군은 약탈전에 완전히 성공하여, 후금 최대의 현안이었던 물자 부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염원하던 홍이포 제작 기술자까지 손에 넣었다. 1631년 후금이 제작한 홍이포가 전선에 등장했다.

북방 루트를 통한 후금의 약탈전은 이제 연례 행사가 되었다. 이를 막아내고 방어선을 건설할 능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던 원숭환은 숭정제가 스스로 죽여 버렸다. 후금의 약탈전은 수도인 북경 일대를 넘어 산동과 산서까지 미쳤고, 이를 저지해야 할 병사들은 진영 안에 머문 채 이들이 그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고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심지어 홍타이지는
"수만 명의 군대가 있었지만 화살 하나 쏘는 놈 없더라."
라며 명나라를 비웃었다. 산동을 약탈한 도르곤이 천진 운하를 건널 때는 도하에 며칠이 걸렸고, 방비도 허술했지만 사기를 잃은 명나라 장수들은 성벽 위에서 이를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34] 이제 명나라는 조선과 더불어 후금에 백성과 재물을 공급해 주는 좋은 공급원에 불과했다.

졸지에 역적의 가족이 되어 몰살당할 판이 된 원숭환의 유족들은 그가 조정에 잡히자마자 바로 후금으로 도망쳤다. 원숭환의 아들 원문필은 뒤에 한군 팔기에 소속되어 후금군에서 공을 세우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조정의 대신도, 전선의 군인도 조국인 명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인물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일생을 명왕조를 위해 바치며 충성을 다했던 명장 원숭환의 이런 비참하고 잔혹한 죽음을 목격한 이상, 명나라를 위해 충성할 마음이 생겨날 수 없었다.

후금은 이후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게 되었고,(1636년) 병자호란(1637년) 이후 조선마저 명나라를 사실상 버리면서 청나라 편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청나라는 요서 방어선을 공략했다. 과연 원숭환이 없는 요서 방어선은 차례로 무너지게 되었고, 명나라의 대청 방어선은 산해관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결국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요서 방어선을 지키던 원숭환의 부하들은 방어선의 붕괴와 함께 차례차례 청나라에 항복했다.

원숭환의 죽음과 동시에 그의 수하들이 후금에 항복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원숭환이 기른 인물들은 모문룡 집단의 무리와는 달리 나름대로 최대한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그들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요서 방어선이 붕괴된 이후였다. 가장 많이 알려진 조대수(祖大壽)의 경우 원숭환의 죽음에 불만을 가져 투항한 것이 아니었고 원숭환이 구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거느린채 산해관 밖으로 도망쳤다가 원숭환의 옥중 서한과 손승종의 권고로 도로 귀환했다. 이후 1631년 대릉하성을 방어하다가 자체 제작한 홍이포와 대장군포를 앞세운 후금군의 공세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하지만 금주를 투항시키겠다고 위장하여 탈출한 뒤 오히려 금주성 방위의 책임자가 되어 금주를 방어했다. 1641년 초, 청나라의 대군은 금주를 포위했고, 외성이 항복하자 힘에 부친 조대수는 명나라 조정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홍승주를 위시로 한 대군 130,000명이 파견되었으나, 송산 전투에서 대패했다. 이후 조대수는 몇 달간 고립된 채로 수성했는데 식량이 떨어지고 아사자가 속출하여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정식으로 청나라에 투항했다.(1642년 2월) 이때 청나라의 장수들 중에서는 이미 한 번 배신한 조대수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홍타이지는 그를 관대하게 용서했고, 그 이후부터 조대수는 충실한 청나라의 신하로서 대명 공격에 종사했다.

중국 역사상 일대의 억울한 죽음을 명령한 숭정제 자신은 이자성의 반란군이 수도 북경을 점령하자 단 한 명의 환관인 왕승은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금성 뒤편 만세산(오늘날의 경산)에서 허무하게 자결하고 말았다.(1644년)

요서 방어선이 붕괴된 뒤, 산해관은 오삼계의 지휘하에 청나라군을 막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이자성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자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투항하려다가, 이자성군이 그의 아버지인 오양을 고문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거느리고 청나라의 도르곤에게 투항했다.

