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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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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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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0년유주지도.png
1. 개요2. 연국(燕國)3. 범양군(范陽郡)4. 대군(代郡)5. 상곡군(上谷郡)
5.1. 광녕군(廣寧郡)
6. 어양군(漁陽郡)7. 우북평군(右北平郡)8. 요서군(遼西郡)9. 요동군(遼東郡)
9.1. 중료군(中遼郡)
10. 창려군(昌黎郡)11. 현도군(玄菟郡)12. 낙랑군(樂浪郡)13. 대방군(帶方郡)14. 같이보기

1. 개요

원래 연나라 영역이었던 곳으로,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원래 연나라 땅을 가리키던 지방 이름인 유주(幽州)와 겹쳤기에 유주자사부가 되었다. 현재의 허베이성 북부와 베이징시· 톈진시 일대. 연나라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기에, 원래 병주자사부 소속이었던 대군을 제외한 이 지방 사람들은 스스로 '연인(燕人)'을 자처하기도 했으며, 후대에는 유주를 장악한 모용선비의 국호로도 사용되었다.

후한 말에 유주 동부지역은 요동태수 공손도가 차지해 스스로 평주목을 자칭했고, 유주 서부지역은 공손찬이 차지했다. 유주목 유우는 실질적으로 유주 서부를 통치하는 공손찬을 간섭했고, 공손찬은 내심 유우의 명망을 질투했기에, 그 불화가 극심해지다가 결국 193년에 공손찬이 유우를 살해해 버렸다. 공손찬은 한 때 유주 서부를 근거지로 삼아 기주·병주·청주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당대 최대 군벌로 군림했지만 이 일로 민심을 크게 잃었고, 특히 근거지였던 유주 서부마저 선우보를 위시한 반공손찬 세력이 생겨나 세력이 급속도로 축소된다.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한 뒤 원소가 아들 원희을 유주자사로 삼았기에 명목상 유주 서부는 원소 세력이 차지한 것이 되었으나, 선우보가 조조에 협력하여 원소와 대립하는 등 유주 서부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207년에 원소의 뒤를 이은 원상과 원희가 멸망하면서 유주 서부는 조조가 장악했다. 213년에 조조가 구주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유주를 폐지하고 기주에 합병했는데,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유주자사를 다시 설치했다.

한편 유주 동부의 공손도의 세력은 대를 이어 세습되어 유지되었다. 공손도는 요동군·요동속국도위부·현도군·낙랑군을 차지해 제멋대로 이를 '평주(平州)'로 분할했다. 이후 공손강은 요동속국도위부 지역을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한동안 오환족 선비족의 영역이 되었다. 244년 선비족이 내부해오자 요동속국도위를 다시 설치했는데, 어느 시점에 창려군으로 격상되었다. 서진 때인 276년에 평주를 다시 설치했다.

2. 연국(燕國)

원래 진(秦)나라 연나라 수도를 점령하면서 설치한 광양군(廣陽郡)이었다.[1] 후한 초기인 26년에 팽총이 연왕을 자칭하면서 연국에 소속되었으나, 29년에 패망하여 환원되었다. 37년에는 광양군을 폐지하여 상곡군에 합병시켰으나, 96년에 다시 광양군을 설치했다.
지명 [진]광양군→[-73]광양국→[10]광양군, [96]광양군→[221]연국→[222]광양군→[232]연국
소속 진(秦)→[전한]유주자사부→[26]연국→[29]유주자사부→[37]상곡군에 합병, [96]유주자사부→[213]기주→[220]유주→[서진]유주
치소 계현
분합 [277]어양군 병합: 노현·옹노현·천주현·안락현
출신 계현: 서막
광양현: 사인
봉작 조간: 연공(221~222)
조우: 연왕(232~265)
사마기: 연왕(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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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군: 계현, 범양현, 양향현, 역현, 용성현, 성현, 탁현, 방성현, 안차현 이외 미상
전한 광양국(4현 20,740호 70,658구): 계현, 방성현, 광양현, 음향현
광양국광유군(廣有郡), 계현→벌융현(伐戎縣), 음향현→음순현(陰順縣)
후한 광양군(5성 44,550호 280,600구): 계현, 광양현, 창평현, 군도현, 안차현
서진 연국(10현 29,000호): 계현, 안차현, 창평현, 군도현, 광양현, 노현, 안락현, 천주현, 옹노현, 호노현 }}}}}}}}}

3. 범양군(范陽郡)

