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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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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晏
190년? 혹은 196년 이전 ~ 249년
1. 개요2. 생애3. 평가4. 일화5.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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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는 평숙(平淑).

친부모는 하진의 아들 하함 윤씨, 아내는 조조 두씨 사이의 딸 금향공주로 하안은 하진의 손자이자 조조의 사위다. 형주 남양군 완현 사람.

2. 생애

조부 하진은 십상시의 난 때 뜻밖의 죽음을 당했고 종조부 하묘도 조부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죽음을 당했으며 이후 정권을 잡은 동탁에게 고모할머니 하태후와 그 아들인 소제가 폐위당해 독살당한 것에 이어 종조부 하묘도 조부를 죽게 했다는 이유로 동탁에게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절단되면서 길에 버려졌다. 곧이어 증조할머니 무양군을 비롯한 하씨 일족들은 동탁이 몰살했고 남은 하진 일족인 아버지 하함도 죽었는지 하안은 하씨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조조가 사공이 되었을 때 하안의 어머니 윤씨가 조조의 첩으로 재가했다. 조조는 하안을 자신의 자식들과 같이 키워 사실상 양자로 위나라 궁정에서 자랐다. 두씨의 아들 진랑도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둘은 사이가 좋았다.

조조가 사공이 된 해가 196년이므로 하안의 생년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5년 이전으로 여겨지지만 구체적인 시점은 설이 갈리는 편인데 동탁에게 하씨 일족이 몰살당할 때 윤씨와 하안만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해석에 따르면 190년생으로 볼 수 있으나, 아버지인 하함이 190년에 죽지 않고 늦어도 196년까지는 살아있었다면 하안의 생년도 최대 195~6년생까지 늦춰서 볼 수 있기 때문.[1]

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하안은 조조의 친자식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며, 《 태평어람》에 인용된 하안별전의 기록에 따르면 7~8세 무렵부터 이미 신동으로 이름이 나 하안이 특별하고 귀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없었고, 조조 역시 책을 읽을 때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부분을 하안에게 시험삼아 물어보면 얼음 녹듯 깔끔하게 해석되었기에 하안을 아주 영특하다 여겼으며, 아들로 삼고 싶어해 가족들을 동반한 자리엔 항상 하안을 대동시켜, 조조의 아들들과 같이 나이에 따라 앉게 했으나, 그 때마다 하안은 조조의 아들들과 따로 떨어져 앉고, 자리가 끝나면 홀로 떨어져버렸는데 , 왜 그러는지에 대해 물어볼 때면 "예의란 서로 다른 집안이면 같이 앉지 않는 것이다." 고 답했다고 한다.

세설신어》에서도 바숫한 일화가 나타나는데 조조가 하안을 워낙 총애해 아예 그를 정식 양자로 들여 조씨(曹氏)로 삼으려 했으나, 어리지만 영특했던 하안이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자 땅에 사각형을 그어놓은 뒤 그곳이 '하씨의 문'이라면서 하루종일 그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이런 하안의 기행에 조조는 하씨의 자손으로 남을 것임을 고집한 하안을 기특해하면서도 안쓰럽게 여겨 양자로 삼으려던 것을 그만뒀다고 한다. 별전류의 기록이나 세설신어의 특성상 디테일한 내용을 완전히 믿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하안이 조씨 일족들 사이에서 자랐으며, 조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친아들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음에도 나름대로 자신의 본가를 강하게 의식하며 조씨와 일정부분 거리를 두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훗날 조조의 딸인 금향공주와 결혼하면서[2] 왕실의 부마가 되었다.

하안은 노장에 심취해 수십편의 책을 저술했고 당대의 석학으로 이름이 났다. 성격이 거리끼는 바가 없어 조비와 같은 복식을 입었다. 조비는 하안을 미워해서 성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가짜 아들'로 부르며 공공연히 경멸감과 경계심을 드러낼 정도였고, 조조가 죽자 하안을 궁궐에서 내쫓았으며, 호색방탕해 금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관직에도 임용하지 않았다.