원숭환의 사후 몇 십 여년 뒤 청나라의 제4대 성조 강희제의 치세때 강희제가 그에게 영상이라는 시호를 내려줬다.

원숭환은 청나라의 제6대 고종 건륭제의 치세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렇다고 이때에 이르러 원숭환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진 것은 아니다. 이미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건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청나라와 싸웠던 한족의 영웅이라 공식적인 복권이 늦어졌던 것뿐이었다.

원숭환의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나 반간계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 등이 건륭제 당시에 조작되는 이야기도 돌아다니지만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적었듯이 반간계는 원숭환이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나온 이야기이며,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은 영웅이라는 이미지도 건륭제 때 조작된 이미지가 절대 아니다. 다만 원숭환이 처형되는 시점에서부터 청나라 초기까지는 원숭환이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걸로 보인다. 당시에 기록된 야사 중에는 사람들이 반간계인 줄 알았는데 진짜 배신이었다는 식으로 이런 반역자 원숭환의 이미지가 그대로 나타나는 기록이 여럿 보인다. 하지만 강희제의 치세 중기쯤 되면 이미 원숭환에 대한 이미지는 완전히 반전되어 역사상 보기 드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명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1712년에 쓰인 《노가재 연행일기》[35][36]에 보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북경으로 가는 길에 영원 지방을 지나며 반간계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원숭환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때가 강희 51년이고, 당시 원숭환은 완전한 영웅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지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37]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그동안 소수의 만주족에 의해 핍박을 받았던 한족들에 의해 멸만흥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원숭환의 죽음은 중국 역사상 가장 억울한 죽음으로 꼽혔고, 그를 찬양하는 작업이 활발해졌다. 청나라 말기의 양계초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으로 《원독수전》(袁督師傳)을 지어 그를 기렸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서(光緖) 연간에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이 있었다. 그는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에다가 한족 민족주의자로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을 만들었다. 그는 원숭환을 죽인 것은 명나라지만 그 원인은 반간계를 쓴 청나라를 지목하여 청나라에 대한 한족의 반감을 고조시키고자 했다. 덕분에 원숭환은 반청 한족 민족주의의 상징같은 인물의 위치에 있게 되었고,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쉬운 위치에 있다 보니 아래 논란 부분에 나오는 엉뚱한 주장이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 중국에서도 원숭환에 대한 평가는 높다. 중국공산당 베이징에 입성하여 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직후인 1952년 베이징 시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지식인들이 마오쩌둥에게 원숭환의 묘 보전을 건의했고, 마오쩌둥 역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평가하며 당시 베이징 시장에게 원숭환 묘의 보전을 명령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분묘는 문화대혁명 홍위병한테 완전히 망가져서 평지가 되어버렸다.

그후 원숭환의 무덤은 복원되어 베이징 시내에 있고, 현재는 많은 중국인들이 그의 무덤에 헌화하며 영웅을 기리고 있다.

4. 평가

4.1. 명장 논쟁

원숭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이 옛날부터 있어 왔고, 현재도 그가 명장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우선 원숭환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요약하면 '명은 사르후 전투 패배 후 청에게 연전연패하다가 원숭환에 의해 겨우 명맥을 보존했는데 어이없게도 그가 지켜내고자 혼신을 다했던 명나라 황제 숭정제와 명 조정, 북경의 백성들이 그를 죽였고,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그의 죽음으로 명군의 전력은 물론이고 사기와 충성심도 저하되어 결국 명나라가 멸망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인데 이는 앞뒤 사실 관계를 무시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1) 홍이포 도입은 서광계가 했고, 산해관을 위시로 한 대청 방어선 구축이나 조선과의 연계 작전인 삼방포치책을 주장한 사람은 웅정필이다. 원숭환이 직접 한 일은 산해관 앞에 영원성을 짓고, 산해관의 홍이포를 영원성으로 옮겨 배치한 후 홍이포의 전문가인 손원화를 불러들여 부하들을 교육시킨 것 뿐이므로 청을 저지한 모든 군공을 모두 원숭환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되었다.

