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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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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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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0년병주지도.png
1. 개요2. 태원군(太原郡)3. 상당군(上黨郡)4. 낙평군(樂平郡)5. 안문군(雁門郡)6. 신흥군(新興郡)
6.1. 오원군(五原郡)6.2. 삭방군(朔方郡)6.3. 운중군(雲中郡)6.4. 정양군(定襄郡)
7. 서하군(西河郡)
7.1. 상군(上郡)
8. 같이보기

1. 개요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원래 관중의 북부 지방을 가리키던 지방 이름인 병주(幷州)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병주자사부가 되었다. 당시에는 병주를 동·서로 양분하여 서부 지역에 자사를 별개로 두었는데 삭방군 방향에 있었기에 삭방자사부(朔方刺史部)로 명명했다. 왕망이 삭방자사부를 폐지하였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는데, 후한 때인 기원후 45년에 다시 폐지하여 병주자사부에 합병했다.

당시 병주 서부 및 북부에 위치한 현대의 오르도스 지방은 고대에도 정주민들이 살기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나라 진나라는 오르도스를 영토화하기 위해 무수한 공을 들였는데, 두 나라 간에 영토 쟁탈이 목적이 아니라, 이 지방이 두 나라에 적대적인 유목민들의 터전이 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진나라 위치한 관중 지방은 동쪽이나 남쪽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기에는 수월한 지형이나 북쪽으로는 개방되어 있어 원래부터 이민족들의 공격에 취약했으며, 실제로 주나라도 그렇게 붕괴해 춘추전국시대라는 유례없는 혼란기가 발생했다. 조나라도 황하 유역인 서북부 지역의 개방된 지역을 통한 유목민들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당해 왔기에, 이를 최소화하려면 황하 유역을 개척해 이 방면이 침공하는 유목민들의 거점으로 활용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진나라가 통일 이후에 괜히 국력을 무리하게 소진해 가며 자신들의 장성과 옛 조나라의 장성을 연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며, 한무제 또한 괜히 오르도스와 그 주변 지역으로 이어지는 장성[障塞]을 더욱 보강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었다.

후한 초기 팽총이 반란을 일으키며 흉노와 연합하자 흉노가 운중군 일대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거점으로 삼았고, 팽총이 패망한 뒤에도 유지되었다. 37년에는 흉노가 하동군까지 침입하는 일이 일어났기에, 이때 일시적으로 오르도스 지방을 포기하고 주민들을 상산관·거용관 이동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흉노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48년에는 남흉노 선우가 후한에 투항하면서, 후한은 다시 오르도스 지방의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후한은 오르도스 지방에 후한의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력만 배치하려 했고, 이 지방에서 거주하는 한족 주민들도 최소한으로 보냈다.[1] 특히 후한은 이미 오르도스로 들어온 남흉노와 오환 등을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오르도스 방면의 방어을 맡겼다. 장성[障塞] 또한 최소한으로만 관리했기에, 125년에는 남흉노선우가 삭방군 지역의 장성을 복구해 달라고 청원하는 일까지 있었다.

후한 말에는 흑산적이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공손찬 추단을 병주자사로 임명한 적이 있으나, 공손찬의 세력이 위축되면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원소가 외조카 고간을 병주자사로 임명했다. 원소 사후에 조조가 업현을 점령했을 때 고간은 조조에게 협력하여 그 세력을 인정받았지만, 이후 조조가 북진하는 틈을 타 기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213년에 조조가 구주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병주를 폐지하고 기주에 합병했다. 이후 215년엔 오원군·삭방군·운중군·정양군 4군을 폐지하여 그 주민들을 태원군 지역에 교치(僑置)[2]해 신흥군을 설치했다. 이 무렵 상군·서하군·북지군이 폐지되고, 그리고 안문군·대군·안정군의 북부지역에 있던 현들도 비슷한 시점에 폐지되거나 교치되었는데, 모두 오르도스 지방에 있던 군·현들이다.