이후 조예가 즉위하자 복권되긴 하지만, 부마도위 같은 실권 없는 명예직으로 여전히 중용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황실의 큰어른 대접은 받아서 조예가 죽자 위명제 의시표[3]를 작성해 조예의 시호 선정을 주관하기도 했으며, 조예의 양자인 조방이 8살의 나이로 제위를 계승하고 황족인 조진의 장남이자 조예의 처남인 조상이 집권[4]하자 하안은 조상의 수하로 영입되면서 관리 선발을 담당하는 이부상서로 임명되어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입성했다. 비록 어린 시절의 영특함과는 별개로 여장을 즐겼다거나 본인의 외모에 본인이 감탄하는 등 별별 희한한 행실에 관한 기록이 정사 본전과 주석 곳곳에 남은 엉뚱한 인물이긴 하나, 하안은 최소한 학식에 있어서는 위나라의 수많은 학자들 중에서도 특히 명성을 날린 명사였다. 마침 조예가 젊은 나이에 죽고 조상이 어린 황제를 보좌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요직에 오를 기회를 잡은 셈이다.

당시 조상과 함께 탁고대신으로 정권을 위임받은 인물은 사마의였는데, 사마의의 업적은 조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며 나이로도 조상의 아버지 뻘에 해당했기 때문에 조상은 감히 사마의를 거스를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하안은 조상을 부추기는 한편 사마의를 실권이 없는 명예직인 태부로 추대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권력을 해체해 사마의를 실각시켰다. 이후 하안은 붕당을 조직해 나라의 중권을 조상이 독점하고 모든 결재를 먼저 심사토록 해 조상의 1인 체제를 확고히 한다.

하지만 조상의 붕당엔 하안을 필두로 당시 경박재자로 불리던 신흥 가문의 인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의 세력은 기초가 없었다. 때문에 하안은 자신들의 세력과 영합하는 자는 승진시키고 거스르는 자는 파면시켰으며, 태후의 궁을 자신들이 맘대로 옮기는가 하면 조방이 집행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등 심하게 권력을 남용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에 대한 기존 관료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249년 조방과 조상, 그리고 그의 일파가 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에 제사를 드리러 간 사이에 조상의 권력 독주에 불만을 품은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킨 고평릉 사변으로 실각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사마의가 하안에게 조상과 그의 심복 이승, 필궤, 정밀, 등양, 환범, 장당 등의 재판을 맡기자 하안은 혼자 살기 위해 동지였던 조상과 그 심복들을 필사적으로 치죄해 사면받기를 원했지만[5] 사마의는 그런 하안을 조롱하듯 죄인들의 명단 마지막에 하안의 이름을 넣었다고 한다.

조상, 하안, 이승, 필궤, 정밀, 등양, 환범은 모두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족되었다. 그러나 하안의 어머니 윤씨가 당시 5~6살 정도였던 손자, 즉 하안의 아들의 구명을 탄원해 이 아이는 살아남아 하안의 집안은 멸족하지 않았다.

3. 평가

하안은 삶의 근본을 정치가 아닌 학문에 두어 현학과 유학, 도가 학문에 두루 깊이 연구를 다해 당시의 지재이던 왕필을 발탁하는가 하면 여러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대표 저작인 《논어집해(論語集解)》는 현대에도 전해지며 위진현학의 시초로 받들어지는 등 역사적으로 패배자였던 반면 학문적 성취는 후대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6]

순욱을 비롯하여 조조의 권력에 반대 혹은 저항했던 사족들이 모두 제거되고 위나라가 선 이후, 개국을 도운 공신들은 제도로 보장된 권리와 명예를 얻음으로써 일종의 귀족이 되었다. 여기에는 당시 정치가로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던 진군이 입안한 구품관인법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진군은 기존의 인사가 권력과 인맥에 영합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각 고을의 중정이라는 담당 전문가가 인사 후보를 정밀히 심사하도록 하자고 제안했고, 조비는 이를 승인했다.

