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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13:53:48

유방(삼국지)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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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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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후비전(后妃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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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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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저 · 전위 · 방덕 · 방육 , 조아, ·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 조거 · 조우 · 조림(林) · 조곤 · 조현 · 조간 · 조표 · 조정 · 조림(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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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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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권 「방기전(方技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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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放
? ~ 250년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는 자기(子棄)로 (漢)왕조의 창시자인 이 분과는 한국식 발음상으로 동명이인이다.

성에서 알 수 있지만 구 한 황족 출신인데 유비, 유표, 유언, 유우, 유엽 경제의 후손이고[1] 유대, 유요 형제, 유총 한고조의 후손인 것과 달리[2] 그는 이채롭게도 무제의 후손이다. 정확히 보면 한무제의 삼남 연날왕 유단(劉旦)의 장남 광양경왕(廣陽頃王) 유건(劉建)의 아들 서향후 유용(劉容)의 후예다.[3][4]

손자와는 조비가 즉위한 이후부터 관직에 똑같은 승진길을 밟아 세트가 되었다.

2. 정사 삼국지

유주 탁군 출신[5]으로 군의 주부로 활동하다가 효렴으로도 천거되었으며, 그 후 군웅할거의 시대가 되자 왕송이라는 자가 유방이 사는 지역을 점령했기에 유방은 왕송 밑에서 일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지난번에 동탁이 반역을 일으키자 영웅이 모두 일어나 관군을 저지하고 명령을 제멋대로 내리면서 각자 스스로 세력을 넓혀 나가려고 했소. 오직 조공( 조조)만이 위험을 구하고 혼란을 수습하고, 천자를 보좌하고 추대해 왕명을 받들고 죄있는 자를 벌해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이길 수 있었소. 이원[6]의 강성함으로써 수비를 맡았더라도 원술은 회남에서 얼음 조각처럼 와해되었고, 저항을 말한다면 원소는 관도의 싸움에서 크게 패했소. 조공은 승리를 틈타 석권했고, 장차 하삭을 소탕하려는데, 그의 위엄과 형벌은 이미 합치되므로 성패의 대세는 알 수 있는 것이오. 따라서 그가 있는 곳에 빨리 도착하는 자는 점차 복을 누리게 되겠지만 나중에 항복하는 자는 먼저 멸망하게 될 것이오. 이것은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달려가야 할 시기인 것이오. 옛날에 경포는 남면의 고귀한 자리를 버리고 검에 의지해 한나라에 귀의했지만 이는 천하가 일어나고 망하는 이치를 진실로 알았기 때문에 물러나고 나가는 구분을 살폈던 것이오. 장군께서는 마땅히 조공에게 몸을 던지고 성명을 의탁하셔서 스스로 그와 갚은 교분을 맺으시오.
왕송은 이 말에 따르기로 하는데, 때마침 남피에서 원담을 토벌하고 있던 조조가 왕송에게 편지를 보내 귀의하기를 청한다. 이에 왕송은 옹노, 천주, 안차를 바치고 그에게 귀의할 때 조조에게 보내는 편지를 유방이 썼는데, 화려한 문장으로 쓰여진 편지였기에 익히 그의 명성을 들은 조조는 유방을 초빙한다.

205년에 유방은 왕송과 함께 조조의 군영에 도착했으며, 이를 보고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옛날에 반표는 두융에 의탁해 하서를 광무제에게 바치는 공적을 세웠으니 지금 그대의 공적은 반표의 그것과 얼마나 서로 비슷하오!
그러면서 유방을 참사공군사에 임명하고 주부기실을 역임하게 했으며, 후에 지방으로 나가서는 합양과 달후, 찬의 현령이 되게 했다.

213년 위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손자와 동일 노선을 밟아 둘이 함께 비서랑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가 즉위하자 손자와 동시에 승진해 좌우승이 된다. 몇 개월 뒤 유방은 현령으로 자리를 옮겨 잠시 외도를 하는데, 얼마 안되어[7] 비서를 중서로 바꿀 때 유방은 중서감 손자는 중서령이 된다. 또한 둘 다 급사중의 작위를 받은 후에 유방은 이를 더해 관내후의 작위를 받는데, 손자는 관중후라는 조금 더 낮은 작위를 받았다가 223년에 유방은 위수정후, 손자는 관내후로 승진한다.