당시 조조가 어떤 이유에서 7개의 군과 오르도스 일대의 현을 폐지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고 있다. 하지만 행정상 효율을 위해 전국시대 조나라와 진나라 때부터 수백 년간 이어져 왔던 영토를 포기했다기엔, 광무제처럼 행정 효율성을 매우 중시했던 인물조차 오르도스 일대를 수복한 뒤에 곧장 군·현을 복구한 사례와 대비되고,[3] 이 시점엔 북방 경계를 위협하는 세력이 전무했던 점에서,[4] 조조의 영토 포기 원인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이 당시 조조는 남흉노선우 호주천을 억류하고[5] 유표 거비를 통해 남흉노를 통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때, 남흉노의 통제를 강화하여 오르도스 일대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흉노중랑장 5부 체제는 어느새 흐지부지되었고, 조비가 선양을 받은 이후로 가비능이 대두되면서 위나라와 선비족은 한나라 장성 이남 지역에서 충돌하게 된다.[6] 3세기 전반기에 독발부는 하서 지방에 거점을 마련했으며, 258년에는 탁발부가 옛 운중군 성양현을 거점으로 삼는 등, 이미 3세기 중엽에는 선비족이 폐지된 군·현 일대에 정착한 것으로 분석된다. 3세기 후반에는 하서 지방의 일개 선비족 분파 수장인 독발수기능이 진주(秦州)·양주(涼州)의 토착세력인 강족과 연계하여 서진을 침략했는데,[7] 이전에 동쪽으로는 요동에서 서쪽으로는 하서회랑까지 아우른 거대 선비 집단의 수장이었던 단석괴나 가비능이 우습게 보일 수준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8]

위나라는 231년에 흉노중랑장 관제를 복구하였으나, 오르도스 지방을 수복하지는 않았다. 이민족 수장들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위나라 말부턴 이민족 수장들이 이민족 편성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흉노중랑장의 예하 부대도 남흉노 수장들이 도위(都尉)로 임명되기 시작했다.[9] 서진 때에는 좌부수(左部帥) 유연이 흉노중랑장의 북부도위로 임명되었는데, 황태후 양씨의 신임을 받아 흉노 5부 대도독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유연은 서진 영토 내외의 남흉노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팔왕의 난이 진행되는 동안 서하군 이석현의 좌국성에서 대선우으로 추대되어 자립했다. 이후 304년에 한왕(漢王)을 자칭하여 전조(前趙)의 전신이 되는 한나라를 세웠고, 팔왕의 난이 종결될 무렵에는 사주(司州) 평양군까지 점령했다. 이미 유연 생전에 홍농군 일대에서 서진과 교전이 일어나는 등 서진 수도인 낙양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결국 311년에 유총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서진이 붕괴되었으나, 전조는 서진을 대신할만한 역량을 갖추진 못하여, 화북 지방에선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된다.

이 혼란을 계기로 선비족들은 더 남하하여 화북 지방 곳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결국 탁발부의 북위가 화북 지방을 통일했다. 하지만 북위 초부터 몽골 고원의 유연과 대립했기에, 북위는 역으로 화북 지방을 방어하는 입장이 되었다. 423년에 명원제는 다시 오르도스 북부에 2천 여리의 장성을 쌓아 유연의 침략에 대비했고, 이후에도 몇 차례 증·개축이 이뤄졌다.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이후에도 관롱 지방은 잦은 반란으로 통제력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진나라 때처럼 황하 북류구간인 서부에는 장성을 운영하진 못했다. 결국 북위는 수도 평성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평성 남부에 기상새위(畿上塞圍)라는 새로운 장성 노선을 보강해 이중으로 방어선을 형성했다.[10] 장성 축조는 북위가 분열된 뒤에도 동위- 북제 서위- 북주에서도 지속되었다. 이처럼 선비족 왕조에서도 오르도스의 전략적 가치는 중시되어 그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상당한 노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수양제가 기존의 북조 장성을 대대적으로 보강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수나라가 멸망해버리면서 오르도스 지방을 감싸는 형태의 장성은 더이상 축조되지 않게 되었다. 당나라 때에는 북조 시절 기상새위 이남 지역을 변주(邊州)로 편성했고, 황하 유역 북부는 기미주(羈縻州)를 설치하거나 기미주마저 설치할 수 없는 곳에는 군진(軍鎭)을 직접 운영해가며 영토로 유지할 수 있었다.[11] 이는 당시 몽골 고원을 차지한 돌궐이 이러한 군정체제를 무너뜨릴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오르도스 북부를 차지한 명나라 초기엔 당나라 때와 유사한 방식으로 대동부(大同府)를 거점으로 하는 산서행도지휘사사(山西行都指揮使司, 일명 산서행도사) 관할의 군정 지역으로 편성했으나, 이는 오이라트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무산되었다.