이 입법의 취지는 아주 좋은 것이었지만 당시는 사회에 귀족적 분위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던 시점이므로 이 신법은 금세 알맹이가 빠져 오히려 귀족제를 옹호하는 방파제로 변해 버렸다. 지방의 중정은 자신도 귀족이었으므로 귀족의 자제에 대해서는 2품 이상의 높은 평가를 주었으며, 곧 이 2품이 그 가문의 기득권으로 변해서 가격(家格), 즉 가문의 자격을 표시하는 부첩(符牒)이 되었다. 이것으로는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도 가격에 의해 초임관이 정해지고, 그 초임관이 낮으면 출세할 수 있는 전망은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일부 가문이 고위 관품을 독점함으로써 귀족이 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순욱 등과는 달리 조조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협력을 선택한 명사들은 이렇듯 사회적 시스템 차원의 보답을 받았고, 인사에 관하여 정부와 사족의 갈등이 발생할 여지는 그럭저럭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현상에 불만을 갖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귀족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고 권력에서 배제된 이들은 손을 잡고 귀족들의 자리를 빼앗을 틈을 노렸다. 심지어 귀족의 일원들 중에서도 각자의 성향에 따라 독특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 특히 눈길을 끄는 이는 단연 하안일 것이다.

하안은 그 자신도, 그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도 모두 독특한 인물이었다. 만약 삼국시대라는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변혁 내지는 퇴폐의 시대가 아니었더라면 하안 같은 인물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았거나 애초에 입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후한 말 대장군 하진의 가문 출신으로 십상시의 난, 동탁의 집권 등 여러 사건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난 가문의 생존자였다. 어찌저찌 조조의 밑에서 자라게 된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드러내어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만 본래도 명문이 아니었던 데다 사실상 불명예를 입은 가문의 출신이라는 약한 배경과, 문제 조비와 명제 조예 등 위나라의 황제들이 대를 이어가며 그를 배척했던 탓에 일찍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예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어린 후계자의 보정을 위해 조상(曹爽)이 집권하자 일약 대신으로 승진하며 조상의 브레인 노릇을 하게 된다. 당시 하안은 뒷날 현학이라고 불리게 될 일종의 학파, 또는 학문적 그룹을 이루고 있었다.

하안은 삼현(三玄)이라 불린 《 주역》, 《 노자》, 《 장자》를 깊이 공부하여 이를 근거로 경전을 연구하고 해석했다. 특히 그가 실천한 노장사상의 무위(無爲)에 대한 재인식은 조상 정권의 정책 집행의 기준이 됨은 물론 위나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옹호이기도 했다. 위나라는 한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을 때 순 임금이 요 임금으로부터 선양받은 것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들의 관점에서 요 임금과 한나라는 붉은색을 상징으로 하는 화덕(火德)의 왕조이고, 순 임금과 위나라는 노란색을 상징으로 삼는 토덕(土德)의 왕조였다.

나아가 하안이 주목한 것은 《논어》에서 공자가 언급한 순 임금의 '무위'였다.

하안이 생각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위의 정치에서는 순 임금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순 임금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정치를 실행했던 것은 그 자신을 보좌할 관료들을 적절하게 선발했기 때문이다. 하안은 이러한 해석으로 노장사상을 정책의 근거로 삼는 동시에 인사권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구품관인법의 기능인 중정의 평가에 따라 관품이 결정되는 제도는 군주가 자신을 보좌할 인재를 선발하는 데 있어 적절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안은 군주의 의사가 적용되는 일원적 인재 등용제를 마련하고자 했고, 그 결과 조상 정권에서 그는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상서에 올랐다. 보다시피 하안은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현학을 통해 정당화했다.

