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獵 官 主 義 / Spoils System정당에 대한 충성도와 기여도에 따라 공직자를 임명하는 인사제도이다.
엽관주의라는 용어는 "관직(官職)을 사냥(獵)한다"는 뜻으로, spoil이 문어체에서 명사로 사용하면 "승리 후 얻는 전리품"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속칭으로, 이 용어가 처음 생긴 미국에서의 정식 명칭은 교체임용주의(交替任用主義, doctrine of rotation)라고 한다.
엽관제도는 정당이 충성도와 기여도에 따라 공직자를 임명한다는 점에서 공천제도와 유사하다. 하지만 전문직이나 정무직 한정으로 대학 교수 등을 끌어오는 공천과는 달리 엽관제는 하위 공무원까지 모조리 정당의 뜻에 따라 물갈이할 수 있는 제도였다. 사실상 정당 하나가 관료제를 자기네들 내에서 독점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방식으로 선거에서의 결과에 따라 승리한 정당이 임명권을 가지고 공직을 행사하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공무원직은 사실상 선거의 전리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공무원 임명의 기준을 정치적 신조나 정당관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실적주의(實績主義)와 정반대다.
오늘날의 능력주의 혹은 실적주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이지만, 엽관제 이전의 대세는 정실주의(情實主義)와 족벌주의 등이었고, 이 제도들은 한 술 더 떠서 최고 권력자와 귀족 같은 상류층들이 자기 내키는 대로 친인척이나 자기 파벌을 공직에 앉히는 제도였다. 이에 비하면 선거로 정권을 잡은 정당이란 다수가 결정권을 갖는 엽관주의는 그에 비해 훨씬 획기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였다. 또한 정당 위주의 공직 배분이다보니 그 정당을 뽑은 국민들의 의사를 더 잘 반영한다는 이유로 실적주의보다 민주적이라고 보는 학문적 견해도 존재한다. 반면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건 똑같은데 충성심 기준의 임용으로 의해 권위적 구조가 이어지고 다양성이 상실된다는 점에서 실적주의보다 비민주적이라는 반론도 있다.
특정 정당과 정치인 출신의 공직 독점은 온갖 부작용과 부패를 낳았고 이 때문에 공직에 실적주의가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엽관주의는 아직도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현대 대부분의 국가들이 행정부 각 조직의 수장들을 실적이 아닌 대통령이나 총리가 인선하여 임명하는 것이 엽관주의의 일환이다.
2. 역사
영국 의회가 왕권에 대항하여 의회정치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관리를 친의회주의자로 임명하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지만, 제도적인 엽관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부분적으로 엽관제를 실시하기 시작한 후, 1820년 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는 엽관제를 입법화하였고, 1829년에 취임한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엽관제를 "공직의 민중에 대한 해방과 공무원에 대한 인민통제의 역할을 지닌 것"라며 적극 활용하였다. 엽관주의를 민주주의의 실천원리로 선언하고 미국 인사행정의 공식적인 기본 원칙으로 채택하였다.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고 이 때 이전 정권의 인사를 현임 정권의 인사로 교체하는 공직경질(公職更迭) 원칙을 내세웠던 것이다.잭슨 대통령이 엽관제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던 것은 재산, 학력, 경력 등에서 검증된 인물들만 받아들인다는 명분으로 정부 요직을 사실상 상류층, 그것도 동부 연안 지역의 상류층들이 독점하는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이다. 잭슨이 흔히 관료제를 타파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미국 정계의 상황은 정확히는 명문가 위주의 과두제에 가까웠다. 이런 구조를 깨기 위해서 엽관제를 밀고 나가서 서부 개척민들과 중하류층이 대거 중앙 권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고, 이들이 잭슨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기반이 되어가고 정권이 교체되어도 엽관주의는 수십 년간 유지되어 간다.
그러나 국가업무가 확대되고 전문화 되면서 엽관주의는 한계를 드러내 많은 폐해가 나타나 사회 곳곳에서 문제점을 제기하였고 대략 1868년부터는 미국의 엽관주의적 인사행정에 대한 반발로 시정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1] 심지어 엽관제가 원인이 되어 1881년에는 당시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가 암살당하기까지 했다. 1883년 공무원제도 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팬들턴법이 제정되면서 엽관주의에서 실적주의로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실적주의는 엽관주의에 대한 반발, 반동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경향으로 초기에 적극적, 창조적 시각이 결여된 소극적, 부정적인 성격을 보인다.