2. 태원군(太原郡)

지명 [-247]태원군→[26]태원국(太原國)→[37]태원군→[265]태원국
소속 진(秦)→[한]병주자사부→[213]기주→[220]병주→[263]진국(晉國)→[265]병주→[서진]병주
치소 진양현
분합 [215]신흥군: 여제현
[221]서하군: 자지현·계휴현
출신 진양현: 왕창 일족
양곡현: 곽회
기현: 왕윤· 왕릉
자지현: 장창포
봉작 사마소: 진공(263~)→왕(264~265)
사마양(司馬瓖): 태원왕(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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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군: 진양현, 대릉현, 습현, 자지현, 평도현, 고랑현, 상애현, 인현, 이석현, 유차현, 기현, 중도현, 양곡현, 낭맹현, 오현, 양읍현, 여제현, 사인현, 우현, 계휴현, 광무현, 기양현(沂陽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태원군(21현 169,863호 680,488구): 진양현, 사인현, 계휴현, 유차현, 중도현, 우리현, 자지현, 낭맹현, 오현, 우현, 평도현, 분양현, 경릉현, 양곡현, 대릉현, 원평현, 기현, 상애현, 여제현, 양읍현, 광무현
진양현→계미현(界美縣), 유차현→대원정현(大原亭縣), 우리현→우합현(于合縣), 자지현→자동현(茲同縣), 낭맹현→낭조현(狼調縣), 평도현→다양현(多穰縣), 경릉현→치성현(致城縣), 대릉현→대녕현(大寧縣), 기현→시현(示縣), 양읍현→번양현(繁穰縣), 광무현→신환현(信桓縣)
후한 태원군(16성 30,902호 200,124구): 진양현, 계휴현, 유차현, 중도현, 우리현, 자지현, 낭맹현, 오현, 우현, 평도현, 경릉현, 양곡현, 대릉현, 기현, 여제현, 양읍현
서진 태원국(13현 14,000호): 진양현, 양곡현, 유차현, 우리현, 우현, 낭맹현, 양읍현, 대릉현, 기현, 평도현, 경릉현, 중도현, 오현 }}}}}}}}}

3. 상당군(上黨郡)

소속 진(秦)→[한]병주자사부→[213]기주→[220]병주→[263]진국(晉國)→[265]병주→[서진]병주
치소 [진]장자현→[삼국]호관현→[서진]현지현
분합 [215]낙평군: 첨현
설치 [215]요하현(열현 분할), [265]무향현
전출 [서진]요하현→낙평군
폐지 [서진]기지현·양아현·곡원현(서하군 계휴현에 합병)
봉작 사마소: 진공(263~)→왕(264~265)
유거: 상당왕(259~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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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군: 장자현, 둔류현, 동제현, 양원현, 노현, 여오현, 단지현, 기지현, 현지현, 고도현, 열현, 호관현, 섭현, 알어현 이외 미상
전한 상당군(14현 73,798호 337,766구): 장자현, 둔류현, 여오현, 동제현, 첨현, 열지현, 양원현, 호관현, 현지현, 고도현, 노현, 기지현, 양아현, 곡원현
양원현→상당정현(上黨亭縣), 곡원현→곡근현(穀近縣)
후한 상당군(13성 26,222호 127,403구): 장자현, 둔류현, 동제현, 첨현, 열현, 양원현, 호관현, 현지현, 고도현, 노현, 기지현, 양아국, 곡원현
서진 상당군(10현 13,000호): 노현, 둔류현, 호관현, 장자현, 현지현, 고도현, 동제현, 열현, 양원현, 무향현 }}}}}}}}}

4. 낙평군(樂平郡)

215년에 상당군 첨현 및 상산군 상애현을 분할해 설치했다.
소속 [215]기주→[220]병주→[263]진국(晉國)→[265]병주→[서진]병주
치소 첨현
전입 [215]상당군 첨현 및 상산군 상애현, [서진]상당군 요하현
설치 [215?]낙평현(첨현 분할), [266?]수양현(태원군 분할)
봉작 사마소: 진공(263~)→왕(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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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낙평군(5현 4,300호): 첨현, 상애현, 수양현, 요양현, 낙평현 }}}}}}}}}

5. 안문군(雁門郡)

