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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0:40:32

손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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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 추존 황제
손견 | 孫堅
파일:vqGt6sW.jpg
출생 155년[1]]
후한 양주 오군 부춘현
(現 저장성 항저우시 푸양구)
사망 191년 (향년 36세)
후한 형주 양양
(現 후베이성 샹양시)
능묘 고릉(高陵)[2]
재위기간 후한의 오정후(烏程侯)
187년 ~ 1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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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ece5b6> 본관 부춘 손씨
견(堅)
부왕 효의왕
형제자매 3남 1녀 중 차남
배우자 무열황후
자녀 5남 3녀
장남: 손책
차남: 손권
딸: 손부인
문대(文臺)
작호 오정후(烏程侯)
묘호 시조(始祖)
시호 무열황제(武烈皇帝)
}}}}}}}}} ||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탄생 설화2.2. 수적 퇴치2.3. 허창의 난2.4. 황건적의 난2.5. 변장· 한수의 난2.6. 우성의 난2.7. 동탁토벌의 기치를 올려 왕예, 장자를 죽이다2.8. 양인 전투2.9. 낙양 입성2.10. 군웅할거 도래2.11. 주씨 형제가 예주를 치다2.12. 죽음
3. 삼국지연의4. 평가
4.1. 통솔력4.2. 성격4.3. 무력4.4. 지력4.5. 정치력4.6. 충의
5. 기타6. 가족 관계7. 대중매체에서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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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修陵懷舊蹟(수릉회구적): 수릉에서 옛 자취 회고해보니,
匿璽啓雄心(닉새계웅심): 옥새 숨겨 영웅되려는 마음 먹었구나.
遂達江東業(수달강동업): 강동의 패업(霸業)을 달성했던 일,
臨風感不禁(임풍감불금): 바람 맞으며 생각하니 감회를 금할 길 없네.
후한 말의 군벌이자 손책, 손권, 손부인의 아버지로 는 문대(文臺).

손종의 차남이며 아래에 동생 손정이 있다. 형 손강은 일찍이 죽었고, 형의 아들들인 손분 손보는 손견이 거병하자 그를 따랐다.

보통 《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자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진수가 《삼국지》에 '아마 손자의 후손일 것이다'라고 추측성 언급을 했는데, 웬만큼 선조가 불확실하지 않으면 이런 표현은 안 쓰기 때문. 조조 조참의 후손이라는 기록도 비슷한 뉘앙스의 추측성 언급으로 되어 있다.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적은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손자의 후손은 자칭이고, 본디 손견의 가문은 후한 말 오군 부춘현에 근거를 둔 중소관리로 한미한 신흥 호족 가문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2. 정사 삼국지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인해 그가 독립적인 세력을 가지고 옥새를 얻어 야심을 품어 천하를 제패하려는 위풍당당한 군벌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 손견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평가는 조금 무리가 있다. 우선 행적이 독립군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점이다. 실질적으로 그 시점 최강의 군세를 갖춘 동탁군을 물리치고 낙양을 탈환한 것은 분명 손견이 맞는데 어느새 그 공적이 원술에게로 고스란히 귀속되는 것도 그렇고, 유표와 싸우다 맞은 최후[3]까지도 원술과의 종속관계 혹은 동맹관계가 뚜렷한 것이 손견의 행적이다. 즉 진짜 군벌로서 강동에 손오의 기반을 잡은 것은 손견이 아니라 그의 아들 손책이다.

다만 손견의 경우 그 커리어가 한나라의 충실한 무관으로서 활약 - 반동탁 토벌군으로서 낙양 진격 - 예주에서 주씨 형제를 상대 - 유표에게 죽음 이렇게 끝을 맺는다. 190년 반동탁 토벌군으로 거병한 이후 191년 혹은 192년? 아무튼 이 1~2년만에 숨을 거두는 것이 손견이다. 따라서 손견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확실한 것은 장사태수로서 독자적인 군사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동탁토벌전에서 그 몸집을 상당히 불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속인지 동맹인지 객장 취급인지 몰라도 1년 정도 원술 밑에서 활약한 것은 맞다. 불확실한 점은 원술과의 관계에 있다.

남양을 원술에게 바치고 손견의 공적이 원술에게 흡수되어 표현되는 점, 주씨 형제와의 싸움이나 유표와의 싸움이 철저하게 원술의 이득을 위해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 사후 원술에게 세력이 흡수된 점 등은 손견의 독자성을 약하게, 원술과 한통속이거나 그 휘하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준다. 반면 손견이 한실 수복이라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낙양 진격 이후 보급로의 허리를 끊었던 원소 일파와는 당연히 싸워서 후방을 안정화시킨 후 다시 장안을 떨어트려야 하기에 당연히 주씨 형제도 쓰러트려야 하고 유표도 쓰러트려야 한다. 이렇게 보자면 손견은 그냥 공동의 목적을 위해 자기는 원술의 칼, 원술은 자기의 보급이자 벼슬도 높은 상급자라고 인정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이라고 봐도 문제는 없다.

또한 손견이 연의처럼 딴마음을 품고 있는 군벌 유망주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손견이 너무 빨리 죽었기 때문이다. 이 때 유비는 그냥 공손찬 휘하에 있던 시절인데 손견 역시 이후 얼마든지 강력한 군벌로 발전할 수 있다. 당장 유표를 쓰러트린 후 눌러앉아서 임지인 장사를 비롯한 형주 남부까지 아우르면 그게 강력한 군벌이다.

아무튼 나관중의 해석도 훗날 손책, 손권을 비롯해 동오의 손씨를 위해 깔아놓은 소설적 복선이고, 손견의 성향은 그냥 해석이 넓게 열려있다고 보는 편이 공평해 보인다. 원술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고, 또 그냥 원술과는 반 동맹 반 객장 정도의 관계로 활동했다고 해석해도 큰 문제가 없다. 손견의 독립성에 관해 자잘하게 이것저것 근거를 따질 수는 있을텐데 모두 결정적인 건 없다.

2.1. 탄생 설화

유명한 《삼국지》 인물 가운데 '출생 설화가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오서》(吳書)엔 손견의 출생 설화가 적혀 있다. 《오서》의 출생 설화는 손견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고 적혀있고[4] 《유명록》에 적힌 설화는 손종 문서로.

2.2. 수적 퇴치

본래 양주 오군 부춘현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대담하고 화통한 기질로 인해 이름이 높았다.

17세 때 부친과 배를 타고 전당현에 이르렀는데, 강기슭에 호옥 등의 수적떼들이 약탈품을 나누고 있었다. 이에 놀란 손견의 부친은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배를 돌리려 했는데, 손견은 부친의 만류에도 기어이 칼을 잡고 언덕으로 올라가 장수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마냥 연기했다. 이를 본 수적들은 관군이 체포하러 오는 것으로 알고는 황급히 달아났는데, 손견은 이를 뒤쫓아가 기어이 수적 한 명의 머리를 베고 돌아와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이름이 알려져 관리가 되었다.

2.3. 허창의 난

이후 회계군에서 허창과 그 아들 허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1천 명의 군사를 모아[5] 양주의 관군과 합류해 공을 세웠다. 이때가 172년이었는데 손견이 156년생이이라면 16세, 155년생이라면 17세의 나이가 된다. 당시에는 십대 중후반만 되어도 장가/시집도 가고 성인 취급 했으니 이상한 건 아니다. 혼란기에 열전이 상세한 상당수의 무인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커리어를 쌓는다.

당시 양주 자사였던 장민이 손견의 공적을 장계에 적어 조정에 알리자 손견은 염독현의 승(丞)[6]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몇 해 뒤에 우이 승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다시 하비 승으로 전임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평판이 좋았기에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2.4. 황건적의 난

손견이 하비 승으로 있을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주준을 우중랑장으로 삼아 반란 진압의 일익을 담당하게 했다. 주준은 손견을 군사마로 천거해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주준은 양주 회계군 출신이며 이전부터 반란 진압으로 잔뼈가 굵은 양주의 실력파 관리로 손견의 선배격이 된다. 더구나 허창의 난 당시에는 회계군의 주부를 지내 손견의 활약상을 더욱 눈여겨 봤던 듯 하다. 주준이 고향이 손견과 가까운 것도 영향이 컸을 것이다. 역사 삼국지의 저자인 최진열 교수는 소속된 군이 다르지만 주준이 고향인 상우현과 손견의 부춘현은 거리가 가까워서 주준이 손견을 동향으로 판단하고 천거했다고 추측했다.

이에 손견은 하비 일대에서 1천 명의 군사를 모아 주준과 합류했는데, 주준과 손견이 함께 힘을 합쳐 분투하니,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였다고 한다. 한 번은 손견이 승세를 타고 지나치게 진군하다가 고립되어 창을 맞고 낙마해 풀숲에 떨어졌다. 손견의 군세도 너무 흩어져서 손견이 어딨는지 몰랐는데 손견의 말이 진영에 돌아와서 울부짖고, 군사들이 그 말을 따라가 풀숲에 떨어진 손견을 찾았다. 손견은 불과 십수일 만에 상처가 조금 낫자 바로 다시 출진했다.

연이은 패배에 황건적은 완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했는데, 이때 손견은 황건적의 거센 저항에도 스스로 앞장서서 성벽을 기어오르며 병사들을 독려해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주준이 손견의 공적을 조정에 알리자 조정에서는 손견을 별부사마로 임명했다.

2.5. 변장· 한수의 난

184년 겨울, 변장, 한수가 서량 지역에서 난을 일으키고 185년에는 삼보까지 쳐들어왔다. 원래 황보숭이 그 진압을 맡았는데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잘렸다. 대신 조정은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반란 진압을 지휘하게 했고, 황보숭의 부관 중 하나였던 동탁은 파로장군으로 올렸다. 장온은 표를 올려 손견을 참군으로 삼아 종군하도록 했다.

