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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9:00:12

원담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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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181818,#e5e5e5
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조조 , 조등 왕준, 조비
3권 「명제기(明帝紀)」 4권 「삼소제기(三少帝紀)」
조예 , 학소 진랑 맹타, 조방 , 장특, · 조모 · 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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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181818,#e5e5e5
5권 「후비전(后妃傳)」
무선황후 · 문소황후 · 문덕황후 · 명도황후 · 명원황후
6권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7권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8권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동탁 , 이각 곽사 마등 한수,
원소 , 저수 전풍 원담 원희 원상, · 원술
유표 , 유종 부손 괴월 한숭 채모,
여포 , 장막 진궁 진등, · 장홍 공손찬 , 유우, · 도겸 · 장양
공손도 , 공손연,
장연 · 장수 · 장로
9권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하후돈 , 하후무 한호 사환, · 하후연 , 하후패, · 조인 , 조순, · 조홍 · 조휴 , 조조(肇),
조진 , 조상 이승 환범 하안, · 하후상 , 하후현 이풍 허윤,
순욱 , 순의 예형, · 순유 · 가후
11권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12권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13권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원환 · 장범 , 장승, · 양무 · 국연
전주 · 왕수 · 병원 · 관녕 , 왕렬 장천 호소,
최염 , 공융 허유 누규, · 모개 · 서혁
하기 · 형옹 · 포훈 · 사마지
종요 , 종육, · 화흠 · 왕랑 , 왕숙,
14권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15권 「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정욱 , 정효, · 곽가 · 동소
유엽 , 유도, · 장제 · 유방 , 손자,
유복 , 유정, · 사마랑 · 양습 , 왕사,
장기 , 유초 장집, · 온회 , 맹건, · 가규 , 가충,
임준 · 소칙 · 두기(畿) , 두서 악상,
정혼 , 정태, · 창자 , 안비 영호소,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 주령, 이전 · 이통 · 장패 , 손관, · 문빙 · 여건 , 왕상,
허저 · 전위 · 방덕 · 방육 , 조아, ·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 조거 · 조우 · 조림(林) · 조곤 · 조현 · 조간 · 조표 · 조정 · 조림(霖)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 시묘, · 양준 · 두습 · 조엄 · 배잠 , 배수,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 신헌영, · 양부 , 왕이, · 고당륭 ,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서막 · 호질 , 호위, · 왕창 · 왕기 왕릉 , 선고 영호우, · 관구검 , 문흠, · 제갈탄 , 당자, · 등애 , 주태, · 종회 , 장창포 왕필,
29권 「방기전(方技傳)」
화타 · 두기(夔) ,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 · 선비 , 가비능, · 부여 · 고구려 ·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bgcolor=#fff> 관련 틀:
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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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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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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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유달
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유조 · 유륭 유호 유보 · 유병 · 유찬