226년, 조예가 즉위하자 두 사람의 총애는 더욱 더 깊어져 산기상시가 더해지고 유방은 서향후, 손자는 악양정후로 봉해졌으며, 228년 쯤에는 손자와 함께 조예의 신임을 받아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어 장제가 표를 올려 이를 주의하면서 신비의 아들 신창은 아버지에게 그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신비는 아들의 그 말을 듣지 않고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가 필궤 왕사의 직위를 신비에게 주자는 논의가 있었을 때 조예가 이 일을 손자와 유방에게 물으니 그들은 바로 이같은 말로 답한다.
폐하께서 왕사를 기용한 것은 실제로 그의 노력을 취하려고 한 것이었지. 허명을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비는 실제로 총명하고 정직하지만 성정은 강직하고 독단적입니다. 성상게서는 이 점을 깊이 관찰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아들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 손자와 친하게 지내지 않은 신비는 밖으로 나가 위위로 임명된다.

청룡( 233년 ~ 237년) 초기에는 손권 제갈량에게 동맹을 맺어 같이 위나라를 공격하자고 보내는 서신을 중간에 얻었는데, 이를 보고 유방은 갑자기 수취인을 만총으로 바꾸고 내용을 손권이 위에 항복하겠다는 내용으로 바꾸어 제갈량의 손에 들어가게 한다. 제갈량은 편지를 읽어봤다가 옆에 말을 타고 있던 보즐에게 줬고 보즐은 이걸 또 손권에게 주니 손권은 제갈량이 손권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제갈량에게 (이 편지에 대해) 깊게 해설을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이런 그의 행동에 조예도 재밌어했는지 유방과 손자에게 시중과 광록대부가 더해진다.

238년에 요동이 평정되자 계획에 참가한 공로로 유방과 손자는 향리의 현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작위가 올라가 유방은 방성후가 되었고 손자는 중도후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24일에 조예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연왕 조우를 대장군으로 삼으면서 하후헌, 조상, 조조(曹肇)[8], 진랑이 함께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는데, 평소 진랑 등과 사이가 좋지 않던 유방과 손자는 명제가 죽은 후에 진랑 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해 조우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몰래 꾸미고 있었지만 항상 조우가 황제 곁에 있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27일에 기회가 오면서 황제의 의식이 혼미해지자 조우가 조조와 상의할 일이 있다면서 궐 밖으로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황제는 얼마 동안은 오로지 조상하고만 같이 있게 되자 유방은 이를 알고 손자를 불러서 음모를 꾸몄다가 손자가 너무 위험하다고 만류하나 유방은
함께 끓는 가마솥으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어찌 불가능한 게 무엇이 있겠소?
하고는 곧바로 황제 앞으로 달려가서 엎드려 울면서 말한다.
폐하께서 이처럼 쇠약하시니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장차 천하를 누구에게 부탁하시렵니까.
조예로서는 이미 조우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갑자기 뜬금 없는 소리를 하는 유방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유방에게 자기가 조우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고 말한다. 이에 유방은
폐하께서는 선제의 조칙을 잊으셨습니까? 선제께서는 번왕은 정사를 보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막 병이 심해지시자 조조와 진랑 등이 곧바로 입궁해 궐내의 재인을 데리고 놀고 병수발을 드는 궁녀들을 말로 희롱했습니다.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또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남면하고는 조신들은 전각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조고와 마찬가지로 국권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황태자께서 유약하시어 정사를 통할할 수 없는데, 바깥에는 강하고 난폭한 도적들이 있고 안에는 노역으로 인해 원망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멀리 존망을 생각하시지 아니하시고 옛정과 온정에 얽매여 조종의 기업을 이 두세 사람에게 위탁하려 하십니다. 폐하께서 앓아누우신지 며칠 동안 안팎에 차단되어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이나 이를 알지 못하시니 이는 신들이 마음 아파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자신이 총애하는 유방과 손자가 다 꾸며서 말해놓으니 그들을 철석같이 믿는 조예는 노했으며, 그래서 조예는 태자를 누구에게 맡기냐고 묻는다. 유방과 손자는 계획대로라 여기고 조상이 조우를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가 사마의를 불러서 상의하라고 하니 황제는 이를 따르기로 하고 유방과 손자는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조가 다시 황제에게 와서 울면서 간하니 조예는 또다시 마음이 바뀌어 조조에게 명해 방금 전에 행했던 칙서를 정지시키도록 했으며, 그렇게 조조가 물러가니 유방과 손자는 다시 들어와 황제를 설득한다. 그리고 조예는 또다시 마음을 바꿔 유방의 말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유방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친필로 쓴 칙서를 만들 것을 권한다.