이때 동탁은 장온의 소집령에 느릿하게 움직이며 한참만에야 도착했는데, 오히려 장온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손견은 장온에게 동탁이 무능한 지휘로 군사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반란을 전혀 진압하지 못했으며, 명령에도 제대로 따르지 않은 데다, 윗사람에게도 무례하기 짝이 없어 그 죄가 매우 크다며 동탁을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장온은 동탁과 강족과의 관계를 들어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동탁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 장온은 하진 사후 조정을 장악한 동탁에게 죽는다.

장온과 손견은 변장과 한수를 상대로 고전만 거듭하였다. 11월 오히려 동탁이 반군을 격퇴하였다. 장온은 탕구장군 주신에게 추격을 지시했다. 동탁은 장온에게 주신의 보급로를 지켜야 한다고 진언했고, 손견은 주신에게 한수 등의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장온과 주신은 그 진언들을 모두 무시했고, 결국 한수 등이 주신의 병참선을 끊는 바람에 주신과 손견이 크게 패퇴하였다. 전력을 온전히 보존한 것은 동탁뿐이었다.

2.6. 우성의 난

우성이란 자가 1만여 명의 무리를 모아 장사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사 태수에 임명되어 진압을 맡았는데 불과 보름만에 우성을 깨뜨렸고, 자신의 관할 구역을 넘어 인근의 군인 영릉 계양에서 우성에게 호응해 일어난 주조 곽석 등의 무리까지 모조리 토벌해버렸다. 이는 엄연한 월권 행위였지만 조정은 손견의 공을 인정해 이를 사관에 기록하게 하고 오정후에 봉했다. 월권행위이자 죄가 됨을 지적하는 하급관리가 있었지만 이에 대해 손견은 나는 어차피 무관으로서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인데 죄가 되는 걸 걱정해서 도적을 놔두겠냐고 그냥 해치워버렸다.

2.7. 동탁토벌의 기치를 올려 왕예, 장자를 죽이다

영제가 붕어하고 동탁이 권력을 잡아 전횡을 휘두르자 각지에서 군사가 일어나 동탁을 치려 했다. 손견은 동탁이 전횡한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하며 장공이 과거에 내 말을 들었다면[7] 오늘날 조정에 이런 난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임지인 장사를 버리고 북진했다.

이때 형주 자사 왕예 또한 동탁을 치기 위해 거병했었다. 그런데 왕예와 무릉 태수 조인(曹寅)은 평소부터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왕예는 일단 병사를 일으킨 김에 조인부터 죽이고 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인은 허풍이건 진짜건 가만히 당할 수는 없었으므로 가짜 격문을 광록대부 온의의 격문이라고 위장해서 손견에게 들고 갔다.

손견은 평소에 왕예가 자신에게 무례했다고 생각했었고, 무릉태수 조인의 격문을 믿고 왕예를 습격했다. 왕예가 성루에 올라 "도대체 내 죄가 무엇이냐." 고 묻자 손견은 "모르는 것이 죄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8] 궁벽해진 왕예는 결국엔 자살했는데, 문제는 왕예는 평소 손견이 무식하고 행동이 가볍다는 이유로 경시했다곤 하나 어찌됐든 손견의 상관이었다는 점이다.[9]

이후 계속 북상해 남양에 이르렀을 때 손견군은 이미 수만명이 되었다고 한다. 손견은 남양 태수 장자가 길도 닦아놓지 않고 군량도 내놓지 않는 등 협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10] 이에 주변의 하급관리들이 손견을 완전히 두려워해 손견군은 얻지 못하는 것이 없고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로 계속 전진해 노양에[11] 이르렀을 때 원술과 만나게 된다. 원술은 손견을 예주 자사와 파로장군으로 추천하였다. 원술은 장자가 죽어 빈 땅이 되어버린 남양 땅에 대한 지배권을 쉽게 가져가게 된다.

다만 이로 인해 같은 반동탁 연합군 제후를 죽인 손견이 정치적 궁지에 몰려서 보급을 얻기 어려워 원술과 손을 잡는다는 식의 해석이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12] 무리가 수만명이라는 것은 뻥카라고 해도 어쨌든 군대가 많이 늘어났으니까 이런 서술을 했다고 보이기에 왕예, 장자를 죽인 것은 오히려 늘어난 보급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보급자유권 발급에 가까웠던 듯하다.[13][14] 그리고 반동탁 연합군 제후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이후 계속 일어났던 일이며 그들끼리도 사실 결속이 대단친 않아서 뭐 누구를 죽였다고 누구를 경제제재하고 보급 안 하고 이러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15] 이미 강력한 군사력을 휘두르고 있는 손견을 제재할 정도의 정치력이나 권위가 있는지도 불명확하고 그럴 만한 동기도 이득도 없다. 그래서 손견이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인 듯하다.[16][17] 어떻게 보면 그럴 듯도 한 해석이기도 하지만, 만약 그런 움직임이 실재했다면 군사적 포진 같은 것은 무시해도 정치적 흐름이나 여론 같은 것은 꽤 잘 기록하는 동양 사서 특성상 어딘가에 한 줄 정도는 적힐 만한데 그런 것은 없고 손견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은 정황을 읽는 추측의 영역이다. 그래서 손견과 원술은 서로의 이득을 보기 위한 결합에 가까워 보인다.

다만 장사태수에 불과한 손견의 보급이 어려웠던 것은 분명해 보이므로 손견이 낙양까지 계속 진격하기 위해서는 추가 보급 기반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양은 하남의 바로 아래이자 크고 부유한 동네였는데 장자가 비협조적이었으므로, 하남 낙양 동탁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보급과 후방 안정을 위해 장자를 처리한 듯싶다. 이후 남양군 노양에서 원술과 회담하고 결합한 이후 손견군은 동탁과의 일전을 앞두고 휴식과 훈련에 매진하는데, 이렇게 보면 원술과 결합해서 안정성을 높이는 것은 군사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손견이 남양에서의 통치와 수탈, 보급을 위해 자기 전력을 나눠서 돌리거나 그 세력을 새로 만든다고 시간을 끌었겠지만 원술과 손을 잡는다면 자기 전력을 온전히 동탁과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다.[18] 이 시기 손견에게 원술 말고는 별다른 대안도 없었을 것으로 보이며 딱히 원술에게 반감을 가질 이유도 없는 듯이 보인다.[19][20]

2.8. 양인 전투

손견은 계속 북상하여 드디어 동탁군과 교전하게 된다. 손견은 초반에는 서영을 상대로 고전하여 불과 수십 기와 함께 도주하는 수모를 겪는데 손견은 항상 쓰던 붉은 두건을 조무에게 씌워서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손견은 다시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동탁이 보낸 호진 여포를 양인에서 대파하고 도위 화웅을 효수했다. 이 전투가 바로 양인 전투다.
주: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혹자가 원술에게 이르길 "손견이 만약 낙읍(洛邑)을 얻게 되면, 다시는 제어할 수 없으니, 이것이 이리를 제거하려다 호랑이를 키운 격입니다"라 했다. 그래서 원술이 그를 의심했다.」고 한다.

양인성에서 노양까지는 100여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손견이 밤에 말을 달려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한 뒤

"출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사사로운 원한을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손견과 동탁은 골육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군이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 했다.

주: <강표전>에 실린 손견의 말에 의하면

"큰 공훈이 승리에 달려 있는데 군량이 이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오기(吳起)가 서하(西河)에서 탄식하며 운 까닭이요, 악의(樂毅)가 수성(垂成)에서 한을 남긴 까닭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에 원술이 조심스러워하며 곧 군량을 조달해주었다. 손견이 둔영으로 돌아왔다.
정사 《오서》 <손파로토역전>

손견이 너무 잘 나가서 낙양까지 수복하면 다시는 제어할 수 없으리라 의심한 원술은 손견을 견제하기로 결정하고 군량의 보급을 중단했다. 사실상 이때 원술은 손견이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까 강하게 의심하여 관계를 끊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 에피소드는 흔히 원술의 옹졸함과 졸렬함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되지만 손견은 왕예, 장자를 골로 보낸 전적이 있기 원술 입장에선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과 견제였다. 이에 손견은 밤새 말을 달려 원술을 대면하고 다른 마음이 없음을 확인시키고 겨우 재보급을 받았다.

손견의 군이 주둔하고 있던 양인에서 원술이 주둔하던 노양까지는 대략 100리 거리였는데 손견은 밤새도록 말을 달려 원술의 앞에 출두해 군의 전황과 자신의 전략에 대해 땅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할 정도로 열변을 토하고 위로는 국가의 역적을 제거하고 아래로는 공의 원수[21]를 갚기 위해 힘쓸 뿐이라며 한치의 사심 따위는 없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손견의 열변에 부끄러워진 원술은 즉시 군량을 보내며 손견을 주둔지로 돌아가게 했다.[22]

2.9. 낙양 입성

동탁은 북상해오는 손견의 용맹과 굳셈을 꺼려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그의 자식들을 태수와 자사로 천거해주겠다며 회유했지만, 손견은 동씨 가문을 멸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온갖 모욕과 함께 거절한 뒤 계속 진군해 낙양에서 90리 떨어진 곳에서 동탁군과 대치한다. 동탁은 친히 나와 여러 능을 사이에 두고 손견과 싸웠는데, 패하여 달아났고 낙양 서쪽의 민지현에 주둔했다. 크게 이긴 손견은 여세를 이용해 계속 진군했고, 낙양을 지키던 여포를 패주시키고 낙양을 수복한다.

동탁은 손견을 자신만큼 뛰어난 장수라고 평하였다.
관동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오직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인 데다, 자못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서는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했소.