하안과 더불어 조상의 한 팔이었던 하후현은 정책 입안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구품관인법을 포함한 당시 위나라의 비효율적인 행정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헌데 뜻밖에도 그가 개혁안을 제안하고 또 그 집행을 맡아달라는 암묵적인 요청을 보낸 인물이 사마의였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사마의는 귀족정권의 대표자 노릇을 하는 인물이다. 그의 기반은 문제의 총애였고, 순욱 사후 위나라 치하에서 기득권을 획득하고 귀족화한 명사 그룹이었다. 따라서 하안과 하후현이 주장하는 바는 사마의의 입장과는 반대된다. 하후현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마의에게 개혁을 제안했고, 사마의가 이를 거부하자 실망을 표했다.[7]

이후 사마의는 서기 249년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장악, 조상 일파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하여 구품관인법을 보다 심화시킨 주대중정(州大中正)을 새로이 설치했는데, 이에 관해 이공범 교수의 《위진남북조사》에서 설명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사마의가 발상한 주대중정 신설은 자기 일파를 지방의 대중정에 임명하여 관계에 자기 세력을 부식하고 또 지방호족을 포섭하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다. 대중정을 주도州都라고도 칭한다. 여기에서 주대중정→군 중정의 상하 기구가 생기게 되어 이제까지 군 중정의 독립적인 품정권이 상위 기구인 주대중정의 규제를 받게 되고 이것은 군내의 명족보다도 주내의 명족 내지 중앙 관서의 고위에 있는 자가 선거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 《위진남북조사》

따라서 사마의가 발의한 주대중정의 정수는 그것이 기존 명사들의 지지와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에 있었던 셈이다. 고평릉 사건 당시 위나라 조정은 일제히 사마의를 지지했고, 조상의 숙청과 사마씨에 대한 권력 집중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려 한 하안과 하후현의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했다. 명사는 학문과 명성을 존립 기반으로 하지만 그 명성의 근저에는 결국 향리 사회의 지배자인 사족의 지지가 깔려 있다. 궁중에서 자란 하안은 유교에 노장사상을 끌어들임으로써 현학을 만들어냈고, 또 그 실효성을 인정받아 대신이 되었지만 결국 그 자신의 바깥에서 지지 세력을 얻지는 못했다.

사마의의 쿠데타에 실각하고 처형된 인물이니만큼 정사에서는 아첨과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권력을 남용하고 최후에는 극도의 비굴함을 보이는 등 간신의 표본에 가깝게 묘사되나 세월이 지나 왕조가 바뀌면서 과거 왕조의 역사에 대한 공정성이 생겼기 때문인지 혹은 사마씨 정권이 조상과 하안 파벌을 몰아내고 세운 서진왕조의 행태가 워낙 막장이었기 때문인지 하안을 재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당나라 시기에 쓰여진 진서에서는 하안이 매우 공정한 관리선발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진서 부함(傅咸)전에는 "정시(正始) 연간 하안이 선거를 관장할 때 안팎의 관직을 얻은 자들은 모두가 각자 재능을 가지고 있어, 깨끗하고 공정하며 아름다운 정치를 이로부터 볼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첨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던 정사 삼국지의 기록조차 "어려서 재주가 빼어나 이름이 알려졌고, 노장(老莊-노자, 장자)의 말을 좋아하여 도덕론(道德論)과 여러 문장과 부(賦)를 저술하여 모두 수십 편에 이르렀다."라고 그의 재주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며 주석 위략에서도 "하안이 상서가 되어 선거(選擧)하는 일을 주관했는데 그와 오랫동안 사귀던 자들 여럿이 발탁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상 일파의 정치에 적대적이었던 세력, 특히 사마씨를 필두로 한 위말진초의 사람들은 이러한 인재 임용을 일종의 파벌 행위로 이해하고 또 비판했으나, 당시 하안이 발탁한 사람들은 사회적 배경으로건 개인적 학식으로건 그리 낮게 평가될 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하안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정적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를 정권의 핵심으로 끌어들여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을 두고 보면, 이 시기 하안의 인재 임용이 무조건 폐쇄적이고 주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래서인지 명-청 교체기의 인물인 왕부지는 하안을 매우 높게 평가하며 사마씨 정권과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신랄히 비판하길,
사서에서는 하안이 권력자에게 빌붙어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그에게 붙은 사람은 승진했고 거스른 사람은 파직됐다고 한다. 부하 등은 하안이 겉으로는 청정하나 속으로는 간사하다고 조롱했는데 이들은 모두 사마씨의 당파로 사악한 사람들이 모여 정직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오명을 더한 것이다.

