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왕(八王)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ccc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여남문성왕 사마량* |
조왕 사마륜 |
하간왕 사마옹 |
동해효헌왕 사마월 |
제무민왕 사마경 |
초은왕 사마위 |
장사려왕 사마예 |
성도왕 사마영 |
|
첨자 * :실제 행적을 바탕으로 사마량 대신 예장왕 사마치를 포함시키는 학자도 있다. 사마량은 팔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다. |
1. 개요
八王之亂중국어: 八王之乱(bāwángzhīluàn)
서진의 2대 황제 혜제 재위기(291~307) 황후 가남풍이 외척 양준을 제거하고자 사마량, 사마위 등 사마씨의 사람들을 이용한 후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자 이에 반발한 왕 8명이 반란을 일으켜 내전을 벌인 사건이다.
내란을 주도한 종실제왕(宗室諸王)[1]이 모두 여덟이라고 해서 팔왕의 난이라 일컫지만, 사실 진서 열전 여남왕등전의 주인공 여덟 왕을 팔왕에 욱여넣은 것이라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2]
이 사건의 결과 서진의 국가 막장 테크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이어진 영가의 난에서 서진은 한족 왕조 최초로 본거지인 중원을 잃고 강남으로 쫓겨나 남북조시대가 열렸다. 누구나 인정하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흑역사이자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최악의 헬게이트 시기였다.
2. 배경과 원인
근자에
위무제가 법술(法術)을 좋아하니 천하에서 법가 사상을 중시하고,
위문제가 통달(通達)을 흠모하니 천하에서 절개 지킴을 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기강이 정돈되지 않고 방탕하고 기이한 행동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었으니, 마침내 천하에서 다시는 청의(淸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제업을 일으켜 선양을 받고
요
순의 교화를 넓히시는데, 청렴하며 예의를 갖춘 신하를 등용하여 풍기를 정돈하지 않으시고 허랑방탕한 인사를 물리쳐 불경한 이들을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신은 이로써 감히 한 말씀 올리나이다.
『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년), 산기상시 부현의 상소
265년 12월 임술일,
조조의 손자
조환으로부터 선양받은
사마염이 내건 국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전란기의 군벌 집단을 기반으로 성장한
조위가 필연적으로 따르던 전제적·법가적 정책 방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방 사회가 붕괴되면서 강고한 기득권 집단으로 굳어진 문벌들의 귀족적·퇴폐적 사회 풍조를 단속하는 일이었다. 이에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후한 시대 이래 흐트러진 유교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년), 산기상시 부현의 상소
이에 따라 재위 초기 사마염은 여러 측면에서 유교적 예법을 준수하며 관대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즉위한 직후부터 사마염이 직접 사마소와 왕원희의 죽음을 3년간 심상(心喪)하면서 유명무실해져 있던 3년상을 부활시킨 것은 곧 가족적 윤리와 국가적 충성을 동일시하는 한대 유교의 국가 운영 논리를 복구하려는 시도였다. 이외에도 278년 11월 신사일에 태의사마 정거(程據)가 꿩의 머리털로 만든 치두구(雉頭裘)라는 가죽옷을 바치자 이를 태워버린 일화[3]가 유명하다.
이러한 사마염의 구상은 의도는 좋았으나, 그뿐이었다.
2.1. 명분이 취약한 서진 왕조
서진 세조 무제 사마염, 역대제왕도권 |
그러나 사마소는 가충을 앞세워 조모를 진짜로 시해했다. 직접적 실행자인 성제, 성쉬 형제에게 책임을 물리기는 했지만, 성제가 죽기 전 저항하면서 사방에 실상을 다 까발린 데다 정작 성제를 사주한 가충은 무사했으므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이외에도 중간중간 사마씨 일족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거는 세력이 있으면 심지어 혜강[6] 같은 문인들조차 없는 죄까지 만들어 사형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자근자근 밟아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처럼 억지 수단으로 정권을 찬탈했다면 최소한 수단을 정당화할 근거라도 있어야 하는데, 하내 사마씨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다. 조씨의 위나라는 적어도 조조가 후한에 기대어 성장하지 않은 자수성가형 세력으로 다 망해가는 한나라의 간판을 유지시켜 주었다는 점, 오히려 헌제가 이미 간신 동탁에게 옹립되어 정통성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황제였다는 점, 그리고 조조·조비·조예 3대 동안 동탁이 초토화시킨 낙양을 복구하고 황건적의 난으로 널리 초토화된 민생을 재건했다는 점[7] [8] 에서 "조씨가 뭘 잘했길래 제위에 오르냐?"라는 질문에 최소한의 할 말은 있었다.
그러나 사마의에게 내치적 업적은 아예 없었고[9] 말 그대로 조씨 정권을 날로 주워 먹고 간판만 바꿔 달아놓은 사마씨 정권에 불과했다. 조조 자체가 서주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여러 명사들을 살해하는 등 도덕적으로 큰 흠결이 있지만, 사마소가 조모에게 한 짓은 정말로 답이 없었다. 고대 사회의 관념에서는 인간말종인 폭군이 아닌 이상 아무런 큰 잘못도 없는 황제를 시해하는 짓은 모든 악행을 넘어서는 천인공노한 죄악이었다. 당장 사마소 본인도 원래라면 사마씨 왕국이 안정화된 뒤에야 촉한 정벌을 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황제 시해를 덮고 천하를 통일하여 제위를 빨리 찬탈하기 위해 정벌을 무리하게 강행하였다. 마침 강유가 한중을 비워두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촉을 정복했다.
그러다보니 당장 무제 사마염의 재종손인 동진의 진명제부터가 자기 조상들이 위나라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건국한 과정을 듣고 난 후 "그 말대로라면 이전에 있던 우리 나라(서진)가 망해버린 건 당연한 일이고 우리 나라(동진)도 오래 못 가지 않겠는가?" 하고 한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10] 동시대에 갈족의 영웅 석륵도 "남자라면 조맹덕이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고아와 과부를 속이고 아첨으로 천하를 취할 수는 없다." 하고 디스한 것을 보면 당대인들의 평가 자체는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사마염은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유교적 가족주의를 내세웠지만[11]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정작 사마염 자신이 사마의의 장손이 아니라 차남인 사마소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마소의 형 사마사가 아들을 두지 못하기는 했지만, 대신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가 사마사의 아들로 입적되었고, 그의 개인적인 인망도 상당했으므로 사마염에게 강력한 위협이었다. 그렇다고 사마유를 아예 배제해버리자니 또 유교적 가족주의에 어긋났다.
결론적으로 사마염은 자신이 내건 '유교 질서의 회복'이란 명분이 적극 강조될수록 자신의 정통성이 약화되는 얄궂은 상황에 처했다. 결국 위에서 본 치두구 사건이 벌어진 278년에 조정 내에서 군기반장 역할을 하던 부현(傅玄)이 졸하고, 280년에는 동오가 멸망하고, 천하가 통일되면서 사마염은 유교 질서의 실현이라는 기조를 사실상 포기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마유에 대한 처우였다. 이전까지 유교적 가족주의에 입각해 전대에 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받았던 사마유가 280년의 천하통일을 기점으로 급격히 견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사마염은 사마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쫓아낸 뒤 사마유도 산동 지방으로 보내버리는데, 283년에 사마유가 갑자기 죽어버렸다. 물론 의문사라고 발표하긴 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사마염이 죽였다고 믿었다.[12]
그런 연유로 서진은 통일왕조라면 으레 있는 '사상'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와 같은 선대 통일왕조들을 보면 이런 문제가 매우 잘 드러나는데, 주나라는 유교적 종법질서를 내세우며 이에 근거한 봉건제를 실행하여 왕과 제후간의 혈연에 근거한 협력을 이끌었다. 진나라는 법가사상을 내세워 부국강병을 일궈내 천하를 통일했고 통일 이후에도 이에 근거한 군현제 실시 등을 이루었다. 한나라는 초기에야 유교에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13] 점차 유교를 받아들이며[14][15] 결국 유교국가가 되었으며 이에 근거해 향거리선제 실시, 태학 설치 등등을 실행했다. 그러나 하내 사마씨가 세운 서진은 이도저도 아니었다.[16]
2.2. 재물과 권력의 남용
지금 토지는 넓고 사람은 드문데도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사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질검을 숭상하게 하고 싶다면 마땅히 사치한 사람을 힐책하여야 하는데, 사치해도 힐책을 받지 아니하니 돌고 돌아서 도리어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서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 자치통감』 태강 3년(282년), 거기사마 부함의 상소
애당초 법가적 정책을 지양하면서 귀족적 풍조를 잡겠다는 방향 설정 자체도 문제였다. 이는 곧 사치를 금지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법가사상 대신 내세워진 유교적 검약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존의 유교사상은 이미 형식만 남아 문벌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온정주의로 왜곡한 지 오래였다. 예컨대 선비의 윤리의식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였던 3년상 관습이 후한시대에는 명성과 관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17]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소가 있다.[18]『 자치통감』 태강 3년(282년), 거기사마 부함의 상소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구품관인법이 더해졌다. 구품관인법의 당초 목적은 여론조사를 통해 이름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었지만, 평가 기준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보니 여론조사관인 중정(中正)이 뇌물을 받거나 거대 문벌들의 눈치를 보고 여론을 조작했다. 한마디로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부터 등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정의 자격과 활동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면 그나마 문제가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사마염은 중정들에게 사실상 면책특권을 줘버리고 말았다.