원래 이름은 탁군(涿郡)이나, 226년에 범양군으로 개칭했다.
지명 [-111?]탁군→[226]범양군→[265]범양국(范陽國)
소속 [한]유주자사부→[213]기주→[220]유주→[서진]유주
치소 탁현
설치 [215]용성현, [서진]장향현
전출 [265]북신성현→기주 고양국
출신 탁현: 유비, 노식
방성현: 유방
용성현: 손례
현 미상: 장비, 간옹
봉작 사마수: 범양왕(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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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탁군(29현 195,607호 782,764구): 탁현, 주현, 곡구현, 고안현, 남심택현, 범양현, 여오현, 용성현, 역현, 광망국, 막현, 고양현, 주향국, 안평현, 번여국, 성국, 양향국(良鄕縣), 이향국, 임향국, 익창국, 양향국(陽鄕國), 서향국, 요양현, 중수현, 무원현, 아릉현, 아무국, 고곽국, 신창국
탁군원환군(垣翰郡), 주현→주병현(逎屛縣), 범양현→순음현(順陰縣), 용성현→심택현(深澤縣), 막현→언부현(言符縣), 고양현→고정현(高亭縣), 안평현→광망정현(廣望亭縣), 번여국→악부현(握符縣), 성국→의가현(宜家縣), 양향국(良鄕縣)→광양현(廣陽縣), 이향국→장부현(章符縣), 익창국→유질현(有秩縣), 양향국(陽鄕國)→장무현(章武縣), 서향국→이풍현(移風縣), 무원현→원한정현(垣翰亭縣), 아릉현→아륙현(阿陸縣), 고곽국→광제현(廣堤縣)
후한 탁군(7성 102,218호 633,754구): 탁현, 주국, 고안현, 범양국, 양향현, 북신성현, 방성현
서진 범양국(8현 11,000호): 탁현, 양향현, 방성현, 장향현, 주현, 고안현, 범양현, 용성현 }}}}}}}}}

4. 대군(代郡)

조(趙)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전한 때까지 이어졌으나, 후한 초기 오르도스 지방을 점거한 흉노가 세력을 더 확장하였기에 39년에 대군을 폐지했다가, 남흉노 선우가 한나라에 투항한 뒤인 50년에 복구했다. 삼국시대 동안 대군 북부의 현들이 무더기로 폐지되었는데, 오르도스 영역을 포기한 215년 무렵의 일로 추정된다.
소속 조(趙)→진(秦)→[전한]병주자사부→[39]흉노, [50]유주자사부→[213]기주→[220]유주→[서진]유주
치소 [진]대현, [후한]고류현→[215?]대현
전입 [서진]중산국 광창현
폐지 [215?]고류현·상건현·도인현·반지현·권장현·북평읍·동안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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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9현[4]): 대현, 당성현, 연릉현, 신평서현, 평읍현, 동안양현, 노성현, 반지현, 참합현, 고류현, 광창현, 영구현, 원양현(原陽縣·연혁 미상)
전한 대군(18현 56,771호 278,754구): 상건현, 도인현, 당성현, 고류현, 마성현, 반지현, 연릉현, 권장현, 차여현, 평읍현, 양원현, 동안양현, 참합현, 평서현, 대현, 영구현, 광창현, 노성현
대군엽적군(厭狄郡), 상건현→안덕현(安德縣), 도인현→도인현(道仁縣), 반지현→반부현(班副縣), 권장현→권취현(狋聚縣), 평읍현→평호현(平胡縣), 동안양현→경안현(竟安縣), 평서현→평보현(平葆縣), 대현→엽적정현(厭狄亭縣), 광창현→광병현(廣屛縣), 노성현→노순현(魯盾縣)
후한 대군(11성 20,123호 126,188구): 고류현, 상건현, 도인현, 당성현, 마성현, 반지현, 권장현, 북평읍, 동안양현, 평서현, 대현
서진 대군(4현 3,400호): 대현, 광창현, 평서현, 당성현 }}}}}}}}}

5. 상곡군(上谷郡)

연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전한 때까지 이어졌으나, 후한 초기 오르도스 지방을 점거한 흉노가 세력을 더 확장하였기에 39년에 상곡군을 폐지했다가, 50년에 복구했다.
소속 연(燕)→진(秦)→[전한]유주자사부→[39]흉노, [50]유주자사부→[213]기주→[220]유주→[서진]유주
치소 [진]저양현→[삼국]거용현→[서진]저양현
광녕군: 하락현
분합 [274]광녕군: 하락현·반현·탁록현
폐지 [274]광녕현, [삼국]영현·구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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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군(12현): 저양현, 이여현, 영성현, 군도현, 상란현, 거용현, 반현, 여현, 차거현, 하락현 이외 미상
전한 상곡군(15현 36,008호 117,762구): 저양현, 천상현, 반현, 군도현, 거용현, 구무현, 이여현, 영현, 창평현, 광녕현, 탁록현, 차거현, 여현, 여기현, 하락현
상곡군삭조군(朔調郡), 저양현→저음현(沮陰縣), 천상현→색천현(塞泉縣), 반현→수무현(樹武縣), 이여현→삭조정현(朔調亭縣), 영현→박강현(博康縣), 창평현→장창현(長昌縣), 광녕현→광강현(廣康縣), 탁록현→포륙현(抪陸縣), 차거현→구거현(久居縣), 여현→곡무현(穀武縣), 여기현→기현(祁縣), 하락현→하충현(下忠縣)
후한 상곡군(8성 10,352호 51,204구): 저양현, 반현, 영현, 광녕현, 거용현, 구무현, 탁록현, 하락현
서진 상곡군(2현 4,070호): 저양현, 거용현
광녕군(3현 3,950호): 하락현, 반현, 탁록현 }}}}}}}}}

5.1. 광녕군(廣寧郡)

274년에 상곡군을 분할해 설치했다.

