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의 공경 | ||||||||
삼공(三公) | ||||||||
사마 | 사도 | 사공 | ||||||
구경(九卿) | ||||||||
태상 | 광록훈 | 위위 | 태복 | 정위 | 대홍려 | 종정 | 대사농 | 소부 |
고려의 삼사삼공 | ||
삼사(三師) | ||
태사(太師) | 태부(太傅) | 태보(太保) |
삼공(三公) | ||
태위(太尉) | 사도(司徒) | 사공(司空) |
태자부(太子府) | ||
태자태사 (太子太師) |
태자태부 (太子太傅) |
태자태보 (太子太保) |
태자소사 (太子少師) |
태자소부 (太子少傅) |
태자소보 (太子少保) |
1. 고대 중국
태위는 3공(三公)의 하나로 고대 및 중세 중국에서 군사 부문을 담당한 재상이었다. 당시에는 주로 문신(文臣)이 임명되었으며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1]삼공(三公)의 하나로 전한 시기에는 태위(太尉)[2], 후한 시기에는 사마(司馬)라 칭해졌다.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군사 방면을 담당했다. 녹봉은 4,200석이었다가 후한 말기에 대사마(大司馬)로 명칭이 바뀌고 나서 10,000석으로 올랐고, 실질적인 승상(丞相) 예우를 받았다. 시대가 변화하고 일반적인 관리들에게 최고 고위직을 경험하고 태위급(사도, 사공 등)으로 임명, 추승되면 후대까지 명문가로 인정받는 명예가 지속되어 관리라면 모두 꿈꾸는 명예직 위치가 되었다.
태위로 유명한 인물로는 양수의 아버지 양표가 있으며, 이각이 황제를 겁박해 대사마의 자리를 얻었다. 가후, 만총과 사마의, 등애도 태위였다.
1.1. 사례
漢 후한의 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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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조희 |
2대 우연 |
3대 조희 |
4대 모융 |
5대 포욱 |
6대 등표 |
7대 정홍 |
8대 송유 |
9대 윤목 |
10대 장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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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장우 |
12대 서방 |
13대 장우 |
14대 이수 |
15대 사마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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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마영 |
17대 유개 |
18대 양진 |
19대 풍석 |
20대 유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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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주총 |
22대 유광 |
23대 방참 |
24대 시연 |
25대 방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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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왕공 |
27대 환언 |
28대 조준 |
29대 이고 |
30대 호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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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두교 |
32대 조계 |
33대 원탕 |
34대 호광 |
35대 황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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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호광 |
37대 황경 |
38대 유구 |
39대 양병 |
40대 진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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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주경 |
42대 유구 |
43대 문인습 |
44대 유총 |
45대 곽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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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대 문인습 |
47대 이함 |
48대 단경 |
49대 진탐 |
50대 허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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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유관 |
52대 맹욱 |
53대 장호 |
54대 진구 |
55대 교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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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대 단경 |
57대 유관 |
58대 허욱 |
59대 양사 |
60대 등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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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대 장연 |
62대 장온 |
63대 최열 |
64대 조숭 |
65대 번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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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대 마일제 |
67대 유우 |
68대 동탁 |
69대 황완 |
70대 조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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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대 마일제 |
72대 황보숭 |
73대 주충 |
74대 주준 |
75대 양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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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대 가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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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 조위의 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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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1대 | 2대 | 3대 | 3대 대리 | 4대 |
가후 | 종요 | 화흠 | 장패 | 사마의 | |
<rowcolor=#ece5b6>5대 | 6대 | 7대 | 8대 | 9대 | |
만총 | 장제 | 왕릉 | 사마부 | 고유 | |
<rowcolor=#ece5b6>10대 | 11대 | 추증 | 추증 | ||
등애 | 왕상 | 위진 | 순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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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당시 한나라 황제인 영제로부터 무려 1억 전[3]이나 주고 산 벼슬이다.[4] 물론 임관기간은 짧았지만.
가후· 종요 등은 조위의 태위였다.
동탁이 황자 유협을 황제로 앉히고, 스스로 태위의 자리에 올랐었다.
- 양(梁)
- 소굉(蕭宏) - 무황제(武皇帝) 소연(蕭衍)의 이복동생으로 2차에 걸쳐 7년을 역임했다. 그는 황족들의 으뜸이었기에 무제 소연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양나라에서 유일하게 삼공(三公)을 모두 역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굉은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웠기 때문에 그가 재임하는 동안 백성들을 수탈하여 집에는 재물이 가득 쌓였으며, 심지어는 황녀 영흥공주(永興公主)과 사통까지 했으나 종실로서 죄를 참작하여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실상 후경(侯景)이 대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建康)을 초토화시키기 이전에 이미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이다. 소굉 본인은 후경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사망하여 그가 쌓은 실책은 그의 후손들이 처리하게 되었다.
- 원법승(元法僧) - 북위(北魏)의 종실 탁발종규(拓跋鐘葵)의 아들로 본래 북위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연호를 선포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남쪽으로 망명했다. 양 무제 소연은 원법승을 후대하며 송왕(宋王)으로 책봉했고 4년에 걸쳐 태위를 역임했으나 후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양려'(襄厲)라 했다. 양나라의 태위 중 유일한 북위의 황족 출신으로 아들로는 원경륭(元景隆)과 원경중(元景仲)이 있었다.
- 곽원건(郭元建) - 태보(太保) 송자선(宋子仙)과 함께 후경의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임명된 인물로 태사(太師) 왕극(王克)이나 태부(太傅) 원라(元羅)가 인망을 위해 임명된 것과는 다르게 후경이 반역하는데 일조한 인물로 추정된다. 정통 황제로 인정되지 않는 후경이 임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 양서(梁書)》에 따로 이름을 남기지 못했으며,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의 폐위를 주장할 때 왕위(王偉)와 대립하며 폐위를 반대했다. 본래 후경은 곽원건의 의견에 따르려 했으나 왕위가 결사반대하며 폐립을 주장하자 결국 본인의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태위 곽원건의 사상과 동시에 신하들에게 이끌려다니는 후경의 우유부단함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 북송
- 홍신(洪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