2) 공성전은 대포가 발명되어 실용화되기 전까지 공격 측이 방어 측보다 월등한 전력을 보유했어도 승리하기 힘든 전투 형태였다. 그런데 오히려 방어 측인 원숭환이 대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장기간도 저지한 것도 아닌 영원성 전투와 홍타이지 시절의 영원성, 금주성 전투를 원숭환의 군재를 고평가할 근거로 삼기에는 부적합하다.

3) 명은 원숭환 사후 14년이나 더 유지되었으며 청이 아니라 이자성에게 멸망하였다. 다시 말해 청은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어오지 못했고, 오삼계가 자발적으로 열어줘서 입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숭환 처형과 명의 멸망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4) 원숭환을 고평가하는 주장은 그 뿌리가 청에서 서술한 명사인데 청나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이전 왕조인 명나라를 폄하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명나라가 원숭환 같은 충신이자 명장을 어이없게도 스스로 죽였고, 그런 왕조가 멸망하는 것은 정당했다.'라는 것이다. 그 예로 청에서는 입관 후 원숭환의 자손을 찾았으나 이미 가문이 몰락하여 찾을 수 없었고, 건륭제는 원숭환의 죽음을 '1만 년에 1번 있을 억울한 죽음'으로 표현하였다. 자신들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적장을 이례적으로 고평가한 것은 만주족 정권으로서 한족 정권인 명나라를 도덕적으로 폄하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정치적 논리로 원숭환이 과대평가된 것이다. 또 청나라는 남송 시대에 여진족에 맞서 싸운 악비의 지위를 폄하하였는데, 과연 청나라가 원숭환을 자신의 호적수로 인정해서 고평가할 정도로 대범했다면 왜 악비에 대하여는 이렇게 박한 평가를 내렸는지 일관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하나씩 살펴 보면 이는 매우 잘못된 주장들이다.

일단 1)의 논리대로라면 세상에는 명장이라고 불릴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충무공 이순신도 왜선보다 훨씬 우수한 화포와 판옥선을 직접 만든 것은 아니며, 이순신 하면 떠오르는 거북선 또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이전부터 제작 논의가 상당히 있었던 것을 이순신이 실현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남긴 군대와 전술을 그대로 활용했을 뿐이고, 나폴레옹도 이미 당시 유럽 젊은 군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던 전술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명장의 조건은 적과 아군의 현실을 냉철히 파악한 후 장단점을 분석하고, 적의 피해를 극대화하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강구해 실현하는 것이다. 원숭환은 당시 기병 위주의 전투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후금군의 장점과 전력이 매우 약화된 데다가 연패로 사기까지 저하된 명군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그래서 평지에서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영원성을 쌓아 수성전을 계획하였고, 보급에 문제가 없도록 했으며, 휘하 병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연전연패로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끝까지 유지하는 등 명장이라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잘 수행하였다.

'그건 기본이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느 상황에서든 기본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말은 세상만사에 다 통하는 이야기이며, 특히 생사가 갈리는 현장이라 냉철한 판단력보다는 격한 감정과 공명심, 정치적 논리, 조급함 등이 앞서는 것이 만연할 수 밖에 없는 군사 부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 어렵잖은 기본도 못 해내서 운에 모든 것을 걸고 대충 추스린 병력으로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하다가 적만 도와주는 장면이 전쟁사에 수두룩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이 명청 전쟁에서 원숭환을 처형한 직후 숭정제는 원숭환의 부하 장수들에게 출전을 명했다가 대패를 당했고, 이후 명군을 대표하는 장군 홍승주는 재정 상태의 열악함을 이유로 속전속결을 주장하는 명 조정에 떠밀려 출전했다가 송산 전투에서 대패해 명의 중앙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청군에게 겁을 먹은 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최고 사령관인 홍승주를 방치하고 도주한 것도 패인 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 사기가 저하되어 청군과 이자성의 반군에게 투항한 지역은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이 논리대로라면 명의 관리들은 모두 기본도 못 한 쓰레기들이다. 그리고 원숭환이 별 볼일 없었으면 그에게 진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위대한 정복자에서 폐기물로 격하된다.