6. 어양군(漁陽郡)

원래 연나라가 설치한 군인데, 서진 때인 277년에 폐지되어 연국에 합병되었다.
소속 연(燕)→진(秦)→[한]유주자사부→[213]기주→[220]유주→[277]연국에 합병
치소 [진]어양현→[266?]옹노현
설치 [서진]연국 호노현(재설치)
폐지 [238]호노현, [266?]어양현, [277]광평현, [삼국]평곡현·제해현
출신 옹노현: 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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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양군(12현): 어양현, 천주현, 백단현 이외 미상
전한 어양군(12현 68,802호 264,116구): 어양현, 호노현, 노현, 옹노현, 천주현, 평곡현, 안락현, 제해현, 광평현, 요양현, 백단현, 활염현
어양군통로군(通路郡), 어양현→득어현(得漁縣), 호노현→거부현(舉符縣), 노현→통로정현(通路亭縣), 천주현→천조현(泉調縣), 제해현→돈덕현(敦德縣), 광평현→평광현(平獷縣), 요양현→요술현(要術縣)
후한 어양군(9성 68,456호 435,740구): 어양현, 호노현, 노현, 옹노현, 천주현, 평곡현, 안락현, 제해현, 광평현 }}}}}}}}}

7. 우북평군(右北平郡)

원래 연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언제부터 북평군(北平郡)으로 약칭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서진 때 정식으로 북평군으로 개명되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후한 말 시점부터 북평군으로 등장한다. 전한 때 우북평태수는 장성 둔수 임무를 위해 토은현에 주둔해 있었으나, 후한 때에는 평강현이 폐지되었기에 토은현이 수현(首縣)이 되었는데, 후한 말까지 우북평태수의 치소도 그곳으로 이전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장제스가 북양군벌을 멸망시켜 북벌에 성공한 것을 기념해 베이징을 베이핑(北平)으로 고쳤는데, 이를 두고 우북평이 지금의 베이징이라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엄연히 다른 지역이다.
지명 우북평군→[서진]북평군
소속 연(燕)→진(秦)→[한]유주자사부→[213]기주→[220]유주→[서진]유주
치소 [진]무종현→[전한]평강현→[삼국]토은현→[서진]서무현
출신 토은현: 정보
무종현: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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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북평군(16현): 무종현, 창성현, 석양현, 자현(薋縣), 광성현, 백랑현, 서무현, 자현(字縣), 석성현, 정릉현 이외 미상
전한 우북평군(16현 66,689호 320,780구): 평강현, 무종현, 석성현, 연릉현, 준마현, 자현(薋縣), 서무현, 자현(字縣), 토은현, 백랑현, 석양현, 창성현, 여성현, 광성현, 취양현, 평명현
우북평군북순군(北順郡), 연릉현→포무현(鋪武縣), 준마현→준마현(俊麻縣), 자현(薋縣)→포목현(裒睦縣), 서무현→북순정현(北順亭縣), 백랑현→복적현(伏狄縣), 석양현→석음현(夕陰縣), 창성현→숙무현(淑武縣), 여성현→갈석현(揭石縣), 광성현→평로현(平虜縣), 취양현→독목현(篤睦縣), 평명현→평양현(平陽縣)
후한 우북평군(4성 9,170호 53,475구): 토은현, 서무현, 준마현, 무종현
서진 북평군(4현 5,000호): 서무현, 토은현, 준마현, 무종현 }}}}}}}}}

8. 요서군(遼西郡)

원래 연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전한 때까지 요서군 영역은 현대의 롼허(灤河) 하류 지역에 본거지를 두면서 한편으로는 동북쪽으로 현대의 다링허(大凌河) 중·하류 지역에 월경지를 두고 있는 기괴한 형세였다. 아무래도 연나라 때부터 연나라가 설치한 장성을 수비하기 위해 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과 각각 분담하고자, 요서군 본 지역 북부에는 우북평군의 장성 둔수 영역이 설정되고 그 동쪽에 요서군의 둔수 영역이 설정되다보니 이런 형세가 된 것으로 보인다.
소속 연(燕)→진(秦)→[한]유주자사부→[213]기주→[220]유주→[서진]유주
치소 [진]양락현→[전한]저려현→[삼국]양락현
폐지 [서진]임유현·영지현
출신 해양현: 한당
영지현: 공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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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군: 양락현, 도하현, 유성현, 영지현, 안평현, 해양현, 비여현 이외 미상
전한 요서군(14현 72,654호 352,325 구): 저려현, 해양현, 신안평현, 유성현, 영지현, 비여현, 빈종현, 교려현, 양락현, 호소현, 도하현, 문성현, 임유현, 유현
저려현→서려현(鉏慮縣), 영지현→영지정현(令氏亭縣), 비여현→비이현(肥而縣), 빈종현→면무현(勉武縣), 교려현→금로현(禽虜縣), 도하현→하복현(河福縣), 문성현→언로현(言虜縣), 임유현→빙덕현(馮德縣), 유현→선무현(選武縣)
후한 요서군(5성 14,150호 81,714구): 양락현, 해양현, 영지현, 비여현, 임유현
서진 요서군(3현 2,800호): 양락현, 비여현, 해양현 }}}}}}}}}
후한은 다링허 이북에 위치한 장성의 운영을 중단하고 부용된 오환족들을 통제하여 다링허 유역을 유지했기에 장성 주변에 설치되었던 현들이 대거 폐지되어, 저려현이 폐지되었기에 롼허 하류 지역의 양락현이 수현(首縣)이 되었다. 그러나 『후한서』 조포열전에 따르면 영제 때 조포는 요서태수로 부임한 뒤에 자신의 일가족들을 임지로 불러왔는데, 일가족이 유성현 근처를 지나가다가 선비족들에게 붙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유성현은 롼허 일대가 아니라 다링허 중류 지역에 있던 곳으로, 요서태수는 여전히 장성 둔수 지역에 주둔해 있던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후한의 양락현이 여전히 장성 지역에 남아있었다고 보는 의견이 많으나, 이 시점에 다링허 중·하류 지역에는 요동속국도위가 설치되어 있었기에, 양락현 또한 다링허 유역에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후한 말까지 우북평·요서태수의 치소는 수현(首縣)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전한 때의 치소를 그대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9. 요동군(遼東郡)

