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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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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遵
(? ~ 33)
1. 개요2. 생애

1. 개요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제손(第孫). 예주 영천군(穎川郡) 영양현(潁陽縣) 사람이다. 운대 28장 중 한명으로 서열 9위에 속한다.

2. 생애

어려서부터 경서(經書) 탐독을 좋아하였으며 집안이 부유했음에도 언제나 겸손하였고, 화려한 옷을 싫어하였다. 효심도 싶어 모친상을 당하자 직접 흙을 짊어지고 어머니의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찍이 채준이 마을 관리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어 자객을 고용해 그 관리를 살해해 버렸다. 본래 채준의 성품이 유순하다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사건 이후로 채준을 두려워 하였다.

지황 4년(23년), 곤양대전에서 왕심의 군대를 격파한 유수가 영양현을 지날 때, 채준은 현의 관리 신분으로 몇 차례 그를 만나 진언하였다. 유수는 그의 용모와 거동이 마음에 들어 문하사(門下史)로 임명하였다. 이후 경시제가 유수를 하북으로 보내자, 채준은 유수를 따라 하북 정벌에 종군하여 군시령(軍市令)이 되었다. 한번은 유수의 객사 내에서 어린 노비가 법을 어겨 채준은 그를 때려서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수는 분노하여 당장 채준을 체포하라 명령하였다. 이때 주부 진부(陳副)가 유수에게 간언했다.
"명공(明公)께서는 군대를 정돈하길 원하셨는데, 지금 채준이 법령을 받들어 권세를 피하지 않았으니 이는 교령(教令)이 잘 시행되는 바입니다."
유수는 바로 채준을 용서하고 자간장군으로 삼은 뒤 제장들에게 말했다.
"경들은 마땅히 채준에 대비해야 할 것이오! 내 집의 어린 아이도 법을 어겨 그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반드시 경들을 사사로이 대하지 않을 것이오."
오래지 않아 채준은 편장군에 임명되었고 유수를 따라 하북을 완전히 평정한 후에는 열후에 봉해졌다.

건무 2년(26년) 봄, 정로장군에 임명되고 영양후(潁陽侯)로 다시 봉해졌다. 그 해 9월, 섬(陝) 땅에서 일어난 도적 소황(蘇況)이 홍농(弘農)의 태수를 생포하였다. 광무제는 등봉(鄧奉)의 난 진압에 여념이 없어 급한 김에 병을 앓고 있던 표기대장군 경단을 보냈으나 경단이 군중에서 병사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얼른 채준을 대타로 보내 경단을 대신하게 했다. 홍농에 도착한 채준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소황의 무리와 전투를 벌일 때, 적의 화살이 채준의 입에 명중하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를 본 부하들은 대장의 안전이 먼저라 생각해 일단 물러나 치유받을 것을 권했다. 한 병사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채준은 버럭 호통을 쳐 그를 물러나게 하고 계속 전투에 임했다. 대장의 분투를 본 사졸들은 모두 사기가 올라 마침내 소황의 무리를 대파하고 홍농을 탈환하였다.

광무제는 이어서 채준에게 신성(新城)의 오랑캐 장만(張滿)의 무리를 소탕하라 명했다. 장만은 험난한 지형에 의지해 때때로 산에서 내려와 주변 마을에 해악을 끼쳤는데, 신성에 도착한 채준은 바로 산적들의 보급로를 찾아 끊고 장만의 본거지가 있는 산을 포위해 버렸다. 다급해진 장만은 내려와 여러 차례 채준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채준은 벽을 쌓고 굳게 지킬 뿐 응하지 않았다. 장만은 염신(厭新), 백화(柏華)의 도적들에게 위급함을 알리고 이들과 연합을 결성하였다. 염신과 백화의 무리들은 장만의 포위를 풀기 위해 곽양취(霍陽聚)를 점거했지만, 채준은 포위를 풀지 않고 별동대를 보내 그들을 격파하여 곽양취를 탈환하였다.

