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의 공경 | ||||||||
삼공(三公) | ||||||||
사마 | 사도 | 사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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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삼사삼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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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소부 (太子少傅) |
태자소보 (太子少保) |
司空
1. 개요
고대 중국의 후한 시대, 고려의 관직. 전한 시대의 어사대부가 개칭된 것으로, 태위, 사도와 함께 삼공으로 불렸다.대표적인 사공으로는 조조[1]와 진군이 있다.
고려에서도 태위, 사도와 함께 삼공을 설치하였는데 고려의 사공은 문종 때 1인으로 하고 정1품으로 정비하였다. 충렬왕 때 원간섭기로 없어졌다가 1356년( 공민왕 5년) 다시 두었으며, 1362년 다시 없앴다. 주된 기능은 임금의 고문 역할을 하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었으나 실제로는 모든 왕족 봉작자들의 아들과 사위에게 봉작 대신 최고의 관직인 사도나 사공을 명예직으로 수여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리들에게 최고 고위직을 경험하고 사공급(태위, 사도 등)으로 임명, 추승되면 후대까지 명문가로 인정받는 명예가 지속되어 관리라면 모두 꿈꾸는 위치였다.
한국, 중국의 성씨 사공씨는 사공 관직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마씨와 같은 연원.
2. 사례
3. 관련글
[1]
삼국지연의에선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고 바로
승상이 된 것으로 기술했지만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사공이 된 것이 맞다. 이것도 원래 자신은
대장군이 되고
원소에게는 명예직인 태위를 제수하려 했다가 원소의 반발로 양보한 것. [2] [3] 승상은 조조가 원씨 세력을 멸망시킨 후 되었으며, 몇년 후
위공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왕에 오른다.
[2]
대장군과 태위 중 무엇이 상위직이냐는 언왕설래가 있는 편이다. 먼저, 대장군은 전한 고황제가 한신을 임명한데서 시작하여 한무제때 공식적으로 설치되어 삼공보다 아래에 두었고, 후한 광무제때 이르러 삼공과 대등, 혹은 그 이상의 위치가 되었으며 후한 말기에는 태위보다 반수 낮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등 서열의 변화가 존재한다. 분명한건 후한 이후부터
외척들이 현재의 내각 총리에 해당하는 녹상서사와 함께
외척보정으로 임명되었던 위상이 달리. 태위직은 명예직화 된 만큼 당시 명예직인 태위보다 대장군이 더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3]
더불어 태위와 완전 동일시되는 오류가 빈번한 (대)사마의 경우 전한 위청, 곽거병에게 나란히 고위 장군호로 앞에 붙게 되었다가, 외척보정이 대사마 + (대/표기/거기)장군으로 직함을 달아 집정대신의 관직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후한 외척보정들이 대사마 직함을 제하고, 사마가 태위로 바뀌며 군정 업무 이외 병권을 갖지 못하게 됨으로서 명예직화 되었으나 후한 말기, 유우가 대사마에 임명되면서 태위와 별도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각이 대사마에 임명되며 승상급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후한 이후, 조위 시대에는 조인, 조휴, 조진 등이 대장군을 거쳐 대사마에 임명되면서 대사마가 대장군의 완벽한 직속상관화 되면서 군정을 관리하는 동시에 대장군처럼 병력을 통솔하며 전쟁을 치를 권한도 갖는 등 최고 통수권자로서 대장군의 상위에 존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