연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연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전한 때인 기원전 126년에 폐지된 창해군(滄海郡·蒼海郡)을 합병했다. 189년에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하면서 요동군 주변의 군·현을 장악하고 대를 이어 세습했다. 이듬해 공손도는 요동후(遼東侯)를 자칭했는데, 군 단위의 식읍을 갖는 후(侯)로 특별한 사례였다. 또한 요동군을 분할해 요서군(遼西郡)과 중료군(中遼郡)을 설치했는데, 당시 요동군 관할인 요동속국도위부에 전한 때에는 요서군 영역이었던 곳이 있었으므로 이를 요서군으로 승격시키고, 지리적으로 첸산(千山) 산맥과 구분되는 요동군 동남부 지역을 중료군으로 분할한 것이라 추측된다. 공손도가 죽은 뒤 후계자가 된 공손강은 요동후 칭호를 버리고 한나라 조정의 양평후 책봉을 받아들였으며, 요서군 운영을 포기하고 중료군을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
지명 요동군→[277]요동국(遼東國)→[283]요동군
소속 연(燕)→진(秦)→[한]유주자사부→[190?]평주→[238]유주→[276]평주→[서진]평주
치소 양평현
중료군: (미상)
분합 [190?]중료군→[204?]요동군에 합병: 서안평현·동답현·북풍현·역성현
폐지 [서진]요수현·평곽현·북풍현
출신 양평현: 공손도 일족
봉작 공손도: 요동후(190?~204?)
사마유: 요동왕(277~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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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군: 양평현, 험독현, 후성현 이외 미상
전한 요동군(18현 55,972호 272,539구): 양평현, 신창현, 무려현, 망평현, 방현, 후성현, 요수현, 요양현, 험독현, 거취현, 고현현, 안시현, 무차현, 평곽현, 서안평현, 문현, 번한현, 답지현
양평현→창평현(昌平縣), 망평현→장설현(長說縣), 요수현→순목현(順睦縣), 요양현→요음현(遼陰縣), 무차현→환차현(桓次縣), 서안평현→북안평현(北安平縣), 문현→문정현(文亭縣)
후한 요동군(11성 64,158호 81,714구)[5]: 양평현, 신창현, 무려현요수현, 망평현거취현, 후성현역성현, 안시현, 평곽현, 서안평현, 문현, 번한현북풍현, 답지현
서진 요동국(8현 5,400호): 양평현, 문현, 거취현, 낙취현, 안시현, 서안평현, 신창현, 역성현 }}}}}}}}}
238년에 사마의 공손연을 멸망시키고 양평현에서 15세 이상 남자 7,000여 명을 모두 죽여서 경관(京觀)을 만드는 학살을 저질렀다. 이 일로 요동군 치안에 문제가 생겼는지, 239~240년에 청주에서 동답현·문현·북풍현 출신 난민들이 출몰하는 현상도 발견된다.

9.1. 중료군(中遼郡)