이런 구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274년부터 283년까지 선조랑(選曹郞)[19]을 지낸 산도(山濤)는 정작 전형(銓衡)하면서 늘 사마염의 눈치부터 봤다. 그러니까 자리가 비면 그 자리에 배치할 후보자 명단을 만들어 비공식적으로 사마염에게 상주하고, 사마염이 낙점해야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배치하는 막후인사를 일삼았다. 즉 아무리 재주와 평판이 있어도 사마염의 눈 밖에 있으면 장외탈락이었다. 이 때문에 산도는 인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는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사마염은 당연히 언제나 산도를 감싸주었다. 사서에는 군신 간의 의리를 보여주는 미담처럼 포장되었지만 국가 건전성 측면에서는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일찍이
호위가 상서가 되었을 때 당시의 정치가 관대한 것을 간언하니, 황제는 "상서랑 이하에게는 내가 가차없이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호위는 "신이 말씀드리는 것이 승·랑·영·사와 같은 하급 관원들이겠습니까? 바로 소신과 같은 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분위기가 엄숙해지고 법령이 분명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 자치통감』 태강 원년(280년)
게다가 사마염의 관대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서, 문벌들의 각종 범법행위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그나마 관대함이 일관성이나 있다면 몰라도 또 그게 그렇지도 못했다. 결국 밑에 힘없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독박을 썼으니 사마염의 재위 초기인 267년 1월부터 관전을 점탈했다는 죄목으로
산도,
사마목,
무해,
유우가 함께 고발되었는데, 피고발자들 중 산도와 사마목, 무해는 그냥 방면되고 일개 현령인 유우만 목이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 뒤에도 사마사의 인척이자 사마염의 최측근인
양수는 아무리 탈법적으로 재산을 모아도 사마염이 보호해준 덕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빽이 없는 게 죄인 시대. 온갖 사고 치고 비리 저지르고 하면서 그 열매는 빽 있고 지위 있는 사람이 먹지만, 일이 잘못되면 독박 쓰고 책임을 떠맡는 건 빽도 지위도 없는 아랫사람들이 하였다. 다른 예 하나를 들어보자.『 자치통감』 태강 원년(280년)
서쪽에서 저족과 강족이 날뛰었는데, 당시 정서대장군이던 조왕 사마륜의 일처리는 영 개판이었다. 형인 학산의 죽음으로 벼르고 있던 학도원부터 저족들을 모아서 한바탕 벌이려는 제만년까지 아주 끝간 데 없이 날뛰는 마당에 별 대책도 없었다. 그러다 해계와 손수가 작전 문제 등으로 서로 표문을 올려 디스를 하는 등 일이 커졌다. 구양건까지 나서서 사마륜의 죄상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도 책임을 물어 사마륜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사마융을 도독옹양이주제군사로 삼아 변방을 맡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의 책임자 사마륜을 불러들여서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정작 책임을 지는 방법이랍시고 내놓은 이야기가 사마륜의 측근 손수의 목을 베어 저족과 강족에게 사과하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팔왕의 난을 잘 아는 후대인들이 보기에는 이 기회에 훗날 큰 후환이 되는 손수를 죽이지 못한 것이 커다란 실책이겠지만, 여기서 손수의 죄는 그저 해계와 군사적 문제로 다툰 것과 사마륜의 측근으로 사마륜 대신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 2가지뿐이었다. 손수는 그나마 신염이 변호를 해 주어 살았지만 그 뒤에 진짜로 희생자가 된 사람은 오나라의 항장으로 아무런 빽도 기반도 없는 주처였다. 그리고 주처가 그 쪽으로 가게 된 이유는 저 잘난 해계가 학도원과 싸워서 졌기 때문이었다.[20] 결국 주처는 사마융의 뒤끝 때문에 지원도 보급도 제대로 못 받고 싸우다 결국 죽게 되는데, 주처에게 그 임무를 맡겼음을 알자 도시락 싸들고 가서 노모를 핑계로 나가지 말라고 말린 이가 바로 저 위에서 책임을 독박 쓰고 죽을 뻔한 그 손수였다.[21]
주처에게 저 임무를 맡기기 전부터 사마융 성격에 주처가 잘못될 걸 알았던 사람들도 많았고, 주처 사후에도 그의 죽음과 패전은 사마융의 탓임을 천하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 시대에는 아주 당연하게도, 사마융에게는 어떤 죄도 묻지 않았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던지, 주처가 이 임무를 맡았을 때 중서령 진준은 이런 말로 간하였다.
하후준과
양왕은 모두 귀한 친척으로 장수의 재목이 아니니, 그들은 진전하여도 더 이상 얻을 명성이 없고, 물러난다고 하여도 죄를 받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처는 오 지역 사람이어서 충성스럽고 곧으며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는데 원수는 있으나 그를 원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 자치통감』 원강 6년(296년)
잘못해도 높으신 분들은 죄를 주지 않으니 책임질 일도 없으므로 열심히 하지도 않을 테고, 아무런 빽도 없는데다 사마융에게 원한까지 샀던 주처 정도는 그냥 패전의 희생양으로 삼거나 아님 다른 해코지를 해버리면 그만일 테니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일은 실제로 딱 그렇게 되었고, 정작 주처가 싸우다 물러나 살아돌아왔다더라도 사마융의 등쌀에 딱 손수 꼴이 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래저래 결과적으로 일을 엉망으로 처리하기는 윗분들이 하고, 희생과 책임을 떠맡기는 아랫사람들이 다 하였다.[22]『 자치통감』 원강 6년(296년)
이러한 문제점들은 결국 사마염의 집권 명분과 이념이 취약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권이 문벌귀족의 지지로 존립하다 보니, 황제가 자신의 지지 기반인 귀족에게 감히 손찌검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시기의 귀족은 아래 서술되는 청담사상의 영향과 맞물려 황제의 권위를 많이 무시하였다. 대표적 사례로 황제가 왕개에게 내린 산호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 부순 석숭이나, 황제의 원림에 쳐들어가 오얏나무 열매는 열매대로 다 따먹고 나무는 나무대로 베어버린 왕제가 있다. 또한 왕제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 고기'를 대접하자 사마염은 몹시 불쾌했지만 내색도 못 하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염이 기껏 권위를 세운다고 선택한 방법이란 돈지랄하는 귀족보다 더 돈지랄하는 것이었는데[23][24] 정작 석숭의 사례를 보듯 이마저도 패배(?)했다.
이러한 막장을 자정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두예나 유의 등 일부 문관들이 구품관인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당대 사회의 풍조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으나, 사마염은 말로만 옳다꾸나 했지 실제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황제부터가 사치에 호의적이고 황권이 약하니 씨알도 안 먹힘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러한 문벌귀족들의 막장성은 걸러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서진 역사는 《 진서》에 기록됐는데 《진서》가 워낙 이거저거 넣어서 만들다 보니 24사 중에서 신뢰도가 낮은 편이다. 설령 그런 기록이 있어도 사마충 치세인 경우가 많다.
2.3. 문벌귀족들의 급격한 성장과 막장 사회상
이렇게 황실과 부모 세대가 판을 깔아두고 모든 리미트가 해제된 상태에서 문벌 2세대들은 말 그대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당시 진나라는 온갖 사치와 향락이 난무하는 동양판 소돔과 고모라나 다름없었다.당장 무제 사마염의 부마인 왕제부터가 상당히 정신줄을 놓았는데, 어마무지하게 비싼 수도 낙양 한복판의 땅을 사다가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 만들고 바닥에는 돈을 가득 깔아두었다. 또 밥을 먹을 때 모든 식기는 귀한 유리그릇[25]을 사용하고 그 위에 사람 젖을 먹인[26] 돼지고기를 담아 내왔다. 재상 하증은 날마다 1만 전이나 되는 산해진미를 차려놓고서도 젓가락을 댈 것이 없다고 반찬투정을 부렸고, 그 아들인 하소는 아버지보다 한 술 더 떠서 날마다 2만 전씩 차려먹었다.
양수는 겨울에 술을 빚어 발효시키면서 사람들에게 번갈아가며 항아리를 품고 있도록 시키고, 술을 데울 때에는 반드시 짐승 모양으로 빚은 숯을 사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명한 일화는 양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갑부인 왕개와 석숭의 중국, 아니 인류사 역사상 전무후무할 돈지랄 레이스.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쳤으며, 석숭이 산초로 집을 칠하면 왕개는 주사로 집을 칠했다.
산도와 왕융, 남조 전축분의 죽림칠현도 |
그러나 상술한 비정상적인 정권 하에서 청담사상의 '진심'이라는 테마는 귀족들이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윤리도덕을 즈려밟는 자기합리화로 변질되었다. 대표적으로 청담사상을 주도하는 죽림칠현의 일원이었던 왕융의 실제 인격은 탐욕스럽고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조카 결혼식 때 홀옷 한 벌을 선물로 줬다가 나중에 다시 달라고 하질 않나, 자두를 팔아도 남들이 자두 씨앗을 종자로 쓸까봐 자두에 구멍을 뚫어둘 정도였다. 반대로 정권에 영합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줄줄이 목이 달아나니 결국 허무주의와 신비주의 사조로 흘러갔다.
안 그래도 혼란스럽고 부패한 서진의 사회 분위기를 한층 더 막장으로 몰아간 한 가지 요소가 바로 오석산이었다. 오석산은 주성분이 비소, 수은 같은 독약화합물로 중추신경을 파괴해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물건이다. 이런 마약이나 다름없는 약물이 위나라 시절부터 하안을 시작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퍼졌는데, 하필 위에서 언급한 허무주의, 신비주의와 뒤섞여 서진의 뽕쟁이들이 신선이랍시고 오석산을 빨고 날뛰었다. 이런 광경을 옆에서 보던 멍청이들도 좋아 보인다고 오석산을 흡입하니 결국 귀족들을 거쳐 서진 전역에 오석산이 유행하였다. 그 결과 환각효과로 인한 기행은 물론이고 중독성이 심각해 오석산 구한다고 가산을 탕진하는 인간이 늘었으며, 독극물인 비소와 수은을 흡입해대니 건강에도 치명타였다. 근대 중국을 침몰시킨 아편전쟁으로 아편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오석산 또한 서진뿐만이 아니라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당 때까지 유행하며 중국을 몇 세기 동안 괴롭힌 약물이었다.[27]
2.4. 백성들의 고난
그렇다면 이러한 사치를 벌일 돈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사실 문벌귀족들이 제 아무리 사치와 향락의 끝을 달리더라도 그만큼 경제가 활성화되었다면 그리 상관이 없다. 지갑이 허락하는 선에서는 오히려 돈 있는 자들이 돈을 써야 경제가 돌아가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그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사회, 경제가 고도로 발달하였다는 징표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당나라, 송나라 전성기에는 경제 호황에 동반된 사치와 안일함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었다.서진시대의 이상기후 빈도 |
물론 중앙의 정치가 해이해진 시기를 다룰 때는 자연재해의 기록도 상당히 과장되는 것이 전근대 역사서의 보편적인 경향이기는 하지만[29], 소빙기로 추론되는 다른 증거들은 더 있다. 소빙기에는 유목민족, 북방 이민족들 또한 생계가 힘들어져서[30] 정주민 지역으로 적극적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팔왕의 난 이후 이어지는 영가의 난 시기에 북방 유목민족들의 유례 없는 대침입이 일어났으므로[31] 역시 소빙기였을 확률이 매우 높다. 소빙기를 주 원인으로 추론하는 유럽의 게르만 민족대이동도 또한 이때와 시기가 거의 겹친다. 즉 서진에서 자연재해가 잦아서 농사를 망쳤다는 기록은 당나라 사관들이 서진이 하늘의 뜻을 잃었다는 의미를 담아 과장한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현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많지 않았다. 사채를 쓰거나, 식객이 되거나. 여기에서의 '식객'이란 간단히 말해서 농노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객 중에서도 고용인인 용객(傭客)이나 소작인인 전객(佃客)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게 취급받긴 해도 자신의 가계를 가지고 생활을 영위하였기에 신분상으로 양인이었다. 그러나 식객 즉 의식객(衣食客)은 주인에게 가계를 의존하여 의식을 제공받았으므로 사실상 노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들은 그나마 노비처럼 아예 대놓고 인신을 지배받진 않았지만, 어쨌건 공짜로 부양을 받았음이 빚이 되어 자의가 아닌 타의에 따라서 노동에 종사해야 했고, 이렇게 해서 부양비를 갚은 뒤에야 다시 풀려날 수 있었다.[32]
결국 생업을 잃은 농민들은 개인의 비정상적인 권력과 부에 기생하는 존재가 되었고, 얼마나 탈법을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부와 권력의 자기확증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와 사병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특히 노비와 사병들은 떠나봤자 영위할 만한 생업이 없기에 그 주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진서》 〈외척전〉에는 양수가 원리원칙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선발했지만, 부하들이 양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가 무너지고 군벌들이 일어나는 상황은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돈을 모으는 방법 자체도 굉장히 악질적이었다. 석숭은 형주자사를 지내면서 지나가는 사신이나 상인을 겁박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약탈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상인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양수는 국가 관청에까지 사채를 씌울 정도였으며, 왕융은 장원과 상업을 경영하던 거대 자본가였는데도 종자가 아까워서 씨에 구멍을 뚫어서 팔았다. 상황이 이 정도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는 애교일 정도.[33]
분쟁은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관직은 돈이 아니면 트이지 못하고, 원수는 돈이 아니면 풀지 못하고, 명성은 돈이 아니면 떨치지 못한다. 붉은 옷을 입고 요직을 담당한 낙양의 사족들이나 가형(家兄)을 좋아하는 것이 모두 끝이 없어서, 나의 손을 잡고 시종 나를 안고 있으니, 무릇 지금 사람들은 오직 돈만 알 뿐이다.