그리고 영원성 전투는 누르하치를 고작 이틀밖에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불과 이틀만에 격퇴한 것이다. 일생동안 승리밖에 몰랐던 누르하치라는 영걸을 이틀만에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나게 만든 인물이 원숭환인 것이다. 누르하치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탄식하며 상심한 기록은 원숭환 숭배자의 창작이 아니라 누르하치의 후손들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또한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국정 운영 능력이든 군사적 재능이든 아버지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모자란다고 평가하는 이가 없고, 사후 묘호 중에서도 가장 영예로운 묘호인 '태종'을 받은 인물이 홍타이지인데 일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영원과 금주 사이를 소득 없이 오가면서 기력만 허비하다 물러나며 체면을 완전히 구긴 게 영원-금주성 전투(영금대첩)였다.

여기서도 홍타이지의 현명함이 드러나는데 전쟁에 패해 일생일대의 망신을 당했음에도 '원숭환이 있는 산해관 방어선을 군사적으로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명나라의 혼란한 정계와 의심 많은 숭정제의 성격을 이용하여 명나라 스스로 원숭환을 제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이성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승승장구만 거듭해 온 제갈각이 합비 전투에서 패배한 후 폭주하다가 죽음을 자초한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청태종은 영웅이며 이것이 전술한 명장의 기준인 것이다.

그리고 홍이포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여 홍이포가 있는 원숭환의 명군과 그렇지 못한 후금군의 전투를 제국주의 시절 유럽 근대식 군대와 아프리카 원주민들 또는 아편전쟁 때 영국군과 청군이 벌인 전투를 떠올리면 안 된다. 물론 홍이포가 당시 기준으로 가공할 무기였던 것은 사실이나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포와 달리, 폭발성이 없는 쇠구슬을 빠른 속도로 날리는 것으로 상대가 홍이포가 없다고 필승을 장담할 화력 무기까지는 아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추가하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홍이포와 비슷한 원리의 화포를 가지고 연전연승하다가 이순신이 파직된 후, 그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의 지휘 하에서는 기존의 병력과 화포를 고스란히 갖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였다. 심지어 당대 뿐 아니라 그로부터 무려 약 180년 후, 그것도 동양보다 무기 기술이 발전했던 서양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음을 트라팔가 해전을 통해 알 수 있다. 단종진(동양식 명칭으로는 학익진)을 펴고 포격 섬멸을 시도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연합함대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종대로 돌진해 쪼개버렸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원숭환 시절에 단지 '포의 보유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했다.'고 볼 수 없었으며, '지휘관의 운용 능력이 승패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원숭환은 공성전 뿐 아니라 기사년에 급히 장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친 병력으로 후금의 선봉군을 대적해 연전연승했으며, 휘하 군사들은 행군과 전투로 지쳤고 성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원숭환의 지휘에 충실히 따랐다. 원숭환 이전 명군은 후금군에게 공성전과 야전을 막론하고 연전연패했는데 원숭환이 통솔한 명군은 청군에게 전승한 것이다. 이런 군사적 능력과 통솔력을 가진 인물을 명장이라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명장이라 부를 인물은 없을 것이다.

원숭환이 죽은 뒤에 명이 14년이나 유지되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계산한 정말 근시안적인 주장이다. 일단 원숭환이 생전 산해관 방어선을 잘 구축해뒀기에 그나마 명이 14년이나 버텼다고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원숭환의 처형은 당장 명의 멸망을 불러오지는 않았지만 명나라 장졸들에게 목숨 걸고 사직에 충성할 이유를 앗아갔다. 당장 본문에 원숭환과 관련된 조대수 등 인물들은 투항하려 했고,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제외하면 영원성을 포함한 다른 성들은 차례로 무너졌으며, 청군의 침입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명나라 장수들이 많아졌다고 이미 서술되어 있다.[38]

원숭환 비판론자들은 원숭환 고평가가 만주족 국가인 청의 중국 지배 정당성 주장을 위한 정치적 논리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나, 비판론 역시 정치적 논리에 뿌리를 둔다. 모택동은 자신이 국공내전 당시 게릴라전을 애용한 탓인지 몰라도 부분적으로나마 그런 역할을 수행한 모문룡을 꽤 고평가했는데 중국 어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중국 역사학계 또한 정치에 자유롭지 못한 이상 모문룡을 고평가하는 주장이 나올 수 밖에 없고, 결국 모문룡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면 그를 처형한 원숭환을 다소 폄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원숭환 비판론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모택동이나 현대 중국 사학계와는 달리 청은 원숭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입장이었다. 원숭환은 청의 건국자인 누르하치와 청의 근간을 마련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겼고, 어느 나라이든 역사를 기록할 때 자국에게 불리하거나 부끄러운 것은 최대한 누락하거나 두루뭉술하게 서술해 감추려 하는데 청은 두 패전 모두를 그대로 사서에 실었다. 명을 폄하해서 중국 지배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자신들의 건국 황제들이 패전한 기록들을 이용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다.[39]