공손도가 190년 무렵에 설치했다고 하는 군으로, 정확하게 어디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다. 요동군은 지리적으로 첸산(千山) 산맥으로 나뉘어서, 산맥 이북의 요하 유역지역과 산맥 이남의 해안지역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산맥 이남 지역은 요동군과 낙랑군 사이에 있어 공손도 세력의 중부에 해당했다. 아마도 이 지역에 있던 현들을 분할해 중료군을 설치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중료군은 공손도가 죽은 204년 무렵에 운영이 중단되어 요동군에 다시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속한서』 군국지에 기재된 요동군·요동속국도위·현도군의 현 목록은 매우 부정확하다. 무려현은 요동군과 요동속국도위에 중복되어 기재되었고, 후성현은 요동군과 현도군에 중복되어 기재되었다. 현도군 현으로 기재된 서개마현과 상은태현은 시기상 후한 때 실재(實在)할 수 없는 현이다. 후한 때에도 있던 것이 분명한 거취현과 요수현은 누락되어 있고, 현도군 소속임이 분명한 망평현은 요동군에만 기재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요동군에 북풍현과 동답현이란 지명이 등장하고, 『진서』 지리지에는 역성현과 낙취현이란 지명이 새로 등장하는데, 이 중 동답현과 낙취현은 답지현이 개명된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얻어낼 수 있지만, 북풍현과 역성현은 그러하지 못하다. 공교롭게도 이 두 지명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등장하는 지명이다. 아마도 후한 때인 106년에 제3현도군이 보강되면서 변경된 요동군의 정확한 연혁과 몇몇 지명의 변동을 『속한서』 저자가 인지하지 못하여 이와 같은 오류를 일으킨 것이라 보인다. 북풍현과 역성현은 후한 때 등장한 것으로, 각각 전한 때의 번한현과 무차현을 대체한 현이라 생각되며, 《광개토대왕릉비》에 언급된 광개토대왕의 순행로를 추적해보면 그 대강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10. 창려군(昌黎郡)

원래 후한 때인 121년에 전한 때의 요동군 서부 지역과 요서군 동부 지역을 합쳐 설치한 요동속국도위부(遼東屬國都尉部)였다. 요동속국도위는 지금의 다링허(大凌河) 유역 일대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원래 이 지역은 연나라가 설치한 장성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현을 설치하고 한족 주민들을 이주시켜와 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이 분담하여 관리한 지역인데, 후한 때에는 이런 식으로 장성을 유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다링허 유역의 현을 대부분 폐지하고 이 지역에 사는 동호 계열의 유목민인 오환족 선비족을 부용시켜 관리하려 했다. 이에 원칙적으로는 요동군 태수의 지휘를 받는 속국도위를 설치해 최소한의 한족 인력만 다링허 유역에 상주시키고 요동속국도위가 후한에 부용되어 있는 오환족과 선비족을 징집하여 이 지역을 관리하게 했다.

후한 말 공손찬이 이곳의 장사(長史)를 맡아 명성을 얻었다. 189년에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하자, 사적인 원한이 있던 요동속국도위 공손소를 양평으로 소환해 그를 때려죽였는데, 다링허 유역은 이렇게 공손도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공손도는 요동군을 분할해 요서군과 중료군을 설치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요동속국도위부의 일부는 원래 요서군이었던 지역이었기에, 요동속국도위부를 요서군으로 격상시킨 것이라 짐작된다. 204년 무렵에 공손도를 계승한 공손강이 공손도가 자의적으로 설치한 요서군과 중료군의 운영을 중단했는데, 결국 당시 오환족 수령이었던 답돈의 영역이 되었던 것 같다. 207년에 답돈이 멸망한 뒤에는 이 지역을 차지한 세력이 없었고, 그렇게 완전히 오환족과 선비족들의 터전이 되었다. 이후 237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요동의 공손연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다시 이 지역으로 진입했는데, 이때 이 지역의 오환족들이 관구검에 항복했고, 244년에는 이 지역의 선비족들도 내부하자 위나라에서 요동속국도위를 재설치했다. 나중에 창려군으로 승격했는데, 정확한 시점은 확인되지 않는다.
지명 [121]요동속국도위부→[190?]요서군?, [244]요동속국도위부→[삼국]창려군
소속 [121]유주자사부 요동군→[190?]평주→[204?]폐지, [244]유주→[276]평주→[서진]평주
치소 [후한]창료도 황룡정, [244]창려현
설치 [244]창려현 및 빈도현(재설치)
폐지 [204?]창료도·빈도현·도하현·무려현·험독현·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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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요동속국도위부(6성)[6]: 창료도, 빈도현, 도하현, 무려현, 험독현, 방현
서진 창려군(2현 900호): 창려현, 빈도현 }}}}}}}}}

11. 현도군(玄菟郡)

전한 때인 기원전 107년에 설치된 군으로 원래는 조선을 멸망시킨 뒤 이듬해에 옥저를 복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설치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옥저 이외에는 현을 설치해 운영하는 데 실패했고, 이에 기원전 82년에 동예를 복속시키려던 목적으로 설치했던 임둔군(臨屯郡)을 합병하여, 단단대령 이동의 한반도 동북부를 영역으로 두는 군이 되었다. 그러나 옥저· 동예 집단은 현도군의 통치에 협조적이지 않았고, 임둔군을 합병했음에도 여전히 독립된 군으로 운영하는 데 난항을 겪자, 기원전 75년에 남아있던 7현을 모두 낙랑군에 넘겨주고 낙랑군 북부에 있던 현들을 넘겨받아 요동군과 인접하게 되었다. 보통 학자들은 옥저에 있던 현도군을 제1현도군이라 부르고, 요동 지방으로 이전하게 된 현도군을 제2현도군이라 부른다.