하안이 자신과 다른 파벌을 해체하고 자신의 사람들을 심은 것은 조씨의 사람들을 깊이 배양하고자 한 것이다. 노육과 부하는 자신의 관직과 녹봉에만 관심이 있고 생각하는 것이 오로지 자신의 자손뿐인데 어찌 사직의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가령 조상이 하안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사마의를 아버지처럼 섬기며 거스르지 않았다면 비록 그 자신은 생명을 부지했을지 몰라도 또한 왕망을 떠받든 유흠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사마의의 찬역이 이미 성공하는 데 이르러 조상이 대항하고자 한들 유의 사마휴지가 망하거나 죽은 것처럼 너무 늦지 않겠는가? 조상은 더불어 무슨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조예가 그것을 모르고 어린 임금을 맡긴 것이다. 조상이 이미 종실의 신분으로 고명을 받으니 하안과 필궤, 등양, 이승 등의 사람들이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누구와 더불어 일을 하겠는가.

당시 조씨의 종친들은 군주에게 시기당해 소원해져 권력이 없었고 한 두 명 남아있던 정직한 대신 고당륭이나 신비 같은 사람들도 세상을 떠났으니 조씨의 존망을 쥐고 있는 것은 오직 하안 뿐이었다. 그런데 유독 하안을 심하게 책망하는 것은 마치 유곤에게 왜 유연에게 귀부하지 않았으며 문천상이 왜 몽고에게 항복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는 것과 다름없지 아니한가!

명예와 절의가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은 부화(浮華 =겉치례만 화려하고 참람되며 실속이 없음)하다 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간사하다 하는구나. 삼국지는 진대에 쓰여졌으니 사마씨의 책이나 다름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책으로 인해 충심과 애국을 버리고 다만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만을 얻고자 하여 심하게는 역당에게 귀부하는 것을 훌륭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공론이 소멸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미혹되는 것이다.||

조상의 정치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술이 없기 때문에 고찰할 방법이 없으니 왕부지가 주장한 대로 조씨의 존망을 쥔 유일한 희망이 하안이었을지도 확단하기는 어려운 문제지만, 하안과 마찬가지로 조상파의 핵심인사였던 하후현 구품중정제의 폐단에 대한 보완책을 제시한 것에 대해 사마의가 반대했던 사건이나[8] 조상 파벌에 속했던 인물들이 주로 조씨의 종친이나 조조 시대에 벼락출세한 신흥 가문 2세대 출신이었던 점을 본다면 능력이나 도덕성의 유무를 떠나 사마씨 파벌로 대표되는 구품중정제로 인해 문벌귀족화한 기존 호족세력에 비해 친왕세력에 가깝고 사마씨 등 문벌귀족과의 대결양상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띄었으리라 추측하기엔 무리가 없다. 물론 진보적이라는 조상 파벌이 실제적인 국정 운영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미지수로 봐야 할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인재를 잘 뽑았다는 기록은 많지만 권력세력 내부가 다 잘했다는 기록자체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기 어렵고, 이 시기에 하안 일파 중에선 하후현이 독보적인 인물이었는데도 그 역시 사마씨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흥세전투 같은 외정의 실책도 보이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조상/하안 일파에 대해 악의적으로 왜곡된 기록을 했다는 설은 왕부지 이래 명~청 대를 거쳐 근대 사학계에서도 꾸준히 제시되는 주장이고,실제로 당시 사서들이 (그 조상/하안을 짓밟고 권력을 쥔) 사마씨 왕조 아래 작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정사 기록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무시하고, 단지 사서 기록만을 전면 반영한 것에 대해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해는 가는 부분이다.