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유협
10권 「황후기(皇后紀)」
곽성통 · 음여화 · 명덕황후 · 장덕황후 · 효화황후 · 등수 · 염희 · 양납 · 양여영 · 등맹녀 · 두묘 · 효인황후 · 효령황후 · 영사황후 · 복수 · 조절 · 무양장공주 · 열양공주 · 관도공주 · 육양공주 · 역읍공주 · 획가장공주 · 평양공주 · 융려공주 · 평지공주 · 심수공주 · 평고공주 · 준의공주 · 무안공주 · 노양공주 · 낙평공주 · 성안공주 · 무덕장공주 · 평읍공주 · 음안공주 · 수무장공주 · 공읍공주 · 임영공주 · 문희공주 · 무양장공주 · 관군장공주 · 여양장공주 · 양안장공주 · 영음장공주 · 양적장공주 · 만년공주
※ 사마표의 속한서는 志에 해당. 후한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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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3><tablewidth=100%><tablebgcolor=#a11><width=50%> 11권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3><width=50%> 12권 「왕유장이팽노열전(王劉張李彭盧列傳)」 ||
유현 · 유분자 왕창 · 유영 · 방맹 · 장보 · 왕굉 · 이헌 · 팽총 · 노방
13권 「외효공손술열전(隗囂公孫述列傳)」 14권 「종실사왕삼후열전(宗室四王三侯列傳)」
외효 · 공손술 유인 · 유량 · 유지 · 유흡 · 유사 · 유순 · 유가
15권 「이왕등내열전(李王鄧來列傳)」 16권 「등구열전(鄧寇列傳)」 17권 「풍잠가열전(馮岑賈列傳)」
이통 · 왕상 · 등신 · 내흡 등우 · 구순 풍이 · 잠팽 · 가복
18권 「오갑진장전(吳蓋陳臧列傳)」 19권 「경엄열전(耿弇列傳)」 20권 「요기왕패채준열전(銚期王霸祭遵列傳)」
오한 · 갑연 · 진준 · 장궁 경엄 요기 · 왕패 · 채준
21권 「임이만비유경열전(任李萬邳劉耿列傳)」 22권 「주경왕두마유부견마열전(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
임광 · 이충 · 만수 · 비동 · 유식 · 경순 주우 · 경단 · 왕량 · 두무 · 마성 · 유륭 · 부준 · 견담 · 마무
23권 「두융열전(竇融列傳)」 24권 「마원열전(馬援列傳)」 25권 「탁노위유열전(卓魯魏劉列傳傳)」
두융 , 두헌, 마원 탁무 · 노공 · 위패 · 유관
26권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27권 「선장이왕두곽오승정조열전(宣張二王杜郭吳承鄭趙列傳)」
복담 · 후패 · 송홍, 송유, · 채무 · 풍근 · 조희 · 모융 · 위표 선병 · 장담 · 왕담 · 왕량 · 두림 · 곽단 · 오량 · 승궁 · 정균 · 조전, 조계,
28권 「환담풍연열전(桓譚馮衍列傳)」 29권 「신도강포영질운열전(申屠剛鮑永郅惲列傳)」 30권 「소경양후낭의양해열전(蘇竟楊厚郞顗襄楷列傳)」
환담 · 풍연 신도강 · 포영, 포욱, · 질운 소경 · 양후 · 낭의 · 양해
31권 「곽두공장염왕소양가육열전(郭杜孔張廉王蘇羊賈陸列傳)」 32권 「번굉음식열전(樊宏陰識列傳)」
곽급 · 두시 · 공분 · 장감 · 염범 · 왕당 · 소장 · 양속 · 가종 · 육강 범굉 · 음식
33권 「주풍우정주열전(朱馮虞鄭周列傳)」 34권 「양통열전(梁統列傳)」 35권 「장조정열전(張曹鄭列傳)」
주부 · 풍방, 풍석, , 유희, · 우연 · 정홍 · 주장 양통 장순 · 조포 · 정현
36권 「정범진가장열전(鄭范陳賈張列傳)」 37권 「환영정홍열전(桓榮丁鴻列傳)」 38권 「장법등풍탁양열전(張法滕馮度楊列傳)」
정흥 · 범승 · 진원 · 가규 · 장패 환영, 환언, , 주총, · 정홍 장종 · 법웅 · 등무 · 풍곤 · 도상 · 양선
39권 「유조순우강유주조열전(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 40권 「반표열전(班彪列傳)」
유평 · 조효 · 순우공 · 강혁 · 유반, 유개, · 주반 · 조자 반표
41권 「제오종리송한열전(第五鍾離宋寒列傳)」 42권 「광무십왕열전(光武十王列傳)」
제오륜 · 종리의 · 송균 · 한랑 유강 · 유보 · 유강 · 유연 · 유언 · 유영 · 유창 · 유형 · 유형 · 유경
43권 「주악하열전(朱樂何列傳)」 44권 「등장서장호열전(鄧張徐張胡列傳)」 45권 「원장한주열전(袁張韓周列傳)」
주휘 · 악회 · 하창 등표 · 장우 · 서방 · 장민 · 호광 원안 · 장포 · 한릉 · 주영
46권 「곽진열전(郭陳列傳)」 47권 「반양열전(班梁列傳)」
곽궁 · 진총 반초 · 양근
48권 「양이적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 49권 「왕충왕부중장통열전(王充王符仲長統列傳)」
양종 · 이법 · 적포 · 응봉 · 곽서 · 원연 · 서구 왕충 · 왕부 · 중장통
50권 「명제팔왕열전(明帝八王列傳)」 51권 「이진방진교열전(李陳龐陳橋列傳)」
유건 · 유선 · 유공 · 유당 · 유연 · 유창 · 유병 · 유장 이순 · 진선 · 방참, 시연, · 진귀 · 교현
52권 「최인전(崔駰傳)」 53권 「주황서강신도열전(周黃徐姜申屠列傳)」 54권 「양진열전(楊震列傳)」
최인 주섭 · 황헌 · 서섭 · 강굉 · 신도반 양진, 사마포, , 마영,
55권 「장제팔왕열전(章帝八王列傳)」
유항 · 유전 · 유경 · 유수 · 유개(劉開) · 유숙 · 유만세 · 유승
56권 「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 57권 「두난유이유사열전(杜欒劉李劉謝列傳)」 58권 「우부갑장열전(虞傅蓋臧列傳)」