4.2. 모문룡 처형

전술했듯이 원숭환이 명장이 아니라는 주장은 궤변이고, 모문룡이 문제가 많았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독단으로 모문룡을 처형한 것은 오랫동안 큰 논란거리이다. 원숭환을 호의적으로 평하는 청나라에서 기술한 명사에서도 '원숭환이 모문룡을 함부로 죽였다.'고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고, 주군을 잃은 모문룡의 부하들과 함대가 훗날 청나라에 투항해 크게 활약했으므로 원숭환의 치명적인 실책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원숭환이 모문룡을 명 조정이나 숭정제에게 알리지 않고 죽인 것은 상황을 보면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당시 명의 정상적인 체계를 통해 조정과 숭정제에게 모문룡 처형을 주청하고, 숭정제가 조정 대신들과 논의를 거쳐서 모문룡을 처형한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형 주청 자체가 기각될 가능성도 있고, 설령 결정이 내려져도 논의되는 과정에서 이미 모문룡에게 호의적인 엄당 세력에 의해 모문룡도 원숭환이 자신을 죽이려 함을 다 알게 될 것이다. 전화나 이메일이 있던 시절도 아니라서[40] 숭정제에게 몰래 직보한다 해도 환관들의 손을 거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엄당 세력에 의해 정보가 새어나갈 수 밖에 없다.

조선 역관 장예충 앞에서 '호적(후금, 청)이 나를 유예로 삼으려 한다.' 라고 하거나 본국에 보내는 상주문에 '남경(南京)을 취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 라는 대역무도한 말을 쓰고, 인조에게조차 '황제같은 지존에게도 꺼리는 바가 없는 자' 라는 평을 들은 모문룡이 숭정제와 명 조정의 처형 결정에 순순히 목을 내놓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분명 모문룡은 명이나 동맹국 조선으로 칼끝을 돌렸거나, 전 병력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여 2만 8천여 명의 함대가 그대로 적의 손에 떨어지는 엄청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문룡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게,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하면서 조목조목 내뱉은 처형 이유만 해도 12가지나 되었는데 이를 계속 좌시하는 것은 병부를 총괄하는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의 직무유기이다.

거기다 모문룡의 횡포로 조선에서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명에 대한 악감정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수군이 강하다는 인식이 명과 청에 퍼져 있었고, 만약 조선이 청과 손을 잡고 명을 적대하게 되면 청은 굳이 산해관을 공략할 필요도 없이 조선 수군과 합세하여 바다를 통해 북경 근처나 산둥 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러면 명의 산해관 방어선은 유명무실해지며 설령 이를 격퇴한다고 해도 그 피해는 막대할 것이었으므로 조선이 청과 제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청의 후방을 공략하는 것이 명이 모문룡에게 내린 임무였다. 그런데 모문룡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는커녕 조선을 상대로 행패를 일삼아 조선에게 명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고 있었으니 이는 명이 청을 상대하는 기본 전략을 뿌리채 뒤흔드는 꼴이었고, 결국 원숭환이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선참후보(先斬後報) 뿐이었다.