『 자치통감』 원강 9년(299년), 노포의 「전신론(錢神論)」
이렇게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가는 마당에 정권을 잡은 소수의 거대문벌에게 극단적으로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반대로 이러한 주류 카르텔에서 소외된 중소문벌들의 불만과 위기감이 축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장 팔왕의 난에서 막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손수와
이함,
장방이 모두 중앙의 문벌 사회에서 멸시받았던 중소문벌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어지간히 한이 맺혀있었던 저 인간들에게 완장이 갈 때마다 무지막지한 피바람이 일어났다. 자기들끼리 조성한 나름의 카르텔이 있어서 적당히 기싸움이나 하다 말았던 주류 문벌 귀족들이었지만 갑자기 힘이 생긴 외부자들은 눈치를 볼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하사한 산호수를 멋대로 깨먹고도 무사했던 석숭은 자기 애첩을 탐내는 손수를 무시한 대가로 자기뿐 아니라 3족이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손수는 예전 미천하던 시절에 자기에게 갑질하며 싸커킥을 날리던 반악에게 품은 원한도 잊지 않고 목을 베어버리는 것으로 되갚아주었다. 장방이 낙양을 무지막지하게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인간 백정짓을 다 하고 다녔을 때도 중앙 귀족들은 그냥 칼로 베기 좋은 고깃덩어리었을 뿐이었다.『 자치통감』 원강 9년(299년), 노포의 「전신론(錢神論)」
2.5. 지방의 종친
황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종친을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었다. 또한 여러 왕들에게 모두가 자신의 봉국 안에서 장리(長吏)를 선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위장군 제왕
사마유 혼자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위에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년)
여러 제반 사항의 문제로 중앙 집권이 잘 되지 않았던 고대 시대에는 찬탈이 과장 조금 보태 밥먹는 수준으로 쉬웠다. 때문에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왕위에 오르자마자 친위 세력을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이는 고대 중국도 다르지 않았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년)
고대 중국에서 왕이 친위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쉬운 부류는 셋이었다. 첫번째는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면서 왕의 손과 발 노릇을 하는 환관이었고, 두번째는 또다른 가족이 된 외척,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자신의 형제, 사촌 등을 위시로 한 종친이었다.
앞서 조위는 후한 말기의 극심했던 혼란을 교훈삼아[34] 외척과 환관을 배제하고 오로지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 하후돈, 하후연을 위시로 한 하후씨와 조인 등을 위시로 한 조씨가 대표적이었고 실제로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삼국 중 수위의 국력을 갖추게 된다. 다만 무턱대고 측근들을 중용하지는 않았다. 조창, 조식 같이 황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종친들은 지방에 제후로 좌천시키며 철저히 중앙 정계에서 배제하고 개인적인 만남도 허가하지 않으며 사실상 봉토에 연금을 당했다.
문제는 전술한 조위의 정책은 능력있고 황권을 위협하지 못하는 측근들이 높은 위치에서 왕을 보좌할 수 있어야지만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하후연, 하후돈, 조인 등의 걸출한 능력의 1세대 조씨 일족이 사망하고 조진, 조휴, 하후상 등 좋은 평가를 받았던 2세대 종친들까지 명을 달리한 상황에서 공고한 황권을 지니고 있던 조예가 사망하자 차기 황제인 조방은 곧바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최후의 보루였던 조상 일파가 고평릉 사변으로 실각하자 실권을 잃고 폐출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위는 망하고 만다.
조위가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똑똑히 지켜본, 아니 직접 멸망시킨 사마염은 조위의 정책(환관을 멀리하는 대신 종친으로 황권을 방어하는 것)[35]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금기를 건드렸는데, 다름아닌 황권에 위협이 될만한 종친들까지 모조리 끌어다가 중앙 정계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통일 이전에도 군권은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부, 그 다음은 사마부의 아들인 사마망[36]이 도독중외제군사로 장악하고 있었으며 독발수기능의 난 때도 처음엔 사마량이, 이후엔 사마준이 관중의 군사를 진수했다. 오멸망전 때도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주가 도독청주제군사로 참전했다. 또한 책봉된 황족에게 휘하 관속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고, 277년부터는 최대 5천 명에 달하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해 주면서 자체적인 세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지방의 군권을 종친들이 장악하는 것은 이후의 통일왕조들이나 분열시기 왕조들이나 안정적으로 간 나라들도 금방 망한 나라들도 대부분이 행한 정책이었다. 당장 전한만 봐도 한고제가 죽은 후 여씨가 전횡하였으나 종친인 주허후 유장의 활약으로 유씨가 황제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즉, 이런 행동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289년 말 종실왕 배치도 및 주요 종실왕. 다만 종실왕의 세력기반은 왕위가 아닌 관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세력의 배치는 봉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37] 위의 지도는 제후왕들이 누가 있는지 알아보는 용도를 제외하고 팔왕의 난 전개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이에 대해 조선의 학자 홍대용은 신랄한 촌평을 남겼다.
진주(晉主)는
조씨(曹氏)가 고립되던 것을 거울삼아
종실(宗室)을 다량으로 봉(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로 해치어서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다가
요행히
보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실을 봉해야 하겠는가? 봉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말하자면, 봉하여도 또한 가할 것이고, 봉하지 않아도 또한 가할 것이다. 위(魏) 나라가 멸망하게 됨은 고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나라가 혼란하게 됨은 종실에 연유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덕을 잃지 않으면 종실을 봉하지 않아도 고립되지 않을 것이고, 봉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호위(護衛)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까닭은 생각하지 않고, 구구하게 봉하고 봉하지 않는 것만을 용심(用心)한다면 나는 동쪽에서 멸망하고 서쪽에서 생겨남을 볼 것이다.
『담헌서』, 「 사론」, 홍대용
즉 홍대용은 서진이 지나친 종친의 우대와 할거 때문에 멸망했으나, 서진과 반대로 행동했던 위나라도 마찬가지로 멸망했으며, 국가의 안위는 종친의 우대·천대의 문제를 떠나서 조정이 이를 다스릴 수 있음에 달렸음을 주장한 것이다.[38]『담헌서』, 「 사론」, 홍대용
3. 전개
3.1. 폭주하는 외척
12월에 황후의 아버지인 진군장군
양준을 거기장군으로 삼고, 임진후로 책봉하였다. 상서
저략과
곽혁이 양준은 그릇이 작아 국가의 중책을 맡기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양준이 교만해져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우쭐거리니,
호분이 양준에게 말하였다.
"경은 딸을 믿고 더욱 거만하게 구는구려! 앞 시대의 일들을 두루 살펴보면, 천자의 집안과 혼사를 맺고 집안이 멸망하지 않은 일이 없었소. 단지 이르거나 늦거나 했을 따름이오."
『 자치통감』 함녕 2년(276년)
사마염은 황제로 즉위하기 전
양병의 딸
양염(楊艶)과 혼인하였고, 즉위한 뒤 양염이 병사하자
양준의 딸
양지(楊芷)를 황후로 간택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양염과 양지가 사촌자매 사이이니, 2연속으로 황후를 배출한
양준 일가가 외척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홍농 양씨 자체도 당시 낙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문 집안이었다.
후한
안제 때 이래로
양진, 양병,
양사,
양표 4대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양표의 아들이
계륵의 고사로 잘 알려진
양수였다. 다만 양병과 양준 일가는 이와 별도로 양진으로부터 양봉, 양부, 양중으로 갈라진 방계였지만 그럼에도 《
진서》 〈외척전〉에서 계통을 구분하지 않고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일컬어질 만큼 그 후광 자체는 업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9]"경은 딸을 믿고 더욱 거만하게 구는구려! 앞 시대의 일들을 두루 살펴보면, 천자의 집안과 혼사를 맺고 집안이 멸망하지 않은 일이 없었소. 단지 이르거나 늦거나 했을 따름이오."
『 자치통감』 함녕 2년(276년)
이전 시대의 조위는 외척에 대해 거의 노이로제나 다름없을 만큼 거부했다. 당장 조조부터가 헌제의 외척을 탄압한 것은 물론이고 조씨의 외척들도 크게 경계하였는데, 전처 정씨와 이혼한 뒤[40] 배후 세력이 없는 기녀 출신의 무선황후 변씨를 정실로 삼았으며, 변씨의 동생 변병에게도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조비는 명문가 출신의 문소황후 견씨를 황후로 삼았지만 이내 자결시키고, 뒤이은 후처 곽여왕(문덕황후 곽씨)의 가족들에게도 권력은 주지 않았다. 조예까지도 명도황후 모씨를 죽이고 명원황후 곽씨로 황후를 바꾸었지만, 정작 조예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바로 이듬해 죽으면서 위나라의 후계구도는 막장으로 가버렸다.
사마염은 조위의 사례를 참고하여 황족과 외척들을 우대했다. 물론 조위의 사례만 보고 그런 것은 아니고, 자신의 백치 아들인 사마충을 보좌시키기 위해 우대한 점도 있다.
더욱이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한 뒤 정무에 마음을 두지 않고 주색만을 탐하자, 온갖 청탁과 뇌물이 양준, 양요, 양제 삼형제에게로 밀려들었다. 그러자 이전까지만 해도 숙청을 두려워하며 《 면사패》까지 미리 받아놓았던 양준 삼형제는 점차 긴장이 느슨해지며 막후의 제왕으로 군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삼양(三楊)이라 불렀다.
289년 말, 사마염이 병이 들어 쓰러졌다. 양준은 이를 기회로 자신을 위협할 만한 세력을 중앙에서 쳐내기 시작했는데, 황실의 가장 큰어른인 여남왕 사마량[41]에게 예주의 군사 지휘를 맡겨 허창으로 내쫓고 다른 황족도 각기 왕으로 책봉해 전국에 흩어놓았다. 다시 이듬해에는 위관의 아들 위선이 술주정이 심하다며 헐뜯어서 그에게 시집간 번창공주의 혼인을 파기하도록 여론을 몰아 위관이 관직을 내놓고 은둔하게 하였다.
이때 골골거리다 잠시 정신을 차린 사마염이 주위가 죄다 양준의 사람들로 바뀐 것을 보고 놀라며 사마량에게 떠나지 말고 양준과 함께 섭정하라는 유조를 내렸지만, 중간에 양준이 유조를 빌려가서 배째라며 안 돌려줬다. 이내 다시 사마염의 병세가 악화되자, 이에 황후 양지가 사마염의 형식적 동의를 얻어 부친인 양준에게 섭정을 맡기라는 조서를 내렸다. 결국 사마염은 "여남왕은 아직 안 왔는가?" 라는 유언을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져 290년 4월 기유일에 붕어하였다.
조위~서진시대의 낙양성 평면도[42] |
이제 양준은 제국의 행정집행권에서 생살여탈권까지 모든 기능을 망라하는 막대한 권력을 거머쥐었다. 양씨의 집권 추세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머지않아 사마진은 양씨에게 찬탈당하였으리란 예상도 있을 정도였다.[44] 하지만 사람들에게 외척의 데자뷔를 일으키는 양준의 집권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이에 양준은 관직과 작위를 뿌려서라도 유력 문벌들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근처에서 불만이 비등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양준이 쥔 불안한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이었다.