힘 없는 황제는 자기 힘으로 조서 쓸 힘조차 없던 상황이라 이 말을 들은 유방은 즉시 침상 위로 올라가 조예의 손을 잡고 힘을 주어 조서를 쓰고 옥새를 찍은 다음 큰 소리로 외친다.
연왕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라는 조서가 있다. 조우 등은 궁성 내에 머물지 마라.
이렇게 되면서 조우, 하후헌, 조조, 진랑 등은 모두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239년 조방이 즉위하자 유방과 손자는 중대한 계획을 결정하는데, 참여해 식읍이 3백 호 증가되어 유방은 이전 것과 합쳐 1천 1백호, 손자는 1천 호가 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두 사람의 사랑하는 아들 한 명을 정후에 봉하고 두 번째로 사랑하는 아들은 기도위에 두면서 그 나머지 아들도 모두 낭중에 봉했다. 유방과 손자의 계획대로 권력을 잡은 조상이 정밀의 계획을 받들어 사마의를 태부로 임명할 때는 조방의 명을 받아 손자에게 조서를 쓰게 한다.

240년 2월 1일에 시중중서감에서 광록대부로 승진. 손자도 광록대부로 승진했으며, 또한 금인, 자수, 의장은 삼사[9]와 같게 한다. 245년 8월 19일에 표기장군으로 승진해 군사 쪽의 일을 맡게 되지만 중서성의 일은 계속 하면서 손자도 또 같이 승진한다.

246년에는 또 그들 두 사람의 아들을 한 명씩 정후로 봉했는데, 유방과 손자는 나이가 많아 자리를 물려주고 단지 매월 삭망 이틀만 열후의 신분으로 황제를 뵈면서 특진[10]으로 승진되었다. 248년 2월 30일에 관직을 사직할 때 손자도 같이 관직을 떠났으며, 249년에 조상이 주살 된 뒤에도 불이익을 받지 않았고 손자는 오히려 다시 관직에 나가 시중에 임명되었다가 250년에 세상을 떠나 경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문서와 격문을 쓰는 것에 뛰어나 조조, 조비, 조예가 조칙을 내려 항복을 설득하는 것은 대부분 유방이 썼다고 하며, 장화(張華)가 고아였을 때 향으로 있던 유방이 자신의 여식을 줘서 처로 삼게 했다고 한다.

3. 삼국지연의

조예가 병에 걸리자 손자와 함께 추밀원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으며, 조예가 종족 가운데 누가 일을 맡길 만하냐고 묻자 손자와 함께 조진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조진의 아들인 조상을 추천했다. 죽기 직전에 조방, 조상, 손자, 사마의 등과 함께 침상 앞에 모여 그의 유언을 들었다.

4. 평가

진수는 그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유방의 재능과 계책은 손자보다 우수했으나 자신의 수양에 있어서는 손자보다 못했다. 유방과 손자는 이미 군왕과 주상을 받드는 데 뛰어났고, 또 일찍이 이렇다 할 만한 말의 실수나 이득도 없었다. 단지 이 두 사람은 신비를 누르고 왕사를 도왔으므로 세상 사람의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신하들의 간언과 논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바른 것을 곁에서 도와주었으며, 아울러 국사의 손해와 이익을 몰래 진술했으며, 아첨하는 말로 조주를 인도하는데 진력하지 않았다. 함희 연간에 이르러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를 설치하자고 건의했을 때, 유방과 손자는 이전 왕조에서 두드러진 공적을 세웠으므로 유정은 방성자에 봉해졌고, 손굉은 이석자가 되었다.

유방은 문사가 유려했고, 손자는 근면하고 삼가 두 사람 모두 제왕의 중요한 정책을 관장했다. 권세가 그 당시 유명했으나 아정하고 청량함은 부족했고, 조롱과 야유의 평가가 이들의 실제 모습을 매번 능가했다.

위나라의 초대 중서감/중서령이었던 유방과 손자는 (비록 유방이 유씨 황실의 후예라고는 하나), 먼 북방 유주/병주 출신으로 위나라의 중역 신료 세력 - 즉 주류 호족 계층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인물들. 그 자신의 능력과 황제의 총애 외에는 아무런 권력의 기반이 없는 이들은 황제의 수족이라는 중서 본연의 포지션에 철저하게 충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타 관료와의 충돌과 그들의 원한 또한 불사한 이들은 환관과 외척에 형제들까지 배제하며 스스로를 덩그러니 노출시킨 조씨 황실이 주류 호족들에게 완전히 삼켜지지 않도록 하는 '근왕'의 역할을 수행해냈다. 한편으로 이들은 조예/조방 계승기에 과거 탁류 환관들의 전횡을 답습하긴 했으나, 그들처럼 독자적인 지배권을 확립시키지 못한 채 결국 조상/사마의와 삼자균형 구도를 형성하는 걸로 만족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5. 미디어 믹스

