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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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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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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0년청주지도.png
1. 개요2. 제국(齊國)3. 제남국(濟南國)4. 낙안군(樂安郡)5. 북해군(北海郡)6. 성양군(城陽郡)
6.1. 동안군(東安郡)?
7. 동래군(東萊郡)
7.1. 장광군(長廣郡)7.2. 영주자사부(營州刺史部)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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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체적으로 현대의 산둥성 동부지역과 겹친다.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원래 태산(泰山)과 하수(河水) 사이의 동부 해안 지방을 가리키던 지방 이름인 청주(靑州)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청주자사부가 되었다. 대략 지금의 산둥성 일대에 해당한다.

군웅할거 시기에는 청주에 근거지를 둔 대형 세력이 등장하지 못했고, 공손찬이 측근 전해를 청주자사로 임명해 초기에 청주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원소는 아들인 원담을 청주로 보내 전해를 구축하게 하여, 청주는 크게는 공손찬과 원소 세력이 충돌하는 각축장이면서 그 아래 황건적의 잔당으로 여겨지는 군소 군벌들이 각지에서 할거하는 양상이 되었다. 요동 지방을 장악한 공손도는 이런 난장판이 된 틈을 타 발해만을 건너와 동래군의 일부 현을 점령하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임명해 보내기도 했다. 청주 동부지역에 위치한 북해상 공융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려던 움직임을 보였으나, 황건적 잔당들의 공격을 받아 임지에서 쫓겨났고, 뒤에 서주를 차지한 유비의 지지를 받아 청주자사를 자처하며 청주에 진입했으나 원담에게 격퇴되었다. 195년 무렵에 유우를 살해하면서 악명을 얻은 공손찬이 급격하게 세력을 잃으면서 전해가 청주에서 물러나, 어느덧 청주는 원담이 장악한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조조 여포를 멸망시키고 서주를 차지한 뒤, 198년 무렵 원담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는 산둥반도 남부지역에 성양군을 설치하는 한편, 하기를 장광태수로 임명해 보내 처음으로 청주로 진입했다. 이어서 199년 무렵에는 장패를 보내 제국·북해국·동안군을 공격하게 했다. 원소 사후 원씨 가문이 분열하자 그 틈을 탄 조조가 원담을 공격하여, 205년에 장료를 청주 방면으로 보내 원담 세력을 제거하고 요동의 유의를 격파해, 청주를 평정했다.

2. 제국(齊國)

원래 진(秦)나라가 설치한 임치군(臨淄郡)인데, 전한 때 제왕이 책봉되면서 제국으로 개편되었다. 후한 말에 제왕이 단절되었음에도 206년까지 봉국을 폐하는 조치가 이뤄지지 못했다. 위나라 때 다시 제왕이 책봉되어 제국이 되었다. 239년에 요동군 동답현 출신 난민들이 청주에 들어오자 새로 신답현을 설치해 거주하게 했고, 240년에 요동군 문현과 북풍현 난민들이 연이어 청주에 들어오자 각각 신문현과 남풍현을 설치해 거주하게 했다.
지명 [진]임치군→[-201]제국→[-127]제군(濟郡)→[27]제국→[29]제군→[37]제국→[87]제군→[90]제국→[206]제군→[221]제국→[222]제군→[235]제국→[239]제군→[254]제국
소속 진(秦)→[한]청주자사부→[서진]청주
치소 임치현
전입 [235]북해국 동안평현 및 낙안군 익현
설치 [206]광요현, [239]신답현, [240]신문현·남풍현
전출 [195]임구현?→동안군, [서진]광현→서주 동관군
폐지 [서진]반양현·익도현·신답현·신문현·남풍현
출신 익현: 국연
봉작 조예: 제공(221~222)
조방: 제왕(235~239·254~265)
사마유: 제왕(265~)
손분: 제왕(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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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치군: 임치현, 임구현, 무성현, 낙안현, 동안평현, 적성현, 박창현, 창국현, 고완현, 천승현 이외 미상
전한 제군(12현 154,826호 554,444구): 임치현, 창국현, 이현, 서안현, 거정현, 광현, 광요현, 소남현, 임구현, 북향국, 평광국, 태향현
제군제남군(濟南郡), 임치현→제릉현(齊陵縣), 이현→이치현(利治縣), 서안현→동녕현(東寧縣), 임구국→감구현(監胊縣), 북향국→옹취현(禺聚縣)
후한 제국(6성 64,415호 491,765구): 임치현, 서안현, 창국현, 임구현, 광현, 반양현
서진 제국(5현 14,000호): 임치현, 서안현, 동안평현, 광요현, 창국현 }}}}}}}}}