3.2. 가남풍의 악행
3.2.1. 양준 숙청
사실 가남풍이 처음부터 양준과 정적은 아니었다. 애당초 가남풍이 태자비가 되었던 것부터가 무원왕후 양염(양준의 조카딸)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염의 사후 새로 들어온 무도황후 양지(양준의 딸)는 가남풍의 포악한 행동을 엄격히 훈계하기 시작했고, 이에 가남풍이 불만을 품으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한편 이때 양준도 양준대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291년 4월에 갑자기 초은왕 사마위와 회남충장왕 사마윤 두 사람이 낙양에 올라오고 싶다는 요청을 하자, 양준은 이를 얼씨구나 받아들였지만… 모든 것은 가남풍이 설계한 바였다. 사마위와 사마윤이 낙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가남풍은 한밤중에 이조와 맹관을 사마충에게 보내 황제의 서명이 담긴 조서를 받았다. 이를 통해 기습적으로 양준을 역적으로 만들었고, 초은왕은 동안공 사마요와 함께 황궁을 봉쇄하고 양준 일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양준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무고 남쪽의 저택[45]에서 측근들과 대책을 의논했다. 이때 그의 비서실장격인 태부주부 주진이 황궁 동쪽의 운룡문에 불을 질러 적들을 위압하고, 사건을 조사하여 주모자를 색출한 뒤, 동궁에서 군대를 모아 황태자를 받들고 만춘문으로 들어가자고 헌책했지만, 여태 상황 파악이 안 된 양준은 아래와 같은 소심한 이유로 이 방법을 기각해버렸다.결국 궁중을 장악한 초왕 사마위 등의 군대는 양준의 집을 포위했다. 이 시기 귀족들의 저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나 마찬가지여서 양준은 그 안에 틀어박혀서 사병들을 모아 항전하려 들었지만, 사마위와 사마요는 누각 위로 궁노수들을 올려보내 저택 안으로 화살을 퍼부었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해오자 양준의 사병들은 참패했고 결국 화공으로 저택이 함락되었다. 양준은 마구간으로 달아나다가 일개 군사들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때는 앞서 사마염에게 받아놓았던 《면벌부》도 무용지물이었다. 덧붙여서 이때 문앙도 원한을 품고 있었던 제갈탄의 외손자인 동안공 사마요에게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삼국시대의 저택 모양 부장품 |
이후 가남풍은 양지의 어머니이자 양준의 처인 방씨를 처형하고자 했다. 양지는 어머니를 구명하고자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통곡하면서, 계후라지만 어쨌든 법적으로는 시어머니 체면에 며느리 앞에서 '소첩'을 자칭해 가며 방씨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가남풍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방씨는 역적의 아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했고, 이에 절망한 양지도 스스로 단식하여 죽었다.
가남풍이 양지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행동한 것은 양지가 자신을 훈계한 데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양지는 앞에서는 가남풍을 훈계했지만 뒤로는 '지금이야 나이도 젊고 해서 투기도 하고 좀 방자하게 굴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라며 행실을 감싸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다.
3.2.2. 토사구팽
이렇게 가남풍은 초왕 사마위 및 동안공 사마요를 움직여 궁중에서 외척 양씨 세력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렸다. 따라서 이 정변의 가장 큰 공로자는 단연 사마위와 사마요였지만, 가남풍은 의도적으로 사마위를 배제하고 여남왕 사마량과 노신 위관을 다시 중용했다. 이에 사마위가 불만을 품자 눈치챈 가남풍은 다시 사마위에게 밀사를 보내 황제의 명이니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안 그래도 부글부글 끓고 있던 초왕 사마위는 한달음에 사마량과 위관을 살해했다. 사마위는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떠들었으나, 살해된 사람들이 각각 황실의 큰어른, 명망 높은 노신으로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을 색출하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심지어 사마위가 가남풍이 대신 내린 조서 내용대로만 행동한 것도 아니라 본인이 조서를 위조하기까지 했다. 결국 토사구팽으로 사마위는 처형당한다.간단히 말해 가남풍이 초왕 사마위를 이용해 정적들을 전부 제거하고 초왕 사마위까지 제거했다. 당연히 권력은 가남풍 손으로 넘어갔다.
3.2.3. 태자 살해
여남왕 사마량과 위관, 초왕 사마위가 제거된 이후인 291년부터 300년까지 큰 사건은 없었다. 근데 여기서 가남풍이 실책을 저질렀다. 혜제 사마충의 아들로 황태자였던 의붓아들 사마휼이 가남풍의 소생이 아닌 데다 똑똑했기 때문에, 가남풍은 사마휼이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까 봐 태자를 지나치게 견제하여 죽이려 했다.가남풍이 사마위를 죽인 일은 일단 사마위가 지은 죄가 있었으므로 문제가 안됐지만, 가남풍이 무려 황태자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방 각지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마씨들이 분개하였다. 이 중 조왕 사마륜[46]이 가장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사마륜의 측근이 사마휼이 죽은 후에 행동하면 더 명분이 있다고 조언하여 직접적으로 구하지는 않았고, 결국 사마휼은 가남풍이 보낸 손려가 건넨 독약을 거절했다가 약 찧는 절구에 맞아 최후를 맞았다. 이때 절구 찧는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담장 넘머로 들렸다고 한다.
3.3. 팔왕의 난 전개
3.3.1. 전기
조왕 사마륜은 드디어 속셈을 드러내어 제왕 사마경과 함께 낙양으로 진군해서 가남풍과 그 일족 및 장화를 멸족하고 권력을 잡았다. 게다가 혜제 사마충을 뒤로 몰아내고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을 죽였는데, 사마장의 형 사마반과 동생 사마상은 요절하여 혜제 사마충과 폐태자 사마휼의 대는 확실히 끊겼다.사마륜은 의양왕 사마위[47], 손수 등 측근과 함께 모의해 스스로 황제에 오를 준비를 했다. 황통이 넘어가게 생기자 무제 사마염의 9남 회남왕 사마윤이 군대를 일으켜 사마륜을 공격했다. 조왕 사마륜의 군대는 연전연패를 거듭했으나 여음왕 사마건에게 포섭당한 부하의 배신으로 사마윤은 목숨을 잃었다. 살해당한 사마윤은 당시 사마염의 아들 중 사마충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고[48] 가장 평가가 좋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마륜은 사마윤의 아들이자 진왕 사마간의 양자인 사마욱도 죽이고, 사마윤의 동복형제이자 사마염의 15남인 오왕 사마안도 죽여버리려 했으나 좌천 선에서 끝냈다.
이후 사마륜이 황제가 되고, 아들 사마과를 태자로 삼는 등 전횡을 일삼자 제왕 사마경,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신야군왕 사마흠이 연합하여 사마륜을 공격, 사마륜의 일족과 손수를 모조리 축출하고 죽여버리는 데 성공했다.[49] 이때 혜제 사마충으로부터 옥새를 빼앗았던 의양왕 사마위 또한 죽임을 당했다.[50]
본시 사마소는 사마염보다 사마유를 더 사랑했는데, 원소와 유표의 일을 예로 들어 결국 장남 사마염이 황제가 되었다. 게다가 태자였던 사마충이 백치였기에 평생 견제당했다. 사마유의 아들이었던 제왕 사마경은 이를 항상 한탄스럽게 생각하였고 재상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게 되자 사촌인 혜제 사마충에게 무례하게 대하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 사치를 일삼았다. 혜소[51], 평원왕 사마간[52] 등이 충고했으나 사마경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장사왕 사마예와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이 다시 사마경을 공격해 패사시키고, 이번에는 사마예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사마예, 사마영은 모두 혜제 사마충의 형제들로 이때까지 생존해 있었던 혜제 사마충의 형제는 본인 포함 사마예, 사마영, 15남 사마안, 25남 사마치 5명뿐이었다.
3.3.2. 중기
어느 정도 평화가 유지되나 싶더니 황태제 자리를 두고 장사왕 사마예와 성도왕 사마영이 충돌하게 되었다. 사마예는 혜제의 깃발을 들고 사마영의 군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후 일방적 도륙을 하였는데, 건춘문에서 7리에 걸친 도랑에 시체가 쌓여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의 대승이었다. 장사왕 사마예는 최대한 황족들을 존중했지만, 이미 다들 야심의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마당이었다. 황태제 자리를 노리라며 성도왕 사마영을 부추긴 하간왕 사마옹 덕에 다시 개판이 벌어지며 엄청난 전투와 출혈[53] 끝에 사마예는 그 두 사람의 손에 살해당했다. 이제는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상황까지 된 것.또한 장사왕 사마예 축출과정에서부터 지방 주둔군 외에도 국경주둔군이나 이민족까지 동원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전까지는 상대적으로 권력투쟁에 이어지는 소규모의 국지전 정도에 불과했고, 과정도 비교적 단순했지만 장사왕 사마예의 경우는 큰 공방전이 여러 번 벌어졌고, 장기전으로 일이 번지는 과정에서 단순 왕부의 군사로만 일을 도모하기 힘들게 되면서 지방 군벌이나 이민족 부대들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 세력으로의 줄서기와 자기 세력 지키며 방관하기 내지는 독자세력 키우기 등의 모습들도 노골적으로 등장하며 나라가 사분오열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이 승리하는가 싶었지만 조왕 사마륜과 똑같이 자기가 다 해먹으려다가 중앙에서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으니까
이에 성도왕 사마영은 유연의 흉노족을 끌어들여 자신의 본거지인 업성을 지키지만, 문제는 정작 사마영 자신이 유연에게 지원군을 모아오라고 해놓고선 지레 겁먹고 낙양으로 튀어버렸다. 이 와중에 동안왕으로 복권되었던 사마요(초왕 사마위와 외척 양준을 죽인 제갈탄의 외손자)는 사마영에게 항복을 권유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사마영이 이렇게 어이없이 무력화되자, 그가 통제하던 세력들은 전부 통제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사마영 휘하에 있던 유연, 석륵 등 유능한 이민족 장수들이 이 시점부터 서진의 통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궐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막장으로 치닫는 중원의 형편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신의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도망친 사마영에게 몹시 실망한 유연은 업성을 빠져나온 뒤 흉노족을 끌어모아 독립을 선언하고 한(漢)나라를 세워 병주자사 사마등과 대립하면서 영가의 난의 씨앗을 뿌렸다. 후일 유연이나 석륵이 서진 멸망의 주역이 될 것을 생각해 보면, 사마영의 퇴장은 결과적으로 서진 제국에 치명타를 안겨준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사실상 서진 제국은 지방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이미 옛 촉한의 땅인 익주에서 가씨의 일파 조흠이 할거하고, 저족의 유민 출신 이특이 성한을 세워 분리 독립하였으며, 병주에선 성도왕 사마영에게서 벗어난 흉노의 유연이 한나라를 세워 자립하였고, 유주에서는 모용씨를 위시한 선비족이 대거 침투했다. 또한 형주에서 유민들이 몰려들어 장창의 난[55]이 일어났고, 양주에서도 진민의 난이 일어났다. 이것은 무제 사마염이 천하통일 이후 지방 주둔군을 감축하여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사태가 심화된 현상이었으며,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 멸망의 서곡이 되었다. 참고로 이 시점에 이르면 이제 18명에 달하던 무제 사마염의 아들들[56]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사마영, 사마치, 사마안 고작 셋뿐이었다. 물론 고대 특유의 높은 영아 사망률 탓에 아들들 중 7명은 8세 이전에 요절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나머지는 다 서로 죽이는 바람에 죽은 것이다.