장호 · 왕공 · 충고 · 진구 두근 · 난파 · 유도 · 이운 · 유유 · 사필 우후 · 부섭 · 갑훈 · 장홍
59권 「장형열전(張衡列傳)」 60권 「마융채옹열전(馬融蔡邕列傳)」 61권 「좌주황열전(左周黃傳)」
장형 마융 · 채옹 좌웅 · 주거 · 황경
62권 「순한종진열전(荀韓鍾陳列傳)」 63권 「이두열전(李杜列傳)」 64권 「오연사노조열전(吳延史盧趙列傳)」
순숙 · 한소 · 종호 · 진식 이고, 이섭, , 조준, · 두교 오우 · 연독 · 사필 · 노식 · 조기
65권 「황보장단열전(皇甫張段列)」 66권 「진왕열전(陳王列傳)」
황보규 · 장환 · 단경 진번 · 왕윤
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숙 · 이응, 이수, · 두밀 · 유우 · 위영 · 하복 · 종자 · 파숙 · 범방 · 윤훈, 윤목, · 채연 · 양척 · 장검 · 진상 · 공욱 · 원강 · 유유 · 가표 · 하옹
68권 「곽부허열전(郭符許列傳)」 69권 「두하열전(竇何列傳)」 70권 「정공순열전(鄭孔荀列傳)」
곽태 · 부융 · 허소 두무 · 하진 정태 · 공융 · 순욱
71권 「황보숭주준열전(皇甫嵩朱儁列傳)」 72권 「동탁열전(董卓列傳)」 73권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
황보숭 · 주준 동탁 유우 · 공손찬 · 도겸
74권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75권 「유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원소 , 원담 · 원상, · 유표 유언 · 원술 · 여포
76권 「순리열전(循吏列傳)」
위립 · 임연 · 왕경 · 진원 · 왕환 · 허형 · 맹상 · 제오방 · 유구, 유광, · 유총 · 구람 · 동회
77권 「혹리열전(酷吏列傳)」
동선 · 번엽 · 이장 · 주우 · 황창 · 양구 · 왕길
78권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 · 채륜 · 손정 · 조등 · 선초 · 서황 · 구원 · 좌관 · 당형 · 후람 · 조절 · 여강 · 장양 · 조충
79권 「유림열전(儒林列傳)」
유곤 · 규단 · 임안 · 양정 · 장흥 · 대빙 · 손기 · 구양흡 · 모장 · 송등 · 장순 · 윤민 · 주방 · 공희 · 양륜 · 고후 · 포함 · 위응 · 복공 · 임말 · 경란 · 설한 · 두무 · 소순 · 양인 · 조엽 · 위굉 · 동균 · 정공 · 주택 · 손감 · 종흥 · 견우 · 누망 · 정증 · 장현 · 이육 · 하휴 · 복건 · 영용 · 사해 · 허신 · 채현
80권 「문원열전(文苑列傳)」
두독 · 왕륭 · 하공 · 부의 · 황향 · 유의 · 이우 · 소순 · 유진 · 갈공 · 왕일 · 최기 · 변소 · 장승 · 조일 · 유량 · 변양 · 역염 · 후근 · 고표 · 장초 · 예형
81권 「독행열전(獨行列傳)」
초현 · 이업 · 유무 · 온서 · 팽수 · 삭로방 · 주가 · 범식 · 이선 · 왕돈 · 장무 · 육속 · 대봉 · 이충 · 무융 · 진중 · 뇌의 · 범염 · 대취 · 조포 · 상허 · 양보 · 유익 · 왕열
82권 「방술열전(方術列傳)」
임문공 · 곽헌 · 허양 · 고획 · 왕교 · 사이오 · 양유 · 이남 · 이합 · 단예 · 요부 · 절상 · 번영 · 당단 · 공사목 · 허만 · 조언 · 번지장 · 선양 · 한열 · 동부 · 곽옥 · 화타 · 서등 · 비장방 · 소자훈 · 유근 · 좌자 · 허자훈 · 해노고 · 장초 · 왕진 · 학맹절 · 유화평
83권 「일민열전(逸民列傳)」
상장 · 봉맹 · 주당 · 왕패 · 엄광 · 정단 · 양홍 · 고봉 · 대동 · 한강 · 교신 · 대량 · 법진 · 한음노보 · 진류노보 · 방공
84권 「열녀전(列女傳)」
환소군 · 조아(趙阿) · 반소 · 이목강 · 조아(曹娥) · 여영 · 마륜 · 조아(趙娥) · 순채 · 조원강 · 숙선웅 · 채염
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86권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 87권 「서강전(西羌傳)」
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 남만 · 서남이 서강
88권 「서역전(西域傳)」
구미국 · 우전국 · 서야국 · 자합국 · 덕약국 · 안식국 · 대진국 · 대월지국 · 고부국 · 천축국 · 동리국 · 율과국 · 엄국 · 엄채국 · 사거국 · 소륵국 · 언기국 · 포류국 · 이지국 · 동저미국
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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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 최종직위 청주자사(靑州刺史)
(袁)
(譚)
현사(顯思)
아버지 원소(袁紹)
생몰연도 ?년 ~ 205년
고향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망지 기주(冀州) 발해군(勃海郡) 남피현(南皮縣)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어린 시절2.2. 청주 정복2.3. 청주 통치2.4. 장자 폐출2.5. 실정(失政)의 반복2.6. 후계자 쟁탈전2.7. 조조와 결탁하다2.8. 최후
3. 삼국지연의4. 평가5.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장남이며 는 현사(顯思)다.