나는 옛날에 주진(主神)과 같이 서정(西征)을 나섰는데, 변장과 한수를 금성(金城)에서 포위했소. 내가 장온에게 말하여, 거느리는 병사들로 주진의 뒤에 주둔케 하려 했는데, 장온이 듣지 않았소. 내가 이때 그 형세를 상언하였는데, 주진이 필히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소. 대각(臺閣 =상서)에는 지금 (당시 일의) 본말(本末)이 있소.

일을 아직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장온은 또한 나더러 선령(先零)의 모반한 강(羌)족들을 토벌하게 하여, 서방 지역을 일시에 소탕하려 하였소. 나는 모든 그 일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그만두게 할 수 없어, 마침내 일을 행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을 남겨두어 보기 4,000명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하여 성세(聲勢)로 삼았소. 모반한 강족들이 곧바로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길을 끊고자 하기에, 내가 조금씩 공격하여 번번이 (길을) 소통시키니, 안정에 병사가 남아있음을 두려워했소.

오랑캐들은 안정에 수만 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유정에 대해서만은 몰랐소. 이 때 또한 소장을 올려 그 상황을 말하니, 손견은 주진을 행군을 따르면서 주진은 10,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을 지으려 한다고 말하기에, 주진에게 20,000명으로 뒤에 주둔토록 하였소. 변장과 한수의 성중에는 묵을 곳이나 먹을 것이 없기에 응당 밖에서 운반하려 하지만, 주진의 대병(大兵)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벼이 손견과 대전하지 못했고, 손견은 병사가 풍족하여 그 운반로를 끊고, 아이들을 써서 강족이 반드시 곡중(谷中)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니, 양주(凉州)는 혹 안정될 수 있었소.

장온은 이미 능히 나를 기용하지 못했고, 주진 또한 손견을 등용하지 못하여, 직접 금성을 공격하고 그 바깥담을 무너뜨려서, 말을 달려 장온에게 얘기하게 하여 나의 승리가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고 하니, 장온이 이 때 또한 스스로 계획이 적중했다 여겼소. 아과(兒果)에게 건너가 규원(葵園)을 끊어버리니, 주진은 군수품을 버리고 달아나고 아과는 내 계책대로 되었소. 대각에서는 이것 때문에 나를 도향후(都鄕侯)에 봉했소. 손견이 좌군사마(佐軍司馬)가 된 것은 이를 보는 바가 남들도 같이 보았듯이,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오.
정사 《오서》 <손견전>

한마디로 동탁이나 손견이 하자는 대로 했다면 변장과 한수를 토벌할 수 있었음에도 장온은 동탁의 진언을, 주신은 손견의 진언을 무시하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미 동탁이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낙양을 초토화시켜놓았기 때문에 낙양성 안팎엔 연기나 불빛이 전혀 없었다. 이를 본 손견은 애통해하며 동탁이 파헤친 역대 제왕들의 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낸 후 곧 노양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손견이 옥새를 발견하고 원술에게 바친다.[23]

2.10. 군웅할거 도래

당시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는 장안의 조정을 동탁의 괴뢰 정권으로 규정했고, 동탁이 보낸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는 칙사를 살해하는 등 조정의 권위를 강하게 부정하고, 명망 높은 황족인 유우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원소의 주장은 상당히 극단적인 논리였지만, 당시 동탁 정권과 헌제의 정통성이 워낙에 약했던 데다, 원소의 기세가 엄청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계획은 유우 본인의 완강한 거절로 인해 무산되었는데, 이는 곧 기존의 권위를 부정했고, 이를 따르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에도 실패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각지의 관리들은 제각기 다투며 토지를 겸병하고 사병을 늘리는 등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며 군벌화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관리들이 군벌화 경향을 보이긴 했으나 일단 관리들이 중심으로 받들던 황제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렇게 반동탁 연합군은 흐지부지되고 군벌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무렵 원소의 독주를 견제하고 있었던 원술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한편 서쪽으로 진군하여 낙양을 회복하고 또한 동탁을 처벌하여 황실을 구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소는 유우의 추대에 실패하고, 원술은 정말로 낙양을 수복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데 이른 것이니, 원술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2.11. 주씨 형제가 예주를 치다

원소 또한 원술의 상승세를 견제하여 회계 사람 주앙 혹은 주우 예주 자사로 삼으며, 예주를 공격해 탈취하도록 했고 주앙은 예주를 내습하여 양성 등의 주요 거점을 빼앗았다. 양성은 사예와 예주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 양성을 대충 현재의 양성현이라고 친다면 허창과 노양 사이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노양에 현재 손견이 주둔한 이상 양성 일대를 빼앗겼다면 진격은커녕 심대한 위협이 된다. 물길의 흐름상 노양까지 털리면[24] 손견은 예주나 사예는커녕 다시 형주 남양으로 위험한 퇴각을 감행해야 한다.

주앙은 오와 회 지역의 유력자였는데, 그의 형인 단양 태수 주흔과 동생인 주우 또한 원소와 연계하며 원술과 대립했다. 이 주씨 형제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으나, 원술이 남양을 통치할 때 극도로 가혹하게 다스리며 마음대로 세금을 걷었다는 기록과 주흔이 원술의 잔학함을 싫어해 그와 대립했다는 기록으로 유추했을 때 원술의 군비 조달을 위한 지나친 수탈로 양주와 예주 일대의 경제가 붕괴된 것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중앙 정부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상태로 흘러가는 당시 분위기에 따라 대부분의 주와 군에서는 제각기 겸병하며 강해지는 데 힘쓰고 있었다. 손견은 주앙의 내습 소식을 듣고는 원소 등을 필두로 한 분리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 "같이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제 역적들이 격파되려 하는데 제각기 행동을 이 같이 하니 내가 누구를 믿고 힘을 합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에 분발한 손견은 휘하의 군사를 이끌어 주씨 형제와 여러 차례에 걸쳐 싸운 끝에 이들을 몰아냈다.
<공손찬전>만 보면 손견이 진 것 같은데 다른 기록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손견이 이겼다.

실제로도 주흔 단양 태수, 주앙 구강 태수로 있다가 원술이 수춘으로 튈 때 쫓겨났는데 단양이나 구강이나 예주가 아니라 양주이다.[25]

2.12. 죽음

손견은 이후 유표를 공략하라는 원술의 명령을 받았다. 유표와 원술 손견은 별 상관이 없어 보이나 이미 주씨 형제가 원소와 연합하여 예주를 어지럽힌 바가 있고 유표 또한 원소와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손견 역시 본인의 야욕이건, 난폭함이건, 동탁 토벌을 위한 후방 안정화건, 원술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서였건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충분히 유표를 칠 만했다.

실제로 유표는 그 전까지 형주자사 치소가 있고 왕예가 있던 무릉에 간 게 아니라 양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수 북쪽의 번성 등도 유표의 세력권으로 보이는 만큼 그 바로 북쪽인 신야도 유표의 세력권이거나 경합지역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신야현도 남양군이고, 그러면 남양군 완성도 한달음이란 얘기기 때문에 남양군 노양현에 있던 손견 역시 양양에 유표가 있다는 것은 좌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을 것이다.

유표는 번성, 등현으로 황조를 보냈으나 손견은 이를 격파하고 한수를 넘어 유표의 거점 양양까지 포위했다.

그러나 현산으로 달아난 황조를 직접 쫓다가 황조가 사전에 준비해둔 매복에 걸려들어 복병들의 화살과 돌을 맞고 머리가 깨져 죽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산으로 유인한 여공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고 한다. 사후에는 손견의 조카인 손분이 손견의 잔당을 이끌고 다시 원술에게로 귀의했다.

그리고 손견이 이 전투로 전사한 후 손씨 가문은 형주의 유표와 철저한 원수지간이 됐고 자신의 아들인 손권이 형인 손책을 뒤를 이어 오나라 군주가 된 이후 형주를 얻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형주 공방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사후에 오나라가 건국된 이후 손권은 자신의 아버지를 황제로 추숭하였다. 묘호는 시조(始祖),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이다.

3. 삼국지연의

유비, 주준이 황건적의 완성을 공격하는 걸 협동하는 데서 첫 등장. 여기서 손견이 수적을 퇴치하고 허창의 난을 토벌했던 과거가 소개된다.

십상시는 손견을 장사 태수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우성을 토벌하도록 시킨다. 손견은 50일도 지나지 않아 우성을 토벌해 강하 땅을 평정했고 그 공으로 오정후가 되었다.

반동탁 연합에 참가하여 호진을 베고, 화웅과 싸우나 원술이 질투 때문에 군량을 보내지 않아 패배한다. 삼형제가 호로관의 여포를 이기자 원소는 다시 손견에게 사수관을 공격하라고 한다. 원술에게 항의하고 원술이 부하탓을 하자 손견은 출진한다. 동탁군의 장수 이각이 손견과 혼약을 청하러 오나 손견은 이각을 쫓아낸다. 화웅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사수관을 지키고 있었던 조잠은 버틸 수가 없어서 항복한다.

조잠의 항복으로 제후 중 가장 먼저 낙양에 들어서게 되는데 손견은 폐허가 된 궁궐을 손보고 동탁이 파헤친 역대 제왕들의 능침, 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냈다. 도중에 옥새를 손에 넣어 서둘러 장사성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손견군의 병사 하나가 이탈하여 밀고한 덕에 원소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소와 손견은 다투고 손견은 밀고한 병사를 죽이려고 하거나 편히 못 죽고 칼과 화살 아래에서 죽겠다는 맹세를 하다가 기습적으로 돌아간다. 원술은 유표에게 손견이 돌아가는 길을 방해하라고 지시한다. 손견은 또 칼과 화살 아래에서 죽겠다느니 하다가 유표와 싸우고 간신히 돌아간다.