혜제도 무사하지는 못해서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으며, 다른 신하들이 모조리 도망가고 혜소 한 사람만이 그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때 피가 혜제의 옷에 튀었는데, 이후 아랫사람들이 핏자국을 닦아내려 하자 혜제는 "충신의 피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얼마 후 사마영의 책사 노지가 풀숲에 쭈그려 앉아 통곡하는 진혜제를 업성으로 데려갔다.
3.3.3. 후기
혜제를 끼고 낙양의 장방에게로 달아났던 성도왕 사마영은 완전히 권력을 빼앗기고, 혜제와 함께 다시 장안으로 옮겨갔다. 그 이후 동해왕 사마월이 거병하여 하간왕 사마옹을 공격하자 사마옹이 사마영을 다시 하북으로 보내 사마월을 견제하려고 했다.[57] 사마영은 훗날 사마옹이 패망한 후 사마효에게 체포되었고, 유여[58]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간왕 사마옹과 동해왕 사마월의 싸움은 그야말로 개싸움이었는데, 이 둘의 싸움에 각지의 주자사, 군태수들과 온갖 사마씨 종친 왕들이 다 끼어들어서 완전 난장판이 되어버렸다.여기에 뛰어든 주요 인물만 해도 구희, 유여, 유곤 형제, 유홍, 유교, 사마효, 사마무 등 엄청나게 많다. 결국 하간왕 사마옹 편이었던 유교가 동해왕 사마월의 편이었던 유여, 유곤 형제한테 패배한 이후에 대세가 사마월 쪽으로 기울었다. 그 이후 사마월이 화해를 제시하는 것에 낚여 사마옹은 자신의 오른팔인 장방을 죽여버렸고, 결과적으로 사마옹이 패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사마월은 사마옹을 향해 쳐들어가 장안을 함락시키고, 혜제를 다시 낙양으로 데려왔으며, 사마옹에게 사도로 임명하는 조서를 보내며 낙양에 돌아오면 용서해준다고 했으나, 이는 거짓이었다. 하지만 지칠대로 지쳐 여기에 낚인 사마옹이 낙양에 가다가 결국 중간에서 사마모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동안 혜제가 붕어하고 사마월이 예장왕 사마치를 제위에 올려 그가 회제가 되었다. 그러나 권력은 동해왕 사마월에게 있었으며, 이렇게 6년에 걸친 피비린내나는 내전은 일단락되었다. 여기까지가 팔왕의 난이다. 여기서 진정되었더라면 그나마 하내 사마씨 황실의 내분으로 수습될 뻔했다.[59]
4. 결과: 영가의 난
하지만 팔왕의 난은 앞으로 280여 년 동안 이어질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난세였던 오호십육국시대와 남북조시대의 서막에 불과했고, 이미 내전을 틈타 각지에 자립한 이민족들이 서진의 영역내에서 일대 세력을 이룬 상황이었다.대규모의 내란을 틈탄 이민족들은 제국 전역에서 발호했다. 남 흉노를 규합한 유연의 아들 유총이 남하하면서 그 휘하의 장군들인 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녔다. 이미 서진의 조정은 지방에까지 통치력을 투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제국의 실권자였던 동해왕 사마월은 친인척들 중 살아남은 사마등과 낭야왕 사마예[60]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거점을 장악하게 하는 등 사마씨 황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여러가지로 고군분투하며 이민족을 몰아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마월은 암중 집권자로써, 황궁에 들어가 회제 사마치의 측근을 살해하는 등 전횡을 저질렀기 때문에 회제는 점차 사마월을 견제했고, 사마월 또한 독재를 계속하면서 회제의 친족인 청하왕 사마담을 죽여 인망을 계속 잃었다. 이와 동시에 이민족은 계속해서 서진 조정을 위협했고, 이에 사마월이 전장에 나간 사이 회제는 황형인 사마안[61]과 짜고 사마월을 죽이라는 조서를 꾸몄다. 그 와중에 회제가 연주자사 구희에게 밀조를 보내 뒤통수를 치려하자 이를 알게 된 사마월이 분사하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팔왕의 난 관련자들은 전부 죽었다.
그러나 이렇게 팔왕의 난 관련자가 전부 사라지게 된 것이 문제였다. 애초에 사마씨 종친들에게 군권을 모두 몰아줘서 황실을 보위하는 울타리로 삼은 것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죽게 되자, 서진 제국의 주요 정예군들을 지휘할 황실 친위 세력이 사실상 공중분해된 것이었다. 남은 이들은 더 이상 사마씨 황실을 보위할 생각을 버리고, 생존을 위해 각자도생을 모색했으며, 이 때문에 서진은 사마월이 죽은 시점부터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당장 동해왕 사마월의 뒤를 이어 대권을 잡은 태위 왕연부터가 사마월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봉지인 동해로 간다며 수도 낙양을 탈출했다. 한 마디로 말해 소위 삼공이나 되는 인물이자, 군권을 가진 최고위 대신이라는 자가 황제를 버린 셈이었다. 그런데 피난민들과 낙양 주둔군이 대거 왕연의 탈출에 합류하여 그 수가 무려 100,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낙양 주변은 흉노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라 해당 지역을 담당한 갈족의 수장 석륵이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왕연 일행을 중간에 기습했다. 이 전투에서 서진군과 피난민들은 사로잡히거나 모두 죽었는데 세자와 황족 48명이 사망했고, 사마월의 왕비 배씨는 윤간을 당한 뒤 노예로 팔렸다. 사로잡힌 왕연 등도 결국 밤에 일부러 무너뜨린 담장에 깔려 죽어 수백 명의 고관대작이 또다시 살해당했다. 문제는 그나마 없는 낙양 주둔군이 이 사건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고 괴멸되었으며, 지방 주둔군은 무제 사마염이 행한 감축과 팔왕의 난으로 인한 병력 소모로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방을 장악한 군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자기 코가 석자인 경우가 많은 데다가 굳이 수도인 낙양을 구원할 이유가 없었다. 즉 서진은 군대가 없는 국가가 되어버린 꼴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인해 낙양은 유총이 보낸 유요, 석륵, 왕미, 호연안 등 흉노족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간신 동탁이 파괴한 지 100여 년 만에 또다시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낙양이 함락되었을 때 대장군 오효왕 사마안이 훙서했고, 회제 사마치는 유총에게 끌려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무제 사마염의 아들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서쪽의 장안으로 도주하여 뒤를 이은 사마안의 아들 사마업이 민제로 즉위했으나 세력권은 극히 작았다. 근방인 홍농에 동해왕 사마월의 형인 남양왕 사마모[62]의 아들 남양왕 사마보가 있었으나 사마보는 민제 사마업을 구원하지 않았고, 결국 사마보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궁지에 몰린 민제가 마침내 항복하여 회제 사마치와 같은 운명을 맞으면서 결국 서진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흉노의 침공을 역시상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이후 화북 지방은 여러 이민족이 난립한 오호십육국시대와 북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장강 이남에서는 사마의의 아들인 낭야무왕 사마주의 손자 낭야왕 사마예가 강동 지방을 근거로 하여 서진의 여명을 잇게 되었는데 이를 동진이라고 한다.
5. 사건 정리
5.1. 타임라인
- 291년
- 300년
- 301년
- 302년
- 304년
- 306년
양준 VS 사마위 + 가남풍
사마량 + 위관 VS 사마위 + 가남풍
사마위 VS 가남풍
가남풍 VS 사마륜 + 사마경
사마륜 VS
사마륜 VS 사마경 +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 + 사마흠
사마경 VS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
사마예 VS 사마영 + 사마옹
사마영 + 사마옹 VS 사마월
여타 사건들의 경우도 그렇지만, 팔왕의 난도 여러모로 중간에 제대로 수습될 만한 분기들이 있었다. 가령 가남풍이 태자 사마휼을 살해하지 않았다든가,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이 축출된 이후, 성도왕 사마영이 장사왕 사마예의 통수를 치지 않고 잘 협력했다든가, 하다못해 사마영이 집권한 이후 똑바로 정신을 차렸더라면 최악의 파국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상의 수많은 파국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수습이 가능한 지점을 죄다 놓치는 바람에 팔왕의 난은 영가의 난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5.2. 주요 인물들
8왕의 봉토. 하지만 성도왕 사마영이나 하간왕 사마옹처럼 분봉지와 실제 병력을 가지고 지배한 거점이 다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큰 의미는 없다. 책봉된다고 반드시 부임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8왕의 병력은 작위가 아니라 무관직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하간국의 왕이었지만 진서장군으로서 관중의 병력을 가졌던 하간왕 사마옹이 그런 예이다.
일련의 사건을 주도한 하내 사마씨 황실의 제후왕과 그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보통 《 진서》 제 59권 <여남왕량등전>에 열전이 있는 8명을 주요 팔왕으로 지목한다. 해당 열전에서 다루는 이들은 볼드체 표시.
-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 사마량(司馬亮)
- 선제 사마의의 3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혜제 사마충을 기준으로는 작은 할아버지.
- 황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외척 양준이 살해당한 뒤 자동으로 정권을 인수받았다가 초왕 사마위에게 살해되었다. 사실 이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모살당한 것이므로 팔왕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어찌보면 팔왕의 난 중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이다. 독발수기능의 난 때 고전하는 아군을 구원하지 않아 참패를 면하지 못하게 만든 부하 유기를 살리려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할 만큼 착한 사람이기는 했는데 양준이 그를 축출하고 권력을 독점하려 할 때, 맞서 싸우지 않고 지방으로 도주했으며, 양준이 몰락한 뒤에는 권력을 잡은 후 공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벼슬을 다 나눠주면서도[64] 정작 초왕 사마위를 지방으로 좌천시키려 하다가 빡친 사마위에게 공격당할 땐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살해당한 인물이었다. 하내 사마씨 황실의 나이 많은 웃어른으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가남풍의 계략에 말려 가장 처음 목숨을 잃는다.
- 초은왕(楚隱王) 사마위(司馬瑋)
- 무제 사마염의 5남. 혜제 사마충의 이복동생, 장사왕 사마예의 동복형이다.
- 여남왕 사마량을 주살했지만 자신도 가남풍에게 주살당했다. 가남풍의 계략에 이용당한 사냥개로, 다른 사마씨들과는 달리 가장 행동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는지 모든 일이든 화끈하게 결정하고 처리했다. 외척 양준 일당이 척살당한 뒤 자신을 몰아내려는 사마량에게 반감을 품고 가남풍과 힘을 합쳐 사마량과 위관을 척살한 뒤 자신의 공로를 자화자찬하다가 가남풍에게 토사구팽당했다. 죽기 전에 가남풍이 사마량과 위관을 척살하라고 지시한 교지를 사형수에게 보이며 내가 왜 죽어야 하냐며 징징거렸다고 하는 굴욕적인 최후를 맞았다. 사실상 팔왕의 난의 원흉이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선제 사마의의 9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혜제 사마충의 작은 할아버지.
- 태자 사마휼을 죽인 가남풍을 독살시켰지만 결국 야심을 드러내 제위에 올랐다가 제왕 사마경 등에게 주살당했다. 조왕 사마륜은 혼자서 결단내리는 일이 별로 없었고, 참모였던 손수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으며 가남풍을 척살한 뒤에는 혜제 사마충을 몰아내고 대신 황제가 되어 사마충의 손자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다른 왕들에게 공격당해 3개월 만에 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세력도 압도적이지 않은 주제에 찬탈을 실행했다가 망했으니 좋은 평가를 내리긴 어렵다.