청주(靑州)[1]를 다스렸으며 군사적 활약이 상당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였다. 결국 원가의 멸망에 단단히 한몫한 인물이다.

2. 정사 삼국지

2.1. 어린 시절

<무제기>에 주석으로 인용된 《위서》에 따르면 190년 당시 원소의 두 아들이 장성해 있었다고 하는데, 정황상 원소의 두 아들은 원담과 원희로 보인다. 당시 관례가 보통 15세 전후에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원담과 원희는 190년의 시점에서 최소 15세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유비에게서 무재로 천거받은 바 있는데 193년 초, 원소와 공손찬이 일시적으로 휴전했을 때 공손찬의 휘하로 있던 유비가 원담을 천거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원담은 이때 20대 초반의 나이가 아니었나 추정되며, 얼마 후 청주 자사로 부임해 동방 문제를 담당한다.

2.2. 청주 정복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구주춘추》에서는 원담이 본디 도독이었을 뿐 자사는 되지 못했으나 훗날 조조가 자사로 천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원담은 청주로 보임할 당시에는 자사가 아니라 도독의 직함으로 불려졌고 아마 196년 무렵 헌제를 옹립한 조조가 정식으로 원담을 청주자사로 천거한 것으로 보인다.

본디 원소는 청주 자사 초화가 죽자 후임 청주자사로 자신과 가까웠던 장홍을 보냈고 장홍이 2년에 걸쳐 청주를 다스리며 도적떼들이 모두 도망갔기에 원소가 그 능력에 감탄하면서 동군 태수로 전임시켰다고 <장홍전>에서는 적고 있으나, 《 후한서》 <공손찬전>에서는 평원국을 접수한 공손찬이 청주자사로 삼았던 전해를 보내 제국(齊國) 일대를 점령시키자 원소가 군세를 보내 2년에 걸쳐 싸웠으나 전황이 안 좋았다가 원담이 파견되자 전해가 패한 것으로 나타나며, 《구주춘추》에서 이어지는 서술에 따르면 당시 청주에서 원소의 세력은 아주 미미하여 원담은 기주의 동쪽 끝 접경지역인 평원국 서부의 일부만을 점유할 뿐이었기에 장홍의 활약은 아마 청주에 교두보를 확보해 전해나 황건적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그쳤던 듯 하다.

새로 부임한 원담은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는지 곧 전해를 격파하고 청주에서 공손찬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또한 북해상 공융[2]을 격파해 그 세력을 멸망시켰고, 청주에 난립하고 있던 여러 군소 군벌들과 황건적 잔당 무리도 성공적으로 흡수해[3] 오랫동안 헬게이트 상태였던 청주를 통일했고, 백성들의 열렬한 추대를 받아 그 위세가 바다까지 빛났다.[4]

원담이 청주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비중있게 남은 개별적인 전투 기록은 전무하나 193년 시점에서 기주와 바로 맞닿아 있던 서부 경계지역 일부를 점유하는 데 그쳤던 원소의 청주 내 영향력이 원담의 부임 이후 급격히 팽창하여 196년에는 동부 해안가까지 세력을 떨치며 청주 전역을 커버하게 되었다는 점과 원담이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서술에서도 보이듯 청주 평정의 과정에서 원담은 연승가도를 달리며 상당한 군사적 명성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위세는 곧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며, 원담의 전성기는 여기까지였다.

2.3. 청주 통치

청주는 본디 전국시대 강대국 제나라의 영역이었고, 후한 시대에도 부유하고 강하다는 인식이 있던 지방이었으나 황건적의 발호와 청주자사 초화의 사망으로 역내 공권력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황건적 군벌들과 해적 혹은 '호걸' 이라 자처하던 자경단 기반의 소군벌들이 난립하는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주인이 없었던 백성들이 원담을 열렬히 환영하며 추대했다는 구주춘추의 기록은 청주 여론이 전해와 공융이 자칭하던 청주자사의 직함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만, 원담이 전해와 공융을 격파하며 청주 전역을 화려하게 장악했던 만큼 청주에 다시 질서를 가져와 주길 바라는 기대가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담의 통치는 군사적 활약상과 달리 대단히 무능했고 문제가 많았다.

《구주춘추》에 따르면 원담은 천성이 방자하며 사치스럽고 호색한인 데다 농사일의 어려움을 모르고 달콤한 아첨만 좋아해 주위에는 소인배만이 들끓었다. 그 결과 1만 호가 넘는 현이 있어도 세금은 그 3할에도 미치지 못하고 심지어 호적에 오른 가구는 겨우 수백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현지의 호족들이 경쟁적으로 토지겸병을 벌여 호적에 올라가는 자영농을 몰락시키고 자신의 장원에 소작인으로 편입시키는데도 '흥청망청 놀기 좋아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모르고 달콤한 아첨만 좋아하는' 원담은 호족들이 눈앞에서 아첨하며 적당히 비위만 맞춰주면 여기에 도취되어 문제의 심각성도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는 소리고 호족들은 원담을 손쉬운 호구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당연히 병역법도 엉망이라 제대로 된 현역 대상자들은 모두 현지 토호들이 먼저 자기 사병으로 뽑아가거나 뇌물로 병역을 기피하는 바람에 병사로 부적절한 인력이나마 겨우 징집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번엔 아예 군사를 풀어 짐승떼를 사냥하듯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징집했다고 한다.

군인들의 배경이 이러니 군기도 빠질대로 빠져 도적떼를 소탕하는 영이 내려져 군대가 나오자 군사들이 전야를 노략질했고, 따로 호족들의 제대로 된 군대를 소집해도 원담을 만만하게 본 호족들은 기일에 제때 맞춰서 오는 법이 없었다. 이는 군법에 따르면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항임에도 호족들은 그로 인해 원담에게 처벌받는 일이 없었고 아무 걱정없이 편안히 지냈다.

