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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1:56

공융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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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181818,#e5e5e5
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조조 , 조등 왕준, 조비
3권 「명제기(明帝紀)」 4권 「삼소제기(三少帝紀)」
조예 , 학소 진랑 맹타, 조방 , 장특, · 조모 · 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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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181818,#e5e5e5
5권 「후비전(后妃傳)」
무선황후 · 문소황후 · 문덕황후 · 명도황후 · 명원황후
6권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7권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8권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동탁 , 이각 곽사 마등 한수,
원소 , 저수 전풍 원담 원희 원상, · 원술
유표 , 유종 부손 괴월 한숭 채모,
여포 , 장막 진궁 진등, · 장홍 공손찬 , 유우, · 도겸 · 장양
공손도 , 공손연,
장연 · 장수 · 장로
9권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하후돈 , 하후무 한호 사환, · 하후연 , 하후패, · 조인 , 조순, · 조홍 · 조휴 , 조조(肇),
조진 , 조상 이승 환범 하안, · 하후상 , 하후현 이풍 허윤,
순욱 , 순의 예형, · 순유 · 가후
11권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12권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13권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원환 · 장범 , 장승, · 양무 · 국연
전주 · 왕수 · 병원 · 관녕 , 왕렬 장천 호소,
최염 , 공융 허유 누규, · 모개 · 서혁
하기 · 형옹 · 포훈 · 사마지
종요 , 종육, · 화흠 · 왕랑 , 왕숙,
14권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15권 「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정욱 , 정효, · 곽가 · 동소
유엽 , 유도, · 장제 · 유방 , 손자,
유복 , 유정, · 사마랑 · 양습 , 왕사,
장기 , 유초 장집, · 온회 , 맹건, · 가규 , 가충,
임준 · 소칙 · 두기(畿) , 두서 악상,
정혼 , 정태, · 창자 , 안비 영호소,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 주령, 이전 · 이통 · 장패 , 손관, · 문빙 · 여건 , 왕상,
허저 · 전위 · 방덕 · 방육 , 조아, ·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 조거 · 조우 · 조림(林) · 조곤 · 조현 · 조간 · 조표 · 조정 · 조림(霖)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 시묘, · 양준 · 두습 · 조엄 · 배잠 , 배수,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 신헌영, · 양부 , 왕이, · 고당륭 ,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서막 · 호질 , 호위, · 왕창 · 왕기 왕릉 , 선고 영호우, · 관구검 , 문흠, · 제갈탄 , 당자, · 등애 , 주태, · 종회 , 장창포 왕필,
29권 「방기전(方技傳)」
화타 · 두기(夔) ,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 · 선비 , 가비능, · 부여 · 고구려 ·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bgcolor=#fff> 관련 틀:
촉서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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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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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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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유달
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유조 · 유륭 유호 유보 · 유병 · 유찬
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유협
10권 「황후기(皇后紀)」
곽성통 · 음여화 · 명덕황후 · 장덕황후 · 효화황후 · 등수 · 염희 · 양납 · 양여영 · 등맹녀 · 두묘 · 효인황후 · 효령황후 · 영사황후 · 복수 · 조절 · 무양장공주 · 열양공주 · 관도공주 · 육양공주 · 역읍공주 · 획가장공주 · 평양공주 · 융려공주 · 평지공주 · 심수공주 · 평고공주 · 준의공주 · 무안공주 · 노양공주 · 낙평공주 · 성안공주 · 무덕장공주 · 평읍공주 · 음안공주 · 수무장공주 · 공읍공주 · 임영공주 · 문희공주 · 무양장공주 · 관군장공주 · 여양장공주 · 양안장공주 · 영음장공주 · 양적장공주 · 만년공주
※ 사마표의 속한서는 志에 해당. 후한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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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3><tablewidth=100%><tablebgcolor=#a11><width=50%> 11권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3><width=50%> 12권 「왕유장이팽노열전(王劉張李彭盧列傳)」 ||
유현 · 유분자 왕창 · 유영 · 방맹 · 장보 · 왕굉 · 이헌 · 팽총 · 노방
13권 「외효공손술열전(隗囂公孫述列傳)」 14권 「종실사왕삼후열전(宗室四王三侯列傳)」
외효 · 공손술 유인 · 유량 · 유지 · 유흡 · 유사 · 유순 · 유가
15권 「이왕등내열전(李王鄧來列傳)」 16권 「등구열전(鄧寇列傳)」 17권 「풍잠가열전(馮岑賈列傳)」
이통 · 왕상 · 등신 · 내흡 등우 · 구순 풍이 · 잠팽 · 가복
18권 「오갑진장전(吳蓋陳臧列傳)」 19권 「경엄열전(耿弇列傳)」 20권 「요기왕패채준열전(銚期王霸祭遵列傳)」
오한 · 갑연 · 진준 · 장궁 경엄 요기 · 왕패 · 채준
21권 「임이만비유경열전(任李萬邳劉耿列傳)」 22권 「주경왕두마유부견마열전(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
임광 · 이충 · 만수 · 비동 · 유식 · 경순 주우 · 경단 · 왕량 · 두무 · 마성 · 유륭 · 부준 · 견담 · 마무
23권 「두융열전(竇融列傳)」 24권 「마원열전(馬援列傳)」 25권 「탁노위유열전(卓魯魏劉列傳傳)」
두융 , 두헌, 마원 탁무 · 노공 · 위패 · 유관
26권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27권 「선장이왕두곽오승정조열전(宣張二王杜郭吳承鄭趙列傳)」
복담 · 후패 · 송홍, 송유, · 채무 · 풍근 · 조희 · 모융 · 위표 선병 · 장담 · 왕담 · 왕량 · 두림 · 곽단 · 오량 · 승궁 · 정균 · 조전, 조계,
28권 「환담풍연열전(桓譚馮衍列傳)」 29권 「신도강포영질운열전(申屠剛鮑永郅惲列傳)」 30권 「소경양후낭의양해열전(蘇竟楊厚郞顗襄楷列傳)」
환담 · 풍연 신도강 · 포영, 포욱, · 질운 소경 · 양후 · 낭의 · 양해
31권 「곽두공장염왕소양가육열전(郭杜孔張廉王蘇羊賈陸列傳)」 32권 「번굉음식열전(樊宏陰識列傳)」
곽급 · 두시 · 공분 · 장감 · 염범 · 왕당 · 소장 · 양속 · 가종 · 육강 범굉 · 음식
33권 「주풍우정주열전(朱馮虞鄭周列傳)」 34권 「양통열전(梁統列傳)」 35권 「장조정열전(張曹鄭列傳)」
주부 · 풍방, 풍석, , 유희, · 우연 · 정홍 · 주장 양통 장순 · 조포 · 정현
36권 「정범진가장열전(鄭范陳賈張列傳)」 37권 「환영정홍열전(桓榮丁鴻列傳)」 38권 「장법등풍탁양열전(張法滕馮度楊列傳)」
정흥 · 범승 · 진원 · 가규 · 장패 환영, 환언, , 주총, · 정홍 장종 · 법웅 · 등무 · 풍곤 · 도상 · 양선
39권 「유조순우강유주조열전(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 40권 「반표열전(班彪列傳)」
유평 · 조효 · 순우공 · 강혁 · 유반, 유개, · 주반 · 조자 반표
41권 「제오종리송한열전(第五鍾離宋寒列傳)」 42권 「광무십왕열전(光武十王列傳)」
제오륜 · 종리의 · 송균 · 한랑 유강 · 유보 · 유강 · 유연 · 유언 · 유영 · 유창 · 유형 · 유형 · 유경
43권 「주악하열전(朱樂何列傳)」 44권 「등장서장호열전(鄧張徐張胡列傳)」 45권 「원장한주열전(袁張韓周列傳)」
주휘 · 악회 · 하창 등표 · 장우 · 서방 · 장민 · 호광 원안 · 장포 · 한릉 · 주영
46권 「곽진열전(郭陳列傳)」 47권 「반양열전(班梁列傳)」
곽궁 · 진총 반초 · 양근
48권 「양이적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 49권 「왕충왕부중장통열전(王充王符仲長統列傳)」
양종 · 이법 · 적포 · 응봉 · 곽서 · 원연 · 서구 왕충 · 왕부 · 중장통
50권 「명제팔왕열전(明帝八王列傳)」 51권 「이진방진교열전(李陳龐陳橋列傳)」
유건 · 유선 · 유공 · 유당 · 유연 · 유창 · 유병 · 유장 이순 · 진선 · 방참, 시연, · 진귀 · 교현
52권 「최인전(崔駰傳)」 53권 「주황서강신도열전(周黃徐姜申屠列傳)」 54권 「양진열전(楊震列傳)」
최인 주섭 · 황헌 · 서섭 · 강굉 · 신도반 양진, 사마포, , 마영,
55권 「장제팔왕열전(章帝八王列傳)」
유항 · 유전 · 유경 · 유수 · 유개(劉開) · 유숙 · 유만세 · 유승
56권 「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 57권 「두난유이유사열전(杜欒劉李劉謝列傳)」 58권 「우부갑장열전(虞傅蓋臧列傳)」
장호 · 왕공 · 충고 · 진구 두근 · 난파 · 유도 · 이운 · 유유 · 사필 우후 · 부섭 · 갑훈 · 장홍
59권 「장형열전(張衡列傳)」 60권 「마융채옹열전(馬融蔡邕列傳)」 61권 「좌주황열전(左周黃傳)」
장형 마융 · 채옹 좌웅 · 주거 · 황경
62권 「순한종진열전(荀韓鍾陳列傳)」 63권 「이두열전(李杜列傳)」 64권 「오연사노조열전(吳延史盧趙列傳)」
순숙 · 한소 · 종호 · 진식 이고, 이섭, , 조준, · 두교 오우 · 연독 · 사필 · 노식 · 조기
65권 「황보장단열전(皇甫張段列)」 66권 「진왕열전(陳王列傳)」
황보규 · 장환 · 단경 진번 · 왕윤
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숙 · 이응, 이수, · 두밀 · 유우 · 위영 · 하복 · 종자 · 파숙 · 범방 · 윤훈, 윤목, · 채연 · 양척 · 장검 · 진상 · 공욱 · 원강 · 유유 · 가표 · 하옹
68권 「곽부허열전(郭符許列傳)」 69권 「두하열전(竇何列傳)」 70권 「정공순열전(鄭孔荀列傳)」
곽태 · 부융 · 허소 두무 · 하진 정태 · 공융 · 순욱
71권 「황보숭주준열전(皇甫嵩朱儁列傳)」 72권 「동탁열전(董卓列傳)」 73권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
황보숭 · 주준 동탁 유우 · 공손찬 · 도겸
74권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75권 「유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원소 , 원담 · 원상, · 유표 유언 · 원술 · 여포
76권 「순리열전(循吏列傳)」
위립 · 임연 · 왕경 · 진원 · 왕환 · 허형 · 맹상 · 제오방 · 유구, 유광, · 유총 · 구람 · 동회
77권 「혹리열전(酷吏列傳)」
동선 · 번엽 · 이장 · 주우 · 황창 · 양구 · 왕길
78권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 · 채륜 · 손정 · 조등 · 선초 · 서황 · 구원 · 좌관 · 당형 · 후람 · 조절 · 여강 · 장양 · 조충
79권 「유림열전(儒林列傳)」
유곤 · 규단 · 임안 · 양정 · 장흥 · 대빙 · 손기 · 구양흡 · 모장 · 송등 · 장순 · 윤민 · 주방 · 공희 · 양륜 · 고후 · 포함 · 위응 · 복공 · 임말 · 경란 · 설한 · 두무 · 소순 · 양인 · 조엽 · 위굉 · 동균 · 정공 · 주택 · 손감 · 종흥 · 견우 · 누망 · 정증 · 장현 · 이육 · 하휴 · 복건 · 영용 · 사해 · 허신 · 채현
80권 「문원열전(文苑列傳)」
두독 · 왕륭 · 하공 · 부의 · 황향 · 유의 · 이우 · 소순 · 유진 · 갈공 · 왕일 · 최기 · 변소 · 장승 · 조일 · 유량 · 변양 · 역염 · 후근 · 고표 · 장초 · 예형
81권 「독행열전(獨行列傳)」
초현 · 이업 · 유무 · 온서 · 팽수 · 삭로방 · 주가 · 범식 · 이선 · 왕돈 · 장무 · 육속 · 대봉 · 이충 · 무융 · 진중 · 뇌의 · 범염 · 대취 · 조포 · 상허 · 양보 · 유익 · 왕열
82권 「방술열전(方術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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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권 「일민열전(逸民列傳)」
상장 · 봉맹 · 주당 · 왕패 · 엄광 · 정단 · 양홍 · 고봉 · 대동 · 한강 · 교신 · 대량 · 법진 · 한음노보 · 진류노보 · 방공
84권 「열녀전(列女傳)」
환소군 · 조아(趙阿) · 반소 · 이목강 · 조아(曹娥) · 여영 · 마륜 · 조아(趙娥) · 순채 · 조원강 · 숙선웅 · 채염
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86권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 87권 「서강전(西羌傳)」
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 남만 · 서남이 서강
88권 「서역전(西域傳)」
구미국 · 우전국 · 서야국 · 자합국 · 덕약국 · 안식국 · 대진국 · 대월지국 · 고부국 · 천축국 · 동리국 · 율과국 · 엄국 · 엄채국 · 사거국 · 소륵국 · 언기국 · 포류국 · 이지국 · 동저미국
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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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로 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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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칠자(建安七子)
공융 완우 서간 진림 응창 왕찬 유정