3. 제남국(濟南國)

본래 전한 초기에 제왕(濟王) 한신 항우를 죽인 공으로 초왕(楚王)으로 전봉(轉封)되었을 당시에 존재했던 제국(濟國)의 지군(支郡)인 박양군(博陽郡)이었는데, 여후가 조카 여태(呂台)를 여왕(呂王)으로 책봉할 당시에는 제남군(濟南郡)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여러 차례 소속 봉국(封國)이 바뀌었다가 기원전 164년에 제남국으로 분할되었다.
지명 [-202?]박양군→[-187?]제남군→[-164]제남국→[-154]제남군→[41]제남국→[153]제남군→[174]제남국→[220]제남군→[246]제남국→[277]제남군
소속 제국(濟國)→[-187]여국(呂國)→[-180]양국(梁國)→[-179]제국→[-164]한(漢)→[한]청주자사부→[서진]청주
치소 동평릉현
전입 [246]기주 평원군 축아현·누음현
전출 [서진]동조양현·추평현→낙안국
폐지 [서진]대현·토고현
봉작 유개(劉開)[1]: 제남왕(~220)
조해: 제남왕(246~265)
사마수: 제남왕(26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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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제남군(14현 140,761호 642,884구): 동평릉현, 추평현, 대현, 양추현, 토고현, 어릉현, 양구현, 반양현, 관현, 조양국, 역성현, 효국, 저현, 의성현
제남국낙안군(樂安郡), 대현→대치현(臺治縣), 어릉현→어륙현(於陸縣), 반양현→제남정현(濟南亭縣), 조양국→수치현(修治縣), 효국→이성현(利成縣)
후한 제남국(10성 78,544호 453,308구): 동평릉현, 저현, 어릉현, 대현, 관현, 토고현, 양추현, 추평현, 동조양현, 역성현
서진 제남군[2]: 평릉현, 어릉현, 역성현, 관현, 저현, 양추현, 누음현, 축아현 }}}}}}}}}

4. 낙안군(樂安郡)

원래 전한 때 설치된 천승군(千乘郡)인데, 후한 때 천승왕이 낙안왕으로 개봉(開封)되면서 낙안국(樂安國)이 되었다.
지명 [전한]천승군→[60]천승국(千乘國)→[95]낙안국→[146]낙안군→[265]낙안국
소속 [한]청주자사부→[서진]청주
치소 [전한]천승현→[95]임제현→[213]고원현
전입 [서진]제남국 동조양현·추평현
전출 [235]익현→제국
폐지 [서진]천승현·낙안현
봉작 사마감: 낙안왕(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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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천승군(15현 116,727호 490,720구): 천승현, 동추현, 누옥현, 평안국, 박창현, 요성현, 건신현, 적현, 낭괴현, 낙안현, 피양국, 고창현, 번안국, 고원현, 연향현
천승군건신군(建信郡), 누옥현→연정현(延亭縣), 요성현→시무현(施武縣), 적현→이거현(利居縣), 번안국→와정현(瓦亭縣), 고원현→상향현(常鄕縣)
후한 낙안국(9성 74,400호 424,075구): 임제현, 천승현, 고원현, 낙안현, 박창현, 요성국, 이현, 익국, 수광현
서진 낙안국(8현 11,000호): 고원현, 임제현, 박창현, 이현[3], 요성현, 추평현[4], 수광현, 동조양현 }}}}}}}}}

5. 북해군(北海郡)