이후 원술의 밀서를 받고 손견은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해서 유표의 양양성을 공격한다.[26] 손견군은 처음엔 승승장구하며 계속 이겼지만 혈기 넘치는 성미 때문에 적의 유인책에 걸려 바위와 화살에 깔려 사망한다. 이때 손견의 시신은 유표군이 접수했고 때마침 황조 황개에게 생포당했는데 유표가 손책과 협상을 해서 손견의 시신과 황조를 교환한다.[27]

삼국지평화를 비롯한 원대 삼국극에서는 화웅이나 여포가 나타났을 때, 배가 아프다면서 도망가는 비참한 개그 캐릭터 역할로 등장하는 등 이미지가 형편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것이다.

손견이 화웅, 호진, 여포, 동탁을 격퇴하는 전공 중에서 화웅, 여포를 이기는 공은 유비 삼형제에게 넘어가는 각색이 있다. 하지만 손견이 동탁군의 진정한 명장 서영한테 패배한 부분은 삭제하고 원술의 비열한 계략 때문에 화웅한테 한번 지는 것으로만 각색한다. 그러나 원래는 없던 유표에게 간신히 도망치는 장면도 있는 등 딱히 굳이 손견을 챙기려는 기색으로 보기까진 어렵다.

손견의 왕예 살해, 장자 살해 등은 삭제되었고 독립해서 할거하는 세력처럼 묘사된 것은 사실과는 맞지 않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단순화와 유관장 삼형제 부각 등을 위해 18로 제후가 집결해서 사수관 호로관에서 화웅과 여포와 싸우는 플롯인데 이 플롯 어디에 손견이 올라오면서 왕예와 장자를 죽이는 걸 집어넣기 어렵다. 띄워준 부분이 있다면 조조, 유비, 손견이 황건적 토벌하다 만났을 때 용맹한 모습을 넣어준 정도인데 용맹한 활약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세 명이 만나는 것은 허구인데 이것도 삼국지를 예고하는 이야기의 플롯이다. 그리고 옥새에 관해서는 상당한 야심과 추한 모습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딱히 좋게 각색해줬다고 하기도 어렵다.[28]

다만 정사대로 하자면 손견은 낙양 탈환하고 주씨 형제와 싸운 후 유표와 싸운 것인데 이렇게 천하가 동탁, 원소파, 원술파 정도로 나뉘어져 있던 시기를 묘사하는 건 연의의 플롯과는 정말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손견이 정말 원술의 사욕을 채워주는 부하가 된 것인지 그냥 계속 동탁 토벌하려다 죽은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원술로부터 손책이 독립하는 것이나 동오의 성립 그리고 손권의 칭제까지 생각하면 알기 어려운 애매한 부분은 쳐내고 훗날의 암시까지 넣어두는 걸로 마무리를 한 나관중이 글을 잘 쓴 것 같다.[29]

결국 손견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서영에게 한 번 지긴 했으나 그 이후 계속 이기면서 낙양을 싸워서 수복한 것인데, 연의에서 손견은 호진만 베고 배고파서 졌는데 유관장 삼형제의 활약으로 여포가 도망치고 조잠이 항복하면서 낙양이 알아서 굴러온 셈이 되며 인상이 매우 흐려졌다. 100% 창작인 옥새를 둘러싼 추한 쟁탈도 그렇고 나관중이 딱히 좋게 각색해준 것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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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우물가에서 옥새를 찾아낸 손견.

삼국지연의에서는 옥새를 손에 넣은 다음 원소 유표가 그를 추궁하자 "내가 옥새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칼과 화살을 맞아 죽을 것이다." 라고 맹세한다. 일종의 복선인 셈. 연의에선 손견이 사용하는 고정도라는 검과 화종마라는 명마가 등장한다. 고정도는 삼국지 시리즈 등의 매체에서 꼭 나올 만큼 유명한 편이지만 화종마는 많이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강동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유명한데 정사에서는 없는 별명이다. 연의에서 분명히 호랑이 같다는 묘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곰 같다는 묘사도 있는 듯 그냥 용맹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문구였는데 이 강동의 호랑이라는 지칭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손견을 묘사할 때, 강동의 호랑이를 꼭 인용할 정도로 연의에서 유명해진 설정이다.

4. 평가

4.1. 통솔력

황건적의 난 때부터 후한 말의 여러 반란에서 활약했다. 특히, 반동탁 연합에서 다른 제후들 공을 다 합쳐도 손견의 활약을 못 따라 간다. 여러 제후들은 동탁군에게 패배했으며 원소는 한복의 군량 보급 중단으로 무력화되었고 조조도 서영에게 패배했다. 손견 역시 초전에 서영에게 패배했지만, 병력을 수습해 호진, 여포를 격파하고 동탁도 물리쳤으며 낙양을 일시 수복했다. 사실상 손견 혼자서 동탁과 싸웠다고 봐도 될 정도. 동탁의 서량군은 서량에서 백전 이상을 치렀다고 회자될 만큼 강군이었고 실제로 대부분의 제후들이 동탁군에게 패배했다. 더구나 하진의 중앙군까지 흡수했으니 규모 면에서도 적지 않았을텐데, 손견이 그 군세를 연달아 격파하자 동탁이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할 정도였다.

일단 종합하면 산양공재기에서 손견을 이각•곽사만도 못하다고 평가하는 부하의 말에 동탁이 병사들은 오합지졸이지만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전을 겪은 양주 병주군에 중앙군을 합친 동탁군을 상대로 내륙에서 보기합동전장을 겪지 않은 병사들을 가지고 본인의 지휘력과 경험으로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조도 서영한테 패배하는등 경험도 없고 병력도 훈련이 안되어있어서 고생을 하는데 손견은 초반에 패배를 하나 결국 양인전투에서 도독 화웅의 목을 거두며 승리하고 그 뒤 이어지는 동탁과의 야전에서도 동탁을 털어서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가게 하고 여포가 지키는 낙양도 공격하여 여포가 도망가게 만들었다. 기병전력을 확보하지도 못하고 최전방에서 전투경험을 가진 유주, 병주, 양주가 아닌 지역에서 긁어모은 병력을 가진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걸 극복하고 야전에서 싸움에서 이기며 낙양을 탈환했다는 점에서 다른 삼국지 무장들과는 다르게 질에서 밀리고 양적으로도 우월하지 않은데 공격으로 이겼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남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손견은 군사활동도 정치의 연장이라는 점에서는 약점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면 손견 역시 군벌의 한 명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손견의 대에서는 결국 원술의 명분을 이용하여 잘 사는 다른 지방을 약탈하고 도살하여 군사력을 유지하는 깡패 집단에서 탈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연의에서는 원술만이 나쁜 놈처럼 각색되었지만, 손견 역시 비슷한 군웅 중 한 명이라는 관점에서는 손견과 원술은 죽을 때까지 한통속이었고 다른 제후들을 뒤통수 치고 약탈하면서 이득을 나누는 철저한 공생관계였다. 이 관점하에서는 왜 더 유능한 손견이 원술 밑에 있었는지 의문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손견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 원술만도 못했다.

다만 손견이 본인의 정체성이나 목적을 한실의 무장으로 여겼다면 좀 다르다. 동탁 토벌 역시 손견의 커리어에서 항상 하던 일처럼 역적토벌이되 그 스케일이 엄청나게 큰 역적토벌로 생각하고 그것에 매진했다면 그냥 반동탁토벌군 이후 1~2년간 불꽃처럼 역적토벌에 매진하다[30] 죽었을 뿐이기 때문에, 애초에 군사활동 역시 정치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깊게 따질 만한 부분이 별로 없다. 인생의 막바지 1~2년간 왕예와 장자를 죽인다는 두 가지의 실책[31] 좀 더하자면 남양 땅 등을 원술에게 맡기면서 원술의 난잡한 정치와 수탈로 후방이 어지러워지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세 가지 실책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손견 본인부터가 군사활동을 정치의 연장선으로 삼는 군벌생활을 시작할 생각이 별로 없었을 수 있기 때문에, 통솔력 평가를 여기까지 끌어오는 것은 좀 다르긴 하다.

4.2. 성격

대체적으로 과감한 무장의 모습을 보이며 난폭함이나 무례함도 가지고 있었다. 동탁의 살해를 그의 앞자리에서 진언하거나 왕예나 장자를 죽인 일, 후성의 난 때 경계를 넘어서면서까지 도적을 주살하거나 10대의 나이 때 혼자서 수적을 쫓아가서 죽여버리는 일 등이 손견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아내이자 손권의 모친인 오부인의 친척 일가들조차 손견의 성격을 싫어했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또 왕예와 장자를 죽일 때는 상당히 비열한 흉계를 사용하였다.

연의나 기존의 많은 중국인 학자들은 손견의 성품을 충렬지사의 본보기로 설정했다. 그 와중에 후인들이 보기에 과장된 순화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손견이 종종 쓰던 잔꾀는 순수한 용맹꾼이라 전투에선 안 쓰고 죽음,[32] 충렬지사인데 같은 반동탁 동맹제후의 뒤통수를 때린 건 평가 안 함, 원술과의 공생관계가 아니라 경쟁관계인 것처럼 묘사함 등.[33]

하지만 기존의 평들이 아예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손견은 원래 어린 시절부터 결기가 있었고 상술했다시피 고대의 무장이 잔인하고 교활하지 않기도 어렵다. 어쨌거나 홀로 나서서 수적을 물리친 일은 의행이다. 또한 중딩이 간이 부어서 나댄 거지 수적들이 침착하게 관찰하고 대처했다면 혼자 있는 손견의 목은 그냥 달아났을 것이며 그것을 끝까지 추적해서 목 하나 베고 돌아온 것은 지혜라기보다는 순수한 용맹꾼, 깡패, 협객에 걸맞은 모습이다. 그리고 황건적이나 서량의 난리 등에 있어서도 공명심으로 용맹을 믿고 겁없이 나대는 모습이 뚜렷하다. 그리고 비단 황실에 대한 제사를 올린 것뿐만이 아니라 손견의 언행은 긴 시간 동안 꽤 일관적으로 충실한 한나라의 무관이었다. 그리고 제사를 올린 것도 사실 상당히 비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원술과 얽힌 것으로 손견을 뭐라고 하기에는 어쨌든 손견이 살아있을 시절에는 원술이 딱히 반역도배도 아니었고 오히려 상당한 충신의 면모를 겉으로는 보여주고 있었다. 원소의 유우 추대도 물리친 것이 원술이다. 원술이 이 시점에서도 깡패짓거리야 실컷 했지만 그건 손견도 남말할 처지가 아니고 당시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로서는 손견이 별로 불만족스러울 부분이 없다. 원소가 내세우는 새로운 황제를 우리가 알아서 만들고 정부도 새로 만들자 같은 것보다 원술이 내세우는 중앙정부와 황제 탈환 같은 것이 훨씬 온건하고 덜 참람되게 보인다.