그러나 요동지역 또한 안정적인 지역이라 할 수는 없었는데, 당시 부여에 부용되어 있던 고구려 계통 집단들이 현도군의 통치에서 계속 이탈해 나갔기에, 전한 말에는 3개 현만 남아있을 정도로 제2현도군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신나라와 후한이 교체되는 시점에 현도군은 고구려의 꾸준한 공격을 받았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후 14년에 고구려가 현도군을 '멸망'시켰다고 전한다. 실제로 현도군이 멸망했는지, 서기 2세기가 될 때까지 100년 가까이 현도군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105년 고구려 태조대왕의 침공으로 요동군 6현이 약탈당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 이듬해인 106년에 현도군에 요동군의 3현이 이속하여 보강되는 조치가 취해지면서 현도군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3세기의 삼국시대 사람들이 기원전 75년에 이전한 현도군 치소를 '현도고부(玄菟故府)'로 부른 것으로 보아, 3세기 당시에 현도군은 제2현도군과는 또 다른 곳에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학자들은 이를 제3현도군으로 부른다. 후일 고구려가 요하 유역에 현도성을 설치해 운영한 곳과 동일한 위치로 여겨지고 있다.

제3현도군이 106년 이전에 설치되었다는 것 외에 정확히 언제 설치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후한 초기에도 존재는 했던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여 1세기 말에 이전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후한 초기에는 없었다가 106년 무렵에 다시 설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소속 옥저→[-107]유주자사부→[-75]교치, [-75]유주자사부→[14]멸망?, [106?]유주자사부→[190?]평주→[238]유주→[276]평주→[서진]평주
치소 [-107]부조현(옥저성), [-75]고구려현(현도고부), [106?]고구려현
폐지 [서진]후성현·요양현·건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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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제2현도군(3현 45,006호 221,845구): 고구려현, 상은태현, 서개마현
상은태현→하은현(下殷縣), 서개마현→현도정현(玄菟亭縣), 고구려→하구려(下句驪)[7]
후한 제3현도군(6성 1,594호 43,163구[8]): 고구려현, 서개마현망평현[9], 상은태현건의현?[10], 고현현, 후성현, 요양현
서진 현도군(3현 3,200호): 고구려현, 망평현, 고현현 }}}}}}}}}
『속한서』 군국지에는 140년 무렵에 현도군에 소속된 현 목록으로 고구려현·고현현·후성현·요양현·상은태현·서개마현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중 후성현은 요동군에도 중복되어 기재되어 있고, 입지상 제3현도군에 소속되었을 것임이 분명하고 실제 『진서』 지리지에서 현도군 소속으로 기록된 망평현은 현도군이 아니라 요동군 소속의 현으로 나온다. 따라서 군국지의 요동군·현도군 현 목록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군국지에서는 현도군에 소속된 곳이 6성(城)이라고 하는데, 고구려현과 106년에 요동군에서 이속된 3현 외에는 정확히 무슨 현들이 있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6성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전한 때의 현도군 현이었던 상은태현·서개마현을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전한 때의 2현은 이 시점에 고구려의 영역이 되어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2현이 제3현도군에 교치된 것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이 현들이 후한 때에도 존재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군국지를 정정해 망평현을 현도군 소속으로 보면, 남은 1개 현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미상의 현이 된다.

5개 현의 위치는 대략 확인이 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현도군 최북단에 위치한 망평현 이외 3개현이 고구려 방향의 동쪽에 집중된 것이 확인된다. 제3현도군이 고구려뿐만 아니라 선비족 또한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강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미상의 현은 서쪽에 위치했을 것이란 추론을 얻어낼 수 있는데, 마침 제3현도군 영역 내에 한나라 성터로 판정되는 유적이 한 곳이 있고 또 현성 규모인 것도 확인이 되므로, 미상의 현 위치도 파악된다. 공손도가 요동후를 자칭한 뒤에 부친인 공손연을 제멋대로 건의후(建義侯)로 추봉했는데, 당시 시호는 보통 1글자만 사용했으며 '建'자는 애초에 시법(諡法)에 없는 글자이므로, '건의'는 시호가 아니라 지명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건의라는 지명을 쓰는 군·현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공손연은 원래 요동군 출신이었으나 현도군에 망명하여 살았는데, 공손도가 그 망명지를 봉토로 설정했기에 건의후가 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미상의 현 이름은 '건의현(建義縣)'으로 추측된다.

12. 낙랑군(樂浪郡)

전한 때 한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군으로, 당초 조선에 부용되어있던 진번국과 임둔국까지 복속시키기 위해 각각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을 함께 설치했고, 이듬해에는 옥저를 대상으로 현도군까지 설치했지만, 낙랑군 이외에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고조선 4군의 운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기에, 기원전 82년에는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여 각각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병시켰다. 이에 따라 낙랑군은 진번군을 합병해 한반도 서북부와 요동 지방 일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기원전 75년에는 임둔군과 통합된 현도군마저 운영이 포기되어, 현도군은 요동 지방으로 이전해 버렸고, 기존에 현도군이 관할하던 7개 현은 낙랑군으로 이속되었다.