그래도 명사들을 공경하여 능력이 알려진 현사들을 널리 초빙했지만 이런 답이 없는 상황들을 보고 현자들은 원담에게 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건 아니라 왕수와 같은 유능한 인재들도 있긴 있었으나, 원담 본인의 용인술이 형편없어 소인배들을 신임했을 뿐 제대로 된 인재는 중용되지 못하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신세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청주를 화려하게 정복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청주의 호족 세력에 지나치게 영합하고 일반 농민들의 민생을 신경쓰지 않았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보다는 호족들의 비위만 맞추는 정책을 거듭하다보니, 오히려 호족 세력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결국 청주의 민생은 물론 원담 자신이 지식인들의 신뢰를 잃고 행정력도 추락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하기전>의 서술에 따르면 원담은 청주에 난립하던 황건적과 호걸들.. 즉 청주의 군소 군벌세력들을 포섭하는데 대단히 적극적이었는데, 원담의 부하들 중 곽조 관승은 아예 해적 출신이었으며, 장패전과 하후연전에서는 원담이 조조에게 패사할 즈음 원담의 근거지였던 평원과 인접한 제남과 낙안에서 황건적 무리들이 봉기해 관리들을 죽이다 하후연과 장패에게 토벌되는 기록이 나타나고, 장홍전에는 원담의 전임 청주자사였던 장홍이 훗날 원소와 틀어져서 원소의 공격을 받을때 동향인 진림에게 흑산적과 연합한 것을 비난당하자 장연은 조정에서 정식으로 관직이라도 받았지만 원소는 황건적 같은 잡배들과 야합하지 않았냐며 편지를 통해 응수한다.

이러한 정황들을 감안했을때 원담이 영합하기 위해 힘썼던 청주의 호족세력들이란 심지어 전통적인 사인층조차 아니었으며, 청주의 공권력을 붕괴시킨 뒤 눌러앉은 황건적계 군벌들이나 혹은 공권력 붕괴를 틈타 자경단을 기반으로 '호걸'을 자처하며 지역사회의 리더로 떠오른 신흥 군벌들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무정부 상태에서 폭력에 기반해 지역사회 내 패왕으로 떠오른 깡패들의 입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정치에 끌어들이며 형님동생 하던 원담의 행보는 아버지인 원소보다는 차라리 숙부인 원술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2.4. 장자 폐출

무능한 정치로 원소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는지 정식 청주자사 임명을 전후해 원소의 형의 후사를 잇게 되면서 사실상 원가 후계자 레이스에서 일찌감치 리타이어되고 말았다는 의견이 한국에서는 대세가 되었다. 다만 이것이 무능한 정치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원소전에 따르면 원소가 원담을 청주로 보내려 하자 저수가 "이것은 필히 재앙의 시초가 될 것입니다”라며 반대했다고 하니, 원담이 청주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후계자 레이스에서 탈락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원소의 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는데, 원술의 친형으로 동탁에게 주살당해 대가 끊긴 원기(袁基)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기는 원술의 친형이니 원소에겐 이복형에 해당하며, 원기가 원소의 종형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기는 분명히 원소보다 나이가 많다. 원소가 원성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므로, 호적상 원기와 원소는 사촌 관계가 되기 때문에 종형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원소의 막내아들 사랑과 원담의 삽질이 맞물린 결과, 원담은 장자인데도 불구하고 호적상 당숙부가 되어 버린 아버지 원소의 관작을 승계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폐출되었다고 해서 후계자에서 탈락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의견도 있다. 오군의 육씨 가문을 예로 들면, 육강이 손책에게 박살날 때, 아들인 육적이 너무 어려서 그나마 연장자인 육손이 가주 역할을 이어받았다. 육강은 육손의 작은할아버지이다. 육손은 육적보다 촌수로 아랫사람인데 이어받은 것을 보면, 원담이 후계자로서의 서열이 낮아진 거지, 아예 탈락했다고는 할 수 없는 부분. 아예 탈락했으면 아무리 주변에서 밀어줬다고는 해도 세력을 말아먹을 정도로 후계자 자리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폐출된 뒤 원소는 원담을 조카라고 불렀고 원담은 원소를 숙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폐출되었다'는 부분 때문에 다소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얘기 자체가 그다지 잘 다루어지지도 않았지만, 이를 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의견이 갈리는 상태다.

저수는 원담을 폐출하고 청주자사로 보낸 원소의 행동에 대해 토끼가 길거리를 뛰어다니면 온 사람이 뒤쫓으나 한 사람이 토끼를 붙잡고 있으면 탐하는 자들이 그만두니 이 점을 생각하라고 간언했다. 이는 후계 구도를 확고히 하려면 경쟁자들에게 기반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진언이었으나, 원소는 오히려 4명의 아이들(원담, 원희, 원상, 고간)로 제각기 주를 다스리게 해 기량을 살펴보겠다는 이유를 대며 저수의 진언을 일축했고, 청주의 원담을 포함해 고간 원희 병주, 유주로 나가 제각기 주를 다스리게 된다.