즉 기존의 손견 묘사 역시 나름대로 깎아내고 보수한 부분은 많지만, 그렇다고 손견의 인물상이 막 나가는 시골 애국보수 무장의 모습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은 없다. 왕예나 장자를 죽이고 날뛴 것은 문제가 크지만, 나라가 넘어가는 난세에 불타는 애국보수 무장의 날뛰는 모습이라고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왕예나 장자를 죽이고 유표처럼 살살 눈치를 보다가 털푸덕 눌러앉았으면 손견 역시 다른 군벌들처럼 그저 교활한 군벌이겠지만 펄펄 뛰면서 낙양까지 진격한 것은 손견이 좀 다른 인물이긴 한 것이다. 물론 왕예나 장자는 애꿎게 죽었지만 대의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어쨌건 손견이 동탁을 크게 물리쳤으니 원술과 손견이 최종성공해서 한실이 다시 정상가동됐으면 잘못한 일이긴 해도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34]

그리고 원술과 이득을 나눠먹었으므로 교활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나, 사실 이득을 먹었다고 할 만한 것은 원술뿐이고 손견은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된 이후 싸우기만 하다가 죽은 인물이다. 분명히 왕예 살해, 장자 살해 등은 원한을 풀거나 부족한 보급을 충당하려고 만들어낸 억지살인인 것은 맞으나 손견은 그 이후 군벌로 할거한다거나 하는 일 없이 계속 싸우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 싸움도 전부 동탁 토벌과 연관이 있다. 원술과 이득을 나눠먹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면 어쨌건 같이 행동했으니 부인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고, 너무 일찍 죽어서 만약 살아남았다면 다른 군벌들처럼 행동했을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최종적인 행적상으로는 분명히 원술과는 다른 인물이다. 기존의 평들도 이유가 있다.

4.3. 무력

개인적인 무예에 관한 기록은 직접적인 것은 수적에게 덤벼들어 1명의 목을 벤 것 정도 이외에는 없다. 다만 용맹하다는 묘사는 여럿 있다.
동탁은 손견의 용맹하고 굳센 것을 꺼려, 이에 장군 이각(李傕) 등을 보내 가서 화친을 구하게 하면서 지금 손견의 자제들 중 자사나 군수로 임명할 만한 자를 나열해 상소하며, 그 표를 허락하고 등용하겠다고 했다.
정사 오서(吳書) 손파로토역전(孫破虜討逆傳 - 손견전)
이와 같은 묘사인데 김경한 등은 이를 두고 손견이 무예도 천하 제일! 식으로 묘사했으나 이건 과장이 심한 확대 해석이다. 손견의 지휘 능력과 군사적 식견을 두려워했을뿐 개인적인 무예[35]를 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저 시점에서 손견은 동탁의 군대를 격파한 거의 유일한 군사집단이며 초전의 패배에도 오히려 반격해 동탁군의 장수를 죽인 상황이므로 그 군대의 기세를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다.

여포가 동탁 휘하였고 동탁도 힘이 대단했는데도 손견의 용맹을 두려워했으니 무예가 최강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애초에 동탁이 전선에서 손견과 직접 칼을 휘둘러 맞섰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탁이 직접 손견과 칼싸움해서 이길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적도 없다. 오히려 동탁이 손견을 칭찬한 것은 과거 보았던 군사적 식견이다. 그리고 여포를 이기고 동탁이 두려워했으니 무조건 삼국지 무예(지휘력도 아니고) 최강은 손견이라고 주장하기도 애매하다.[36] 병사를 지휘해 전투에서 이기는 지휘력은 확실히 당대 최상급이었지만 그게 손견이 직접 칼을 휘둘렀다는 증거는 아니다. 물론 용맹함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볼 때 앞장서서 싸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다. 용맹하다는 것은 장수 개인이 호전적이었고 겁이 없었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방어적인 전술보다는 공세적인 전술을 선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전투에서 이겼으니 무예도 더 낫다는 식의 의견은 삼국지연의에서 장수들이 앞장서서 칼싸움하는 이미지 때문이다. 하지만 연의와 달리 실제 이 당시 중국의 전쟁은 관우 안량 참살이나 방덕 곽원 참살 등 기록에도 남을만한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병사들의 훈련도와 경험, 지휘관의 전략, 전술로 판가름났다. 손견이 몇몇 예외적인 경우였다는 증거는 없다.[37] 게다가 삼국지에는 만인지적이라고 불린 관우, 장비, 조아라고 평가 받은 황충, 조운, 비장이라고 불리는 여포, 백마장수라 불리웠던 방덕 등 개인 무력에 대한 별명이 부여된 무장들이 제법 있지만 손견에게는 그런 칭호는 없다.[38]

하지만 완성의 황건 토벌 당시 앞장서 성벽을 올랐다는 묘사가 있는 걸 보아 최강은 아니더라도 장군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무예를 익히기는 했던 모양이다. 초월적인 무예나 용력의 근거로는 빈약하나 선두에서 먼저 성벽을 오르는 것은 보통의 용기와 무예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39]

그리고 간접 증거로 봐도 손견이 직접 창칼을 휘둘렀다는 것은 거의 명백한 수준이다. 일단 10대 시절부터 수적을 퇴치할 때 혼자서 돌격하는 모습을 볼 때 최소한 깡다구, 담력은 일반인 수준을 상당히 넘어서 있다. 또한 10대를 비롯한 초창기 시절 1000여명의 무리를 모아서 싸우러 다녔다고 하는데 이 숫자는 개인의 용력을 배제하고 지휘력으로만 위력을 발휘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숫자다. 실제로 황건란 당시 부상을 입고 낙마했을 때의 정황으로 봐서는 혼자서 지나치게 깊게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유표에게 죽을 때 소수의 기병대만 이끌고 앞장서서 돌격하던 것을 볼 때 창칼을 휘두르지 않는 스타일의 장수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서 휘두르고 다니는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이나 성벽을 먼저 올라간 모습, 직접 용맹함이 언급된 것으로 볼 때 상당하기는 했을 것이다.[40]

어찌 보면 삼국지연의에서 무력이 너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력을 쓰는 장면이 딱 하나 있는데 황건란 당시 성벽을 제일 먼저 올라 황건적 조홍이 찌르는 창을 뺏어서 죽이고 잡졸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황건란 당시 성벽을 제일 먼저 올라간 것은 사실이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최소 몇 명은 죽였을 것이기에 적장인 조홍을 죽인 것만 빼면 차라리 정사반영에 가깝고 너도 나도 관우, 장비급으로 나오는 삼국지연의에서는 오히려 무력이 못하게 연출되었다.

4.4. 지력

삼국지 연의와 후대의 매체에서는, 손견이 춘추전국 시대 초일류 병법가 손자의 후예이므로 손견이 학식을 겸비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손견은 일단 손자의 후예가 맞는지 조차 불확실한 인물이다. 실제로는 당시의 손견 가문은 성씨만 유사한 신흥세력으로 보는 해석이 많은 편이다. 또한, 학식이라는 측면에서는 별로 두각을 보인 적이 없다. 오히려, 왕예는 평소에 손견을 무식한 무부라고 무시한 기록이 있다.[41]

손견이 지략을 쓴 기록이 두개 있긴 하다. 17세 때 수적을 퇴치할 때 관병처럼 보이게 했던 것과, 손견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장자를 죽일 때 손견이 병든 척을 하고 친한 사람을 장자에게 보내 병 때문에 군사를 장자에게 맡기겠다고 속여 장자를 군영으로 오게 해서는 장자를 죽였다.[42]

4.5. 정치력

손견은 공손찬처럼 문관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이런 류의 인물이 그렇듯이 부하들의 평판은 좋았다. 후한 시기 현령을 보좌하는 공식적인 직위는 승(丞)과 위(尉) 두 직책이 있었다. 이 중 '승'은 문관직으로 문서와 행정 담당을 하는 직책이었고 '위'는 현의 치안을 담당하는 총책임자로 군권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승을 역임하면서 칭송을 받고 따르는 자가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행정가로서 실무 능력도 있었던 듯하다. 왕예에게 무관이라 언행이 가볍다고 까였던 손견이지만, 실무적인 차원에선 장애가 되지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손견은 정사에선 무식하다는 평가, 심지어 무부에 불과하다는 자평도 있었기 때문에, 손견의 행정력이 다른 변방 군웅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부족하다.[43] 정사에선 동탁 공손찬도 군사행정 만큼은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 모습과 비교된다. 오히려 조조보다 앞서 협천자를 하며 국가를 장악하는 동탁, 축성과 세력 유지의 재능을 지녔던 공손찬이랑 비하면 손견은 별로 두드러지는 모습이 없다. 단 무릉에서 낙양까지 행군하면서 낙양탈환에 성공한 것, 원술과 결탁하기 전까지 남양에서 알아서 보급을 충당하던 것을 보면 최소한 군사행정에서 못하는 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4.6. 충의

삼국 시대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동진 - 유송 시대의 사람인 배송지는 손견을 "의흥군 중에 가장 충렬이 어울리는 자"라고 그의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사며 그를 평가했다. 성격은 좀 거칠어도 한 황실에 대해서 일관된 우국충정을 보였기에 배송지가 당대의 여러 인물 중에서도 손견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칭호를 준 것이라고 한다. 우선 손견 자신은 한실에 반대한 것은 없었다. 그가 후에 오의 무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어디까지나 아들 손권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추숭받은 것이지 그와는 무관한 일이다. 무엇보다 반동탁 연합이라는 기치하에 모인 군웅들이 동탁군에게 패하거나 서로 간만 보다 각자의 이해 관계의 충돌에 따른 내분 등으로 지리멸렬할 때 혼자서 동탁군과 싸워 낙양을 수복했으며, 초토화된 역대 제왕들의 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내며 한실의 몰락을 비통해 했다. 또 원소를 중심으로 한 분리주의자들의 행태에 강렬한 분노를 표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배송지는 손견의 충의를 높게 평가했고 후손들의 평가는 그렇게 좋게만 써주지 않았다.

