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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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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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기(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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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華表(204 ~ 275)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위용(偉容)으로 화흠의 맏아들, 화집(華緝)의 조카, 화박(華博), 화병(華炳),[1] 화주(華周)의 형, 화이(華廙), 화잠(華岑), 화교(華嶠), 화감(華鑒), 화담(華澹),[2] 화간(華簡)의 아버지.
2. 행적
청주 평원군 고당현 사람으로 223년에 산기황문랑이 되었다가 시중으로 옮겼으며, 254년에 석포가 조모를 조조님의 화신이라고 칭송하자 화표는 이 발언이 화를 초래할 것을 우려해 두려워하면서 병이 낫다고 해 집으로 돌아갔다.이로 인해 260년에 조모가 사마씨를 몰아내려다가 실패했을 때 연좌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상서에 올랐다가 5등작이 생기자 관양백이 되었으며, 친족에 대한 상에 대해 방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에 연좌되어 면직되었다가 태시 연간에 태자소부, 광록훈 등을 역임하다가 태상경이 되었고 몇년 후에는 노환으로 은퇴를 청했다.
여러 물품과 2만 전을 하사받았고 275년 8월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시호는 강(康)으로 조복을 하사받았다.