'鴈門郡'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전국시대에 조(趙)나라 무령왕이 누번과 임호를 무찌른 뒤에 설치했다. 후한 초기 오르도스 지방을 점거한 흉노가 세력을 더 확장하였기에 39년에 안문군을 폐지하였다가, 50년에 복구했다.
소속 조(趙)→진(秦)→[전한]병주자사부→[39]흉노, [50]병주자사부→[213]기주→[220]병주→[263]진국(晉國)→[265]병주→[서진]병주
치소 [진]선무현→[50]음관현→[215?]광무현
설치 [서진]번치현(재설치)·곽현(재설치)·마읍현(재설치)·사인현
폐지 [215?]번치현·곽현·마읍현·무주현·날현·노성현·강음현, [서진]음관현·누번현·극양현
출신 마읍현: 장료
봉작 사마소: 진공(263~)→왕(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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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군(17현): 선무현, 평성현, 마읍현, 누번현, 옥양현, 곽현, 번치현, 왕도현, 날현, 신성현(新城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안문군(14현 73,138호 293,454구): 선무현, 옥양현, 번치현, 중릉현, 음관현, 누번현, 무주현, 왕도현, 극양현, 곽현, 평성현, 날현, 마읍현, 강음현
안문군진적군(塡狄郡), 선무현→음관현(陰館縣), 옥양현→경양현(敬陽縣), 번치현→당요현(當要縣), 중릉현→차해현(遮害縣), 음관현→부대현(富代縣), 무주현→환주현(桓州縣), 극양현→선양현(善陽縣), 곽현→곽장현(崞張縣), 평성현→평순현(平順縣), 날현→진적정현(塡狄亭縣), 마읍현→장소국(章昭國), 강음현→복음현(伏陰縣)
후한 안문군(14성 31,862호 249,000구): 음관현, 번치현, 누번현, 무주현, 왕도현, 극양현, 곽현, 평성현, 날현, 마읍현, 노성현, 광무현, 원평현, 강음현
서진 안문군(8현 12,700호): 광무현, 곽현, 왕도현, 평성현, 사인현, 번치현, 원평현, 마읍현 }}}}}}}}}

6. 신흥군(新興郡)

215년에 조조 오르도스 지방 영역을 포기하여 오원군·삭방군·운중군·정양군 4군을 폐지하고 그 주민들을 태원군의 양곡현·여제현 일대에 옮겨와 설치했다. 옛 오원군 주민들로 구원현을, 옛 운중군 주민들로 운중현을, 옛 삭방군 주민들로 광목현을 설치하고, 옛 정양군 주민들을 양곡현에 이주시켜 정양현으로 고쳤으며, 기존의 태원군 여제현만 신흥군에 남고 양곡현은 이전되었다. 『삼국지』 명제기에는 235년에 삭방군을 다시 설치했다고 전하는데, 이전의 삭방군을 다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광목현이 신흥군의 다른 지역과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인근의 태원군 소속 현들과 함께 삭방군으로 운영했다가, 253년에 군·현이 일괄 폐지될 때 환원된 것으로 보인다.
소속 [215]기주→[220]병주→[263]진국(晉國)→[265]병주→[서진]병주
치소 구원현
삭방군: 광목현?
분합 [235]삭방군→[253?]신흥군에 합병: 광목현 이외 미상[14]
전입 [215]태원군 여제현
설치 [215]구원현·광목현·운중현·정양현, [266?]진창현
폐지 [서진]여제현
봉작 사마소: 진공(263~)→왕(264~265)
유순: 신흥왕(259~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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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신흥군(5현 9,000호): 구원현, 정양현, 운중현, 광목현, 진창현 }}}}}}}}}
신흥군이 설치되었을 때 오르도스 4군의 한족 주민들만 이주한 것은 아니었고, 오르도스 지역에 살던 남흉노와 오환족도 대거 이주시켰다. 특히 남흉노는 흉노중랑장의 직할부대로 편제되어, 중부 6천여 부락은 태원군 대릉현, 좌부 1만여 부락은 태원군(서하군) 자지현, 우부 6천여 부락은 태원군 기현, 남부 3천여 부락은 하동군(평양군) 포자현, 북부 4천여 부락은 신흥군 구원현 주변에 배치되었다.