하지만, 손견의 충의는 배송지처럼 낭만적인 것으로만 보기는 힘들다는 비판이 있다. 손견은 반동탁연합군 비판의 핵심인 학살과 약탈에 있어 같은 동맹제후를 뒤통수치고 도살하는데 앞장섰으며, 죽을 때까지도 원술과 철저한 공생관계였다.[44] 연합군 사이 태수 살해의 시작도 손견이 열어제끼기도 했다.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남송 시대의 학자인 홍매는 <<용재속필(容斋随笔)>>에서 "왕예와 장자를 죽이는 것이 왕(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인가? 역심을 품는 원술 밑에서 왕실을 생각하는 유표를 공격했는데 이는 어떤가?"라는 골자로 손견의 충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신의 직속 상관인 형주자사 왕예를 평소에 자신을 업신여겼다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살해하고, 남양 태수 장자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처참히 살해했으며, 왕예의 후임으로 부임한 정식 형주자사 유표도 임의로 쳐들어갔다. 왕예는 아예 반동탁 연합군의 일원이기까지 하였다.[45]

왕예 살해의 경우 조금 복잡한 양상이 있다. 일단 왕예가 반동탁연합이긴 하였으나 일단 무릉태수 조인을 죽이고 시작한다는 사적 제재를 천명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당연히 반발한 조인이 손견에게 가짜 격문을 들고 갔다는 점, 그리고 평소부터 손견이 왕예를 아니꼽게 봤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왕예를 죽이기 전에 손견이 창고를 열어본 점, 그리고 장사에서 무릉으로 갔다고 한다면 행로상 무릉태수 조인이나 형주자사 왕예가 손견이 가장 처음 만나게 될 제후라는 점에서 손견의 왕예 살해는 아마도 일단 여러 가지가 섞여서 왕예를 죽이고 난 이후 남양이라는 수천리 길에 이르기까지의 보급을 원활하게 만든다는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대군을 이끌고 가며 장사에서 남양까지의 보급을 손견이 갑자기 충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으며, 남양태수 장자에게도 일단 보급을 요구하고 주지 않으니까 죽였다는 점에서 볼 때 무릉에서 남양까지도 아마 손견은 같은 요구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평민 출신으로 10대에 출사해 태수까지 오른 손견의 명성까지 더한다면 왕예 살해는 손견군의 보급을 꽤 쉽게 만들어줬을 것이라고 보이기에 꽤 복잡한 동기가 얽혀 있는 사건이라고 추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장자 살해의 동기를 추측하는 것은 꽤 단순한데 남양이 크고 부유하며 하남의 바로 아래이므로 장자가 손견의 보급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은 꽤 위험한 신호였다. 장자 본인은 태연하였다는 서술이 있는데 손견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약 장자가 동탁과 연결된다면 낙양 탈환을 위해 싸울 때 장자와 동탁에게 양각을 얻어맞게 되는 셈이고 장자가 보급로만 끊어도 괴로워진다. 따라서 장자 본인은 위기감을 인식하지 못한 듯이 보이나 손견의 이 요구는 장자에게 굉장히 위험하고 신중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인데, 차라리 그냥 도망이라도 치지 않은 장자는 처신을 잘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46] 그렇다고 손견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보급을 거절하고 회색지대, 간을 보는 듯한 이 상황에서는 안 죽이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더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둘을 살해한 것을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발해태수 원소와 기주목 한복의 관계와 비슷하다. 장사태수 손견이 빠르게 형주자사 왕예를 죽인 것, 그리고 보급지인 남양태수 장자가 회색분자 포지션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죽인 것은 합법 불법을 따지기 이전에 굉장히 효율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복이 회색분자이자 군량담당 포지션을 맡으면서 원소를 굉장히 괴롭게 하고 원소군의 진격을 돈좌시켰기 때문이다. 이 사례를 봤을 때 손견의 왕예, 장자 살해는 막나가는 개인감정 살인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원술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얘기하자면, 손견이 죽기 전까지 원술은 다른 막장스러운 군벌들과 특별히 다를 바는 없었으며 한실을 정상화 하겠다는 명분을 크게 휘두르고 있던 시기다. 그리고 결국 원소도 기주목 한복과 타협하고 손을 잡으면서 후방과 보급 안정화를 꾀했기 때문에 손견과 원술이 손을 잡고, 손견이 원술에게 후방안정과 보급을 맡긴 것은 타당한 판단인 것 같다.[47] 손견의 충의에 관한 문제는 과연 당시의 손견이 원술의 딴마음까지 알고 동조했냐는 것이다. 이것은 손견이 죽은 시기가 미묘하기 때문에 진짜로 알 수 없는 문제다. 원술과 연합한 후 유표에게 처들어간 것도 크게 이상할 건 없다. 이미 그 전에 주씨 형제가 원소 일파로서 원술과 손견의 허리를 끊어서 장안 진격을 앞두고 돌아왔기 때문에, 같은 원소 계파로서 후방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큰 유표까지 처리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어차피 손견과 싸웠던 동탁군도 다 정식 한실 관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원술이 황족인 유총을 암살한 일이나 칭제를 하기 시작한 것 등도 전부다 손견 사후에나 일어난 일이다. 손견이 죽기 전까지 원술은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겉으로는 상당한 충신이라고 볼 수 있었고,[48] 칭제 또한 본인이 더이상 충신 코스프레도 못하게되고 점점 궁지에 몰리자 본인의 상황을 뒤집기 위한 최후의 도박쯤 되는지라 손견과 어울려 다닐 당시에는 칭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며 손견도 원술이 딴마음을 먹던 것까지는 몰랐을 가능성도 크다. 왜냐면 애초에 그 정도로 교류가 깊었을 일도 없다. 손견은 원술과 잠깐 만나서 동맹관계가 된 이후 계속 싸우러 다니다 금세 죽었다.

손견이 다른 군벌들과 조금 다른 케이스라고 볼 만한 이유는 있다. 언급되었듯 손견이 동맹 제후들을 죽이고 눌러앉았으면 말할 것도 없다. 불법적으로 징수, 사실상의 약탈을 자행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손견은 왕예, 장자 등을 죽인 다음 앞장서서 낙양으로 진격하였다. 즉 반동탁연합군의 최종목적에 가장 충실한 제후였다. 또한 이후 손견의 행적이나 언행 역시 딱히 흠잡을 만한 것은 아니다. 낙양 수복 직전에는 동탁의 회유를 거절했고[49] 수복 이후 장안으로 가면 되는 시점에서 원소가 주씨 형제를 시켜서 허리를 잘라버리자 이제 거의 다 이겨서 한실 수복하면 되는데 왜 분열해서 뒤통수를 치는가! 하면서 회군해서 주씨 형제와 싸워서 몰아냈다. 또한 앞서 말했듯 유표와의 싸움도 그렇게까지 이상할 게 없다.

유학자 놈들 제사 한 번 치러줬다고 띄워주네 하기에는 앞장서서 날뛰면서 낙양까지 수복한 것도 손견이기도 하다. 물론 낙양수복 역시 정치적으로 앞서나가기 위해서라고 하면 그것 역시 그럴 듯한 얘기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손견이 추하게 조무한테 빨간 두건 뒤집어 씌우면서 도망쳤다가도 바로 돌아와서 동탁군을 대파한 것처럼 선봉으로 몸바쳐 목숨바쳐 싸운 것도 확실하다. 비판자들의 비판도 일리가 있지만 기존 학자들의 평가 역시 근거가 뚜렷하다.