고조선 4군 중 낙랑군만 제대로 운영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고조선이 예맥 계통의 토착민들만으로 구성된 나라가 아니라, 춘추전국시대 진-한 교체기의 혼란을 피해 이민 온 한족 계열의 이주민들도 상당한 규모였기 때문으로, 애초에 당시 고조선은 위만조선으로 그 이주민 집단이 왕위까지 차지했을 정도였다. 당초 위만조선에 합류하지 않았던 기존의 예맥계 집단이 남하하여 마한을 세웠는데, 위만조선도 멸망하자 이번에는 낙랑군에 합류하지 않은 세력이 남하했는데 그들이 진한이 되었다. 신라 또한 그들 스스로 밝혔듯 이때 남쪽으로 내려온 예맥계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다.

신나라가 멸망하자 낙랑군의 토착 호족인 왕조라는 인물이 낙랑군을 장악했는데, 30년에 광무제가 왕조를 토벌하여 후한의 영역이 되었다. 후한 정권은 이민족을 적극적으로 군·현의 통제에 두기보다는 이민족 수장들을 책봉하여 그저 조세와 징병의 의무만 부과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에 현도군에서 넘어왔던 영동 7현을 포기하고 각각 현지의 옥저· 동예 수장들을 후(侯)로 책봉해 독립시켰다. 이때 독립된 나라들은 111년에 화려국이 고구려에 정복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고구려에 복속되었는데, 245년에 관구검의 침공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이 일시 위축되면서 잠시 독립을 되찾게 되었다. 서진 때는 교지군과 같은 유배지로 각광을 받았는지(...) 사마씨 정권에 저항하던 하후현· 이풍· 장집· 하후패 등의 남은 친족들이 이곳으로 추방된 일이 있다. 서진은 27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주 동이교위에 소속시키며, 적극적으로 동방에 개입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동이교위가 동방 정책의 중심이 되면서 낙랑과 대방은 점점 세력이 쇠퇴해져 갔다.

하지만 서진의 적극적인 동방 정책이 무색하게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의 연이은 대전란, 그로 인한 서진의 멸망과 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290년~300년대 경부터 낙랑, 대방과 중국 본토와의 연결 고리는 사실상 끊긴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결국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던 회랑 지대인 서안평을 장악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313년 미천왕에 의해 낙랑군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주민들은 대부분 고구려 사회의 일부로 동화되었고 유민들 중 일부는 모용선비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는데 모용외는 유민들이 정착한 요서 지역에 낙랑군을 재설치하여 '낙랑군'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요서 지역에서 이어진다.
소속 조선→[한]유주자사부→[190?]평주→[238]유주→[276]평주→[서진]평주
치소 조선현
분합 [204?]대방군: 대방현·열구현·소명현·장잠현·제해현·함자현·해명현
폐지 [삼국]남감현·증지현·점제현·패수현·낙도현
봉작 공손연: 낙랑공(23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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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낙랑군(25현 62,812호 406,748구): 조선현, 남감현, 패수현, 함자현, 점제현, 수성현, 증지현, 대방현, 사망현, 해명현, 열구현, 장잠현, 둔유현, 소명현, 누방현, 제해현, 혼미현, 탄열현, 동이현, 불이현, 잠태현, 화려현, 야두매현, 전막현, 부조현
낙랑군낙선군(樂鮮郡), 패수현→낙선정현(樂鮮亭縣), 증지현→증토현(增土縣), 해명현→해환현(海桓縣)
후한 낙랑군(18성 61,492호 257,050구): 조선현, 남감현, 패수현, 함자현, 점제현, 수성현, 증지현, 대방현, 사망현, 해명현, 열구현, 장잠현, 둔유현, 소명현, 누방현, 제해현, 혼미현, 낙도현
서진 낙랑군(6현 3,700호): 조선현,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 누방현, 사망현 }}}}}}}}}

13. 대방군(帶方郡)