또한 원숭환은 모문룡만 주살했을 뿐 가도의 진영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휘하인 부총병 서부주(徐敷奏)를 붙여 감시하긴 했으나 가도 진영 지휘 자체는 모문룡의 부하인 진계성에게 맡겼고, 모문룡을 처형한 후 가도의 군대 2만 8천여 명을 4군으로 나눌 때 모문룡의 아들을 한 군의 수장으로 삼았으며, 모문룡의 부하들이 배신할까 봐 급료도 올려주었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투항한 것은 원숭환이 처형당하고 2년이 지난 후의 일로 모문룡 처형이 후금이 해군력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홍이포를 통한 공성전 전략이 무력화되는데 일조하였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공유덕과 경중명은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평소 요동 장병들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동래순무 손원화(孫元化)에 의해 유격에 임명된 자들이다. 그러다가 1631년 대릉하성이 청에게 포위되자 명에서는 이들에게 1,000명의 병력을 주어 대릉하성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들은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산둥의 임읍성과 능사성 등을 공격하였다. 이후 이들은 등주성을 공격하여 요동 출신 두승공의 내응을 얻어 함락에 성공하였고, 명 조정은 끝까지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 둘은 이를 무시하고 북경으로 진군하다가 토벌군에게 패하자 후금으로 귀순한 것이다.

정리하면 모문룡의 세력들은 원숭환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명나라로부터 홀대는커녕 후대를 받아 왔고, 별다른 이유 없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후금으로 귀순한 것인데 이는 공유덕과 경중명의 야심, 당대 명나라 정치의 잔혹성, 숭정제의 의심병 등에서 원인을 찾아야지 원숭환의 책임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4.3. 성격

청나라 때의 《석궤서》라는 사서에서는 원숭환이 조포했다고 서술했는데 이는 조급하고 포악함이란 뜻이다. 앞서 말한 모문룡의 처형은 어느 정도 옹호의 여지가 있으나, 원숭환이 원칙을 무시한 행동을 해 온 전적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다소 독선적이었음은 분명하다.

능력은 당대 평가에서도 나타나듯 매우 뛰어나고, 문무 모두에 두각을 나타낸 엘리트이며 군사적 능력 또한 중국사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만한 명장이지만, 사회적 지능이 원체 떨어지는데다가 처세술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정도로 떨어지는 편이어서 결국 참소로 인해 목이 떨어진 명장이다. 그러나 참소 탓만 하기에는 숙청 당할만한 짓을 너무 많이 하기도 했다.

본문 상단에서 말한 것처럼 제멋대로 적정 탐색을 하고 온 적도 있었고, 감군으로 있었던 도중 병사들의 수가 안 맞자 독단적으로 군관을 처형하는 월권 행위를 단행했다가 손승종이 크게 화를 내자 엎드려 사죄했다는 기록도 있다. 능력에 대한 자부심 때문인지 독선적인 면이 강해서 지위가 동등하거나 혹은 높은 사람들과 갈등이 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억울하게 죽었던 것도 이런 성격으로 인해 적을 많이 만들었던 측면도 있다. 문제는 당시 황제인 숭정제도 상당히 의심이 많고 관리들 잘못에 결벽증 증상이 보일 정도로 엄했다는 것이다. 즉 원숭환과 숭정제의 악연은 이런 성격에서 오는 갈등도 크다.

결국 어찌보면 다정다감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찌보면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졌다. 이런 성격이 그를 비극적 최후로 이끈 듯 하다. 모문룡을 유인해서 처형할 때, 본인이 모문룡의 죄상을 실컷 나열해 꾸짖은 다음 참살하고도 다음날 곡을 하면서 모문룡의 위패를 놓고 조문했다고 한다. 부하들이 괴이쩍게 여기자 "모장군은 나의 전우였다. 내가 비록 상관으로서 그의 죄를 물어 처형했지만, 어찌 전우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했다고 한다. 영원성 전투에서도 누르하치가 패퇴하자 전사한 후금군의 시신을 훼손하지 않고 수습해 보내주었고, 누르하치는 그 신사적 태도에 감명을 받아 수천필의 베를 답례로 보냈다. 이후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조문사절까지 보냈고, 이 때문에 후금과 명은 몇년간 휴전을 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 후금은 정묘호란 및 내몽골 합병을 추진했고, 명나라는 만리장성 방어선을 정비한다.