진(秦)나라의 교서군(膠西郡)이었다. 전한 때인 기원전 164년에 교서왕과 치천왕이 책봉되어 교서국(膠西國)과 치천국(甾川國)으로 분할 되었는데, 기원전 154년에 교서왕의 난행을 이유로 식읍을 삭감하면서 교서국에서 북해군을 분리해 설치했다. 교서국은 기원전 108년에 교서왕이 단절되어 교서군이 되었다가, 기원전 71년에 고밀왕의 식읍이 되어 고밀군이 되었다. 후한 때인 기원후 37년에 고밀국·치천국과 교동군을 북해군으로 합병했고, 52년에 북해왕의 식읍이 되어 북해국(北海國)으로 개편되었다. 후한 말에 북해왕이 단절되었음에도 206년까지 봉국을 폐하는 조치가 이뤄지지 못했다.
지명 [-154]북해군→[52]북해국→[86]북해군→[90]북해국→[96]북해군→[107]북해국→[206]북해군→[212]북해국→[220]북해군→[222]북해국→[224]북해군→[232]북해국→[233]북해군→[265]북해국
[진]교서군→[-164]교서국(膠西國)→[-108]교서군→[-71]고밀국(高密國)→[37]북해군에 합병
[-164]치천국→[37]북해군에 합병
소속 진(秦)→[한]청주자사부→[서진]청주
치소 [전한]영릉현→[후한]극현→[삼국]평수현
교서군: [진]고밀현
치천국: [전한]극현
전입 [205?]장광군 정현
전출 [195]장무현·순우현·고밀현·창안국·평창현·안구현·이안국→동안군?, [198?]정현·관양현→장광군, [235]동안평현→제국, [서진]정현→장광군 및 주허현·영릉현·극현→서주 동관군
출신 극현: 서간, 등윤
영릉현: 시의
주허현: 병원, 관녕
현 미상: 유정, 손건
봉작 조곤: 북해왕(222~224)
조유(曹蕤): 북해왕(232~233)
사마릉: 북해왕(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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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서군: 고밀현, 평수현, 하밀현, 도창현, 신성현, 순우현, 집현, 고막현 이외 미상
전한 북해군(26현 127,000호 593,159구): 영릉현, 극괴국, 안구현, 집국, 순우현, 익현, 평수현, 극국, 도창현, 평망국, 평적국, 유천국, 수광현, 낙망국, 요국, 짐현, 상독현, 평성국, 밀향국, 양석국, 낙도국, 석향국, 상향국, 신성국, 성향국, 교양국
고밀국(5현 40,531호 192,536구): 고밀현, 창안현, 석천현, 이안현, 성향현
치천국(3현 50,289호 227,031구): 극현, 동안평현, 누향현
영릉현→북해정현(北海亭縣), 안구현→주질현(誅郅縣), 극괴국→상부현(上符縣), 집국→도덕현(道德縣), 익현→탐양현(探陽縣), 유천국→홍목현(弘睦縣), 수광현→익평정현(翼平亭縣), 낙도국→발롱현(拔壟縣), 성향국→석락현(石樂縣)
고밀현→장모국(章牟國), 석천현→양신현(養信縣), 이안현→원정현(原亭縣), 성향현→순성현(順成縣)
극현→유현(兪縣)
후한 북해국(18성 158,641호 853,604구): 극현, 영릉현, 평수현, 도창현, 안구현, 순우현, 평창국, 주허국, 동안평현, 고밀국, 창안국, 이안국, 교동국, 즉묵국, 장무현, 하밀현, 정현, 관양현
서진 북해국(5현 5,000호)[5]: 평수현, 하밀현, 교동현, 즉묵현, 도창현 }}}}}}}}}

6. 성양군(城陽郡)

후한 초기에 폐지되었으나, 198년 조조 여포를 멸망시킨 뒤에 다시 설치했다. 210년 무렵에 원담이 설치했던 동안군을 합병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 [진]성양군→[-178]성양국(城陽國)→[35]성양군, [198]성양군→[269]성양국→[271]성양군
소속 진(秦)→[전한]청주자사부→[37]서주자사부 낭야군에 합병, [198]청주자사부→[서진]청주
치소 [진]거현, [198]동무현
동안군: 평창현?
분합 [195?]동안군→[210?]성양군에 합병→[220?]평창군(平昌郡)→[삼국]성양군에 합병: 북해국 안구현·순우현·평창국·고밀국·창안국·이안국·장무현 및 제국 임구현
전입 [198]동래군 검추국 및 서주자사부 낭야군 동무현·제현·거현·고막현
설치 [서진]이안현
전출 [210?]임구현→서주 동관군, [서진]안구현→서주 동관군
봉작 사마경: 성양왕(26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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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양군: 거현, 양도현, 남무현(南武縣·연혁 미상), 고양현(高陽縣·연혁 미상), 거양현(莒陽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성양국(4현 56,642호 205,784구): 거현, 양도현, 동안현, 여현
성양국거릉군(莒陵郡), 거현→거릉현(莒陵縣), 여현→저선현(著善縣)
서진 성양군(10현 12,000호): 거현, 고막현, 제현, 순우현, 동무현, 고밀현, 장무현, 검추현, 평창현, 창안현 }}}}}}}}}

6.1. 동안군(東安郡)?