거기에 이미 원상으로 마음을 정해 분쟁의 소지가 있을 원담을 폐출시켜 놓곤 지역적 기반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이었는데, 의심이 많아 자식과 조카들만 임용한다는 곽가의 평이나 이 무렵부터 저수 등 호족 계열의 인사들과 대립구도가 심화되던 정황을 봤을 때, 원소는 일단 족벌 중심의 독재체제로 각 주의 통제력을 강화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 후계 분쟁의 소지는 차후에 장성한 원상의 권위를 강화함으로서 해결할 심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저수는 이를 두고 '재앙이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라 말하고 다녔다고 하나, 원소는 이후로도 저수를 철저히 무시하며 점차 실각시킨다.

2.5. 실정(失政)의 반복

원소가 원담을 폐출시키고도 청주자사로 기반을 마련하게 한 것은 자식들의 충성심을 이용한 권력강화의 목적일 가능성이 크다.

청주자사로 있으면서 원술을 불러들이고, 유비를 맞아들이고, 정현을 초청하는 등 당대에 굵직한 인재 영입에 열을 올렸으며 관도전에도 원소를 따라 직접 종군하는 등 뭔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결과적으론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원소의 혈족으로 각 주를 장악하고 있던 고간, 원희는 물론, 원소를 제외한 원소세력 인사 전원을 통틀어서도 원담만큼 적극적으로 대외적인 행적이 보이는 인물은 없다.

2.6. 후계자 쟁탈전

결과적으로 하는 짓마다 사고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원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총애는 원담에게 향하지 않는다. 원소는 여전히 삼남(혹은 막내아들) 원상을 총애해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본격적인 후계자 작업에 들어가기 전인 202년 5월에 병사한다.[7]

이 원소의 병사가 원담에게는 큰 기회가 되었는데, 당시 원상의 나이가 워낙 어렸기 때문에 기주 내에서는 원담과 야합하고 있던 곽도 신평을 중심으로 나이나 경력면에서 앞서는(30세 전후) 원담이 옹립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원담 또한 원소의 뒤를 잇기 위해 청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으로 향했으나 도착하기 전에 원담과 사이가 나쁘던 심배 등이 선수를 쳐서 정권을 장악하고 원상을 옹립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심배 등의 유서조작 여부는 미지수다.

원담은 이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업 근교에 주둔시키며 원소의 첫 작위인 거기장군을 자처하는 등 원상의 승계에 불복했지만, 마침 조조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원상과 화해하고 조조를 물리쳤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봉기는 끔살당했다. 이때 원담은 퇴각하는 조조를 추격해 습격하면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원상은 이를 거절했고, 또한 원담에 대한 군사와 무기의 지원을 중단했다.

군사지원을 중단한 원상의 의도인 즉, 공연히 욕심부리지 말고 청주로 돌아가란 소리다. 원담으로 인해 크게 위험을 겪었던 원상으로서는 당연한 처사였지만, 후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원담으로서는 반강제로 내쫓기는 격이니 당연히 대노할 수밖에 없었다.

원담은 이에 워낙 대노한 데다 마침 곽도, 신평의 부추김[8]을 듣고 원상을 급습하지만 오히려 대패하여 남피로 도망간다.

이후로도 원상에 대한 적대를 멈추지 않아 다시 군사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백성들을 워낙 쥐어짜서 그렇잖아도 명분 없는 싸움에 더욱 명분을 잃었고 청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원담세력 내부에서도 곽도, 신평을 죽여버리고 원상과 화해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가 된다. 원담은 이를 모두 무시하고 다시 원상을 공격했으나 끝내 여기서도 거하게 털려버린다.

2.7. 조조와 결탁하다

완전히 대세가 기울어 원상에게 포위되자, 곽도의 계략으로 조조에게 항복하며 조조를 재차 하북으로 불러들이고, 함께 원상을 공격해 기주 내의 원상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켰으나, 조조의 업성 접수와 원상의 패퇴를 틈타 감릉, 하간, 안평, 발해, 중산 기주의 5개 군국을 점령하는 등 세력 확대에 매진하면서 야욕을 드러내자 결국 조조에게 공격을 받는다.

204년 12월, 원담은 조조가 자신을 치러 온다는 말을 듣고 평원에서 나와 용주[9]에 주둔하며 영격할 태세를 취하나 막상 조조가 자신의 군문 앞에 진을 치자 응전하지 않고, 밤중에 달아나 남피까지 이르러서는 그곳에 다시 진을 치고 주둔한다.

이듬해인 205년 1월, 남피에 도착한 조조와 싸워 한 번은 조조를 격파해 철수까지 고려하게 만들지만 이어진 전투에서 격전 끝에 패하고 목숨을 잃는다.