6.1. 오원군(五原郡)

원래 진(秦)나라가 설치한 구원군(九原郡)이었는데, 흉노의 영역이 되었다가 전한 때인 기원전 127년에 이를 수복하고 오원군을 설치했다. 후한 초기 오르도스 지방을 점거한 흉노가 세력을 더 확장하였기에 44년에 오원군을 폐지하였다가, 50년에 복구했다. 215년에 폐지되어 신흥군 구원현으로 교치되었다.
지명 [진]구원군, [한]오원군
소속 진(秦)→흉노, [전한]삭방자사부→[44]흉노, [50]병주자사부→[213]기주→[215]폐지
치소 구원현
출신 구원현: 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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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군: 구원현, 하음현, 무도현, 서안양현, 만백현, 막달현, 고양현, 남여현(南輿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오원군(16현 69,322호 231,328구): 구원현, 고릉현, 오원현, 임옥현, 문국현, 하음현, 포택현, 남흥현, 무도현, 의량현, 만백현, 성의현, 고양현, 막달현, 서안양현, 하목현
오원군획항군(獲降郡), 구원현→성평현(成平縣), 고릉현→고조현(固調縣), 오원현→전하정현(塡河亭縣), 임옥현→진무현(振武縣), 문국현→번취현(繁聚縣), 남흥현→남리현(南利縣), 무도현→환도현(桓都縣), 만백현→연백현(延柏縣), 성의현→애로현(艾虜縣), 고양현→고음현(固陰縣), 서안양현→장안현(鄣安縣)
후한 오원군(10성 4,667호 22,957구): 구원현, 오원현, 임옥현, 문국현, 하음현, 무도현, 의량현, 만백현, 성의현, 서안양현 }}}}}}}}}

6.2. 삭방군(朔方郡)

원래 진(秦)나라 때 신진(新秦) 또는 신진중(新秦中)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조나라가 쌓은 장성과 진나라의 장성을 연결하는 공사를 하던 지방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장성 공사를 위해 이 지방에 몇몇 현들이 설치되었으나, 공사가 완공되기 전에 진나라가 멸망하여 끝내 군(郡)이 설치되지 못했다. 이 지방 명칭은 한나라 때도 쓰였는데, 북지군 북부와 삭방군 서부 일대에 해당되었다. 전한 때인 기원전 127년에 옛 구원군(九原郡) 영역을 수복하자 그 일부를 분할해 삭방군을 설치했으며, 후한 때인 26년에 팽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흉노를 끌어들여 와 삭방군 일대가 흉노에게 장악되어 사실상 폐지되었다가, 50년에 복구했다. 215년에 폐지되어 신흥군 광목현으로 교치되었으나, 235년에 재설치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기존의 삭방군을 재건한 것이 아니라 신흥군을 잠시 분할했던 것으로 253년에 다시 폐지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명 [진]신진중, [-127]삭방군
소속 진(秦)→흉노, [전한]삭방자사부→[26]흉노, [50]병주자사부→[213]기주→[215]폐지
치소 [전한]삭방현, [후한]임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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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중(34현): 거수현, 임하현, 구연현, 고망현, 부평현, 구연도(昫衍道·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삭방군(10현 34,338호 136,628구): 삼봉현, 삭방현, 수도현, 임하현, 호주현, 유혼현, 거수현, 옥야현, 광목현, 임융현
삭방군구수군(溝搜郡), 삭방현→무부현(武符縣), 임하현→감하현(監河縣), 유혼현→극무현(極武縣), 거수현→구수현(溝搜縣), 옥야현→수무현(綏武縣), 광목현→염관현(鹽官縣), 임융현→추무현(推武縣)
후한 삭방군(6성 1,987호 7,843구): 임융현, 삼봉현, 삭방현, 옥야현, 광목현, 대성현 }}}}}}}}}

6.3. 운중군(雲中郡)