건무 3년(27년) 봄, 채준은 출병하여 굶주리고 피폐해진 장만의 무리를 전멸시키고 수괴 장만을 사로잡았다. 애당초 예언을 믿고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 착각했던 장만은 탄식했다.
"참문(讖文)이 나를 망쳤구나!"
장만은 이내 참수당했고 채준은 장만의 처자식까지 잡아다 멸하였다. 등봉의 난은 작년에 광무제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그 아우 등종(鄧終)이 굴복하지 않자, 채준은 장만을 잡은 직후 병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두연(杜衍)에서 등종을 격파하였다. 그 해 4월, 건위대장군 경엄에게 패한 연잠(延岑)이 동양취(東陽聚)로 도주해 초여왕(楚黎王)을 자칭하던 군벌 진풍(秦豊)과 군세를 합쳤다. 채준은 건의대장군 주우와 함께 동양취에서 연잠을 격파했고 연잠은 진풍이 있는 여구(黎丘)로 향했다.

건무 4년(28년) 5월, 작년 3월에 사신을 잡아 가두고 무상대장군을 자칭하며 팽총에게 항복한 탁군(涿郡)의 태수 장풍(張豐)을 주우, 경엄, 효기장군 유희(劉喜)와 함께 공격하였다. 한나라의 군대가 공격해오자 장풍의 공조 맹굉(孟宏)이 장풍을 사로잡고 투항했다. 장풍은 원래 방술(方術)을 좋아했는데, 한 도사가 다가와 돌이 들어있는 오색주머니를 장풍의 팔꿈치에 매어주고는 돌 속에 옥새가 들어있다 하였다. 장풍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자신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야망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잡혀온 장풍은 채준에게 자신의 팔꿈치에 달려 있는 오색주머니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안에 들어있는 돌 속에 옥새가 있소."
이에 채준은 몽둥이를 가져와 돌을 깨뜨려 그 속을 보여주었다. 평범한 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장풍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마땅히 죽어도 한이 남을 바가 없구나!"
장풍을 토벌한 후, 채준은 광무제의 명령에 따라 탁군 량향(良鄉)에 주둔하고 유희는 양향(陽鄉)에 주둔하여 팽총을 막았다. 채준은 호군 부현(傅玄)을 보내 노(潞)에서 팽총의 장수 이호(李豪)를 격파하고 천여 명을 참수하였다. 그렇게 한 해 동안 채준은 팽총이 보내는 군대를 수 차례 격파하니, 팽총의 무리들 가운데 항복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결국 팽총의 노복 자밀(子密) 등 3명이 팽총 부부를 참수한 뒤, 그 수급을 낙양까지 들고 가 광무제에게 바쳤다. 팽총의 상서 한립(韓立)은 황급히 팽총의 아들 팽오(彭午)를 옹립했지만, 국사 한리(韓利)가 팽오를 참수하고 채준에게 투항했다. 채준은 입성하여 남은 팽총의 종족들을 모두 주멸하였다.