북해상(北海相)
孔融
공융
파일:공융 초상화.jpg
최종직위 태중대부[1](太中大夫)
성씨 (孔)
(融)
문거(文擧)
이명 공북해(孔北海)
아버지 공주(孔宙)
생몰기간 153년 ~ 208년 9월 26일[2] (향년 55세)
고향 예주(豫州) 노국(魯國) 노현(魯郡)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어린 시절2.2. 관리 출사2.3. 북해상 시절2.4. 조정의 야당 인사2.5. 최후
3. 삼국지연의4. 평가
4.1. 극과 극을 달리는 평판4.2. 효자가 불효죄로 처형당한 이유
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후한 말의 관원이자 삼국시대 초기의 인물로 는 문거(文擧). 예주 노국 노현 사람이자 공자의 20세손으로 성헌의 의제다.[3]

공자의 후손으로 명망이 높았다. 더불어, 그의 작품은 전해지진 않지만, 그는 몹시 뛰어난 문재를 지녔으며, 건안문학을 빛낸 건안칠자 중의 한 명이었다.

2. 정사 삼국지

2.1. 어린 시절

그의 7대조 공패(孔覇)[4]는 원제(元帝)의 스승이 되었다가 시중으로 승진했다. 고조부인 공상(孔尙)은 거록태수를 역임했고, 아버지 공주(孔宙)는 태산도위를 역임했다. 공융은 7형제 중 여섯째 아들이다.[5]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자유분방하였고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천성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유년기부터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공융이 4살 때 형과 함께 배를 먹는데, 그가 언제나 작은 조각을 먹자 사람들이 이에 대해 물었다. 공융은 "어린 사람이 작은 것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도성으로 가게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당시 청류파의 수장이자 하남윤[6]을 지낸 이응(李膺)과의 대화는 유명하다.
10여 세의 공융은 이응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이응의 문도가 되려고 했다. 이응의 집에 도착한 공융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군(李君)의 가문과 통했던 사람의 자손이오."
이응이 공융을 만나서 이렇게 물었다.
"고명하신 그대의 선군께서 일찍이 나의 가문의 조상과 교제를 하신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저의 선군이신 공자와 군의 조상이신 이노군(李老君)께서는 덕과 의를 나란히 하셨으며, 함께 사우로 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저 공융의 가문과 이군의 가문은 대대로 서로 통하는 집안입니다."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기이한 동자라고 했다. 태중대부 진위(陳煒)가 나중에 도착했다. 같이 앉아 있던 사람이 공융과 이응의 대화를 알렸더니, 진위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총명한 애가 커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답니다."
그러자 공융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군께서도 어렸을 때 총명하셨겠습니다.”
당돌한 어린 공융의 말에 진위는 결국 꼬리를 내렸고, 이응은 크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명하고 장대하니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어 삼년상을 지냈는데,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부축하지 않으면 똑바로 서지 못할 만큼 건강을 해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공융의 대단한 효심에 감탄했다. 유가적인 관념이 절대적이었던 당시에도 삼년상은 육체적으로 힘들어 후한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약식으로 지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삼년상을 지내던 상주가 그 고행에 지쳐 죽어 줄초상이 나도 주변에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그만큼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삼년상을 유가의 규율대로 철저하게 지내는 사람은 덕성을 갖춘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았다. 삼년상을 두 번 연속 6년 동안, FM으로(!) 지낸 원소가 괜히 명성이 높았던 게 아니다. 더욱이 공융의 나이가 겨우 13세였기에 그가 지낸 삼년상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16세가 되는 169년에 공융의 형인 공포(孔褒)의 친구인 장검(張儉)[7]이 당대의 권력자였던 중상시 후람의 비리를 고발했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고 공포에게로 도망쳤는데, 당시 공포는 부재 중이었고 공융이 집에 있었다. 이 사건은 곧 2차 당고의 금과도 연결되었던 엄청난 일이었는데, 장검은 공융이 어렸으므로 상황을 모르리라 생각하여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은 채 떠나려 했지만 공융은 이를 눈치채고 형 대신 장검을 숨겨주었다.