진(秦)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후한 때인 26년에 팽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흉노를 끌어들여 와 운중군 일대가 흉노에게 점거되었다가, 50년에 복구했다. 215년에 폐지되어 신흥군 운중현으로 교치되었다.
소속 진(秦)→[전한]병주자사부→[26]흉노, [50]병주자사부→[213]기주→[215]폐지
치소 운중현
출신 운중현: 진의록· 진랑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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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군(12현): 운중현, 양음현, 함양현, 원양현, 북여현, 정릉현, 무천현, 사릉현, 낙현 이외 미상
전한 운중군(11현 38,303호 173,270구): 운중현, 함양현, 도림현, 정릉현, 독화현, 사릉현, 원양현, 사남현, 북여현, 무천현, 양수현
운중군수항군(受降郡), 운중현→원복현(遠服縣), 함양현→분무현(賁武縣), 정릉현→정륙현(楨陸縣), 사릉현→희은현(希恩縣), 무천현→순천현(順泉縣), 양수현→상득현(常得縣)
후한 운중군(11성 5,351호 26,430구): 운중현, 함양현, 기릉현, 사릉현, 사남현, 북여현, 무천현, 원양현, 정양현, 성락현, 무진현 }}}}}}}}}

6.4. 정양군(定襄郡)

원래 운중군의 일부였으나, 기원전 196년에 운중군을 지군(支郡)으로 삼고 있던 대국(代國)의 장성 수비 부담을 줄여주고자, 운중군을 분할해 서부는 황제 직할로 이속하고 동부는 정양군으로 명명하여 대국의 지군으로 남게 하면서 형성되었다. 후에 대국의 영역이 1군 수준으로 축소되면서 정양군 또한 황제 직할이 되었고, 후한 초기 오르도스 지방을 점거한 흉노가 세력을 더 확장하였기에 34년에 정양군을 폐지하였다가, 50년에 복구했다. 215년에 폐지되어 신흥군 정양현으로 교치되었다.
소속 [전한]삭방자사부→[34]흉노, [50]병주자사부→[213]기주→[215]폐지
치소 [전한]성락현, [후한]선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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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정양군(12현 38,559호 163,144구): 성락현, 동과현, 도무현, 무진현, 양음현, 무고현, 낙현, 정도현, 무성현, 무요현, 정양현, 부륙현
정양군득항군(得降郡), 동과현→의동현(椅桐縣), 도무현→통덕현(通德縣), 무진현→벌만현(伐蠻縣), 무고현→영무현(永武縣), 낙현→차요현(遮要縣), 정도현→영부현(迎符縣), 무성현→환취현(桓就縣), 무요현→엽호현(厭胡縣), 정양현→저무현(著武縣), 부륙현→문무현(聞武縣)
후한 정양군(5성 3,153호 13,571구): 선무현, 동과현, 무성현, 낙현, 중릉현 }}}}}}}}}

7. 서하군(西河郡)

전한 때인 기원전 125년에 상군을 분할해 설치했다. 후한 말에 폐지되었는데, 조조의 통치가 실제로 미치던 지역은 아니었는지 정확히 언제 폐지되었는지 알 수 없다. 오르도스 북부의 4군이 폐지되었을 때 상군과 함께 폐지된 것으로 추측되나, 4군처럼 지역 주민들이 사민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221년에 태원군 자지현·계휴현을 분할해 서하군을 다시 설치했는데 이전의 서하군 영역이 포함되지는 않았으며, 이듬해에 이석현 정도만 수복했다.
지명 [-125]서하군, [221]서하군→[277]서하국(西河國)
소속 [전한]삭방자사부→[45]병주자사부→[213]기주→[215?]폐지, [221]병주→[263]진국(晉國)→[265]병주→[서진]병주
치소 [전한]평정현→[139]이석현, [221]자지현
전입 [221]태원군 자지현·계휴현
설치 [221]중양현(재설치), [222]이석현(재설치)
폐지 [215?]중양현·이석현·평정현·미직현·낙가현·고랑현·평주현·평륙현·익란현·환음현·인현·환양현·광연현
봉작 사마소: 진공(263~)→왕(264~265)
사마빈(司馬斌): 서하왕(277~)
유종(劉琮): 서하왕(25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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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서하군(36현 306,390호 698,836구): 부창현, 추우현, 곡택현, 평정현, 미직현, 중양현, 낙가현, 도경현, 고랑현, 대성현, 광전현, 환음현, 익란현, 평주현, 홍문현, 인현, 선무현, 천장현[15], 증산현, 환양현, 광연현, 무거현, 호맹현, 이석현, 곡라현, 요현, 방리현, 습성현, 임수현, 토군현, 서도현, 평륙현, 음산현, 예시현, 박릉현, 염관현
서하군귀신군(歸新郡), 부창현→부성현(富成縣), 평정현→음평정현(陰平亭縣), 낙가현→절로현(截虜縣), 도경현→염치현(廉耻縣), 대성현→호성현(好成縣), 광전현→광한현(廣翰縣), 환음현→방음현(方陰縣), 익란현→향란현(香闌縣), 선무현→토맥현(討貉縣), 무거현→환거현(桓車縣), 요현→요연현(饒衍縣), 방리현→광덕현(廣德縣), 습성현→자평정현(慈平亭縣), 임수현→감수현(監水縣), 서도현→오원정현(五原亭縣), 음산현→산녕현(山寧縣), 예시현→복예현(伏觬縣), 박릉현→조환현(助桓縣)
후한 서하군(13성 5,698호 20,838구): 이석현, 평정현, 미직현, 낙가현, 중양현, 고랑현, 평주현, 평륙현, 익란현, 환음현, 인현, 환양현, 광연현
서진 서하국(4현 6,300호): 이석현, 습성현, 중양현, 개휴현 }}}}}}}}}