『삼국지』에서 199년에 조조 장패를 청주로 보내 제국·북해국·동안군을 격파하게 했다는 기록에서 등장하는 지명이다. 아마도 원담이 195년 이후에 북해상 공융을 쫓아낸 뒤에 제국과 북해국의 일부를 분할해 설치했던 군이라 추측된다. 213년에 구주를 재편한 조치에서 동안군은 언급되어 있지 않기에 그 이전에 폐지되었던 것은 확실하며, 유수가 동안태수를 맡았다는 점을 보면 대략 208년 무렵까지는 유지되었던 것 같다. 동안군이 폐지되면서 원래 제국 소속이던 임구현이 서주 동관군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고, 성양군을 처음 설치할 198년 당시에는 원래 북해국 소속이었던 안구현·순우현·평창국·고밀국·창안국·이안국·장무현은 당시 조조와 원담의 세력 판도로 봤을 때 성양군에 소속될 수 없는 현들이다. 따라서 원담이 195년 무렵에 북해국 7현과 제국 1현을 분할해 동안군을 설치했으며, 조조가 210년 무렵에 이를 폐지하여 각각 성양군과 동관군 소속이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판단된다.

220년대에 조비가 성양군을 분할해 이 일대에서 잠시 평창군(平昌郡)을 운영했었고, 손례가 태수를 역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언제 설치하고 언제 폐지하였는지와 어느 현들이 소속되었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7. 동래군(東萊郡)

진(秦)나라의 교동군(膠東郡)이 모체로, 기원전 153년에 교동왕이 책봉되었을 때 교동군이 분할되어 일부는 교동국으로 개편되고 일부는 동래군으로 독립했는데, 후한 초기에 교동국이 북해국으로 합병되었다. 190년 이후 요동의 공손도가 동래군의 몇 현을 점거하고 영주자사부(營州刺史部)를 설치했는데, 205년에 장료가 청주에서 요동의 유의를 격파하면서 그 운영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지명 [-153]동래군
[진]교동군→[-164]교동국→[-154]교동군→[-153]교동국→[-150]교동군→[-148]교동국→[37]북해군에 합병
소속 진(秦)→[한]청주자사부→[서진]청주
치소 [전한]액현→[후한]황현→[서진]액현
교동군: [진]즉묵현
장광군: [198?]장광현, [277]불기현
분합 [190?]영주자사부→[205]멸망→[서진]동모군?: 동모현·모평현·갈로현
[198]장광군→[205?]동래군에 합병→[277]장광군 재설치: 장광현·창양현·불기현 및 북해군 정현·관양현
전입 [서진]정현(장광군)
전출 [198]검추국→성양군, [205?]정현→북해군
출신 황현: 태사자
곡성현: 왕기
모평현: 유대, 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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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군: 즉묵현, 창양현, 야현, 황현, 수현, 동모현, 창무현, 임구현, 위기현 이외 미상
전한 동래군(17현 103,292호 502,693구): 액현, 수현, 평도현, 황현, 임구현, 곡성현, 모평현, 동모현, 현현, 육리현, 창양현, 불야현, 당리현, 노향현, 양락국, 양석현, 서향현
교동국(8현 70,022호 323,331구): 즉묵현, 창무현, 하밀현, 장무현, 욱질현, 정현, 관양현, 추로현
액현→액통현(掖通縣), 평도현→이로현(利盧縣), 황현→의모현(意母縣), 임구현→감구현(監胊縣), 동모현→홍덕현(弘德縣), 모평현→망리현(望利縣), 창양현→숙경정현(夙敬亭縣), 불야현→숙야현(夙夜縣), 당리현→동래정현(東萊亭縣), 양락국→연락현(延樂縣), 양석현→식명현(識命縣)
교동국욱질군(郁秩郡), 즉묵현→즉선현(卽善縣), 장무현→효무현(曉武縣), 추로현→시사현(始斯縣)
후한 동래군(13성 104,297호 484,393구): 황현, 모평현, 현국, 곡성국, 액국, 당리국, 동모국, 창양현, 노향현, 장광현, 검추국, 갈로현, 불기국
서진 동래국(6현 6,500호): 액현, 당리현, 노향현, 곡성현, 황현, 현현
장광군(3현 4,500호): 불기현, 장광현, 정현 }}}}}}}}}