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유방.jpg
삼국지 14 일러스트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 20, 무력 15, 지력 80, 정치 73, 매력 50이며 일러스트는 100만인의 삼국지의 제갈근을 재활용했다. 개성은 언독, 문화, 능리, 주의는 명리, 정책은 삼령오신 Lv.4, 진형은 학익, 전법은 업화, 도발, 매성, 친애무장은 사마의, 손자, 장화, 조상, 조예, 혐오무장은 동료 손자와 마찬가지로 진랑, 하후헌이다. 생년은 176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5.2. 삼국전투기

아무래도 이름이 한고제 유방과 비슷했던 탓인지 고우영 초한지 유방으로 나왔다. 정작 헌제 조비에게 선양하고 한고제 유방에게 사죄하며 한탄하는 장면에서 나왔어야 할 진짜 한고제 유방은 제갈량의 크고 아름다운 슴가(...)로 패러디.[11] 다만 이쪽도 섹드립과 연결될만한 이름을 갖고 있는것은 마찬가지인지라 실제로 단짝인 손자와 처음 등장했을 때, 손자가 뭔가 푸근한 느낌의 멋진 이름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손자와 더불어 능력은 있는 인물들이었으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간상이라고 평가되었다. 덧붙이면 본작에서는 유방이 손자보다 미묘하게 비중이 높다.

전투외편 2편에서 처음 등장. 238년 기준 산기상시로 손자와 함께 위의 파워 랭킹 4위에 위치해 있었다고 언급된다.

조예가 중병으로 쓰러지고 유방과 손자를 불러 조방을 태자로 삼고 조우 등의 일족들로 하여금 태자를 보좌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한 뒤 이에 대해 숙고해 보라고 말하자 손자와 함께 조예의 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손자와의 합의 끝에 조상과 그를 견제할 사마의만 올리고 나머지를 다 쳐내기로 정했다.

이후 조예의 앞에서 조우가 겸양하는 태도로 대장군직을 살짝 거절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우가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다며 그대로 무마시킨 뒤 조상을 대장군직에 추천하고,[12] 조상이 못 미더우면 사마의와 함께 태자를 보좌하게 하면 된다고 사마의를 추천했다. 이후 조예가 조상과 사마의를 보좌로 하고 그 뒤에 조씨, 하후씨 일족을 붙이려 하자 하후헌, 조조, 진랑이 궐내 궁녀들을 건드리고 다닌다고 말하며 어찌 그들에게 나라를 맡기겠냐고 말했고 이에 조예는 홧김에 조조, 하후헌, 진랑을 궐 밖으로 쫓아내라고 명하게 된다.

조예가 조우와 상의한 뒤 사마의를 허창 부근에 계속 머무르게끔[13] 조칙을 내리자 유방은 이에 반발하여 당장 사마의를 부르게끔 조칙을 다시 쓰게끔 했다.


[1] 유비는 중산정왕의 후손, 유표와 유언은 노공왕의 후손, 유우, 유엽은 장사정왕의 후손이자 광무제의 후손이다. [2] 엄밀히 말하면 서손이다. 한문제 혜제의 이복형이자 한고조의 서장남 제도혜왕 유비(劉肥)의 후손이다. [3] 원문에는 광양순왕(廣陽順王)의 아들 유굉(劉宏)의 후예라고 하나, 실제 광양왕 중 '순'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은 없다. 전대소(錢大昭)는 《한서》 왕자후표를 근거로 하여 '순'은 '경'의 잘못이고, '굉'은 '용'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전대소의 주장을 따랐다. 참고로 이 유굉은 후한 영제의 이름과 완전히 같기도 하다. [4] 연날왕은 동생이 황제 된 것을 아니꼽게 여겨 반기를 2번이나 들다 자살을 강요당한 인사라서, 사실 자손이 연좌당하여 본 문서의 인사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데 자손이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다. 참고로 날 자는 시법상 최악이라는 려/여(厲) 자와 통한다. [5] 유비가 이곳 출신이다. [6] 二袁 : 원소, 원술을 말한다. [7] 220 ~ 223년 사이다. [8] 조휴의 아들 [9] 三司 : 재상대우 [10] 特進 : 삼공 다음가는 지위다. [11] 근데 어떻게 보면 무리수라고 할 수 있다. 여자 가슴을 나타내는 유방은 한자가 乳房으로 두음법칙과 상관 없이 유방이지만 한고제 유방은 한자가 劉邦으로 두음법칙을 적응하지 않은 원음이 류방이기 때문이다. [12] 조상이 크게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못 하자 조상의 발을 밟아서 대장군직을 받아들이게끔 하기도 했다. [13] 사마의는 요동 평정 후 허창 부근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