다만 실증적인 역사 연구 측면에서 봤을 때, 그렇다고 이런 정황적 근거와 논리만으로 무작정 정사 삼국지를 무시하고 하안 일파에 대한 기술이 죄다 거짓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게 사실. 위서 전반에 보이는 진수의 태도가 석연찮은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 사실의 누락/축소(대표적으로 사마의와 관련되어 노성전투에서 제갈량의 북벌에 관한것) 정도고 노골적인 왜곡과 거짓 기술까지 간 경우는 흔치 않은데, 유독 이 부분에서만 그렇게 정성들여 과감한 왜곡을 했다고 보기는 조금 힘들다. 당장 그들과 같은 라인이자 결국 마찬가지로 사마씨와의 파워게임에 의해 살해당한 하후현만 봐도,진수의 위서는 그에 대해 꽤 호의적으로 서술해 놨으니...[9] 그리고 왕부지란 인물이, 기본적으로 (하안처럼) 노장사상에 호의적이며 주역의 해석에 몰두한 경학자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왕부지의 논거만 따르는 것도 굉장히 위험한 접근이라는 이야기.

이와는 별개로 하안 역시 하후현처럼 조상 정권 내에서 자신의 뜻을 온전히 펴지 못했으며, 하안과 조상 일파의 정치적 입장은 달랐다는 주장도 있다. 하안은 조조의 의붓아들이자 사위라는 특권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조비/조예 부자의 개인적인 반감으로 인해 오랫동안 자복과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인물이었으나 조상이 보정을 맡기 전까지 실권은 없을지언정 황실의 웃어른으로서 조상보다 관위가 훨씬 높았고, 연배로도 조상 일파보다 한 세대 앞의 사람이었다.

하안은 조예 사후 손아랫사람인 조상에게 영합하며 그를 바지사장, 간판으로 삼아 정치에 등단하고 조상과 그 일파들을 자신의 사상적 추종자이자 현실 정치에서의 수족으로서 움직여줄 것을 기대하며 그동안 품어온 자신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킬 야심과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겠지만, 등양 관련 기록에서 등양의 뇌물에 대한 미칠듯한 탐닉이 하안의 인재 선거에 적지않은 훼방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고, 응거가 조상의 정책을 비판하는 풍자시를 짓자 조상 일파들은 이를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여겼으나, 하안만이 말이 없었다는 기록, 정밀 관련 기록에서 그가 (동렬의) 하안/등양을 업신여겼다는 기록. 그 정밀이 조상과 가장 친한 인물이자 조정 최고 원로인 사마의를 배제하는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이었음을 감안하면, 사마씨와 진나라 시점에서야 하안과 조상 일파가 같은 라인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삐걱대고 있었고, 이 불편한 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쪽은 하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조상 정권 3대 중진 중, 하안은 정밀에 치이고 등양에 골머리 썩는, 상당히 손해 보는 포지션에 있었던 셈.

더군다나 본래대로라면 하안의 청담 사상은 그 자신의 이상과 사상을 공유/답습하는 후학들의 정계 입문 창구가 되어야 했지만, 정작 그들 중 최고의 수석생도였던 왕필이 끝내 조상에게 중용받지 못했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힘으로써, 오히려 현실 정치와 괴리된 언어와 사유만이 떠도는 상아탑이 될 위기감 또한 그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안이 마지막에 보였던 조상 일파에 대한 배신과도 같은 행동도 이런쪽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는 것.

4. 일화

하안은 평상시 석종유, 석유황, 백석영 등을 정제시켜 만드는 일종의 흥분제인 오석산을 복용해 친한 지인들에게 전파하기까지 했다. 그는 중국사 최초의 마약 복용자 및 마약 브로커로 창천항로에서 어느 정도 보이는 그의 기행은 다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하안은 오석산을 복용하면 병을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이 맑게 트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얘기했다.

하안은 자신의 외모를 많이 가꾸어 이름이 났고, 하안은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희열을 느껴 밖으로 나갈 때는 분백이 손에서 떠난 날이 없었으며 자신의 그림자마저도 항상 돌아보며 기뻐했다고 한다.