본래 잭슨이 확립한 엽관제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 제도이지만 행정학에서 유난히 비난을 받기도 했었던 제도였다. 이는 행정학 자체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 행정학이 정치에서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의 영향이 매우 크다. 아예 행정학계에서는 이 윌슨으로부터 행정학이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윌슨은 행정학의 기본을 잡으면서, 엽관제의 단점과 폐해를 지적하고 행정은 정치와는 완전 별개인 '경영(Business)'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행정관리설이라고 하며 행정학의 기본 중 하나로 여긴다. 이 때문에 엽관주의는 행정의 기본을 망가뜨리는 제도라며 한동안 과도한 비난을 받았다. 현대에는 엽관제가 당시로선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고, 행정 자체에도 '정치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엽관제를 행정 제도의 요소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3. 특징
3.1. 장점
특정한 신분이나 시험, 경력, 실적, 자격조건을 따지지 않고 집권 정당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인사가 임명되기 때문에 연공서열 등으로 인한 관직의 경직성과 특권화를 배제한다. 또한 관료들과 달리 엽관제의 공무원들은 정권을 빼앗기면 본인도 잘릴 확률이 높으므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민주정치와의 궁합이 잘 맞다.[2] 공직자의 적극적인 충성심이 확보되고 해당 정권 안에서 업무에 추진력을 더한다. 특별히 경력같은 건 없더라도 제대로 능력 갖춘 인선만 잘 뽑으면 유연하게 능력을 갖춘 인재를 적시에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관료가 잘못하거나 하면 정권이 날아가고 그에 따라서 자기도 잘릴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대응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흔히 엽관주의의 장점으로 꼽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제대로 시너지만 낸다면 엄청난 효과를 내는 것도 가능하다.또한 특정 관료조직이 정치세력으로 변모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한다. 각 분야의 전문화가 진행된 오늘날에는 각 부처의 관료들이 부처 소관 분야를 다루면서 전문가가 되고, 그러면서 부처 관료와 각 분야의 관련 인물들이 단일한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부처의 인사를 이해관계자들끼리 결정한다면 부처가 자신의 이해관계자들을 위해서만 활동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대의 민주주의 원칙에 반함은 물론 국가적인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또한 이렇게 되면 일본의 관료제 문제처럼 민주적으로 뽑힌 국가지도자의 정책을 부처 인사들이 단합해 공공연하게 거부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에 대해 엽관제는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지도자가 부처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함으로써 이해관계자가 아닌 자를 참여시켜 부처 관료들이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봉사하지 않도록 한다. 이런 점에서는 문민통제와 비슷한 장점을 지닌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전문성을 갖추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더라도 전문가들이 모인 관료집단들이 국가지도자들의 정책을 거부하여 행정적 공백이 발생하는 비효율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장점도 있다.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도 엽관주의가 힘을 발휘한다. 정권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임명된 인사들이 정권을 지키려고 하지, 등에 칼을 꽂지는 않기 때문이다.[3]
3.2. 단점
정당이 바뀔 때마다 인사가 바뀌기 때문에 정권이 금방 바뀌게 되면 전문성을 갖추기 힘들어지며 원래 특정한 조건이나 능력을 다투어서 뽑은 인선이 아니기 때문에 정당에서 인선이 잘못되면 망. 인선의 중립성이야 일단 엽관제가 선거결과에 따른 제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넘어간다 치더라도 정당제의 특성상 정당 자신의 이득이나 부정부패, 안목의 부재로 인한 무능력한 낙하산 인사 등이 관직에 배치되면 역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때문에 행정의 부패와 기강의 문란을 초래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또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정치인들을 공직에 임용하면서 정치문화가 전체주의적인 권력자 위주 시스템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이런 엽관제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게 19세기 들어서 뉴욕을 장악한 민주당 조직인 태머니홀로 이들은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부정부패의 대명사로 꼽히는 집단이다. 또한 사회가 발전하면서 복잡해지면, 그에 비례해서 행정도 전문적인 기술이 있는 인재를 요하지만 엽관주의는 능력을 평가하는 제도는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전문성이 없는 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나 정치인들에게 특정 부처 장관 등 요직을 맡김으로써 부처에 대한 전반적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 전체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이렇게 될 경우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장관이 완전히 잘못된 정책을 내거나 차관 등 다른 전문가들에게 끌려다니기도 한다.