5. 대중 매체에서


[1] 청나라의 제4대 성조 강희제가 추봉해준 시호. [2] 당시에는 문신도 군사를 지휘했다. 후술되는 내용 참조. [3] 공성전 뿐만이 아니고 무려 야전에서 격파했다. [4]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 모두 서로마 제국 말기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이민족의 침략을 저지하고 조국의 멸망을 늦추었으나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처형당하거나 암살당했다는 점에서 원숭환과 비슷한 점이 많다. [5]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종군한 총병 유정은 무관이었고, 부총병 양호는 문관이었다. [6] 분업화와 전문화를 통한 효율성을 중시하는 현대의 눈으로 보면 그다지 좋은 방침은 아니다. 원숭환이나 웅정필처럼 문관임에도 성과를 거둔 경우도 있지만, 사르후 전투의 판도 자체를 잘못 짜서 패배의 단초를 만든 양호 같은 사례도 있다. 다만 양호는 임진왜란에서는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을 보여줬다. [7] 고대~중세의 무관이란 현대의 직업 장교와 달리 전문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단지 군에서 오래 생활했거나 개인적인 무력 또는 체격이 뛰어날 뿐인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문맹인 경우도 많아서 전문적으로 글을 읽어주거나 문서를 작성해 주는 문사들이 동행해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에 전근대 동양에서는 대국적인 안목을 갖춘 무관이 없을 경우 군사 부문에 소양을 가진 문관이 무관을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중국의 경우 송나라 명나라가 특히 심한 편이었고, 반대로 정복국가인 원나라 청나라에서는 그런 경우가 드물었다. 사무라이(무사) 계급이 줄곧 사회 지도층이었던 일본이나 무관의 사회적 지위가 고려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졌던 조선도 무관의 자질이 높은 편이라 문관이 무관을 지휘해 전쟁을 이끌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8] 사실 원숭환의 행동은 근무지 무단이탈 등으로 중형을 받을 수도 있는 사항이었지만, 당시 명나라는 상황이 말이 아니었고, 원숭환의 행동도 적을 정탐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9] 원문: 只要給我兵馬糧草,我一人足以守住山海關.(《 명사》, 권 259) [10] 왕화정은 위충현한테 뇌물을 바쳐 무사했으나, 훗날 숭정제 때인 1632년, 이때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11] 특히 사르후 전투에서 많은 군마를 상실했고, 명나라의 재정이 나빠져서 대규모의 기병을 양성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12] 누르하치는 원숭환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300,000명의 대군으로 자칭했고 뒤의 기록에도 160,000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당시 후금의 인구가 300만 명이며, 동원 능력 등을 고려해보면 실제로는 10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13] 그나마도 능지형이 아니고, 자살로 죽을 수 있었던 건 희종 천계제가 총애했던 덕분에 내려진 관대한 조치였다. [14] 조선의 병조판서와 동일한 역할을 하는 직책이다. 물론 제국과 왕국의 차이 때문에 의전상 품계는 3품씩 차이나지만… 즉 현대의 국방부 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 [15] 발해 또한 일본이나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물자를 확보했고, 고구려도 초기에는 약탈 경제였다는 것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나마 고구려는 훗날 황해도, 평안도, 경기도 일부 등 한반도의 비옥한 영토를 차지해서 나름대로 자급을 이루었으나, 그렇지 못했던 발해는 계속 교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16] 사실 설령 조선이 무역에 적극적이었더라도 현물경제인 당시 조선의 상업 수준을 고려하면 후금이 무역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 임진왜란 때 명군 장수들이 자국과 달리 조선의 교통로와 화폐가 발달하지 않아 보급품 확보가 힘들다고 토로할 정도로 조선은 상업 수준이 낮았다. [17] 이때문에 청태종이 인조한테서 항복을 받고 난 후, 군대에 약탈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청군은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18] 정묘호란은 후금이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었다. 모문룡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일어났을 전쟁이다. [19] 정확하게 말하면 원숭환은 모문룡의 직속 상관이 아니었다. 원숭환은 1628년 행변독수계요천진등래등처군무[43] 겸 병부상서 및 우부도어사로 임명되었지만, 모문룡[44]은 병부 소속도 아니었고,[45] 계료독사가 관할하는 지역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46] 거기다가 독자적인 사법권까지 각자 가지고 있었기에 원숭환이 허가없이 죽이는 것에는 사실 문제가 있었다. 