7.1. 장광군(長廣郡)

정확한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조 하기를 장광태수로 임명해 보낼 수 있던 여건이 마련된 시점은 198년에 여포가 멸망한 이후의 일이었다. 이후 199년에 조조가 적극적으로 원담이 장악하고 있던 청주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장광군은 조조가 원담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동래군 남부 일대를 수습하여 본격적으로 청주에 진출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 여겨진다. 원담이 멸망한 205년 무렵에 장광군을 폐지하여 동래군에 합병했다. 서진 때인 277년에 다시 장광군이 설치되었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서진 때 창양현·관양현이 폐지되었다.

후한 말의 장광군에 정확히 어떤 현들이 소속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서진 때의 장광군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동래군 장광현·창양현·불기현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3현과 인접해 있는 북해국 관양현도 그 입지 여건상 장광군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관양현은 위나라 때에는 동래군에 소속되었는데, 아마 장광군이 폐지되어 동래군에 합병되면서 함께 동래군으로 유입된 것이라 판단된다.

7.2. 영주자사부(營州刺史部)

190년 무렵 요동의 공손도는 동래군의 몇 현을 점령하고 영주자사를 두었다고 한다. 205년에 장료가 요동의 유의를 격파해 청주를 평정했다고 하는데, 유의가 공손도가 임명했던 영주자사였는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이에 따라 공손씨 일족의 영주자사부 운영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산둥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되는 현들인 동모현·모평현·갈로현 3현은 삼국시대와 서진 때까지 아예 존재 여부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데, 공손씨 일족이 멸망한 이후로 뜬금없이 요동군에서 난민이 발생해 청주 지방으로 이주해 온 사례가 기록으로 남은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다. 이 3현의 연혁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원인은 아무래도 공손도의 영주자사부 운영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사가 태수의 상관이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영주자사가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사는 태수의 상관이 아니며, 태수와 달리 오히려 독자적으로 징병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관직이기에, 대형 군벌 중에는 측근이나 자신의 예하에 있던 군소 군벌을 이렇게 자사로 임명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서주목 도겸이 유비를 예주자사로 임명해 소패에 주둔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

『진서』 지리지에 3현의 연혁을 찾아볼 수는 없는데, 회제 본기 영가 원년(307) 기록에선 동모태수(東牟太守)가 등장하고 있어, 지리지에서 동모군(東牟郡)이 누락되었고 동모현과 모평현이 그 소속이라 여기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 동모군의 실존여부를 교차검증해 줄 만한 자료가 없기에, 보통은 '동래태수'의 오기(誤記)로 여기고 있는 편이다.

8. 같이보기

파일:실제 지도 후한 13주.png

[1] 207년에 황건적에게 피살당한 아버지 유운(劉贇)의 작위를 계승함. [2] 『진서』 지리지에는 촉한 평정 이후에 제수(濟水)와 하수(河水) 이북의 호족들을 옮겨가 제민군(濟岷郡)으로 만들었기에, 『태강지리지』에 제남군은 보이지 않아 상세하지 않다고 전한다. 그러나 제민군은 영가의 난 이후에 등장하는 지명이며, 『태강지리지』에 제남군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283년에 제남군을 폐지해 제군에 합병시키려 했다가 그해에 조치를 취소했기 때문이다. 『진서』 지리지에는 마찬가지로 북해국이 누락되어 있고 제남군에는 5현 5천 호에 평수현·하밀현·교동현·즉묵현·축아현 5현이 소속되었다고 전하는데, 이 가운데 축아현만 제남군에 속하고 나머지 4현은 북해국 소속이며, 호구 수는 북해국 정보로 판단된다. [3] 『진서』 지리지는 이익현(利益縣)으로 오기(誤記)했다. 이를 이현과 익현으로 나눠보아 제국 익도현도 낙안국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익도현은 낙안국과 인접하지 않는 현이므로 옳지 않다. [4] 『진서』 지리지는 추현(鄒縣)으로 오기했다. [5] 『진서』 지리지에는 북해국이 통째로 누락되어 있다. 호구 수는 제남군으로 소개되었으나, 북해국 정보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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