손견이 교활하고 잔인한 짓도 했고 원술과 한통속이었던 것도 맞지만, 손견의 언행에서 충성심의 목적이 원술로 향한 적은 없다. 항상 역적을 없애겠다고 화를 낸 것이 손견이고 원술과 만나기 전에도 이미 30대의 젊은 나이에 장사태수, 열후의 자리에 올랐었으며 조정에서 중히 썼다. 인맥과 뇌물로 빡빡하게 돌아가던 당시 사회에서 시골 평민 집안의 손견이 30대에 순전히 자신의 군공으로만 태수, 열후에 올랐으니 있을 수 없는 대출세를 한 것이다. 한실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리고 손견의 커리어를 봐도 수적 죽여버리기, 허소의 난 토벌하기, 황건란 토벌하기, 변장 한수의 난 종군하기, 구성의 난을 토벌하고 주준, 곽석까지 다 토벌해버리기, 반동탁토벌 활동하기 등 10대 후반부터 30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한나라의 무장으로서 활발하게 싸웠으며 꽤 일관성이 있다. 손견의 주요 커리어는 역적, 도적 조지기로 일관되어 있으며 일관적으로 굉장히 강한 동기부여와 충성심을 보여줬다. 수만의 무리라는 허소의 난에서는 의병으로 천 명을 모으고 거침없이 진군한다던가, 황건란 당시에도 다시 한 번 1000명을 모병했다. 승세를 타고 지나치게 들어가다가 역습을 당해 창에 찔리고 말에서 떨어졌다가 구출되고 십수일 만에 다시 출전한다던가, 직접 성벽을 먼저 오른다던가 하는 등 이 시기에 손견만큼 한나라를 위해 평생 몸바쳐 싸운 무장이 별로 없다.[50] 평생을 걸친 전투와 행적도 확실히 장렬하고 강한 동기부여가[51] 보일 뿐만 아니라 나는 충성한다 군무를 건방지게 어지럽히는 동탁을 죽여서 기강을 세워라 등 언사도 나름대로 충실하다. 몇 가지 혐의점이 있긴 하나[52] 이런 무장의 충성심을 굳이 의심하는 것도 이상해 보인다. 기존 학자들의 평이나 각색도 손견의 이런 일관성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손견 역시 딴마음을 속에 품고 있었거나 자라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손견 충의 논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손견이 너무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난세가 개막되고 나서 1~2년 사이에 죽어버렸으며 딱히 속마음을 드러내거나 행동으로 보여줬다고 할 만한 것도 없기 때문에 추측의 영역이 크다.[53] 손견의 충의를 기존의 학자들처럼 낭만적으로만 보기 힘들다는 견해도 충분히 일리는 있고 강하게 주장한다면 딱 잘라 부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확정적으로 그렇게 말하기에는 꽤 많이 부족하다.