나중에 공융이 장검을 숨겨준 일이 발각되자 장검은 도망쳤지만, 공융과 공포는 이에 대해 조사를 받기 위해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체포될 적에 공융은 자신이 장검을 받아들였으니 공포는 이 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공포는 장검이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니 공융과는 무관한 사건이라 주장했다. 담당 관리가 누구를 죄줄지 정하지 못하고 형제의 어머니에게 아들 중 누구를 죄줄지 묻자, 어머니도 집안 일은 주인이자 어른인 자신의 책임이며 두 아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토록 서로가 자신이 책임지고 처형받겠다고 다투는 전례 없는 일 때문에, 결국 군국에서는 판결을 못 내려 끝내는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 공포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조서가 내려왔고 공융은 살아남았다. 이와 같은 일화로 공융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2.2. 관리 출사

평원 출신인 도구홍, 진류 출신인 변양은 공융과 더불어 인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나중에 함께 관직으로 진출했다. 공융은 논리를 전개하거나 이치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변양 등에 비해 부족했지만, 창의성과 박학에서는 그들보다 뛰어났다. 사도 양사가 추천하여 공융은 사도부의 속관으로 재직했는데, 관리들의 부정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환관과 그 친족들의 비리를 산더미만큼 적발해냈다. 공융의 보고서를 받자 상서는 환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해 결재해주지 않고 공융에게 면박을 주었지만, 공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채 환관들의 비리를 정연히 진술했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하진 하남윤에서 대장군으로 승진했을 때, 양사는 공융을 시켜 그에게 축하인사를 보냈지만, 공융은 하진을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공융은 그 즉시 사도부로 돌아가 하진을 탄핵한 뒤 고향으로 떠나버렸다. 왕윤 예주에서 황건적을 격파할 때 공융은 그를 따르는 부장으로서 종군했다. 하남윤 시절의 하진의 부하들은 이 일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자객을 고용해 공융을 죽이려고 했지만, 도리어 하진은 사대부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공융을 포섭하려 했기에 공융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진의 문객이 하진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공융은 세상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입니다. 장군께서 그의 원한을 사는 일을 하시면, 사방의 사대부들이 그를 따라서 물러날 것입니다. 차라리 예를 갖추어 그를 다시 불러서 장군의 넓은 마음을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 하진은 공융을 시어사로 천거했지만, 공융은 어사중승[8] 조사(趙舍)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병을 핑계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공은 훗날 다시 사공부에 벽소되어 중군후에 임명되었다가 재직한 지 3일 만에 호분중랑장으로 승진했다.

189년 9월 십상시의 난으로 동탁이 집권했다. 공융은 황제를 폐위하려는 동탁에게 늘 바른 말로 반박하여 동탁의 심기를 건드렸기에 의랑으로 좌천되었다. 이 즈음 황건적이 다시 일어나 여러 주에서 위세를 떨쳤었는데, 그중에서도 청주의 북해국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자, 동탁은 공융을 북해상으로 삼아 그를 북해로 보냈다.

본디 공융은 약간의 군무를 맡은 경력이 있었으나, 그다지 군사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부의 모든 관리들이 공융을 추천했으니, 이는 동탁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상 칼을 휘두르지 않은 채 그를 죽이려고 보낸 셈이다.

2.3. 북해상 시절

그렇게 189년, 북해상으로 부임한 공융은 북해상으로써 백성들을 수습하였고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다. 한편에는 청주의 각 군현에 격문을 보내어 세력을 집결시켰고 방비를 굳게 했다. 덕분에 황건적의 수령이었던 장요(張饒)는 식량을 약탈하지 못했고, 20만의 무리를 이끌고 기주로 돌아갔다. 이를 안 공융은 역습에 나서 황건적을 패주시키고 각 현을 수복했다. 또한 흩어져 있던 관리와 백성들이 점차 모이자 황건적으로 오인되었던 4만 명의 남녀 백성들을 중심으로 다시 성읍을 조성했다.

193년 황건적이 다시 침략을 하자 공융은 곧 도창(都昌)에 주둔했다. 그러나 황건적의 관해에게 포위되자, 다급해진 공융은 청주 동래군 출신의 장수 태사자 평원 유비에게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공북해는 천하에 유비가 있음을 다시 알게 해 주었던 사람이다."

유비는 3천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공융을 구원하도록 했다. 유비의 구원병이 오자 적은 도주했다.

황건의 잔당을 모두 격파하고 성읍을 수복하자, 학교와 상서(庠序)를 세우고 현명한 인재들을 천거하여 유학자들을 세상에 진출시켰다. 또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방을 떠돌다가 죽은 사족들을 모두 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서 장례를 지어 주었다. 군민들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가 일찍 죽은 사람이 있으면, 공융은 자신이 그를 돌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여 곧 현에서 사당을 지어주도록 했다. 그 밖에도 한 가지라도 선행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대함으로 유가적 덕성의 회복을 장려했다.

사실상 죽으라고 보낸 곳에서 멋진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공융의 정치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면에 치중돼 있던 모양인지 삼국지 「왕수전」에 의하면 호족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 구절이 있다. 더하여 현실적인 감각이 빠졌다는 비판이 많았다.

「구주춘추」의 기록들은 그를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공융은 비록 법치에 기반한 정치를 잘 펼치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실행되는 법은 없었으며, 단지 문제를 끌어다 망라하는 것에 능할 뿐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점에 있어서는 소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보좌해야 할 측근들을 임용함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좌승조 유의손이라는 인물들이 책모에 뛰어나 준재라는 평판이 있었지만, 공융은 이들의 명성이 높았기에 어쩔 수 없이 높은 자리에 앉혀만 뒀을 뿐, 절대로 이들을 중히 쓰지 않았고 그들의 진언도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대신 그저 빈말을 잘하고 별 재주가 없던 왕자법과 유공자라는 인물들을 총애하며 중용했다고 한다.

「구주춘추」의 기록들은 공융의 군사적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모로 비판을 하고 있다. 유주의 군사 수만 명이 북해를 공격하자[9] 청주 전역이 모두 두려워하며 떨었지만, 공융은 기습공격을 통해 이들을 대파하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모조리 배반한 뒤 본국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또한, 그가 황건적 잔당과 재차 싸울 때, 공융은 승리를 과신했는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친히 지휘했지만, 황건군은 중군은 공융과 맞붙으어 견제하는 와중에 좌우익은 우회로 기동하여 강을 건너 공융의 본성을 함락시켰다. 공융은 그 해가 지나도록 성을 되찾지 못하다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자 북해를 버리고 서주로 달아났다.

이후 그는 다시 북해로 돌아갔고, 유비의 추대를 받아 영[10] 청주 자사가 됐다(195년?)

당시 원소 조조가 두각을 드러내지만, 공융은 이들과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좌승조는 공융에게 충고를 했는데, 원소와 조조가 강하니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붙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융은 화를 내면서 좌승조를 죽여버렸고 이에 유의손은 공융을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당시에는 조조 원소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공융은 어느 쪽으로도 붙지 않았다. 좌승조가 공융에게 어느 한 쪽으로 붙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그러나 공융은 원소나 조조가 결국은 한왕실을 없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좌승 황조의 말을 시류와 권력에 영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대노하여 처형했으며, 유의손은 자신도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구주춘추처럼 세세하게 좋지 않은 내용은 넣지 않았으나, 좌승조의 일화를 소개하며 공융은 높은 뜻이 있고 왕실을 보좌하며 난세를 평정하려는 뜻을 가진 충신이었지만, 그의 기질이 너무 올곧았기에 넓은 시야를 가지지 못했다고 공융을 평가했다. 범엽의 평을 보면 좌승조와 유의손 등은 비록 냉철한 안목은 있었지만 공융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좌승조가 처형당하자 당시 공융 밑에 있던 태사자도 이 때 공융을 떠나 유요에게 갔다.