조조가 온다는 말에 용주에 주둔하며 폼을 잡다가 막상 조조가 오자마자 남피로 달아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 후한서》엔 원담이 남피에서 조조와 싸울 때 군대를 집결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표현이 있는데, 원담의 조직관리능력이 형편없어 따로 부하들의 군대를 소집했을때 기일에 맞춰서 제대로 도착하는 법이 없었다는 구주춘추의 서술이나 원담이 죽은 직후에 도착해서 통곡하던 왕수의 예를 봤을 때 단기간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전력이 각지로 분산되었기에 합류를 기다렸지만 군대 소집이 계산보다 늦어지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2.8. 최후

후한서》 <원소열전>에는 원담의 마지막 모습을 좀 더 비참하게 묘사하였다. 패배한 원담은 말을 타고 도주하다가 낙마했는데, 추격병을 다 따돌렸다고 생각했으나 유독 집요하게 쫓던 한 사람이 있어 원담에게 이르렀다. 원담은 추격병에게 "나는 너를 부귀하게 해줄 수도 있다."면서 목숨을 구걸했으나, 추격병은 이를 완전히 무시해서 원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과 머리를 분리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원담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호표기를 통솔하던 조순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정확히는 조순이 아니라, 조순이 통솔하던 호표기 대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호표기의 역대 지휘관이 전원 조씨라는 점도 있고, 마침 조조의 하북 평정 무렵부터 조씨, 하후씨 2세대의 인물들도 대거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정사를 참고하는 판본에서는 이들의 임팩트있는 첫 등장을 위해 원담을 칼밥으로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담의 일족은 몰살되었고, 원담의 수급은 감옥문에 내걸렸다. 하지만 뒤늦게 달려온 왕수(王修)가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담의 수급 앞에서 곡을 하고 조조에게 원담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청원하였으며 조조가 이를 허락하여 겨우 매장은 될 수 있었다. 왕수의 절의를 높이 평가한 조조는 왕수를 등용하였고, 이후 왕수는 조조 아래에서 위군태수, 대사농 중서령 등의 벼슬을 했다.

3. 삼국지연의

부친 원소는 "성질이 급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며 평소 별로 좋지 않게 평가했고, 원소의 평가대로 성질이 급해 사고를 저지르는 모습도 자주 보이지만, 정작 삼남 원상에 대해서는 "어질고 영웅의 기개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정작 원상도 원담 이상 가는 개차반임은 물론 거진 패륜아에 가깝게 나와서 원담의 막장성은 상대적으로 희석되고, 오히려 원소에게서 폐출되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저런 막장짓이 장남이기에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어 보인다.[10]

덤으로 유비 서주에서 쫓겨나자 하북으로 도망쳤을 때 처음으로 유비를 맞이하기도 하고, 유비가 원담을 지지하는 대사도 해 주는 등 전반적으로 원담에게 우호적이다. 어쨌든 유비의 입장에서는 은인이다. 그래서 삼국지 유비, 촉빠들한테는 부정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조조에게 항복한 뒤 조조와 사돈을 맺는 것이 조조의 사위가 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라지만 조조가 동년배 친구인 원소의 아들과 사돈을 맺는 상황이 삼국지연의의 주 독자층인 서민들에게는 쉽게 와닿지 않으니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11] 조조에게 원담이 항복했을 때 조조는 원담을 칭찬하며 사위로 삼겠다고 공표했지만 실제로 딸을 보내지는 않았고, 조조가 원상과 싸우는 동안 원담이 세를 넓히자 맹약 위반을 이유로 혼약을 파기한다.

실제 역사상에서 원담의 딸의 운명은 상당히 비참한데, 조조가 원담의 항복을 받아들여 북상한 203년 10월,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으로 조조에게 보내져 며느리가 되었다가 딱 1년 만인 204년 겨울에 원상이 몰락하고 조조와 원담의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소박을 맞아 원담에게 되돌려 보내졌다는 기록 외에는 직접적인 등장이 없지만, 원담의 사망 직후 원담의 처자식을 다 죽이고 기주를 평정했다고 나와서 끔살당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원소의 처 유씨와 원소의 딸들, 원상의 형수 견씨와 원상의 처자 등 원상과 같이 있던 원씨 일족들이 수모를 당했을지언정 신변만큼은 보호되던 것과 비교했을때 상당히 대조적인 처우다.[12]

결국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조홍 일기토를 벌여서 죽는다. 후한서를 참고하지 않았는지 찌질한 최후가 나오지 않아서 나름대로 미화되었다. 어째튼 조조 진영에서 손꼽히는 맹장인 조홍과 싸웠다는 자체가 용맹 자체는 훌륭한 것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

4. 평가

열악한 상황에서도 공손찬이 보낸 청주자사 전해와 북해상 공융 등을 격파하고 청주 전역을 재패했으며, 분산된 전력 집결에 실패하는 등 불리해진 상황에서 벌인 조조와의 회전에서도 한 차례 승리하는 등 꽤 선전했던 것으로 보아 군사적 재능은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격적으로는 이래저래 소인배스러운 인간이다. 야심 많고 경력도 화려한 장남이 아버지에게 폐출되면서 까마득히 어린 동생을 섬겨야 한다는 울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보여주는 행동이 전부 근시안적인 데다 치졸한 수준이다. 근본적으로는 원담이 원상한테 개기는 게 가능할 만한 여건을 만들어놓고, 후계자 문제를 수습 못한 채로 병사해버린 원소의 책임이지만.