초학기에 인용된 하안별전에 의하면 엄청난 미남으로 밖에 나가면 구경하는 사람이 거리에 가득했고 모두 하안이 신선과 같은 부류라고 말했다고 하며, 세설신어에서도 용모가 아름답고 피부가 희다고 나오나 여기서는 조비가 하안이 얼굴에 분을 칠하고 다녀서 저렇게 하얀 것이라고 여기며 망신을 주기 위해 여름철인데 뜨거운 국을 자리에 내오게 했고, 하안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옷소매 혹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옷소매가 희어져 화장빨이 들통났다고 한다.

옷소매가 희어졌다는 구절은 해석이 갈릴 여지가 있는데,

"땀을 많이 흘려 붉은 옷소매로 닦으니 색깔이 바뀌어 희어지다."(大汗出,以朱衣自拭,色转皎然., 세설신어 용지편).
"땀이 얼굴에 흘러 닦아내니 바뀌어 희어지다. " (汗出流面, 拭之, 轉白. 태평어람 365권 어림)
"땀이 얼굴에 흘러 수건으로 닦아내니 바뀌어 희어지다."(汗出流面, 以巾拭之, 皎然. 태평어람 387권 어림)

기록에 따라 글자가 몇자씩 차이가 나는 데다, 구를 전(轉)은 돌다, 회전하다, 바뀌다의 의미로 쓰이나 오히려 혹은 더욱의 의미로도 확장되어 쓰이기 때문에 수건이 아닌 얼굴이 더욱 희어졌다고도 볼 수 있고, 실제 중국인들도 얼굴이 오히려 하얗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역사가 꽤 되기 때문. 다만 앞에서 '붉은' 옷소매를 강조해 놓고 '붉은 옷소매로 닦았더니, 오히려 (얼굴이) 희어지다'로 풀이하면 해석이 어색해지기 때문에 세설신어 본문의 이야기는 그냥 화장빨이 들통나는 묘사 쪽에 가깝다. 저런 일화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으로 해석하던 간에 당대인들의 인식에서 하안의 외모가 그만큼 유명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 일화에서 뜨거운 국을 내오게 한게 조예라는 기록도 있다. 아무래도 조비야 어렸을적부터 하안의 외모를 보고 자랐을테니 실제 하안이 화장을 안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알았겠지만 어린 시절 궁안에서 독서만 했다던 조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기록에 따르면 조예 또한 미소년이었으니 호승심이 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에 조예가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의 이상형(...)이 하안 같은 미남보단 사마의(...)같은 아버지 같은 스타일이고 조예는 하필 미남인 하후현 제갈탄도 싫어했으니 가뜩이나 이들의 명성을 싫어한 마당에 하안이 화장까지 하고 미모를 자랑했으니 얼마나 화장빨이라고 같잖게 보였겠냐는 것이다.

위말전에 따르면 하안은 여자 옷을 입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오행지에서는 하안이 이부상서를 지내던 시절에도 여자옷 입기를 좋아해 부현이 내외의 구분이 없는 요사한 짓이라며 이를 비판하는 기록이 있다.

하안의 외모도 외모지만 위의 기록과 종합해 봤을 때 당대 최고 권력자인 조조의 의붓아들이자 사위라는 사람이 여자옷을 입고 화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현대 기준으로도 쇼킹하지만 고대에는 더더욱 엄청난 컬쳐쇼크였을 것이다. 게다가 구경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상황에서 하안이 주눅들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외모를 과시했다고 다녔음을 생각하면 일반 사람들이 하안을 다른 차원의 사람(=신선)으로 여겼을 것도 무리가 없다.