원래는 요동경략 정도가 후금의 공격에 대한 방어와 점령된 실지 회복을 담당했으나, 명나라 조정 내부의 혼란으로 인하여 전선의 상황이 악화되고, 거짓 공적을 내세우는 자들이 생기면서 해당 지역 담당관들의 지휘급이 쓸데없이 높아졌다. [20] 제후국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공격해서 차지하겠다는 건, 명나라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한 상황이었기에 원숭환이 분노한 건 당연했다. [21]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일 때 열거한 죄만 봐도 비록 12가지나 되지만 그 죄목도 기군망상, 횡령, 밀무역, 도적질, 전투 회피 같은 것들이었지 후금과 내통했다는 죄목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모문룡의 목적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목적이었을 뿐 역모를 해서 반역자가 되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22] 숭정제 입장에선 원숭환이 다른 마음을 먹게 되면 막을 수단이 없기 때문이었다. [23] 효장문황후를 포함한 홍타이지의 호르친부 출신 5비들이 이 과정에서 홍타이지의 처첩이 되었다. [24] 선제인 희종 천계제 시절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형성한 당파로, (閹)은 환관이라는 뜻이다. 환관인 위충현이 만든 정파라서 엄당이라고 불리지만 주요 인사들은 환관이 아닌 조정 대신들이었다. 숭정제 즉위와 함께 세력이 약해지지만 그래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대항해서 마지막 싸움을 힘겹게 벌일 때도 이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25] 지금의 허베이성 탕산시 쭌화시. [26] 내부에 후금과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7] 원숭환이 반역을 일으킬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28] 북경성 남쪽 교외에 위치한 명, 청 황실의 사냥터였다. 현재 이곳에는 공원이 들어서 있다. [29] 현재의 베이징시 퉁저우구. [30] 당장 항우도 진평의 유치한 함정에 속아 범증을 내쳤을 정도니 말 다했다. [31] 명말청초를 다룬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 삼국지연의에서 배운 이간책이 현실에서도 통할 줄 몰랐다면서 홍타이지가 감탄한다. [32] 산 채로 뼈와 살을 발라내는 형벌로 중국에서도 웬만한 중죄인이 아니면 집행을 하지 않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33] 모문룡의 가족이 원숭환이 보는 앞에서 나눠진 그의 살을 씹었다는 설도 있다. [34] 물을 건널 때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라는 건 전근대전에서 병가의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군사들은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35] 1712년 동지사겸 사은사인 김창집의 아우 김창업이 자제군관으로 형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이다. 수많은 연행 기행문 중에서도 발군으로 박지원의 《 열하일기》와는 또 다른 읽는 재미가 있다. [36] 한국고전 종합DB로 들어가 서명에서 연행록선집을 찾은 뒤 다시 연행일기 항목으로 들어가면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 [37] 영원성을 지나갈 때 짧게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가 역사에 밝지는 않은지 원숭환이나 기타 당시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앞뒤가 좀 맞지 않거나 과장되거나 하는 부분들이 보인다. 그냥 민간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고 옮긴 듯 하다. [38] 이해를 돕기 위해 유사 사례를 들면 이오시프 스탈린 대숙청이 있다. 인력 손실도 문제였으나, 공포 분위기로 소련 군부 인사들 모두 상관의 입만 바라보는 수동적 기계가 되어버렸고, 이는 독소전쟁 초기의 소련군 수백만 명이 공격도 후퇴도 못 하다가 궤멸당하는 참사로 이어진다. [39]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정해보면 미국이나 인도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식민지였던 시절에 영국의 주도로 학살 등 비인간적인 사건이 있었다면 자신들의 독립 정당성을 뒷받침할 훌륭한 근거로 들 수 있겠으나, 그 사건에 자신들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이나 마하트마 간디가 개입되었다면 세상에 크게 드러나는 것이 꺼려질 것이다. [40] 이것이 과거 군주의 통치난이도를 올리는 가장 큰 원인이다. 현대였으면 숭정제가 몰래 텔레그램 연락 계정을 만들어서 원숭환에게 알려준 다음 '중요한 일은 주변에 알리지 말고 여기로 직통해라'라고 지시하면 가장 좋았겠지만, 당시에는 보고를 올려도 직접 가는데 수십일이 걸렸던 시대이다. [41] 판빙빙 주연. [42] 처형당하는 동안 원숭환의 괴로워하는 표정과 손짓이 대사 없이 클로즈업되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