4. 한국의 엽관주의
한국도 엽관주의를 일정부분 취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국가공무원법(28조)과 지방공무원법(27조) 모두 실적주의를 기반으로 한 시험제도로 공무원을 채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헌법에서 국무총리(86조), 국무위원(87조), 행정각부의 장(94조), 감사원장과 감사위원(98조), 대법원장과 대법관(104조), 일부 헌법재판관과 헌법재판소장(111조) 일부 중앙선거관리위원(114조) 등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규정이 있고 그외에도 기타 법률에 따라서 대통령이나 혹은 다른 기관장들이 자의적으로 공무원을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그렇게 자의적으로 임명하기도 한다.한국에서도 엽관제의 폐해를 인식하고 실적제가 기본이 되는 관료제 바탕 하에서 부분적으로 엽관제를 도입해서 유연성을 갖추려고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좋게 돌아가지만은 않는 법이라서 실적제의 단점과 엽관제의 단점이 시너지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튀는 경우도 많다.
엽관제 자체가 상기했듯 장단점이 있는 제도다보니, 관료 입장에서는 " 관피아는 일이라도 할 줄 아는데, 주로 대선캠프나 집권자의 후보 시절 후원회, 인수위 출신 등의 정피아는 하나부터 열까지 옆에서 다 가르쳐야 한다"는 불만을 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조직의 장으로 임명되면 바로 아래 차장이나 부사장은 실무에 밝은 사람으로 짝을 지어 그 뒤치다꺼리를 맡기게 된다는 것. 한편으로 관피아 역시 그 권한, 인맥, 지식, 경험, 업무 이해도, 관직 등을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오남용하고, 업무의 결과에 대해 정치적, 도의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며, 퇴임 후에도 자신의 인맥이나 권력 카르텔을 활용하여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부패 관료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지독한 관료주의나 복지부동의 자세로 정책 입안과 시행에 대하여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성이나 공정성 문제 때문에 거의 모든 정부에서 이런 정피아, 관피아 문제는 발생하고 있다. 결국 선출직에 의해 책임을 지는 정무직과, 자신의 분야의 행정적 전문성을 지닌 평생 관료들의 견제와 균형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문제라는 결론이 나온다. 적당선을 찾아 최대한 부작용을 줄이고 효율을 올리는 것이 핵심이라할 수 있겠다.
5. 같이보기
[1]
대표적으로 펜들턴 법안의 시초격이라 할 수 있는 젠크스 법안의 등장이었다. 비록 의회에서 부결되었지만 엽관주의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최초의 법률안이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2]
국내
행정학 교과서의 경우 이 때문에 '관료제가 민주화에 기여했다'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아래 '단점' 문단에서 볼 수 있든 비민주적인 요소도 있기에 외국 교재에서는 다르게 보기도 한다.
[3]
좋은 예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잘 드러난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전쟁 이전에
측근 위주의 정부로 비판받았지만, 전쟁이 터지자 그러한 형태의 정부가 오히려 젤렌스크의 생존성을 보장하여 전황을 우크라이나 측에 좀 더 유리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개전 직후 수도 키이우가 포위된 상태로 결사항전을 벌이는 동안 블라디미르 푸틴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측근들과 우크라이나군 지휘관들에게 노골적으로 쿠데타를 종용하기 시작했는데, 기존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 중 친러 인사나, 두려움 때문에
매국노가 된 인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안전을 보장받기 어려웠을 것이고, 끝내 암살당하거나, 쿠데타가 일어나거나, 위협 때문에 키이우를 떠나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젤렌스키의 키이우 사수가 이 전쟁의 추후 전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만큼 고위 인사들을 모조리 자신의 측근으로 채운 것은 신의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