- 회남군왕(淮南郡王) 사마윤(司馬允)
- 무제 사마염의 9남.
- 거점은 회남. 집권 이후 전횡을 부린 조왕 사마륜에게 항거했다가 패사했다. 사마윤은 소위 팔왕에는 들질 않는다.
- 제무민왕(齊武閔王) 사마경(司馬冏)
-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무제 사마염의 조카. 혜제 사마충의 사촌형제.
- 거점은 허창(許昌)으로 찬탈자인 조왕 사마륜을 주살했다. 제왕 사마경은 본래 지혜롭고 남들에게 인자한 성품이었다는데 처음에는 조왕 사마륜과 함께 했다가, 사마륜이 황제가 되자 다른 왕들과 힘을 합쳐 사마륜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나서 권력을 독차지하고 요직에 측근들을 앉힌 뒤 사촌인 혜제를 핍박하며 지나친 향락과 사치를 일삼다가 결국 다른 사마씨 왕들에게 통수를 맞고 죽었다.
- 장사려왕(長沙厲王) 사마예(司馬乂)
- 무제 사마염의 17남. 혜제 사마충의 이복동생. 초은왕 사마위의 동복동생이다.
- 거점은 낙양(洛陽)으로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을 주살했다. 욕심과 패륜으로 가득했던 팔왕의 난 당시 유력한 인물들 중 유일한 정상인이자 충신이었다. 제위를 찬탈한 조왕 사마륜을 제거한 후, 향락에 흠뻑 빠져 국정을 농단하는 제왕 사마경을 몰아내고 혜제를 구출하기 위해 100명의 선봉대를 친히 이끌고 낙양으로 진군해 황제를 구하고 사마경을 척살했다. 이후 자신의 형인 혜제를 충실히 보필하고 다른 왕들과는 협치를 하여 엉망이 된 서진 제국의 체제를 재정비하고,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하간왕 사마옹의 꾀임에 넘어간 성도왕 사마영이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도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분전하여 사마영을 고전하게 했지만 동해왕 사마월이 느닷없이 역습을 가하는 바람에 끝내 자식들과 함께 사로잡혔다. 그후 하간왕 사마옹의 부하였던 장방에 의해 산채로 화형을 당했다.[65] 팔왕 중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으로, 장방의 부하들조차 너무 잔인한 그의 최후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무제 사마염의 19남. 혜제 사마충, 초왕 사마위, 장사왕 사마예의 이복동생.
- 거점은 업(鄴). 조왕 사마륜, 제왕 사마경, 장사왕 사마예를 순서대로 주살했다. 사마영은 본래 똑똑하고 백성들에게 인자했던 사람으로 인망이 두터웠다고 하는데, 처음의 행보는 의기로왔으나 곧 하간왕 사마옹에 의해 흑화해버렸다. 장사왕 사마예와 힘을 합쳐 조왕 사마륜을 축출하고 권력을 얻었다. 하지만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을 잇달아 몰아낸 뒤에는 황태제가 되려는 야욕에 빠져 하간왕 사마옹의 꾀임에 넘어가 장사왕 사마예를 통수쳐서 죽여버렸는데, 왕들 사이에서 완충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사마예의 죽음으로 사실상 서진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끊어져버렸다. 그후 동해왕 사마월 휘하의 연합군이 자신을 몰아내려 하자 남흉노의 유연과 손을 잡고 이에 맞섰으나 결국 패배했고, 훗날 유곤의 형인 유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사마방의 3남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태원열왕 사마괴의 장남, 무제 사마염의 6촌. 혜제 사마충의 재당숙(7촌 삼촌뻘)
- 거점은 장안(長安). 역시 조왕 사마륜, 제왕 사마경, 장사왕 사마예를 순서대로 주살했다. 성도왕 사마영이 흑화되는데 있어 1등 공신이었다.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 조왕 사마륜이 득세할 땐 그와 손을 잡았다가 제왕 사마경,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이 사마륜을 공격하자 3왕의 편에 들었다. 그후 제왕 사마경이 타락하자 성도왕 사마영, 장사왕 사마예와 힘을 합쳤고, 황태제가 되려는 야욕에 사로잡힌 사마영을 부추겨 사마예를 치게 해 그를 잡은 뒤엔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이후 오랜 싸움으로 힘을 잃어버린 사마옹은 사마영과 남흉노까지 끌어들여 힘을 합친 뒤, 동해왕 사마월+예장왕 사마치와 맞서 싸웠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성도왕 사마영을 잡아서 죽게 한 뒤 사마월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본인도 사마월에게 살해당했다.
- 동해효헌왕(東海孝獻王) 사마월(司馬越)
- 사마방의 4남 사마규의 손자, 고밀문헌왕 사마태의 차남, 무제 사마염의 6촌. 혜제 사마충의 재당숙.
-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을 주살했다. 다른 사마씨들이 난리를 칠 때 혼자 숨죽이고 지켜보다가 대충 정리가 되었다 싶으니까 튀어나온 기회주의자였다. 물론 그 명분은 어지러워진 천하를 바로잡겠다는 것이었지만, 당연히 말이 안되었다. 처음에는 기세좋게 밀고 나가다가 남흉노까지 합세한 성도왕 사마영+하간왕 사마옹의 세력에 밀렸는데 이에 질세라 선비족을 끌고 와서 맞불을 놔버렸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사마옹까지 잡아죽였지만 이 개판으로 인해 서진 제국의 영역 안에 남흉노와 선비라는 큰 위험이 깊숙히 자리잡게 되었다. 바보 황제였던 혜제에게 독이 든 떡을 먹여 죽였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후 예장왕 사마치를 제위에 올렸는데, 그후 영가의 난이 발발하여 사방에서 이민족들이 쳐들어오고, 유연의 남흉노족과 석륵의 갈족이 낙양으로 진격해오자 이를 막기 위해 지방에 파발을 띄워 당장 낙양으로 오라고 명령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정적이나 위험 인물들에게 잔인하기로 유명했고, 그 와중에도 권력을 독점하고자 황제인 사마치의 측근들을 주살해 황제를 분노하게 했다. 결국 사마치는 전횡을 일삼는 사마월을 숙청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이 음모가 발각되어 황제의 배신을 알게 된 사마월이 격분하여 피를 토하고 죽은 뒤, 제국은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이민족들이 서진의 영역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후 태위 왕연이 무려 100,000명에 달하는 정예군 및 백성들과 함께 사마월의 시신을 관에 싣고, 봉지인 동해로 도망가다가 석륵의 군대에게 붙들려 몰살을 당하고 사마월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 예장왕(豫章王) → 회계공(會稽公) → 회황제(懷皇帝) 사마치(司馬熾)
아래는 팔왕의 난과 관련된 주요 인물의 간단한 계보도.
'''''' | ||||||
<col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경조부군[추존][2] | 사마랑 | 창무정후 | 하간평왕[3] | 의양왕 | |
장무왕 | ||||||
의양성왕[4] |
|
|||||
동평왕 | ||||||
고조 선황제[추존] | 세종 경황제[추존] | 제헌왕[8] |
|
|||
|
||||||
제무민왕 | ||||||
태조 문황제[추존] | 세조 무황제(초) | 비릉도왕[12] | ||||
효혜황제(2) | 민회태자 | |||||
진헌왕 | 진왕[13] | |||||
효민황제(4)[14][15] | ||||||
성양회왕 | ||||||
성양상왕 | ||||||
초은왕 | ||||||
동해충왕 | ||||||
시평애왕 | ||||||
회남충장왕 |
|
|||||
한왕 | ||||||
신도회왕 | ||||||
|
||||||
장사려왕 | ||||||
성도왕 | 화용왕[18] | |||||
오효왕 |
|
|||||
발해상왕[20] | ||||||
예장왕→효회황제(3)[21] | ||||||
대애왕 | ||||||
|
||||||
성양애왕 | 청하강왕[23] | |||||
요동도혜왕 | 동래왕[24] |
|
||||
광한상왕 | 북해왕[26] | |||||
낙안평왕 | ||||||
|
||||||
사마영조 | ||||||
낙평왕 | ||||||
여남문성왕[28] | 사마수 | |||||
여남회왕 | ||||||
낭야무왕 | 낭야공왕 | 중종 원황제(5)[29] | ||||
무릉장왕 | ||||||
동안왕 | ||||||
회릉원왕 | ||||||
연왕 경 | 연왕 기[30] | |||||
부풍무왕 | 순양왕 | |||||
신야장왕 | ||||||
평원왕 | ||||||
양효왕 | ||||||
조왕[31] | ||||||
안평헌왕 | 안평정왕 |
|
||||
|
||||||
|
||||||
태원성왕 |
|
|||||
사마익 | 남궁현왕 |
|
||||
하비헌왕 | 하비왕 | |||||
태원열왕 | 하간왕 | |||||
상산왕 | 안평왕 돈 | 안평왕 우[37] | ||||
패순왕 | ||||||
동무대후 | 팽성목왕 | 팽성원왕 | ||||
고밀문헌왕 | 동해효헌왕 | |||||
신채무애왕 | ||||||
고밀효왕 | ||||||
남양왕 | 진원왕 보[38] | |||||
범양왕 | ||||||
사마순 | 제남왕 | 중산왕 | ||||
사마진 | 초강왕 | 초정왕 | 초왕 | |||
초민왕 | ||||||
단수현후 |
|
|||||
안성정후 | 임성왕 릉 | 임성왕 제 | ||||
서하무왕 | ||||||
안평정후 | 안평정후[40][41] | |||||
경조부군 이전[추존][43] | ||||||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 柘 黃 色)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
||||||
|
- 팔왕의 난 당시 훙서한 서진의 종실 제왕: 여남왕 사마량, 초왕 사마위, 회남왕 사마윤, 진왕 사마욱, 한왕 사마적, 조왕 사마륜, 조 태자 사마과, 여음왕 사마건, 고밀문헌왕 사마태, 동안왕 사마요, 의양왕 사마위[67], 제왕 사마경, 신야왕 사마흠,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청하강왕 사마하, 동래왕 사마유.
- 이후에 죽은 황족: 혜제 사마충, 동해왕 사마월, 회제 사마치, 오왕 사마안, 민제 사마업, 신채왕 사마등, 고밀왕 사마략, 남양왕 사마모, 남양왕 사마보, 청하왕 사마담[68], 민제의 형제들 사마고, 사마연, 안덕현공 사마영 등 수백 명.
그냥 쉽게 대중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 《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들과 연계해서 요약하자면 사마염의 아들 3명[69], 사마의의 아들 2명[70], 사마유의 아들 1명[71], 사마의의 조카손자 2명[72]이었다. 무제 사마염을 중심으로 불과 7촌 이내의 사람들끼리,[73] 더 편하게 생각하면 사마의의 부친인 사마방의 손자~현손자끼리 서로 죽고 죽였으니, 게다가 일반인들끼리도 아닌 국가 지배 계층이 국정에 손을 놓고 한두 해도 아닌 장장 15년 동안이나 이런 난리를 계속 벌여댔으니, 나라가 폭삭 망함은 당연지사였다.[74]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라는 말을 대륙의 스케일로 고스란히 실현한 셈이었다.