'산동을 귀부시키고 밖으로 요동과 맞붙어 군사적 이득을 얻고자 하였으며, 한 구석에 홀로 기초를 세워 (원소, 조조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구주춘추의 기록을 생각하면, 공융은 청주를 평정한 뒤 요동의 공손도와 결전을 벌여 요동-청주를 아우르며 원소, 조조와는 독립된 세력권을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196년 1월에 서서히 세력을 넓혀 가던 원소의 세력권과 충돌하여 마침 전해를 격파하여 기세를 타던 원담을 맞아 전투를 하였다.

계절이 지나 여름에 이르기까지 수개월 교전한 끝에 공융은 거듭 패배하여 끝내는 불과 수백 명의 군사만 남은 채로 농성하는 상황에 몰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성을 잃었다. 성이 점령당하는 날, 공융은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그의 바로 옆에까지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전혀 안색이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책을 읽으며 평상시와 같이 행동하는 등 무척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평소에 정무를 내팽개친 채 책이나 읽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라는 것이 구주춘추가 묘사하는 공융이다. 태도만 의연하게 허세를 부렸기에 망한 한심한 인물이라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후한서에서 묘사되는 그는 그렇게까지 한심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절대적인 열세에 몰려 별다른 방도가 없던 상황에서 보였던 공융의 초연함과 당대의 다른 군벌들과 달리 매사에 사소한 일로 공치삿거리를 만들지 않았던 것을 칭찬한다.

저렇게 초탈한 모습을 보인 것치고는 붙잡히지 않은 채 탈출에 성공했으나, 정작 공융의 가족들은 모조리 원담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마침 이 무렵은 조조 헌제를 막 옹립했을 때였고, 헌제 또한 자신을 충심으로 보필할 인재가 필요했기에 직접 조서를 내려 공융을 불렀다. 이에 공융은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2.4. 조정의 야당 인사

허도로 간 공융은 196년 장작대장에 천거되었다가 다시 소부로 전임되었는데, 장작대장[11]으로 재임하던 197년, 원소 조조가 대장군 직을 두고 대립한 끝에 조조가 대장군의 자리를 내놓은 사건이 있었다. 공융은 지절을 받아 업으로 가서 원소에게 대장군의 작위를 수여하는 칙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공융은 결코 조조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며 매우 비판적으로 대했는데, 조정에서 조회를 열 때마다 그는 늘 정론을 펼쳐 의견을 주도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무렵 공융은 순욱과 설전을 벌였는데, 그들이 논한 주제는 원소군의 상장인 안량 문추의 자질이었다. 순욱은 안량과 문추에 대해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장수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과소평가를 한 반면, 공융은 안량과 문추에 대해 용맹이 삼군의 으뜸이라 병사를 통솔할만 하다고 극찬했는데, 나중에 순욱의 안목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지난 193년 정권을 잡고 있던 이각 곽사는 원술과 손잡을 생각을 하여 태부 마일제를 사신으로 보내어 산동으로 갔다가, 회남에 이르러 원술과 만났다. 원술은 마일제를 가볍게 여기며 모욕을 주고 마침내 그가 지닌 부절을 빼앗았다. 마일제가 다시 달라고 하자 원술은 듣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협박을 했다. 마일제는 그것이 너무 창피하고 한스러워서 결국 피를 토하고 죽었다. 마일제의 시신이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그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려고 했다. 아무도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자, 공융이 홀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마일선은 상공의 존엄한 자리에 있으면서 모절을 든 사신이 되었습니다. 명을 받들어 흔들림 없이 그대로 동하를 평화롭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눈웃음이나 치는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장표에 서명이나 하는 사람으로 으뜸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윗사람을 기망하였으니, 간사함으로 군주를 섬겼을 뿐입니다. 옛날에 국좌는 진나라 군사들과 마주쳤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의료는 칼날 앞에서도 정색을 했습니다. 왕실의 대신이 되어 어찌 협박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또 원술이 역모를 꾸민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마일제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오랫동안 한의 율법을 어긴 죄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거나 적당히 무마하는 일에 전념했을 뿐입니다. 원술을 만나고 3일이나 지났으면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숙손득신이 죽었을 때, 양중의 죄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날자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정나라 사람들은 유공의 난을 토벌하고 자가의 관을 깎았습니다.

헌제는 옛 신하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차마 지난 일을 공안에 붙이지 못하고, 마일제의 장례에 특별한 예를 더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정도 황제의 명에 따랐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마일제를 다시 육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공융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옛 사람은 크고 두터우면 옭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관리들이 올곧으면 형벌이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정치가 지나침이나 빠짐이 없는데도 백성들이 죄를 지는 것은 모두 스스로 저지른 짓입니다. 세상이 기울어지면 풍속을 교화하는 기능이 무너지고, 정치가 흔들리면 법이 사람들을 해칩니다. 그러므로 상류층이 도를 상실하면 백성들이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묶으려면 고대의 형법인 신체를 손상시키는 법률을 버려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서 저절로 늘어나거나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은(殷)의 주왕(紂王)은 아침에 냇물을 건너는 사람을 보고 정강이를 발랐기 때문에 천하의 사람들이 무도하다고 했습니다. 구목(九牧)의 땅에는 1,800명의 군주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한 사람씩 월형(刖刑)으로 처벌했다면 천하에는 1,800명의 주왕이 있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야 풍속을 아름답고 온화하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또 형벌을 받는 사람은 온전하게 살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더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숙사(夙沙)는 죽음을 각오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려(伊戾)는 송나라의 화근이 되었으며, 조고 영포는 세상에 큰 우환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적당한 조치를 취하여 옳은 길로 유도를 하는 것이 낫습니다.

비록 죽권과 같은 충성심과 변화와 같은 믿음과 손빈과 같은 지혜와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재능과 항백과 같은 억울함과 자정과 같이 모든 학문에 통달한 사람이라도, 칼질 한 번이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이는 태갑이 항상 도를 생각하게 된 것과 진목공이 진(秦)나라를 패자로 만든 것과 남수가 뼈를 세운 것과 위무공이 초연을 베푼 것과 진탕이 모든 일을 주관했던 것과 위상(魏尙)이 변경을 수비했던 것과 같은 경우는 다시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한왕조가 개국을 하여 개악(改惡)의 길을 걸은 것은 대개 이와 같은 사례를 참고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덕을 갖춘 군주는 멀리 헤아리고 깊이 사유함으로써, 단점을 머리고 장점을 취하면서 정치적 개혁을 구차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옳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그것을 고치지도 않았습니다.

《속한서(續漢書)》에 따르면 태위 양표는 원술과 사돈관계였고, 원술은 황제를 칭하려 하였으므로, 조조와 양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양표를 붙잡아 죽일려고 했다. 공융이 이 소리를 듣고 조복을 입지도 않고 조조를 만나서 말했다.
양공은 4대에 걸쳐 밝고 바르게 천자를 섬겨 그 덕망을 모두가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주서(周書)는 "부자형제까지 죄는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12] 지금 원술 때문에 양공까지 죄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주역에는 적선여경(積善餘慶), 즉 덕행을 많이 행한 집안은 그 자손들이 그 덕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양표가 하옥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것은 국가의 일이지, 내가 알바 아니오.[13]