204년 무렵에 공손강이 낙랑군 둔유현 이남에 있던 7현을 재편하여 설치한 군인데, 이 현들은 전한 때에는 낙랑군 남부도위부 소속이었다. 현재의 재령평야 일대에 해당하는데, 현대에는 개간되어 평야가 되었고 또한 서해갑문이 설치되어 대동강의 범위가 길어졌기에 간과하기 쉽지만, 재령평야는 후대에 김자점이 간척을 시작하면서 조성된 것이며, 원래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고재령만(古載寧灣)'을 이루고 있었다. 대방군 설치 당시 이 지역은 인구 상당수가 한(韓)으로 유출되어 매우 쇠락한 상황이었다고 전하는데, 공손강은 고구려의 꾸준한 위협을 받는 낙랑군을 대신하여 이 지역을 개발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덕분에 서진 때에는 낙랑군이 3,700호 규모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대방군은 4,900호로 오히려 낙랑군보다 큰 군이 되었다. 서진 황족 사마요가 이곳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진의 멸망과 오호십육국시대의 도래로 인한 중국 본토와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대방군은 고립되었고 결국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지 1년 후인 314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다. 주민 대부분은 이후 고구려 사회로 흡수되었으나, 일부 유민은 대방군에 우호적이던 한성백제로 이주하여 백제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고, 또다른 일부는 요서로 이주하면서 대방군이 요서에 교치되기도 하였는데 남북조시대인 430년대 북위가 이를 폐지했다.
소속 [204?]평주→[238]유주→[276]평주→[서진]평주
치소 대방현
전입 [204?]낙랑군 대방현·열구현·소명현·장잠현·제해현·함자현·해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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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대방군(7현 4,900호): 대방현, 열구현, 남신현, 장잠현, 제해현, 함자현, 해명현 }}}}}}}}}
한국 사학계에서는 진번군의 후신으로 보고 있는 것이 통설이다. 상술했듯이 대방군 지역은 전한 당시에는 낙랑군 남부도위부였으며, 같은 시기에 원래 임둔군·현도군 소속이던 단단대령 이동의 7현에는 동부도위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남부도위부는 당연히 원래있던 진번군을 통합하면서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후한 때에는 도위부가 치민 권한을 행사하며 사실상 군에서 독립되어 있던 일이 많았기에, 이를 두고 '변군(邊郡)의 특수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가며 '부도위(部都尉)'가 설치된 도위부는 이민족의 특별자치구역이란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는 설정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은 한나라의 지방 통치체제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으로, 도위부가 치민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엄연히 후한 이후의 일이고, 도위부는 변군에서만 설치되었던 것도 아니며 도위부 중엔 현을 전혀 관할하지 않고 장성이나 변새만 관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른바 '부도위론'은 당시의 통치체제를 설명할 수 없는 명백한 오류이다. 진번군을 대방군의 전신이라 확정짓는 것 역시 이러한 오류에 근거한 것이므로 재고가 필요하다.

14. 같이보기

파일:실제 지도 후한 13주.png

[1] 참고로 연나라는 이 지역을 점령당하자 수도를 요동군으로 옮겼다. [2] 삼국시대 이전에는 '촌(村)'이란 글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향(鄕)의 치소가 있는 읍(邑) 안이나 전지(田地) 주변에 조성된 거주 구역인 '리(里)'에서 생활했다. 간혹 성벽이 둘리지 않은 향의 치소를 '취(聚)'라고 불렀다. 당시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촌락들은 보통 군·현의 통제에서 벗어난 유랑민들이 거주하는 경우로 '야(野)'로 통칭하는 통치영역 바깥에 있는 것이었기에, 현대의 '마을'과 같은 개념은 없었다. 연의가 성립된 시점의 지명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3] 연의의 설정 덕에 누상촌은 "천하의 그릇 유비가 돗자리를 짜고, 만인지적 장비가 돼지를 잡고 있으며, 의협의 적란운 관우가 서당 훈장을 하고 있고,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옹...?이 동네 백수를 하고 있으며, 송대의 무기인 언월도를 82근으로 선뜻 만들어 주는 대장장이가 있으며, 황건적의 5만 군사를 무찌르는 500명의 동네청년이 있고, 의협을 위해 자기 재산을 선뜻 내주는 장세평 같은 상인이 있는 오늘도 평화로운 동네."라는 장난스러운 수식이 붙기도 한다. [4] 발견된 지명은 13곳이다. [5] 『속한서』 군국지의 무려현은 요동속국도위부에 중복되어 있고 후성현은 현도군에 중복되어 있다. 망평현은 현도군 소속임이 분명하다. 또한 요수현과 거취현이 폐지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북풍현과 역성현이 후한 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군국지 저자가 후한 때의 요동군 주변의 변동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여 오류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되며, 후한 때에는 무차현과 번한현이 각각 역성현과 북풍현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6] 『속한서』 군국지에서 요동속국도위부의 호구는 누락되었고 장액속국도위부의 호구를 4,656호 16,952구로 적었는데, 장액속국도위부는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니므로 이 수치는 원래 요동속국도위부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7] 왕망이 고구려를 고쳐 하구려(下句驪)로 칭했다는 것은 현도군에 예속된 고구려 계통 집단인 '양맥'을 지칭하는 것이지, 고구려현의 이름을 '하구려현'으로 고친 것이 아니다. [8] 인구(口) 수치에 비해 세대(戶)가 너무 적다. 10,594호의 오기(誤記)라 판단된다. [9] 후한 때에는 서개마현이 존재할 수 없으며, 현도군 소속임이 분명한 망평현이 누락되어 요동군 소속으로 기재되었다. 『속한서』 군국지 저자가 후한 때의 요동군 주변의 변동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여 오류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된다. [10] 후한 때에는 상은태현이 존재할 수 없다. 후한 말 공손도가 자신의 아버지 공손연을 '건의후(建義侯)'로 추봉했는데, '건의'는 현도군에 소속된 현의 이름으로 보인다. [11]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전한 때(정확히는 낙랑군 설치 이후)의 패수는 청천강으로 추정된다. 패수로 추정되는 강 중 대동강은 《한서》 〈지리지〉의 각주 내용과 《점제현신사비》의 출토 위치를 보면 열수(列水)임이 확실하고, 압록강은 마자수(馬紫水)라는 별개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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