아쉬운 점은 팔왕 열전에 묘사되는 8왕들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놓고 무능하며 멍청하게 묘사되는 조왕 사마륜과 이민족인 남흉노와 선비족을 끌어들여 서진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끈 성도왕 사마영 및 동해왕 사마월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들 재능이 있고 평판이 좋았던 사람들이었는데, 권력을 쟁탈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타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75] 따라서 이들 8왕들이 전부 사악해서 이런 비극이 일어났다기 보다는, 중앙의 권력자인 황후 가남풍이 태자 사마휼을 죽이는 과정에서 생긴 황권의 붕괴를 틈타, (원래 황실의 위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종친 왕들의 세력이 존재했던 만큼) 이들이 자연스럽게 '서진의 정상화'를 내걸며 권력을 쟁취하려고 나서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이를 중재하거나 제어할 중앙의 권력이 부재했기에 연쇄적인 내전이 점점 수습이 불가능해진 상황으로 흘러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76]
6. 기타 창작물
웹툰 《 삼국전투기》의 <전투외전 8-2>편에서 작가 최훈이 팔왕의 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 다루었다. 과연 최훈이 280년 삼국시대 종결 이후의 이야기인 팔왕의 난까지 연재할지 귀추가 주목되었지만, <삼국통일>편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처리되어 5호 16국이 도래되었다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토탈 워: 삼국>의 첫 번째 챕터팩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발매되었다. 희대의 개막장 시대라는 혹평과 《삼국지연의》와 관련이 없다는 인식이 커서 기존 《삼국지연의》 팬층이 두터운 한국 및 중국에서는 반발이 있는 편이다. 사실 《삼국지연의》와 아예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단 사건 자체는 《삼국지연의》가 끝난 직후이므로 《삼국지연의》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토탈 워: 삼국> 본편의 유니크 무장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한 상황에서[77] 무장을 추가할 생각은 안하고, 별 뚱딴지같은 DLC가 먼저 나왔다는 데 있었다.
반면 서양인들 기준으로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이전부터 《삼국지연의》의 팬이었던 경우가 적고, 황족들의 분쟁이 소설《 왕좌의 게임》을 연상시켜서인지 제위를 놓고 일족들끼리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는 막장의 시대라는 것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 모양이다.[78][79] 사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 등의 일련의 대란들로 인해 한족 세력이 화북을 상실하고, 육조시대 및 남북조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에 역사적인 의의가 적지 않은 시대다. 삼국시대보다 이후 위진남북조시대, 육조시대 관련 연구가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고. 이렇게 연구가 넘쳐나는 시대를 버리기도 아까웠을 것이라는 행복회로가 당시에는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가 무색하게 <팔왕의 난 DLC>는 출시하고 난 뒤에도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한채 망해버렸다. DLC 출시 이후 유저가 고작 6,000명 정도만 증가했을 정도였으며 그렇게 찔끔 오른 유저들도 몇 주 안되어서 다시 다 빠져버렸다. <토탈 워: 삼국>의 유저층은 《삼국지연의》라는 이야기의 매력으로 유입된 유저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와 전혀 관련이 없는 팔왕의 난은 애시당초 기존 유저들의 흥미를 이끌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상술했듯이 호평을 보였다는 서양측에서도 반응이 미적지근한 편이었는데, 중국 역사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있는 파트 중 하나인 《삼국지》 시대조차도 서양권에서는 마이너에 속하는데, 그 《삼국지》 시대에 비해 훨씬 인지도가 떨어지는 시대를 내보낸 시점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였을 것이다. 그나마 《왕좌의 게임》 마냥 다채로운 왕들을 기대했더니 무슨 놈의 군주들이 죄다 Sima Sima Sima Sima냐는 불평도 무시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는 단순히 서양인들의 무지라고만 하기도 힘든것이 중국인이나 한국인들도 이 사마씨 황족들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사마의, 사마염, 사마부, 사마유 등의 아들이나 손자라는 식으로 아는 것이 대부분이다. 애시당초 이런 인식을 없애려면 이들이 황족이라는 설명을 충분히 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없이 나온 탓에 유저들에게 찬물을 제대로 부어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고증도 좋지 못해서 논 플레이어블 세력 중에서는 사마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상인물이다. 심지어 구희나 유곤과 같이 팔왕의 난에서 나름 비중이 있는 실존 인물들은 등장조차 안 시키고, 가상인물로 채워 넣었다. 거기에 이름만 바꿔 달았을 뿐 성의라곤 1도 없는 미칠듯한 중복 모델링은 덤이었다.
경쟁작으로 출시되었지만 < 삼국지 14 with 파워업키트>가 제작진의 과대광고 및 입털기, 부실한 콘텐츠 때문에 도저히 플레이할 수 없을 정도의 물건으로 나오면서, 얼떨결에 <팔왕의 난 DLC>가 재평가를 받았었으나, 2021년 5월 28일 DLC를 관도대전까지 하고, 사후 업데이트 중단으로 인해 안그래도 쓸데없는 DLC 하나 출시해놓고 입털기, 여전히 부실한 컨텐츠, 버그 고치기를 해결하지 않고 버리는 패로 쓴 탓에 <삼국지 14>보다 평점이 떨어져서 <토탈 워: 삼국> 자체와 <팔왕의 난 DLC>는 더욱 나락으로 갔다. 만일 바로 다음 DLC가 5호 16국이기라도 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1]
왕으로 봉해진 여러
종친
[2]
그래서 조왕 사마륜이 찬탈한 301년부터를 진짜 팔왕의 난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3]
十一月, 辛巳, 太醫司馬程據獻雉頭裘,帝焚之於殿前。
[4]
이것이 사실상 결정타라 봐도 무방하다. 사마의나 사마사야
조상의 전횡과
조방의 정통성 문제라는 참작의 여지가 있었던 반면, 사마소의 대에 일어난 현위 황제 시해는 그럴 여지도 없었는데다 책임을 아예 안 졌다. 후대의 인물들도 보면 폐위 이후 죽이는 일은 있었어도 적어도 대놓고 시해하기는 드물었다. 설령 죽여도 일단 폐위하고 나중에 적당히 핑계를 대 처형하거나 은밀하게 암살을 했지, 재위 중이던 황제를 백주대낮에 대놓고 시해하는 일은 없었다. 당장
항우가
그 짓을 했다가 실리와 명분을 모조리 날려먹었다.
[5]
《
삼국지연의》나 민담에선 조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촉한 소열제
유비의 칭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정사에서는 산양공으로 봉해지고 조비보다 8년이나 더 편안히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졸했다.
[6]
혜강을 숙청할 때 명목 중 하나가 명문이다. '혜강은
와룡과 같으니 그냥 둬서는 안된다.'
종회가 혜강을 모함하면서 한 주장이다.
[7]
이 부분은 이견의 여지가 굉장히 크다. 조조의 통치방식은 사실 후한 말의 사회적 모순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후한 말기의 사회문제를 유발하던 귀족계층을 조조는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더 키워주었고 그 결과는 비대해진 귀족들이 조정을 공격하는
고평릉의 정변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게다가 위나라의 대민정책 및 사회 분위기는 후대의 저명한 사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상시 계엄령에 비유했을 정도로 폭압적이었고 잔인했다. 이런 조위의 폭압성을 대표하는 정책 중 하나가 바로
둔전제다.
[8]
다만 그럼에도 백성들의 삶의 질은 후한말보다는 나은데 당장 후한말 쯤 되면 백성들이 굶어죽었다는 기록이 심심찮게 나오지만 조씨 정권 시절에는 착취를 엄청나게 당했지 최소 굶어죽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심지어 낙양에서는 조모가 죽자 백성들이 통곡을 한것을 보면 최소 후한말보다는 백성들의 삶이 낫다고 할 수 있다.
[9]
명제 시기,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공과
공손연의 반란을 진압한 공이 크지만 이건
고평릉 사변 이전의 일이다. 즉 상기한 일들은 사마의가 정권을 잡고 이뤄낸 내치적 업적과 정권 장악의 명분이 아닌,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불과했다.
[10]
오래 못갔지만 100년은 채웠다. 그나마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조 중에 100년 넘게 간 건 동진과 북위 둘뿐이었으니 상대적으론 오래 가긴 했는데, 제대로 황권을 휘두른 황제는 명제가 마지막이었다. 명제 자신도 왕돈의 반란을 막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이후 황제들은 모두 나이가 어리거나 심지어는 지적장애를 가진 자들이었기에 제대로 통치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
[11]
황제 시해를 저지른 사마소 때문에 '충'이란 가치는 전혀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대의 교리인 유교를 배척할 수도 없으니 차선으로 내세운 유교적 가치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마염이
삼년상을 치른 것도 이와 맞닿은 효를 강조하기 위함이 크다고 해석할 수 있다.
[12]
굳이 사마염이 아니더라도 후계 구도에서 황후가 되는데 사마유가 큰 걸림돌이던
가남풍이나 사마유와 상성이 안 좋아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데 큰 몫을 한
풍담 등의 대신이 흑막으로 거론되고 있다.
[13]
단 유교사상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통치철학이라는 것은 있어서 노장사상이나 무위지치 등을 철학으로 삼았다. 다만 무위지치는 한나라 초기만 행해졌는데 이는 한나라는 초한전쟁이라는 전중국을 휩쓴 대전쟁으로 건국된 만큼 초기 한나라는 상태가 매우 엉망이라서 일을 크게 벌일 형편이 못 되었다. 당장에 전대인 진나라가 이런저런 일들을 크게 벌였다가 그 부작용으로 망했으니 '무위지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14]
당시는 이미 전국시대~초한쟁패기를 거치면서 기존의 질서가 대부분 무너진 상황이라 유교를 받아들여 질서를 바로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한나라의 건국 목적이자 사상이다.
[15]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제의 경우 처음에는 유학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신들 대부분이 개백정이나 도적 출신이었던 탓에 1년이나 공적문제로 서로 다투는 일로 인해
숙손통의 조언에 따른 간단한 예법을 받아들이고 실행을 한 것을 통해 유교를 받아들였다. 다만 이때는 아직 주류는 아니었고, 앞에서 설명한 노장사상에 따른 무위지치가 통치이념 이었다. 유교가 본격적으로 통치이념이 된 것은
한무제 때였다.
[16]
그러나 이는 서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조가 기틀을 잡은 그 조위부터가 그 기반이 사마진과 같이 탈법적이고 과두적이라 정당성을 가진 통치철학이나 사상이 없었고, 이 기조를 위나라와 똑같이 탈법적으로 형성된 진나라가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조위에 비하면 사마씨의 진나라는 정통성 면에서는 당대인들에게 훨씬 더 인정받은 편이었다.
[17]
원래 3년상은 이런 의도가 아니었다. 공자가 3년상에 대해 비판한 재야에게 "자식은 태어나 3년은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무릇 부모를 위해 3년상을 치르는 것이 천하에 통하는 상례인 것이다."라고 했듯이 원래의 목적은 선비의 윤리 중 예(禮)의 영역이었다.
[18]
원소는 자기 생모가 아닌 원가의 정실부인의 3년상을 치르고, 곧 이어 자기가 태어났을 때 이미 고인이었던 호적상의 아버지 원성의 3년상을 이어서 치르면서 6년상이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행했고, 이를 통해 얼자라는 태생적 약점을 씻어내고 당대 청류파 명사들과 교류하여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원가는 탁류파였지 청류파쪽 가문이 아니었다.
[19]
전형 담당이다.
[20]
그리고 기세가 오른 반란군들은 제만년을 앞세워 칭제까지 했다.