공융이 말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나라 시대에 창업주인 무왕(武王)이 귀국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린 성왕이 등극하고 무왕의 아우인 주공이 섭정을 했습니다. 주공은 그의 아우인 소공(召公)과 의논하여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제 열 살도 안된 어린 성왕이 소공을 죽였다고 한다면, 주공의 입장에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천하의 대신들과 선비들 중에서 명공(조조)을 우러러 보면서 따르는 자들은, 공의 총명과 인지로서, 한나라의 조정을 도와가며 다스리고 , 바른 자들을 천거하고 , 요상한 것을 버리고 하는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고한 사람을 느닫없이 죽이는데,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듣는다면, 도대체 누가 명공을 따르겠습니까? 공융은 노국(魯國) 남자로, 내일 옷을 벗고 되돌아가서, 두번 다시 조정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조조도 어쩔 수 없이, 양표를 풀어주라고 하였다. 공융은 조정의 무력함에 대하여 꽤나 한탄했던 듯하다. 당시에 형주목 유표는 공납을 바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하다가 마침내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낼 때 마치 천자가 가마를 타고 가는 것처럼 했다. 조칙을 내려 그것을 질책하려고 하자 공융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듣기로는 영형주목 유표가 방자한 행동으로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사직을 행하려 한다고 합니다. 비록 무지몽매하고 악하기 짝이 없지만, 국익을 생각할 때, 처벌하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왜냐? 만승지중이시고 천왕의 지존이신 폐하께서는 성스러움 그 자체이며, 나라는 신기(하늘에 제사지내는 제기)이니, 천자의 지위는 하늘과 같고, 녹봉과 지위(벼슬)와는 근본이 다른 것입니다. 이는, 하늘을 오를 수 없고, 해와 달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신하(유표)가 사방에서 사악한 싹을 틔울 때마다 구름을 그려 번번히 막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데, 큰 죄를 지은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참고 참아야 합니다. 가의가 말한 '쥐를 때려 잡고 싶지만 장독이 아까워 참는다.'라는 뜻이 이와 같습니다. 옛 제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포모(제기의 일종)를 바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으며, 진나라에서는 왕의 군대가 패전하여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원술의 죄를 표방하였는데, 또다시 유표의 죄를 널리 알린다면, 이는 절름발이에게 높은 언덕을 가르키며 아무리 험한 곳도 오를 수 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표는 제멋대로 제후를 주살하고, 조정의 칙서를 닿지 않게 하며, 공물을 끊고,악한 자들을 모아 무리지어 반역을 꾀하려 합니다. (약탈한)고 솥을 종묘에 둔다 하여 가치가 있겠습니까! (유표는) 뽕이 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것처럼 끝날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데, 유표의 일은 모른체 하고, 국방에 힘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건안 5년(200년)에 헌제의 아들이었던 남양왕(南陽王) 유풍(劉馮)과 동해왕(東海王) 유지(劉祗)가 죽었다. 황제는 일찍 죽은 그들이 불쌍하여 사계절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한편, 공융에게 제사에 참석하도록 했다. 공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은이 두텁고 따뜻하셔서 계절이 지날 때마다 더욱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두 왕의 영령을 애도하시며 슬프고 불쌍한 마음을 담은 조칙을 내리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전의 규정을 살펴서 예제(禮制)는 바르게 시행하셔야 합니다. 신이 홀로 지난 사례를 살펴보니, 양회왕, 임강민왕, 제애왕, 임회회왕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경제, 무제, 소제, 명제와 같이 태어난 현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조에서 제도를 고쳐 제사를 지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임시로 그러한 조치를 내렸다면 열전이나 본기에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분들이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황제께서 그것을 슬퍼하여 어른과 같은 예를 갖추고 시호를 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주상의 은혜를 가늠하여 제사를 마친 후에는 어 이상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고작 한 살인 경우에는 더욱 예와 일치되지 않을뿐더러 선대의 황제들이 남긴 법도와도 일치되지 않으니 그렇게 하시지 않아야 합니다.

뒷날 원소가 죽고 조조가 원소의 후계자 원상을 격파하여 업을 함락했을 때, 조조와 조씨 일족은 많은 원소의 딸과 며느리들을 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조조의 아들인 조비 원희의 부인이었던 견씨를 빼앗아 강제로 처로 삼은 것이다.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 무왕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조조와 조씨 일가를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런 고사를 찾지 못했기에 나중에 공융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떤 책에서 발췌했냐고 물어봤는데 공융은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14] 즉, 공융은 실재하지 않는 고사를 거짓으로 지어내 말함으로써, '오늘날 조조 일족의 행태는 성현의 행적과 대비되는 부도덕한 일이다.'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융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는 정도를 넘어서 역사와 고전도 모르는 무식쟁이[15]라고 까댄것을 알았다.죽여달라고 비는 수준[16]

이후 하북을 평정한 조조가 오환 원정을 계획하자, 나서는 김에 옛날 숙신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정령족이 소무의 소와 양을 훔친 것까지 다스리지 않겠느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이 말인즉, 내부적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그렇게 밖으로 돌 테면 나서는 김에 아예 옛날부터 있던 온갖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처리하고 오라는 말이며, 한편으로는 조조가 정벌하지도 못할 곳까지 생각없이 함부로 나서대는 얼빠진 사람이라고 비웃는 말장난이기도 하다.

또한 오환 원정 당시 군량이 모자랐기에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리며 조조와 논쟁하기도 했다. 식량난은 곧 자신의 치세가 그만큼 좋지 못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조조는 "옛 암군들이 술에 빠져서 나라 망쳤다"는 구실을 댔다. 공융은 "여색 때문에 나라 망친 일도 적지 않으니 여자도 금합시다."라며 허를 찔렀다.[17] 물론 공융이 반대한 이유는 극히 사적인 이유도 포함되었으며, 그것은 곧 자신이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 일화는《 세설신어》에서도 언급되는데, 공융이 제례를 지내기 위해서 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공융의 인기가 높아졌으며, 세설신어에서는 조조가 공융을 죽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공융의 금주령 반대에 대해서는 여론이 좋았던 듯하다.

중국의 근대 학자인 루쉰은 이에 대해 "그때 내린 조조의 금주령은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경세가라는 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조조는 그때 '현실'을 책임진 조정의 경세가였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융은 야당의 방관자 입장이었으므로 자기 멋대로 함부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2.5. 최후

공융은 이미 조조라는 사람이 점차 간웅으로서의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조조를 감당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공융은 자꾸 비꼬는 말을 내뱉었고, 이는 조조와 공융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또한 일찍이 고대의 왕기제도(王畿制度)에 따라서,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 1천리 내에는 제후를 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조조로부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조조는 그 일로 더욱 공융을 꺼렸다. 그러나 공융의 지명도가 워낙 높았으므로, 겉으로는 서로 참고 용인하는 것처럼 했지만, 속으로는 그와 정론을 펼치는 것을 기피하면서, 공융이 자신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조는 외부적으로는 공융에 너그러운 척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싫어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208년 8월, 공융과 사이가 나빴던 치려라는 인물을 현대의 검찰총장격인 어사대부에 임명했고, 치려 또한 조조에게 영합되기 위해 관직을 이용해 공융의 죄를 날조해 고발했다. 이로 인해 공융이 파직되었고, 실질적인 배후에 있던 조조는 표면적으로는 치려와 공융 사이를 중재해주는 척 하며 회유에 나섰지만, 공융이 고분고분하게 따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승상군모좨주(丞相軍謀祭酒) 노수(路粹)를 시켜서 다음과 같이 공융을 모함하는 상주(上奏)를 올리도록 하였다.
소부 공융은 예전 북해에 있을 때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함을 보고 무리를 끌어 모아 불궤(不軌)를 꾀하고 이르기를

"내 공자의 후손으로 조상은 송나라에서 멸문을 당했었소. 천하를 소유할 자가 어찌 묘금도[18]만 있겠소?"하였으며 손권의 사자와 더불어 이야기하며 조정을 비방하였습니다. 또한 공융은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라서도 조정의 논의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맨머리에 미복(微服)을 하고 당돌하게도 궁궐을 다녔습니다. 또한 전에는 평민이었던 예형과 더불어 방자하게 말하기를 "아버지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본래 의미를 논한다면 실상 부부 사이의 욕정이 나타났을 뿐 아닌가.[19] 자식이 어머니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물건을 병 속에 두었다가 꺼내면 병과 떨어져 상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네.[20]"

하고는 예형과 더불어 서로를 칭찬하였습니다. 예형이 공융에게 일러 말하기를

'중니(仲尼)께서 죽지 아니하셨소.'

하였사옵고 공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 안회가 다시 살아났구려.' 하였습니다.

"이처럼 대역 무도하니 마땅히 무겁게 주벌하소서."