건무 6년(30년),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채준, 경엄, 호아대장군 갑연(蓋延), 한충장군 왕상, 포로장군 마무, 효기장군 유흠(劉歆), 무위장군 유상(劉尙) 등에게 촉 땅의 공손술을 토벌하라 명했다. 이때 상장군 외효(隗囂)가 한나라의 군대가 자신의 영지인 농(隴)을 지나는 것을 원치 않아 핑계를 대며 공손술 토벌을 방해하였다. 외효는 이미 자신의 아들까지 인질로 보내고 충성을 맹세하였기에 광무제는 외효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광무제가 군신들을 모아 의견을 묻자, 채준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외효의 청을 받아들이는 한편, 내부 공작을 통해 그의 세력이 알아서 해산하게끔 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이때 채준이 반대하며 말했다.
"이미 효(囂)는 간사한 계략을 품은 지 오래입니다. 만일 움직이지 않고 시간을 끈다면, 그의 모략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촉 땅의 경비도 더욱 갖추어질 것이니, 지금 진격하느니만 못합니다."
유수는 그의 의견을 채택하고 선봉으로 삼았다. 한나라의 군대가 자신의 핑계를 무시하고 물 밀듯 들어오자, 외효는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선포하고 장수 왕원을 농저(隴坻)로 보내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채준은 진격해 왕원을 격파하고 그를 신관(新關)까지 추격했다. 얼마 뒤, 광무제가 보낸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여 그들과 함께 외효와 더불어 싸웠으나, 외효의 용병술이 생각 외로 뛰어나 대패하고 농(隴) 아래로 군을 물렸다. 패전 소식을 들은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경엄은 칠(漆), 채준은 견(汧), 서정대장군 풍이는 순읍(栒邑)에 배치시켜 각자의 위치를 지키게 하였다. 대사마 오한(吳漢)은 패잔병들을 추스려 장안으로 귀환했다. 외효는 장수 왕원과 행순(行巡)을 보내 견과 순읍을 기습했지만, 행순은 순읍에서 풍이에게 격파당하고 왕원도 견에서 채준에게 또 패해 달아났다.

건무 8년(32년) 가을, 광무제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에서 나와 농(隴)으로 향했다. 외효도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천수(天水)에서 광무제의 군대와 맞섰으나, 광무제에게 대패하여 서성(西城)으로 도주했다. 광무제는 뒷일을 오한, 잠팽 등에게 맡긴 후 다시 동쪽으로 돌아갔다. 광무제는 채준이 주둔하고 있던 견(汧)에 들러, 승전한 기념으로 병사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춤추고 노래하며 깊은 밤이 되어서야 마쳤다. 당시 채준은 병이 들어 막사 내에 누워 있었기에 광무제는 자신의 수레에 있던 담요를 하사해 친히 그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얼마 후, 다시 광무제의 명령을 받아 농(隴)으로 이동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공손술이 원군을 보내 서성을 공략하던 오한과 잠팽을 패퇴시켰고 전세가 매우 불리해져 상규(上邽)에 있던 경엄도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군대를 물렸다. 하지만 채준만은 후퇴하지 않은 채 공손술의 공격을 받을 각오하고 그대로 농을 지켰으나, 천수, 북지(北池), 안정(安定)이 다시 외효에게 넘어가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건무 9년(33년) 정월, 군중(軍中)에서 병사하였다. 채준은 축재에 뜻이 없어 항상 광무제로부터 재물을 하사받으면 남김없이 자신의 병사들에게 뿌렸고, 집안에 재물이 없어 언제나 가죽 바지와 베옷을 입었다. 채준의 사망 소식에 병사들은 모두 슬퍼하였고 광무제 또한 비통해하였다. 그의 상여가 하남현(河南縣)에 이르자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백관들을 하남으로 소집시켰다. 그리고 백관들은 하남에서 채준의 상여를 영접하였고, 광무제는 친히 소복을 입고 상(喪)에 참석해 곡하였다. 채준의 시신을 실은 수레가 지나갈 때도 광무제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상이 끝나고 광무제는 태뢰(太牢)의 예로 그의 제사를 지내주었다. 또, 대장추(大長秋), 알자(謁者), 하남윤에게 모든 상사(喪事)를 돕게 하고 대사농에게 명령해 그 장례비용을 전부 지급하게 하였다. 채준의 장례식이 열리자 광무제는 이번에도 참석하여 유가족들을 위문하고 그의 관(棺) 안에 장군의 인수를 넣으며, 성(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례가 끝난 후에는 매 조회 때마다 이렇게 탄식했다.
"내 어찌 채정로(祭征虜)와 같은 우국봉공(憂國奉公)의 신하를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보다못한 위위 요기가 너무 지나치다 경고하니, 비로소 그만 두었다고 한다. 참고로 채준에게는 자식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는데, 광무제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사촌동생 채융(祭肜)을 언사장(偃師長)에 임명해 채준의 묘를 돌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