7.1. 상군(上郡)

후한 말에 폐지되었는데, 조조의 통치가 실제로 미치던 지역은 아니었는지 정확히 언제 폐지되었는지 알 수 없다. 오르도스 북부의 4군이 폐지되었을 때 서하군과 함께 폐지된 것으로 추측되나, 4군처럼 지역 주민들이 사민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소속 진(秦)→[전한]삭방자사부→[45]병주자사부→[213]기주→[215?]폐지
치소 부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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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 부시현, 양주현, 환양현, 고노현, 칠원현, 광연현, 낙도현, 정양현, 조음현, 조음도, 원도현, 평도현, 도경현, 평주현, 중양현, 서도현, 무고현, 평륙현, 요현, 박릉현, 백토현, 부창현, 정양현, 양락현, 부현 이외 미상
전한 상군(23현 103,683호 606,658구): 부시현, 독락현, 양주현, 목화현, 평도현, 천수현, 경실현, 낙도현, 백토현, 양락현, 원도현, 칠원현, 사연현, 조음현, 추야현, 정림현, 고망현, 조음도, 구자현, 정양현, 고노현, 망송현, 의도현
상군증산군(增山郡), 양주현→상릉치현(上陵疇縣), 천수현→광신현(廣信縣), 경실현→적속현(積粟縣), 낙도현→비순현(卑順縣), 백토현→황토현(黃土縣), 양락현→상당정현(上黨亭縣), 사연현→사절현(奢節縣), 추야현→배야현(排邪縣), 정림현→정간현(楨幹縣), 고망현→견녕현(堅甯縣), 고노현→이평현(利平縣), 의도현→견녕소읍(堅寧小邑), 칠원현→경조대윤 열위군
후한 상군(10성 5,169호 28,599구): 부시현, 백토현, 칠원현, 사연현, 조음현, 정림현, 정양현, 고노현, 구자현, 후관[17] }}}}}}}}}