글이 상주되니 공융을 하옥하고 기시(棄市)[21]되었는데, 이때 나이 55세였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도 모두 주살되었다. 이때의 죄목이 불효죄였다. 공융이 죽기 10개월 전에 원소 집단이 붕괴했고, 전 달에는 유표가 죽었으며, 조조는 막 삼공을 폐지하고 승상에 오른 시점이었다. 양대 주적이 모두 박살났으니 더 이상 공융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공융을 처형한 표면적인 이유는 위에서 나오듯이 예형과 함께 서로를 성인(聖人)인 공자와 안회로 지칭한 불경을 범했으며, 기근이 들어 모두 죽게 생겼을때 아버지가 불초한 인간이라면 그를 살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는 패륜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공융은 효(孝)라는 개념을 타산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정작 공융이 효자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데, 이와 같은 그의 효의 해석은 당시 유가적 미덕으로 칭송받던 청렴이나 효행이 본질은 없어진 채 오로지 과시적인 허례로 악용되던 사회상을 비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한 말 영제의 철권과 극심한 정치적 부패에 대한 반발은 유가적인 미덕인 청렴함과 효행을 극단적으로 과시하는 원리주의적 풍조로 이어졌는데, 이는 효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당연한 고마움의 감정이 아닌 단순히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겉치레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런 분위기에서 몇몇 인간들은 일부러 자기학대에 가까운 고행을 통해 명성을 얻는 등, 효를 정치적 출세에 악용했다.

위선적 행동양상은 후한 사대부 전체에 만연했던 풍조인 만큼 조조 진영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후의 시대인 위진시대까지도 이런 기풍이 이어졌다. 본질을 살펴보면 공융은 과격한 언사를 통해 변질된 효를 실천한 인사들의 위선성을 비판한 것이다. 다만 조조는 한이 충과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이념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는데, 공융은 효에 대한 개념을 단순히 타산적으로 해석했으니 국가이념을 뒤흔드는 것이라는 억지를 부리며 처형한 것이다.

슬하에 아들이 둘(《 후한서》에서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어 형은 6살, 동생은 5살이었는데, 《 세설신어》에는 낮에 공융이 잘 때 동생이 술을 훔쳐 먹었더니 이를 본 형이 어찌하여 배례를 않느냐고 묻자, 동생은 훔쳐 마시는데 무슨 예를 행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으며, 언어라는 책에 종회 형제와 관련해 비슷한 고사가 실려있어 이 고사가 와전된 내용으로 추측된다.

아버지인 공융이 죽임을 당할 당시에 형은 9살, 동생은 8살로 두 사람은 바둑[22]을 두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도망가라고 급히 알려주니 " 둥지가 깨졌는데 그 안의 알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하더니 두던 바둑을 계속 뒀다고 한다.

세설신어》에서는 저 일화가 못치기놀이로 나온 것 말고도 조비가 원희의 처를 받아들인 뒤에 조조에게 편지를 보낸 이야기, 그의 아들과 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을 대접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의 아들과 딸이 연약한 어린아이였므로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켜 다른 사람의 집에 기거하게 했는데, 그 집의 주인이 고깃국을 보내주어 아들이 그것을 마시자 딸이 오늘 같은 화를 당했는데 어떻게 오래 살 수 있겠냐면서 무슨 믿는 구석이 있다고 고깃국 맛을 알겠어요?"라고 질의했다.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그 말을 알리자 그들은 체포되어 여동생이 오빠에게 "만약 죽어서도 지각이 있어서 부모님을 뵐 수 있다면 어찌 지극한 바람이 아니겠어요?"라고 말한 뒤에 당당히 목을 길게 내밀었다고 한다.

공융은 권세를 잃고 실각한 뒤부터 처형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집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날마다 빈객이 그의 문하에 가득했다고 한다. 공융 자신은 인재를 아끼고 선비를 좋아해 늘 부족한 듯이 여겼는데, 그러면서도 매번 좌중에 상객이 늘 가득하고 술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라 탄식했다고 한다.

한편 진서 양호열전에 양신의 전처가 공융의 딸이라는 기록이있다. 저서로 《공북해집(孔北海集)》(총 10권), 《천예형표(薦禰衡表)》 등이 있다.

손권이 훗날 연회를 열었을 때 우번이 손권의 술 강권을 면하려고 취한 척 했다가 들통나자 열받은 손권이 그 자리에서 우번을 죽이려 들었는데 유기가 이를 말리자 "예전에 조조는 자기에게 직언하던 공융을 죽였는데 난 못할 게 뭐냐?"고 따졌다. 이에 유기는 "옛 성현을 본받겠다고 하시면서 조조가 했던 머저리 짓을 따라하려고 하십니까?"라고 받아쳐 손권은 반박하지 못하면서 주변에 "내가 취해서 누굴 죽이라고 하면 따르지 말아라."라고 공언한 일이 있다. 타 세력에서도 조조의 공융 숙청은 부정적이면 부정적이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단 것을 짐작 가능하다.

3. 삼국지연의

18로 제후 중 1명으로 참가하는데 정사에서는 아니었다. 황건적 관해에게 북해를 공격당하나 태사자, 유비 삼형제가 구원해주었다. 같은 시기 도겸이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러 간다. 조조가 신야의 유비 공격을 명했지만 공융은 반대해서 조조에게 처형되었다.

정치, 사회, 윤리철학 전반에 걸쳐 복잡하게 다양한 요소가 걸친 공융의 죽음을 유비를 치는걸 반대해서로 퉁친건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 원인이된 혼잣말은 나관중이 공융 캐 해석을 잘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혼잣말로 "어질지 않은 자가 어진 자를 치려 하니 패하지 않겠는가."라고 빈정거린 것이 처형 원인이었다. 정사의 본인 어록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

연의에서도 공융의 성격 면모를 반영했다. 대표적인 예는 양표를 문초하지 말고 낙향시키라는 그의 진언과, 유비에게 패하여 사로잡혀 설득당한 채 돌아온 유대 왕충 처형을 말리는 대목이나, 장수의 투항을 진언하는 대목 등 인재 관리삼국지 시리즈로 치면 인사 계열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그 밖에 공융이 예형을 조조에게 추천했다가 예형이 조조의 안전에서 막말을 내뱉자 화가 난 조조가 예형을 죽일까봐 조조를 말리기도 한다.

이후 여포가 죽은 뒤 한동안 조조에게 진언을 하고, 원소 토벌에 관해서 순욱과 대립하는 장면이 살짝 구체화되었다. 정사에서 안량& 문추만 다뤘던 것과 달리 모사들까지 언급하며 '이렇게 인재풀이 많으니 얕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순욱이 그 모사들의 단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반박하는 등 전반적인 전개는 정사와 같다. 다만 이후로는 비중이 다시 급격하게 줄어들고, 최후도 정사와 같다.

4. 평가

4.1. 극과 극을 달리는 평판

공융에 대한 사가들의 평가는 양극으로 극단적으로 갈린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공융의 전기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최염전의 말미에 부록으로 공융의 행적을 매우 간략하게 언급하며 오만하게 굴다가 죽었다고 적었다. 더불어 사마표는 구주춘추에서 공융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특히 청주에서의 공융의 행적을 두고 조목조목 따지며 비판하는데, 대체로 말만 앞섰지 제대로 실행되는 게 없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고, 재주는 얕은데 이상만 가득한 인물로 표현한다.

위나라의 적국인 촉나라에서조차 공융을 순교자로 포장해서 조조를 공격하는 명분으로 써먹기는 커녕 반대를 위한 반대로 혼란만 불러일으키는 분탕종자로 취급했다. 제갈량은 내민을 파직시키면서 공융보다 더한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직접 언급했다. 공융을 사적으로 매우 잘 아는 사람이 다름 아닌 촉한의 창업주 유비이고, 유비가 평원-서주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공융과는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란걸[23] (물론 훨씬 나중에야 입관했지만) 그 최측근인 제갈량도 모를리가 없을텐데 저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반조조 측에서도 저걸 단점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공융을 순욱, 정태와 더불어 후한의 마지막 충신으로 평가해 세 사람을 같은 열전에 묶었다. 공융에 내린 범엽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공융은 다른 사람의 선행을 들으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좋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부연해서 완성시켰다. 상대의 면전에서 단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했으나 뒤에서는 그 장점을 칭찬했다. 현명한 선비를 좋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발탁하여 명예를 얻게 했다. 선한 사람을 알고 있으면서 추천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잘못과 같이 여겼다.'
(중략) 마찬가지로 공문거의 높은 뜻과 외곬적인 행동은 사람들의 정의감을 불러일으켜 효웅의 야심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 때문에 조조도 살아있는 동안에 한의 천하를 빼앗지 못하고 아들의 대에 한을 대신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본디 곧은 성품의 사람은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숙명으로, 원만하게 다스려지도록 허리를 구부려 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공문거는 순수한 백옥과 같아 준열(峻烈)함의 표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범엽 또한 공융이 청주에서 할거할 당시의 행적을 모르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사마표처럼 세세하게 따지지는 않은체, 공융의 성품이 너무 올곧다 보니 시야가 좁았다고 그의 장점을 높이 사는 동시에 그의 단점을 지적하였다.