다만 하안이 상서를 지내다 죽는 시점에서의 나이는 60대에 가까운데 진나라 시대에 하안과 조상 일파를 까는 기록이야 워낙 파다했을 테니 하안의 기행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젊은 시절에 잠시 벌였던 기행이 과장되어 전해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한편 당대의 유명한 점술가 관로는 하안이 변고를 당할 것이라 예언했고, 하안이 관로를 만난 뒤 10일이 지나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이 뒤집히고 하안이 처형되면서 결과적으로 관로의 예언은 적중하게 되는데, 하안을 만난 직후 관로의 숙부가 하안의 권세를 두려워해 관로를 꾸짖자 관로는 하안의 관상은 혼이 나간 형상에 핏기가 하나도 없으며, 정신도 맑지 못해 보이는데다, 얼굴이 고목나무처럼 거칠고 지저분하다며 이는 사람이 아닌 귀신의 상이니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평가한 기록도 있는데, 관상의 신뢰성 여부와 별개로 만년에는 오랜 오석산 복용으로 인해 외모가 흉하게 무너졌을 가능성이 크다.

태평어람에 의하면 몸이 워낙 허약해서 무거운 옷은 그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다고 한다.

태평어람의 기록과 같이 본다면 조복 같은 당시의 남성 정장이 무거워 입기 힘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남성복이 다 무겁고 여성복은 다 가벼운 게 아닐 테니 역시 취향의 문제 같다(...). 이 때문에 하안은 성도착증 내지는 동성애자 의혹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같은 살롱(?) 출신인 종회 역시 이런 의혹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미묘한 이야기.[10] 심지어는 남풍(男風)이라고 불리는 서진 정권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 준 동성애 분위기를 처음 만든 것이 하안 일파라는 해석도 있다.

관로가 하안의 외모를 흉측하다며 디스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무거운 옷을 입지 못하던 문제 역시 하안이 오석산을 즐겼기 때문에 부작용을 겪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오석산을 상용하면 피부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안은 일찍이 명사들을 품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오직 깊기만 하여 천하의 뜻을 통할 수 있는 사람[11]이라면 하후태초( 하후현)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오직 기미(幾微)를 알아 천하의 힘쓸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마자원( 사마사)이 바로 이 사람이다. '오직 신비스러워서 서두루지 않으면서 속히 하고, 가지 않으면서 도착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런말을 들었지만 아직도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자치통감의 촌평이 재밌는데 '대개 신비스러운 상황의 인물이 자기 자신이고 싶어한 것이다.'

자치통감의 동진 시기 부분에서도 몇 번 언급되는데, 학문적 능력은 인정하지만 위 및 서진 시기 지식인들의 기풍을 망친 기괴한 인간 쯤으로 생각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남조에서는 이 인물의 평판이 대단히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5.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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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으로는 190년생으로 비정되는 경우가 경우가 절대다수였고, 코에이 사의 삼국지 시리즈도 이 설을 따르고 있으나, 2019년 기준으로는 193년생으로 비정되어 쓰이는 사례가 많이 늘어났고, 중국어권에서는 195~6년생으로 비정되는 경우도 흔한데,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에서의 묘사도 어느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 위말전에 따르면 이 금향공주가 하안과 어머니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이라면 아버지가 다르다 해도 근친혼을 한 것이다. 배송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이 내용을 부정했다. 금향공주는 정황상 두씨의 딸일 확률이 높다. [3] 현존하지 않으나 일부가 북당서초에 인용된다. [4] 원래 조예는 그의 숙부인 연왕 조우를 대장군에 임명해 정권을 맡기려고 했다가 그가 사양하자 조상에게 맡겼다. [5] 하안은 그 사마사와 친했다. 나이 차이는 20세 가까이 났지만 그냥 친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잘하면 살 길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6] 하안의 논어집해에 송나라 사람 형병이 소(疏)를 단 책이 바로 '논어주소'인데, 주자의 '논어집주'와 아울러 논어 주석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2015년 말에 한국어 번역이 완간되었다. [7] 하후현의 개혁을 위해선 반대파의 수장과도 같았던 사마의의 지지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8] 사마의를 비롯한 사마씨 정권 자체가 구품중정제로 인해 세력을 강화한 문벌귀족들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9] 물론 '하후현이 폐정을 바로잡거나 인재를 뽑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드립을 친 바는 있다. [10] 종회는 처자식이 전혀 없었으며, 그의 행적을 보면 동성애자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만한 모습들이 나온다. [11] 주역대전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