8. 같이보기

파일:실제 지도 후한 13주.png

[1] 때문에 전한 때와 후한 때 오르도스 지방의 인구차이가 크게 나타나고, 특히 후한 정권은 군·현 안에 산재한 이민족들의 호구를 모두 파악하면서 그들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려는 성향이 강하지 않았기에, 전한 때에 비해 인구가 다소 크게 줄어든 것이 그다지 이상한 점은 아니다. 조·진·한 모두 오르도스 지방에서 이민족들을 모두 쫓아내고 한족들의 영역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오르도스 통치에 협력적인 이민족들을 통해 이 지역을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다른 지역의 고을을 폐지하고 그 주민들을 옮겨 새로운 고을을 설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조시대에는 여러 사유로 이주민이 발생하면 그 정착지에 이주민들이 원래 소속된 고을을 그대로 재설치했다. 남북조시대의 긴 혼란기 동안 교치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각지에서 동일한 이름의 고을이 중복되어 발생했다. 예를 들면, 동진(東晉) 초기에 장강(長江) 북쪽의 서주(徐州)를 빼앗겨 장강 남쪽의 경구(京口) 일대에 서주(徐州)를 교치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원래의 서주와 교치된 서주가 병립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결국 이를 구분하고자 남조(南朝)와 송나라 시대에는 교치된 서주를 남서(南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삼국지연의』에도, 태사자가 죽은 후 손권이 남서의 북고산 기슭에 묻게 하였다는 대목이 쓰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낙랑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면서 요동 지방에 교치된 낙랑군이 발생했고, 교치된 낙랑군이 또다시 고구려에 축출되자(...) 요서 지방에 다시 교치된 낙랑군이 나타난 사례가 있다. [3] 광무제는 지방행정체계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30년에 대규모 현 통폐합을 단행했고, 각 군(郡)의 도위(都尉)를 폐지했으며, 열후 및 그 봉국 제도까지 고친 사례가 있다. 그럼에도 남흉노가 투항하면서 오르도스 일대를 수복하자 50년에 곧장 군·현을 복구했다. [4] 2세기 중엽부터 북방 민족들을 규합해 후한의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던 선비의 단석괴는 181년에 죽었고, 그를 계승한 화련의 능력 부족으로 단석괴의 세력은 이미 와해되었다. 조조가 오르도스 일대의 군·현을 폐지할 무렵에는 보도근이 단석괴 세력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보도근은 조조와 대립하진 않았다. 남흉노나 오환은 후한 당시부터 복속한 세력이었고, 그 중 오환이 원소 일가와 협력해서 조조와 대립했으나, 207년에 답돈이 패망한 뒤로는 더이상 위협이 되진 않았다. [5] 『삼국지』 무제기에는 216년에 호주천이 자발적으로 업(鄴)에 머무른 것처럼 기록하였으나, 『후한서』에선 215년에 호주천이 억류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 사서에서는 가비능에 비해 단석괴의 세력이 더 강했음만을 강조해놨기에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위나라와 가비능이 충돌한 지역은 후한과 단석괴가 충돌한 지역보다 남쪽에서 이뤄졌기에, 이 시점에 선비족이 옛 정양군·운중군 일대를 차지한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7]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당시인 277년에 위관이 이간책으로 탁발부의 세력을 약화시킨 사례도 보인다. [8] 이처럼 오르도스 영역을 상실하여 전국시대 이래 형성된 장성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명백히 신흥군 교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선비족 왕조에서 오르도스 일대를 차지한 점을 들어 영토 상실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면서 단지 조조가 미움을 받기에 무리한 비판이 이뤄진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리한 두둔이 아닐 수 없다. [9] 후한 당시에는 이민족 수장들이 각 부(部)의 '수(帥)'가 되어 정치적인 지도자로 인정받고, 징집되어 중랑장·교위 등의 직할부대로 편성되면 그 부(部)는 한인(漢人) 사마(司馬)가 지휘하는 구조로 운영되었었다. 도위는 사마보다 격이 높은 부(部)의 부대장이다. [10] 북조 장성의 세부적인 노선을 비정하는 의견에는 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북부 노선은 대체로 음산 산맥 일대의 진나라 장성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남부 노선은 이후 명나라가 축조한 장성 노선의 원류가 된 것으로 보는 점에서는 대체로 동일하다. [11] 당나라의 주(州)는 크게 정주(正州)와 기미주로 구분되는데, 정주는 당의 율령격식(律令格式)이 그대로 시행되는 지역이고, 기미주는 해당 지역의 도호(都護)나 도독(都督)이 수시로 영식(令式)을 내려 통제하고 지방관은 현지 토착 유력자가 세습하는 구조로 운영되었다. 정주는 다시 보주(輔州)·망주(望州)·웅주(雄州)·변주 4종류로 구분되었는데, 이중 변주는 변경에 분포하는 지방으로, 국경을 방위하기 위한 군사 조직이 증강되었다. [12] 서하군과 상군이 언제 폐지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4군이 신흥군으로 교치된 215년 무렵에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3] 이전의 삭방군을 재설치했다기 보다는 신흥군을 분할해 새로운 삭방군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14] 입지상 태원군 낭맹현·우현·양곡현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5] 간독에는 간장현(干章縣)으로 표기된 예가 있으나, 무엇이 옳은지 명확히 알 수 없다. [16] 무도현(武都縣)으로 쓴 용례도 보인다. [17] 상군에는 전한·후한 때 속국도위가 있어 구자현에 주둔했다. 『속한서』 군국지에 구자현과 함께 속국도위와 후관이 나열되어 있어 후관을 상군의 현급 행정기관으로 보기도 하지만, 후관은 속국도위의 속관인 관직의 이름이다. 후한 때 상군 후관은 속국도위와 별개의 임지를 갖고 태수 직할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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