당대 사가들 평가부터 이렇다보니 후대의 평가도 극단적이다. 같은 행적을 두고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쪽은 죽을 만해서 죽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입만 산 인물이라 폄하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후한의 키케로, 시대의 마지막 양심으로 평가하는 등 평이 심하게 갈라진다. 사실 키케로도 죽을 만해서 죽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입만 살았다 소리 듣는다

다만 당시 혼란스러운 곳이었던 청주에 좌천성으로 부임해서는 황건적을 몰아내고 통령체계를 회복했다는 자체를 감안하면 그는 절대로 가볍게 생각될 인물이 아니다. 그는 권력자들과 상성이 극단적으로 나빴는데, 십상시 하진 동탁 원소 조조로 이어지는 당대 최대의 권력자 계보에서 공융이 비판하지 않은 인물은 없다. 다만, 원소와 공융의 관계는 직접적인 기록이 많지 않고 오히려 관도대전 무렵 공융은 그에 대한 비관론을 펼쳤기에 친원소파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공융이 원소를 최대의 역적이라 여긴 것은 후한서에서 확인되고, 원소도 조조에게 공융을 죽이라고 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조는 여론을 의식해 거절하였다.

조조가 불효죄로 삼족을 멸했기에 건안칠자의 1명으로 꼽히면서도 다른 6명과 달리 전혀 언급되지 않는 등 조조의 시대에 거론되는 대상은 아니었으나, 조비가 공융의 시를 특히 좋아했기 때문에[24] 그는 조조가 죽은 뒤에 공융의 시문을 모은 공북해집을 출간했다. 하지만 조조 시대를 거치며 공융의 글이 많이 사라진 탓에 조비는 남아있는 공융의 글을 신고하는 자가 있으면 황금과 비단을 내리며 포상했다고 한다.

공융은 글재주가 뛰어나 건안칠자의 일원이었고 조비와 < 후한서>에 남겨진 평에 따르면 '논리를 전개하고 이치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부족했지만, 그는 창의적이었고 아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처형하기 직전 임종시(臨終詩)를 지어 죽는 순간까지 조조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그는 국가에 충성하고 효로써 세상을 교화한다는 유가적 이념을 끝까지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공융孔融:비틀린 시대에 용납되지 않은 비운의 천재

4.2. 효자가 불효죄로 처형당한 이유

공융이 불효죄로 처벌받아 그 삼대가 멸족당한 원인은 바로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근본된 뜻을 논하자면 사실 (아버지의) 욕정(欲情)이 결과로 나타났을 뿐 아닌가? 자식 또한 어미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병 속에 있던 물건을 꺼낸 것과 같을 뿐 아닌가?"
후한서》 <공융전>

공융은 이렇게 효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을 던져[25] 불효죄로 처형되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왜 공융은 이렇게 말했을까? 공융 처형의 빌미를 제공한 이 말은 부모와 자식의 윤리를 전면 부정하며 (孝)[26]에 대한 가열찬 비판을 담고 있다. 유교의 성인인 공자의 후손이 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공융을 죽일 꼬투리를 찾던 조조가 가장 사회적 공감을 받기 쉬운 죄목을 골라 잡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공융과 조조의 대립 관계에 대해 좀 더 초점을 맞춰볼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공융은 조조의 '권력'을 공격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융이 끝내 용서받지 못한 것은, 그가 조조의 '권위'를 공격한 것을 조조가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조는 당대의 여러 명사들처럼 효렴을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아버지 조숭의 참사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서주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 시대의 여러 야심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조 역시 효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자 했던 셈이다. 그전까지 조조가 싸워온 상대들은 황건적, 흑산적 등 반란세력 또는 무력을 기반 삼아 괴뢰를 세운 동탁 같은 부류들이었다. 반면 서주의 통치자 도겸은 엄연히 조정의 명으로 서주를 다스릴 권한을 얻은 공직자였으므로 조조의 서주 공격 및 학살은 그의 첫 일탈이자 사적 전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헌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공융의 효 해석이 결합하면 조조가 결코 달갑게 여길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공융에 의하면 효는 어디까지나 근친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이기주의에 불과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그 어떤 윤리적 정당성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조조가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명분의 기반 또한 정당성을 잃는다. 결국 남는 것은 한에 대한 충성은 나몰라라 하고 영토 확장과 세력 경쟁에 대한 군웅들의 야욕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조조는 이러한 해석이 공융이 가진 명성에 힘입어 설득력을 가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공융은 자신의 발언이 단순한 변덕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헛소리가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조조를 조롱했으며 그 논리의 원천은 대부분 경학에서 나왔다. 조조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분노와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이런면에서 공융이 참으로 적절한 지적을 한게, 실제로 효는 굉장히 타산적인 논리[27]고 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효는 결국 '봉양의 의무를 진 자'가 '봉양의 혜택을 받는 자'로 자연 전환되면서 희생과 수혜의 대차를 맞추는, 결국 철저한 손익균형/순환의 시스템인데 반해,충은 한번 신하는 영원히 신하, 한번 군주는 영원히 군주로 못 박힌, 불변의 불균형 관계다. 결국 효와 충을 억지로 단일화 시키다 보면,신하가 '나는 내 의무 다했으니까 나도 왕 돼보련다!' 라는, 오히려 찬탈과 왕조 교체의 논리가 정당화 되는 것도 가능하다. 공융이 했던 문제의 발언은, 이런 효자/역적들을 지켜보며 오랜 세월 내려온 이 모순된 충효관에 대해 나름 느낀 바가 많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데, 공자의 후손으로서 그가 이런 문제의식을 새로운 학설로 발달시켰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28]

다시 말해 공융은 유교의 양대 덕목인 효와 충이 양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현한 셈이다. 전후 양대 400년을 합쳐 한나라를 지탱했던 사상[29]인 유교를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세력이 받을 사회적 반감을 최대한 줄일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결과 발생한 것이 바로 효의 부각이었다. 이렇듯 윤리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던 공융은, 힘으로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는 대신 끊임없는 조롱으로 일관했다. 그저 한 개인에 불과했다면 무시당하거나 진작 제거되는 빌미를 마련했을 발언들은 공융의 명성을 뿌리 삼아 나름대로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공융은 젊은 나이에 이미 조정으로부터 복잡한 시선을 받은 사람이다. 후한 말 대장군 하진은 공융의 탄핵을 받자 무사들을 시켜 그를 암살하려 했다. 헌데 빈객이 공융의 명성이 높은데 그를 죽였다간 사방의 사대부들이 등을 돌릴 것이 우려되므로 차라리 회유책을 쓰는 것이 낫겠다고 진언하여 받아들여진 사건이 있었다. 조조가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공융을 굳이 끌어안은 것 또한 반대 세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에서 나왔을 터이나, 정작 그 공융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규합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늘릴 판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융이 멸족을 당한 것은 다름 아닌 공융 자신이 조조에게 갖는 존재 근거에서 기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결국 조조는 구현령으로 인재를 선발할때 불인불효를 외쳤으나 정작 당대의 명사 공융은 불효죄로 죽인 꼴이 되었다. 공융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식으로 조조에게 엿을 먹였으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후일 조조의 후손 조모가 천자의 지위를 잃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근거는 그가 불효자라는 조작된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이로써 조모는 죽은 뒤에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여 시호조차 없게 되었다. 신하가 황제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최대 최악의 불충조차 황실의 어른에게 불효했다는 사실에 눌려 가려지고 또 그것이 정치적 필요의 당위를 얻었다는 이 기막힌 사건은, 생전의 공융이 무엇을 경계하고 또 무엇을 적대하고자 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상이 사상으로 남지 않을 때, 정치적 필요에 따라 변질되고 오용될 때 그것은 창칼 못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대적하기 어려운 무기가 될 수 있다. 물론 공융은 사상이 사상 그 자체로 남을 수 있도록 지키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 자신이 직접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사상을 무기로 삼아 행동한 것에 가까우며 그 결과 일가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조조 또한 공융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굳게 세운 효의 불가침성으로 인해 살해당한 자손이 오히려 죄인이 되고 찬탈을 당하는 역사의 비극을 낳았다.