[21]
손수는 젊은 시절 하급 관리로 근무할 때, 태수도 아니고 태수 아들인
반악에게 맞는 대굴욕을 겪는 등 당시 위진사회의 갑질에 엄청나게 학을 떼었을 사람이었다. 그가 훗날 저렇게 된 것이 사회의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2]
그리고 몇 년 더 끌다가
맹관이 제만년을 진압한 후, 사마융은 그 공으로 대장군, 녹상서사로 영전하였다.
[23]
사실 중근세 유럽이라면 딱히 나쁜 전략은 아니다. 이 시대의 유럽에서는 사교활동이 중요했는데 여기서 얼마나 돈지랄하느냐는 그 사람의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을 상징하기 때문,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주인공인
에드몽 당테스가 돈을 물쓰듯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중국은 그런 거 없고
인맥이 더 중요했다. 혈연은 당연하고 한나라 시절에는 추천을 통한 인맥이 출세에 크게 작용했다. 물론 추천이라는 한계상 문제가 없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돈지랄 싸움이나 벌이는 서진보다는 나았다.
[24]
사실 진짜 차이점은 서양의 경우 왕과 봉신, 상위 봉신과 하위 봉신 간에 계약을 통해 관계를 맺었던 것에 비해 중국의 경우 명분과 혈맥을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황제나 왕이 돈지랄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데, 중국의 경우는 유교적 명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 돈지랄의 문제가 아니었고 황제가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돈을 쓰는 것을 그리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다.
[25]
당시 중국에는 유리 공예술이 없었다. 그럼 이 유리그릇이 어디서 온 물건이냐 하면, 바로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이었다.
[26]
《
세설신어》에는 정말로 사람 젖을 먹여 키운 돼지의 고기를 내왔다고 하고, 《
진서》에는 사람 젖으로 쪄내서 성분이 스며든 고기를 내왔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든 돼지고기에 사람 젖을 먹였다고 표현할 수 있다.
[27]
헌데
당나라 이후로도 안 없어졌다.
북송의
소동파가 오석산을 두고 한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
[28]
실제로 《
진서》 4권, 〈혜제〉편을 살펴보면, 우박이나 지진, 서리, 홍수, 가뭄, 기근, 전염병,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에 관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29]
현존하는 다른 중국 역사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
진서》는 진나라 당시에 작성된 1차 사료가 아니라 한참 후대인
당나라
태종 때 편찬된 역사서이기에 당나라 인들의 시각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다. 중국에 그 대혼란을 야기한 서진 왕조를 당나라 사관들이 좋게 기록해줄 리 만무함을 감안하면, 서진 문벌귀족들의 행패나 잦은 자연재해에 대한 기록들이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는 있다.
[30]
소빙기에는 유목민들도 가축들을 먹일 목초가 급감하고 약간씩 동반하던 농사도 망치게 되어 정주민 지역으로 이주하는 수밖에 없다.
[31]
이전에는
흉노에
묵돌 같은 강력한 선우가 집권해 한나라 군대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어도, 한나라에게 조공이나 잔뜩 뜯어먹었지 중국 내부로 민족 대이동을 하진 않았다. 다만 한말 혼란기에 인구가 줄면서 이민족들을 적극적으로 중원으로 이주시켜서 살게 만들기도 했었고 사실 자발적 이동보다 이게 더 많았다. 그리고 저 경우 이주한 이민족들은 중원 국가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32]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2003, 234~235쪽 참조.
[33]
그나마 뇌물은 후진국에서는 오히려 경제가 돌아가는 원동력이라도 되는 경우도 있지 이쪽은 노답 그 자체다.
[34]
위의 실질적 건국자인
조조는
십상시의 난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다.
[35]
원래는 외척도 밀려나는게 맞았으나 사마염의 아버지인 사마소가 가충을 총애한 탓에 모질게 대하지 못했고, 가남풍이 전횡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36]
다만
사마랑의 양자로 들어갔다.
[37]
예를 들어 성도왕
사마영의 근거지는 진북대장군으로 지키고 있던
업이고, 하간왕
사마옹의 근거지는 진서장군으로 지키고 있던
관중이었다.
[38]
사실 이 점은 현대
민주공화국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엽관제와 실적주의를 보자. 원래 정실주의 및 매관매직을 타파하고 민주적 인사를 위해 생긴 것이
엽관제이다. 하지만 엽관제에 치중하고
실적주의를 버리면 부정부패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반대로 엽관제를 버리고 실적주의만 내세우면 도덕적 해이가 일어난다. 미국에서 엽관제가 부정부패 및 비전문성으로 인해 비판받고, 결정적으로 미국 대통령이 엽관제에서 관료에 오르지 못했던 불만분자에 의해 암살당하자, 이후
우드로 윌슨 때부터 실적주의가 대두되었다. 원래 민주주의 국가는 민주성과 효율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조화시켜야 한다. 만약 민주성을 우선시하고 효율성을 등한시하면 관료의 전문성이 떨어져 일이 지지부진해지고, 반대로 민주성을 등한시하고 효율성만 추구하면 관료가 국민을 우습게 보게 된다.
[39]
사실 전근대의 경우 친족의 범위가 매우 넓었다. 당장에
팔고조도라고 하여 자신의 고조들의 이름 정도는 외워야 했다. 이러니 증조대에서 갈라진 사람은 당시 관점에서 친척이지 남이 아니다.
[40]
다만 정확히 말하면 조조가 이혼당했다.
[41]
사마의의 3남이자 사마소의 바로 아래 동생. 사마염의 숙부 가운데 가장 연장자.
[42]
현재 위치가 아니다 지금의 뤄양시는 수나라 때의 낙양성을 기초로 한 것으로 당대의 냑양성은 현재 뤄양시에서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대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 사찰인 백마사가 낙양성 동쪽에 바로 붙어 있어 구글 어스 등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
[43]
《
진서》 〈직관지〉에 따르면 재상급이 개인적으로 거느릴 수 있는 호분도 20명에 지나지 않았다.
[44]
그렇기는 해도 양준은 욕심은 많고 옹졸하기는 해도 당장 궁궐 문 부수는 것도 못하는 사람이니 찬탈까지 할 만큼 간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다 양준의 동생들이자 최측근인 양요나 양제는 기본적인 식견이나 양식은 있는 사람들이어서 양준에게 찬탈을 부추길만한 위인들도 못 되었다, 다만 가남풍 쪽에서 양준을 칠 때 저런 식의 프로파간다를 하기는 했었다.
[45]
공교롭게도 이 저택은 42년 전에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숙청된
조상의 집이었다.
[46]
사마의의 아들이자 사마소의 이복동생으로 백부인 소생이다.
[47]
초왕
사마위와는 동명이인,
사마망의 손자
[48]
정확히는 요절한 아들들과 이전에 죽은 사마위를 제외하면
[49]
사마륜은 손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위에 올랐다는 핑계를 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0]
사마충이 직접 사마위를 지목해 이 사람이 직접 옥새를 빼앗은 역적이라고 언급했다. 뺏을 당시 사마위는 사마충의 손가락을 꺾었다.
[51]
죽림칠현 중 한 명인
혜강의 아들
[52]
진왕
사마간과는 동명이인으로 사마의의 7남
[53]
일례로 신야군왕
사마흠은
사마영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후에 사마흠의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예는 그 둘을 의심하여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사마흠은 반군에게 패하여 죽고 말았다.
[54]
사마치는 군대를 전혀 동원할 수도 없었으며, 당시 팔왕의 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허수아비로 내세워진 것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55]
이때 형주를 담당하던
사마흠은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사마영과 대립하던
사마예가 사마흠을 의심하여 지원을 안해주었고, 결국 사마흠은 장창에게 패하여 살해당하였다.
[56]
딸들까지 합하면 자식이 25명이었다.
[57]
당시 하북에서 성도왕 사마영의 부하였던 공사번이 거병하여 동해왕 사마월의 세력과 싸우는 중이었다. 공사번 밑에서 훗날
후조의 시조가 되는
석륵도 활약하였다.
[58]
유곤의 형
[59]
팔왕의난에 가담한 왕은 사마염을 기준으로 아들 3명, 조카 1명, 숙부 2명, 당숙 1명이다.
[60]
장사왕
사마예와는 동명이인.
[61]
무제 사마염의 15남
[62]
부하에게 살해당함.
[63]
사실 팔왕의 난 가운데 유일한 방어 성공의 케이스지만 그렇기 때문에 묻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다른 왕을 죽인 적이 없는 사마량은 위관과 함께 정권을 장악한 적이 있지만, 사마윤은 정권을 장악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더 그렇다.
[64]
이런 일 때문에 기강이 안 선다며
부함이 여러 차례 간했지만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65]
이런 탓에 고우영은 사마예를, 피를 보지 않은 유일한 사마씨라고 고인드립을 쳤다.
[66]
그런데 마냥 그르쳤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사마월을 놔 두는 게 사마치에게는 굉장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67]
사마망의 손자이자 사마홍의 아들
[68]
청하강왕
사마하의 아들
[69]
사마위,
사마예,
사마영
[70]
사마량,
사마륜
[71]
사마경
[72]
사마옹,
사마월
[73]
현대의 핵가족 사회에서 7촌은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친족 관계가 밀접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불과 1960년대만 해도 7촌은 가까운 관계였다. 애당초 부계 혈족 8촌까지는 '유복친'이라 하여 상복을 입을 만큼 가까운 관계로 규정되었으니 고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와닿게 설명하면, 당신의 손자와 당신 사촌의 자식이 정확히 7촌 지간이다.
[74]
이후 명나라 초기에
정난의 변이라는 대규모 내전을 4년 동안 벌이긴 했지만, 팔왕의 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주씨의 사직을 온전히 보존했다.
[75]
심지어 성도왕 사마영조차도 '얼굴만 번지르르했지 정신상태는 흐리멍텅하고 제정신이 아니었다'라고 까이긴 해도, 당대에는 꽤 인망이 있어 많은 인재들이 그의 휘하에 몰려왔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동해왕 사마월조차도 대란이 발발하기 이전까지는 평가가 꽤 괜찮았던 사람이었다. 즉 이들 역시 권력 쟁취 과정에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가 타락했던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장 사마영만 해도 혜제의 후계자가 없는 틈을 타서 자신이 황태제가 되기 위해 온갖 무리수를 두었던 것이 최대의 문제점으로 지목되는데, 까놓고 사마영이 이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5호의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서진 제국에게 있어 최악의 사태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76]
8왕들 중에서 성도왕 사마영과 동해왕 사마월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이민족이었던 남흉노족와 선비족을 내전에 끌어들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사실상 이 두 민족이 서진 제국을 완전히 끝장내는데 일조했으니, 성도왕과 동해왕이 특히 더 비판을 받아 마땅할 자들이기는 하다.
[77]
순유는 첫 턴에 정강에게 죽고, 《삼국지연의》 최고의 메이저 히로인인 초선이나, 책사계 탑티어인 순욱조차 클론 일러였다. 인물 비중이 높은 《삼국지연의》의 특성상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78]
실제로 해당 작품의 <황건적 DLC>에서 나오는 하의의 대사에선 대놓고
밤의 경비대의 맹세를 오마쥬한 부분이 있다.
[79]
사실 유럽의 역사 자체가 팔왕의 난 같은 왕위 계승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당장에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백년전쟁, 장미전쟁, 9년전쟁, 스페인, 오스트리아, 폴란드, 바이에른의 왕위 계승 전쟁, 7년전쟁, 카를리스타 전쟁 모두 결국 왕위 계승과 직결된 전쟁이었다. 동아시아에선 군주의 자리를 두고 전쟁까지 벌이는 것이 특이한 일이었지만 서양은 흔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