유표는 원담을 일컬어, '천성이 급하며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 고 평가했다. 나이 역시 아무리 적게 잡아도 원상보다 최소한 열 살은 많을 터이고 유표는 원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청주(=원담)가 천성이 급하고 그야말로 앞뒤 분간을 할 줄 모르지만 동생 쪽은 현명하니 큰 것으로 작은 것을 포용하고 우월함으로 열등함을 받아들이라고 한다.[13]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원담의 어리석은 결정이) 만세가 경계할 실례가 될 것이며 모든 동맹자들에게 수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당대에서도 보통 한심하게 생각한 게 아닌 듯하다.

《구주춘추》에선 원담을 비록 군사적 성공을 제법 거두긴 했으나 성품이 교만, 방자하며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데다 민정에도 무능하고, 주위에는 소인배들이나 기용하는 용렬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원담에 대한 소수 의견으로 삼국지의 주석으로 인용되고 있는 전론에 의하면, 어질고 총명했다고 하고, 후한서에서도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행보를 보면 용렬하고 어리석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원담도 일단은 나름대로의 군사적인 실적이 있었으니 유능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또한, 《전론》에 의하면 조조와의 연합 따위 때려치우고 모든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죽이고 화해하자는 심배의 편지를 받고[14]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전권을 곽도가 장악해버렸기에 곽도한테 겁박당하며 돌이킬 수 없었다는 말도 있다.[15]

종합하자면, 꽤 뛰어난 군재를 가졌지만 방종한 처신과 방만한 행정으로서 지도자로서는 함량 미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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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산둥성이다. [2] 참고로 공융이 북해에서 축출된 해는 건안 원년(196년), 사망한 해는 13년(208년)이다. [3] 《삼국지》 <하기전>의 기록. 대체로 관직을 주어 포섭했던 것 같다. [4] 당시 청주의 해안지역은 해적들이 극심했다. 요동에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던 공손도 또한 바다 건너로 군사를 보내 동래군 일대의 현들을 점령하고 영주(營州)라고 부르며 영주 자사를 두는 등 객기를 부린 바가 있고, 수만 명의 군사를 보내 공융에게 찝적대다가 크게 패하는 기록도 있다. 원담이 청주 전역을 제패했다면 이런 해상세력들과의 충돌은 필수적인데,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바다까지 위세가 빛났다'는 표현으로 봤을 때 해적들을 소탕하거나 본국과 떨어져 있던 요동 공손씨의 영주자사부를 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고 보기도 한다. [5] 실제로 관도대전 당시 조조의 후방 교란을 위해 예주로 파견되었고 채양을 격파해 죽이는 등 약간의 성과도 냈으나 조인에게 격파되었다. [6] 안량이야 유비 원소에게 간 줄도 모르고 관우가 죽였지만 문추가 연진에서 패할 때 누구랑 같이 지휘했는지 생각해보자. 물론 원소 세력 내에서 신참인 유비의 실질적인 입지는 크지 않았다고 봐야겠지만 어찌 됐든 손에 꼽는 고위직 인사였던 만큼 패전 책임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7] 생전에 원상을 적사(=대를 이을 아들)로 족보에 올렸으나 병사해버려서 유언도 남기지 못했다. [8] 곽도와 신평은 이런 원담에게 원소가 그를 폐출시킨 것은 모두 심배의 이간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언했다. 물론 모함이었지만 심배는 평소부터 원담과 대단히 사이가 나빴고, 또한 당시 어린 원상을 옹립하여 기주의 권력을 대부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원담은 이를 그럴듯하게 여겼다. 아예 연의에서는 원소의 임종 직전에 원상의 생모인 유씨와 함께 원상을 후계자로 옹립해도 되겠냐고 질문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9] 평원국의 서쪽, 용하라는 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원소가 이곳에서 공손찬을 대파한 적이 있다. [10] 이에 대해선 원상 항목을 참고하면 된다. [11] 생각해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애초에 조조의 자식들은 아들딸 합쳐 50명에 가까웠으며, 개중엔 손자들보다 어린 자식들도 있었다. 원담은 원소의 장남이며, 조정은 조조의 아들들 중 항렬이 낮은 편이었으니 나이 차이 자체는 평범한 부부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물론 조정이나 원담의 딸이나 당대 평균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고, 일부다처제였던 당대 기준으로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도저히 쉽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겠지만 말이다. [12] 이 때문인지 당나라 시대까지 원희의 자손이 남아 재상을 배출하기도 했다. [13] 당시 원담은 적어도 30세 전후였으며, 원상은 많아도 20세 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4] 원상 측에서 화해하자는 신서를 보낸 것 자체는 《 후한서》와 《한진춘추》에서도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지기에 사실로 봐야할 것이다. [15] 《전론》의 저자가 조비인지라 장자 계승의 정당함을 위해 원담을 미화했다는 시각이 있기도 하지만, 원담과 비슷한 처지였던 유기에 대한 변호는 따로 없는데다 후한서에서 해당 내용을 인용했음을 볼 때 적어도 이러한 평가가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