이상의 사실을 토대로 볼 때, 공융을 순수한 철학자로 보기 어렵다는 관점은 공융 자신의 정치적 행적에서 직접 드러나므로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쟁에 이념이라는 요소가 깊게 침투해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공융의 주장과 그의 삶은 정치와 사상, 윤리도덕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정면 반박인 셈이다. 출처: 강명의 삼국지 - 충과 효에 대한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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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 조거 · 조우 · 조림(林) · 조곤 · 조현 · 조간 · 조표 · 조정 · 조림(霖)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 시묘, · 양준 · 두습 · 조엄 · 배잠 , 배수,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 신헌영, · 양부 , 왕이, · 고당륭 ,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서막 · 호질 , 호위, · 왕창 · 왕기 왕릉 , 선고 영호우, · 관구검 , 문흠, · 제갈탄 , 당자, · 등애 , 주태, · 종회 , 장창포 왕필,
29권 「방기전(方技傳)」
화타 · 두기(夔) ,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 · 선비 , 가비능, · 부여 · 고구려 ·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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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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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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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유조 · 유륭 유호 유보 · 유병 · 유찬
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유협
10권 「황후기(皇后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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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융 , 두헌, 마원 탁무 · 노공 · 위패 · 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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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권 「유조순우강유주조열전(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 40권 「반표열전(班彪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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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권 「제오종리송한열전(第五鍾離宋寒列傳)」 42권 「광무십왕열전(光武十王列傳)」
제오륜 · 종리의 · 송균 · 한랑 유강 · 유보 · 유강 · 유연 · 유언 · 유영 · 유창 · 유형 · 유형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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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 · 이법 · 적포 · 응봉 · 곽서 · 원연 · 서구 왕충 · 왕부 · 중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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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건 · 유선 · 유공 · 유당 · 유연 · 유창 · 유병 · 유장 이순 · 진선 · 방참, 시연, · 진귀 · 교현
52권 「최인전(崔駰傳)」 53권 「주황서강신도열전(周黃徐姜申屠列傳)」 54권 「양진열전(楊震列傳)」
최인 주섭 · 황헌 · 서섭 · 강굉 · 신도반 양진, 사마포, , 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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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록훈 아래서 조정의 정사를 의논하고 황제의 물음에 답하는 품계 비 2000석의 고문 [2] 음력 8월 29일 [3] 태평어람》에 실린 우예의 회계전록 인용에 따르면 성헌은 공융과 의형제였다. 당시 10여세의 소년 공융의 범상치 않음을 보고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4] 공자의 13세손이다. [5] 이름이 알려진 형제는 큰 형 공포(孔褒)와 공융 둘 뿐이다. [6] 《속한서》에는 하남윤이지만, 《 세설신어》에는 사례교위로 기록되어 있다. [7] 강하팔준 팔급 중 1명이다. [8] 어사대부의 부관으로 감찰의 임무를 맡아보던 관직. 시어사의 직속상관이기도 하다. [9] 산동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공손도와 대립한 것으로 보인다. [10] ; 겸직이라는 의미이다. [11] 토목과 능묘 사업을 관장하는 벼슬 [12] 춘추좌씨전》에서 강고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으며, 형이 아우를 우애하지 않고, 아우가 형을 받들지 않더라도, 그 죄는 당사자에서 그치고 부자와 형제까지 미치지 않는다.' 라고 했다. [13] 죄가 있고 없고는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라는 것이다. [14] 여기에서 사용한 단어인 상당연(想當然)은 관용문구로 남게 되는데,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뜻이다. [15] 달기와 비슷한 행적을 보인 중국의 4대 미녀 서시의 최후는 기록이 다양하다. 그래서 조조는 서시랑 혼동했던지 했던거 같다. [16] 취소선이 쳐져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조조를 은연중에 까내렸으니 조조 입장에서는 공융은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것이 그였던만큼 공융의 이러한 조롱과 비난은 조조의 심기를 충분히 건드리고도 남았던 것이다. [17]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조는 여자를, 특히 유부녀를 탐하는 호색한인데다,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건드렸다가 장남이자 차기 후계자였던 조앙을 허무하게 잃었던 이력이 있고, 자신이 벌인 어지간한 일에는 후회하지 않던 조조가 유일하게 후회했다. 물론 조앙이 죽었다고 당장 조조의 패업이 기울진 않았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조가 조비와 조식을 두고 꽤 오랫동안 후계자 자리를 갈등하다가 겨우내 조비를 지목했고, 그렇게 후계자가 되고 조위를 세운 조비, 그리고 그 아들 조예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라가 삐걱대기 시작하였고, 고평릉 사변이 터지고 사마씨가 득세한 이후로는 조방이 폐위당하거나 조모가 시해당하는 등 온갖 못볼 꼴들이 다 일어난 끝에 조위가 망하며 조조가 일으킨 조씨도 마찬가지로 허무하게 끝났다. 이게 다 조조가 여자를 잘못 건드렸다가 일어난 나비효과였다. [18] 卯金刀-'卯', '金', '刀' 세 글자를 합하면 '劉' 자가 됨. [19] 부부관계의 결과로 자식이 태어났을 뿐이라는 말이다. [20] '父子有親' 등은 인간 본연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21] 죄인을 참하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버려 두는 형벌이다. [22] 위씨춘추에서는 바둑, 세설신어에는 못치기놀이로 나오며, 위씨춘추에는 공융이 손권의 사자를 모욕해 기시형을 겪은 것으로 나온다. [23]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유비가 공융에게 빚을 진 것이다. 듣보잡 군벌이였던 유비를 전국구 거물로 알려지게 한 시초가 공융이다. [24] 공융의 글을 볼 때마다 늘 양웅, 반고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25] 현대에나 할 수 있는 주장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할 말은 다 하고 살았다. 단지 죽거나 배척당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현대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 현대는 사상이나 도덕의 주류세력에게 배척당해도 웬만하면 죽지는 않는다는게 다르다. 물론 지역에 따라 여전히 죽기도 한다. [26] 한나라 말기 시대의 예속농은 가난하므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고 그래서 이 시대 효행에 관한 에피소드를 모은 책들을 보면 무서운 이야기가 많다. 아들을 죽여 노모를 부양하려고 했던 부부 같은 즉, 국가 복지, 사회 안전망 작동이 불가한 상태에서 인민들에게 각자도생을 주문하고, 그걸 합리화하는 도구로 효(孝)가 오용되고, 이럴 경우 보통 가족 내부에서 가장 약한 계층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맹종의 죽순 일화 같은 건 일종의 '가문 미화 설화'로,'이렇듯 효성 지극한 집안이라 하늘의 복을 받아 지금 같이 번성한 것' 이라는 논리로 퍼진 것인데 어머니께 드리고자 귤을 품었다고 효자로 칭송 받는 이(육적), 3년상을 2연타로 치러서 명성을 얻은 이(원소) 등이 있지만, 결국 그것도 권력자에게 초대받아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지위였기에, 6년 동안 생업 따위는 버려두고 몸을 고생시켜도 문제 없는 기반과 건강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결국 일반 백성들은 애초에 기회조차 없는 허례허식의 거품으로 자기들끼리 '효'라는 코인의 가치를 뻥튀기 시켜주고, 그것으로 통치의, 혹은 탈권의 정당성을 얻은 자들인 것이다. [27] 사실 한나라가 오랜 세월 평화를 구가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비례하여 세력이 있는 가문의 수 역시 증가했고. 벼슬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사인들은 벼슬을 얻기 위해 가문과 인연에 의존하여, 가족끼리 벼슬을 점유하고(양씨, 원씨) 반대파를 몰아내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런 극악의 경쟁 분위기 속에서 명성을 떨쳐야 한다는 절박감에 스펙, 보여주기 목적에서 효행을 하는 사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효행이 엉큼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28] 이 문단의 얘기나 관점이 나름 재밌긴 한데 실제로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 게 유교의 충효사상이다. 예를 들어 삼년상도 손익균형과 순환만을 논하자면 절대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니. [29] 정확히는 후한 200년 시절에 유교의 힘이 다른 사상보다 더 강해진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