5. 기타

6. 가족 관계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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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견은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오서》에서는 손견이 192년 사망한 것으로 (즉, 156년생으로) 나오나,《한기》 및 《오력》에서 손견은 191년 사망하였다는 기록과 《오록》에서 손책이 17세에 부친을 여의었다는 기록을 종합하여 배송지는 주석으로 손견이 191년 사망한 것이(즉, 155년생이) 맞을 것이라 하였다. [2] 오군 곡야현. [3] 연의에선 손견 본인이 주체적으로 형주의 유표를 공격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상에선 원술의 명령을 받고 출전했다 전사한다. [4] 《오서》(吳書)에 이르길 「손견의 집안은 대대로 오군에서 벼슬살이를 했는데, 그 집은 부춘에 있었고, 조상들은 성 동쪽에 장사지냈다. 무덤 위에 여러 번 괴이한 빛이 있었는데, 운기(雲氣)가 오색 빛을 띠고 위로는 하늘에까지 이어져 수(數) 리에 만연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길가다 이를 보았다.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얘기하길 “이것은 비범치 않은 기운이니, 손씨가 흥하게 될 것이다!” 라 했다. 그 어미가 손견을 배었을 때, 꿈에서 창자가 나와서 오의 창문을 둘러싸는 것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는 두려워서 이를 이웃 어멈에게 알렸다. 이웃 어멈이 말하길 “어찌 길조가 아니겠습니까?” 라 했다. 손견이 태어나니, 용모는 범상치 않았고 성품은 활달하며, 빼어난 절개(奇節)를 좋아했다」고 한다.- 정사 《오서》 <손견전> 주석. [5] 손견의 가문이 경제력을 갖춘 신흥 가문이었다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는 데는 상당한 자본금이 필요한 데다가 인맥 역시 중요하다. 비록 손견이 공직에 있었다곤 하나, 말단이었고 수완이 좋았다고 한들 고작 17세의 소년에 불과했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1천의 병력을 모은 주체가 손견으로 된 것은 최소한 그의 가문이 군대 편성의 자금 문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부를 축적해왔고 다른 호족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만한 가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냐는 것. [6] 현령의 보좌관 [7] 즉 그 때 장온이 내 건의를 받아들여 동탁을 죽여버렸으면. [8]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 논변으로 불학무식자, 양아치가 자주 쓰곤 한다. 간혹 배운 사람도 쓰지만 그 경우 너랑 나는 급이 안 맞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다물고나 있으라는 상당히 거만한 스타일의 논변이다. 손견이 후자의 경우, 크게 배웠을 경우일 리가 없으니 말이다. [9] 왕예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형주자사 자리에 들어선 이가 바로 유표였고, 손견은 결국 유표 휘하의 황조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결과적으론 자업자득(?)이 된 셈이다. [10] 이 때 장자에게 보급을 요구했는데 주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 말은 손견이 지나가면서 다른 곳에도 보급을 요구했다는 얘기 같다. 그리고 장자는 다른 관리들과는 달리 보급을 주지 않고 뻗대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1] 남양군 노양현. 현재의 핑딩산시. 장자가 죽은 곳은 아마도 치소가 있을 완현, 현재의 남양시로 추정. [12] 헌제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왕예를 죽이고 원술에게 중랑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하지만 최소한 손견이 처음부터 원술의 사주를 받아 왕예를 죽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원술이 활동하던 곳이 예주 일대다. 당시 무릉에 형주자사 치소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 왕예가 무릉에서 죽었을 것이다. 손견이 무릉을 지나기 전에 원술이 그 소식을 듣고 예주에서 무릉까지 지시를 내려서 무릉을 지나면서 손견이 왕예를 죽인다는 것은 정말로 처음부터 손견이 원술 휘하가 아니면 무리가 있어 보인다. 중랑장 벼슬도 태수와 같은 2000석이니 이미 오정후에 무릉태수인 손견에게는 중앙직이라는 것 말고는 애매할 뿐이다. 중랑장 벼슬을 줬다는 헌제춘추의 기록을 믿는다 해도 그냥 무릉에서 남양까지 가는 길에 친교 혹은 동맹을 맺고 싶다는 인사차 원술이 준 벼슬이고 손견이 받으면서 우호적인 사인을 보냈다, 이후 노양에서 둘이 만나서 회담을 하고 본격적인 동맹을 맺었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얼굴도 한 번 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손견이 자기와 군대 그리고 낙양수복의 명운을 맡기면서 휘하로 들어가고, 곧바로 지시를 받아 장자까지 죽였다 이것은 힘들어 보인다. [13] 왕예를 죽였을 때도 죽이기 전에 야 너 창고 까봐 - ㅋ 없엉 일부러 안 준 거 아님 너도 창고 봐라 그냥 없지? 같은 과정이 있었다. 아마 다른 곳에서도 보급자유권을 발급하기 위해서 지나가는 길에 있는 다른 관리들에게 보여주기식 + 무릉태수 조인의 계략 + 평소에 재수없어했던 점 모두가 합쳐져서 왕예를 죽였던 듯하다. [14] 역시 100% 추측의 영역이지만 아마 장사에서 낙양까지 먼 길을 가는 과정에서 보급이나 후방안정을 위해 하나 죽이긴 해야 된다고 보고 그 김에 평소에 싫어하던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닐까 싶다. [15] 그냥 지들끼리의 이해관계에 따른 동맹이거나 명분용이 많았지 같은 반동탁 제후를 죽였다고 싸우고 이런 건 사실 없었잖은가. [16] 남쪽 장사에서 출발한 손견에게 누가 딱히 제재를 가할 수 있을지도 불명확하다. 그리고 제후 연합군이라 의사 결정이 빠를 수가 없고 의사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는 특성,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의 흐름상 그런 제재를 결정할 만한 여지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손견도 홈런 한 방 쳐서 끝낼 생각밖에 없어 보인다. 또 남양이면 낙양이 있는 하남의 바로 밑인데 동탁을 정말 코앞에 두고 반동탁연합군끼리 서로 싸우거나 제재하는 것은 좀 많이 이상하다. [17] 물론 손견 역시 같은 반동탁연합군인 왕예를 죽이긴 하였으나 수천리나 떨어진 남형주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손견과 원술에 대한 원소의 겐세이로 반동탁연합군이 흐지부지되긴 하였으나, 그것도 동탁의 장안 천도로 인해 장기전으로 흘러가고 원소도 한복과 동탁의 겐세이를 받고 어쩌고 하면서 그렇게 흘러간 것이지 낙양에서 동탁군이 기세등등하게 반동탁연합군을 때려부수던 시점에서 손견을 토벌하자 어쩌고저쩌고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18] 이 시기 원술이 남양 동쪽 예주 서부 일대를 장악한 것이 사실이라면, 낙양 탈환이라는 목적하에 같은 반동탁 세력인 원술과 협력하면 이득이고 불화할 이유가 없다. 토벌 이후의 정치까지 생각한다면 여러 복잡한 계산의 여지는 있었겠지만 단순하게 본다면 그렇다. [19] 용맹한 손견이 무능한 원술과 왜 연합 혹은 뜬금없이 밑으로 들어갔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떠오른 것이 손견이 왕예, 장자를 살해하며 정치적 궁지에 몰렸기에 원술에게 투신했다는 해석인 듯 보인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낙양 수복이 손견의 목적이라고 친다면 현실적으로 볼 때 장사에서 낙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남양 일대에서 손견군에게로의 보급과 배후를 지켜줄 세력은 그게 누가 됐건 필요하며 이 시점에서 원술보다 적임자라고 볼 만한 사람도 없는 듯이 보인다. [20] 그리고 반동탁연합의 사실상 맹주격이었던 원소부터가 황제의 칙사로 왔던 호모반 등을 죽이고 조리돌림한 마당에 남양태수, 형주자사를 죽였다고 손견만 고립되거나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다. [21]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동탁은 아직 낙양에 거주하고 있던 원씨들을 역적죄로 참수하였다. [22] 손견과 원술의 이 시점에서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얘기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탁토벌을 향한 불타는 의지 정도다. 하긴 수천리를 와서 그냥 돌아가기도 그랬겠지만 이 시점에서조차 손견은 사기나 의지가 꺾이지 않고 태업성도 없이 바로 몸소 말을 달려올 정도면 의지력이 매우 충만하다. 그리고 이걸 아랫사람이자 부하인 손견이 원술에게 애걸했다, 군량을 쥐고 있는 게 윗사람이다, 봐라 어떻게 손견이 원술의 부하가 아니겠느냐 하면 당시 군량을 끊으며 비슷한 일을 하던 한복도 원소를 부하로 부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손견 입장에서는 기껏 남양을 줬는데 여기서 또 원술과 싸우면 임지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본거지에 가까운 원술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고, 동탁 토벌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원술과의 다툼은 굉장히 무익한 전력 낭비이자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정말 회피하고 싶은 상황일 수밖에 없다. [23]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손견의 아내 오부인을 볼모로 잡고 협박해서 얻었다고 한다. 훗날 원술은 그 옥새를 이용하여 자신이 황제임을 온 천하에 알려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24] 아마 노양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니 노양까지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25] 남양을 원술이 장악해서 수탈했으므로 이는 손견의 죄라고 하기에는 어차피 손견부터가 군비 조달을 위해 남양태수 장자를 죽인 것으로 보인다. 장자를 죽인 이후 가지고 싶을 것을 마음껏 가져갔다고 하니, 그냥 낙양 탈환을 위해 남양을 뜯어먹겠다고 하는 손견의 목적이 명확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26] 이 때 손견이 먼저 번성을 친 후에 한수를 건너 양양을 공략하는걸로 묘사되는데 이 때문에 손견이 반동탁 연합 전쟁 이후 장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완전 모순된다. 장사는 양양 남부에 있기에 양양 북부에 있는 번성부터 먼저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연의에서 손견의 유표 공격 동기를 각색한 나머지 생긴 설정 오류이다. 정사에는 손견이 장사로 가지도 않았고 줄곧 원술과 함께 활동하며, 원술과는 대립하지 않는 충실한 동맹 관계였다. [27] 본래 정사에서는 황조가 생포되지 않았고, 손견의 시신을 찾아온 것은 환계다. [28] 제후를 도살했다, 불법침공했다, 같은 동맹제후의 뒤통수를 쳤다 등으로 손견을 굉장히 흉악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이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는데 삼국지 시절 유우 정도를 제외하면 이런 걸 하지 않은 군웅이 없기 때문에 특별히 삭제했다고 하기도 좋게 각색했다고 하기는 그렇다. [29] 다만 이 손견이 칭제의 뜻을 품고 독립해서 할거하다 유표와 싸우는 묘사 때문에 손견의 정치력이나 행정력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시선이 많은 듯도 싶다. 손견이 죽자마자 손견군이 원술에게 흡수되었는데 이것을 보면 손견의 통솔력이 매우 약하며 항상 흩어졌어도 군사가 다시 모이는 유비와 비교하면 매우 약하다는 등이 있다. 하지만 손견의 행적을 보면 할거의지가 과연 있거나 강했다고 확정짓는 것은 어려워 보이고, 장사에서 모아온 오리지널 손견군이라기보다는 그 이후 반동탁의 기치를 걸고 여기저기서 모집한 군사였고 이미 임지인 장사에서 멀어진지도 1~2년이기 때문에 그 무리가 청소년인 손책 대신 같은 진영에서 같은 기치를 올리던 원술에게 넘어가는 것 등등으로 손견의 정치력을 탓하기는 이상해 보인다. [30] 동탁군은 역적이고, 왕예와 장자 등은 그 역적토벌을 하러 가는 길에 일으킨 일종의 부수적 피해, 주씨 형제와 유표는 원소와 편 먹고 역적토벌을 방해하는 비슷한 놈들로 생각했다면 뭐 군인이 그렇게까지 정치를 생각할 이유가 있겠는가? [31] 명분, 도덕에서의 실책이다. [32] 평소부터 손견은 성급한 성격으로 정치, 군사 양쪽으로 간혹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죽음까지 자초한 손견의 이러한 단점을 충렬지사 캐릭터로 미화하여 '순수한 용사라서 손해를 감수하며 싸운 것' 처럼 손견의 영웅성을 중심으로 해설하는 사례가 널리 알려졌다. 단 이런 해설방식은 세계공통이지 굳이 유학적이라고 볼 여지는 없다. [33] 경쟁관계인 것처럼 묘사한 것은 학자들의 견해라기보다는 소설인 연의의 묘사다. [34] 한실 수복에 대한 손견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손견은 상당히 여러 번 격한 어조로 한실 재건의 의지를 표명했고, 제후 중 적극적으로 나가 싸운 것은 포신과 손견뿐이었고 잡군까지 치면 조조와 그에 딸린 유비 정도가 있다. 왕예와 장자를 죽인 것이 의심스럽고 문제되는 행동인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그 이후 손견의 행동은 적극적인 전투, 전투였다. 조무에 빨간 두건 뒤집어 씌우고 튀기를 시전할 정도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는 손견이었지만 그런 위기를 겪고도 계속 불같이 싸웠다. [35] 싸움 실력 [36] 애초에 이 두 사람이 힘세고 무예가 뛰어나다는 묘사는 있어도 천하 제일이라는 식으로 묘사된 정사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37] 장수들끼리 붙는 경우도 최전선에서 지휘하다가 마주쳐서 죽이려할경우 별 수 없이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전투 중인 병력과 함께하면서 사기를 북돋는 것 또한 당대 지휘관들이 가져야 할 미덕이었다. [38] 하다못해 손견의 아들도 소패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말이다. [39] 동서를 막론하고 공성전에서 성벽에 가장 먼저 오르는 것은 최정예 병력이며, 그들을 마주하는 수성 측도 최정예를 먼저 앞세운다. 성벽을 올랐다는 것부터가 요즘으로 따지면 특수부대고, 거기서 최선두였다면 특수부대 중에서도 최정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최선두에서 성벽을 오르고 그게 성공했다는 건 1:1 대결 같은 무예는 몰라도 한 명의 병사로서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고 담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능력 또한 비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벽을 오른 이후에도 주변의 적병들에게 협공당해 죽지 않고 아군이 올라올 때까지 적의 공격에 지지 않고 공간을 확보했다는 것인데, 기록은 없지만 사실상 복수의 정예병을 사살하며 버텼을 것이니 무예도 보통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40] 화웅을 죽이긴 했으나 아마 손견군이 죽였던 것이지 손견이 직접 죽이진 않았을 것이다. 연의와 달리 화웅이 그렇게 유명한 장수도 아니다. 다만 중요한 싸움에서 동탁이 내세웠으니 약하진 않을 듯하다. [41] 사실 유명한 혈통을 자기 가문에 갖다 붙이는 행위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자주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유비는 혈통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헌제가 직접 인증한 진짜인데도 현대인에게는 종종 가짜로 의심받았는데 정작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손견의 혈통은 진짜로 믿어졌다. [42] 자신보다 약하면서 잘못이 없는 남양태수를 죽인 이것을 미묘하다고 평할 수는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남양태수를 죽여서 보급을 충당한다는 목적은 아주 쉽게 달성되었다. 교활하고 잔인한 것은 맞으나 미묘하다고 보기는 좀 그렇다. [43] 정치적인 실속으로 평가하자면 한실 수복의 의지를 불태우다 실패했다고 치면 아쉬운 전사, 할거나 생존의 목적에서 보자면 손견의 정치적인 실속은 최악이다. 왕예, 장자를 죽이면서 사실상 형주를 손권이 제패하다시피 했는데 원술에게 들어서 바쳤으니 말이다. [44] 연의와 일부 사서에선, 변명을 써서 손견은 순수한 사람처럼 포장해놓고 있다. 하지만, 정사의 손견은 원술의 명령을 거절하긴 커녕 좋다고 따르며, 평소에 관계가 나빴던 자사 뒤통수를 치는 도살자의 모습을 보인다. [45] 장자의 경우 보급을 거절하다 죽었으므로 같은 반동탁 연합군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46] 사실 남양이 하남의 바로 밑이라고 생각해 보면 손견이 패배할 경우 동탁의 잔혹한 복수가 바로 자기자신에게로 향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협력을 한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긴 했다. 따라서 굉장히 쉽지만은 않은 선택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쨌던 간에 위기감이 너무 없었다. 선택하기 어려웠으면 정말 빠르게 도망을 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47] 한 번 원술도 보급을 끊기는 하지만... [48] 십상시 살해 당시의 난장판이나 반동탁 운동, 원소의 유우 추대 반대 등이 이 때까지 원술의 주요 활동인데 관점에 따라서는 충분히 충신이다. [49] 아들들에게 자사와 태수를 주겠다는 엄청난 제의였는데 동탁의 삼족을 멸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 못감는다고 거절했다. 이 정도로 한실수복의 의지를 불태운 제후는 사실 손견 말고는 없다. [50] 지휘관 봉직기간이 더 긴 인물은 있겠지만 20여년 동안 지휘도 하고 직접 앞장서서 창칼을 휘두르며 싸우기도 한 무장은 손견 말고 없다. [51] 보신적인 기회주의자라면 수만 무리라는 허소의 대군 앞에서 굳이 1000명의 의병을 모으고 앞장서서 전투하고 다닐 일인가? [52] 왕예, 장자 살해. 원술과의 공조관계. [53] 원술과 한통속이었다는 얘기도 얼핏 생각하면 원술과 한통속 = 역적인데 손견의 경우 원술이 구석에 몰려 막나가기는커녕 잘 나가던 시절에 손견이 너무 일찍 죽어버렸고 둘 사이의 종속관계나 인연도 사실 잠깐에 불과하기 때문에 애매한 것이다. 어쨌든 입으로는 한나라 충성충성충성만 외치던 게 손견이고. [54] 왕예 살해는 거의 99% 손견의 독단이고 장자 살해의 경우 원술과 뜻을 함께한 살해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차라리 확실한 건 원술과의 교감이 없어도 정황상 그냥 죽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55] 손견이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명문가에게 약하기 때문이라는 해석까지 있었을 정도. [56] 병음인 Sūn Jiān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쑨젠이라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